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미륵대불 '100kg 황금옷' 입다

  • 입력 2002년 6월 3일 18시 32분


충북 보은군 속리산의 법주사 금동미륵대불사진=안철민기자
충북 보은군 속리산의 법주사 금동미륵대불
사진=안철민기자
높이 33m, 무게 160여톤으로 청동 입상(立像)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속리산 법주사(충북 보은군 내속리면)의 미륵대불이 최근 ‘황금 옷’을 갈아 입고 금동미륵대불로 다시 태어났다.

법주사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7일 오전11시부터 ‘금동미륵대불 회향 대법회’를 갖는다.

이 불상은 원래 ‘청동(靑銅)미륵대불’이었으나 지난해 11월부터 불상 표면에 금을 입히는 ‘개금불사(改金佛事)’를 진행해왔다. 이 작업에 사용된 금은 100여㎏에 이르며 총 불사 비용은 7억원에 이른다.

이 작업은 표면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미세한 구멍을 메우는 과정에서부터 옻칠, 금분칠, 금박 입히기 등 8단계의 공정을 거치는 도금법이 사용됐다. 50여년 이상 80도의 고온과 영하 30도의 저온 상태에서 팽창과 수축에 의한 균열이 생기지 않고 광택이 유지된다.

회향식에서는 미륵부처님 점안식과 기념 축하공연, 10만등 불사 점등식 등이 이어진다. 043-543-3615

1964년 완공된 시멘트 미륵불상

법주사의 미륵대불은 사연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불상은 금동→시멘트→청동→금동으로 모습을 바꿔가면서 시련을 겪어왔다.

법주사는 553년 신라 진흥왕 때 의신(義信) 조사가 창건한 사찰로 미륵불을 모신 미륵종찰(彌勒宗刹). 기록에 따르면 조선 고종 9년(1872년) 대원군에 의해 사찰 내의 금동미륵불상과 당간 지주가 파괴된다. 이때 해체된 불상은 궁궐에서 사용할 못과 화폐 주조에 사용됐다.

1939년 불상 복원 작업이 시작됐다. 사찰과 신도들의 염원은 금동미륵불상의 복원이었으나 당시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 시멘트 대불로 추진됐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조각가 김복진씨와 시주자가 한국 전쟁 중 사망하는 바람에 작업이 중단됐다. 64년 첫 작업을 시작한지 25년만에 완성됐다.

이 과정에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대불 조성 작업이 지지부진할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대원군의 손자 며느리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인 이방자 여사와 63년 당시 최고 실력자였던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최고의장. 대불은 권력에 의해 파괴됐다 다시 권력의 도움으로 회생한 셈이다.

1990년 조성된 청동미륵대불

시멘트 대불은 안전상의 문제로 해체된 뒤 90년 5년의 작업 끝에 청동미륵대불로 다시 조성됐다. 33m는 12층 아파트 높이이며 무게 160톤은 점보 비행기의 무게와 맞먹는다. 법주사 대불이 개금불사를 통해 금동미륵대불로 원형을 되찾기까지 무려 130년이 걸렸다.

법주사 주지 지명 스님은 “법주사의 개금불사는 무엇보다 권력에 의해 파괴된 불상의 원형을 복원에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청동불상의 용접 부위에서 부식이 진행되면서 얼룩진 외관 때문에 불상으로서의 품위가 훼손됐다는 현실적인 고민이 깔려 있다.

법주사 대불외에도 국내에는 유난히 대불 조성이 많은 편이다. 최근 20년간 서울 강남 봉은사의 석조 미륵대불(23m), 대구 동화사의 석조 약사대불(33m), 설악사 신흥사의 청동좌불(14.6m)이 조성됐다.

세계 최대의 청동 불상은 93년 세워진 홍콩 난타오섬 보련선사(寶蓮禪寺)의 천단대불(天壇大佛)로 높이만 34m에 이른다.

불교계에서는 “대불 조성은 우리 민족의 염원인 평화와 통일에 대한 불교도의 순수한 뜻을 담은 것”이라며 “역사적으로도 대불을 통해 국난을 극복하고 민족의 뜻을 하나로 모은 사례가 많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불가피한 불사가 아니라면 대형 불상의 건립은 과시적이며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김갑식 기자 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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