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이너리티 철학사 다룬 '안티 호모에렉투스'

  • 입력 2001년 3월 27일 18시 50분


◇삶에 대한 '열린 사유'에 눈길

표지에 아무런 장식이나 저자 이름도 없이 ‘안티 호모에렉투스(Anti Homo erectus)’라는 제목만 달랑 적힌 철학 책 한 권이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리스와 중국에서 약 3000년 전에 탄생한 것으로 전해지는 철학의 역사를 인간이 처음 두 발로 직립해 무리를 이루고 살던 150만년 전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류의 철학사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고대 그리스나 중국 철학자들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들의 철학적 발상은 다만 호모에렉투스 이후 인간이 발전시켜 온 ‘자연에의 대응관계’로부터 파생된 하나의 혁명이었을 뿐이다.”

이 책을 발간한 출판사(도서출판 길)가 알려 주는 이 책의 저자는 연세대 철학과 박동환 교수. 1987년 깊은 사색의 글을 모은 저서 ‘서양의 논리 동양의 마음’(까치·1987)을 펴내 주목받았던 학자이다. 그 후 논문 모음집인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고려원·1993)를 낸 뒤 이번에 8년만에 세 번째 저서를 내놓은 것.

올 여름 대학 정년을 앞두고 있는 박 교수는 강의시간 외에는 자택에서 두문불출하며 사색에 몰두한다.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책에 일부러 저자 이름도 밝히지 않았는데 무슨 인터뷰냐며 정중히 거절했다.

출판사 측은 “지금까지 전개해 온 사유를 일단 묶어 세상에 내놓은 뒤 이를 토론거리로 삼아 치열하게 논전이 벌어지는 등 검증과정을 거쳐 완전한 결정판을 내겠다는 것이 박 교수의 의도”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가 이 책에서 추구하는 것은 철학사에 실리지 않은 사람들의 철학. 그것은 고대 그리스 이래의 서양철학과 고대 중국 이래의 동양철학 이외에, 철학사에서 다뤄지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의 철학이다. 서양이나 중국처럼 특별한 문명권을 형성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주변부의 사람들에게도 삶의 양식이나 삶의 전략이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철학이란 ‘생명행태’의 한 가지일 뿐이다.

기존의 ‘철학’이라는 틀을 빌리지 않고 철학사에서 잊혀진 이들의 세계관, 가치관, 삶의 양식 등을 그대로 반영하려다 보니 글쓰기 방식도 기존의 방식과 달라졌다. 일반적인 논문 형식의 글이 있는가 하면 두 세 줄로 된 짧은 사유의 흔적도 있고, 그저 단어들의 나열로 된 글도 있다.

기존의 철학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유사한 특징을 개념화하고 분류하는 방식을 취하는 데 반해, 박 교수는 각각의 생명들이 그때그때 부딪히는 상황에서 자연에 반응하는 구체성을 잡아내는 방식을 취한다. 이로 인해 그의 글은 일관된 논리적 ‘체계’에 익숙한 사람들로서는 접근이 쉽지 않지만, 철학사에 대한 ‘학습’이 아닌 구체적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 동참하는 기쁨을 준다.

“진리를 찾아 광야를 헤매는 자는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라는 이 책의 한 구절처럼 박 교수는 이 책을 통해 다음 세대의 철학도들과 함께 진리를 찾아가기 위한 토론의 장을 마련해놓고 있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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