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고싶다]신상환/인도,가슴사랑 깨우쳐준 땅

  • 입력 1997년 10월 2일 07시 28분


인도는 내 마음을 위로해 준 곳이다. 법현 현장 혜초같은 구도승과 사막을 가로지르던 캐러밴들의 뒤를 좇아 도착한 인도에서 마음 속에 담고 있던 『무엇을 할 것인가』란 화두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80년대 그 질풍 노도의 시대 저마다의 몫으로 고통받고 신음하고 거리로 나섰던 때,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어쩌다」 대학 총학생회장이 되었고 「다시 어쩌다」 실형 2년을 선고받아 복역하기도 했다. 그러다 졸업후 「무얼 어쩔지 몰라」 3일만에 배낭을 꾸렸다. 한 시대의 결절점이 지나자 가슴속에 품고 있던 자유 평등 박애나 자주 민주 통일 등의 시대적 이상을 뒤로 하고 한국을 「도망쳤다」. 그래서 사막을 가로질러 인도에 도착했고 삶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도에서 위로받았다. 인도사람들이 모두 성자는 아니다. 그러나 앙상한 손을 내미는 꼬마거지의 투명한 눈이나 낡은 옷가지를 걸친 거지의 체념한 눈을 보면서 내 가슴속에 묻어 있었던 「형이상학」이란 게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갠지스강 화장터에서, 라닥의 고원에서, 얼굴에 맺힌 소금을 털어내며 자전거를 타던 남인도에서, 눈 앞에 펼쳐지는 이국의 경외감과 육체적 한계속에서 우리 세대가 외쳤던 민주주의란 결국 다같이 잘 먹고 잘 살자고 한 일이었음을 되뇌었다. 되돌아 보건대 나는 나의 머리를 사랑했지 가슴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그게 인도가 내려준 답이었다. 누구나 분노했던 「80년 광주」. 그러나 나는 서툰 혁명가의 어쭙잖은 흉내는 내었을지 몰라도 「나의 인생」을 걸기에는 저열(低熱)한 분노의 몸짓을 했을 따름이었다. 혁명이 간단한 「티 파티(tea party)」가 아닌 줄 알게 해 준 인도에서 그림공부하는 예쁜 일본 처녀를 만나 결혼까지 해 이 곳 산티니케탄에 자리를 잡았다. 신상환(인도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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