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허영한/연주회 객석에도 불을 밝히자

  • 입력 2002년 10월 24일 17시 59분


연주회장에 클래식 음악회를 감상하러 간다. 시작 시간보다 늦으면 들어가지도 못하고 첫 곡은 놓치게 된다. 첫 곡이 끝난 후에 들어간다고 해도 왠지 죄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빠른 발걸음으로 정해진 자리를 찾아간다. 환한 로비의 밝은 세상과는 달리 연주회장은 완전히 바깥 세상과는 격리된 채로 깜깜하고 조용하다.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아 다음 순서를 기다린다. 잠시 웅성거리던 소리가 연주자의 등장과 함께 멈춘다. 조용히 숨죽이고 기다린다. 혹시나 핸드폰이 울려 주위 사람들로부터 교양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까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보는 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연주가 시작되고 이제부터 내 몸은 자유롭지 못하다. 정작 내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이나 쇠사슬은 없지만 내 몸은 움직이지를 못한다. 몸이 움직이면 소음을 만들어 내고 내가 만든 소음은 다른 이들에게 음악 감상에 방해를 준다. 자기 좌석 주변에 어린아이가 눈에 띄면 시작부터 부담스럽다. 아이는 몸을 잘 움직이고 소음의 진원지 역할을 한다. 나는 눈만 껌벅이며 귀를 열어놓고 음악이 내 몸 속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들어와라. 들어와서 내 몸과 마음을 움직여 다오. 취소! 내 마음만 움직여 다오.”

혹시 클래식 음악회장이 감옥처럼 느껴진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엉뚱한 말 같지만 클래식 음악은 온갖 규제가 난무하는 규제의 천국이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통제된다. 교향악단이 첫 곡을 연주하기 전에 무엇을 하는지 보라. 모두들 자기의 악기를 하나의 음으로 정확하게 (물론 수리적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모으는 조율을 한다. 한 명이라도 음이 틀리면 실제로 우리의 귀를 괴롭힌다. 훌륭한 교향악단일수록 현악기 연주자들의 활은 일사불란하고 정확하게 통일된 움직임을 보인다. 마치 잘 훈련된 군인들의 행진을 보는 듯하다.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연주할 때 이 점이 가장 잘 드러난다. 앙상블이 잘된다는 말은 그만큼 모든 연주자들이 지휘자의 지휘봉에 잘 움직인다는 뜻이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딱딱한 일인가?

서양의 클래식 음악은 20세기로 오면서 점점 우리의 이성만을 자극하는 쪽으로 변했고 음악뿐만 아니라 음악이 연주되는 연주회장 상황도 그에 맞게 변화했다. 클래식 음악은 극도로 인간의 육체를 자극하지 않으려 애쓴다. 이러한 클래식 음악의 전통에 도전하는 연주자들이 동서양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중음악의 요소를 클래식 음악과 연주에 도입하는 것이다. 가장 노골적인 행위는 클래식 악기를 록 음악의 악기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바이올린 연주자 바네사 메이가 선정적인 자세로 바이올린을 들고 몸을 쓰더니 한국에서는 메이의 남자판이라고 할 유진 박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국의 아가씨들 4명으로 구성된 본드는 이번에는 단체로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서양음악에서도 가장 머리를 써야하는 실내악의 최고 장르인 현악사중단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연주회장은 우리가 알고 있는 클래식 연주회장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이들과는 다르지만 정통 클래식 연주가들 중에서도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에 동참하는 예들이 나타나고 있다. 클래식 음악회의 분위기를 바꾸어보자는 시도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악사중주단의 예를 든다면 이미 오래 전에 크로노스 현악사중단에 의해 시도되었다. 이같은 연주회에서는 객석의 불을 밝혀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웬만한 소음도 용인하자. 어차피 연주자들이 몸을 움직이며 소음을 만들어 낼텐데 왜 청중만 숨죽이고 있어야 하는가?

허영한 음악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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