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향기속으로 20선]<1>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 입력 2006년 3월 20일 03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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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두 그루의 등나무가 탐스러운 꽃을 터뜨려 그윽한 향기를 풍기며 팽나무를 힘껏 껴안듯이 감고 올라갔다. 사랑이 식은 사람들도 이곳에 오면 다시 가까워진다고 한다. ―본문 중에서》

여름비가 막 지나가고 난 뒤에 나는 그녀의 집 담장 밖에 있었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상큼했다. 무엇인가 새로운 생명들이 막 살아서 꼬물대며 자라는 게 보일 것 같은 명징한 오후였다. 그러나 그녀는 밖으로 나오지 않고 나만 허송세월이었다. 물리적인 시간은 짧은 것이로되 그녀를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은 젊은 사랑의 시절에 느껴지는 시간은 억겁과 같은 것, 아직 물기를 머금은 풀잎들의 잎만이 속절없이 고울 뿐이었다.

바로 그때 언제 그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꽃 한 무더기가 꽃분수를 이루며 솟아오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른 받침목을 타고 올라간 그 꽃은 사방을 향해 의연한 자태를 선보이고 있었다. 주황색의 콧대 높은 꽃, 마치 내가 기다리는 여인과 같았다. 나는 그 꽃이 무엇으로 불리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망막이 가득하고 아득할 뿐. 늠연하면서도 광휘로운 그 꽃들에 비하면 나는 하찮은 지푸라기였다.

그러고 한참의 세월이 지났다. 그 여인의 아름다움도 ‘보는 눈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두 사라졌고 그 풍경도 사라졌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 꽃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질문.

그렇지만 내가 그 꽃의 이름을 모른다고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 꽃도 나에게 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어서 나는 그냥 살았다. 그런데 시인이 되고 난 뒤 이상한 책을 하나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꽃 백 가지’란 책. 1990년의 일이다.

그 책을 보았을 때 우선 첫 소감은 야릇했다. 책의 부제인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이라는 말이 주는 약간의 고약스러움 때문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의당 알아야 할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으면서도 뻔뻔하게 그냥 살고 있는 모습에 대한 질타가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즐거운 불쾌감이었다.

이 책은 우리 산하의 사계에 피어나고 사라지는 꽃들을 계절에 따라 화보로 보여 주고 그 꽃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100여 종의 꽃의 정식 이름과 속명을 소개하는가 하면 그 꽃에 얽힌 설화나 사연들도 있었고 그 꽃들의 쓰임새도 적혀 있었다. 덕분에 나의 의식 저편에 숨어 있었던 꽃의 이름도 부를 수 있었다. ‘능소화’라고.

순간 청춘의 시절 이후 내 마음에 광휘로운 광경으로 남아 있던 풍경에 빚을 갚을 수 있었다. 마음의 저편에 그냥 복합적인 풍경으로 혼몽스럽게 존재하던 풍경은 마침내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이름’이 될 수 있었다.

강형철 시인·숭의여대 교수


▼ 자연의 향기 속으로 20선
도서 (저자)도서 (저자)도서 (저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꽃 100가지 (김태정)숲-보기,읽기,담기 (전영우)꽃-윤후명의 식물이야기 (윤후명)
궁궐의 우리나무 (박상진)산책의 숲,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순우)곤충의 사생활 엿보기(김정환)
초록 덮개(마이클 조던)딱새에게 집을 빼앗긴 자의 행복론 (최병성)나무를 안아보았나요 (조안 말루프)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이유미)사계절 꽃산행(현진오) 자전거 여행 (김훈)
세밀화로 그린 나무도감 (도토리) 춤추는 물고기(김익수) 숲에서 길을 묻다 (유영초)
숲에 사는 즐거움(베른트 하인리히)나는 걷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신갈나무 투쟁기 (차윤정·전승훈)
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잡초는 없다 (윤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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