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덕

김창덕 본부장

동아일보 산업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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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창덕 본부장입니다.

drake007@donga.com

취재분야

2026-04-13~2026-05-13
칼럼100%
  • [횡설수설/김창덕]‘반값’ 5세대 실손보험

    1998년 신세기통신의 ‘017 패밀리 무료요금제’는 나오자마자 메가 히트를 쳤다. ‘24시간 무료 통화’는 지갑이 가벼운 청년층에게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새벽 내내 잠들지 않는 연인이 속출하는가 하면, 얼굴을 맞댄 가족끼리도 “어차피 공짜”라며 전화기를 들기 일쑤였다. 급격히 늘어난 통화량에 회사는 설비 확충 속도를 맞추지 못했고, 이는 통화 품질 악화로 이어졌다. 신세기통신이 경영 악화를 이기지 못하고 2001년 SK텔레콤에 인수된 여러 요인 중 ‘무료요금제’는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같은 시기 금융업계에서도 예측 실패로 인한 애물단지가 탄생한다. 1999년 나온 1세대 실손보험이다. 가입자의 자기부담금은 아예 없거나 극히 소액이었고, 적용 범위는 한마디로 ‘안 되는 게 없는’ 정도였다. 경제학이나 수학 석박사가 즐비한 보험사들이 복잡한 수식을 바탕으로 설계한 이 상품은 ‘병원 쇼핑족’이란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 수익성이 곤두박질했다. 동네 정형외과는 도수 치료를 받으러 온 사람들의 ‘사랑방’이 됐고, 이들의 치료비는 모두 보험사에 청구됐다. ▷실손보험 정책은 이후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2009년 10∼20%의 자기부담금이 생긴 2세대, 2017년 도수 치료 등 일부 비급여 항목을 기본 보장에서 제외한 3세대, 2021년 비급여 항목 전체를 특약으로만 보장하는 4세대로 각각 진화했다. 세대 전환 기간도 10년→8년→4년으로 짧아졌다. 그런데 보험금 수령자들의 의료기관 이용 행태 역시 빠르게 적응했다. 1∼4세대 실손보험의 위험손해율은 110∼150%로, 보험사들은 여전히 고객들에게 받은 돈보다 더 많은 보험료를 내주고 있다. ▷다수 가입자들도 속이 쓰리긴 매한가지다. 작년 실손보험 가입자의 65%가 보험료를 내기만 했을 뿐 받은 적은 없다. 보험금 수령인 상위 10%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지급액 전체의 74%가 건네졌다. 다시 말해 고객 3분의 2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소수의 병원 비용을 대고 있다는 얘기다. 심지어 병원에 간 적도 없는데 보험료는 계속 올랐다. 이달 6일부터 나온 5세대가 비급여 항목이나 비중증 질환 치료 보장을 축소하고 자기부담금을 늘리게 된 배경이다. ▷과잉 진료나 의료 쇼핑을 제한하겠다는 목적 자체는 이번에도 달라진 게 없다. 눈에 띄는 건 1, 2세대 가입자들이 일부 보장을 빼거나 5세대로 갈아타면 30∼50% 보험료를 깎아주는 ‘반값’ 정책이다. 하지만 “이제 병원 자주 다닐 나이”라며 기존 계약을 고수하겠다는 초기 가입자들이 많다. 보험사와 병원 쇼핑족 간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은 어떤 결말로 향할까. 2010년대까지도 7만 명 이상이 이용하던 ‘017 무료통화’는 2G 서비스 종료로 ‘017’ 번호를 쓸 수 없게 된 2020년에야 완전히 종료됐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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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창덕]노동계 ‘치트키’ 된 노란봉투법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에서는 웰리브라는 회사가 사내 식당을 운영한다. 셔틀버스 운행과 일부 시설관리도 대신 맡고 있다. 이 회사는 20여 년 전 옛 대우조선해양 자회사로 설립됐지만 2017년 독립했다. 이후 영남권 대형마트와 군청 등 50여 곳으로 고객사를 확대해 연 매출 1200억 원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지난달 중순 경남지방노동위원회가 한화오션이 웰리브 노동조합과 교섭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사실상 한화오션을 웰리브 직원들의 ‘사용자’로 본 것이다. 아직 결정문 공개 전이어서 지노위 판단 근거를 알 수는 없지만,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사안임에는 분명하다. 자칫 수많은 기업, 기관, 학교 등이 외주 업체에 소속된 구내식당 종사자들과 무더기 교섭에 나서야 할 수도 있어서다. 흔히 ‘노란봉투법’이라 부르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 3조 개정안이 3월 시행된 후 산업 현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장면 중 하나다.이미 예고됐던 산업 현장의 혼란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우선 원청과 하청 노조 간 교섭 갈등은 시장경제를 지탱해 온 ‘계약’의 의미가 퇴색됐을 때 이미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아는 경제활동 대부분은 계약에 의해 움직인다. 자영업자가 가게 자리를 구할 때나 팔 물건을 사들일 때, 개인이 집을 사고팔 때나 보험 등의 금융 상품에 가입할 때 빠뜨려선 안 되는 게 계약서다. 서로의 약속을 법적 테두리 내로 끌고 와 보호하려는 장치다. 회사에 취직하면 ‘근로계약서’부터 쓰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나 노봉법에서는 근로계약을 맺지 않았더라도 특정 조건에 해당하면 회사를 ‘사용자’로 보고 교섭 의무를 부여한다. ‘근로 조건에 대하여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라는 조건에서 ‘실질적’이 뭔지, ‘구체적’이 뭔지 누구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하청 노조들이 교섭 요구부터 하고 보는 것이다. 노봉법 시행 한 달 만에 1011개 하청 노조가 372개 원청 사업장을 대상으로 교섭을 신청했다. ‘안 하는 게 손해’, ‘밑져도 본전’ 등의 인식이 퍼지면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중앙부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이 잇따라 사용자로 인정되자 정부도 화들짝 놀랐다. 이후 공공부문에 대해서만 법안 수정 가능성을 내비친 것은 한 편의 코미디 같다. “장관 나와라”는 안 되고, “회장 나와라”는 된다는 건가. 정규직 노조 역시 노봉법으로 파업에 나설 명분이 대폭 확대됐다. 1일 파업에 들어간 삼성바이오로직스 노조는 임금 인상안과 함께 기업 분할이나 인수합병(M&A) 등을 결정할 때 자신들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단체협약 개정안도 요구하고 있다. 핵심적인 경영 판단에 노조가 개입하겠다는 뜻인데, 노봉법이 사업 통폐합 등을 노동쟁의 대상에 포함시켰기에 가능한 일이다. 노동계로서는 안 통하는 곳이 없는 ‘치트키’ 하나를 확보한 셈이다.‘노사 갈등 유발법’ 오명 벗게 보완을 지난달 말 주한미국상공회의소가 낸 ‘2026 국내 경영환경 인사이트 리포트’를 보면 기업 71%가 “노동정책 및 노동시장 유연성”을 개혁 우선순위로 꼽고 있다. 보고서는 노봉법 영향에 대해 “분쟁 발생, 운영 차질, 복잡한 도급·하도급 구조 전반에 걸친 불확실성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이런 나라에 누가 아시아 지역본부를 설립하고, 새로운 설비 투자에 나서겠나. 국회도, 정부도 아직 늦지 않았다. ‘약자 보호’라는 법안의 취지를 지키고, ‘노사 갈등 유발법’이라는 오명을 벗으려면 지금이라도 보완하면 된다. 입법 시 혼란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현장의 아우성을 목격하고도 모르는 체하는 건 차원이 다른 직무유기다. 우리 당이 밀어붙인 법안이라고, 장관이 민노총 위원장 출신이라고 버틸 일이 아니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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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창덕]‘카지노 옆 교회’

    5월 초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열리는 버크셔해서웨이의 연례 주주총회는 전 세계 투자자들이 가장 기다리는 행사다. 그런데 올해는 그 열기가 조금 덜했다고 한다. 최고경영자(CEO)에서 물러난 워런 버핏이 무대에서 질문에 직접 답하는 대신 다른 주주들처럼 관중석에 앉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자본시장의 슈퍼스타는 대중의 기대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행사 후 CNBC와 가진 인터뷰에서 버핏은 특유의 비유법을 사용해 투자자들의 조급함에 일침을 가했다. ▷버핏에 따르면 현재 투자 시장은 “카지노 옆에 있는 교회”와 같다. 교회는 전통적인 가치 투자를, 카지노는 초단기 거래와 옵션 상품 등을 의미한다. “아직은 교회에 사람이 더 많지만, 지금만 보면 카지노가 지나치게 매력적”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는 “지금처럼 사람들의 도박 심리가 강한 때는 없었다”는 경고도 했다. 버핏의 투자 철학은 가치와 장기(長期)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런 그의 눈에 지금의 시장은 ‘투기’를 넘어선 ‘도박’에 가까워 보인다는 것이다. ▷버핏이 여전히 대주주인 버크셔는 현재 3970억 달러의 현금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사상 최대 수준이다. 불안정한 상황이 이어지자 ‘일단 기다리기’를 전략적으로 선택한 셈이다. 이는 “많은 성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고 했던 그의 예전 발언과도 맞닿아 있다. 인공지능(AI) 등 기술 기업 투자에 지나치게 신중한 버핏에 대해 지난 2, 3년간 다양한 비판이 나온 것도 사실이다. 기술주가 폭등한 뒤로는 ‘버핏의 판단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의구심도 확산했다. 하지만 버핏은 그런 평판에 흔들리지 않고 있다. 그레그 에이블 버크셔 신임 CEO 역시 버핏의 철학을 그대로 잇는 모습이다. ▷최근 상황만 보자면 한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불안정하다’는 평가를 받아도 이상할 게 없다. 작년 말 대비 올 4월 말 기준 주가 상승률은 코스피가 56.6%로 일본 닛케이(17.3%), 미국 나스닥(7.1%), 영국 FTSE100(4.6%) 등을 압도한다. 단기 급등이나 급락은 많은 투자자들의 이성을 흐리게 만든다. 한국 증시의 경우, 버핏 표현을 빌리자면 교회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가 그 옆 카지노로 새 버릴 가능성이 더 높다는 뜻이다. ▷‘빚투’는 그런 시장의 또 다른 뇌관이다. 신용거래융자 잔액이 지난달 29일 36조 원을 넘어섰는데, 이는 23일 35조 원을 돌파한 지 4거래일 만에 1조 원이 불어난 것이다. 현재 글로벌 금융시장은 단기 빚투를 하기엔 변수가 너무 많다. 버핏의 말이 귀에 더 선명하게 꽂히는 게 그래서다. 점심 식사 한 번 함께 하려면 수십억 원의 돈을 내야 하는, 괜히 ‘오마하의 현인’이란 별명이 붙은 게 아닌 투자업계의 전설이지 않나.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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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창덕]AI 자격증만 500종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유튜브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다양한 무료 강연이나, 유료 교육 프로그램 광고를 손쉽게 접한다. 최근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건 역시 인공지능(AI) 활용법이다. 3시간 강의를 들으면 남들만큼 챗GPT를 유려하게 활용할 수 있다, 이틀 교육 수료 후 AI 비즈니스 기회를 찾게 해 준다 등의 문구를 보면 클릭을 참기 힘들어진다. 취업 준비생부터 은퇴를 앞둔 직장인, 그리고 전업주부까지 수강생 면면도 다양하다. AI 시대에 나만 뒤처질까 두려워 모여든 이들인데, 정작 교육이 끝나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인 게 함정이다. ▷조급함이 가시지 않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기웃대는 다음 단계가 민간 자격증이다. 2000년대 들어 이력서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 자격증 중 컴퓨터활용능력을 빼놓을 수 없다. 심지어 엑셀을 잘 다룬다는 인증만 받아도 뿌듯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걸 기억하는 이들이 지금은 ‘AI 자격증’을 찾아보고 있다. 놀랍게도 한국직업능력연구원에 등록된 자격증 중 AI와 관련한, 정확히는 명칭에 ‘AI’가 들어가는 것이 500개가 넘는다. 대학, 온라인 교육기관, 협회, 민간 기업 등 등록기관도 다채롭다. ▷하지만 이 중에는 AI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아리송한 것들이 많다. ‘AI부동산권리분석가’, ‘AI탄소중립분석사’, ‘AI여행플래너’, ‘AI스포츠전문가’, ‘AI내부감사사’처럼 말이다. 각 직업군에 ‘AI’만 붙인 것과 무엇이 다른가 싶다. ‘활용능력’ ‘전문가’ 등 겹치는 용어를 피하다 보니 ‘AI조련사’라 이름 지은 것도 있다. 자격증을 등록한 기관도 AI 전문성과는 멀어 보이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500여 개 자격증 중 한 번이라도 검증 시험이 실시된 것은 50여 개뿐이고, 그마저도 절반 정도는 합격률이 100%였다. ▷‘자격 미달 자격증’ 문제가 AI에 국한된 건 아니다. 민간자격증은 운영 기관이 특별한 결격 사유를 갖지 않는 한 등록만 하면 된다. 2024년 말 기준으로 등록 민간자격증은 5만6000여 개에 달하는데, 이 중 국가공인을 받은 것은 96개에 불과했다. 국가공인 없이도 정상 운영되는 일부를 제외하면 사실상 ‘유령 자격증’이 수만 개에 이르는 셈이다. 한국소비자원이 조만간 AI 자격증 실태조사에 나서기로 한 건 해당 분야 등록 건수가 너무 빨리 늘어나 소비자 피해도 덩달아 커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민간자격증 비즈니스를 얘기할 때 흔히 ‘불안 마케팅’이라는 말을 쓰곤 한다. 취업이나 재취업 전선에서 아무런 무기를 갖지 못한 이들의 불안을 타깃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AI의 이름을 달고 우후죽순 나오고 있는 자격증들도 그런 심리를 파고들고 있다. 이러다 AI 자격증 분별 능력을 검증하는 자격증까지 나오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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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창덕]‘이주노동자 이름 부르기 운동’

    과거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상대방의 ‘이름’을 부를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상급자에게는 ‘부장’, ‘차장’ 같은 직급에 ‘님’자만 붙여서, 하급자에겐 ‘이 대리’, ‘김 과장’처럼 직급 앞에 성만 붙여 부르는 게 일상적이었다. 물론 ‘야’, ‘너’ 같은 한 글자만 입에 달고 사는 상관도 더러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수직적이고 경직된 문화를 바꾸려면 이런 호칭부터 손을 대야 한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스타트업들은 물론 일부 대기업에서도 ‘OO 님’, ‘OO 프로’처럼 모든 임직원이 직책과 직급을 빼고 서로 이름만 부르는 곳들이 많아졌다. ▷물론 이런 사회적 변화를 전혀 체감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은데, 이주노동자들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다. 누가 누군지 잘 구별하지 못해서, 이름을 기억하거나 발음하기 어려워서, 사고 위험 요소가 즐비한 현장에서 이름을 부를 여유가 없어서…. 이유는 다양한데 다 핑계일 뿐이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어이, 베트남’, ‘야, 미얀마’ 같은 방식으로 불리는 일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에어건 상해’나 ‘지게차 결박’ 사건 같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들이 그 일터와 동료, 그리고 한국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나. ▷한국은 이미 다민족 국가다. 국내에 상주하는 외국인, 귀화자, 다문화가정 자녀 등을 합한 ‘이주배경인구’는 2024년 272만 명으로 집계됐다. 인구 20명 중 1명은 해외에서 왔거나 부모 중 한 명이 외국인이라는 뜻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이주배경인구가 총인구의 5% 이상이면 ‘다문화·다인종 국가’로 분류하는데, 한국도 그 기준점을 넘어선 것이다. 하드웨어가 바뀐 만큼 그 안에 들어갈 소프트웨어도 바꿀 필요가 있는데, 아직은 걸음이 더딘 셈이다. ▷의미 있는 움직임들이 아예 멈춘 건 아니다. 노동자 권익을 높이는 사업들을 꾸준히 해온 4개 재단이 17일 고용노동부와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번 협약으로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사업을 추진할 예정인데, 핵심이 ‘이주노동자 이름 부르기 운동’이다. 이름이 새겨진 안전모 등을 개인에게 지급해 이주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보다 존중받도록 하겠다는 캠페인이다. 27일 울산에서 이번 협약에 따른 첫 안전모 전달식이 열릴 예정이다. 이주노동자들은 벌써 기대감에 차 있을 것 같다. ▷110만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인이 하기 힘든 ‘험한 일’을 맡는 대체 일꾼이 아니라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소중한 구성원이다.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는 대한민국의 국격을 얘기할 ‘스피커’가 되기도 한다. 이를 떠나 이름을 가진 이들에게 그 이름을 불러주는 건 당연한 것이지 베푸는 게 아니다. 또 성숙한 사회로 가는 시작이어야지 끝이 돼선 안 된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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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창덕]“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양 팀이 4 대 4로 팽팽히 맞선 8회말 투아웃 만루 상황. 홈팀 1번 타자의 방망이가 빠르게 돌았다. 타구는 가운데 담장 근처까지 쭉쭉 뻗어나갔다. 중견수가 몸을 던졌지만 공이 빠졌고, 타자는 그 틈을 노려 2루를 통과해 3루까지 내달렸다. 그만 뛰라는 주루코치의 만류도, 벤치에 있던 감독과 동료들의 안타까운 손짓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3루에 안착하고 나서야 그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팀을 위한 한 베이스 추가 진루를 위해 사이클링히트라는 개인 대기록을 포기한 순간이었다. ▷삼성 라이온즈 우익수 박승규 선수는 10일 NC 다이노스와 치른 그 경기가 작년 8월 부상 이후 8개월 만에 치르는 복귀전이었다. 첫 타석부터 3루타를 쳐낸 박승규는 다음 두 타석에서 단타와 홈런을 때려냈다. 네 번째 타석은 땅볼 아웃. 그리고 문제의 그 타석에서 2루타로 만족했더라면 단타-2루타-3루타-홈런을 한 경기에 모두 친 사이클링히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올해로 45년째인 한국프로야구에서 32번(30명)만 나온 기록을 포기한 것이다. 팀이 8 대 5로 승리한 뒤 박승규는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프로스포츠에서 선수의 기록은 곧 자신의 몸값을 의미한다. 한 타석, 한 타석의 결과가 모여 개인 기록이 만들어지고, 흔하지 않은 기록을 달성하면 스타성이 올라간다. 그러니 선수가 기록에 대한 욕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다. 박승규가 화제가 되는 것은 찰나의 고민도 없이 팀을 위한 선택을 내렸다는 점 때문이다. 스물여섯 박승규가 앞으로 어떤 기록을 쌓아갈지는 알 수 없지만, 2026년 4월 10일 8회말의 질주는 야구팬은 물론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기록’될 것 같다. ▷축구, 농구, 배구, 핸드볼 같은 다른 단체 종목들도 마찬가지로 ‘팀 퍼스트’ 정신이 강조된다. 2003년 “팀보다 큰 선수는 없다”며 최고 스타 데이비드 베컴을 스페인으로 이적시킨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당시 감독은 팀 우선주의를 가장 극단적으로 강조했던 인물이다. 물론 선수들도 이를 가장 큰 가치로 여긴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전성기 시절 팀 사정에 맞춰 벤치 멤버 역할을 흔쾌히 받아들였던 미국프로농구(NBA)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마누 지노빌리가 오래도록 사랑받은 게 그래서다. ▷가정과 직장에서도 개인과 단체의 이해관계는 늘 부딪치기 마련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개인의 희생을 ‘미덕’인 양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갈수록 옅어지는 것은 맞다. 그럼에도 다수를 위해 나를 버리는 모습은 여전히 큰 울림을 준다. 우리가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은 어쩌면 승패를 가리는 짜릿함만큼이나 ‘박승규의 질주’처럼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보여주는 낭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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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창덕]4달러 내면 30분 만에 나오는 AI 논문

    작년 2월 프랑스 파리에서 글로벌 인공지능(AI) 업계의 두 거물이 대담을 펼쳤다. 떠오르는 AI 강자 앤스로픽의 다리오 아모데이 최고경영자(CEO)와 2016년 이세돌과 세기의 바둑 대결을 벌인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 CEO였다. 사회자는 “마치 비틀스와 롤링스톤스의 대담 같다”고 표현했다. 비록 ‘홀대당한 억만장자들’이란 밈에 묻히긴 했어도, 두 사람이 AI의 미래에 대해 내놓은 예언은 섬뜩하리만치 파격적이었다. ▷아모데이는 노벨상 수상자와 비슷한 지능을 갖춘 AI 모델이 2026∼2027년 등장할 것으로 봤다. 상대적으로 신중론에 가까운 허사비스도 AI가 5년 내 새로운 과학적 이론을 창조하는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들은 올 1월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다시 만났는데, 작년의 예상이 여전히 유효하냐는 질문에 아무런 고민 없이 그렇다고 했다. 인류의 가장 창의적 영역 중 하나인 과학에서도 AI가 인간을 능가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다. ▷실제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딥마인드의 ‘알파폴드’는 신약 개발이나 식량 문제 해결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적인 생물학자, 화학자, 물리학자들이 수년에 걸쳐 입증해 온 일들의 수천 배, 수만 배를 뚝딱 해낸다. 2024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허사비스는 “1년 만에 박사 학위 소지자가 10억 년간 할 일을 해냈다”고 할 정도다. 구조생물학자들은 “알파폴드가 못 하는 복합단백질 구조 예측은 여전히 사람의 영역”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유효 기간도 그리 오래갈 것 같진 않다는 전망이 많다. ▷과학자들의 AI 의존도가 커지면서 논문의 ‘양’은 늘었는데 ‘질’은 떨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글로벌 논문 저장소 ‘아카이브(arXiv)’에 올라온 논문 수는 챗GPT가 등장한 2022년 18만 건에서 작년 28만 건으로 50% 이상 늘었다. 상당수가 품질 검증이 안 된 이른바 ‘AI 슬롭(slop·찌꺼기)’들이라고 한다. 논문 작성 AI 에이전트 ‘데나리오’는 4달러만 내면 30분 만에 논문 한 편을 완성해 준다. 이런 ‘논문 공장’ 논문들은 제대로 된 과학적 통찰이나 실험을 통한 검증이 없는 경우가 많아 지식 생태계를 혼탁하게 만든다. ▷과학자들의 언어는 논문이다. 한때 해괴한 상상이란 비판을 받았더라도 단 한 편의 논문만 제대로 발표하면 지구 반대편 석학들과 계급장 떼고 붙을 수 있는 게 과학계다. 공신력 있는 학술지에 반대 주장의 논문이 나란히 실리는 경우가 있는 것도 그래서다. 학계가 시끌벅적해져야 과학은 또 한 단계 발전했다. AI의 편리함에 ‘중독’된 과학계가 그런 야성을 서서히 잃어갈까 우려스럽다. 이러다 AI가 인간의 수준에 도달하기 전, 인간의 퇴행이 먼저 시작되는 걸 지켜보게 될 수도 있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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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창덕]최고 빌런 떠오른 네타냐후

    2023년 10월 오토바이와 낙하산, 보트로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는 한 인물에게만큼은 ‘구원자’에 가까웠다. 정치적 위기에 처해 있던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다. 전쟁이 나면 언제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이스라엘인들은 하마스 침공 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초강경 보수파인 네타냐후부터 찾았다. 그를 향한 반정부 시위도 멈췄다. 네타냐후는 “지금은 전쟁의 시간”이라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로 당당하게 진군했다. ▷그렇다고 하마스 전쟁 효과가 무제한일 수는 없었다. 뇌물수수, 사기, 배임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던 현직 총리 네타냐후는 일명 ‘사법부 무력화 법안’을 추진 중이었는데 2024년 1월 대법원에 제동이 걸렸다. 이듬해 3월에는 카타르로부터 홍보비 명목으로 6500만 달러를 받았다는 ‘카타르 게이트’까지 불거졌다.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네타냐후로서는 다시 한 번 터닝포인트가 필요했다. ▷다음 타깃은 이스라엘의 오랜 정적 이란이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네타냐후는 올 2월 11일 극비리에 백악관을 찾아가 이란 공격을 설득했다. 참모 대다수의 부정적 의견에도 트럼프 미 대통령은 그달 말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 제거 작전을 승인했다. 네타냐후로서는 이번 전쟁이 트럼프가 내려준 ‘동아줄’이나 다름없었다. 그에게 휴전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미국과 이란의 휴전 발표 하루 만에 레바논을 공습한 것은 전쟁을 포기할 수 없다는 네타냐후의 절박함으로 해석된다. ▷네타냐후는 1996년 첫 집권 이후 세 차례에 걸쳐 18년 이상 총리직을 수행해 왔다. ‘전쟁광’, ‘부패한 정치인’이란 논란에도 그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리더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랬던 그가 현재 처한 상황은 위태롭기 그지없다. 이란 체제 붕괴라는 시나리오가 ‘오판’으로 드러나면서 이스라엘 국민은 물론이고 해외 유대계의 지지도 바닥을 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전 세계 경제가 흔들린 뒤로는 네타냐후를 향한 비판이 사망한 하메네이와 그의 추종 세력을 겨냥한 것을 능가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레오폴도 갈티에리 군사 독재 정권은 경제난으로 정권이 붕괴 위기에 처하자 1982년 영국이 실효 지배하던 포클랜드제도를 침공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참패했고, 이는 정권이 무너지는 시간을 더 앞당겼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프랑스 나폴레옹 3세 역시 내부 불만을 밖으로 돌리려 프로이센과 전쟁을 일으켰다가 1870년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벼랑 끝에 내몰린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은 이렇듯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현 시점 ‘최고 빌런’ 중 하나로 꼽히는 네타냐후는 과연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그 책임은 또 누가 떠안게 될까.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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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전자 노조가 귀 닫은 세 가지 여론 [오늘과 내일/김창덕]

    한 기업의 노조도 ‘여론’을 잘 살펴야 한다. 첫째는 노조에 가입한 조합원이다. 지도부 선출권이 있는 노조원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건 당연하다. 둘째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비(非)노조원. 직장 동료긴 해도 노조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들을 설득해야 노조도 세를 불리고 협상력을 키운다. 셋째는 기업 밖의 시선이다. 노사 협상과 직접 관련이 없어도 외부 여론의 향방에 따라 노조는 때로 날개를 달기도 하지만, 반대로 고립된 섬이 되기도 한다. 최근 노사가 가장 치열하게 맞붙고 있는 곳 중 하나가 국내 1위 기업 삼성전자다. 지난달 27일 교섭 중단을 선언한 이 회사 노조는 다음 달 하순부터 총파업도 예고한 상태다. 그렇다면 삼성전자 노조는 세 여론에 얼마나 귀를 기울여 왔을까.메모리 사업부만 유리한 노조 요구안 삼성전자 노조를 이해하려면 우선 회사 사업 구조부터 알아둘 필요가 있다. 크게는 디바이스경험(DX) 부문과 반도체(DS) 부문으로 나뉜다. DX에는 스마트폰과 가전 등이 있고 DS는 메모리반도체, 파운드리, 시스템LSI 사업부로 구분된다. 국내 임직원이 약 12만 명인 삼성전자에서 최대 노조는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지부(초기업노조)’로, 지난달 말 7만 명을 넘어섰다. 전체 조합원의 80%는 DS 부문이고, 그중 절대다수가 메모리 사업부 소속이다. 초기업노조가 교섭을 중단한 것은 초과이익성과급(OPI) 제도 개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다. OPI는 목표 이상의 실적을 달성하면 영업이익에서 법인세, 투자비, 배당 등을 제외한 금액의 20% 정도를 재원으로 ‘연봉의 최대 50%’를 지급하는 보상이다. 재원을 ‘영업이익의 10%’로 바꾸고 개별 상한도 풀어 달라는 게 노조의 최종 요구안이었다. 사측이 “업계 최고 대우” 약속과 함께 특별 보상까지 제시했지만 노조 입장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노조 주장도 일부 이해는 된다. ‘작년 실적이 좋았으니 성과급을 최대한 챙겨 달라’는 것은 조합원 권익을 위해 충분히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다. 게다가 올해 영업이익은 작년의 몇 배가 될 것으로 예상돼 이번에 ‘상한제’를 폐지해야 내년 초 더 큰 목돈을 쥘 수 있다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문제는 방법론에 있다. 초기업노조는 재원 기준을 영업이익으로 바꾸자고 하면서 부문별로 공통 지급하던 OPI의 60%는 사업부에 따라 차등 지급하는 안을 내놨다. DS 부문의 경우 적자를 낸 파운드리와 시스템LSI 사업부 성과급을 뚝 떼어내 실적이 좋았던 메모리 사업부에 몰아주는 구조다. 같은 조합원이라도 소수는 희생해도 된다는 것이다. 비조합원은 또 어떤가. 70% 이상이 해당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DX 부문은 애초부터 지도부 관심사에서 멀어져 있었던 듯하다. 대기업 노조들 중 이렇게 한 특정 집단만 유리한 안을 놓고 사측과 대립했던 사례가 있었나 싶다.파업 전까지 합리적 방안 도출하길 조합원 중 소수 집단, 그리고 비조합원들의 여론에 귀를 닫았던 초기업노조는 파업 참여율로 한 번에 ‘명분’을 얻으려 하고 있다. 그러니 파업에 불참하면 인사상 불이익을 줄 것 같은 협박성 발언을 한다든지, 회사에 협조적인 동료를 찾아 신고하게 하는 등의 무리수가 나오는 것이다. 그보다는 다수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갖게 된 소수의 동료들을 먼저 챙기는 게 노조가 가져야 할 책임감이 아닐까 한다. 삼성전자는 저성장 기조 늪에 빠진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버팀목이다. 그런 기업에서 억대 연봉을 받으며 일하는 직원들이 “확실한 피해를 입혀야 한다”, “파업하면 회사는 10조 원 손실” 같은 거친 발언을 쏟아내면 외부 시선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귀족노조’ 탄생을 알릴지, 노사가 합리적 상생 방안을 만들어낼지 아직 파업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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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창덕]46년 만에 ‘서열 2위’ 복귀한 국방차관

    국방부 차관의 부처 내 의전 서열은 아홉 번째였다. 다른 부처들처럼 장관 바로 다음이 차관이 아닌 것은 중간에 현역 군인 여러 명이 끼어 있어서다. 합참의장, 육·해·공군참모총장, 한미연합군사령관, 육군지상작전사령관, 2작전사령관이 2∼8위로 차관보다 서열이 높았다. 3월 31일 국무회의에서 그런 차관의 서열을 장관 바로 다음으로 올리는 군예식령 개정안이 의결됐다. 현역 군인들을 모두 민간인 신분인 차관 아래에 두도록 한 것이다. ▷국방부에서 차관이 서열 2위로 되돌아가는 것은 무려 46년 만이다.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신군부가 이듬해인 1980년 7월 국무총리훈령 157호를 공포하면서 군인들의 예우를 두 단계씩 올렸다. 장성급의 경우 3급이던 별 하나 준장을 1급 공무원으로 예우한다는 내용만 명시됐는데, 그보다 높은 별 넷인 대장은 장관급, 별 셋인 중장은 차관급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 신군부 세력에 대한 군 내부 반발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당근책’을 내세운 것이다. ▷복지 정책을 한번 만들면 없애기 쉽지 않은 것처럼, 군인 예우를 높인 157호 역시 그랬다. 노무현 정부 당시 폐지 시도가 있었지만 “군 사기가 꺾인다”는 반대가 거세 중단됐다. 그러는 사이 신군부의 잔재는 반세기 가까이 명맥을 이어온 셈이다. 이명박 정부 때 경제관료 출신인 장수만 차관, 문재인 정부 당시 노무현 청와대 출신 서주석 차관처럼 ‘실세 국방차관’도 여럿 있었는데, 그들이 지휘한 현역 군인들보다 의전 서열이 아래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이번 차관의 서열 조정은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군에 대한 문민통제의 필요성이 다시 커진 상황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재명 정부는 우선 5선 국회의원인 안규백 장관을 64년 만의 첫 문민 국방부 수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직무 서열이 더 높은 차관이 의전 서열은 대장 7명보다 낮다는 불균형을 바로잡은 것이다. ▷선진국들은 군의 문민통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국방장관과 국방 부장관(한국의 차관)은 물론 육·해·공군 장관도 민간인이다. 특히 댄 드리스콜 육군장관과 존 펠런 해군장관은 월가 출신의 금융전문가다. 유럽의 경우 2014년 한 국제포럼에서 독일,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의 여성 국방장관 4명이 찍은 ‘셀카’가 문민통제를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현재도 유럽 여러 나라들이 군 경력이 없는 여성 장관을 꾸준히 임용하고 있다. ▷군의 문민통제는 이처럼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됐다. 차관 서열의 회귀는 또 과거 군사정권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낸다는 의미가 있다. 군으로서도 이런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일 때 새로운 출발점에 설 수 있다. 그런 모습을 보여야 군에 대한 신뢰도 빠르게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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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창덕]반도체 품귀에 머스크 “내가 만들겠다”

    일론 머스크는 몽상가다. 하지만 그가 진짜 무서운 건 막대한 자금을 무기로 그 꿈을 현실화한다는 점이다. 머스크의 눈은 화성을 향하고 있다. 정확히는 인류의 화성 이주가 목표다. 2024년 10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후보 유세장에 등장했을 때도 ‘OCCUPY MARS’(화성을 점령하자)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 그 꿈을 위해 인공지능(AI), 로봇, 우주선까지 손에 넣은 머스크가 반도체까지 직접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머스크는 22일 미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초대형 반도체 공장인 ‘테라팹(Fab)’ 건설을 공식화했다. 일주일 전 X(옛 트위터)에서 예고한 대로다. 그는 “테라팹을 짓지 않으면 필요한 만큼의 칩을 확보할 수 없다”고 했다. 외부 위탁 생산만으로는 미래 반도체 수요에 대응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테라팹은 테슬라 자율주행차와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 우주 데이터센터 등에 쓰일 반도체를 생산할 예정이다. 대만 TSMC가 자신의 공장을 ‘기가팹’으로 부르곤 하는데, 기가(10억)보다 1000배 큰 숫자인 테라(1조)를 공장 이름에 붙였다. ▷마치 ‘기가팩토리’ 탄생의 데자뷔 같다. 머스크는 2013년 “전 세계 배터리 생산 능력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는 하나의 공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머스크 특유의 ‘허세’라는 부정적 시선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미 네바다주에서 전기차와 배터리를 만드는 1호 기가팩토리가 문을 열었다. 테슬라가 전 세계 전기차 시장을 장악한 데는 미 캘리포니아주, 중국 상하이, 독일 베를린까지 확장된 기가팩토리의 뒷받침이 절대적이었다. “답답하면 내가 만들면 그만”이라는 머스크식 투자 본능이 10여 년 만에 재등장한 셈이다. ▷다만 반도체는 머스크에게도 쉬운 도전이 아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극강의 실력을 쌓아온 삼성도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7%에 그친다. TSMC는 파운드리 사업만 하고,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만 만든다. 반도체 미세공정은 이미 1나노(10억분의 1)대에서 경쟁하고 있어 후발주자에겐 진입장벽이 너무 높다. 하나씩도 어려운데 머스크는 AI 칩과 메모리 모두를 만드는 데다 설계, 제조, 패키징까지 수직 계열화하겠다는 구상이라고 한다. 아무리 머스크라도 성공 가능성을 높게 점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머스크에게 지금 가장 아쉬운 건 시간이다. 그는 발사 비용을 100분의 1로 줄인 재사용 로켓을 개발해 우주 시대를 성큼 앞당겼다. 그러니 사업의 빠른 진척을 가로막는 ‘반도체 공급난’을 하루빨리 풀어내고 싶을 것이다. 테라팹의 성공과 별개로 거대한 메기의 등장에 긴장한 기존 기업들이 반도체 공급 속도를 높인다면, 이 또한 머스크가 원하는 결과물일 수 있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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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창덕]美 법원서 제동 걸린 ‘AI 구매 대행’

    2022년 인공지능(AI) 챗GPT가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사람처럼 알아듣고, 사람과 같은 말투로 답변한다는 데 있었다. 기존 디지털 플랫폼 기업들의 서비스와 가장 차별화된 점이었다. 부족했던 정확성마저 개선되면서 AI의 활용도는 빛의 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호시탐탐 선을 넘으려는 분야가 바로 사람의 일을 대신 해주는 ‘에이전트 기능’이다. AI 구매 대행이 대표적인데, 미국에서 일부 제동을 거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퍼플렉시티의 AI 에이전트 ‘코멧’에는 쇼핑 자동화 기능이란 게 있다. 코멧이 이용자가 알려준 아이디로 아마존에 대신 접속해 물건을 고르고 주문과 결제까지 완료하는 것이다. 아마존은 사람이 아닌 코멧의 접속을 허용한 적이 없다며 작년 11월 퍼플렉시티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캘리포니아 북부 연방지방법원은 10일 아마존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코멧의 해당 기능을 일정 기간 비활성화하도록 했다. AI가 사람 대신 쇼핑을 하려면 실제 구매 활동이 일어나는 플랫폼 기업으로부터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못 박은 셈이다. ▷아마존이 코멧의 진입을 막아선 건 실은 ‘광고 매출’을 포기할 수 없어서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물건을 많이 팔려면 얼마나 구매자 눈에 잘 띄는지가 중요한데, 좋은 위치를 확보하려면 광고비를 내야 한다. 아마존이 이렇게 번 돈이 작년에만 약 700억 달러다. AI 에이전트가 알아서 물건을 사면 광고주들은 아마존이 아닌 코멧 운영사인 퍼플렉시티에 광고를 하려 할 테니 급한 대로 법을 동원한 것이다. ▷그런데 법원 결정 바로 다음 날 아마존이 보인 ‘이중적’ 행태에 많은 사람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사 AI 에이전트가 외부 플랫폼으로 이동해 구매 대행을 하는 ‘바이 포 미(buy for me)’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외부 AI에는 철저히 문을 닫으면서 자신은 외부 플랫폼들과의 파트너십 계약을 통해 AI 활동 영토를 넓힌 것이다. 아마존은 매월 3억 명 이상이 이용하는 디지털 커머스 시장의 절대 강자다. 웬만한 제조사 판매몰이나 중소 쇼핑몰은 그런 아마존의 제안을 거부하기 힘들 것이다. ▷이번 미 법원 결정으로 각 플랫폼이 외부 AI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도록 최소한의 ‘방패막’을 갖게 된 건 분명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마존 같은 강자만 유리해진 게 아닌가라는 우려도 나온다. 빅테크들의 AI 에이전트 공세 속에서 다양한 중소 플랫폼이 가진 개성과 특징, 브랜드 가치 등은 무의미해질 수 있다. 영화, 음악, 문학 같은 콘텐츠 영역에서도 AI에 선택되기 쉬운 ‘정답형’만 살아남을지 모를 일이다. AI 발전은 막을 수 없고 막아서도 안 되지만, AI가 인간을 ‘대체’하지 않고 ‘보조’해야 한다는 대원칙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한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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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창덕]구두 선물

    겨울철이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종종 올라오는 따뜻한 목격담들이 있다.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신고 있던 신발을 노숙인에게 벗어주는 사람을 봤다는 내용이다. 신발을 벗어주면 자신이 차가운 바닥과 뾰족한 물질에 노출되기에 선뜻 하긴 어려운 선행이다. 이런 사람들은 ‘제2의 크리스’라 불리기도 한다. 2012년 크리스 더블디라는 캐나다 버스 기사가 맨발로 걷던 노숙인에게 신발을 벗어준 일이 널리 알려진 이후부터다. ▷최근 화제가 된 한 여성화 브랜드 ‘착한구두’의 선물은 응원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회사 입사 면접에서 떨어진 한 지원자는 “저희 신발이 후보자님의 내일에도 닿기를 바란다”면서 발 사이즈를 묻는 문자를 받았다고 한다. 문자에는 “앞으로 모든 길 위에서 발걸음만큼은 조금 더 가볍고 편안하길 바란다”는 응원도 담겼다. 그는 새 구두 덕분인지 취업에도 성공했다는 얘기를 X(옛 트위터)에 올렸고, 수백만 명이 조회했다. ▷교제 중인 이성에게 신발을 선물하면 떠나간다는 속설이 있다. 신발이 ‘이동’을 위한 수단이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말이 생긴 듯하다. 실제로도 신발 선물을 꺼리는 연인이 꽤 있다. 하지만 가족에게까지 그런 미신이 닿진 않는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주인공은 결혼을 앞두고 생전 처음 아버지에게 선물을 한다. 자신과 버진로드를 함께 걸을 때 신을 새 구두다. 무뚝뚝했던 딸의 미안함과 고마움이 담긴 구두는 너무 커서 불편하지만, 그 마음만으로 충분했던 아버지는 “딱 맞다”며 기뻐한다. ▷이유는 달라도, 큰 구두를 선물받고 바꾸지 못하는 이들이 현실에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플로샤임’ 브랜드 구두를 선물받은 고위공직자들이 그렇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올해 초 J D 밴스 부통령과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이 구두를 신은 모습이 포착됐는데, 뒤꿈치가 손가락 두 개는 들어갈 만큼 남았다고 한다. 트럼프가 발 크기를 눈대중으로 짐작해 주문했기 때문이다. 백악관 참모 여럿과 일부 공화당 의원도 같은 구두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 조금 불편하다고 다른 구두를 신었다간 불충하다거나 팀워크를 깬 행동으로 오해받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하다. ▷정치인들이 ‘낡은 구두’로 서민 이미지를 부각시키곤 하지만, 트럼프처럼 자신이 즐겨 신는 구두를 직접 선물한 사례가 흔한 건 아니다. 내가 좋으면 남도 좋아할 것이란 트럼프식 일방주의가 드러나는 장면일 수 있겠다. ‘트럼프 구두’는 또 그가 얼마나 가까운 측근인지를 확인하는 표식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이 구두는 145달러 정도로, 억만장자 트럼프의 신발치고는 저렴하다. 백악관에선 선물로 받기 전 스스로 구매해 은근히 충성심을 드러내는 참모도 더러 있을 것 같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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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창덕]보기만 해도 아찔한 ‘널뛰기’ 증시

    지난달까지만 보면 이재명 정부의 최고 히트상품은 누가 뭐래도 주식시장이었다. 대선 공약이었던 ‘코스피 5,000’을 핵심 국정 과제로 삼았고, 여당은 이에 발맞추기 위한 특별위원회까지 만들어 입법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런데 정권 출범 7개월여 만인 올해 1월 목표를 달성해 버렸다. 물론 반도체 붐을 타고 목표가 너무 ‘이른’ 시점에 그야말로 ‘강제’ 달성돼 버렸다는 해석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됐건 상승장에 제때 올라탄 개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치솟는 주가에 정부는 고무됐고, 6·3 지방선거를 준비하던 여당도 몰려든 표를 세느라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올해만 7번 울린 사이드카그리고 찾아온 2월. 증시 첫날부터 매도 사이드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신임 의장 후보자로 케빈 워시가 지명된 데 따른 이른바 ‘워시 쇼크’가 덮친 것이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날 포함 닷새 만에 3번의 사이드카가 울렸다. 3월 초 ‘이란 전쟁’의 충격은 훨씬 혹독했다. 3, 4일 이틀간 코스피는 20% 가까이 빠지며 투자자들을 패닉에 빠뜨리더니 다음 날 보란듯이 10%를 회복했다. 글로 옮기는데도 이렇게 숨이 찬데, 전 재산을 걸고 곡예비행 중인 투자자들의 심정은 어떨까.우리는 지금 기록적인 ‘롤러코스터 장’을 목격하고 있다. 2002년 이후 코스피에서 사이드카가 한 차례도 발동되지 않은 해가 14번이나 됐다. 한 해 26번 사이드카가 나온 2008년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라 예외로 두자. 나머지 중에서는 팬데믹 때인 2020년이 7번으로 가장 많았는데, 겨우 3월 초순이 지나고 있는 올해 벌써 7번의 사이드카가 울렸다.불안정한 증시는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본다.우선 한국 증시는 대외 변수에 취약하다는 게 이번에 또다시 입증됐다. 같은 변수에 노출된 일본, 홍콩 등의 증시가 2∼3%씩 오르내릴 때 한국만 유독 진폭이 컸다. 반도체나 방산 같은 한국의 주종목에 뭉칫돈을 투자한 외국인들이 글로벌 경제를 흔드는 이슈가 생기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을 빼고 있어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관세로 끊임없이 변덕을 부리고 있고,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의 전쟁은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다.또 하나는 코스피가 빨라도 너무 빨리 올랐다는 점이다. 작년과 올해 코스피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증가율을 보였다. 지난달 하순 6,300 선을 찍었을 때 기준으로는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세 배로 오른 셈이었다. 게다가 지수를 끌어올린 자금의 상당 부분이 빚이다. 증권사 신용거래융자 잔액은 32조 원을 넘어섰다. 빨간색 우상향 그래프를 그릴 때야 적금을 깨든 빚을 내든 개인의 문제지만, 급락장에서는 반대매매 물량이 쏟아내 하락 폭을 키우는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 한국 증시를 자칫 잘못 건드리면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카드의 집’ 같은 상황으로 보는 비관적 시각도 아주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선수가 잘 뛰어야 관객도 찾는다여당 대표 등이 “코스피 1만”을 외칠 때는 기대보다 걱정이 앞서게 된다. “심장 약한 사람은 못 버틴다”, “코인 시장 같다”는 얘기가 나오는데도 정치권이 주식 투자를 너무 부추기는 듯해서다. 지금은 이 대통령이 최근 언급한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는 차분함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투자자 유인’에만 집중했던 정책 흐름도 냉정한 시각으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주식의 가치는 근본적으로 기업의 실적과 비전에서 나온다. 그러니 기업의 활동 반경을 과도하게 줄여 놓고 시장 가치가 오르길 기대하는 건 이율배반적이지 않나. 아무리 좋은 운동장을 만들어 봤자 정작 선수들이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경기는 형편없어질 수밖에 없다. 어떤 관객도 그런 경기를 푯값을 내고 보러 오진 않는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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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창덕]UAE서 미사일 요격률 90% 보여준 ‘천궁-2’

    지난달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에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잃은 이란은 바로 보복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물론 미군이 주둔한 페르시아만 건너편 산유국들을 자폭 드론과 탄도미사일로 공격한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탄도미사일 174발과 순항미사일 8발, 그리고 드론 689대가 아랍에미리트(UAE)에 집중됐다. 하지만 실제 영토에 떨어진 건 드론 44대뿐, 나머지는 모두 방공망에 의해 격추됐다. 요격률은 93%가 넘었다. ▷미 군사기지가 있는 중동 국가들은 주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와 ‘패트리엇 방공 시스템(PAC-3 MSE)’으로 영공을 보호한다. UAE가 유독 주목받은 건 한국산 중거리 지대공유도무기 ‘천궁-2(M-SAM Ⅱ)’ 역시 실전에 배치됐기 때문이다. UAE는 2022년 천궁-2를 도입하기로 하고 미국 시스템 등과 함께 여러 겹의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이번 방어 작전은 우리가 수출한 국산 무기로는 첫 실전이 된 것이다. 이란은 저가 드론과 미사일을 꾸준히 뿌려 상대국의 값비싼 방공망 무기를 소진시키는 ‘가랑비 전략’을 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범용 패트리엇’이라 불리는 천궁-2가 이번 방어작전 때 보여준 요격률은 90% 안팎이었던 것으로 우리 당국은 파악했다. ▷천궁-2는 미사일을 일단 공중 10∼30m 정도로 띄운 뒤 로켓엔진이 점화되는 ‘콜드 론치(cold launch)’ 방식을 쓴다. 직접 목표물을 맞히는 ‘직격 요격(hit-to-kill)’이라는 점에서는 미 록히드마틴의 패트리엇과 방식이 유사하다. 특히 미사일 한 발 가격은 패트리엇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해 ‘가성비’가 탁월하다. 저가 무기 공격에 보다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의미다. UAE에 이어 2024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가 연이어 천궁-2 도입 계약을 맺은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였다. ▷방위산업은 세계 정세가 어지러울수록 ‘호황’을 맞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트럼프 미 대통령의 그린란드 편입 시도 등은 유럽 각국이 방위체계 고도화에 서둘러 투자하도록 등을 떠밀었다. 작년 12월과 올 1월 폴란드, 노르웨이에 각각 다연장로켓 ‘천무’를 공급하기로 한 것도 그런 흐름에서다. 전쟁 장기화 우려가 나오는 중동에서도 한국 무기체계 도입 요구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 대치 중인 한국은 그동안 사드 등 미국 방어시스템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 이번 천공-2가 성공적으로 실전 능력을 입증한 것은 우리 자체 방어 능력이 한 단계 더 올라섰다는 의미다. 여기에 한국 방산기업들의 전투기, 장갑차, 잠수함까지 해외로 진출하고 있다. 자국 영토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군비 태세를 갖추는 국가들의 협력 파트너로서의 위치도 굳혀가고 있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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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창덕]테러 시나리오 주고받은 챗GPT, 쉬쉬한 오픈AI

    10일 오후 인구 3000명이 채 되지 않는 캐나다 산간마을 텀블러리지는 한순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갈색 머리 드레스 차림’의 총기 난사범을 피하라는 공습경보가 울렸지만, 때는 늦었다. 주택과 학교에서 사망자 9명이 발견됐고, 25명이 다쳤다. 캐나다 왕립기마경찰(RCMP)이 용의자로 지목한 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18세 제시 밴 루트셀라였다. 슬픔에서 헤어 나오기도 전 캐나다 국민들은 또다시 충격적인 보도를 접했다. 오픈AI가 8개월 전 용의자와 인공지능(AI) 챗GPT 간 대화에서 ‘레드 플래그(위험 신호)’를 인지하고도 이를 묵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밴 루트셀라는 작년 6월 챗GPT와 며칠에 걸쳐 총기 테러 시나리오를 주고받았다. 자동 모니터링 시스템이 경고음을 울린 뒤 직원 10여 명은 곧바로 후속 조치를 논의했다. 일부는 캐나다 수사 당국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오픈AI 경영진은 해당 계정만 차단하고 신고는 하지 않았다. ‘신뢰할 만하고 임박한 위험’이란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밴 루트셀라는 지역 경찰로부터 한 차례 이상 체포된 적도 있는 ‘주요 관찰 대상’이었기에, 어쩌면 오픈AI의 신고가 참사를 막을 수도 있었다. ▷총기 테러범들은 온라인 포털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챗봇 등에 사건을 암시하는 ‘디지털 발자국’을 남긴다. 무기 정보를 얻거나 다른 범죄 사례를 찾아보는가 하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글이나 영상을 올리기도 한다. 2021년 성탄절 영국 윈저성에 침입했던 석궁 테러 미수범은 AI 챗봇 앱 ‘레플리카’에서 5000여 건의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2022년 흑인만 10명을 살해한 미국 버펄로 총기 난사범은 디스코드, 레딧 등에서 극단적 인종 차별주의를 접했다. ▷텀블러리지 참사는 오픈AI가 위험을 알고도 모른 체했다는 점에서 과거 사례들보다 더 충격적이다. 오픈AI의 이런 판단은 이용자 프라이버시가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나왔을 것이다. 특히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예측해 이용자 정보를 먼저 제공하면 ‘사찰 논란’이 더 커져 이용자들의 신뢰를 잃을 수 있다. 미 정부의 광범위한 개인 데이터를 분석해 테러 등 범죄 징후 등을 찾아내는 AI 기업 팔란티어가 사회적 기여도와 별개로 인권 침해 비판을 받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AI는 범죄자들이 단순 검색을 하거나 글을 올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정보 제공을 넘어 이용자에게 절대적 공감을 표한 챗봇이 범죄의 ‘트리거’ 역할을 할 수 있어서다. 챗GPT는 이미 ‘자살 조장’을 이유로도 여러 건의 소송에 휘말려 있다. 텀블러리지 참사를 계기로 개인 프라이버시와 범죄 예방 간 균형추를 찾고, AI 서비스 제공자의 책임 범위를 정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됐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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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창덕]“100년 뒤에 원금 갚을게요”

    1997년 글로벌 휴대전화 1위 미국 모토로라는 위성전화 서비스인 ‘이리듐 프로젝트’를 위해 만기가 100년 후인 회사채 3억 달러어치를 발행했다. 하지만 이리듐 사업부는 일명 ‘벽돌폰’이란 오명만 남긴 채 처참하게 실패했고, 2001년 헐값에 팔렸다. 그 여파로 휘청거리던 모토로라는 스마트폰 대응 실패로 2012년 휴대전화 사업까지 접었다. 장기 채권을 떠안게 된 존속회사 모토로라솔루션은 앞으로도 71년이나 더 이자를 내야 한다. 모토로라 이후 테크 업계에선 자취를 감췄던 ‘100년물 회사채’가 거의 30년 만에 재등장했다. 주인공은 구글이다. ▷투자자들은 구글을 ‘제2의 모토로라’로 여기진 않았다. 구글 지주사 알파벳이 10일 영국 채권시장에서 10억 파운드(약 2조 원)어치의 100년 만기 회사채를 발행했는데, 매수 주문이 10배나 몰렸다. 흥행에 힘입어 금리도 예상보다 낮은 6.125%로 확정됐다. 발행일 기준 영국 국채 30년물보다 겨우 0.8%포인트 높았다. 이 정도면 거의 ‘준국가급’ 장기 신용도라는 평가가 나온다. 알파벳은 미국과 스위스에서도 회사채 발행에 성공해 하루 만에 320억 달러(약 46조 원)를 확보했다. ▷채권 시장에서는 100년물을 흔히 ‘센추리 본드(century bond)’라 부른다. 보통 만기가 10∼30년이면 ‘장기채(long bond)’, 30∼50년이면 ‘초장기채(ultra long bond)’란 이름이 붙는데, 100년은 그런 수식어로는 부족해 아예 기간을 명시한 것이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만기가 길수록 금리가 높아 수익 측면에서 유리하지만, 위험 부담이 큰 것도 사실이다. 채권 발행 기업이 그때까지 생존하지 못하면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어서다. ▷100년물을 발행한 곳들의 면면을 보면 적어도 ‘안정성’ 측면에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국은 월트디즈니, 코카콜라, 포드, 노퍽 서던(철도회사) 등이 있었고, 유럽에서는 프랑스전력공사, 옥스퍼드대, 오스트리아 국채 등의 사례가 있다. 테크 기업으로는 닷컴버블 이전 IBM과 모토로라 정도만 있었다. 아직 만 서른이 안 된 알파벳은 앞으로 백년기업 반열에 들 확신이 있었고, 시장에서도 통한 셈이다. ▷알파벳의 이번 회사채 발행은 인공지능(AI)과 인프라 투자였기에 더 주목을 끈 측면도 있다. 알파벳이 AI용 데이터센터와 전력 인프라 등을 구축하는 데 올해 쓰겠다고 한 1850억 달러는 지난 3년간의 투자액을 합한 것보다 많다. 알파벳과 함께 미국 4대 빅테크라 불리는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메타도 올해 최소 4650억 달러의 실탄을 AI 분야에 쏠 준비를 하고 있다. 당장 일 년 후도 보이지 않는 무한경쟁 시대인데, 100년을 내다보고 투자하는 빅테크들의 패기가 부럽기도 하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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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김창덕]과도한 노동입법, ‘보호의 역설’ 부른다

    성벽을 높이 쌓고 성곽 둘레에 해자(垓字)를 깊이 파면 내부 사람들은 안전해진다. 해자 위로 놓은 다리마저 끊어버리면 외부 위협을 아예 차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밖에서의 젊은 일꾼 수혈과 신선한 물자 보급은 어려워진다. 장기전으로 갈수록 곳간은 비고 사람들은 빠르게 지칠 수밖에 없다. 이른바 ‘보호의 역설’이다. 노동시장도 그렇다. 각종 제도로 기득권 노조를 과도하게 보호하면 기업은 신규 인력을 수급하거나 첨단 장비를 도입할 기회를 놓친다. 기업 경쟁력이 추락한 뒤엔 결국 노조가 나눠 가질 과실도 줄어든다.노조엔 ‘보호막’을, 기업엔 ‘족쇄’만 ‘노동자’를 무조건 보호해야 할 약자로 정의하는 순간 그들을 고용하는 ‘기업’은 언제든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는 경계의 대상이 된다. ‘실용주의’를 내세우는 이재명 정부의 행보도 현재까지는 이런 이분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작년 8월 국회를 통과한 ‘노란봉투법’은 하청업체 근로자들에게 원청 기업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권한을 줬고, 경영상의 결정도 파업의 이유로 만들었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법”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법 시행은 다음 달인데 전국금속노동조합은 벌써 하청 기업에 투쟁 지침을 전달했다고 한다. 기업의 대(對)노조 전력이 분산되는 것을 지켜보는 대기업 노조만 한층 여유로워졌다. 5월 1일 노동절에 맞춰 추진 중인 ‘근로자성 추정제’와 ‘일하는 사람의 권리에 관한 기본법’도 만만치 않은 후폭풍을 예고한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출신인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의 의지도 강하다. 프리랜서나 특수고용직이 소송을 걸면 기업은 그들이 ‘근로자가 아님’을 직접 입증해야 한다. 명칭부터 ‘추정’이 들어가니 법 조항들도 모호할 게 뻔하다. 그 어려운 일을 맡아줄 대형 로펌들만 축포를 터뜨리게 생겼다. 주 4.5일제와 동일노동 동일임금 논의가 더해지면 기업들은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보호막이 늘어나는 노동자와 달리 기업들은 더 많은 족쇄를 차고 있다. 법인세율을 기어이 1%포인트 올리더니 상법 개정은 벌써 세 번째 라운드가 진행 중이다. 부도덕한 경영주가 자기 뜻대로 못 하도록 견제 장치를 두는 것인데 왜 멀쩡한 경영주들까지 어렵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다. 마지막에는 수백만 원씩 투자한 개인 주주들이 아니라 수천억 원씩 지분을 몰래 사 모은 뒤 경영진을 협박하는 해외 투기자본 세력만 웃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에는 외국인 투자기업들이 머쓱해지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외국인 투자기업들과의 간담회에서 기업 지배구조 개혁, 주식시장 정상화, 지방 투자 확대 등에 발언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외국인 자본 투자자가 아닌 한국에서 기업체를 운영하는 이들이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모를 주제들이다. 외투 기업들의 요청 1, 2순위에 노동 정책이나 세제 개혁이 항상 오른다는 사실을 행사를 준비한 참모진은 정말 몰랐던 걸까.AI로 인한 인력 재배치 일상화 시대 유럽에는 이미 훌륭한 반면교사 모델들이 있다. 프랑스가 1998년 세계에서 처음 시행한 ‘주 35시간 근로제’는 20년 가까이 경제 성장을 방해한 핵심 원인 중 하나로 꼽혔다. 2000년대 초반 근로자 해고를 원천 봉쇄한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그 여파가 누적되면서 청년 실업률이 40∼50%에 달하는 홍역을 치러야 했다. 지금은 특히 인공지능(AI) 쇼크로 대규모 인력 재배치가 일상화되고 있는 시대다. 미국 빅테크들은 AI가 대체할 인력을 수만 명씩 내보내면서도 전체 고용은 오히려 늘리고 있다. 노동시장 경직도가 세계 선두권인 한국에선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대통령도 작년 양대 노총 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유연성’이란 단어를 어렵게 꺼낸 적이 있다. 실용주의가 구호에만 그치지 않으려면 이제 그에 대한 실천 과제들을 내놓을 때가 됐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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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창덕]어이없는 네이버의 ‘지식인 파묘’ 사건

    한 원로 여자 배우는 여러 동료들 가운데 자신의 외모가 가장 낫다는 취지의 댓글을 포털에 남겼다. 한 남자 배우는 피임 관련 질문에 ‘수위’가 높은 조언을 했고, 다른 남자 배우는 ‘쉽게 돈 먹겠다는 한심한 족속들’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주식 투자자들을 비판했다. 같은 대학 남학우들의 음주 성희롱을 감싸는 듯한 글을 올린 정치인도 있다. 한때의 치기가 발동해서 썼거나, 지금 돌아보면 당장 주워 담고 싶은 것들이지만 오래전 익명으로 남긴 글이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을 것이다. 20여 년이 지나 실명으로 ‘파묘’당하기 전까지는…. 이들의 과거를 허락 없이 공개한 것은 해커가 아니라 게시판 운영자인 네이버였다. ▷‘지식인(iN) 파묘’ 사건은 3일 일어났다. 네이버는 자사에 인물정보를 등록한 세무·법률·의학 등의 전문가 프로필에 ‘지식인’ 링크를 추가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정치인, 연예인, 스포츠 선수, 게이머, 기업인까지 다양한 직종의 유명인들에게도 링크가 표시됐다. 이 링크를 타고 들어가니 지식인이란 코너에 과거 익명을 전제로 쓴 질문이나 답변이 여과 없이 노출됐다는 것이다. 네이버가 하루 만에 시스템을 이전으로 되돌렸지만 이미 1만5000여 명이 과거에 쓴 글로 소환된 뒤였다. ▷지식인 링크는 네이버가 6개월 전에 업데이트를 예고했던 서비스다. 그래서 네이버의 ‘기술적 오류’라는 해명은 더 궁색해 보인다.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신규 서비스를 내놓을 때는 알파, 베타 등 여러 테스트를 거치며 오류를 수정한다. 작년 매출액이 12조 원이 넘는 국내 1위 포털이 이런 기본적 절차에 실패했다면 심각한 문제다. 네이버는 6일 공식 사과하면서 피해 예방과 재발 방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기술 인력 몇 명에게 책임을 지우고 넘길 일은 아니다. ▷글 작성자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실명으로 썼던 글이나 자의로 출연했던 방송 화면 중에도 감추고 싶은 ‘흑역사’가 있는데, 하물며 익명 글은 오죽하겠나. 개인 사정이나 주변 관계를 고려했을 때 익명이어야 했을 경우가 많았을 터다. 일거수일투족 대중의 관심을 받는 사람들이라면 더 그렇다. 다른 이용자들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기에 “익명성을 믿은 게 바보였다”, “이건 네이버가 선을 넘은 거다” 등의 비판이 나온다. ▷네이버는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의 개인정보를 축적하고 있는 만큼 보안이 뚫리면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래서 회사 차원에서는 생존을 걸고 보안 시스템에 투자해야 하고, 내부 구성원들에게도 보다 철두철미한 보안 인식이 요구된다. 이번 지식인 사건으로 이용자들의 실망감이 유독 큰 이유다. 국가대표 인공지능(AI)까지 도전했던 네이버가 이 정도의 정보 보호 수준에 머물러 있다니 씁쓸할 따름이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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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창덕]“그는 정치적 동물이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1기 시절인 2017년 케빈 워시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이사는 신임 의장 후보 중 하나였지만 제롬 파월 현 의장에게 밀려 최종 낙점을 받지 못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당시 “그(워시)는 모든 것을 잘못 판단해 왔다”며 후보 거론 자체를 비판했다. 다시 돌아온 트럼프는 지난달 30일 워시를 연준 의장 후보자로 결국 지명했다. 크루그먼의 비판은 한층 거칠어졌다. “그(워시)는 정치적 동물(political animal)이야.” ▷크루그먼은 민주당 성향이 짙은 경제학자이긴 하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전혀 근거 없는 비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월스트리트 출신인 워시는 2006년 30대 중반의 최연소 이사로 연준에 입성했다. 그는 연준이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천문학적 돈을 풀던 2010년 ‘인플레이션 우려’를 내세워 양적완화 중단을 주장했고 이듬해 사임했다. 긴축을 내세우는 연준 내 ‘매파’ 역할에 충실했던 셈이다. 워시는 그러나 작년부터 정반대로 금리 인하 필요성을 공개 지지했다. 금리만큼은 연준 내 ‘비둘기파’ 성향으로 바뀐 것이다. ▷워시는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 에스티로더 가문의 사위다. 장인은 트럼프의 오랜 친구로, 트럼프에게 그린란드 매입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한 것으로도 알려진 인물이다. 워시가 트럼프 정부마다 연준 의장이나 재무장관 후보로 언급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 이들도 많다. 개인적인 배경이야말로 트럼프가 말한 ‘적임자(cental casting)’라는 것이다. 가장 독립적이어야 할 연준이 정치적 중립성을 잃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그래서 나온다. ▷연준 의장은 흔히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도 불린다. 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 연준은 수도 워싱턴에 있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12개 지역 연방은행으로 구성된다. FRB 이사 7명과 지역 연방은행 총재 중 5명이 1년에 8번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를 결정한다. 만에 하나 앞으로 연준이 트럼프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향으로, 원하는 만큼 금리를 조정하면 세계 경제에 어떤 후폭풍이 닥칠지 알 수 없다. ▷워시는 더 강경파로 꼽히는 케빈 해싯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과 마지막까지 경쟁했다. 시장에서는 워시 지명으로 그나마 불확실성이 줄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지난달 30일 안전자산인 금과 은 현물 가격이 각각 7.9%, 12.9% 내린 데는 그런 배경이 있다는 것이다. 워시가 금리는 내리되 ‘매파’ 성향으로 돌아가 연준 유동성 공급은 줄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로 인한 달러 가치 상승 기대감에 비트코인 가격은 8만 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연준 후보자 지명 뉴스만으로도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 202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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