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나를…」의 인간군상,세월의 덧없음 웅변

  • 입력 1997년 10월 7일 07시 56분


▼ 「사랑이 나를 만질때」 강규 지음/문학동네 펴냄 강규라는 소설가를 들어 보셨는지…. 30대에 인생을 다 알아버린, 또는 잘못 알아버린, 그런 소설을 쓰는 작가. 그의 첫 창작집 「사랑이 나를 만질 때」(문학동네)는 인생을 다 살아버린 노인네 같은 추억과 회상 속에 잠겨 있다. 「세상은 저마다 소멸의 사막을 건너가는 것」이라는, 세월의 덧없음에 대한 고단함이, 나른한 피로감이 묻어난다. 『나이 서른을 넘어서면서 어느날 홀연히 깨달음을 얻듯, 「환멸」을 체험했어요. 20대의 환(幻)이 멸(滅)하는…. 그렇지만 나에게 20대는 너무 지독하게 앓아서, 너무 오래 머물러 있어서, 일시에 떨쳐버릴 수 없는 그런 어떤 거예요』 말하자면 이 소설은 30대에 씌어진 20대의 결별사랄까, 그 시절의 환에 대한 기록인 셈. 『20대엔 내용물을 알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쩔쩔맸던 것 같아요. 이성과 합리의 저 건너편에 있어서 도저히 움켜질 수 없는 불확실성에 압도당했다고나 할까. 정말 뜨거운 사막을 지나는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내열(內熱)에 부대꼈어요』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죽음과 소멸이라는 「시간의 벽」에 갇혀, 사막의 모래알처럼 건조한 삶을 이어간다. 이들은 영원을 꿈꾸지만 이런 희망과 기원은 시간의 무게에 눌려 모래언덕처럼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전혀 현실감 없이 환영처럼 떠도는 사람들. 이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내부에서 자라는 소멸과 죽음의 징후처럼 영원한 것은 없다」고 되뇐다. 『20대의 통관절차를 거친 지금,삶이 한결 간결해지고 가뿐해졌어요. 국경을 넘어설 때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듯 시야가 확 트였달까. 맨 앞에 실린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는 말하자면, 앞으로 이렇게 쓰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에요』 「봄비…」는 유일하게 지금, 여기의 「저자거리」를 담고 있다. 사납금을 채우기 위해 이를 악무는 택시운전사, 실연한 화장품회사의 영업과장, 변두리 레코드가게의 여주인, 음악학원 옥상에서 기타를 치는 삼류악사 등등. 『이 나이에 감히 말씀드리자면, 이제는 사는데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어요. 땅에 발을 내딛고 있다는 구체적인 실감도 있구요. 일상의 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눈물 젖은 빵」에 뺨을 부빌 생각입니다. 엄살부리지 않고 전투적으로, 맹렬하게…』 〈이기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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