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일부일처제’ 사회

  • 입력 2004년 2월 9일 13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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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일부일처(一夫一妻)제 사회였다. 그러면서도 각저총이나 수렵총 벽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부 상류층은 후궁이나 첩을 두었던 모양이다. 후사를 잇는 방편으로 용인되었으리라.

상류층에 일부다처제가 있긴 했지만 처첩의 차이는 있어도 지위는 대등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고구려왕들은 대체로 한 명의 왕후를 두었다. 물론 기사화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28명 가운데 7명을 제외하고는 후궁을 둔 기록이 없다. 신라왕실이 근친혼을 통해 체제를 유지했던 데 비해, 고구려왕은 인접 소국(小國)의 왕족이나 귀족층에서 왕비를 간택했다. 정략혼인 셈이다. 이를 토대로 고구려는 동아시아 제국을 탄탄하게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구려왕 가운데 후궁을 둔 유리왕 대무신왕 산상왕 동천왕 중천왕 등은 서민층에서 후궁을 구했다. 마음 편한 애첩으로 미색을 구하지 않았을까.

유리왕의 유명한 황조가(黃鳥歌)에 그런 정황이 잘 드러나 있다. 후궁 간의 다툼에 져서 궁전을 떠나버린 한족(漢族) 미인 치희(雉姬)를 못 잊어 망연자실 읊은 시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운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基與歸)'.

시조인 동명왕 주몽에 이어 도읍을 옮기고 고구려를 일으켜 세워야 하는 짐이 버거웠을 유리왕이다. 절박한 나랏일 못지않게 한 남정네로서 품은 그리움을 애절하게 노래했다. 이런 서정이 있었기에 고구려가 찬연한 벽화예술을 창조한 멋쟁이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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