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파업]「시민의 발」을 투쟁도구로 삼다니…

  • 입력 1999년 4월 19일 19시 19분


“원칙적으로 노조의 파업권을 존중하고 싶고 당장 출퇴근때 겪는 불편도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막대한 국민의 혈세를 지원받는 공기업 노조가 자신들만 ‘구조조정의 무풍지대’로 남겠다며 파업을 벌인 ‘몰염치함’에 분통이 터집니다.”(회사원 정상근씨·35·서울 구로구 고척동)

서울지하철 1∼4호선 운영을 맡고 있는 서울지하철공사 노조가 19일 파업에 돌입하자 ‘명분없는 파업’이라는 시민들의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지하철노조의 파업은 해마다 고질병처럼 되풀이돼온 일이지만 올해는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의 시각이 예년과 사뭇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실업과 임금삭감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지하철노조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파업을 벌였다는 점에서 시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노조측은 올 단체교섭의 핵심 쟁점인 구조조정에 대해 시종일관 ‘백지화’를 요구하며 실무 논의조차 거부했다. 이에 대해 시민들은 “지하철공사의 구조조정은 반드시 필요한 것 아니냐”는 반응이다.

시정개발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지하철공사는 매년 2천5백억원의 국민세금을 무상 지원받고 있는 적자투성이 공기업”이라며 “경영과 인력구조 전반에 걸쳐 개선해야 할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하철 경영의 효율성을 나타내는 1㎞당 운영인력을 보면 지하철공사는 85명으로 5∼8호선을 운영하는 도시철도공사(55명)는 물론 영국 런던지하철(46명), 일본 도쿄지하철(66명)보다 훨씬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조는 파업 이틀전까지도 “공기업인 우리가 실업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근로시간을 4시간 줄여 1천4백2명을 증원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언뜻 보면 유럽식 ‘일자리 공유제’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론 “임금은 줄이지 말고 근로시간만 줄이자”는 주장이다. 자신들은 전혀 손해를 안보고 시민세금을 더 많이 받아 인력을 늘리자는 것.

이번 파업이 민주노총과 정부간의 대리전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데 대해 시민들 사이에선 “노동계가 ‘시민의 발’을 대정부 투쟁의 발판으로 삼는 건 옳지 못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공기업인 H사에 근무하는 권영진씨(43·경기 고양시 일산구 장항동)는 “지하철노조가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을 저지하는 선봉대가 되겠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다른 공기업 근로자들은 구조조정을 다 겪고 민간기업에서도 수백만명의 실직자가 쏟아졌는데 뭘 앞장서서 막겠다는 거냐”며 “노조가 조합원의 권익을 지키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명분으로 사회적 대의(大義)를 내세우는 것은 역겹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이철수(李哲洙·노동법)교수는 “서울시 등 당국은 노조와의 대화에 성의를 갖고 적극적으로 나서되 사회정의와 형평성의 원칙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기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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