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예술인 100人 “나의 삶을 말한다”

  • 입력 2004년 6월 16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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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림을 하시게 된 계기는… 어떻게…?”

“처음에 그림을 하려고 생각한 게 아녜요. 문학을 하려고 했는데….”

“아, 문학을요? 그런데….”

“결국은 내가 작품을 발표할 때는 일본말이 아니면 한국말로 해야 할 텐데 아무 소용이 없는 거라….”

미수(米壽)의 화가 전혁림이 후배인 김주원 경기대 강사(한국근현대미술사)에게 토로한 미술 입문의 ‘첫 기억’이다. 전 화백의 육성고백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 한국예술연구소(소장 강태희)가 문예진흥원 후원으로 지난해 시작한 ‘한국 근현대 예술인 100인의 증언 채록사업’의 일부분이다. 이 사업은 격동의 근현대를 살아온 원로 예술인들의 체험을 망각의 늪에서 길어 올려 우리 예술 발전의 디딤돌로 삼겠다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지난해 12월 착수해 이달 말 32명으로 1차 마감하는 증언 채록 작업에는 자문, 발제, 토론, 촬영, 녹취문 작성 등에 200여명의 예술인과 연구자들이 참여했다. 우선 1920년 이전에 태어난 예술인(평균 연령 88세) 1명당 연구자 1명이 짝지어졌다. 그 결과 총 300여 시간의 영상촬영 자료와 200자 원고지 4만5000여장 분량의 녹취문이 만들어졌다.

첫 녹취 대상자는 정진숙 을유문화사 사장(92), 국악인 이은관옹(87), 미술사학자 황수영(86) 진홍섭옹(86),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85), 연극배우 김동원옹(88), 영화감독 유현목옹(79), 시인 황금찬옹(86), 화가 전혁림(88) 정점식옹(87), 무형문화재 무속인 김석출옹(82) 등 음악 미술 무용 연극 문학 공예 건축 방송 출판 영화 가요 만화분야가 총망라됐다.

정진숙 사장의 증언에서는 광복 직후 내로라하는 문화예술인들이 출판사를 중심으로 모여 활동했던 풍경이 생생히 묘사된다. 동해안별신굿의 무속인 김석출옹은 구수한 입담을 통해 우리네 삶은 전통과 현대, 몸과 정신이 한꺼번에 버무려진 집합체라는 사실을 생생히 들려준다.

1980년대와 90년대 두 번이나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이경성옹을 만난 이인범 한국예술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이력으로만 보면, 이옹은 ‘관변’이라는 말로 묶을 수 있지만, 실제 녹취과정에서 그가 얼마나 정권과 민중작가들 사이에서 긴장과 평형을 유지하며 예술정신을 지키려 했는지 알 수 있다”며 “이번 구술작업을 통해 삶과 인간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없던 지난 시절을 반성하게 됐고, 삶을 삶 그 자체로 보는 진정한 인문학적 힘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당초 36명이 선정되었으나 건강 악화와 기억력 감퇴로 작업이 진행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아동문학가 어효선옹(79)은 채록이 끝나고 한 달 뒤인 5월 15일 작고하기도 했다.

이번 사업은 2005년까지 68명의 원로 예술인들이 추가되어 모두 100인으로 완결된다. 1차 작업을 정리하는 ‘한국 근현대예술사 증언채록사업의 성과와 전망’ 세미나가 19일 오후 1시반 서울 종로구 동숭동 문예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 3층 강당에서 열린다. 02-958-2754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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