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학생독립운동 72년만에 재조명한다

  • 입력 2001년 11월 28일 18시 21분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에 이어 12월2일부터 보름에 걸쳐 계속됐던 서울지역 학생독립운동이 72년만에 재조명된다. 유족들로 구성된 ‘서울학생독립운동 순정(純情)동지회’(회장 이호찬)는 12월1∼15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서울학생운동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기획전시회를 연다.

독립운동사를 전공하는 박찬승 충남대 교수는 “광주학생운동 직후 광주지역의 보도관제로 그 내용이 전해지지 않다가 보도관제가 풀리면서 이 사건이 서울에 전해져 12월초부터 서울전역에서 학생운동이 벌어졌고 전국적으로도 확산됐다”고 당시 서울학생운동의 역할을 높게 평가했다.

광주-나주간 통학열차에서 일본인 학생의 조선인 여학생 희롱사건을 계기로 일어났던 광주학생운동은 11월3일 1차 시위, 12일 3차시위로 이어지며 광주 일대를 치안 마비 상태까지 몰고 갔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서울에서는 경성제대를 비롯한 각급 학교와 시내 곳곳에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화를 외치며 총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격문이 살포됐다. 이에 호응해 경성, 경신, 보성, 중앙, 휘문, 배재, 협성실업, 이화, 동덕, 진명, 정신 등 수십 개 학교에서 약 1만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며 가두시위와 동맹휴학을 벌였다.

전국적으로는 약 200개에 달하는 학교의 학생 수만 명이 참가했고 그 중 2000여 명이 검거돼 퇴학 정학 및 실형을 받았다. 이 가운데 서울학생운동의 주동자로 분류된 35명은 징역 8월에 집행유예 4년의 형을 선고받고 1년간 복역하기도 했다.

이번 행사를 기획한 이호찬 회장은 “당시 중동고보 재학중이던 부친(이일신·李一信)을 비롯해 주동자 대부분이 출옥 후에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예전에는 관련 자료를 찾기 어려워 애태우고 있었으나 정부기록보존소, 국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등에 자료가 정리되면서 부친의 자료를 찾다가 유족들 사이에 연락이 돼서 작년 9월부터 모임을 결성해 이 운동의 재조명 작업을 준비해 왔다”고 말했다.

이들이 공개한 당시 신문자료에 따르면, 12월부터 이듬해 초까지 이들의 시위와 격문 배포, 그리고 이들의 검거에 관한 기사가 연일 계속돼, 당시 서울지역의 학생항일운동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알 수 있다.

12월5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얼마 전부터 각 사상단체의 중요인물과 각 학교 학생들까지 엄중한 경계를 경찰측에서 해왔으나, 2일 밤부터 전 경성 시내 요소요소에 근년에 보기 드문 과격한 격문 네 종류를 배부하는 동시에, 학교 교정에서 등교하러 오는 학생들에게도 배부를 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학생 책상 서랍 안에도 일일이 집어넣었다”며, 당시 학생들의 준비가 매우 치밀했음을 전하고 있다.

전시회에는 당시 운동과 관련된 경찰 및 검찰의 조서, 판결문, 총독부 경무국 비밀문서, 신문기사, 유물 등이 전시된다. 02-466-0368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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