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야의 세상읽기]『늙거든 두고보자』

  • 입력 1996년 11월 15일 20시 42분


『우리 영감, 정년퇴직하고 집에만 있으니 스트레스가 팍팍 쌓인다우』 『신랑이랑 같이 있으면 좋잖아요?』 『모르는 소리 마. 남편이라고 할말이 있어야 재미있지. 치다꺼리하기가 귀찮기만 한데 뭐』 며칠 전 산에서 만난 50대 후반의 아주머니는 정년퇴직한 남편을 둔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이 아주머니의 남편은 항상 집안일보다는 회사일이 우선이었던 일벌레였단다. 그래서 몇십년간 남편이 빠진 일상생활에 익숙하다보니 하루종일 같이 있는 요즈음이 아주 서먹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다고 한다. 같이 즐기는 취미도 한가지 없고 그동안 바깥일에 대해 물으면 『당신은 몰라도 돼』라는 퉁명스런 대답만 듣고 살았으니 갑작스레 대화다운 대화가 오고 갈 리가 없다. 그러니 아침마다 「저 양반, 오늘은 어디 안나가나」 은근히 바라게 되고 사소한 일에도 신경질이 난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일본에서는 정년퇴직후 이혼이 새로운 사회현상이란다. 수십년동안 살림 잘하고 별다른 불만없이 보였던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 정년퇴직과 함께 이혼을 요구하는 것이다. 부인들은 항상 바깥일로 바쁜 남편과 대화도 없이 속 썩으며 살면서도 아이들 때문에 그리고 경제적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남편의 무시와 무관심을 참아 왔지만 아이들도 품안을 떠나간 마당에 더이상은 참고 살지 않겠다는 거다. 게다가 남편 수중에 퇴직금이 있으니 위자료를 못받을 염려가 없어 이때가 이혼하기에 아주 적당한 시기라고 한다. 남은 인생이나마 혼자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희망에 덧붙여 「당신 늙어서 고생좀 해 보시지」라는 그동안의 소홀한 대우에 대한 보복심리까지 작용한 것이다. 이런 이혼의 두드러진 특징은 부인은 수년간 다각도로 준비한데 비해 남편은 이혼하자는 말이 나오는 날까지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있었다는 거다. 세월을 두고 누적된 대화의 부재가 이혼을 초래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던 남편으로서는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은 심정일 거다. 남자들에게 일과 친구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제일 소중한 부인에게는 이해해주겠지라고 믿고 늘 뒤로 미루며 정년 퇴직후 시간이 많을 때 잘해주면 된다는 생각은 위험천만이다. 요즘 흐르는 분위기로 봐서는 30, 40대때의 「평소점수」가 좋아야 말년에 부인에게 섭섭한 대접을 받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집 사람은 절대로 그럴리가 없다구요? 어제 산에서 만난 그 아주머니의 남편도 분명히 당신과 똑같은 생각을 했을텐데요.〈오지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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