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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6월 1일 2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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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가치나 인기도 주가에 비교되고 학교나 선생님이 교육의 공급자, 학생이 교육의 고객이나 소비자 같은, 상점의 주인과 손님을 가리키는 말로 지칭되고는 한다. 자칫 선생에게도 사도가 아닌 상도가 요구되는 세상이 오는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다.
▼˝깽판 ˝빠순이˝反사회적▼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이처럼 그 언어가 통용되는 사회의 의식구조를 드러내 준다. 그 사회에서 주로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그 사회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편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거울이다.
언어는 의식의 산물이지만 반대로 그 언어가 통용되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의식을 만들어주거나 강화시켜 주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한때 ‘가정파괴범’이라는 자극적 용어가 언론에 자주 오르면서 여성운동가들의 호된 비판을 받았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가정파괴범’이란 집안에 침입한 강도가 가정주부에게 성폭력까지 가한 경우의 범죄 행위를 일컫는 말로 범죄 후유증으로 가정이 파괴되는 사례가 있어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를 당한 가정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전제가 암암리에 내포되어 있어서 그런 아내를 버리지 않는 남편이 비정상으로 비치는 사회의식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말이었던 것이다.
“남북대화 하나만 성공하면 다 깽판 쳐도 괜찮다.” 최근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가 공식 석상에서 발언한 내용이다. “잘 쓰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 자네 창자를 뽑을 거야.”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가 97년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발언한 것으로 전해지는 말이다.
상상을 해 보자. 정치지도자 같은 공인들이 하는 말은 쉽게 미디어를 타고 만인의 주목 대상이 된다. 특히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말들은 모방의 대상이 되며 쉽사리 널리 퍼지게 된다.
그 결과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많은 국민이 이 같은 말들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된다면? 언어이론으로 풀어보면 그 사회는 폭력배적 사고가 만연하고 인간관계는 도살장 같은 살벌한 분위기가 될 것이다.
이것은 부질없는 상상이 아니다. 요새처럼 문제된 정치지도자들이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반성하기보다 과장법을 좀 쓴 것을 가지고 공연히 말꼬리 잡는다며 오히려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한 족히 우리의 현실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노 후보는 거친 어투 때문에 상대 당의 자질 시비에 자주 휘말린다. 나는 노 후보의 자질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의 선거운동 전략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는 얼마든지 고상하고 점잖은 말을 사용할 줄 안다. 보다 박력있고 화끈한 이미지를 만들고 그의 지지 기반이라고 생각하는 계층에서 정서적 친근감을 얻어내기 위한 전략적 이유로 그런 언어 행태를 보이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최근 이 후보는 ‘빠순이’ 발언으로 난처한 상황에 빠졌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은어를 써서 그들의 환심을 사보려고 했다가 실패한 경우다.
은어나 절제되지 않은 거칠고 단순하며 자극적인 말들은 그것을 즐겨 사용하는 집단이나 공동체의 정서적 결속과 유대감을 형성해 주는 효과가 있다. 다듬어지고 절제된 말이 갖지 못하는 힘이다. 그런 만큼 배타성도 강하다. 그 집단 밖의 사람들이 섣불리 사용하다가는 그 집단의 호응을 얻기보다 오히려 비웃음과 경계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집단으로부터는 암암리에 따돌림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잘못하면 하나를 얻는 대신 다른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만큼 함부로 사용할 것이 아니다.
▼절제된 용어 더 호소력▼
더구나 대통령후보는 다양한 취향과 성향의 국민을 상대로 한다. 어느 정도의 동질성을 지닌 지역사회 선거 후보와도 다르다. 국가 사회 같은 거대 집단을 상대할 때는 미지근해 보여도 다듬어지고 절제된 말이 지속적이고 폭넓은 호소력을 지닐 수 있게 된다.
대통령후보들은 후보 위치에서도 대통령다운 언행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과장법을 쓰거나 농담을 한다고 반사회적인 가치가 내포된 말들을 마구 써도 될 것인지, 과연 거친 말이 서민적이거나 박력있는 것이랄 수 있는지, 귀족 이미지에서의 탈피가 언행의 품격 절하에서 얻어질 수 있겠는지 숙고해 주기 바란다.
박명진 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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