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홍인근]이봉창의사 훈장등급 격상시켜야

  • 입력 2005년 10월 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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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은 이봉창(李奉昌) 의사가 순국하신 지 73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의사는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 경시청 앞에서 히로히토(裕仁) 당시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지는 의거를 결행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수류탄의 위력이 약해 거사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천황을 살해하려 한 대역죄인’으로서 일본 최고재판소인 대심원의 단심(單審) 공판만으로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해 10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했다.

이 의사의 의거는 일왕의 목숨을 직접 겨냥한 최초의 의거라는 점에서 내외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국내에서는 즉각 내각이 총 사퇴서를 일왕에게 제출하였고(내각이 출범한 지 1개월도 안 되었다는 이유 등으로 반려됐음) 대대적인 문책인사가 단행되었다.

이 의사의 의거는 그로부터 3개월 후에 거사된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의거와 함께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무관심하던 중국 국민에게 임시정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했으며,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부의 재정 및 외교적 지원을 끌어내 광복군을 창설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이 의사에 대한 평가는 그 의거의 역사성이나 영향력에 비해 안중근(安重根)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그것보다 낮은 것 같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조선 식민지화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응징했고,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 생일(天長節) 축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의사의 의거는 비록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 대상이 일본 총리와 조선통감을 지낸 이토나 시라카와 대장과 비교하기 힘든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 일왕이었고, 장소는 하얼빈 역의 플랫폼이나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본의 수도 도쿄, 그것도 도쿄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경시청의 현관 앞이었다는 점만으로도 더욱 값지고 의의 있는 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1962년 3월 1일 이들 세 의사에게 수여한 훈장의 훈격에서 안 의사와 윤 의사에게는 최고 건국공로훈장인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반면 이 의사에게는 그보다 한 등급 낮은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윤 의사의 의거는 이 의사의 의거가 앞서 결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또 성공할 수 있었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따르면 윤 의사는 이 의사의 의거가 있은 뒤 어느 날 김구 선생을 찾아가 “선생님이 동경 사건과 같은 경륜을 지니고 계실 것으로 믿사오니 부디 지도하여 주시면 은혜 백골난망이겠습니다”라며 ‘제2의 이봉창’이 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또 이 의사가 던진 수류탄이 위력이 작아 거사가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은 윤 의사가 충분히 위력 있는 폭탄을 준비하는 데 결정적 작용을 했고 따라서 윤 의사의 의거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구 선생은 이를 두고 ‘이봉창 의사의 은혜’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필자는 정부 당국에 청원한다. 이 의사의 훈격을 재심의하여 윤 의사와 같은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으로 높여 추서할 것을 청원한다.

홍인근 국제한국연구원 연구위원·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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