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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높이 쌓고 성곽 둘레에 해자(垓字)를 깊이 파면 내부 사람들은 안전해진다. 해자 위로 놓은 다리마저 끊어버리면 외부 위협을 아예 차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밖에서의 젊은 일꾼 수혈과 신선한 물자 보급은 어려워진다. 장기전으로 갈수록 곳간은 비고 사람들은 빠르게 지칠 수밖에 없다. 이른바 ‘보호의 역설’이다. 노동시장도 그렇다. 각종 제도로 기득권 노조를 과도하게 보호하면 기업은 신규 인력을 수급하거나 첨단 장비를 도입할 기회를 놓친다. 기업 경쟁력이 추락한 뒤엔 결국 노조가 나눠 가질 과실도 줄어든다.노조엔 ‘보호막’을, 기업엔 ‘족쇄’만 ‘노동자’를 무조건 보호해야 할 약자로 정의하는 순간 그들을 고용하는 ‘기업’은 언제든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는 경계의 대상이 된다. ‘실용주의’를 내세우는 이재명 정부의 행보도 현재까지는 이런 이분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작년 8월 국회를 통과한 ‘노란봉투법’은 하청업체 근로자들에게 원청 기업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권한을 줬고, 경영상의 결정도 파업의 이유로 만들었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법”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법 시행은 다음 달인데 전국금속노동조합은 벌써 하청 기업에 투쟁 지침을 전달했다고 한다. 기업의 대(對)노조 전력이 분산되는 것을 지켜보는 대기업 노조만 한층 여유로워졌다. 5월 1일 노동절에 맞춰 추진 중인 ‘근로자성 추정제’와 ‘일하는 사람의 권리에 관한 기본법’도 만만치 않은 후폭풍을 예고한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출신인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의 의지도 강하다. 프리랜서나 특수고용직이 소송을 걸면 기업은 그들이 ‘근로자가 아님’을 직접 입증해야 한다. 명칭부터 ‘추정’이 들어가니 법 조항들도 모호할 게 뻔하다. 그 어려운 일을 맡아줄 대형 로펌들만 축포를 터뜨리게 생겼다. 주 4.5일제와 동일노동 동일임금 논의가 더해지면 기업들은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보호막이 늘어나는 노동자와 달리 기업들은 더 많은 족쇄를 차고 있다. 법인세율을 기어이 1%포인트 올리더니 상법 개정은 벌써 세 번째 라운드가 진행 중이다. 부도덕한 경영주가 자기 뜻대로 못 하도록 견제 장치를 두는 것인데 왜 멀쩡한 경영주들까지 어렵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다. 마지막에는 수백만 원씩 투자한 개인 주주들이 아니라 수천억 원씩 지분을 몰래 사 모은 뒤 경영진을 협박하는 해외 투기자본 세력만 웃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에는 외국인 투자기업들이 머쓱해지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외국인 투자기업들과의 간담회에서 기업 지배구조 개혁, 주식시장 정상화, 지방 투자 확대 등에 발언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외국인 자본 투자자가 아닌 한국에서 기업체를 운영하는 이들이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모를 주제들이다. 외투 기업들의 요청 1, 2순위에 노동 정책이나 세제 개혁이 항상 오른다는 사실을 행사를 준비한 참모진은 정말 몰랐던 걸까.AI로 인한 인력 재배치 일상화 시대 유럽에는 이미 훌륭한 반면교사 모델들이 있다. 프랑스가 1998년 세계에서 처음 시행한 ‘주 35시간 근로제’는 20년 가까이 경제 성장을 방해한 핵심 원인 중 하나로 꼽혔다. 2000년대 초반 근로자 해고를 원천 봉쇄한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그 여파가 누적되면서 청년 실업률이 40∼50%에 달하는 홍역을 치러야 했다. 지금은 특히 인공지능(AI) 쇼크로 대규모 인력 재배치가 일상화되고 있는 시대다. 미국 빅테크들은 AI가 대체할 인력을 수만 명씩 내보내면서도 전체 고용은 오히려 늘리고 있다. 노동시장 경직도가 세계 선두권인 한국에선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대통령도 작년 양대 노총 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유연성’이란 단어를 어렵게 꺼낸 적이 있다. 실용주의가 구호에만 그치지 않으려면 이제 그에 대한 실천 과제들을 내놓을 때가 됐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한 원로 여자 배우는 여러 동료들 가운데 자신의 외모가 가장 낫다는 취지의 댓글을 포털에 남겼다. 한 남자 배우는 피임 관련 질문에 ‘수위’가 높은 조언을 했고, 다른 남자 배우는 ‘쉽게 돈 먹겠다는 한심한 족속들’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주식 투자자들을 비판했다. 같은 대학 남학우들의 음주 성희롱을 감싸는 듯한 글을 올린 정치인도 있다. 한때의 치기가 발동해서 썼거나, 지금 돌아보면 당장 주워 담고 싶은 것들이지만 오래전 익명으로 남긴 글이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을 것이다. 20여 년이 지나 실명으로 ‘파묘’당하기 전까지는…. 이들의 과거를 허락 없이 공개한 것은 해커가 아니라 게시판 운영자인 네이버였다. ▷‘지식인(iN) 파묘’ 사건은 3일 일어났다. 네이버는 자사에 인물정보를 등록한 세무·법률·의학 등의 전문가 프로필에 ‘지식인’ 링크를 추가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정치인, 연예인, 스포츠 선수, 게이머, 기업인까지 다양한 직종의 유명인들에게도 링크가 표시됐다. 이 링크를 타고 들어가니 지식인이란 코너에 과거 익명을 전제로 쓴 질문이나 답변이 여과 없이 노출됐다는 것이다. 네이버가 하루 만에 시스템을 이전으로 되돌렸지만 이미 1만5000여 명이 과거에 쓴 글로 소환된 뒤였다. ▷지식인 링크는 네이버가 6개월 전에 업데이트를 예고했던 서비스다. 그래서 네이버의 ‘기술적 오류’라는 해명은 더 궁색해 보인다.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신규 서비스를 내놓을 때는 알파, 베타 등 여러 테스트를 거치며 오류를 수정한다. 작년 매출액이 12조 원이 넘는 국내 1위 포털이 이런 기본적 절차에 실패했다면 심각한 문제다. 네이버는 6일 공식 사과하면서 피해 예방과 재발 방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기술 인력 몇 명에게 책임을 지우고 넘길 일은 아니다. ▷글 작성자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실명으로 썼던 글이나 자의로 출연했던 방송 화면 중에도 감추고 싶은 ‘흑역사’가 있는데, 하물며 익명 글은 오죽하겠나. 개인 사정이나 주변 관계를 고려했을 때 익명이어야 했을 경우가 많았을 터다. 일거수일투족 대중의 관심을 받는 사람들이라면 더 그렇다. 다른 이용자들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기에 “익명성을 믿은 게 바보였다”, “이건 네이버가 선을 넘은 거다” 등의 비판이 나온다. ▷네이버는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의 개인정보를 축적하고 있는 만큼 보안이 뚫리면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래서 회사 차원에서는 생존을 걸고 보안 시스템에 투자해야 하고, 내부 구성원들에게도 보다 철두철미한 보안 인식이 요구된다. 이번 지식인 사건으로 이용자들의 실망감이 유독 큰 이유다. 국가대표 인공지능(AI)까지 도전했던 네이버가 이 정도의 정보 보호 수준에 머물러 있다니 씁쓸할 따름이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1기 시절인 2017년 케빈 워시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이사는 신임 의장 후보 중 하나였지만 제롬 파월 현 의장에게 밀려 최종 낙점을 받지 못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당시 “그(워시)는 모든 것을 잘못 판단해 왔다”며 후보 거론 자체를 비판했다. 다시 돌아온 트럼프는 지난달 30일 워시를 연준 의장 후보자로 결국 지명했다. 크루그먼의 비판은 한층 거칠어졌다. “그(워시)는 정치적 동물(political animal)이야.” ▷크루그먼은 민주당 성향이 짙은 경제학자이긴 하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전혀 근거 없는 비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월스트리트 출신인 워시는 2006년 30대 중반의 최연소 이사로 연준에 입성했다. 그는 연준이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천문학적 돈을 풀던 2010년 ‘인플레이션 우려’를 내세워 양적완화 중단을 주장했고 이듬해 사임했다. 긴축을 내세우는 연준 내 ‘매파’ 역할에 충실했던 셈이다. 워시는 그러나 작년부터 정반대로 금리 인하 필요성을 공개 지지했다. 금리만큼은 연준 내 ‘비둘기파’ 성향으로 바뀐 것이다. ▷워시는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 에스티로더 가문의 사위다. 장인은 트럼프의 오랜 친구로, 트럼프에게 그린란드 매입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한 것으로도 알려진 인물이다. 워시가 트럼프 정부마다 연준 의장이나 재무장관 후보로 언급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 이들도 많다. 개인적인 배경이야말로 트럼프가 말한 ‘적임자(cental casting)’라는 것이다. 가장 독립적이어야 할 연준이 정치적 중립성을 잃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그래서 나온다. ▷연준 의장은 흔히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도 불린다. 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 연준은 수도 워싱턴에 있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12개 지역 연방은행으로 구성된다. FRB 이사 7명과 지역 연방은행 총재 중 5명이 1년에 8번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를 결정한다. 만에 하나 앞으로 연준이 트럼프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향으로, 원하는 만큼 금리를 조정하면 세계 경제에 어떤 후폭풍이 닥칠지 알 수 없다. ▷워시는 더 강경파로 꼽히는 케빈 해싯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과 마지막까지 경쟁했다. 시장에서는 워시 지명으로 그나마 불확실성이 줄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지난달 30일 안전자산인 금과 은 현물 가격이 각각 7.9%, 12.9% 내린 데는 그런 배경이 있다는 것이다. 워시가 금리는 내리되 ‘매파’ 성향으로 돌아가 연준 유동성 공급은 줄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로 인한 달러 가치 상승 기대감에 비트코인 가격은 8만 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연준 후보자 지명 뉴스만으로도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작년 11월 한 시장조사업체가 국가별 현금 사용 비율을 조사해 발표한 적이 있다. 한국은 10%로 전 세계 123개국 중 중국, 호주,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와 함께 공동 꼴찌였다. 한국인의 일상은 그만큼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카드를 쓰면 자연스럽게 포인트가 적립되는데, 2021∼2025년 쌓인 포인트만 28조 원이었다고 한다. 같은 기간 미처 쓰지 못하고 사라진 포인트도 5000억 원이 넘었다. ▷카드 포인트는 ‘선의의 혜택’이 아닌 ‘마케팅 도구’다. 카드사들은 회원 모집을 위해 경쟁적으로 높은 포인트 적립률을 내세운다. 소비자들은 이 포인트를 소진하는 과정에서 내 돈을 더 얹어 추가 소비를 하기 마련이다. 남은 포인트가 아까워 다른 카드사로 갈아타기를 망설이는 ‘록인(lock-in) 효과’도 있다. 그런데 이 포인트는 회계상으로 ‘이연수익’, 즉 카드사의 부채로 인식된다. 유효기간이 끝나 포인트가 소멸됐다면, 소비자들이 그만큼의 카드사 빚을 대신 갚아준 꼴이 된다. ▷포인트 소멸로 인한 피해는 고령층일수록 컸다. 카드 포인트 전체 소멸액은 매년 소폭이나마 줄었지만, 65세 이상 고령층은 크게 늘었다. 포인트 사용이 대부분 노인 접근성이 떨어지는 온라인이나 모바일 환경에 최적화되어 있어서다. 사용법은 고령층에겐 그저 ‘외계어’일 뿐이다. 오프라인에서도 소액 할인을 받겠다고 일부러 실물 카드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꺼내 보여주는 어르신이 얼마나 될까. 포인트 사용률을 높이기 위한 정부의 통합 포인트 조회 및 현금화 서비스 역시 앱 형태여서, 고령층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다음 달부터 65세 이상은 각 카드사에 별도 신청을 하지 않아도, 카드 포인트가 대금 결제 등에 자동 사용되도록 한다니 다행스럽다. ▷카드 포인트와 비슷한 사례들은 일상 곳곳에 있다. 항공사 고객들은 수천, 수만 마일리지를 쌓아놓고도 몇 안 되는 전용 좌석을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성수기나 인기 노선은 아예 엄두도 못 낸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같은 곳은 포인트 소멸 시한이 보통 1∼3년으로 카드사보다 짧아 정부가 이를 5년으로 늘리도록 유도하는 중이다. 통신사 멤버십 서비스는 포인트를 제공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제휴처와 사용 방법을 공부하는 게 웬만한 전공서적 읽기보다 어렵다. 또 연말이면 남은 혜택들이 신기루처럼 증발한다. ▷‘소비자 권리’는 소비자들이 직접 챙겨야 하는 건 맞다. 그렇더라도 이 권리를 행사할 때 너무 높은 허들을 넘어야 한다면, 그 기업은 ‘소비자 기만’이란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더욱이 고령층을 포함한 디지털 소외계층에겐 작은 문턱조차 높은 장벽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기업이 정말 포인트나 멤버십 서비스를 ‘소비자 혜택’으로 포장하고 싶다면 이런 사각지대부터 없애는 게 맞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광고로 혼탁해진 인터넷 검색 결과를 믿지 못했다. 연관성에만 집중한 검색엔진을 만들었고, 1998년 구글을 창업했다. ‘사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란 철학을 채택한 배경이다. 그러나 2004년 실적 압박이 커지자 광고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결과와 광고의 엄격한 분리”라는 해명에도 사회적 비판이 거셌다. 구글은 2015년 ‘옳은 일을 하자(Do the right thing)’로 모토를 바꿨다. ▷오픈AI가 생성형 인공지능(AI) 서비스 ‘챗GPT’에 광고를 붙인다고 한다. ‘플러스 요금제’(월 20달러)는 아니지만 새로 만든 ‘고(Go) 요금제’(월 8달러)를 쓰면 광고를 노출하겠다는 것이다. 전 세계 약 8억 명의 챗GPT 사용자 중 유료 가입자는 35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진입장벽을 낮춰 유료 가입자를 늘리는 한편 광고를 새로운 수익 모델로 삼으려는 계획이다. 넷플릭스 같은 구독료 기반 기업들이 신규 수익원을 찾을 때 단골로 써왔던 방식이다. ▷사용자들로선 반가울 리 없다. AI의 답변은 일반 키워드 검색 결과와는 달리 철저히 개인 맞춤형으로 제공된다. 그래서 사용자들은 결과물에 훨씬 더 깊이 빠져들고 쉽게 신뢰하게 된다. 문제는 특정 광고주의 이해관계에 따라 답변이 일부라도 오염될 가능성이다. AI가 추천한 광고를 클릭하면 이는 추가적인 데이터가 돼 다음 답변을 특정 방향으로 왜곡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 이미 유튜브에서도 알고리즘 추천에 매몰돼 한쪽 면만 보고, 결국 ‘확증편향’에 빠진 이들이 많다. ▷광고 추천은 나와 AI 사이의 대화에 제3자가 끼어든다는 의미다. 유료 구독자인 경우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내밀한 감정까지 AI와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 고민이나 취향까지도 AI가 속속들이 파악하고, 영구 기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오픈AI의 광고 전략은 그런 대화에 상품이나 서비스를 추천하고 돈을 벌겠다는 것이다. 광고의 알고리즘 미개입, 개인 데이터 보호 등을 강조하고 있지만 사용자들이 검증할 방법은 없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는 과거 “광고 비즈니스 모델은 최후의 수단”이라고 했다. 위험한 돈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비영리 법인이던 오픈AI의 영리화를 추진하다가 측근들로부터 쫓겨났다 복귀한 적도 있는 올트먼은 작년 10월 ‘영리 추구’의 걸림돌을 없앴다. 오픈AI 공동 창업자였던 일론 머스크도 올트먼이 비영리 법인 약속을 어겼다며 소송을 건 상태다. 오픈AI는 착한 기업을 표방했다가 돈을 벌어 몸집을 키운 구글의 전철을 똑같이 밟고 있다. 지나치게 자본화된 AI는 검색과는 차원이 다른 태풍을 몰고 올 수 있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낚시’ ‘전단지’ ‘체험권’ ‘숙제’…. 결이 같은 듯 다른 듯 알쏭달쏭한 이 단어들은 단 하나를 가리킨다. 15일부터 쿠팡이 지급하기 시작한 5만 원 상당의 ‘구매이용권’이다. 대규모 정보 유출 사태에 대한 보상 성격이라고 들었는데, 소비자들이 막상 받고 보니 별로 쓸 데가 없더라는 것이다.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격앙된 반응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쿠팡의 이번 이용권은 불편함의 삼박자를 다 갖췄다. 사용처가 제한적이고, 쓰기 까다로운 데다, 유효기간도 짧다. 쿠팡과 쿠팡이츠에선 각각 5000원씩만 쓸 수 있다. 그나마 한 번 결제할 때 다 못 쓰면 남은 금액은 포기해야 한다. 나머지 4만 원은 사람들이 잘 모르던 쿠팡 트래블과 명품 플랫폼 알럭스를 찾아가 용처를 확인해야 한다. 쿠팡 트래블에선 원래 치킨이나 커피 등의 기프티콘도 판매하는데, 이번 이용권으론 결제가 안 된다. 몇십만 원짜리 숙소나 티켓을 살 때만 쓰도록 해 많은 사람들에겐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3개월 내에 소진해야 해서 소비자들은 숙제하듯 까다로운 쇼핑을 해내야 한다. ▷이번 보상안은 쿠팡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매우 좋지 않을 때 나온 것이다. 3370만 명이 개인정보가 유출됐는데도 수장인 김범석 쿠팡Inc 의장은 국회 출석을 거부했다. 그 대신 청문회에 나온 해롤드 로저스 쿠팡 한국 임시대표는 “미국에선 법률 위반이 아니다” 등의 말로 국회의원들과 입씨름만 벌이다 갔다. 여기에 정보 유출자를 조사한 뒤 정부와 상의도 않고 기습 발표를 한다거나, 미국 정치권을 동원해 오히려 정부를 압박하는 모습은 소비자들의 실망감을 더 키웠다. 결국 ‘분위기 반전’ 카드로 보상안을 발표했는데, 그마저도 ‘고객 묶어두기’에 방점을 찍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성이 결여된 보상은 소비자들의 상처를 더 덧나게 하기 마련이다. 2021년 대규모 환불 중단 사태를 일으킨 머지포인트, 2016년 과다 수수료 징수 소송에서 진 미국 티켓마스터 등이 그랬다. 쿠팡의 5만 원 이용권도 그런 전철을 밟는 듯하다. 소비자들 중에는 쿠팡의 정보 유출 사태 자체도 심각하지만, 이후 대처 방식의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10여 개 로펌이 모집한 공동 손해배상 청구소송 참여자만 현재 60만∼7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보상 쿠폰마저 소비자의 화를 돋우고 있으니 이 숫자는 더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쿠팡이 국내 온라인 유통시장을 빠르게 장악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모든 종류의 물건을 가장 편하게 언제 어디서나 받아볼 수 있다는 편의성 덕택이었다. 그런데 정작 위기에 몰리자 자신의 정체성과는 정반대의 대책을 내놓고 있다. ‘쿠폰이 팡팡 쏟아진다’에서 이름을 지었다는 쿠팡이 소비자를 대하는 태도는 창립 초기에 비해 180도 달라진 것 같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석유화학 업계가 수술대에 오르기 시작한 건 작년 11월부터다. 충남 대산 롯데케미칼과 HD현대케미칼의 나프타분해시설(NCC) 통폐합이 정부에 낸 ‘1호 구조조정 방안’이었다. 나머지 기업들도 정부가 마감시한으로 정한 지난달 하순 빠짐없이 ‘자구안’을 제출했다. 매년 수천억 원씩 적자가 쌓이는 상황에서 기업들도 업계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규모 설비를 사고파는 것도 엄청난 비용을 수반하는 일이어서 아무도 먼저 나서지 않았다. 올해 정부 압박 강도가 거세지자 등 떠밀리듯 나온 기업들 간 ‘빅딜’은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숫자’ 집착하다 ‘체질’ 놓쳐선 안 돼 왠지 낯이 익다. 꼭 10년 전에도 석유화학 업계는 정부 주도로 똑같은 구조조정을 시도했었다. 2016년 ‘산업의 쌀’로 불리는 에틸렌의 국내 생산 설비 규모는 860만 t 수준이었다. 당시 테레프탈산(TPA) 공급 과잉 문제가 더 두드러지긴 했어도 중국 자급률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던 에틸렌 역시 체질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정부는 분산된 설비들을 지역별 인수합병(M&A)을 통해 통합하는 방식을 추진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그해 하반기 국정농단 사태로 박근혜 정부는 정책 동력을 잃었다. 이듬해 들어선 문재인 정부의 각 부처는 적폐 청산에 초기 역량을 모두 쏟았다. 기업 구조조정이라는 중장기 과제는 정책 우선순위에 오르지 못했다. 정부 압박이 느슨해지자 기업들은 오히려 에틸렌 생산 설비를 늘려 현재 규모는 1300만 t에 이른다. 그사이 중국은 에틸렌 설비 규모를 3배로 키워 글로벌 공급 과잉 우려도 현실이 됐다. 가격 경쟁력에서 중국에 압도당한 석유화학 제품은 수출길이 막혔다. 정부가 다시 한번 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에 드라이브를 거는 건 늦었지만 환영할 만한 일이다. 다만 이번에는 단순한 ‘숫자 줄이기’에 집착해선 안 된다. 일부 설비 통폐합에만 만족했다가 저가의 중국산 제품에 안방을 내어주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생산 효율성이 상대적으로 좋은 기업에 범용 제품을 몰아줘 중국에 뒤지지 않는 가격 경쟁력을 갖추게 하고, 다른 기업은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선(先) 자구 노력, 후(後) 지원’이란 원칙도 한 번쯤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일부 산업, 일부 기업에 특혜를 줄 수는 없다는 정부 입장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산업의 존폐가 걸려 있는 비상 상황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산업연구원의 최근 보고서도 그런 시각을 담았다. 이 기관은 석유화학 구조조정이 늦어진 까닭이 기업들이 서로 눈치만 보며 버티기 전략을 고수하는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정부가 선제적으로 사업 재편 대상을 발굴하고 구체적인 지원책을 실행에 옮겨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도 조언했다. 정부의 소극적 구조조정 지원은 이미 실패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낡은 산업구조 개혁 첫 성공 사례로 작년 한국 수출은 처음 7000억 달러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슈퍼사이클에 올라탄 반도체를 빼면 오히려 소폭 줄었다. 15대 수출 품목 중 9개가 전년보다 뒷걸음질 쳤다.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의 비중은 24%를 넘어섰다. 특정 산업 의존도가 이렇게 높은 나라는 중동 산유국과 몇몇 원자재 수출국을 제외하면 대만(반도체)이나 아일랜드(의약) 정도밖에 없다. 반도체 부진으로 15개월 연속 무역적자를 냈던 게 불과 3년 전이다. 다른 산업 체질 개선이 시급한 이유다. 자동차, 정유, 석유화학, 철강 등 한국 주력 산업들은 대부분 1970년대를 전후해 태동했다. 50년이 넘은 낡은 산업구조를 하나씩 고쳐 나가야 한다면 당장 경고등이 들어온 석유화학을 첫 성공 사례로 남겨야 한다. 저성장 탈출 해법도 여기에 있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아저씨 셋이 모이면 처음엔 육아나 교육에 대한 고민을 찔끔 나누고 이내 부동산 얘기로 옮겨타는 게 불문율이었다. 마지막은 늘 언성을 높여 정치 논쟁을 벌이다 막잔을 비우곤 집으로 향했다. 그러던 풍경이 최근 확 바뀌었다. 주식으로 시작해 주식으로 끝난다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작년 하반기부터 심상치 않던 코스피가 새해 들어 매일 최고치를 경신 중이니 화제를 독식할 수밖에 없나 보다. ▷코스피는 7일 전날 대비 0.6% 또 올랐다. 장중 4,600 선까지 넘었다가 오후 들어 하락세로 돌아섰는데, 장 막판 기어이 상승으로 마감했다. 7개월 전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가 됐다. 미국이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뉴욕 법정에 세운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는데 증시는 놀라는 기색조차 없다. 증권사들은 앞다퉈 코스피 목표가를 상향 조정하고 있다. ‘코스피 5,000 시대’는 아직이라던 입장을 바꿔 이젠 목표가를 5,650으로 올려잡은 곳까지 나왔다. ▷기록적인 상승장에서도 모두가 웃는 건 아니다. 전체 지수는 계속 빨간색인데 오른 종목보다 내린 종목이 더 많다고 투자자들은 울분을 내뱉는다. 코스피가 반도체 일부 종목에 무등을 탄 모양새라서다. 실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투톱’의 시가총액은 835조 원, 540조 원으로 둘을 합치면 유가증권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6%를 넘는다. 두 기업 주가는 작년 한 해만 각각 125%, 274%가 올랐다. 이들을 제외하면 우울한 ‘블루’ 종목들이 부지기수다. 일부 투자자는 주가가 내리면 이익이 나는 인버스 상품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봤다. 상승 랠리가 이렇게 길어질지 몰랐던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을 주변에 호소하는 이들도 적잖다. ▷‘불장’에 빠지지 않는 게 ‘빚투’다. 현재 신용거래융자 잔액은 27조8000억 원에 이른다. 비상계엄 충격이 컸던 2024년 말 15조8000억 원 대비 75%가 늘었다. 빚을 내서라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투자자들의 결연함이 숫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문제는 상승 랠리가 끝난 뒤다. 미처 손쓸 새도 없이 반대매매를 당하면 투자 원금은커녕 빚만 남게 된다. IMF 외환위기 직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주가 대상승 국면에서도 무리하게 투자했다 전 재산을 날린 이들이 많았다. ▷시장에서는 코스피 상승 곡선이 당분간은 이어질 거란 낙관론이 우세하다고 한다.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 등 해외 시장도 마찬가지다. 동학개미든 서학개미든 아직은 기회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다만 요즘처럼 하루 변동 폭이 큰 롤러코스터장에서는 꼭 좋은 결말만 보장되진 않는다. 나만 낙오될 것 같다는 불안함에 뛰어든 ‘포모(FOMO)족’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있을지 모른다며 투자 결정을 미루는 ‘포보(FOBO)족’이 더 유리한 때일 수도 있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는 워런 버핏의 도시다. 그의 고향이자 68년째 거주 중인 2층 단독주택이 있는 곳이다. 버크셔해서웨이(버크셔) 소재지도 물론 오마하다. 인구 50만 명의 이 중소 도시는 외부 인파 수만 명이 버크셔 주주총회를 찾는 5월만 빼면 대체로 조용하고 차분한 편이다. 버핏은 복잡하지 않은 오마하의 환경이 투자 전략을 구상하고 중요한 판단을 내리기에 적합하다는 말을 하곤 했다. ▷작년 11월 버핏의 마지막 연례 주주서한에서 유독 눈에 띄었던 대목은 오마하의 인연들이다. 그의 평생 동반자 찰리 멍거가 맨 먼저 등장한다. 여섯 살 차이인 둘은 10대 때 버핏의 할아버지 식료품점에서 일한 시기가 아슬아슬하게 엇갈렸다. 버핏은 20대 후반에 만난 멍거를 “더없이 훌륭한 스승이자 보호자 같은 형”이라고 했다. 1980년대 적자 신문사를 가장 쏠쏠한 수익원으로 바꾼 스탠 립시, 1999년 미드아메리칸에너지 인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월터 스콧 주니어도 평생 동료였다. 젊은 시절 버핏의 맞은편에 살며 가족끼리도 친했던 커피 영업사원 돈 키오는 훗날 코카콜라의 사장을 지낸 뒤 버크셔에 합류했다. ▷오마하 사람들과 오랜 인연을 이어간 삶과 경영 방식은 ‘가치’, ‘장기’ 두 단어로 요약되는 그의 투자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보유 기간은 ‘영원’이다”(1988년), “주식시장은 성급한 사람에게서 인내심 있는 사람에게 돈을 옮기는 장치다”(1986년) 등은 사람을 쓰고 키우는 데도 그대로 적용됐다. 오마하의 인연 중 마지막 즈음 나오는 인물이 1일 버크셔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그레그 에이블이다. 캐나다 출신인 에이블도 1990년대 몇 년간 버핏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살았다고 한다. 버핏은 “오마하의 물에 무슨 특별한 성분이라도 있는 걸까”라며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올해 아흔여섯이 된 버핏은 작년 5월 주총에서 예고한 대로 CEO 직을 내려놨다. 쓰러져가던 직물회사 버크셔는 1965년 버핏이 인수한 뒤 60년 만에 연 매출 4000억 달러(약 580조 원)의 투자회사가 됐다. 이 기간 주식 가치는 610만 % 오른 것으로 추산된다. 동일 기간 배당금 포함 S&P500 지수 수익률의 130배가 넘는다. 버핏 개인 재산은 1510억 달러로 세계 10위다. ▷버핏이 CEO에서 물러나기로 한 건 “재산 99%를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약속을 빨리 지키기 위해서다. 그는 사망한 첫째 부인과 세 자녀 이름으로 된 재단에 지속적으로 재산을 기부하고 있는데, 자녀들의 나이가 벌써 68세, 72세, 73세가 돼 더 미루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멍거, 립시, 스콧, 키오 등 평생의 친구들과 하나둘씩 이별하고 있는 ‘오마하의 현인’은 이제 그의 마지막 남은 과업을 준비하고 있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놀랍기도 했지만 큰 영광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존 F 케네디 공연예술센터’가 18일 ‘도널드 J 트럼프-존 F 케네디 공연예술센터’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한 말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런 결정을 내린 센터 이사회 의장이 트럼프 본인이다. ▷1971년 개관한 이 센터는 트럼프 대통령에겐 스스로에게 준 당선 축하 선물과 다름없었다. 1963년 암살당한 제35대 케네디 대통령을 기리는 기념 공연장이자 미 수도의 랜드마크라 더 탐이 났던 걸까. 그는 취임 직후 이사회를 측근으로 물갈이하고 자신을 이사회 의장에 ‘셀프’ 임명했다. 센터 측은 이사회 결정을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다음 날 ‘트럼프’ 이름을 건물 외벽에 새겼다. 23일 CBS가 녹화 방영한 ‘트럼프-케네디센터 공로상’ 시상식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집주인인 양 MC 역할까지 자처했다. 주인공인 문화예술인들은 들러리로 전락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마이 네임’ 정치는 영역을 가리지 않고 노골화하고 있다. 그는 5조 원이 넘게 투입돼 2030년 완공 예정인 프로미식축구리그(NFL) 워싱턴 커맨더스의 새 안방구장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길 원한다고 한다. 미 해군의 신형 전함도 ‘트럼프급 전함’으로 불릴 것으로 보인다. 100만 달러를 내면 영주권이나 체류 허가를 받는 이민 프로그램은 ‘트럼프 골드 카드’라 이름 붙였다. 곧 나올 500만 달러 이상 기부 프로그램은 ‘트럼프 플래티넘 카드’다. 의회 산하 싱크탱크인 ‘미국 평화연구소’는 ‘도널드 트럼프 평화연구소’가 됐다. 사진도 곳곳에 쓴다. 내년 발행되는 미 국립공원 입장권은 물론이고 비록 초안이지만 ‘미국 독립 250주년 기념 주화’에도 트럼프 이미지가 들어갔다. ▷미국 내 여론은 좋지 않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2.0’이 제왕적 대통령제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고 비꼬았다. MSNBC는 “트럼프의 주된 관심사는 국정 운영이 아닌 자기 과시와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셀프 우상화” “자기 홍보 노골화” 등 트럼프의 ‘자기 이름 중독증’에 대한 비판은 신랄하다. 트럼프-케네디센터 이름 확정 후 재즈 뮤지션 척 레드는 2006년부터 그곳에서 해 온 크리스마스이브 공연을 취소했다. ▷현대 사회에서 지도자 이름을 공적 영역에 활용하는 건 그 사람이 직에서 물러났거나 사후에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 권력자 이름을 마케팅 용어처럼 사용하는 건 독재국가에서나 볼 법한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편으로 ‘탁월한 사업가’다. 퇴임한 그가 공연장, 경기장, 전함 등을 상대로 이름 사용료를 요구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들려오지 말란 법도 없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올 3월 세계배드민턴연맹(BWF)이 주관한 ‘2025 전영오픈’ 결승전 2세트. 6-6으로 맞선 두 선수의 랠리가 1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상대의 마지막 79번째 샷이 네트에 걸리는 순간 안세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배드민턴 여자단식 역사상 최장 랠리로 기록된 순간이었다. 안세영은 이 득점을 시작으로 상대를 거세게 몰아붙였고, 체력적 우위를 내세워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안세영의 하루는 오전 5시 반 400m 트랙 열 바퀴를 뛰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전 배드민턴 훈련과 오후 근력 훈련, 그리고 야간 기술 훈련으로 이어진다. 이 일과가 매일 반복된다. 경기 후반부 당장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짓고도 어김없이 코트에 몸을 던져 셔틀콕을 받아 넘기는 건 그 덕에 가능했다. 이른바 ‘질식수비’라 불리는 안세영의 플레이스타일은 상대에겐 공포의 대상이다. ▷안세영은 등장부터가 강렬했다. 만 15세가 되던 2017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8전 전승을 거뒀다. 중학생이 선발전을 통과한 것도 놀랍지만 이렇게 압도적 성적을 거둔 사례는 없었다. 물론 국제 무대는 만만치 않았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선 첫 경기 만에, ‘2020 도쿄올림픽’은 8강에서 모두 같은 선수에게 져 탈락했다. 도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중국 천위페이였다. 안세영은 2022년 7전 8기 만에 복수에 성공했다. 숙적을 넘어선 그는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과 ‘2024 파리올림픽’을 연달아 제패했다. ▷국내 팬들에게 안세영의 이미지는 단지 운동만 잘하는 선수가 아닌, 할 말은 하는 ‘당돌한’ MZ다. 그는 아시안게임 2관왕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저 평범한 운동선수”라며 광고 모델·방송 출연을 모두 고사해 화제가 됐다. 작년 올림픽 경기가 끝난 뒤엔 대한배드민턴협회와의 갈등을 폭로하면서 스스로 이슈의 중심에 섰다. 올 7월 일본 요넥스와 4년 100억 원 수준의 후원계약을 맺은 뒤 “결국 모든 게 돈 때문”이라는 날 선 비판이 쏟아졌는데도 안세영은 흔들리지 않았다. ▷안세영은 워낙 뛰어난 수비력을 갖춘 데다 최근 크로스 헤어핀과 대각 스매싱 같은 공격 기술도 향상돼 완성형 선수에 가까워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역대급’ 시즌을 완성해 낸 원동력이다. 올해 거둔 11번의 우승, 연간 누적 상금 100만3175달러, 시즌 승률 94.8% 모두 남녀를 통틀어 BWF 신기록이거나 타이 기록이다. BWF 공식 SNS 계정은 안세영의 시즌 마지막 우승 후 “The YOUNG GOAT(역사상 최고 선수)!”라고 썼다. 스물셋 배드민턴 여제는 그럼에도 “아직 내 전성기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언제나 목마른 비인기 종목 ‘슈퍼스타’의 갈증을 안세영이 채워주고 있다.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대한민국의 오늘을 표현하는 말로 ‘혼돈’이나 ‘혼란’보다 더 적합한 말을 떠올릴 수 있을까.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나 배웠을 법한 ‘비상계엄’이 현실화하면서 서울 한복판에선 군인들과 시민들의 대치 상황까지 빚어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을 뜻하는 ‘X-이벤트’가 2024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것이다.국민도, 소상공인도, 기업도 이미 힘들다비상계엄 같은 초유의 사태가 없었더라도 국민은 이미 힘들다. 금리와 체감 물가는 여전히 높고, 질 좋은 일자리 구하기는 갈수록 어렵다. 주가 폭락은 자산가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소액 투자자들의 시름을 더 깊게 만든다. 소상공인들은 굳게 닫힌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 방법이 없다. 이러다 아르바이트생 월급이나 제때 챙겨줄 수 있을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기업들도 글로벌 지정학적 리스크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내수시장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다. 비상경영을 선포한 곳도 여럿이다. 산업별로 들여다봐도 잘나가던 한국 자동차와 배터리는 ‘전기차 캐즘’이란 복병을 만났다. 중국발 공급 과잉에 석유화학, 철강처럼 한가락 하던 주요 수출 업종들도 동반 부진에 빠졌다. 건설에 경제 부양 책임을 맡기겠다는 기대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유통은 벌써 사업 구조조정에 한창이다. 벼랑 끝에서 살아 돌아온 반도체가 그나마 한국 경제를 지탱해 주곤 있다. ‘트럼프 스톰’의 불똥이 언제 튈지 몰라 불안하긴 매한가지지만.기업들은 3일 밤 벌어진 때아닌 난리통에 4일 이른 아침부터 긴급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다. 뾰족한 수가 나올 리 없었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대기업 임원은 “하나같이 ‘이게 무슨 일이냐’는 장탄식만 내뱉었다”고 했다. 정치적 안정이 빨리 찾아오길 막연히 기대하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단다.정치권과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경제마저 흔들려선 안 된다. 전 국민이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어서다. 경제는 생물과 같다.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뛸 수 없는 것처럼 경제도 한번 멈추면 다시 시동을 걸기 힘들다.철저한 계획에 따르더라도 용광로 가동을 한번 멈추면 재가동까지는 길면 반년이 걸린다고 한다. 만에 하나 사전 준비 없이 불을 꺼뜨리면 용광로 전체가 거대한 철강 덩어리로 굳어져 재가동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쇳물을 받아 철강제품을 만들던 압연공장, 냉연공장도 망가져 결국 제철소 문을 닫아야 한다. 나라 경제 역시 멈추면 굳어 버린다.글로벌 시장에서 내로라하는 강자들과 싸워야 하는 기업들에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해주는 게 국가가 할 일이다. 미국, 유럽, 중국, 일본, 대만 등은 저마다 보조금이다 수입품 관세다 하며 자국 기업 살리기 경쟁에 나서고 있다. 유독 한국 기업들만 상법 개정안 같은 새로운 위협에 시달려야 한다.이런 위기에서야말로 경제가 우선이다급기야 간밤에는 국가 브랜드마저 추락했다. 해외에선 ‘사우스 코리아’를 ‘노스 코리아’로부터 침공을 받을 수 있는 전쟁 위험 국가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국내 기업들이 외국 자본을 유치하거나 해외 기업을 국내로 끌어들일 때 보이지 않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하물며 ‘전쟁 없이도 계엄령 선포가 가능한 나라’가 됐으니 어떻게 믿고 투자하라고 하겠나.지금의 혼돈이 언제 끝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정치 싸움에 경제를, 그리고 기업을 볼모로 잡는 일만 없었으면 한다. 경제가 무너지면 국회의원 300명이 받아가는 세비도, 대통령실을 포함한 행정부 공무원들이 받는 월급도 없다.바닥이 보이지 않는 내수침체를 되살릴 방안을 마련하고 이런 위기에서도 기업들이 경영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스스로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온 사람들이 당장 해야 할 일들이다. 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롯데그룹의 지난해 매출액은 67조7000억 원으로 전년 71조8000억 원보다 4조1000억 원(5.7%)이 줄었다. 신세계그룹 역시 작년 매출액이 35조8000억 원으로 전해의 37조1000억 원에서 1조3000억 원(3.5%) 뒷걸음질 쳤다. 설령 올해 실적이 다소 반등한다 하더라도 과거에 누렸던 성장세를 기대하긴 힘들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두 기업 스스로도 위기의식이 크다. 롯데지주는 8월부터 비상경영 체제에 들어갔다. 실적 부진 계열사인 롯데면세점과 롯데케미칼은 앞서 6월, 7월 연이어 비상경영을 선언했다. 롯데지주와 화학부문 계열사 임원들은 이번 달부터 급여까지 일부 반납하기로 했다. 신세계라고 다르지 않다. 신세계그룹은 이미 지난해 9월 정기 인사에서 계열사 최고경영자(CEO) 25명 중 9명을 바꿨다. 올해 3월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승진한 뒤엔 수시 인사를 통해 신세계건설, G마켓, 쓱닷컴의 CEO가 교체됐다. 그리고 지난달 말 정기 인사에서 신세계푸드, 신세계인터내셔날, 신세계야구단 등 몇 곳의 수장이 추가로 바뀌었다.활력 떨어진 유통 대기업들재계 6위, 11위에 올라 있는 두 거대 그룹이 부진한 이유는 다양하다. 롯데는 중국발 석유화학 공급 과잉으로 인한 화학계열사 실적 추락이, 신세계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확산의 직격탄을 맞은 신세계건설 유동성 위기가 우선 꼽힌다.하지만 가장 뼈아픈 건 그룹 근간인 유통 부문에서 성장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비 환경부터가 녹록지 않다. 한동안 이어져 온 고금리 기조로 얼어붙었던 내수 시장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으니 유통 기업들은 딱히 손쓸 방법이 없다. 소비자들이 쿠팡과 같은 온라인 플랫폼으로 급격히 쏠리는 사이 오프라인 유통 채널의 영향력이 예전같지 않아진 것도 부담이다.두 기업이라고 새로운 모멘텀을 찾기 위한 도전이 없었을까.롯데는 2022년 1월 한국미니스톱을 사들여 편의점 체인 세븐일레븐의 덩치를 키웠다. 이듬해 12월에는 바이오사업 진출에 속도를 내기 위해 미국 제약사 브리스톨마이어스 스큅의 시러큐스 공장을 인수했다. 작년 3월 전지소재 업체 일진머티리얼즈(현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를 2조7000억 원에 인수하면서 전기자동차 생태계에도 뛰어들었다. 신세계는 2021년 4월 여성의류 플랫폼 W컨셉을, 그해 6월에는 3조 원대에 이베이코리아를 그룹에 편입시켰다. 2022년 3월엔 플랫폼 구축 전문기업 플그림을 샀다. 올해 10월엔 뷰티 전문회사 어뮤즈까지 품었다. 문제는 신사업 진출(롯데)이나 디지털 경쟁력 강화(신세계) 어느 것도 아직 ‘성공적’이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업태의 본질’에서 답 찾아내야유통업계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 속출하는 가운데 그나마 활기가 도는 전장이 있긴 하다. ‘물건을 판다’는 개념을 넘어 ‘경험을 제공한다’는 콘셉트를 내세운 복합쇼핑몰이다.부동산 개발 회사인 신세계프라퍼티의 스타필드는 하남점, 고양점, 서울 코엑스점, 안성점에 이어 올 1월 MZ세대들의 놀이터를 자처한 수원점을 오픈했다. 광주와 인천 청라, 경남 창원에도 신규 점포를 계획하고 있다. 이에 질세라 롯데도 타임빌라스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꺼내들었다. 지난 달 롯데백화점 수원점을 리뉴얼한 타임빌라스 1호점을 낸 것을 시작으로 국내에만 13곳에 점포를 내겠다고 한다.미국에서 아마존이라는 강력한 시장 파괴자의 등장에 잠시 흔들렸던 월마트는 지금도 ‘글로벌 넘버 원 유통기업’이라는 지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오프라인 채널이 가진 ‘업태의 본질’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면서도 물류, 배송, 상품 구성 등을 끊임없이 혁신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국내 유통산업의 역사를 함께 써온 두 기업이 찾아야 할 답도 결국 여기에 있지 않을까.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은 올 초 민생토론회에서 ‘1·10 주택공급 대책’을 발표할 때 “재개발·재건축 규제를 아주 확 풀어버리겠다”고 했다. 당시 대책의 핵심은 30년 이상 아파트 재건축 시 안전진단 절차를 사실상 건너뛰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6월 기업구조조정(CR) 리츠를 10년 만에 부활시키겠다고 했다. 8월 들어서는 ‘재건축·재개발 특례법’ 추진을 포함한 ‘8·8 주택공급 대책’과 기업이 운영하는 20년 이상 장기임대주택 카드를 연이어 꺼내들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도심 지역을 중심으로 집값이 심상치 않게 뛰자 공급 속도를 높여 이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어서였다.시멘트 수입해 공사비 안정화하겠다는 정부 그런데 이런 대책들이 나올 때마다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공사비 문제였다. 정부가 아무리 드라이브를 걸어도 민간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공허한 대책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민간의 움직임을 막고 있는 게 치솟은 공사비였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발표하는 공사비 지수는 2020년 연간 평균을 100으로 놓았을 때 작년 127.90까지 올랐다. 올해는 2월부터 6월까지 5개월 연속 130을 웃돌기도 했다. 8월 역시 129.71이다. 전국 재개발 및 재건축 현장 곳곳에선 조합과 시공사 간 공사비 증액 갈등으로 시끄럽다. 정부도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을 거다. 이달 초 나온 공사비 대책이 그 결과물이었다. 눈에 띄는 내용은 시멘트 수입 지원이다. 국내 시멘트 가격은 2021년 t당 7만8800원에서 지난해 11만2000원까지 40% 넘게 올랐다. 수입 시멘트를 들여오도록 유도하면 이 상승세가 멈출 것이란 논리다. 다시 한번 꺼낸 ‘공급’ 카드다. 그런데 건설사들은 왜 이제까지 시멘트를 수입하지 않았을까. 간단히는 이로울 게 별로 없어서다. 시멘트는 반도체와 다르다. 부피가 커서 수입이나 수출을 하려면 운송비가 너무 많이 든다. 그나마 가까운 중국이 유일한 수입처가 될 텐데, 그마저도 계산이 맞지 않았다. 정부가 시멘트 저장시설과 유통설비 인허가를 지원해 준다 한들 해결될지 의문이다. 결국 둘 중 하나다. 우선 정부 의도와 달리 수입이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나머지는 비싼 운송 비용을 감안하고도 공사비를 낮출 수 있을 만큼 아주 값싼(저질) 시멘트를 들여오는 것이다. 정부는 수입 시멘트 품질인증을 강화해 안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한다. 국내 시멘트 시장에 영향을 줄 만큼 의미 있는 규모를 수입하려면 쉽지 않은 과제다. 정부 대책은 타깃 설정이 중요하다. 이미 오른 공사비를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걸 목표로 삼는 게 맞을지는 고민이 필요하다. 조류인플루엔자(AI)가 유행할 때 스페인산 계란을, 배추값 잡으러 중국산 배추를 수입하는 것과는 다르다. 시멘트를 수입해서도 공사비가 내려가지 않는다면, 그때 가선 이동통신사에 ‘통신비 인하’를 요구하듯 할 순 없지 않은가.현장 갈등의 중재자 역할 나서 주길 차라리 현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주택공급 속도를 높일 방안을 찾는 데 정부의 힘을 모아줬으면 한다. 이를테면 시공사와 조합 간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각 지방자치단체에 설치해 뒀지만 현재 유명무실해진 도시분쟁조정위원회의 활용도를 높이는 것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공사비를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시공사와 아파트를 싸게 지어 수익성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는 조합이 이견을 보이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지금처럼 공사비 부담이 클 때 양측 의견은 더 첨예하게 갈리기 마련이다. 정부가, 또는 정부의 위임을 받은 이가 적절한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도심 주택공급이라는 목적지에는 의외로 빨리 도달할 수 있다. 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1994년 10월 어느 날 밤. LG유통 영업담당 정재형 사원의 신혼집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밤 1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누구일지 단박에 감이 왔다. 전화기 너머의 한껏 풀 죽은 목소리, 역시나 ‘그’였다. 주섬주섬 옷을 꺼내 입는 정 사원에게 아내가 한마디 쏘아붙였다.“대기업 다닌다더니.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주말이고 밤이고 불려 나가?”결혼한 지 6개월밖에 안 된 아내에겐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다. 정 사원이 투덜거리며 10여 분을 걸어 도착한 곳은 LG25 편의점이었다. 유리문 안쪽으로 넋이 나간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가 보였다. 본사에서 도착한 물건들은 박스째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짤랑짤랑’ 출입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는 구세주를 만난 양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발주 내용을 시스템에 넣는 게 너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불렀다고 했다. 이대로면 5시간이고 6시간이고 해뜰 때까지 못 끝낼 거라면서.내가 맡은 점포인 걸 어쩌겠는가. 게다가 형, 동생 하며 친하게 지내기로 한 ‘그’의 부탁인데…. 세 살 형인 ‘그’도 신혼 5개월 차였고, 형수는 임신 중이라고 했다. 문을 연 지 한 달도 안 돼 아직은 버벅대는 거라고, ‘그’도 언젠가 익숙해질 거라고 정 사원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그’, 최형규 씨(61)는 2024년 9월 11일 GS25(옛 LG25) 30주년 경영 기념패를 받았다. 이젠 GS리테일(옛 LG유통) 편의점사업부 대표가 된 정 사원이 직접 패를 건넸다.》LG유통은 1990년 12월 LG25 경희점을 시작으로 편의점 사업에 뛰어들었다. 2004년 LG와 GS가 분리되면서 LG유통은 GS리테일로, LG25는 GS25로 간판을 바꿨다. 현재 GS25 점포 수는 약 1만8000개. 최 씨의 서울 구로구 신도림점은 328호다. 30주년 기념패는 최 씨가 11번째, 한자리에서 편의점을 꾸려 온 건 그보다 적다. “바로 옆 유리 가게 말고는 우리 편의점이 이 동네에서 제일 오래됐죠. 예전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니까요.” 신도림점은 대로변이 아닌 주택가 안쪽에 있다. 처음엔 거의 단독주택뿐이었다. 1985년 입주한 구로우성아파트 3개 동이 유일한 고층 건물이었다. 신도림역으로 이어지는 여관 거리의 투숙객들, 나중에 자리를 옮긴 제약회사와 철강공장 직원들도 종종 찾아오긴 했다. 그래도 손님 대부분은 동네 주민들이었다. 지금은 아파트가 줄줄이 들어섰고, 먹자골목도 생겼다. 최 씨의 편의점은 동네가 자라는 모습을 1만1000일 동안 고스란히 목격해 왔다. ● 낙(樂)최 씨 동네도 2002년 여름은 뜨거웠다. 그는 월드컵이 시작하기 전 40인치 액정표시장치(LCD) TV부터 샀다. 그러곤 편의점 외부에 내걸었다. 한국 축구대표팀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편의점 앞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학생들이나 젊은 직장인들은 죄다 시청역, 강남역 같은 핫 플레이스로 몰려들었지만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모일 곳이 별로 없었다. 술집이나 호프집에 자리를 잡지 못한, 그러나 마음만은 청춘이었던 40, 50대들은 캔맥주 하나씩을 손에 쥔 채 편의점 앞 테이블 4개에 옹기종기 앉았다. 많으면 30명까지도 모였다. 붉은악마 공식 티셔츠가 없으면 목이 늘어난 빨간색 티셔츠를 아무거나 주워 입고 나왔다. 자녀들에게 부탁했는지 얼굴에 응원 문구 스티커를 붙인 이도 있었다. 동네에서 유일한 ‘실외’ 응원 장소다 보니 지나가던 행인과 차량이 모두 하나가 됐다. “대∼한 민! 국! 짝짝짝 짝! 짝!” 최 씨는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안정환 선수가 연장전 골든골을 넣는 순간에 대해 “까무러쳐 쓰러졌을 정도”라고 기억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야 뭐, 다 친구가 됐지.” 가게 문을 연 지 8년. 동네 주민들과 안면을 트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경기 파주시에서 온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해 여름 대한민국의 모든 언어는 축구로 통했다. 구로동도 예외일 리 없었다. ‘응원 맛집’ 편의점은 그렇게 동네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갔다. ● 애(哀)늘 좋았던 때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1997년 11월 22일 아침, 편의점으로 배달된 조간신문(동아일보)에는 ‘IMF에 200억 달러 요청’이라는 헤드라인이 대문짝만하게 걸렸다. 그 전에도 국제통화기금(IMF)이란 단어는 여러 번 들어는 봤었다. “IMF? 그게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한 몇 달 지나니까 급격하게 변하더라고요. 담배나 술, 생필품 같은 걸 사람들이 사가질 않는 거예요. 매출이 뚝 떨어지니 낮에 일하던 아르바이트생부터 내보내야 했죠.” 편의점 맞은편 구로우성아파트는 은행원들이 모여 지은 ‘조합원 아파트’였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이 금융권이라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구로우성아파트 주민 역시 기업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해 가지 못했다. 최 씨는 “그저께까지 은행 지점장 하던 분이 평일 낮인데도 슬리퍼를 끌고 편의점에 와 담배를 사가더라”면서 “편의점 사업이 어떤지 물어오는 손님도 꽤 많았다”고 했다. 인근 거리공원에서 지내는 노숙인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편의점을 찾아왔다. 문 앞에 서서 손님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일도 허다했다. 경찰에 신고해도 한참 떨어진 곳에 데려다 놓는 것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술 한 병을 쥐여줘야 노숙인은 발길을 돌렸다. 이후에도 경기는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했다.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팬데믹 등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때다. 30년 경력의 편의점 경영주인 최 씨에겐 경기를 감별하는 그만의 잣대가 만들어졌다. “경기가 좋으면 알바를 아무리 뽑으려 해도 전화 한 통이 안 와요. 그런데 경기가 별로 안 좋을 땐 구인 광고 한 번에 전화가 쏟아집니다. 애들이 직장 구하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거죠.” 최 씨는 거기에 한마디 덧붙였다. “경기가 안 좋으면 취업이 어려운지 알바생이 몰려요. 요즘이 딱 그래서 씁쓸해요.” ● 노(怒) 최 씨의 편의점도 굴곡이 있었다. 처음 1년은 좋았다. 월 매출액이 초기 120만 원 언저리에서 180만 원까지 올랐다. 첫아들을 출산한 아내도 식품 대기업을 그만두고 육아를 하면서 편의점 일을 도왔다. 그래도 충분히 먹고살 만한 벌이가 됐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1995년 가을, 건물주였던 와이셔츠 제조 업체가 어려워지면서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다. 한 번 유찰될 때만 하더라도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유찰이 되니 목이 타들어갔다. 한 번만 더 유찰되면 채권 우선순위상 보증금 1억2000만 원을 그대로 날릴 판이었다. 거리에 나앉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다행히 골프웨어 업체가 세 번째 만에 건물을 낙찰받았다. 하지만 회사 오너는 1층에 쇼룸을 꾸미겠다고 통보해 왔다. 그는 몇 날 며칠을 찾아가 설득했다. “빚을 지고 시작했는데 지금 나가면 정말 거지가 된다고 간곡히 사정했습니다. 딱해 보였는지 회장님이 ‘그럼 그냥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그 건물주와 20년을 함께했어요.” 또 다른 고비는 6년 전쯤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2017년부터 3년간 최저임금을 30%나 올리면서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함께 일하던 아르바이트생 3명 중 1명을 내보내고, 빈자리는 자신과 아내가 몇 시간씩 더 일하며 메웠다. 그것도 힘들어지자 나머지 아르바이트생도 주 15시간 미만씩 일하는 단기 아르바이트 여러 명으로 대체했다. 너무 급격한 인건비 상승을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최 씨는 “다른 자영업자들도 다 마찬가지일 텐데, 당시엔 정말 그만둬야 하나 여러 번 생각했다”면서 “인건비를 조금씩 올리면서 알바를 여러 명 쓰는 것과 빨리 올려서 알바를 줄이는 것 중 뭐가 애들을 위한 건지 한번 고민해봤으면 어땠을까”라고 했다.● 희(喜) 최 씨는 이런저런 어려움을 모두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건 결국 사람 덕분이라고 했다. 정재형 사원은 초기에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달려와 줬던 동생 덕에 시골뜨기의 서울 적응기는 몇 달 만에 끝낼 수 있었다. 처음 같이 일했던 아르바이트생도 똑똑했다. 바로 앞 구로우성아파트에 살던 그 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 앞 편의점에 이력서를 냈다. 연예인이 되고 싶다면서 대학수학능력시험도 치르지 않고 편의점에 출근했던 아이였다. 부모님께 미안하기도 했지만 내심 고맙기도 했었다. 3년 가까이 일한 그 아인 일을 그만두고 나서도 친구들과 몇 번을 찾아왔었다. 며칠 전 추석 연휴 때는 5년 전쯤 일했던 친구가 다녀갔다. 데려온 아기는 곧 돌을 앞두고 있다 했다. 캐나다인과 결혼해서인지 이름은 ‘올리비아’라고 지었다고 했다. 남편 직장이 있는 대전에 신혼살림을 차렸는데 명절 때 부모님을 뵈러 왔다가 편의점 사장님이 생각나더란다. 최 씨와 아내는 그 친구가 가져온 작은 선물 보따리가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자주 오던 초등학생, 중학생 아이들이 다 커선 군대 다녀왔다고, 취직했다고, 또 결혼했다고 가끔 찾아와요. 알바로 일했던 친구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럴 때 정말 힘이 나죠.” 최 씨 아들은 이제 스물아홉,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대기업에 다닌다. 미대를 나온 스물일곱 딸은 노무사 자격증을 준비 중이다. 서른이 된 최 씨 부부의 편의점은 큰아들인 셈이다. 언제까지 하실 거냐는 물음에 “칠십? 아니 몸이 허락할 때까지”란 답이 돌아온다. “30년을 내리 한자리에서 장사를 한 것 아닙니까. 여기 동네분들이 편의점이나 제 아들, 딸을 다 키워주신 거나 다름없죠. 그러니 제가 어떻게 여길 떠나나요. 하하.” 인터뷰를 마치겠다고 하자 최 씨는 서둘러 편의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좀 전에 아르바이트생이 받아둔 물건들을 정리해야 할 바쁜 시간대다. 그래야 직장인들이 퇴근하기 전에 새 물건을 진열해 놓을 수 있다고 했다. 구로동 주택가 편의점은 그렇게 또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지난 30년간 그랬던 것처럼.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우리는 상품이 아니라 역사를 팔고 있습니다.”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 회장은 아이폰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는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고 한다. 25년 후 ‘아이폰’이 존재할지는 모르지만 1921년 탄생한 프랑스산 샴페인 ‘돔 페리뇽’은 여전히 팔리고 있을 것으로 확신하는 이유였다. 아르노 회장의 이 한마디에는 기업이 헤리티지(유산)를 어떻게 경영에 활용해야 하는지 단순 명료하게 담겨 있다.모든 기업에는 스토리가 있다 헤리티지는 무형의 자산이다. 월트디즈니가 1957년 지식재산권(IP) 기반의 사업 확장 계획을 종이에 그린 ‘디즈니 시너지 맵’은 기업 정체성을 상징한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1998년 구글 검색엔진을 만든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허름한 차고는 스타트업 정신 그 자체가 됐다. 1960년대 후반 플로리다대 풋볼팀 ‘게이터스’가 게토레이를 마시고 승승장구해 우승까지 차지했다는 스토리는 과학적 증거를 떠나 제품에 긍정적 이미지를 더했다. 기업은 본래 자기 자본은 물론 남에게 빚을 지면서까지 재화를 확보해 부가가치를 만들어낸다. 결국 기업이 고유의 헤리티지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것은 주머니 속 비즈니스 자산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30대 그룹의 마케팅·전략 담당 임원들에게 한국 기업이 실제 가치에 비해 어떤 평가를 받는지 묻자 ‘저평가’라고 답한 비율이 80%에 가까웠다(30명 중 23명). 글로벌 기업들과 치열하게 맞붙는 세계 무대에서 기업 스스로 느끼는 아쉬움이다. 그 이유를 적은 답변 중 하나는 이랬다. “한국 기업들은 대부분 조직문화와 브랜드 이미지가 별개인 경우가 많다. ‘역사에 대한 존중’과 ‘미래를 위한 혁신’을 동시에 좇으면서, 그 둘을 잇는 ‘헤리티지의 끈끈함’은 무시하는 편이라고 느낀다.” 헤리티지 활용이 서툴다고 기업 및 브랜드 가치가 낮아진다고 단언하긴 힘들다. 기업 가치라는 게 많은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매겨지기 때문이다. 다만, 헤리티지가 기업 가치를 올릴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도구’가 될 수는 있다. 기업 경쟁력을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려면 헤리티지가 필수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글로벌 1위 브랜드 애플이 ‘단순함’이라는 잡스의 디자인 철학을 고집스럽게 계승하는 게 바로 그런 배경에서가 아닐까. 독일 메르세데스벤츠가 자체 박물관에 130여 년간 만들어온 차량을 모두 전시하고, 현대자동차가 1970년대 첫선을 보인 포니를 50년 만에 복원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장수 기업일수록 써먹을 재료가 많은 건 사실이다. 오랜 역사를 지나오는 동안 깊고 풍부한 이야깃거리들이 축적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헤리티지를 100년 기업만의 전유물로 여겨선 곤란하다. 1921년생 디즈니에 시너지 맵이 있는 것처럼 갓 서른이 된 1994년생 아마존 역시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휴지에 휘갈긴 ‘플라이 휠’을 떠올릴 수 있으니 말이다.헤리티지도 잘 써야 가치가 빛난다 헤리티지의 실질적 가치는 결국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느냐’보단 ‘어떻게 잘 쓰느냐’에 달려 있다. 사사(社史) 속에 꽁꽁 숨겨둔 유산은 ‘기록’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 테다. 한국의 대표 기업들은 최근 10년간 빠르게 세대 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어느덧 3세 경영자가 그룹을 대표하는 곳이 많아졌고, 일부 기업은 4세 경영으로까지 넘어가는 단계다. 충분한 업력과 그에 따른 유산들이 쌓였다는 얘기다. 이제 그 유산들을 세계 무대에 꺼내 놓을 때가 됐다. 한국만의 정체성, 그리고 거기에 뿌리를 둔 한국 기업만의 독특한 이야기들이 또 하나의 글로벌 스타를 만들어낼지 누가 알겠는가. 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온라인 플랫폼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대동소이하다. 그럴듯한 콘셉트의 홈페이지 또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을 만든 뒤 상품이나 서비스, 콘텐츠를 올려둔다. 그러고는 고객들을 끌어모은다. 무료 쿠폰, 할인 판매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다만 쌓이는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 서버를 늘리고, 사용자환경(UI)도 수시로 바꿔야 한다. 관건은 자금 수혈이다. 대규모 투자를 받아낸 곳은 버티고, 그렇지 못하면 문을 닫게 된다.이커머스 업체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 충성고객 수와 객단가가 일정 수준을 넘기면 플랫폼의 태도는 달라진다. 광고비를 받기 시작하고 수수료나 구독료를 올린다. 구글과 유튜브, 메타(옛 페이스북)가 그랬다. 한국의 네이버, 카카오, 쿠팡, 배달의민족도 다르지 않다. 1990년대부터 바이블처럼 여겨져 온 성공 방식이었다. 미국 아마존과 중국 알리바바의 엄청난 성공은 국내 유통업계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 지마켓, 11번가, 티몬, 위메프 같은 전자상거래 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들의 가파른 성장에 대형마트와 동네슈퍼, 전통시장은 직격타를 맞았다. 결국 오프라인 유통기업들도 온라인으로 손을 뻗기 시작했다. 신세계는 2018년 ‘SSG닷컴’을 론칭한 데 이어 2021년에는 지마켓을 3조5000억 원이라는 거금에 인수했다. 롯데도 2020년 롯데백화점, 롯데마트, 롯데슈퍼, 롯데홈쇼핑 등 7개 계열사의 온·오프라인 데이터를 통합해 ‘롯데온’을 출범시켰다. 사실 지금까지는 실적이 신통치 않았다. 유통업계의 한 인사는 “오프라인과 온라인 사업은 언어 자체가 다르다”는 말로 유통 대기업의 온라인 사업 부진을 설명했다. 대기업 진출로 이커머스 시장 내 경쟁만 더 치열해지게 됐다. 그러다 미정산 사태가 터졌다. 6월 활성이용자(MAU)가 합계 870만 명에 육박했던 티몬과 위메프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본사 앞에는 환불을 요구하는 소비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정산금을 받지 못한 소상공인과 중소기업들은 거리로 나섰다. 제2의 티몬·위메프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본보가 국내 주요 이커머스 업체 10곳의 재무 상태를 조사했더니 완전자본잠식에 빠진 기업이 4곳이나 됐다. 함께 분석한 회계사는 나머지 기업 중에도 현금 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곳들이 있다고 했다. 이커머스 시장은 소비자가 동시에 여러 플랫폼을 쓰는 ‘멀티호밍’이 특히 심하다. 무한 가격 경쟁이 벌어지면서 누구도 이익을 낼 수 없는 구조가 됐다. 이를 두고 “이커머스 플랫폼의 숙명”(임일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이라고도 한다. 그나마 시장이 성장할 때는 괜찮았다. 이익을 내지 못해도 파이가 커지다 보니 생존은 가능했다. 하지만 성장세가 꺾인 데다 중국 이커머스 기업들마저 국내 시장을 넘보는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오프라인 유통업계에서도 확인된 것처럼 ‘빅3’ 외에는 살아남기 힘들 수도 있다”(정연승 단국대 경영학부 교수)는 경고가 나오는 이유다.적자기업, 투자 못받으면 곧바로 위기 이커머스 시장에선 ‘계획된 적자’란 표현을 흔히들 쓴다. 공격적으로 고객을 모으려면 적자경영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규모 투자를 따박따박 받아낼 때의 얘기다. 시장 환경이 달라지면 투자 유치 계획은 언제든 삐걱댈 수 있다. 적자 기업들에 이는 곧 유동성 문제를 의미한다. 티몬·위메프 사태에서 보듯 대형 이커머스 업체가 무너지면 수십만 명의 피해자가 양산된다. 재무건전성은 뒤로한 채 덩치 키우기에만 집중해 온 기업들은 이제 방향타를 조정할 시점이 왔다. 30년 묵은 비즈니스 성공 방식이 앞으로도 유효할 거란 기대는 버려야 한다. 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경기 파주·운정 주상복합 3블록은 2022년 6월 사전청약 당시 45 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2021년 말까지 지속된 집값 폭등세가 다소 진정되던 시기였지만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A노선 운정역에 인접한 단지라는 이름값을 한 것. 2년이 흐른 지난달 28일 시행사인 DS네트웍스는 사전청약 당첨자에게 “불가피한 사유로 사업 취소를 안내드린다”고 통보했다.불확실성에 불확실성을 더한 사전청약 사전청약 당첨자들은 날벼락을 맞았다. 결혼 6년 차였던 한 사전청약 당첨자는 신혼부부 특별공급에 지원해 내 집 마련에 성공한 듯했지만 물거품이 됐다. 게다가 2년 허송세월을 하고 나니 결혼 8년 차가 됐다. ‘7년 이하’ 기준을 넘겨 더 이상 특공 혜택을 받기 어려워졌다. 당첨자들 중에는 본청약을 위해 치밀한 자금계획을 세웠다 모든 게 꼬여버린 이들도 있다. 사전청약 당시 예고된 입주 시기에 맞추느라 웃돈을 줘가며 전세계약 기간을 조정했던 이들도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고 한다. 한국 아파트 분양시장에는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이 깔려 있다. 만들어진 물건을 확인하고 구매하는 게 아니라 물건을 만들겠다는 계획만 보고 계약을 맺기 때문이다. 아파트를 짓는 2년여 동안 시공사나 시행사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사전청약은 이 불확실성이 한층 더 큰 제도다. 물건을 만들겠다는 계약인 본청약조차 확정되기 전 구매자부터 모집한다. 물론 부동산 시장이 기대대로 흘러갈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금리가 오르고 공사비가 치솟는 등의 악재가 겹치면 본청약은 뒤로 밀리기 마련이고 급기야 사업이 취소되기도 한다. 정부는 이런 리스크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미 10여 년 전 똑같은 부작용을 겪었으니까. 사전청약이 처음 도입된 건 2009년인데 몇 년 지나지 않아 운영이 중단됐다. 이유는 지금과 똑같은 본청약 지연에 따른 부작용 때문이었다. 이미 ‘실패 낙인’이 찍힌 제도가 다시 부활한 건 2021년이었다. 집값이 가파르게 오르고 분양 시장이 끓어오르자 추후 분양할 단지들을 미리 당겨 수요를 분산시킨 것이다. 그 결과는 또다시 실패. 기업들은 새로운 전략을 짜거나 상품을 내놓을 때 ‘A/B 테스트’라는 걸 한다. 가설이 아무리 훌륭해도 시장이 A에 반응할지, B에 반응할지는 시장만 알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정부가 매번 새로운 정책을 펼 때마다 A/B 테스트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 번 실패했던 정책을 급한 마음에 다시 꺼내 쓴다는 건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정부는 5월 사전청약 제도를 사실상 폐지했다. 또 시행규칙을 고쳐 9월부터는 민간 건설사가 진행한 사전청약 당첨자들도 다른 아파트 분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풀어주겠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3년 만에 다시 폐지될 정책을 괜히 끄집어내 애꿎은 잠재적 피해자들만 양산한 꼴이 됐다. 부동산 정책은 땜질식 처방이어선 안 된다 “강남 집값을 잡겠다”와 같은 정치적 슬로건이 부동산 시장을 어떻게 교란시켰는지 우리는 지난 정부에서 충분히 목격했다. 강남 집값이 잡히기는커녕 다른 지역에까지 거품이 잔뜩 끼었고, 금리 인상으로 집값이 추락하기 시작하자 수많은 ‘역전세’ 피해자가 나타났다. 시장의 기본인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사라진 결과였다. 두 번이나 실패한 사전청약 제도는 단기 효과를 목적으로 한 땜질식 처방이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시장의 불확실성을 하나라도 더 제거하는 것이지, 더하는 게 아니다. 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신반포15차를 재건축해 다음 달 공급될 서울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 원펜타스’ 일반 분양가가 최근 결정됐다. 3.3㎡당 6737만 원. 1월 서초구 잠원동에서 분양한 ‘메이플자이’(6705만 원)를 넘어 사실상 역대 최고가라고 한다. 같은 달 주인을 찾은 서울 광진구 광장동의 ‘포제스한강’이 1억 원대였지만 아파트라기보단 초고급 빌라에 가까운 단지다. 원펜타스는 높은 분양가 이상으로 눈길을 끄는 게 있다. 어마어마한 기대 수익이다. 원펜타스 분양가는 가장 작은 전용면적 59㎡가 16억 원대, 84㎡는 23억 원가량이다. 작년 8월 입주한 인근 ‘래미안 원베일리’의 비슷한 평형대 매매가격은 각각 32억 원과 43억 원 안팎. 원펜타스 30평형대에 당첨되면 당장 20억 원 가까운 시세차익을 얻는다는 얘기다.‘복권 제조기’ 전락한 분양가상한제 원펜타스가 ‘로또 분양’이라 불리는 이유다. 청약시장은 벌써부터 들썩인다. 몇 년간 전매가 제한되고, 비록 3년 유예된 상태지만 실거주 의무도 있어 단기 차익 실현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닌데도 말이다. 액수가 20억 원이라면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시장에선 보는 모양이다. 이런 기현상은 집값을 억누르기 위해 고안된 분양가상한제가 적용되고 있기에 벌어진 일이다. 2005년 3월 도입된 이 제도는 천정부지로 솟은 아파트 분양가를 인위적으로라도 끌어내리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투기과열지구 중에 분양가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의 2배가 넘는다든지, 거래량이 갑자기 늘면 적용 대상으로 지정된다. 분상제는 도입 후 폐지와 부활을 거듭했다. 최근에는 2020년 7월 민간 택지까지 확대 시행됐다가 지난해 1월부터 다시 폐지 수순을 밟고 있다. 아직까지 분상제가 적용되고 있는 지역은 서울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와 용산구뿐이다. 분상제 적용 아파트가 복권으로 둔갑한 것은, 바꿔 말해 정책 효과가 작았다는 말과 같다. 분양가를 낮춰 주변 시세까지 안정시키길 바랐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다. 결국 분상제는 청약 당첨자들에게 인근 단지와의 시세차익을 선물로 안겨주는 장치로 전락했다. 물론 분양가 상한선이 없었다면 재건축조합이나 시공사가 더 챙길 수 있었던 몫을 일반 분양자가 일부 나눠 갖게 된 셈이라는 주장도 있다. 제3자가 보기에는 ‘도긴개긴’일 뿐이지만. 원펜타스를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수많은 청약 대기자들이 있지만 대부분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일반 분양자가 시세차익을 챙기려면 본인 수중에 적어도 20억 원의 현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거주 의무가 3년 유예돼 당장은 전세를 놓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이들도 있는데, 3년 후 실거주 의무제가 폐지된다는 보장은 없다. 목돈을 쥔 사람들에게만 입장권이 교부된 ‘그들만의 리그’라는 곱지 않은 시선이 나오는 배경이다. 일부에선 편법과 탈법이 횡행할 수 있다. 시장에선 “자금이 한 푼도 없더라도 청약을 넣지 않으면 바보”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고 있다. 일단 당첨만 되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긴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금융기관 대출 조건이 까다로운 만큼 외부 자금이 법망을 피해 들어오는 과정에서 시장이 혼탁해질 수밖에 없다.부작용 컸던 정책들 과감하게 걷어내야 정부가 집값을 잡겠다고 내놓은 수많은 정책들은 ‘실패’의 멍에를 쓰고 수정되거나 사라졌다. 연명 중인 분상제가 바로 그런 정책의 한 사례다. 이미 많은 부분 완화돼 효력이 줄어든 종합부동산세도 정치권에서 폐지 얘기가 흘러나오는 중이다. 아파트값은 무리한 정책으로 수요를 찍어 누르면 누를수록 오히려 팽창하는 힘이 커지곤 했다. 제 몫을 다하지 못한 규제나 세제는 이제라도 과감하게 걷어낼 필요가 있다.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라는 기본 중의 기본에 시장을 한번 맡겨 보는 건 어떨까. 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정부는 작년 초 한국토지주택공사(LH) 매입임대 사업에 대해 주택을 사들이는 가격을 ‘원가 이하’로 정했다가 올 2월 ‘합리적 시장가격’으로 바꿨다. 매입임대는 LH가 주택을 직접 사들여 청년, 신혼부부, 고령자, 저소득층 등에게 저렴하게 임대하는 사업이다. 1년 만에 기준을 되돌린 건 지난해 매입 실적이 목표치의 23%에 그쳤기 때문이다. 사실 이 수치는 2020년 100%에서 2021년 67%, 2022년 46%로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조건에 맞는 매물 찾기가 그만큼 어려워졌단 얘기다. 그런 사정을 무시하고 원가도 쳐줄 수 없다고 하니 매물이 나올 리 없었다. 시장을 외면한 정책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모든 정책에는 저마다의 고객이 있다 3월에는 아파트 공시가격을 층(7개 등급)과 향(8개 방향), 조망(도시·숲·강), 소음(강·중·약) 등에도 등급을 매겨 전면 공개하겠다던 기존 방침을 철회했다. 이런 요소들에 따라 아파트 가격 차이가 나는 게 사실이더라도 정부가 등급을 매겨 공표까지 하면 개인 자산에 ‘낙인’을 찍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깜깜이 공시’라는 비판을 피하겠다는 목적만 그럴듯했지, 시장 반응에 대한 고민은 얕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주택 정책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최근 정부는 국가통합인증마크(KC)를 받지 않은 80개 품목의 해외 직접구매(직구)를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가 사흘 만에 거둬들였다. 위해 제품 수입을 차단해 소비자들의 안전을 지키겠다는 대책인데, 그 소비자들이 정작 뭘 원하는지는 읽지 못한 결과다. 정부도 오판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기업 총수들이 내는 메시지 중 가장 많이 언급하는 단어가 ‘고객’이다. 기업의 생존이 고객에게 달려 있어서다. 기업이 이해하려는 대상은 시장에서 타깃 고객층으로, 그리고 개인으로 점차 좁혀졌다. 이젠 인공지능(AI)을 접목하면서 개인이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자사 제품이나 서비스에 반응할지까지 들여다본다. 모든 정책도 마찬가지로 고객이 있다. 매입임대 사업은 우선 집을 갖고 있거나 지으려는 이들부터 해당 정책에 호응해야 한다. 그래야 집을 최대한 확보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싸게 빌려줄 수 있다. 아파트 공시가격은 현재 집을 가진 이들은 물론이고 미래에 집을 사려는 잠재 구매자들까지도 해당 정책에 영향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이 고객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해외 직구 논란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정책 입안자들에게 기업 수준의 고객 분석을 요구하는 건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특정 고객들만 잡으면 되는 기업과 달리 국가는 특정 계층에게만 이로운 정책을 설계해선 안 된다는 논리에서다. 그러나 기업 전략이나 국가 정책 모두 고객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고 본다.쉽게 만든 정책일수록 부작용도 큰 법 요즘은 국민들의 행태가 예전보다 훨씬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 공무원들도 정책 결과를 예측하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시장이나 이해당사자들의 상황을 더 치밀하게 분석해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시각이 많다. 책상에 앉아 쉽게 만든 공급자 위주 정책은 어떤 후폭풍을 낳을지 가늠하기 힘들다. 반면 고객 관점의 정책은 만들기는 어려워도 시행은 오히려 쉽다. 작은 것부터라도 변화를 시도해 봤으면 한다. 이를테면 장관 사진 한 컷을 얻기 위한 현장 방문이나 기업 다그치기 용도의 업계 간담회를 ‘각계 의견 수렴’으로 포장하는 일부터 중단하면 어떨까.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