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짜미술품 판친다

  • 입력 2002년 5월 3일 15시 37분


한국화랑협회가 2일 발표한 현대미술품 진위 감정 통계 자료는 흥미로우면서도 충격적이다. 감정 의뢰받은 이중섭 작품의 75%가 가짜로 확인된 사실에서 드러나듯 가짜 작품의 유통이 생각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심각하기 때문이다. 가짜가 많기로 유명한 고미술 분야의 추사 김정희 글씨나 대원군 묵란(墨蘭)도 가짜 비율이 50% 정도인데 이번 이중섭 그림의 가짜 비율은 이를 훨씬 능가한다. 이번 자료는 화랑협회 감정위원회가 1982년부터 2001년까지 20년간 진위를 감정한 작품 2525점에 대한 판정 결과다.

▽가짜 미술품 실태=감정 의뢰받은 전체 작품 중 가짜는 약 30%. 이중섭의 회화는 189점 중 143점이 가짜(75.7%)로 밝혀져 수위를 차지했다. 서양화 가운데 박수근 작품은 36.6%(101점 중 37점), 김환기 작품은 23.5%(153점 중 36점), 장욱진 작품은 20.5%(83점 중 17점), 이인성 작품은 55%(60점 중 33점)가 가짜였다. 한국화 중 가짜 판정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허건 작품으로 65%(17점중 11점)가 가짜로 밝혀졌고, 김기창 작품은 30.8%(367점 중 113점), 천경자 작품은 40.6%(32점 중 13점)가 가짜로 드러났다. 전체 미술품 중 회화작품은 가짜가 약 30%였다. 반면 조각은 감정의뢰 작품이 24점밖에 되지 않았지만 대부분 진품으로, 가짜 비율은 8%에 불과했다. 미술계는 감정의뢰되지 않은 작품까지 합할 경우 시중에서 진짜로 행세하는 가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가짜 미술품의 경향=이번 통계에서 드러나듯 가짜는 역시 유명작가들 작품에 많다. 박수근 김환기 김기창의 작품 등 모두 '큰 돈'이 되는 작품들이다. 특히 최근 경매에서 최고가 신기록 경신을 진행 중인 박수근 작품의 경우, 가짜를 만들어 속여서 팔기만하면 한 번에 수억원을 손에 쥘 수 있다. 특히 "고관들에게 뇌물로 상납한 그림의 경우 대부분이 가짜였다"는 한 관계자의 말이 흥미롭다. 타계한 중광스님도 생전에 "내 가짜 그림이 군 고위장교에게 선물로 제공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가짜 미술품 제작 수법=한국화의 경우, 한지를 정교하게 둘로 나누어 한 작품을 두 개로 만드는 수법이 가장 많이 이용된다. 또 특정 작품을 그대로 모사하기도 한다. 이 경우엔 모사하기 쉬운 경향의 그림을 대상으로 삼는다. 가짜 제작자들의 그림 테크닉은 수준급이기 때문에 모사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청전 이상범의 설경(雪景) 그림은 특히 모사하기 쉬워 가짜를 만들기 수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시중에 나도는 청전의 설경 그림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한국화에 찍는 낙관은 진품에 찍혀있는 낙관을 동판으로 떠서 가짜 그림에 찍는다. 작가의 드로잉 원화를 구입해 그 위에 색깔을 입히는 수법도 이용한다. 서양화 인물화의 경우, 인물 모델이 살아있으면 진품 분위기와 흡사하게 그 인물을 그려 진짜로 둔갑시킨다.

최근엔 가짜 제작자들도 전문화되고 있는 경향이다. 특정 작가나 장르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훈련함으로써 진품과 구별하기 힘든 가짜를 제작한다. 화랑협회 관계자는 "일부 작품의 경우는 감정위원들조차 의견이 엇갈려 감정불능 판정을 내릴 만큼 위조기술이 날로 정교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누가 가짜 미술품을 만드나=화랑협회는 국내에 가짜 전문가가 30여명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국전과 미술대전 등에서 입선한 경력이 있을 만큼 그림을 잘 그린다. 또한 유명 작가의 직계 제자도 있다고 화랑협회는 보고 있다. 가짜를 만드는 직계 제자들은 주로 정통 산수화 분야에 많다. 가짜 전문가 중 일부는 신상이 알려져 있으나 제작과 유통이 워낙 은밀하게 이뤄져 적발이 쉽지 않다.

▽대책=우선 진위 감정이 더욱 정밀하고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 진위 감정 기관이나 전문인력이 많을수록 가짜을 잡아낼 기회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로선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화랑협회 감정위원인 최병식 경희대 교수는 "현재 국내에 30여명의 감정인력이 활동 중이지만 자격증을 가진 감정 전문가의 양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말 감정가협회가 발족돼 현대미술품 감정에 적극 나서기로 했고 이번 학기에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에 예술품감정학과가 생겨 앞으로 좀더 철저한 감정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와 함께 화랑협회도 감정전문인력 양성기관 설립을 추진 중이다.

현대미술품은 고미술품과 달리 제작된 지 수십년이 넘지 않아 수십년의 연대 오차가 나는 과학적 연대측정이 별 의미가 없다. 따라서 감정 전문가 양성과 함께 풍부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이 필요하다. 화랑협회는 이번에 확인된 가짜 작품에 관한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해 진위 판정의 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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