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비트…구속없는 음악세계 '테크노 열풍'

  • 입력 1999년 8월 31일 18시 59분


멜로디와 가사는 전혀 없고 오직 강렬한 비트만이 반복되는 테크노 음악과 몽롱함을 더하는 초록색 조명 속에서 20,30대 젊은이 30여명이 몸을 흔들고 있었다.

8월27일 밤11시23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테크노클럽 ‘Devil Eyes’.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도리도리 춤’도 간혹 보이지만 대부분 박자만 맞춘 채 일정한 형식없이 몸을 흔들고 있었다. 복장도 사이버 풍의 ‘빤짝이 옷’부터 정장 군복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날 김모씨(S그룹 직원·28)는 “구속이 없는 것이 테크노의 장점”이라며 힙합부터 디스코까지 맘껏 춤을 췄다.

‘테크노(Techno) 음악’이 세계를 휩쓸고 있다. 갖가지 전자음악 장비와 전기적 테크닉을 활용하는 테크노음악은 음악적 바탕을 첨단 테크놀로지에 둬 젊은 취향에 맞는 탓인지 사이버 세대에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현상과 징후

테크노 음악은 70년대 크라프트베르크 등이 개척한 독일초기 전자음악인 ‘크라우트 록’에서 출발해 80년대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자리를 잡았다. 최근 영국 그룹 ‘프로디지’ ‘케미컬 브라더스’ 등이 세계적 스타로 부상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우리나라에는 올해 본격 등장했지만 몇 년 전부터 대부분의 장르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쳐 왔다. 전문 테크노뮤지션도 생겨났다. 지난해부터 서울 홍익대 인근의 언더그라운드 클럽에서 활동하면서 최초의 본격 테크노앨범 ‘휘파람 별’을 낸 강기영(DJ명 달파란)이 대표적. 최근에는 후배 DJ들인 세인트바이너리 모하비 등이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올초부터 제도권 가수들도 부분적으로나마 테크노를 시도했다. 올초 영국에서 귀국해 프로젝트그룹 ‘모노크롬’을 결성한 신해철은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음악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수단”이라며 테크노음악을 들고 나왔다. 최근에는 최창민 ‘한스밴드’ 등 10대 댄스가수들도 어떤 형태로든 테크노 색깔을 낼 정도다.

패션에서도 금속 소재의 ‘테크노 룩’이 유행이다. ‘질 샌더’ 등 세계적인 패션브랜드도 이러한 테크노적 감성을 적극 수용하고 있다. 영화 ‘매트릭스’ 등도 테크노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

마니아는 물론 일반팬도 ‘가장 테크노적인 현상’으로 꼽는 것은 테크노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새벽까지 춤추고 노는 ‘레이브 파티’. 서울 홍익대 앞 ‘nbinb’ ‘MI’, 압구정동 ‘Devil Eyes’ ‘앱솔루트’ ‘타임 투 록’ 등이 레이브 파티가 자주 열리는 대표적인 테크노 클럽들이다.

▼음악적 특징

컴퓨터를 비롯한 각종 전자장비를 이용해 만들어내는 ‘비트’의 음악. 즉 멜로디와 가사를 최대한 절제하고 음을 컴퓨터로 잘개 쪼개 반복하는 ‘반복성’이 핵심이다. 또 이를 이용해 음악을 무한정 변주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 이를 위해 △음악을 디지털로 바꿔 필요한 마디로 분절한 뒤 이를 키보드로 연주(샘플링)하거나 △턴테이블을 손으로 돌리면서 음악을 변조(디제잉)하기도 하고 △컴퓨터를 통해 음을 만들고 배치하는 작업(미디)도 한다.

▼‘세기말&새밀레니엄’음악?

테크노가 록이나 힙합 등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음악 자체에 ‘정신’이나 ‘이즘(ism)’이 없다는 것. 흑인의 애환을 랩으로 푸는 힙합이나 억눌린 젊음을 발산하는 록과 달리 테크노는 지금까지 컴퓨터를 이용한 기술적 개량이 용이하다는 이유로 하위 장르(애시드하우스 앰비언트 인더스트얼 트립합 등)를 양산하는 데만 주력해왔다.

혼성모방을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상징적 음악인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진공상태를 드러낸다. 세기말의 성격을 그대로 안고 있는 셈. 패션과 영화 등에서 테크노적 양식을 취할 수 있는 것도 테크노의 이런 특성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다.

대중음악평론가 신현준씨는 “‘정신’대신 그 공간에 무한한 음악적 변용을 담을 수 있는 다양성이 주도적 이데올로기가 없는 세기말의 시대적 정서와 들어 맞는다”고 분석한다.

2000여명이 회원인 PC통신 하이텔 테크노동호회 ‘21세기 그루브’는 PC통신 동호회로는 최초로 7일 회원들이 직접 만든 테크노 컨필레이션 앨범(여러 뮤지션들의 혼합 앨범)인 ‘테크노@kr’을 발매한다. 이은석(28) 대표운영자는 “테크노는 그 다양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입맛’에 맞게 즐기고 만들 수 있는 ‘민주적’ 음악”이라고 평한다.

〈이승헌기자〉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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