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일교수, 문학인 實名거론 ‘쓴소리’

  • 입력 2005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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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교수
조동일 교수
《'시인 김수영(金洙暎)은 소심한 모더니스트였다. 창비의 백낙청(白樂晴)은 처신을 중요시했는지 김지하(金芝河)의 시를 게재하지 않았다. 김지하는 도사인 척 하지 말고 시인으로 거듭나라.'

조동일(趙東一·66·국문학) 계명대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가 13일 강원 인제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열릴 문인협회 주최 '광복 60년 맞이 한국문학인대회 기념 심포지움'에서 '1960년대 문학활동을 돌아보며'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문단에 쓴 소리를 할 예정이다. 1960년대초 학생운동으로 투옥된 경력이 있는 조 교수는 '인문학의 위기'를 주장하며 학교 보직은 물론 학회 임원까지 사양하면서 평생 '연구'에만 매달린 학자. 그런 조 교수가 한국 문학계를 대표했던, 지금도 '신화'처럼 여겨지는 주요 인사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비위가 거슬릴 수도' 있는 과거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것이어서 화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강연 원고를 요약 소개한다.》

◇김수영에 대해=4ㆍ19가 일어나자 기성 문인들도 생각이 달라졌다. 혁명의 희생과 정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참여문학을 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몇몇 시인이 그 선두에 서서 전에 볼 수 없던 시를 발표했다.

박두진이 <우리는 우리들의 깃발을 내릴 것이 아니다>라는 시를 썼다. 선혈로 물든 깃발을 내리지 말고 혁명을 계속하자고 했다. 기존 문단에 큰 충격을 주고, 젊은 시인들이 분발하게 했다.

김수영은 서구 추종의 모더니스트이고 또한 지식인의 자폐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가 시대가 달라지는 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참여문학의 대열에 들어서서 현실을 노래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직 많이 모자라 기대와 실망을 아울러 안겨주었다. 그 어느 면에서든지 많은 관심을 모아 그 시기 시단의 중심에 섰다.

김수영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점을 자주 지적하다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당에서 공개토론을 한 적 있다. 지식인이 자기반성을 한다고 하면서 대안은 찾지 못한다고 나무랐다. 자기 혼자 외톨이가 되어 번민하고 있을 따름이고 민중과 함께 나아가지 못하고 민족의 현실을 크게 보지 못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 김수영은 변명다운 변명을 하지 못하고, 위험한 사고방식이라는 우려를 나타내기나 했다. 공개토론을 한 내용을 <<주간한국>> 한 면에서 다룬 것으로 기억하는데, 보관하지 못하고 있으며, 몇 호인지 기억할 수도 없다.

김수영의 소심함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전쟁을 모질게 겪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겨우 연명하는 처지였다. 글을 부지런히 써도 생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업을 하려고 하다가 실패했다. 직업을 갖지 않고 시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 드는지 김수영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었다.

1964경에 김수영과 나는 같은 돈벌이를 한 적 있다. 광화문 뒷골목에 자리 잡고 있는 희망출판사에 번역 원고를 파는 것이었다. 임중빈이 그 출판사 주간이어서 일거리를 주었다. 그 출판사에서 <<올 다이제스트>>라는 월간 잡지를 냈는데, 외국 글 번역만 싣든 것이었다. 한 달에 필요한 원고는 1,500매였다. 그것을 김수영과 나, 그리고 누군지 모를 한 사람에게 500매씩 할당해 만들어 오라고 했다. 번역 거리를 지정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시청 옆 골목에 가서 영문잡지를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싸구려로 사서 흥밋거리를 찾아서 번역해가면 되었다. 축약해서 번역하고 적당히 윤색도 해야 했다.

월말에 최저단가의 원고료를 받는데, 예상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은 주는가 해서 기다리고 있으면 사장 부인이 나타나 현금을 모두 거두어 가서 다음날의 기약하고 빈손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허허한 기분으로 물러나면서 소주 한 잔 생각이 간절한데, 김수영은 그 돈도 없으니 내가 사야 했다. 좁은 좌판에 걸터앉아 쓴 잔을 비우면서 김수영은 커다란 눈만 껌벅이고 말이 없었다.

◇김지하에 대해=1960년 4ㆍ19 이후 몇 년 동안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은 별난 곳이었다.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진원지였다. 김지하와 거기서 만나 격동과 열정을 함께 겪었다. 지금은 공원이 된 그 자리를 드나들며 노는 젊은이들은 과거를 얼마나 아는지 의문이다.

세상을 온통 쥐고 흔들고 역사를 이끌어가겠다는 이상주의자와 몽상가, 과격분자와 모험주의자, 혁명가와 투사들이 목청을 높였다. 모두 관심을 정치에 두고, 정치노선, 정치이론, 정치투쟁의 전략과 전술에 관해 많은 말을 했다. 깊은 탐구는 생략한 채 이미 있는 주장을 현실에 무리하게 적용해 통일을 이룩하는 데까지 나아가겠다고 했다.

나는 공감하는 부분이 있으면서 실망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김영일, 김지하라는 필명을 사용하면서 시인으로 등장하게 될 친구는 달랐다. 거대한 꿈을 예술에서, 문학에서 이루려고 고심하고 있었다. 모더니스트나 다다이스트의 성향이 있어 거슬리기는 하면서도, 깊은 호감을 주었다.

현실참여 예술운동을 민족미학의 발견과 재창조에서 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해 동지가 되었다. 시를 같이 쓰고, 연극도 함께 했다. 그 전후의 일이 회고록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 때 이루어진 두 사람의 깊은 유대는 변함없이 지속되면서, 예술과 학문의 길이 갈라졌다.

김지하는 <오적> 같은 시를 써서 군사정권과 정면에서 투쟁하다가 감옥에 가서 모진 고초 겪고 건강이 많이 상했으니,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이름이 나라 밖에서까지도 너무 높아져 착심하기 어렵게 한 것이 또 하나의 심각한 피해였다.

나는 교수 노릇을 하기로 하고 서울을 떠나 대구로 갔다. 시달리는 일이 있으면서도 교수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죄책감 때문에 더 많은 연구 작업을 해야 했다.

김지하가 석방되고 다시 활동한 다음에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얼마전에 어느 잡지에서 대담을 할 기회가 있었다. 새로운 사상을 열겠다고 하면서, 시를 쓰는 본업에서 너무 멀리 이탈하지 말아라. 어수룩하게 살면서 못난 시도 버리지 않고 거두는 것이 슬기로운 자세이다. 이런 충고를 했다.

그 뒤에 바로 김지하는 시집을 내서 많은 사람이 읽게 하고, 널리 공감을 얻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착심하고 시인의 길을 갈 것을 기대했는데, 회고록을 써서 잡지에 연재하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세 권의 분량으로 출간되어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회고록을 벌써 쓰는가? 이런 의문을 가지면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내가 잘못 생각했다. 이제 할 말을 할 수 있을 때가 되었으므로 더 기다리지 않고 붓을 든 것이 마땅하다. 기억이 정확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내게 관련된 사실도 과연 그랬던지 나는 자신이 없는데, 잘도 알고 있다. 또한 필력이 살아 있을때 써야 한다. 전권의 문장이 생동해, 산문이 온통 시와 같다. 지금 쓰기를 잘했다.

이 회고록은 자기 혼자 위안도 얻고 변명도 하려고 쓴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겪어온 역사의 내밀한 진통을 응축해서 담은 작품이다. 상상해서 허구를 만들어서는 확보하기 어려운 진실성을 밀도 짙게 간직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이룬 가장 갚진 창조물의 대열에 들어간다고 평가할 수 있다.

큰일을 했다. 높은 이름이 헛되지 않게 하는 작업을 이룩했다. 오랫동안 힘들게 했던 부담과 긴장에서 벗어나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기 바란다. 도사 같은소리 그만두고, 할 말을 시로 나타내라. 주석에는 신경 쓰지 말고 본문만 써라. 비평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할 일을 남겨두어라.

인류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 새로운 사상을 일거에 깨달아 선포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지나친 기대는 버리자. 나 같은 교수는 논문으로 말하고, 시인은 시를 쓰면서 그 과업의 일부를 힘자라는 대로 감당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따름이다.

◇백낙청에 대해=김지하 보고 써놓은 시를 내놓으라고 해서 <황톳길>을 포함한 예닐곱 편을 <<창작과 비평>>을 내고 있는 백낙청에게 주고 실어달라고 했다. 대단한 것을 갖다 주었으니 크게 감사하리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반대였다. 얼마 뒤에 백낙청은 게제 불가라는 판정 결과를 통보하고 작품을 되돌려주었다. 자기 잡지라고 마음대로 하는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생각하면서, 그 때문에 백낙청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백낙청이 그 일을 회고하면서, 작품을 김수영에게 보였더니 게재 불가의 의건을 내더라고 했다. 김수영은 인민군의 군가이지 무슨 시냐고 했다는 것이다. 김수영 특유의 소심함을 지나칠 정도로 나타낸 피해망상증이라고 할 수 있는 반응이다. 백낙청이 그대로 따른 것은 시는 잘 몰라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문학보다 처신을 더욱 중요시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퇴짜 맞은 일을 회고하면서 김지하는 "시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자그마한 생각이나마 아예 접어버렸다"고 했다. 그러고 말았으면 얼마나 큰 손실인가. 그 뒤에 조태일이 내고 있는 <<시인>>에 환영받으면서 작품을 싣고 시인이 되었으니 큰 다행이다. 조태일은 시인이어서 시인을 알아보았다.

위세 당당한 <<창작과 비평>>에서 무엇을 했단 말인가? 김지하만한 시인을 등장시킨 적 있는가 묻고 싶다. 김지하에 대한 평가가 널리 정착된 다음,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넌다는 격으로 그 잡지사가 제정한 만해문학상인가 무언가를 주었다. 김지하는 두 말 하지 않고 감사하다는 듯이 받았지만 나 같으면 정중히 거절했을 것이다.

허문명기자 ange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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