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피플]'태극기 휘날리며' 장동건 "부상보다 연기가 걱정"

  • 입력 2004년 2월 9일 16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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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개봉된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는 1000만 관객을 향해 행진 중인 ‘실미도’와 더불어 올 최고의 흥행 기대작으로 손꼽힌다. 이 영화에서 형 진태역을 맡아 온몸을 던져 혼이 담긴 열연을 펼친 영화배우 장동건을 최근 만났다.》

“제 컬러링 못 들어보셨죠?”

5일 오후 서울 세종로 일민미술관 1층 카페 ima에서 만난 영화배우 장동건(32)은 마치 칭찬받을 행동을 한 소년처럼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어, 차에 전화를 두고 왔네…. 우리 영화 제목이 들어간 ‘조국찬가’라는 곡이 생각나 찾아봤더니 마침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구절부터 노래가 시작되더라고요. 감독님이랑 스태프, 다들 좋다며 벨소리 바꿨잖아요.”

제목만 듣고선 무슨 곡인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대뜸 “‘동방에 아름다운 대한민국 나의 조국∼’으로 시작하는 노래 있잖아요”라며 한 구절을 불러주었다.

대한민국 대표 미남배우로 꼽히는 그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었다. 만나는 사람에게 자신의 잘생긴 얼굴이 아니라 내면의 힘을 주목하게 만드는 특별함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냉정한 연예계에서 열두 해를 버텨온 스타에게 어떻게 생채기가 없으랴. 그럼에도 온화한 말과 행동에서는 도무지 거친 세파에 비틀린 흔적이나 사나운 성정(性情)을 찾아보기 힘들다. 여리고 선해 보이는 심성(心性) 안에 세상에 쉽게 길들여지지 않고자 하는, 단단한 심지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귀찮을 정도로 일상을 캐물었다. 실없는 질문에도 꼬박꼬박 다 대답한다. 그런데도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의 이미지는 모호해졌다. 시종일관 모범적이고 건실한 대답만 하는데도, 세상의 매혹적인 쓸쓸함과 인간의 근원적 고독을 이해하는 듯 보였다. 그에겐 분명 모순적 얼굴이 숨어 있다. ‘태극기…’의 엔딩신에서 화면을 압도한 폭발력 있는 연기, 배우로서 살아가는 힘이 여기서 나오는 듯했다.

▽선한 인상속에 폭발력 숨어

한국 영화 사상 최대 순제작비(147억원)와 최다 스크린 개봉작(443개) 등의 기록을 세운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는 전쟁과 두 형제에 관한 영화다. 이 작품에서 그는 자신의 연기 스펙트럼을 최대한으로 확장시켰다. 구두닦이를 하며 가족을 뒷바라지하는 순박한 청년에서, 동생(원빈)을 구하기 위해 전쟁의 광기에 휩쓸리면서 무자비한 살인기계로 변해가는 과정을 탁월하게 연기한 것.

“사실 지금까지는 내가 출연한 영화를 관객들이 얼마나 많이 보느냐 하는 것보다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보느냐도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야 큰 영화는 큰 영화대로, 작은 영화는 작은 영화대로 계속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겠죠.”

꼬박 9개월의 촬영 기간 내내 그 역시 치열한 전쟁의 몸살을 치렀다. 하필 첫 전투신을 찍을 때 무릎연골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을 줄이야. 그래도 몸 걱정보다 연기 욕심이 앞섰다.

“통증이나 그런 게 힘든 게 아니라, 남은 전투신에서 내 생각대로 몸이 안 따라주면 어떡하나, 그게 스트레스였어요.”

동생과 약혼녀를 챙길 땐 한없이 믿음직스러운 형이자 다정한 연인, 전투신에서는 소름 돋칠 정도로 살기등등한 군인. 이 영화 전후반에서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보이는 그의 열연은 이번 영화에서 거둔 최대 수확이다.

▽시종 상대배려 잊지 않아

누구도 가볍게 대하지 않았다. 사진촬영과 인터뷰 도중에도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다가와 사진 찍자, 사인 해달라고 부탁하자 군말 없이 다 응해줬다. 계산된 매너가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지 않으면 자기 마음이 더 불편한 듯했다. 동행한 매니저 홍의씨는 “사람과도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오래가는 스타일”이라고 귀띔했다. 잘생기고 인간성 좋고, 완벽해 보이는 이미지에 스스로 싫증난 적은 없을까.

“예전에 착하다는 얘기를 들으면 ‘미안하지만 사실 오해하신 겁니다’라고 생각했어요. 굉장히 우유부단한 성격이거든요. 부탁하면 싫어도 거절을 못해요. 내 성격이 싫어서 인위적으로 고치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착하다는 소리는 옛날보다 줄어든 반면 많이 편해졌죠.”(웃음)

그래도 1년 통틀어 화낼 때가 몇 번 안 된다. “화를 내는 제 자신에 대해 더 화가 나서요. 감정을 표현한다고 화가 가시는 것 같지도 않고요.”

인터뷰 시작할 때부터 큰 눈을 자주 껌벅인다. 간밤에 술을 마셨다고 했다.

“요즘 들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지난해 11월 말경 분가했거든요. 아무래도 술이라도 한잔 하고 집에 들어가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요. 혼자 있을 땐 TV도 안 켜요. 음악만 틀어놓고 가만히 앉아 있죠.”

한 달 전 수술한 무릎이 아직도 아픈지 손이 자꾸 그쪽으로 간다. 피아니스트처럼 섬세하고 긴 손가락이 눈에 들어온다. 언젠가 헤어지는 순간이 오는 게 싫어서 애완동물도 안 기른다는 그에게 언제 좋은 인연이 다가올까.

“지난 연말 제수씨가 생겼어요. 앞으론 명절 때 결혼채근을 덜 받겠죠?”

▽인기-돈보다 연기욕심 강해

집착이 없으면 두려움도 없다. 인기나 돈에 연연했다면 TV에서 한창 날리던 때 공부를 더 하겠다며 연기생활을 중단하진 않았을 거다. ‘패자부활전’ ‘연풍연가’ 등 그가 출연한 멜로영화들이 별 반응을 얻지 못했을 때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동안 슬럼프나 위기의 순간도 있었지만 당시엔 그걸 실감하지 못했어요. 얻은 게 별로 없으니 잃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작품 선택할 때마다 걱정이 많아졌어요.”

그는 늘 촬영 들어가기 전 시나리오를 철저히 연구하고 연기와 동선을 머릿속에 그려간다.

“별로 끼가 없는 편이라서요. 연기철학, 그런 거는 잘 모르겠는데 요즘 들어 좋은 연기가 뭔지 생각하게 돼요. 노련하고 훌륭한 배우가 익숙하게 던지는 ‘사랑해요’라는 말보다 신인의 서툰 대사가 더 울림을 줄 수 있잖아요. 그 차이는 바로 진심이란 생각이 들어요.”

시간의 흐름 속에 그의 얼굴엔 감정의 굴곡과 살아온 이야기들이 하나둘 새겨질 것이다. 배우 장동건은 지금보다 그때 더욱 빛날 것 같은 ‘즐거운 예감’이 들었다.

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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