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서 만난 삼국유사]백제불교 닻내린 성스러운 포구

  • 입력 2003년 11월 6일 16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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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저물 무렵 법성포 포구에 이르렀다. 먼바다 쪽으로 엷은 노을이 걸려 그윽해진 풍경을 보면서 법성포를 둘러보았다. 즐거움을 넘어 애처롭기까지 한 신비가 해변을 감싼다.

서해고속도로가 뚫린 이후 법성포를 찾아가는 길은 전국 어디서 출발해도 무척 수월해졌다. 고속도로의 영광 톨게이트에서 나와 법성포에 이르는 국도 또한 거의 고속도로급이다.

행정구역상 전남 영광군 법성면, 우리에게는 소주와 굴비의 고장으로 아로새겨져 있는 곳이다. 그러나 영광(靈光)이라는 이름이 그렇거니와 법성(法聖) 또한 뭔가 종교적인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겨 심상치 않다.

물이 빠진 법성포 포구의 풍경은 서해 바닷가 어디나와 비슷하다. 뻘밭의 언덕에 기대어 비스듬히 누워있는 작은 배들, 언젠가 밀물이 들어 함빡 힘을 받게 될 때만 기다리는 인고(忍苦)의 표정이다.

하지만 법성포가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 앞바다에서 작은 만(彎)을 이루며 바닷물이 한참을 들어와서야 포구와 만난다는 것, 법성포의 법(法)이 불교적 뉘앙스를 자아낸다는 것.

조선시대 때는 인천 이남에서 가장 번성한 항구로, 서울로 실어 올리는 호남평야 일대의 쌀을 여기에 보관하였다지만, 지금 법성포는 굴비 하나로 전국의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먼바다건, 가까운 바다건 어디에서 잡았느냐가 아니라 법성포에서 말려야 제대로 된 굴비란다.

큰 바다와는 거리를 두고 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와 형성된 포구는 큰 바람과 높은 파도로부터 배와 사람을 지켜준다. 서해안에서 이런 포구를 다시 볼 수 없는, 마치 넉넉한 여성의 몸과 같이 느껴지는 천혜의 입지 조건이다.

그 품안으로 마라난타(摩羅難陀)는 배를 타고 들어왔다. 백제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했다는 사람이다. 뭍으로 파고들어오는 바닷물을 넉넉히 안을 것처럼 보이는 법성포 한쪽 언덕에 마라난타 도래지 기념 건물이 세워지고 있다.

마라난타의 법성포 입국은 어디까지나 전설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기를 빌려, 고구려 소수림왕이 즉위한 지 2년 되는 372년 전진(前秦)에서 승려 아도(阿道)가 불교를 전하러 왔다고 적었다. 이 땅에 처음 불교가 전해진 공식기록이다. 그로부터 꼭 12년 뒤, 백제에 진(晉)나라에서 마라난타가 왔다.

그는 본디 서역(西域), 곧 인도 출신이었다. 그 이름의 뜻을 동학(童學)이라고 일연은 풀어 놓고 있다. 아이 적의 첫 배움, 그것이 백제에서 어디 불교뿐일까, 만물을 아는 새로운 가르침이 그로부터 시작됐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마라난타를 찬미하는 시에서 일연은 “대체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늙은이는 춤과 노래에 실어 저절로 풀고/옆 사람까지 이끌어 눈뜨게 했다”고 노래했다. 백제 제15대 침류왕 때의 일이다.

글=고운기 동국대 연구교수 poetko@hanmail.net

:촬영노트: 법성포를 중심으로 남쪽의 백암부터 북쪽의 동호까지 이어지는 바닷가는 서해안에서는 드물게 곧게 뻗어 있어서 어디든지 일몰 사진을 찍기에 좋다. 법성포 남쪽 해안은 대개 깎아지른 절벽이 이어지고, 북쪽은 너른 개펄이 펼쳐져 있는데 서로 다른 분위기의 일몰을 볼 수 있다.

일몰은 언제 봐도 장엄하지만 해가 넘어갈 때보다는 막 져서 여운만 남아 어둑어둑해질 무렵이 더 좋다. 해가 사라지면서 흰 구름은 오렌지색으로 물들다가 붉게 변하고 이내 검어진다. 이 모든 풍경은 커피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면 끝나기 때문에 쉴 새 없이 셔터를 누르게 된다.

개펄에 비친 노을을 찍고 싶다면 바닷물이 들고 나는 시간을 미리 확인하자. 국립해양조사원(www.nori.go.kr)의 조석예보를 보거나 ARS(032-887-3011)를 이용하면 된다.

양 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tophoto@korea.com

법성포 바로 위 언덕에는 오래 묵은 느티나무들이 들어찬 숲이 있다. 숲을 지나 더 오르면 정자가 하나 있고, 여기에 서면 포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백제 왕실은 마라난타를 맞아들여 당시 새로운 도읍지로 삼은 한산주,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에 절을 짓고 승려 열 사람을 가르치게 했다.

여기까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그런데 법성포를 둘러보면 그의 발자국은 이 주변의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특히 영광군 불갑면의 불갑사(佛甲寺)는 물론이요, 한산주에 이르는 길목에 있는 계룡산 갑사(甲寺)가 그의 손에 의해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불갑사건 갑사건 모두 첫 절이라는 뜻이다.

물론 모두가 전설적인 이야기일 뿐이고, 아직 문헌상으로 고증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법성포가 마라난타 도래지라든가, 마라난타가 불갑사와 갑사를 창건했다는 데에 의구심을 품는 이들도 있다. 다만 구비전승(口碑傳承)의 힘을 아는 이들은,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문헌 못지않은 권위를 지닌다는 사실을 믿는다.

말이 ‘삼국유사’이지 사실 ‘신라유사’라 불러야 할 만큼 이 책의 신라에 대한 경도(傾倒)는 심하다. 누군가 이 책을 일러 신라 중심의 불교문화사라 한 것은 분명 맞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경북 경주를 비롯한 경상도에서야 곳곳에 현장을 두고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모아져 있는 게 금방 확인되지만, 전라도 쪽은 가물에 콩 나듯 한다. 그것도 억지로 갖다 붙여야 겨우 의미 해석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요즘 법성포의 모습은 명성만 못하다. 포구 안쪽까지 펄이 차서 작은 배들만 들어올 수 있고, 갈매기도 몇 마리 없다. 솟대를 세워 마을을 지키려했던 옛 사람의 마음을 저 갈매기 홀로 전하려는 것일까.

법성포와 마라난타의 관계 또한 그러해서 아쉬움이 없지 않다. 다만 그의 이름이 백제 불교 전래와 함께 적혀져 문헌 증거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미 어두워진 다음, 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을 찾는다. 굴비 백반에 법성포 소주 한 잔이면 좋겠다. 그러나 굴비 도매상만 즐비할 뿐 눈에 쏙 들어오는 식당이 없다. 그냥 포기하듯 허름한 시골 식당에 들어 밥상을 주문했는데, 놓인 반찬마다 입에 맞았다. 그러기에 전라도이던가?

서늘한 밤바다가 어둠 속에서 멀리 느껴진다. 물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포구의 배들도 지금은 철이 아닌지 모두 닻을 내리고 있다. 마을 뒤편 느티나무 숲에서 들려오는 바람 쓸리는 소리만이 시원하다.

마라난타를 법성이라 일러 이 포구의 이름이 생겼다면, 우리는 어디서 출발해도 법성포에 이를 수 있다. 우리가 찾는 법성포는 사람이 이르게 될 궁극적 경지로서, 불교에서는 법성(法性)이라 부르는 그 무엇인지도 모르기에.

▼주변에 가볼 만한 곳▼

법성포에 이르기 전, 영광군 불갑면의 불갑사를 들러볼 수 있다. 마라난타가 지었다는 절이다.

영광군 영광읍에서 22번 국도를 타고 광주 쪽으로 가는 길에 전남 함평군과 경계를 짓는 불갑산 자락에 있다. 여러 차례 거듭 지어진 건물들이 많아, 마라난타가 지은 백제의 절이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절터 하나로도 세월을 느껴볼 수 있다.

이 절의 뒤편에는 천연기념물 112호인 참식나무 자생지가 있다. 이 나무는 남쪽 지방의 섬에 자라는 난대수종인데, 이곳이 자생지로서 현재 발견된 북쪽 끝이다.

한편 법성포구와 마라난타 도래지 사이에 있는 느티나무 숲도 장관이다. 이 마을의 역사를 대변이라도 하듯 꿋꿋하게 선 나무들에 경의를 표해 봄도 좋겠다. 그 앞을 지나 언덕을 하나 넘고 해안도로를 따라 가면 가마미 해수욕장이 나오는데, 철 지난 바닷가의 정취를 한 몸에 느낄 수 있다. 이 해수욕장에 이르는 길 곳곳에 더 작은 해수욕장들이 있고, 바닷바람을 맞는 해송들의 유연한 몸놀림이 눈을 시원하게 해 준다.

가마미 해수욕장 바로 옆이 영광 원자력발전소이고 해수욕장 위편이 금정산이다. 산속에 금정암이 있고, 여기서 바라보는 서산낙조(西山落照)를 일품으로 친다.

영광읍내에서 출발하여 법성포로 들어가기 직전 왼쪽으로 백수해안도로 표지판을 보고 따라 들어가 보자. 아마도 서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밤이면 몇 군데 포장마차가 등장하여 밤바다를 구경하러 나온 이들의 입맛을 돋운다.

이 길의 끝자락인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에는 원불교의 발상지로 성역시되는 박중빈 생가가 있다. 박중빈 선생은 원불교의 창시자이다. 교도들의 교육 수련을 위한 선원과 80년대 초반에 개교한 영산성지학교도 있다.

영광은 전남의 가장 북쪽이고, 바로 전북 고창군과 이어진다. 법성포에서 고창의 선운사로 올라가는 길은 간간이 서해 바다를 보여주며 구불구불 한적한 게 시골 모습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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