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누룽지

  • 입력 1996년 12월 25일 20시 19분


요즘처럼 쌀쌀한 날씨면 왠지 마음까지 추워지는 듯하다. 회색빛 하늘아래 뿌연 도시속에서 문명은 발전하는 모양이나 반대로 점점 사라져가는 것들도 있다. 정이 대표적인 것 같다. 얼마전 반찬거리를 사기위해 집 근처 대형 슈퍼마켓에 갔을 때였다. 배추 콩나물 두부 등 반찬거리를 고르며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바로 다름아닌 포장 누룽지였다. 그것을 본 순간 허탈감에 빠져드는 건 무슨 이유였을까. 요즘 집에서 누룽지를 눌려 먹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전자밥통이 등장하면서 누룽지의 모습은 사라졌고 보리차나 생수가 숭늉을 대신하여 가족들의 식수로 자리잡고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가마솥에 불을 지펴 밥을 짓고 어김없이 긁어주시던 누룽지가 생각난다. 어렸을 적엔 그것이 너무 고소하고 맛있어 밥도 먹지않고 누룽지 긁어 주길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아버지 밥상엔 항상 맨 나중에 누룽지를 끓인 구수한 숭늉이 올려지고 아버지는 그것을 다 마시고 나서야 『아, 잘먹었다』하시며 밥상을 물리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기억속에 누룽지는 이렇듯 따스하고 정이 넘치는 추억과 함께 간직돼 있다. 그런데 슈퍼에서 상품으로 포장된 누룽지를 보면서는 그런 추억과 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속에서 완전히 잊혀지지 않고 이렇게 남았다는 것이 고맙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산업이 급속히 성장하고 정보가 넘치는 정보화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나 치열한 경쟁속에 사는 직장인들, 전자제품의 편리함속에 사는 주부들에게 누룽지를 그리워 할 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날 저녁 처음으로 돌솥에 밥을 지어 식탁에 올려 보았다. 남편은 밥맛이 더 쫄깃하고 감칠 맛이 난다며 맛있게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이어서 구수한 숭늉을 내놓자 너무도 반가워하며 한사발을 다 마셔치웠다. 『아 정말 잘 먹었어』하며 만족해 하는 남편을 보며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행복감에 젖었다. 한 해가 저무는 요즘 가슴이 시린 사람이 있다면 누룽지로 끓인 구수한 숭늉 한 그릇을 마셔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 미 라(경기 용인시 역북동 414의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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