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변신 꿈꾸는 두 중년주부 겨울 여행

  • 입력 2002년 1월 15일 16시 44분


《서해바다는 격정적이지 않다. 멀리 나갔던 바닷물이 돌아오는 해거름녘. 사나운 기세로 쳐들어오는 동해의 성난 파도와 달리 서해바다는 가만히 밀물을 데리고 올 뿐이다. 갈매기도 이 조용한 풍경을 깨지 않으려는 듯 낮게 날며 하나의 정물이 된다.

산 머리에 걸려 있던 해가 어느덧 수면 바로 위까지 내려앉자 해는 점점 붉은 색으로 선명해진다. 하지만 그 색은 아침에 솟아오르는 해처럼 투명한 단색이 아니다. 긴 뒤안길을 걸어온 인생처럼 신산(辛酸)의 흔적이 묻어 있는 듯하다.

해가 저무는 안면도의 겨울바다. 낮은 산들에 에워싸인 해변의 모습은 중년의 얼굴을 닮았다. 이 겨울에 두 여인, 이제 막 쉰 고개를 넘고 있는 두 여인이 이곳에서 안온함을 느끼는 건 그런 풍경과의 일체감 때문인지 모른다.

‘살아간다는 건 곧 나이든다는 것이지만 나이들어 간다는 사실을 늘 느끼면서 살아가는 건 아니다. 달릴 때는 모른다. 하지만 늘 달리기만 할 수는 없다.(박혜란, 나이듦에 대하여)’

두 여인은 달리기를 멈추고서 나란히 섰다.》

# 소녀에서 중년으로

서울에서 자란 당찬 여학생 현숙이, 그리고 진주에서 올라온 수줍음 많은 아가씨 현숙이.

성만 김과 강일 뿐, 한자까지 이름이 똑같은 두사람은 성격은 대조적이었지만 자석의 양극이 서로 끌리듯 단짝이 됐다.

“너는 자분자분 정이 참 많았어.”(김현숙)

“너는 어떻고. 네가 도시락 싸오면 같이 나눠먹었잖아.”(강현숙)

두 사람이 입학(이화여대 사회학과)했던 70년은 박정희 군사독재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시위다 휴교령이다 해서 제대로 수업을 받아본 날이 얼마 안될 만큼 학교는 늘 어수선했지만 그래도 캠퍼스엔 꿈과 낭만이 넘쳤다.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 모든 먹구름을 씻을 수 있었던 때였다.

꿈많고 파릇파릇하던 두 여대생은 이제 삶의 한 모퉁이를 돌아섰다. 작년(김현숙)과 올해 (강현숙) 쉰 고개를 넘어섰다.

# 나이듦에 관하여

“우리 옛날엔 이렇게 흐린 날씨가 왠지 좋았잖아. 뭔가 낭만적인 분위기가 나는 것도 같고. 하지만 이젠 이런 흐린 날씨가 싫어. 마음보다 몸이 그걸 안받아들이는 것 같아.” 서울에서 출발한

차가 서해안고속도로로 접어들자 차창 밖으로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며 김현숙씨가 말했다.

“그래, 9시 뉴스 보다가 졸잖아”

강현숙씨가 화답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렇게 마음보다 몸으로 먼저 찾아오는 건지 모른다.

“내가 왜 작년에 몸이 많이 안좋았잖아. 그게 바로 갱년기라고 그랬던 것 같애.”

50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두사람이 작년에 부산에서 동창들과 함께 보낸 하룻밤은 어쩌면 50 진입을 앞둔 일종의 ‘예방주사’였는지 모른다. 부산에 사는 친구가 불러 함께 모였던 12명의 동창들은 콘도에서 성년식이 아닌 ‘중년식’을 치렀다.

그날 밤의 분위기는 중년, 혹은 노년의 초입으로 들어서는 데 대한 낯설음과 거부감, 그리고 한편으론 과장된 자괴감이 뒤섞인 것이었다.

“너는 아직도 옛날 그대로네”라며 서로 위안을 보내던 친구들은 한편으론 “이제 할머니가 다 됐는데. 40대가 화장하면 변장이고, 50대가 화장하면 위장이라고 한다잖아”라며 씁쓸한 심정들을 꺼내보였다.

“나이가 드니 세월이 참 빨리 지나가지. 마치 아다지오(아주 느리게)에서 알레그로(빠르게)로 바뀌는 것 같아.”

하지만 아직도 50이라는 게 익숙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다.

“꼭 숙제를 안했는데 학교 가야 하는 초등학생 기분이야.”

또는 죄없이 받아야 하는 벌처럼 억울한 마음이기도 하다.

‘쉰’이란 나이는 두사람에게 아직은 그렇게 생소한 나이다.

# 자유에 대하여

작년 막내아들이 대학입시를 치른 김현숙씨는 큰 애(대학 3년)에 이은 6년간의 수험생 뒷바라지가 끝났다.

“애가 고3 올라갈 때 안방으로 들여왔던 TV부터 다시 거실로 내왔지. 애가 ‘엄마는 이제 자유부인 됐다’고 하더라구.”

자유-.

그것은 김현숙씨가 늘 꿈꾸던 것이었다.

대학 마치고 3년간 했던 직장 생활을 결혼과 함께 접었다가 둘째 애 낳고 나서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애가 우는걸 뿌리치지 못하고 들어앉았지”

그때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늘 미련은 남아 있었다.둘째 애가 크면서 속상할 때 ‘내가 너 때문에 내 일도 접고 왔는데’라는 섭섭함이 들기도 했다. ‘주부가 내 직업’이라고 마음을 정리하긴 했지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은 서랍 속의 오래된 소지품처럼 늘 남아 있었다. 그런 미련을 접은 건 마흔살 넘어서였다.

“신문의 구인광고를 봐도 40 넘은 주부를 구하는 데는 아무데도 없더라구.”

20여년만에 다시 찾아온 자유. 그러나 이젠 너무 낯선 것이 된 듯하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식당에 앉은 두 사람은 앞에 회 한 접시를 놓고, 또 다시 각자 앞에 놓인 자유를 놓고 얘기한다.

“나는 신춘문예 공모를 보면 지금도 가슴이 뛰어.”

‘문학소녀’였던 강씨는 얼마 전 남편에게 휴대전화 메시지로 그동안 속으로만 묵혀놓았던 얘기를 했더니 후련하다고 털어놓았다.

“남편이 ‘그런 줄 몰랐다’면서도 많이 도와준대. 옛날 내가 보냈던 편지를 책으로 묶어 내주겠다고도 하고.”

“글세 뭘 할까. 이제 그동안 못했던 그림 공부도 다시 하고 싶은데….”

미대를 가려고 했다가 집안의 반대로 접어야 했던 김씨는 환갑을 맞기 전까진 전시회를 가지겠다고 한다.

하지만 두사람이 품고 있는 생각은 좀더 ‘크고 속깊은’ 계획들이다.

“돌아보면 그래도 넘치게 살아왔어. 내 인생은 내게 친절했던 것 같아. 이젠 넘친 걸 덜어줘야 할 때가 됐어.”

“너, 그래서 호스피스 할 거라면서.”

남에게 베푸는 게 실은 자신이 배우는 과정이라는 건 두사람이 새로 깨친 ‘비밀’들이다.

# 날마다 특별한 날

김씨는 작년 남편이 갑자기 위경련을 일으켜 응급차에 실린 채 병원으로 가면서 겁에 질렸던 날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그 일을 겪으면서 우리 인생에 특별한 날을 위해 뭔가 대비한다는 건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바로 매일 매일이 특별한 날이야.”

겨울바다에서 맞은 이 날은 두 사람에게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안면도〓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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