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동화 당선작]김정옥의「삼색 나비 목걸이」

  • 입력 1998년 1월 9일 20시 16분


정원 어귀에 자리잡은 조그만 연못엔 잉어들이 손바닥만한 구름을 한입씩 베어 물고 있었다. 잉어들이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송이는 참 심심했다. 송이는 살그머니 할머니 작업실을 들여다보았다. 반쯤 열려 있는 문 사이로 꼿꼿하게 앉아 실을 꼬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송이는 살며시 할머니 곁에 앉아 까만 눈동자를 굴려 가며 찬찬히 바라보았다. “할머니, 색깔이 참 곱게 나왔네요. 난 이 색이 좋더라.” 할머니가 물들인 옥색 명주실을 보며 한마디 던졌으나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작업할 때는 말을 안하는 할머니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전통 매듭을 한다. 한 달이면 두 세번은 제자들이 찾아와 할머니에게 배워 가기도 한다. 제자들에게 매듭을 가르칠 때에는 가끔 화를 낼 때도 있지만, 요즘은 한번도 큰소리를 내는 일이 없었다. 할머니는 그것을 곧잘 나이 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렇지만 유난히 엄마한테만큼은 버럭버럭 화를 잘 내는 할머니가 송이는 은근히 미웠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매섭고 차가웠다. 송이는 실을 꼬고 있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송이야, 재미있어 보이니? 할머니가 매듭 가르쳐 주랴?” 할머니는 송이를 바라보며 은은하게 말했다. “할머니, 정말이에요? 와! 신난다. 정말이죠?” “그렇게도 좋으냐? 이리 가까이 앉아 봐라. 자, 이 끈이면 좋겠구나. 끈을 손에 대기 전에 매듭이란, 끈과 끈이 만나 어우러져야 아름다운 작품이 된단다.” 송이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할머니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말끔히 닦인 유리장 속에는 갖가지 모양의 주머니, 노리개, 안경집 등 옛날 궁중에서 쓰던 모양의 작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할머니, 이 붓주머니 참 곱다. 그런데 이건 뭐예요?” 송이는 유리장 속의 자주색 주머니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건 자색 향낭이란다. 옛날에 공주들이 지녔던 향 주머니지.” 송이는 그 작품들과 친구가 된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송이야, 매듭은 코, 몸, 손으로 구분한다. 코는 이렇게 잡고 돌리면서 자… 한 번 해봐.” “할머니, 이거 맞아요?” “음, 그래. 그런데 끈이 이렇게 꼬이면 미워지지.” “그럼, 다시 이런 식으로 돌리면 되지요?” 여러 번 반복하는 동안 송이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배어 나왔다. 송이의 야물게 다문 입과 진지한 표정을 본 할머니는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송이의 조그만 손가락의 움직임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송이는 신기하게도 왼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할머니도 유독 매듭을 할 때만큼은 왼손을 써 왔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너무나 놀라워 송이에게 대뜸 물었다. “송이야, 보통 때 무슨 손을 많이 쓰니?” “네? 할머니, 이 손이요.” 송이는 대번에 오른손을 내어 보였다. “아니, 그런데 지금은 왜 왼손을 쓰는 거냐?” “어? 나도 모르게 왼손을 쓰고 있네.” 송이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하였지만 할머니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아이가, 나를 닮았다니….’ 할머니는 계속 혼자말을 하였다. 송이는 할머니가 가르쳐 준대로 코를 만들면서 활짝 웃었다. “할머니, 이것 보세요. 잘했지요? 이렇게 재미있는데 엄마는 왜 가르치다 말았어요? 계속했으면 엄마도 지금쯤 잘할텐데.” “네, 어미는 안되겠더라.” 갑자기 뽀로통해진 송이는 잡고 있는 실을 놓칠세라 손가락에 힘을 주며 볼멘 소리로 말했다. “할머니가 제자들 가르칠 때처럼 잘 가르쳐 주면 되잖아. 괜히 엄마한테는 화만 내고선. 할머닌 왜 엄마만 미워하는 거야!” 한참 동안 말이 없던 할머니는 송이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아비와 어미는 어울리지 않는 끈이 만난 거야. 휴….” “할머니 무슨 말이야? 왜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송이는 따지듯이 물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한참 후 눈을 뜬 할머니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아들이라도 하나 낳았더라면. 그 흔한 사내 녀석 하나 못 낳고 말이야.” 할머니의 눈빛은 뭔지 모를 아픔이 잔물결치고 있었다. “할머니, 송이가 있는데도 손자가 필요해요? 피, 그럼 난 뭐야?” 송이는 눈꼬리를 추켜세우며 말했다. 그런데 그 순간 할머니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 할머니, 할머니 왜 그러세요?” “괜―찮아. 조금 있으면….” 할머니의 힘겹고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송이는 급하게 엄마를 찾았다. “엄마, 엄마 큰일났어. 할머니가 갑자기 이상해.” 엄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바쁘게 뛰었다. “어머님, 어머님 어디 편찮으세요?” 떨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방안 가득 번졌다. “괜찮다. 왜 이리 소란을 피우나? 나가서 일이나 봐.” 할머니는 매정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할머니는 그 후에도 몇 번의 가슴앓이가 있었으나 틈나는 대로 송이에게 매듭을 가르쳐 주었다. 송이는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잘 돌려댔다. 손가락에 송곳을 끼워 힘있게 잡아당길 줄도 알았다. 어느 날 할머니는 심한 통증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할머니는 웃음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누워만 있었다. 송이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도 할머니는 몇 번 고개만 끄덕였을 뿐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할머니가 갑자기 송이를 불렀다. “송이야, 내일 병원에 올 때는 매듭 바구니 가지고 오렴. 이 할미하고 다시 시작하자!” 할머니의 눈망울엔 갑자기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강한 빛이 솟았다. 송이는 잠자리 매듭도 만들었고 국화 매듭, 매화 매듭, 하기 힘들다는 벌매듭도 완성했다. “할머니, 천천히 가르쳐 주세요.” “이 할미가 송이한테 가르쳐 줄 게 아직 많구나.” ‘내가 이렇게 마음이 바쁘면 안되지.’ 혼자 중얼거리는 할머니는 송이에게 매듭을 가르쳐 주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아 편안했다. 송이의 종알거림이 허전한 마음을 달래 주고, 서글픔도 이기게 해 주었다. 날이 갈수록 할머니는 눈시울을 적시는 일이 자주 생겼다. 엄마가 곁에 앉아 있기만 해도, 또 숟가락에 밥을 떠서 할머니 입에 가져갈 때도 할머니는 아무 말없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할머니, 울지마. 할머니 우는 거 정말 싫어.” “그래. 송이는 할미에게 귀한 선물을 주었구나.” “선물이요?” “송이는 이 할미에게 평온한 마음을 선물로 주었지.” ‘피, 난 또.’ 가볍게 코방귀를 뀐 송이는 여러 색의 끈을 만지작거리며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제가 목걸이 만들어 진짜 선물 드릴 게요. 이 분홍색 끈은 할머니고요, 이 연두색 끈은 엄마고요, 이 노란색 끈은 저예요. 아셨죠.”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할머니는 눈이 동그래졌다. 송이는 끈을 한 번 돌릴 때마다 할머니와 송이를 엮어서 맺고, 또 엄마와 할머니를 엮어서 맺고, 그리고 송이와 엄마를 엮어 맺으면서 나비를 만들고 있었다. “할머니가 엄마를 업어 주는 거예요. 그리고 엄마는 할머니를 업어 드리고, 마지막엔 내가 엄마를 업어 주고. 자, 어때요?” “어디 보자, 정말 기가 막히구나. 어떻게 세 가지 끈으로 이럴 수가?” “할머니, 제법 잘하지요?” 송이는 입을 샐룩거리며 우쭐거렸다. “어디, 이 할미가 네 엄마를 업어 주었구나. 네 엄만 평생…” “이번엔 엄마가 할머니를 안으실 차례예요. 자 보세요. 맞지요?” “그래. 네 엄마가 나를 안아 주니까 참 편하다. 점점 고운 나비가 되어 가는구나.” 송이는 끈의 결이 꼬이지 않게 차근차근 고르게 조이면서 매듭을 맺어 갔다. 이윽고 나비매듭을 마친 후, 할머니 목 둘레에 맞게 길이를 재어 남기고 양 끝엔 조그만 방울 매듭을 하여 끝맺음을 하였다.“할머니, 나비가 나는 것 보세요.” 송이는 나비 목걸이를 이리저리 흔들어 나는 시늉을 해 보이다가 할머니 목에 걸었다. 할머니는 송이의 왼손가락을 만지며 눈물을 글썽이었다. 할머니의 가슴에는 늘 나비가 찰랑거렸다. 그러나 할머니는 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하고 열흘이 못되어 엄마 품에 안겨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감고 말았다. 할머니의 두 손엔 목걸이가 꼬옥 쥐어 있었다. 햇빛이 가만히 내려앉은 언덕 할머니의 무덤 가엔 작달막한 키의 노란 민들레와 보랏빛 엉겅퀴가 다복했다. 그 노란 민들레 위로 삼색 나비가 나폴 거리며 날아갔다. 송이는 다시는 슬프지 않았다. <김정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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