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점 아리따와 신의 탈…창작민요 뮤지컬 가능한가

  • 입력 2003년 12월 31일 16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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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회오리바람이 불고, 객석의 사방 곳곳에서 검은 구름옷을 뒤집어 입고 무서운 탈을 쓴 마마병정들이 등장한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닫았다 하면서 관객들을 위협한다. (의정부 예술의 전당 공연, 2003.12.5)
사진 : 회오리바람이 불고, 객석의 사방 곳곳에서 검은 구름옷을 뒤집어 입고 무서운 탈을 쓴 마마병정들이 등장한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닫았다 하면서 관객들을 위협한다. (의정부 예술의 전당 공연, 2003.12.5)

- 민요연구회 20주년 기념 특별공연 “붉은 점 아리따와 신의 탈”을 보고

필자는 올해 여름, 즉 지난 7월에 있은 프랑스의 아비뇽 세계연극축제와 8월의 영국 에딘버러 플린지연극축제를 구경했다. 필자가 거기서 또 다시 느끼고 결론지은 것은 '가장 세계적(보편적)인 것은 가장 한국적(전통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말과 음식과 풍토와 생활방식이 전혀 다른 세계인들이 언어와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같이 할 수 있는 공감대란 시각적인 공감대와 청각적인 공감대와 가슴으로의 공감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함께 어우러짐 즉, 행동의 공감대가 이루어질 때 가장 세계적(보편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것이라 하더라도 박제화된 전통은 결코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우리 것은 그것이 세계인의 공통된 심성적 가치인 리듬과 몸짓에서 재해석되고 체감될 때 비로소 그 유의미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붉은 점 아리따와 신의 탈>(류이 작 연출/ 김상철 음악감독/ 오세란 안무)은 몇 가지만 보완된다면 충분히 세계 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필자는 지난 12월 5일(금) 오후 7시에 의정부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할 때 작품을 보았다. 이 작품은 제1부인 '신의 탈'과 제2부인 '흰머리산호수' 즉 2부작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내가 본 작품은 제1부 “신의 탈”이었다. 올해 1부를 선보이고 내년에 2부를 선보인다고 한다.

아리따가 ‘신의 공간’에 들어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마마와 싸우는 마을신들과 돌하르방 벅수머리 장승들과 만나는 아리따의 모험과 여행이 이야기 흐름을 이룬다. (의정부 예술의 전당 공연, 2003.12.5)

이 작품을 관람하면서 마음을 가장 도닥거리게 했던 것은 우리의 전통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란 것에 있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삼신할미라든가 조광대감이라든가 용신이라든가 하는 집안 신들과 마을신들 그리고 산신, 물신, 바다 신 등을 등장시킨 점들이다. 울뤠마루, 보름웃도, 동백자, 궤네깃도(마을신)와 괴또르(유랑광대 신), 돌하르방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러한 신들의 특징은 우리의 설화에서 많이 등장하는 도깨비와 같이 우리의 친구같이 앙증맞고 개구쟁이 같이 친근하며 여느 때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모습으로 포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신들이 우리의 아리따를 항상 옆에서 친구처럼 도와주고 부모처럼 든든하게 지켜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우리 것이 원형대로 남아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는 제주도 토속신앙과 설화를 배경으로 함으로써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된 오늘날의 신(新)설화가 된 것이다.

“여기여차 불어라 불불 불어라/ 슬근 살짝 불어도 한라산이 나온다/ 마고가 하늘 땅 떼어 놓을 때 생긴/ 산천은 여전히 아름답구나” 울뤠마루 보름웃도 동백자 등 마을신 3형제가 노래하며 나온다. (의정부 예술의 전당 공연, 2003.12.5.)

울뤠마루 : (아니리로) 마마가 분명해! 그래, 하얀 거품, 붉은 세균에 또아리 튼 마마! (노래로) 마마가 분명해! 핏빛 눈동자. 내장이 뒤틀리는 냄새, 마마가 분명해! (의정부 예술의 전당 공연, 2003.12.5.)

동백자 : (아니리로) 난 싫어. 저런 끔찍한 마마와는 얼굴 마주치기 싫다구!

상군해녀 : (메기는 소리) 이어도 사나
해녀들 : (합창, 받는 소리) 이어도 사나
상군해녀 : (메기는 소리) 쳐라 쳐라
해녀들 : (합창, 받는 소리) 쳐라 쳐라

이와 더불어 그 형식에 있어서도 설화가 가지는 이중성 즉, 스펙터클한 역사 요소와 이야기 요소인 교훈적인 요소가 공존하듯이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면서 아이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노래와 춤을 보게 되면 그것이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 준다.

음악적인 요소를 보더라도 전통적인 노동요나 민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편곡한 것이나 창작민요를 만든 것, 그리고 현대음악의 요소를 가미한 창작곡들을 보면 모두가 작품의 주제나 성격 그리고 인물에 맞게 잘 배치되고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필자가 우선 시급하게 세계화를 전제하고 이야기하자면 대사의 양이 더 적어지거나 아니면 가급적 음악과 몸짓으로 표현되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꼽고 싶다. 우리나라에서도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일 때 그 단어 하나하나가 가진 속 깊은 의미를 어떻게 음악과 몸짓으로 승화시켜 표현할 수 있겠는가가 문제일 것이다.

누군가 내 삶을 조롱하고 있어 있어
난 그저 하릴없이 당하고만 있어 있어
왜 왜 왜 왜 하필 나야?
왜 하필 나냐구? 왜 하필 나냐니까?

그리고 배우에 있어서 시각적인 요소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인물의 성격에 있어서 적확성이란 점에서 볼 때 이번 공연에서 아리따의 경우 작품에서 받는 인상은 매우 조그맣고 귀여운, 소녀적인 인상이지만 실제 무대 위에 나타난 배우의 모습은 매우 강하고 거칠고 나이가 많은 느낌으로 작품 전체를 휘어잡는 아리따의 본래의 맛을 살리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가창력에 있어서도 노래 자체는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 그 노래의 전부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배우의 가창력이 몇몇을 제외하고는 노래의 맛을 살리지 못하는 것이 또한 아쉬운 요소로 남았다.

세트와 조명과 의상의 조화가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아 섣부른 판단일 수 있으나 동작 하나하나에 세밀하지 못한 티가 나타나며 군무와 같은 경우 조화와 일치가 생명인데 짧은 연습기간이라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앙상블에 있어 매우 거칠었던 느낌이 있다.

유랑광대의 신 괴또르가 곰솔나무 등과 함께 풍파 속에 빠진 세상을 한탄하며 <어이할까>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의정부 예술의 전당 공연, 2003.12.5.)

하지만 이러한 가창과 율동은 정확하고 세밀하며 세련되지 못하면 문제가 심각해지기 때문에 다음을 위해서라도 굉장히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다.

가장 관심이 가는 캐릭터로 자주 웃음을 짓게 만드는 유랑광대의 신 괴또르 (오산시청대강당 공연, 2003.12.7)

필자가 보기에 다음에는 좀 소재를 바꿔야 하지 않겠나 하는 부분이 ‘사스’의 문제다.

삼형제·꼬마돌 : (받는 소리, 합창) 음음 예레라 여라 어기여 음음 예레라
울뤠마루 : (아니리로) 오~ 인간이네!

보름윗도 : (아니리로) 오호! 오만한 것들!
동백자 : (아니리로) 욕심에 눈먼 것들!
꼬마돌 : (아니리로) 쓰고 버리고 쓰고 버리고!


꼬마돌의 노래

뒤로 넘어져도 코 깨지고

하는 일마다 배배 꼬일 때

바로! 내 이름을 불러봐.

바람처럼 달려와 널 구해줄 거야.

넌 든든한 친구가 있지

우여 우이 새를 쫓는

나는 꼬마돌, 너의 수호신

두름박 딱딱 우여 우이

이 시점에서조차도 좀 시사성이 떨어진다는 느낌과 마마와 같은 엄청난 힘을 갖는 마력의 단편으로 표현되기에는 좀 걸맞지 않는 느낌이 든다.

세트와 의상, 소품과 관련한 것은 미술과 디자인의 문제지만 우리의 특징적인 요소를 단적으로 표현해줄 수 있는 감각과 고증 그리고 현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잿빛 마마장군이 큰 칼을 휘두르며 마마를 퍼뜨리고... 이야기는 계속된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고 할 때는 환상을 유발할 수 있는 아이디어도 많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조명도 이러한 것들이 갖춰지게 되면 그 분위기에 맞는 조명이 이루어지리라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문제점들이 시연의 성격으로 치러진 공연에서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필자는 참 다행스러움으로 느낀다. 다음에 이러한 것들이 극복되어 좀더 준비된 공연으로 치러지게 된다면 정말 대단한 작품이 이 공연계에 출현할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리베룽겐의 노래나 영국의 아더왕의 이야기라는 사소하고 지엽적인 설화가 위대한 한 문학가에 의해서 웅대한 서사시로 변모되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독일과 영국의 역사를 세계화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해온 것만큼이나 우리에겐 아쉽게도 그러한 작가나 서사시가 없다.

천리둥이(풍산개) 만리둥이(진도개)가 유랑광대의 신 괴또르에게 무언가를 얻기 위해 꼬리를 흔들고 있다. (오산시청대강당 공연, 2003.12.7.)

늦은 감이 있다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독일이나 영국의 설화적 소재보다 결코 뒤지지 않을 단군 이야기라든가 각 지방의 설화나 전설들을 장대한 서사시로 바꿔 놀 문학가가 필요하며 그 작품을 무대로 옮겨 놓을 연출가들이 필요한 때이다. 그러한 문학적인 바탕 위에서 우리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 뮤지컬이나 오페라, 심포니같은 것들이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뿌듯한 일이 되겠는가?

필자는 이 작품이 그러한 미래를 간직할 수 있는 시초가 되었으면 하는 그런 바램으로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필자 소개 ▼

나도은 : 극단 무리 대표. 연출가. 가톨릭 포럼 회원.

1980년대 문화운동 세대로서 자칭 <아트 게릴라>.

인디예술과 인디방송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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