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복거일 풍자소설 '구보 기자의 특종'

  • 입력 2003년 3월 31일 18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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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질긴 쇠고기 조각을 씹으면서, 반도일보의 과학부 구보 기자는 휴스턴 시내의 야경

을 내다보았다. 기획기사 취재를 위해 미국 남서부의 연구소들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만난 대학 동기와 함께 저녁을 먹는 참이었다. 취재는 그럭저럭 마쳤고 기사도 구도

가 잡힌 터라, 그는 마음이 푸근했다.

“기자 생활한 지 8년이 됐으면, 특종도 몇 개 뽑았겠다?” 맥주잔을 비운 친구가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물었다.

“과학 담당 기자가 특종 뽑는다는 게….” 맥주병을 들어 친구의 술잔을 채우면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운이 닿으면, 황소 뒷걸음질 치다 개구리 밟는 식으

로….”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나직이 말했다, “우리 연구소에 한국과 관련된

얘기 하나가 흘러 다니던데….”

저릿한 느낌이 그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친구는 화학자로 줄곧 미국에서 일했는데,

지금은 주로 미국 정부와의 계약 아래 무기들을 연구하는 텍사스 소재 연구소에서 일

하고 있었다. 속에서 솟구치는 흥분의 물살을 지그시 누르면서, 그는 친구의 얼굴을

살폈다. “그래? 좀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겠니?”

“그레입바인(비밀정보망)을 통해서 떠돌아다니는 얘기니까, 뭐, 신빙성이 높은 건

아닌데….” 친구는 손을 가볍게 저었다. “한국이 미국의 미사일 디펜스 계획에 참여

할 의사를 내비쳤다는 얘기가 돌더라.”

“아, 그래? 얘기가 재밌다. 사실이라면, 특종감이다.”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알다시피, 미사일 디펜스에서 미사일 부문은 한국

이 기여할 여지가 거의 없지만, 전자 부문은 한국도….”

“그렇지. 전자 부문이라면, 한국도 참여할 수 있겠지. 그러잖아도 한국 정부가 그

일에 너무 소극적이라 좀 아쉬웠는데….”

그는 전 정권이 미국 주도의 미사일 방어 계획에 적대적이었던 것이 늘 안타까웠다.

러시아의 술수에 넘어가, 공동 성명이라는 형식으로 미국의 계획에 반대한 것은 중대

한 외교적 실책이었다. 뒤에 러시아는 슬그머니 뒤로 빠지고 일본은 재빨리 요격 미사

일 체계 개발에 참여했다. 한국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미국만 화나게 만들었다.

“일본이 벌써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자리를 잡은 상태라, 좀 늦었지만, 그래도 지금이

라도 참여하면, 여러 가지로 한국에 좋지.”

고개를 돌려 화려한 야경을 내다보면서, 그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맞아. 전자

부문이라면, 얘기가 된다.”

이틀 뒤 구보 기자는 인천공항에 내렸다. 좀 피곤했지만, 그는 곧바로 과천으로 향했

다. 가슴을 채운 흥분과 기대를 즐기면서, 그는 정부청사에 들어섰다. 그가 지금 취재

하려는 기사는 중요한 함의를 여럿 지닌 정보였다. 당연히, 시민들 모두가 그것을 알

아야 했다. 그렇게 중요한 정보를 소수가 독점하면, 다수의 시민들이 손해를 볼 수밖

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중요한 정보를 시민들에게 알리게 된 기자가 바로 그

였다. 그의 특종이 실린 지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담당 실장은 그를 반갑게 맞았다. 전공이 같아서, 두 사람은 전부터 비교적 얘기가

잘 통했다.

그러나 그가 찾아온 까닭을 설명하자 실장의 얼굴이 이내 굳어졌다. “구보 기자님

얘기를 확인해 드릴 수가 없네요. 미안합니다.”

좀 뜻밖이라, 그는 잠시 실장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렇습니까? 비밀은

아니잖습니까? 시민들이 알아야 할 정보이기도 하고요.”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확인해 드리긴… 정부의

언론 정책이 워낙….”

“이건 정부의 언론 정책과는 관계가 없는 사항 아닙니까?”

“지금은 전시라서….” 실장이 야릇한 웃음을 입가에 올렸다.

“전시요? 이라크전쟁 말씀입니까?”

“그런 얘기가 아니고….” 실장이 좀 딱하다는 낯빛을 지었다. “‘오보와의 전쟁’

얘깁니다.”

“아, 예.” 얘기의 맥을 짚지 못하고 헤맨 자신이 부끄러워서, 그는 고개를 돌렸다.

사오정이 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공보관을 만나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실장이 은근한 어조로

달랬다.

속에서 무엇이 울컥 치밀었다. “오보를 안 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물론 중요하죠.” 그의 거센 목소리에 자극을 받았는지, 실장의 목소리에 뼈가 들

어 있었다. “무고한 사람 하나를 잘못 벌하는 것보다는 죄를 지은 사람 열이 벌을 받

지 않는 것이 낫다는 얘기가 있죠? 바로 그겁니다. 오보 하나를 내지 않는 것은 옳은

뉴스 열 개를 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 정부의 언론 지침입니

다.”

한껏 부풀었다가 갑자기 허전해진 가슴을 애써 달래면서, 구보 기자는 공보관실로

향했다.

공보관도 그를 반갑게 맞았다. 그러나 그의 얘기를 듣자, 공보관의 태도도 갑자기

바뀌었다. “미안합니다. 구보 기자가 말씀하신 얘기를 확인해 드릴 수 없습니다.”

“왜요?” 씁쓸한 무엇이 가슴 밑바닥에 고이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되도록 부드러

운 목소리를 냈다. “비밀로 분류될 만한 사항은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시민들이 알아

야 할 일이고. 미국 사람들은 다 알고, 여기서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텐데, 우리

시민들은 다수가 모른다면….”

“구보 기자께서 제 얘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제가 확인해 드릴 수 없는

까닭은 사안이 비밀이기 때문이 아니라 확인해주는 일 자체가 정부의 언론 정책 원칙

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원칙요?” 문득 마음이 멍해져서, 그는 공보관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 원칙이라

는 게 뭡니까?”

“만일 지금 구보 기자께서 확인해 달라고 하신 얘기가 신문에 나가면, 특종이 되겠

죠?”

“아마 그럴 겁니다.”

“바로 그 점입니다. 현 정부의 언론 정책의 기본 원칙은 특종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인해 드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종을 막아요? 왜요?”

특종은 그것을 터뜨린 신문에 큰 이익을 독점적으로 줍니다. 특종이 될 만한 정보는

얻기가 쉽지 않고, 자연히 큰 신문들만 특종을 터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큰 신문들이

이익을 보고 작은 신문들은 손해를 봅니다. 언론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오는

거죠. 그런 상황은 현 대통령의 기본 철학에 어긋납니다.”

“현 대통령의 기본 철학이 뭔데요?”

“지난 선거 때 성장과 분배가 중요한 이슈였잖습니까? 그때 현 대통령께선 성장은

좀 더디더라도 분배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예.”

“그래서 우리 정부는 뉴스들도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

다. 특정 신문에 특종을 주어 독점적 이익을 누리게 하는 것은 평등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현 정부의 철학에 어긋납니다. 현 정부의 정책들은 모든 분야에서

평등의 이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일이관지(一以貫之)에 수미상응(首尾相應)입니다.

”공보관은 득의의 웃음을 얼굴에 떠올렸다. “구보 기자께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

십니까?”

“그러면 대한민국에선 정부와 관련된 일엔 특종이 있을 수 없겠네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저번에 문화부장관께서 명언을 하셨잖습니까? 특종을 뽑으려

면, 쓰레기통을 뒤지라고.” 공보관의 눈길이 구석에 놓인 빈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이틀 뒤 텔레비전의 저녁 9시 뉴스를 보다가, 구보 기자는 자신이 특종을 노렸던 기사

가 첫 뉴스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의 확인 요청을 거절했던 공보관은 그저 방송 기

자의 얘기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친절하게 배경과 전망까지 설명했다.

다음날 아침 구보 기자는 공보관을 찾아갔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정보는 제가

먼저 얻었는데, 특종은 방송에서 터뜨렸으니, 이게….”

“방송은 방송이고 신문은 신문 아닙니까?” 공보관은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방송하고 신문이 어떻게 다른가요?”

“구보 기자께선 텔레비전도 안 보시나? 저번에 대통령께서 그러셨잖아요, 방송이

없었으면, 어떻게 선거를 치렀겠느냐고.”

“그렇습니까? 내가 기사 하나 도둑맞은 건 그렇다 칩시다. 현 정권은 평등의 이상을

추구한다더니, 특정 언론기관을 특별히 우대한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그게 평등입

니까?”

“저번에 얘기한 것처럼, 우리 정부는 평등을 추구합니다. 모든 언론기관들은 평등합

니다. 그러나 어떤 언론기관들은 다른 언론기관들보다 더 평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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