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한국 역동적 언론시장 '광화문 가판 夜市'

  • 입력 2003년 3월 13일 20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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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후 6시경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 로비에서 갓 나온 저녁 가판신문을 보는 사람들. 야시(夜市)가 선 것이다. 가판 시장에서 야시의 비중은 20%정도. 나머지는 퇴근길 직장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서울시내 중심가의 가판대에서 팔린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10일 오후 6시경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 로비에서 갓 나온 저녁 가판신문을 보는 사람들. 야시(夜市)가 선 것이다. 가판 시장에서 야시의 비중은 20%정도. 나머지는 퇴근길 직장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서울시내 중심가의 가판대에서 팔린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6일 오후 5시35분.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앞 인도에 쏜살같이 달려온 오토바이 한 대가 멈춰 섰다.

오토바이에서 내린 운전자는 싣고 온 신문 뭉치를 건물 앞에 내려놓았다. 비닐에 싸여 십자로 묶인 200여장의 모 경제신문 뭉치에는 ‘광화문 가판’이라고 쓰인 A4용지가 붙어 있었다.

운전자는 신문을 꺼내 건물 구조상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에 몇십 부씩 나눠 열을 지어 늘어놓았다. 신문 정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오토바이 서너대가 잇따라 도착해 같은 작업을 시작했다. 이들이 싣고 온 것은 다른 3종의 경제신문과 정보기술(IT)전문 신문 뭉치였다.

10일 오후 5시35분 서울 종로 지하철 1호선 종각역 5번 출입구. 신문 뭉치들을 싣고 온 오토바이 대여섯 대가 늘어섰다. 오토바이 운전자들은 익숙한 솜씨로 출입구 인도와 역 구내 통로에 신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후 5시35분. 저녁 가판신문 시장의 장이 열리는 시간이다.

●가판시장①…야시(夜市)

가판은 가두(街頭)판매의 준말이다. 길가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역 가판대에서 신문을 파는 행위 또는 그 신문을 말한다.

가판은 또 초판(初版)신문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한국의 조간 신문사들은 오후 5시반∼6시에 다음 날 신문의 첫 인쇄를 하고 밤늦게까지 약 1시간 간격으로 3, 4번 신문을 더 찍는 이른바 ‘판갈이’를 한다.

동아일보의 경우 돌발사건이 없을 경우 이튿날 오전 3시에 인쇄가 끝난다. 첫 번째 찍어내는 신문이 초판이고 이 신문이 저녁 가판시장에 나온다. 아침에 지하철역 등의 가판대에 있는 신문은 밤에 새로 만든 것으로 초판과 다르다.

가판시장의 생생한 현장은 동아미디어센터(동아일보사옥) 앞이다. 가판 관계자들은 이곳을 ‘야시’라고 부른다. 즉 ‘가판 신문 야시장’이라는 의미다. 초저녁에 발행되는 서울 시내 일간지는 모두 이곳에 집합한다.

동아미디어센터 옆 공간에 신문이 나란히 놓이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50여명이 우르르 밖으로 나와 신문들을 집어들었다.

이들은 다시 로비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신문을 바닥에 펼쳐 놓았다. 한 손에는 형광펜이나 붉은색 플러스펜을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커터를 들고 기사를 유심히, 그러나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부분 기업체 홍보실 직원이다.

청와대는 지난달 26일 가판을 보지 않겠다고 발표했고 각 부처도 청와대의 의중에 따라 그동안 보던 가판을 보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정부 부처에서 나온 사람들도 있다.

6일 저녁에는 새 정부 출범 후 신임 장관의 진퇴 문제가 뉴스의 초점이 된 부처의 직원에게 가판배달 현장 책임자 A씨(41)가 “기사 많이 나왔네요”하며 아는 척을 했다. 오후 6시6분, 평소보다 늦게 IT전문의 신문을 실은 오토바이가 도착했다. 기다리던 A씨가 “이제 갖다 주면 어떡해”라고 볼멘소리를 하자 운전자는 “길이 너무 막혔다”며 재빨리 신문 뭉치를 풀어놓았다.

이어 종합일간지들을 실은 오토바이들이 속속 도착했다. 6시20분경이 되자 최근 윤전기 교체작업 중인 A일보와 지난해 가판 발행을 중지한 중앙일보를 제외한 모든 종합일간지가 도착했다. 야시가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동아미디어센터의 야시는 한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언론시장이다.

사람들은 분주히 신문을 보고 자기 회사와 관련된 기사는 커터로 오려서 모으거나 간단한 기사 내용과 면(面), 기자이름 등을 꼼꼼히 수첩에 적는다.

최근 사장이 바뀐 B백화점의 홍보직원은 모 신문에 난 자사의 재벌 3세 승계 문제를 꼬집은 칼럼을 읽더니 “터져버렸네. (회사로) 팩스를 넣어야겠는데…” 하며 회사로 전화를 한 뒤 기사를 찢어 들고 나갔다.

7시가 넘어서면서 동아미디어센터 로비의 인파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한번씩 훑고 지나간 신문들이 차곡차곡 로비 한 쪽에 쌓였다. 때마침 건물 앞을 지나던 행인이 신문을 한 부 사려고 했지만 아무도 팔지 않았다. 야시에 나오는 신문은 판매용이 아니다. 모두 임자가 정해져 있는 배달용이다. 저녁 가판을 살 수 있는 곳은 도심의 일부 지하철역 구내, 버스 정류장 등의 가판대 뿐이다.

7시반, 야시는 파했다. 100여명의 사람들이 웅성대던 현장은 고요해졌다. 100ℓ들이 쓰레기 봉투에 가득 담긴 신문 포장용 비닐과 나일론 끈만이 이날의 치열함을 말해줄 뿐이다.

●가판시장②…가판대

서울지하철 1호선 종각역 구내와 인근 지상 가판대는 저녁 가판이 서울 시내에서 가장 먼저 배달되는 곳이다. 오토바이 배달원들은 각 신문을 여러 뭉치로 나눈 뒤 가판대에 가져다 준다.

10일 오후 6시20분 유모씨(여)가 운영하는 종각역 가판대에는 종합일간지 4종과 경제신문 2종 등 모두 400여부의 가판신문이 진열됐다.

6시반을 지나면서 퇴근하는 사람들의 물결이 지하철 역으로 밀려왔다. 가판대 판매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퇴근길 회사원들은 가판대에 들러 어떤 신문을 고를까 망설이다가 곧 특정 신문을 뽑아들고는 개찰구로 향했다.

모 신문 광고국에서 일한다는 40대 남성이 “○○일보 왔어요” 하고 물었다. 아직 그 신문은 도착하지 않았다. 50대 여주인은 속이 타는 듯 “곧 올 텐데…”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6시50분경 ○○일보 70부가 도착했다. 저녁 가판시장의 승패는 시간에 달려 있다. 회사원들의 퇴근이 집중되는 6시에서 7시반 사이에 가판이 배달되지 않으면 그날 장사는 공친 것과 다름없다. 최근 윤전기 교체작업 때문에 배달 시간이 평소보다 1시간여 늦어진 A일보는 유씨의 가판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저녁가판을 사는 사람들은 ‘더 빨리 알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또 인터넷으로 보는 뉴스와 막 찍혀나온 신문에 실린 뉴스는 ‘질감’이 다르다고 설명한다.

정성진씨(40·잡지사 직원)는 퇴근 때마다 유씨의 가판대에서 특정 신문을 산다. 정씨는 집에서도 그 신문을 구독하지만 집에 갈 때마다 저녁 가판 사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퇴근하기 전에 인터넷으로 대충 그날의 제목만 훑는다. 신문 기사 스크랩을 하는데 집에 가는 동안 어떤 기사를 오려 놓아야 할지 정한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30대 남성은 집이 인천이라 지하철을 타고 가는 1시간여 동안 읽을거리로 가판을 선택한다고 말했다.

유씨의 가판대에는 단골 손님이 꽤 있다. 대부분 30, 40대 회사원이고 60대 이상의 할아버지도 있다. 유씨는 하루 수입의 80% 이상을 저녁 가판에서 올린다고 말했다.

동아미디어센터 앞의 야시가 파할 무렵인 7시반. 종각역 가판대의 저녁 피크타임도 끝나간다. 이 시간부터 가판대가 문을 닫는 10시반까지는 손님들이 현저히 줄어 드문드문 사갈 뿐이다.

● 가판의 여정

동아미디어센터 앞 인도에 놓인 각 신문사의 저녁 가판 신문들을 한 배달원이 자신의 배달 물량만큼 챙기고 있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각 신문사는 평일 저녁 각각 4000∼7000부의 가판을 찍는다. 야시에 신문사별로 800∼1200부 정도를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서울 시내 중심가의 가판대로 나간다.

야시는 배달 전문시장이다. 가판을 보려는 기업이나 관공서, 또는 개인이 가판업자에게 신청하면 배달해준다. 동아미디어센터 앞에서 직접 가판을 체크하는 홍보실 직원들에게 가는 것은 이 배달물량의 일부.

가판 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업자는 2명이다. 30년 전부터 가판배달을 해온 박종호씨(47)가 기업체를, 조미남씨(52)는 관공서를 맡고 있다.

이들은 오토바이 배달원들을 고용해 각 신문사 발송파트에서 가판을 받아와 배달한다. 최근까지 40여명의 오토바이 배달원들이 일했지만 정부가 가판 구독을 하지 않겠다고 한 뒤 오토바이 배달원 7명의 일감이 사라졌다.

가판은 주로 서울 여의도 증권가와 강남 테헤란로 등 서울시내에 본사가 있는 기업들로 배달된다. 의외로 가판을 받아 보는 개인도 많아 전체 배달 물량의 20%가량을 차지한다.

개인 구독자 중에는 정치인, 대기업 임원, 중소기업 대표들이 많지만 90년대 들어 증권시장이 커지면서 애널리스트 등 관련업종 종사자가 많이 늘었다. 새벽시간에 TV나 라디오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는 방송인이나 기자 등도 저녁 가판을 받아 본다. 국회의원 구독자도 30여명선을 유지한다.

가판의 ‘배달 한계선’은 북으로는 노원구 상계동이고 남으로는 경기 성남시 분당 신도시. 지난해에는 인천까지 가판 3부를 배달했다. 광화문에서 분당까지 1시간 안에 주파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후 9시반이면 배달을 끝낸다.

배송료는 한달 구독료(1만2000원)와 배달비를 합친 가격. 광화문에서 여의도까지의 배달비만 한달에 5만원 정도다.

야시용이 아닌 저녁 가판은 서울 시내 4대문 안의 지상과 지하 가판대에 깔린다. 기업체가 몰려 있어 퇴근하는 사람이 많고 퇴근 시간 안에 배달이 가능한 곳의 가판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지상의 가판대는 4대문 안과 얼추 맞아 떨어진다. 서대문에서 광화문을 지나 종로 그리고 동대문까지가 ‘북방 한계선’이고 명동성당과 남대문을 잇는 가상의 선이 ‘남방 한계선’이다. 이 사이에 있는 150여개의 가판대에 저녁 가판신문이 꽂힌다.

지하철 가판대는 이보다 좀 더 복잡하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1∼5호선의 역 중 위의 조건이 맞는 곳에 가판을 돌린다.

1호선은 서울역에서 청량리역까지 9개역, 2호선은 홍대입구역에서 동대문운동장역, 그리고 성수역까지 15개역과 강남권의 교대, 강남, 선릉, 삼성, 역삼역이다. 3호선은 안국역에서 교대역까지 13개역, 4호선은 동대문에서 사당역까지 12개역, 5호선은 광화문에서 여의도역까지다. 6∼8호선은 수지가 맞지 않아 가판을 깔지 않는다.

가판 업자들은 가판이 “시간 승부”라고 말한다. 저녁 가판이 깔리는 지상과 지하의 가판대는 대부분의 수입을 저녁에 올린다. 낮 시간 판매는 신통치 않다. 출근길에는 집 근처 가판대에서 신문을 사지 회사 근처에서 사지는 않기 때문이다.

집에서 구독할 때는 메이저 신문이 절대적이지만 직장인들이 서둘러 퇴근하는 초저녁의 경우 가판대에 먼저 깔리는 신문이 가장 먼저 팔리는 경향이 있다. 신문사의 가판 판매 담당자들은 “가판업자들은 기사가 몇 개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인쇄를 빨리해서 빨리 깔아달라고 요구한다”고 말했다.

● 가판 미셀러니

7일 오후 5시40분경 롯데백화점 홍보팀 홍용기 대리(31)가 동아미디어센터 로비에 도착했다. 로비에 놓인 5개의 간이 소파는 이미 다른 홍보사 직원들이 차지했다. 찬 바닥에 신문을 깔고 앉아서 신문을 찬찬히 보기 시작했다. 홍보실에서 흔히 말하는 ‘가판 당직’이다.

“처음에 혼자 나올 때는 신문을 정말 뚫어져라 살폈다. 한번 다 보고도 혹시 내가 뭐 놓친 것 없나 하고 다시 훑고 또 훑고 그렇게 세 번을 본 다음에 퇴근했다.”

가판당직 경력 4년의 홍 대리가 보는 신문은 20여개. 신문당 1분 30초 정도면 다 훑는다. 정치, 사회, 국제면은 건너 뛰고 경제면 중에서도 산업과 유통면을 주의깊게 본다.

“이제는 신문을 넘기다가도 기사 속의 ‘롯’자를 쉽게 알아보는 정도가 됐다. 그러다 보니 기사에서 ‘비롯해’라는 단어만 나와도 눈이 번쩍 뜨인다.”

야시에 직원을 보내는 업체들은 대략 50여곳. 이들 업체도 배달을 받아 보지만 조금이라도 더 빨리 기사를 보기 위해서다.

홍보 담당자들끼리 통하는 말로 “마(魔)가 낀” 날이 있다. 꼼꼼히 모든 기사를 잘 살피고 “별 일 없다”고 보고를 한 뒤 퇴근을 했지만 다음날 신문의 경제1면 톱기사가 자사 이야기인 경우가 그런 날이다. 이런 일을 겪어야 비로소 ‘진정한 홍보맨’이 된다고들 한다.

홍보 인력이 부족한 기업들은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한다. 야시에는 이런 아르바이트 학생이나 중년여성들이 10여명 있다.

동아미디어센터 앞의 야시가 언제부터 열렸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형태의 야시는 83년 경부터라는 것이 가판업자들의 말이다.

80년대 초 야시는 동아미디어센터 건너편인 교보빌딩 앞에서 잠시 이뤄지다 83년경 당시 동아일보사 주차장 앞이었던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새 신문들이 창간되고 동아와 중앙일보가 조간으로 바뀐 뒤에야 야시는 지금처럼 홍보실 직원들이 모이는 장이 됐다. 야시가 동아미디어센터에 서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바로 지난해 6월 월드컵 한국 경기가 열릴 때. 거리 응원을 나온 시민들이 야시가 서는 공간을 다 차지하는 바람에 이 때는 길 건너 무교동 인도에 장이 섰다.

대부분 신문이 석간으로 발행되던 60, 70년대 가판시장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가판시장에서만 50여년을 일해온 성기중씨(67)는 “60년대엔 가판 대금을 쌀 포대에 담아 운반했는데 시발택시(군용 지프를 개조해 만든 택시)에 포대를 실으면 차가 기우뚱할 정도였다”고 말한다. 80년대 석간 시절의 동아일보는 가판만 16만∼18만부를 찍었다. 87년 6월항쟁 때 동아일보는 30만부대의 가판을 유지했으며 6·29 선언이 발표되던 날 오후 가판만 40만부를 찍은 것이 가판 인쇄물량으로는 최고기록이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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