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일과 꿈/김태성]번역에 모든 것을 걸고

  • 입력 2005년 1월 23일 18시 15분


코멘트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은 자신의 삶의 동기를 사랑과 예술로 규정하면서, 하지만 사랑과 예술은 둘 다 자신의 전부를 요구하는 것이라 둘 다 완전하게 해내지 못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나는 여기에 인식, 즉 학문을 하나 더 추가했다. 애당초 완전의 그림자도 갖출 수 없는 삶일 수밖에 없었다.

마흔이 되던 날 아침 공교롭게 공자가 생각났다. 불혹, 흔들리지 말아야 할 나이인데 곰곰이 따져 보니 내겐 이미 흔들리는 것이 삶의 법칙이었다. 여전히 대학생 수준의 정신연령으로 아무것도 해 놓은 것 없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세월을 인습적으로 이어 가고 있었다.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위기감을 느꼈고 그래서 찾은 것이 일이었다. 삶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없을 만큼 열심히 인식과 관련된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내게 가장 중요한 인식의 방법은 번역이다. 선후배 학자들 가운데 번역이 논문만 못하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가벼운 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번역에 나는 꿈과 생활을 모두 걸고 있다.

번역은 외부 문화를 인식하는 최적의 장치다. 번역이 없었다면 동아시아의 근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세계화 개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글로벌 시대, 무한경쟁의 지식산업사회라는 오늘날엔 번역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문제는 모든 번역이 똑같은 효용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전까지 수백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몇 년 전부터 중국 저작물이 물밀듯 몰려오고 있고, 내가 번역하는 것도 대부분 중국의 저작물이다. 일제강점기엔 일본의 문물이 집중적으로 들어왔고 그 뒤를 이어 서양문물이 들어왔음은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 일본을 한자문화권 또는 동아시아 문화권이란 이름으로 손쉽게 동질화하는 경향에 나는 우려를 금치 못한다. 새뮤얼 헌팅턴의 분류로 말하자면, 한국은 중화문화권에 속하지만 일본은 엄연히 별개의 권역이다. 이런 이질감과 한국-중국의 인문적 동질성이 제대로 체감되지 못한 채 세 나라 문화가 동류로 인식되는 현실은 어쩌면 번역의 책임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중국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한대 이후 중국문화가 외래문화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던 시대로 다시 회귀하고 있고, 이러한 회귀는 아예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류(韓流)라는 시냇물에 흥분해 있는 동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온몸을 적시는 한조(漢潮)를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 중국 관련 번역물들이 수박의 겉만 핥아 온 것은 아닐까? 이제 중국이라는 거대한 코끼리의 다리만 붙잡고 늘어질 것이 아니라 온몸 구석구석, 속살까지 드러내고 파헤치는 번역과 기획이 이뤄져야 하고, 이를 기초로 양국 문화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조직화해 인식을 힘으로 전환해야 한다. 마흔 권이 넘는 중국 관련 역서와 저서를 내놓고도 부끄러운 이유는 내 인식의 작업이 아직 이런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약력▼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국학 연구공동체인 한성문화연구소를 운영하며 번역 기획자 및 번역 작가로 활동 중이며 ‘상경’ ‘변경’ 등의 역서가 있다. 호서대 중어중국학과 겸임교수이자 계간 ‘시평(詩評)’ 기획위원이기도 하다.

김태성 번역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