[실용기타]정원에 물주며 내마음도 주었다…‘정원통신’

  • 입력 2006년 4월 1일 03시 00분


코멘트
◇정원통신/프랜 소린 지음·이순주 옮김/240쪽·1만 원·뜨인돌

“땅에는 천국이 가득하고 나무는 신과 함께 불타오른다….”(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

땅을 파고, 화초를 심고, 잡초를 뽑는 것은 우리 자신의 뿌리에 이르는 원초적인 경험이다. 거기에는 영혼의 카타르시스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땅은 매우 현명하고도 관대한 매개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영감과 열망을 불어넣는다. 소리 없는 멘터링이다.

원예는 상상하는 것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마음속에 그려 보는 것이다. 지도에 나오지 않는 비밀스러운 길을 걸어 보는 것이다. 한 움큼의 흙은 우리의 창조적인 기억에 불을 붙이고 자유와 가능성에의 느낌으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정원을 가꾸면서 자신 안에 있는 갈망과 더욱 친밀해진다. 원예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는 미묘하면서도 소중한 과정이다. ‘내면의 달빛’을 따라가게 된다.

흙을 간질이면 땅은 꽃을 통해 웃는다던가. 원예는 순수한 기쁨이다. 자연스러운 놀이다. 심오한 장난질이다. “빈둥거리고 놀면서 영혼을 초대하는 것이다.”(월트 휘트먼)

놀이는 하찮은 게 아니라 그 반대다. 우리가 되려고 애쓰는 존재를 기꺼이 포기할 때, 놀이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존재를 한껏 표현한다. 현재의 순간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예술이 나타나려면 우리 자신을 길에서 치워야 한다.”(랠프 월도 에머슨)

미국의 저명한 원예 전문가이자 정원 디자이너인 저자. 그는 “정원의 울타리를 뛰어넘으면 모든 자연이 정원”이라고 일러 주며 원예의 기쁨, 그 생생한 체험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원예를 도구와 비유로 삼아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지혜를 들려준다.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 세상에 인내심을 기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재촉해도 화초는 때가 돼야 자라고 꽃을 피운다. 원예를 하게 되면 기다리고, 경청하고, 순종하게 된다.

“우리의 품성을 형성하는 것은 인생에서 은밀하게 일어나는 숙성의 조용한 과정이다!”

모든 좋은 관계가 다 그렇듯이 원예에 있어서도 시작은 매력적이다. 화초를 심는 것, 그것은 사랑에 빠져 들듯 새롭고 들뜬 단계다. 그러나 연애의 궁극적인 성공 여부는 불꽃이 꺼지고 관계가 일상 속에 녹아들었을 때 가려진다. 깊이와 힘을 느낄 수 있는 진정한 관계는 매일 화초를 돌보는 데 있다. 창조의 화염(火焰)은 흐릿하지만 꾸준한 불꽃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정원은 아기와도 같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외로운 여우다. “그대는 여우를 길들인다. 그대는 정원에 물을 주면서 그대의 마음도 주었다. 자연의 이 작은 부분과 영원한 관계를 맺은 것이다.”

생명이 있는 곳엔 그 어디든지 아름다움의 비애가 있다. 아끼던 화초가 죽어 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하는 순간이 있고, 이렇다 할 이유 없이 시들어 가는 나무 때문에 낙담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정원에 첫서리가 내린다.

원예의 계절이 끝나면 서글픈 느낌이 찾아든다. “매년 때가 되면 서리가 내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때마다 상실감을 어쩌지 못한다. 가을이 깊어 가고 점점 해가 짧아지면서 기온이 내려가면 정원에는 고독이 밀려온다. 익숙한 고독이다….”

정원보다 더 심오하게 탄생과 죽음, 시작과 끝, 그 소멸의 주기를 보여 주는 게 있을까? 집을 떠나가는 자녀들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줄 때처럼 이 인생의 중요한 고비에선 왠지 뿌듯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미묘한 감정이 밀려든다.

하지만 신은 우리에게 12월에도 장미를 볼 수 있는 기억을 주었다!

원예를 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성장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들은 ‘땅의 심부름꾼’으로서 정원을 잠재우고 있을 때도 봄이 되면 새 생명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계절의 기적을 믿는다. 한겨울에도 땅속에서 아늑하게 동면하고 있을 구근들을 생각한다. 차가운 공기의 고요함에 잠겨 나비의 꿈을 꾼다.

그리고 가만히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를 읊조리는 것이다.

“날아가는 환희에 키스하는 자는 영원의 시초에 산다….”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