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간]전우치는 살아있다

  • 입력 2001년 2월 9일 18시 42분


◇엄광용 지음/296쪽 7000원/ 문확과지성사

엄광용(47)의 첫 창작 소설집. 표제작을 비롯해 ‘잠자는 숲속의 미녀’ ‘비수와 산금’ 등 7편의 단편이 실렸다.

처음 실린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응축한 작품이다. 광화문 공원 벤치에서 흰 드레스를 입고 누워있는 여인을 필름 없는 카메라로 찍는 사진작가와 ‘금오신화’가 가짜라는 믿음으로 작품을 구상 중인 소설가인 ‘나’의 우연한 만남. 숲속의 미녀의 미망을 좇던 소설가는 홀연 잠적해버린 사진작가가 광주항쟁의 악몽에 시달려왔음을 깨닫게 된다.

작가의 관심은 진실한 삶을 방해하는 현실에 다양하게 적응하는 방식에 머물고 있다. 그 현실은 곧잘 ‘벽’이란 상징으로 구체화된다. 때로는 ‘불신의 벽’이나 ‘현대라는 시간에 매달려 살고 있는 절망의 벽’ 같은 직유로, 혹은 ‘무수한 사람의 얼굴’이나 ‘어둠 속의 음모’같은 은유로.

‘절망의 벽’ 같은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순진하게 보일만큼 긍정적이다.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사랑의 힘 밖에 없다’는 믿음(‘베를린 장벽의 눈물’)이나, 설화 속 인간의 부활을 믿는 외침(‘전우치는 살아있다’)이 희망의 방향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벽’을 무너뜨릴 망치나, 뛰어넘을 사다리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현실을 뒤집으면 바로 환각이 된다’는 깨우침이 있지만 결국 ‘변한 것은 없었다’(‘잠자는…’)는 결론은 그래서 공허하다.

평론가 이경호는 “작가가 불신이나 절망같은 상투화된 상징성을 벗어나 ‘벽’의 새로운 정체를 치밀하게 탐구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지적한다.

작가는 “처음에 나는 감히 소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에 와선 나는 소설로 나를 바꾸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록작 면면을 보면 그가 질 줄 알면서 싸워야할 때가 있음을 외면하지 않고 있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이같은 문제의식이 ‘벽’을 우회해 곧장 낭만적 사랑으로 달려가는 다른 소설가들과 그를 구분짓고 있다. 비록 깨지더라도 현실과 우직하게 맞서려는 그의 자세가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든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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