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현의 바둑세상만사]조치훈이 새삼스레 위대한 이유

  • 입력 2000년 12월 4일 12시 36분


잉창치배 결승 1,2국에서 이창호 9단이 중국의 창 하호 9단을 연거푸 이겼다. 이제 남은 3대국 중 한판만 이기면 이창호 9단이 우승을 차지한다. 그렇게 되면 네 번 열린 이 세계 대회에서 한국의 정상급 기사 네 명이 번갈아가며 우승을 차지하는 멋진 쾌거를 이루게 된다.

지금은 한국 바둑이 세계정상에 올라 큰소리치는 시절이지만 따지고보면 그 기폭제는 제1회 잉창치배 대회에서 조훈현 9단이 네 웨이핑 9단을 물리치고 우승하면서였다. 이 대회를 창설한 잉창치씨는 당시 발군의 실력을 보이던 중국의 네 웨이핑 9단이 우승할거란 믿음이 있었고, 세계바둑의 종주국임을 자랑하던 일본도 자기들의 우승을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겨우 본선 티켓 한 장을 배정할 정도로 푸대접했던 한국기사 조훈현의 우승이었다. 이때만 해도 조훈현 9단의 기재가 워낙 출중하므로 그려려니 했지만 2회, 3회 대회에서도 서봉수,유창혁 9단이 정상에 오르면서 한국바둑의 실력이 세계 최고에 올라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이창호 9단이 우승을 눈 앞에 둔 잉창치배는 한국바둑이 세계정상으로 도약하게 도와준, 또 세계정상임을 확인시켜준 우리로서는 아주 고마운 대회이다.

잉창치배라는 세계대회가 열리기 이전까지는 일본이 세계 바둑의 최선진국이었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누구나 일본 기사들의 기보를 연구했고, 신수 신형도 거의가 일본에서 만들어지면 하루가 멀다하고 이 땅에서 유행하곤 했다. 바둑으로 대성하겠다는 사람은 으레 일본 유학을 꿈꾸었다. 그 시절 한국바둑계의 희망이 조치훈 9단이었음은 너무 당연했다.

어린 나이 6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진(名人)이 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던 소년. 그가 24살이 되던 1980년 11월 6일 드디어 메이진 타이틀을 따냈을 때 한국바둑계는 열광했다. 아니 한국이 열광했다.

조치훈은 이후 일본의 내로라하는 바둑 타이틀을 하나씩 점령해 갔다. 대삼관(大三冠)이라는 일본의 3대 빅 타이틀을 차지했고, 교통사고를 당해 휠체어에 탄 채 기세이전 방어전을 치러 바둑을 대하는 그의 진지한 자세로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불의의 교통사고 이후 한때 정상에서 물러나는가 싶던 조치훈 9단은 다시 재기에 성공한다.그러나 단순한 재기가 아니었다. 2차 대삼관 달성, 일본서 가장 오래된 기전인 혼인보전의 10연패란 신기록 달성. 그의 재기는 장기집권의 서곡이었다.

한국바둑이 아직 세계변방에서 서성거리던 시절 조치훈 9단이 있었기에 한국 바둑계는 위안받았다. 일본의 최고수가 한국인이라는 사실, 또 그랬기에 우리바둑의 발전을 위해 더 절치부심했는지도 모른다.

한국바둑이 세계바둑의 흐름을 좌우하는 지금, 조치훈 9단은 마지막으로 지니고 있던 메이진 타이틀을 요다 노리모토 9단에게 내주고 무관으로 돌아갔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조치훈 왕국의 장기집권이 일본에서 막을 내렸다. 그가 다시 정상으로 재 등극 할 수 있을 것인지? 아마도 한두개 타이틀은 다시 획득 할 수 있겠지만 과거와 같은 일인지배는 이제 힘들 것이라는 예측들을 하고 있다. 조치훈 9단. 그 이름이 지니는 상징적인 의미도 한국바둑이 세계정상에 오른 이후 예전과 같지 않다. 이제 그의 시대는 지나갔다.

한 시대가 지나가고 한 바둑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가 전성기 때 보여준 치열한 바둑수는 기보로 고스란히 남아 바둑팬들 옆에 영원히 함께 한다. 그 바둑을 동시대에 같이 즐기며 함께 기뻐하고 안타워하기도 했던 우리 세대는 그런 면에서 행복한 세대라는 생각을 해본다.

김대현 <영화평론가·아마5단>momi21@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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