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 미술가 함 섭…닥종이에 담은 '토종의 美'

  • 입력 2003년 3월 2일 19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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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 작가 함섭은 대기만성을 기다려 주지 않는 이 스피드의 사회에서 쉰이 넘은 나이에 주변에서 중심으로 들어온 보기드문 작가다. -사진제공 박영덕화랑
한지 작가 함섭은 대기만성을 기다려 주지 않는 이 스피드의 사회에서 쉰이 넘은 나이에 주변에서 중심으로 들어온 보기드문 작가다. -사진제공 박영덕화랑
한지 작가 함섭(61)은 쉰이 넘은 나이에 주변에서 중심으로 들어 온 보기드문 작가다. 대기만성을 기다려 주지 않는 이 스피디한 사회에서, 청춘이 권력이 되어 버린 이 사회에서, 대학에 적을 두지 않으면 네트워크가 형성되기 어려운 세상에서 그는 오로지 끈기와 성실, 자기고집 하나로 버텨 성공한 작가다. 그것도 국내보다 해외에서, 다른 때도 아닌 국제통하기금(IMF) 체제때 세계 시장에서 호평받았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1등한 함기용씨를 작은 아버지로 둔 인연으로 고교때 마라톤 선수를 했다는 그는 인생도 장거리 경주라고 생각한단다. 고교시절 그림을 시작할 때도 풍경이든, 정물이든 마라톤처럼 쉬지 않고 하루에 1장씩 그렸다.

홍익대 서양화과 1학년(62학번)때 강원도 미술대전에서 종합대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졸업 후 고등학교 미술교사라는 생활전선으로 뛰어든다. 이후 13년동안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화가로 살았다. 아파트 지하에 월세 10만원짜리 작업실을 마련해 놓고 팔리든 안 팔리든, 남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매년 100여 작품을 내놓았다.

그동안 당한 설움은 많았다. 아웃사이더였던 그에게 그룹전 참가 기회조차 쉽게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 세월을 좌절과 울분으로 보내는 대신, 자기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만드는 시간으로 바꿨다.

“아무리 서양화 해 봐야 다른 누군가와 유사한 페인팅밖에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나는 어느 누구를 추종하기도 싫었고 다른 예술가와 비교되기도 싫었다.”

이런 고집은 자연스럽게 한국적 독창성을 살릴 수 있는 재료인 한지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다. 자연염색 한지를 다루면서 그는 자신의 영육에 배인 한국적 정서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게 된다. 마침내 붓과 캔버스를 아예 버리고 한지만으로 작업하는 ‘함섭 식(式) 한지 회화’를 만들어 냈다.

그의 작품은 황토를 연상시키는 바탕 빛에 닥종이를 적신 후 찢거나 두드리고 짓이겨 붙인 다음 다시 단단한 솔로 힘차게 두드려 특유의 부조적 효과와 질감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방식이다. 화면에 포인트가 되는 색조나 조형도 오방색의 종이를 휙휙 던져 붙인 다음 다시 한번 솔로 두들겨 완성한 것이다.

함섭작 'DREAM 2088' -사진제공 박영덕화랑

서울 마포구 서교동 그의 작업실에는 바퀴달린 커다란 나무판 위에 목욕탕 청소에 쓰이는 플라스틱 솔이 먼저 눈에 띈다. 그는 이 솔로 작품을 두드린다. 100호 짜리에는 무려 1만여번의 ‘두드림’이 들어간다고 한다. 작업실 한 구석에는 지방에서 사왔다는 고서들이 가득하고 화장실에는 닥나무 껍질을 삶을 때 쓰는 볏짚 태운 물이 양동이에 가득 담겨있다.

첨단과 인공으로 무장된 요즘, 철저한 수공업으로 만드는 그의 작품에는 기계가 대신하지 못하는 인간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서양인들이 좋아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

그는 1993년부터 1997년까지 뉴욕 아트페어, 프랑스 아트페어(FIAC), 일본 아트페어(NICAF)에 잇따라 참가했고 수년간 그의 작품을 눈 여겨 보던 해외 컬렉터들은 1998년 샌프란시스코 아트페어에 출품한 그의 작품 8점을 모두 사 가는 것으로 보답했다. 당시 밀린 주문 때문에 작품 2점을 서둘러 만들어 공수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이듬해 1999년 시카고 아트페어 출품작도 모두 매진됐다. 지금까지 해외에서 구매한 그의 작품은 미국이 150여점, 유럽이 100여점, 일본이 6점 등이다. 현재 그의 작품은 100호 한점에 1만6000달러선이다.

3월6∼15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박영덕화랑에서 그의 최근작들을 선보이는 개인전이 열린다. 02-544-8481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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