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출간… ‘편향된 역사접근’ 바로잡기

  • 입력 2006년 2월 9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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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 특히 현 집권세력과 이른바 386세대의 현대사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친 ‘해방전후사의 인식’(약칭 해전사)으로 상징되는 ‘좌파적 역사인식’의 편향성을 극복하고 현대사 해석의 균형추를 바로잡겠다는 취지의 책이 우여곡절 끝에 8일 출간됐다.

‘해전사’식 역사인식의 좌편향성과 이분법적 접근을 비판하며 한국현대사 이해의 중층성과 복합성, 역동성을 강조하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약칭 재인식·책세상)이다.

서울대 박지향(朴枝香·서양사학), 이영훈(李榮薰·경제사), 연세대 김철(金哲·국문학), 성균관대 김일영(金一榮·정치외교학) 교수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재인식’은 ‘해전사’가 민족지상주의와 민중혁명 필연론에 사로잡혀 있다는 문제의식 아래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국내외 논문 28편과 편집위원의 대담을 정리했다.

박지향 교수는 서문에서 “‘해전사’를 읽고 피가 거꾸로 흘렀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노 대통령이 2004년 8월 25일 독립유공자 초청 오찬에서 ‘반민특위의 역사를 읽는 많은 젊은 사람이 가슴 속에 불이 나고 피가 거꾸로 도는 경험을 다 한 번씩 한다’고 발언한 것을 지칭한 것으로 보임)을 보도를 통해 접하고,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을 이대로 두고 본다는 것은 역사학자의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재인식’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왜곡된 역사인식을 조금이라도 교정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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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식’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삶과 광복 후 친일 청산 문제를 다룬 1권(15편의 논문·780쪽), 광복 이후 분단과 6·25전쟁의 책임 및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가를 다룬 2권(13편의 논문과 편집위원 대담·696쪽)으로 이뤄져 있다.

필자 중에는 ‘해전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수정주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명예교수의 부인인 우정은 미시간대 정치학과 교수, ‘해전사’의 필자였던 이완범(李完範·정치학)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와 신형기(辛炯基·국문학) 연세대 교수도 있다.

‘재인식’은 그 책의 내용 못지않게 기획과 출간과정에서 우리 지식인 사회가 이념과 비지성적인 편견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함을 확인시켜줬다.

이 책의 편집위원들은 처음부터 “‘해전사’의 역사인식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정치색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는 글들만 엄선한다”는 원칙을 앞세웠다.

그러나 필자 섭외 과정에서 많은 학자들이 기고를 회피했다.

박지향 교수는 “준비 과정에서 외국에서 발표된 훌륭한 연구물을 실으려 했는데 거절당한 경우가 있었다. 연구자가 국내 반응과 분위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며 “사실을 사실대로 탐구하는 연구조차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라고 대담에서 밝혔다.

최근엔 한 언론이 ‘역사 연구가 특정 이념이나 정책적 목표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선 안 된다’는 재인식 출간 취지를 무시한 채 ‘뉴라이트판 해전사’라고 보도해 필자들이 크게 반발하고 책이 인쇄돼 나올 때까지 언론과의 접촉을 거부하기도 했다.

현대사에 관한 한 좌파적 역사관이 득세하며 성역처럼 군림하고 있는 지식인 사회의 굴절된 단면은 책 출판 과정에서도 엿보인다. 이 책은 2004년 11월 본보가 그 출간 기획 소식을 처음 보도한 뒤 학계와 출판계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당초 책을 내기로 했던 출판사로부터 두 번이나 보이콧을 당했다.

지난해 초 출판의사를 밝혔던 한 출판사는 기획과정에서 “정치색이 너무 뚜렷해지는 바람에 진보적 시각을 유지해온 우리 출판사의 기조와 맞지 않는다”며 출판을 거부했다. 또 다른 출판사는 출판계약까지 해놓고는 책이 발행되기 보름 전에 돌연 이를 덮어버렸다. 일부 편집위원들의 반대로 책 출간을 포기한 또 다른 한 대형 출판사 관계자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일부 위원들이 역사해석에 동의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고 전했다. 출판계에서는 이들 출판사가 민족주의와 통일지상주의 성향이 강한 역사학 필진을 의식해 이를 거부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이완범 교수“재인식 출간 정치적악용 말아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재인식)을 꼭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에 대한 공격과 비판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해전사’가 열어젖힌 지성사적 사건의 연장선에서 한 차원 높은 학문적 논의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해전사’와 ‘재인식’에 모두 필자로 참여한 이완범(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두 책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 교수는 ‘해전사’에 3편의 글을 기고해 임헌영(任軒永·국문학) 중앙대 교수와 함께 가장 많은 글을 기고한 학자다. 그는 ‘해전사’의 마지막 책인 6권 기획에도 참여했다.

“저는 ‘해전사’가 처음 출간된 1979년에 대학에 들어갔으니 영락없는 ‘해전사’ 세대라고 해야겠지요. ‘해전사’를 대학 1학년 시절 처음 읽었을 때 감동은 아직도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수는 “그동안 흐른 세월을 감안한다면 ‘해전사’는 이제 박물관에나 가야 할 책이 되지 않았느냐”며 ‘재인식’의 출간을 비판이 아니라 창조적 극복으로 바라봤다.

이 교수는 “‘재인식’의 출간이 너무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이를 이용하려는 것이 오히려 문제”라면서 “이 책의 출간을 좌우를 아우를 수 있는 균형 잡힌 역사 인식을 잡아 가려는 노력으로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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