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김상운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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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학술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단행본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을 냈고,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을 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sukim@donga.com

취재분야

2026-01-09~2026-02-08
칼럼51%
문학/출판17%
역사10%
미국/북미7%
국제일반3%
중동3%
국제정세3%
문화 일반3%
대통령3%
  • 세라 넬슨 교수 “한반도 출신 中 상나라 황후가 주인공인 역사소설 쓰고 있어”

     “한반도에서 온 중국 상나라 황후가 등장하는 역사소설을 쓰고 있어요. 전작에 이어 한국 여성이 또 주인공이네요.” 7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만난 세라 넬슨 미국 덴버대 명예교수(85)는 소녀 같은 표정으로 차기작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통 고고학자인 그에게 소설 쓰기는 부업에 가깝다. 전작 소설은 2002년 영어와 한국어로 발표한 ‘영혼의 새(Spirit bird journey)’. 이 작품은 미국에 입양된 한국인 여성 고고학자가 모계 중심의 한반도 신석기 문명을 연구하면서 한국 사회의 남성 중심 문화와 갈등을 겪는다는 이야기다. 고고자료에 드러난 성역할에 주목하는 이른바 ‘젠더(gender)’ 고고학자인 넬슨 교수의 관심이 반영된 소설이다. 이날 서울 강동구가 주최한 ‘암사동 유적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한 것은 물론 고고학자로서다. 그는 1970년대 세계 고고학계에서 불모지에 가깝던 한국 고고학을 전공한 1세대 외국학자다. 1970년 미군 군의관으로 한국에 파견된 남편을 따라와 2년간 한강 유역의 고고 자료를 집중 연구했다. 이를 토대로 1973년 ‘한강 유역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연구’로 미시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암사동 연구가 소설 ‘영혼의 새’의 모태가 된 셈이다.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 고고학에 비해 한국 고고학의 위상이 낮은 게 현실이지만, 1996년 세계동아시아고고학대회에서 한국 고고학을 독립분과로 만들고 강원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선사유적을 세계고고학사전에 올린 것은 그의 공이다. 고고학자인 그가 소설을 계속 쓰는 이유가 궁금했다. “고고학은 남은 유물을 통해 삶의 보편성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결국 잃어버린 부분이 있기 마련이에요. 하지만 소설에서는 충분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에 꽤나 매력적이지요.” 이번 학술대회에서 그는 한반도와 중국 랴오닝 지역의 토기문화가 서로 유사하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넬슨 교수는 “토기도 그렇지만 만주 지역에서 한반도로 농경이 전파된 점 등을 고려할 때 한반도로의 ‘인구이동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며 “유전학과 언어학을 아우르는 다양한 비교자료를 통해 두 지역의 문화적 유사성을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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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촌상 30년, 한국 밝혀온 124개의 별들”

     올해 30회를 맞은 인촌상 시상식이 11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롯데호텔 크리스털볼룸에서 열렸다. 이 상은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에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경성방직과 고려대를 설립한 민족 지도자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의 뜻을 잇기 위해 1987년 제정됐다.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이사장 이용훈)와 동아일보사는 매년 인촌의 탄생일(10월 11일)에 맞춰 시상식을 열고 있다. 이날 시상식에서 △홍성대 상산고 이사장(교육) △김병익 문학과지성사 고문(언론·문화) △백완기 고려대 명예교수(인문·사회) △염한웅 포스텍 교수(과학·기술) 는 각각 상패와 기념메달, 상금 1억 원을 받았다. 이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인촌상의 지난 30년은 치열한 도전과 열정으로 빛나는 124개의 별을 찾아내 이들의 헌신이 합당한 예우를 받도록 노력한 여정”이라며 “21세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요동치는 위기 상황에서 고난과 혼돈의 시대를 담대한 용기와 냉철한 지성으로 헤쳐 나간 인촌의 사상과 발자취를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축사에서 “고려대에 다니던 젊은 시절 인촌 선생의 가르침을 접하면서부터 늘 존경하는 마음을 가슴속에 간직해 왔다”며 “인촌은 일생 동안 교육, 언론, 산업, 정치 등에 걸쳐 민족자강의 길을 추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분”이라고 밝혔다. 인촌상운영위원회(위원장 한승주)는 외부 심사위원 16명을 위촉해 4개 부문에 걸쳐 6월부터 2∼4차례 회의를 열어 최종 후보를 선정한 뒤 수상자를 확정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수상자와 가족, 역대 수상자를 비롯해 각계 인사 300여 명이 참석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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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박 2일 걸린 무령왕릉 졸속 발굴… 씻을 수 없는 잘못”

     “무령왕릉 내부에서 촬영, 실측, 유물 수습에 소요된 시간은 만 하루에도 못 미치는 불과 1박 2일의 철야 작업이었다. 한국 고고학사에 오래도록 남을 씻을 수 없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73)이 최근 출간한 ‘한국 고고학 백년사’(열화당·사진)에 쏟아낸 신랄한 반성문이다. 그는 “무령왕릉 발견은 ‘동아시아의 투탕카멘’으로 불릴 만큼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제대로 발굴했다면 몇 달은 족히 걸릴 작업이었다”고 썼다. 지 이사장은 1971년 무령왕릉, 1973년 천마총, 1988년 창원 다호리 고분 발굴에 모두 참여하고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한국 고고학계의 원로다. 무령왕릉 발굴은 그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학예연구사로 고고학계에 막 발을 들여놓던 시기에 이뤄졌다. 지 이사장은 “1973년 천마총 발굴은 무령왕릉에서 겪었던 시행착오에 대한 반성으로 철저한 사전계획과 함께 수행됐다”고 적었다. 국가예산이 투입돼 문화재관리국 중심의 발굴단이 조직됐으며 경주와 부여, 공주 등 고도(古都)에서 유적을 집중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1880년 일본 학계의 광개토대왕비 조사부터 1980년대 경제개발에 따른 발굴 규모 대형화까지 고고학 100년사를 폭넓게 다뤘다. 특히 책 말미에 4대강 사업에 따른 발굴기관 급증으로 발굴이 부실화된 현상을 비판했다. 지 이사장은 발굴 제도의 전면적인 개선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그는 “구제 발굴(건설공사로 파괴될 위험이 있는 유적의 사전 발굴)의 국영 또는 공영화나 지방자치단체로 부분적인 관리 전환 등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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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촌상 시상식은 ‘현대사 명장면’

     국내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인촌상 시상식은 현대사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1987년 10월 12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인촌상 제정 및 1회 수상자 축하연’에서는 3김(金)이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7년 만에 한자리에 모여 눈길을 끌었다. 13대 대선을 두 달 앞두고 이뤄진 ‘3김 회동’은 모든 언론이 주목한 빅 이벤트였다. 당시 이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대권 주자답게 묘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장이 “묘한 인연이군요. 1980년에 인촌기념관에서 이렇게 만났는데…”라고 인사하자 김영삼 민주당 총재는 “그때처럼 되면 안 좋은 얘기인데요”라며 받아쳤다. 결국 3김이 모두 출마한 그해 대선에서는 야권 분열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당선됐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1년 10월 11일 인촌 김성수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식 및 제5회 인촌상 시상식에 참석해 인촌을 기리는 기념사에서 “사회 해체의 위기를 맞아 공선사후(公先私後), 신의일관(信義一貫) 등 인촌 선생의 정신과 유덕을 살려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차기 대선 후보로 꼽히고 있는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도 인촌상과 인연이 깊다. 그는 2000년 제14회 인촌상(산업기술 부문)을 수상했다. 당시 38세였던 안 의원은 “너무 큰 상을 받게 돼 어깨가 무겁다. 인촌상 후보로 오를 것이라는 생각조차 못했다”는 소감을 밝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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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일본 곳곳에 스며있는 우리 조상의 흔적을 따라서

     올 2월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 갔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무덤들 옆으로 의자왕과 아들 부여융의 가묘가 있었는데, 근처에 일본인들이 식재한 나무와 기념비가 여럿 눈에 띄었다. 이 중 5년 전 기념수(紀念樹)를 심을 때 세운 비석에 ‘일본국 백제후손 오우치 기미오(大內公夫)’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그는 백제 성왕의 셋째아들로 대한해협을 건넌 임성태자의 후손이었다. 자신의 조상을 찾아 멀리 이곳까지 와서 참배한 것이다. 고대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뿌리 깊은 시원을 엿보는 듯했다. 이 책은 지난해 한일수교 5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에 연재된 ‘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시리즈를 수정해 엮은 것이다. 사회부, 정치부, 문화부 등을 두루 거친 베테랑 기자 14명이 일본 열도를 발로 뛰면서 한일의 역사, 문화적 친연성(親緣性)을 생생히 보여준다. 백제 무령왕이 출생한 섬 가카라시마를 비롯해 백제인 어머니를 둔 간무왕이 세운 교토, 백제왕이 하사한 칠지도를 모신 이소노카미 신궁 등 40여 곳의 유적을 취재했다. 지난해 서재필 언론문화상과 올해 일한문화교류기금상을 받으면서 양국 문화계로부터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현직 기자들이 쓴 글답게 옛날 얘기에만 그치지 않고 한일 고대사를 바라보는 지금 일본인들의 복잡한 속내까지 담아냈다. 예컨대 간무왕의 백제계 어머니인 다카노노 니가사의 위패를 모신 히라노 신사는 기자의 끈질긴 취재 요청에도 “우리는 백제 혹은 한국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며 인터뷰를 거부한다. 근대 일본이 전국의 수많은 신사에서 한반도와 연관성을 지우려고 노력한 사실과 오버랩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 동안 면면히 이어진 한일 교류의 수많은 흔적은 양국이 나아가야 할 미래를 명확히 보여준다고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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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글의 뿌리는 몽골 파스파문자? 주장하는 근거 보니…

    한글의 뿌리는 몽골제국의 파스파문자라는 주장이 재차 제기됐다.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76·사진)는 지난달 30일 가천대에서 열린 '유라시아 문명과 알타이' 국제학술대회에서 "파스파문자의 43자모는 한글의 초성 32자, 중성 및 종성 11자를 합친 43자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파스파 문자는 티베트 출신 승려로 몽골 국사(國師)에 오른 파스파가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칸)의 명령에 따라 창제한 것이다. 앞서 해외 언어학계는 한글이 파스파문자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해왔으나, 국내 학계는 한글의 독창성을 들어 이를 부인하고 있다. 정 교수는 논문에서 "(우리나라를 포함해) 알타이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은 한자문화에 동화되기 어려웠다"며 "교착적인 문법구조를 가진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하기에 한자는 적당하지 않아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7세기 이후 중국 북방민족들이 새로운 국가를 세우면 문자를 제정하기 시작했는데 조선도 이를 본받아 건국과 더불어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성계의 가계(家系)가 몽골과 연관성이 깊은 것도 주목할 만하다는 설명이다.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은 원나라에서 벼슬을 지냈으며, '울루스 부카'라는 몽고식 이름으로 개명하기도 했다.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 201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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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봉총 크기 차이 확연… 쌍둥이 무덤 아니다

     봉황 장식의 금관이 출토된 경북 경주 서봉총(瑞鳳塚)의 두 개의 무덤 크기가 크게 차이 나는 것으로 드러났다. 서봉총이 황남대총과 같은 표형분(瓢形墳·2기의 원형무덤이 서로 붙어 있어 표주박 모양을 닮은 것)이라는 학계의 기존 견해와 다른 조사 결과다. 일각에서는 ‘데이비드총(塚)’으로 불리는 남쪽 무덤(남분·南墳)의 주인공이 북쪽 무덤(북분·北墳)에 묻힌 여성이 낳은 어린아이일 수도 있다는 추정도 나온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서봉총 재발굴 조사 결과 남분은 원형이 아닌 타원형이며 지름도 약 25m로 북분(41m)에 비해 훨씬 작은 규모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5일 밝혔다. 앞서 일제강점기인 1926년과 1929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서봉총을 발굴했으나, 봉토 조사 없이 매장주체부에 있는 유물만 수습하고 발굴보고서조차 내지 않았다. 박물관은 서봉총의 구체적인 내부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올 4월부터 재발굴에 착수했다. 박물관은 유구의 양상을 볼 때 북분이 남분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했다. 이와 관련해 북분의 호석과 봉분 일부를 훼손하면서까지 남분을 이어 붙인 사실이 주목된다. 연접한 무덤을 축조할 때에는 앞선 무덤의 호석을 건드리지 않고 이어 붙이는 게 일반적이다. 윤온식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드물지만 경주 쪽샘지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며 “서봉총 남분과 북분의 관계를 시사하는 정황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남북과 북분의 중심을 잇는 축이 남북 방향이 아니라는 점도 주목된다. 대표적인 표형분인 황남대총의 경우 남분과 북분의 중심축이 정확히 남북 방향이다. 서봉총의 경우엔 두 무덤의 중심축이 북서∼남동 방향으로 틀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학계에선 남분의 크기가 북분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데다 중심축이 틀어져 있는 점, 북분의 일부 호석 등을 파괴하면서 남분을 만든 점을 감안할 때 두 무덤의 피장자가 부부처럼 대등한 관계는 아닌 것으로 추정한다. 남분의 지름이 어린아이가 묻힌 금령총의 지름(약 18m)과 비슷한 점을 들어 북분에 묻힌 여성이 낳은 아이가 묻혔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서봉총 북분의 경우 피장자가 대도(大刀)가 아닌 ‘굵은 고리 귀걸이(太環耳飾·태환이식)’를 착용했고 대형 요패(腰佩)를 오른쪽에 차고 있으며 화려한 금관이 출토됐다는 점에서 여성 왕족이 묻힌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이번 발굴에서는 제사용 큰항아리 12점이 호석 외곽에서 출토됐다. 항아리들이 서로 같은 간격으로 무덤을 빙 두르고 있어 무덤 조성 당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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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천마총 금관에 손을 뻗는 순간… 하늘이 울기 시작했다

     “광복 이후 ‘3대 발굴’에 모두 참여한 건 제게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지난달 27일 경북 경주시 천마총 앞에 선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73·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푸른 뗏장을 입은 고총(古塚)을 바라보며 40여 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1971년 무령왕릉을 시작으로 1973년 천마총, 1988년 창원 다호리 고분까지 3대 발굴에 모두 참여한 그는 한국 발굴사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그는 “졸속으로 진행된 무령왕릉 발굴을 반면교사로 삼아 천마총은 제대로 발굴하려고 애썼다”고 술회했다.○‘정말 하늘이 노(怒)한 것인가…’ 1973년 7월 초순 천마총 발굴 현장.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 바쁘게 움직이던 조사원들이 일손을 잠시 멈추고 숨을 죽였다. 목관 머리부분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노란색 금속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복 이후 우리 손으로 처음 건져낸 신라 금관이었다. 금관총이나 서봉총 금관은 일제강점기 일본 고고학자들이 찾아냈다. 관테부터 영락까지 흙에 묻힌 금관 전체를 대칼과 붓으로 노출시키는 데 5시간이 걸렸다. 지건길(당시 문화재관리국 학예연구사)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신라 금관 발굴이었다. 황홀경 그 자체였다”고 회고했다. 영물(靈物)을 건드리면 천기운행도 상서롭지 않게 되는가. 금관을 들어올리기 직전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경주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이날도 종일 하늘이 쨍쨍하던 터였다. 강풍으로 봉분 위에 쳐놓은 텐트가 날아가려고 해 조사원 여럿이 붙들고 간신히 버텼다.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 2년 전 무령왕릉 발굴이 떠올랐다. “그때도 낮엔 맑았는데 야간 발굴 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어요. 무령왕릉 내 연도를 따라 석실 안으로 들어차는 물을 빼내려고 조사원들이 사투를 벌였습니다. 무덤 발굴이 왕의 넋을 노하게 한 건가 싶었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금관을 나무상자 안에 옮겨놓자마자 뇌우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뚝 그쳤다.○ 발굴 초창기 열악한 환경 천마총 발굴은 최대 규모의 적석목곽분인 황남대총 발굴에 앞서 기획된 일종의 테스트베드였다. 박정희 정부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황남대총 발굴이 결정되자 당시 문화재위원회와 김정기 발굴단장은 “황남대총의 규모와 중요성에 비해 발굴 경험이 일천하니 이보다 작은 천마총을 먼저 발굴하자”고 제안했다. 이로써 1970년대 국책 발굴사업의 본격적인 서막이 열렸다. 초창기였던 만큼 작업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지름 60m, 높이 13m에 이르는 거대 봉분의 흙을 퍼내는 것부터 고역이었다. 굴착기나 컨베이어벨트와 같은 기계를 동원할 수가 없어 드럼통을 반으로 쪼갠 뒤 이를 이어 붙인 관로(管路)를 직접 만들었다. 봉분 꼭대기에서 삽으로 퍼낸 흙을 관로로 흘려보내는 식이었다. 지건길은 “그때의 원시적인 작업 광경을 요즘 고고학자들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1500년을 품은 천마도의 신비한 색(色) 무덤 이름이 천마총이 된 것은 목제 부장궤 안에서 ‘천마도(天馬圖)’가 그려진 말다래(말을 탈 때 흙이 다리에 튀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뜨리는 판)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지건길이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물 중 최고로 꼽는 천마도는 처음 발견된 신라시대 채색화다. 그는 “외부 공기에 닿아 변색이 일어나기 직전의 천마도는 너무도 생생한 빛깔을 담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천마도는 보존 처리까지 만만치 않은 과정을 거쳤다. 유물 수습과 동시에 아직 부식되지 않은 부장궤 일부 나무판재를 약품 처리했다. 김유선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의 조언에 따라 폴리에틸렌글리콜(PEG)을 가열해 녹인 뒤 붓에 묻혀 판재에 꼼꼼하게 발랐다. 부장궤 내부 상황은 더 까다로웠다. 금동장식의 말다래 밑에 자작나무로 만든 말다래 두 겹이 깔려 있었다. 오랜 세월 돌에 눌린 채 맞물려 있는 말다래들을 훼손하지 않고 안전하게 분리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처음에 말다래 사이에 합판을 넣으려다 실패했지만 함석판을 끼워 넣어 가까스로 분리했다. 수습 이후 박물관에서 시행한 보존 처리도 자외선 차단용 커버를 씌우고 30분 간격으로 가습을 하는 등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하루 만에 발굴을 끝낸 무령왕릉과 달리 8개월에 걸쳐 진행된 천마총 발굴이지만 후회는 남았다. “칠기(漆器)처럼 외부에 노출되면 금방 부식되는 유기물을 온전하게 보존하지 못한 점이 늘 아쉽습니다. 천마총의 정확한 축조 연대를 규명해 무덤의 주인을 알아내는 게 남은 과제일 겁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 201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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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자유 평등 정의는 에너지를 따라 진화했다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역사학자는 대담하거나 무모한 사람일 것이다. 저자의 논지는 에두르지 않고 간결하며 단호하다. 10만 년에 걸쳐 형성된 인류의 모든 가치관이 에너지 획득 방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현상의 경향을 기술하는 데 그치는 여느 역사학자들과는 다르다. 논지 전개 방식도 독특하다. 이 책을 몇 초간 스윽 넘겨본 독자는 “이거 역사책 맞아?”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실질임금과 지니계수, 국내총생산(GDP) 비중, 씨앗 및 포유류의 생장이 활발한 지역 등 온갖 통계와 도표가 책 곳곳을 빼곡히 채운다. 고고학에서 시작해 진화생물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등을 아우르는 저자의 지적 편력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그러나 데이터의 홍수가 지향하는 서사 방식은 의외로 단순하다. 인류의 발전단계를 수렵채집, 농경, 화석연료(산업혁명) 시대로 삼분하고 각 단계의 변화를 이끈 동인(動因)을 분석한다. 저자는 기술 발전으로 인간이 소비하는 에너지양이 많아지면 인구가 늘면서 계층화가 심화된다고 본다. 계층화된 사회구조는 자유 평등 정의와 같은 핵심 가치관을 좌우한다는 주장이다. 계층화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측면도 있지만, 인간 본연의 폭력성을 억제한다는 것도 중요한 논점이다. 선사시대로 올라갈수록 유골에 남겨진 폭력성이 심해진다는 고고학자들의 오랜 연구 결과와 일치하는 대목이다. 재밌는 것은 3단계의 역사 진행 과정에서 기후 변화와 지리적 혜택과 같은 우연성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설명이다. 예컨대 수렵채집 경제에서 농경으로 넘어가는 데 오랜 빙하기가 끝난 뒤 찾아온 ‘긴 여름’(1만2000년 전부터 찾아온 세계적 간빙기 현상)이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식용 가능한 동식물이 왕성하게 번식한 ‘행운의 위도(緯度)권’인 고대 중동, 인도, 중국에선 농경을 기반으로 한 문명이 번성할 수 있었다. 농경에 따른 가축 활용과 사회 규모 확대에 힘입어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하루 최대 3만 Cal까지 늘어날 수 있었다. 고대 로마나 중국 한나라, 인도 마우리아 왕조와 같은 소수의 거대제국들이 다다른 에너지 소비 수준이다. 농경에서 화석연료 경제로 넘어가는 과정도 마찬가지로 우연성이 적지 않은 몫을 차지했다. 예를 들어 광대한 태평양을 끼고 있는 아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은 면적의 대서양을 둔 유럽은 바다로 나가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유럽은 대서양을 통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광대한 자원을 효과적으로 수탈할 수 있었다. 월등한 부의 축적은 화석연료를 활용한 기계문명을 여는 데 중요한 물질적 기반이 됐다. 실제로 대서양 일대 에너지원을 독식한 유럽의 에너지 획득량은 17세기에만 10%나 늘었다. 이렇게 형성된 사회구조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가치관을 낳는다. 예컨대 화석연료 경제는 케인스가 언급한 유효수요 창출이라는 관점에서 구매력이 있는 중산층을 필요로 한다. 동시에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유인도 필요하므로 부의 불평등을 어느 정도 감수하는 가치관을 조장한다는 얘기다. 이 모든 설명이 맞다면 형이상학자들은 깊은 상실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연성이 크게 작용한 사회구조와 문화가 가치관을 결정한다면 시대를 초월한 가치란 애당초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내 이론은 절대 도덕률을 산정하려는 노력을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비판한다”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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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각화 물막이 실패… 문화재청 집중 질타

     29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는 반구대 암각화 보존대책에 대한 정치권의 개입이 도마에 올랐다.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은 “문화재 행정에 정치가 개입되는 폐해가 계속 나타나고 있다”며 “가변형 임시 물막이(키네틱댐)에 대해 전문가들이 구조적·환경적인 문제로 타당성이 없다고 의견을 냈음에도 결국 문화재청이 입장을 번복해 물막이 실험을 강행했다”고 지적했다. 안 의원은 “이것은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인가”라고 따져 물었다.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1965년 건설된 사연댐 때문에 물이 차오르고 빠지는 게 반복되면서 현재도 암각화 훼손이 진행되고 있다”며 구체적인 보존대책을 요구했다. 앞서 2013년 임시 물막이 업무협약 체결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변영섭 고려대 교수(고고미술사학)가 올 7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임시 물막이가 과학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며 “하지만 당시 국무조정실이 물막이 설치를 강하게 추진했다”고 밝혔다. 3년간 추진된 임시 물막이 실험이 최근 실패하면서 암각화 보존 시기만 놓친 채 28억 원의 세금만 낭비하게 됐다. 이에 대해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문화재 보존은 정치와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다. 나 청장은 “문화재 보존과 문화재의 세계 공유가 목표이므로 합리적인 기준으로 열심히 일하겠다”는 동문서답식 답변만 늘어놓았다. 보존 대책에 대한 질문에도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았다. 나 청장은 “지금까지 여러 방안을 검토 중이며 올 12월에 안을 내놓을 것이다. 대안이 있다면 (의원님이) 제시해 달라”고 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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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원전 4세기경 의례용 유물 추정 ‘소형 경형동기’ 국내서 처음 발견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이르기까지 종교의례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소형 ‘거울모양동기(경형동기·鏡形銅器)’가 국내에서 처음 발견됐다. 중국 동북지방의 경형동기와 유사해 이 시기 청동기문화의 교류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은 “한국문화재재단이 전남 함평군 해보면 상곡리 신축 부지 발굴 현장에서 청동기시대 토광묘(土壙墓)와 주거지, 초기 철기시대 석관묘, 삼국시대 주구(周溝·무덤 주변의 도랑) 등 총 21기의 유구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중 초기 철기시대 석관묘 한 곳에서 경형동기 4점이 발견됐다. 동기들은 무덤 안 북쪽 가운데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크기는 지름 6.2∼6.4cm. 지금껏 예산 동서리 등에서 출토된 비슷한 모양의 원개형동기(圓蓋形銅器)는 지름이 20cm가 넘는 대형이었다. 고고학계는 원개형동기의 크기에 따라 용도가 달랐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번에 발견된 경형동기 4개는 모양과 크기가 서로 동일해 같은 틀을 이용해 제작(밀랍주조 방식)된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경형동기의 출토 위치가 시신의 목 주변인 점과 동기의 특정 부위가 닳은 점을 감안할 때 무덤 주인이 평소 사용하던 동기를 목에 두른 채 매장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석관묘 안에서 무기가 나오지 않은 걸 보면 무덤 주인은 정치권력자라기보다 신관(神官)에 가깝다”라며 “이런 맥락에서 경형동기도 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는 의기(儀器)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계는 경형동기가 주로 중국 동북지방에서 출토된 데 주목하고 있다. 기원전 3세기 이후 발생한 한반도의 세형동검 문화가 시기적으로 앞서는 중국 동북지방의 비파형동검 문화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사실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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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美 메인 주의 깊은 숲… 고향 땅에서 만난 ‘생명’

     요즘 한 달 동안 해외에서 잠시 살아보는 게 유행이다. 수박 겉핥기가 아닌 현지인들과 호흡하며 이들의 삶에 녹아드는 진짜 여행이다. 이 책 저자도 어느 날 훌쩍 대학을 떠나 미국 메인 주의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간다. 차이점이라면 그의 목적지는 해외가 아닌 자신의 고향이며 기간도 한 달이 아닌 1년. 이 책은 그가 초야에 묻혀 겪은 이야기를 풀어낸 에세이이자 자연관찰기다. 생물학자답게 주변 생태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특히 인상적이다. 여느 수필처럼 자신의 내면을 일일이 풀어놓는 데 급급하지 않는다. 그저 지저귀는 새소리와 형형색색의 낙엽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은연중에 드러낼 뿐이다. 마치 구구절절한 편지 대신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주는 선비를 연상시킨다. 그는 40년 전 목초지였던 곳이 무성한 소나무 숲으로 바뀐 걸 생생히 보여줌으로써 자연의 생명력과 더불어 인간 삶의 덧없음을 암시한다. 말벌이 자신의 알을 애벌레에 쑤셔 넣으려고 하자 애벌레들이 진동을 일으켜 집단방어에 나서는 모습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저자는 “우리 인간은 곤충들이 알지 못하는 걸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우리 또한 의미도 모른 채 살아남기 위해 무작정 하고 있는 일들이 많지 않을까”라고 썼다. 암컷이 죽자마자 새 짝을 맞는 제비와 멧새의 행태를 묘사한 대목에서는 아내와 헤어져 홀로 숲에서 지내는 저자의 고독을 담았다. 상처(喪妻)한 뒤 재혼을 미루는 사람의 기준으로 “인정머리 없다”며 비난할 수 있지만 저자는 인간보다 수명이 훨씬 짧은 새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감싼다. 이어 “나는 너무 오래 짝을 기다린 게 아닐까”라는 의미심장한 문구를 남겼다. 얼핏 저자를 극단적인 생태주의자로 오인할 수 있지만 그는 자연과 인간 삶의 균형을 지향한다. 환경보호단체 어스퍼스트(earth first)가 벌채를 막으려고 나무에 못을 박는 바람에 인부가 사망한 사건이 책에 소개된다. 저자는 “이곳의 삶은 나무와 숲을 빼곤 상상할 수 없다. 나무는 목재가 되기도 하고 숲을 이루기도 한다”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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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위원회, 첨성대 해체수리 하지 않기로

    최근 경주 지진 피해를 입은 첨성대(국보 제31호)에 대해 해체수리를 하지 않기로 문화재위원회가 결정했다. 가장 위에 놓인 정자석(井字石·井자 모양의 돌)의 추락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을 우선 마련할 방침이다. 문화재청은 "22일 열린 문화재위원회 건축문화재분과에서 첨성대의 구조 안정성을 검토한 결과 첨성대가 붕괴 등 심각한 손상을 초래할 정도로 위험한 상태는 아니라고 판단됐다"고 밝혔다. 문화재위는 향후 첨성대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정밀 안전진단을 실시한 뒤 적절한 보존관리 방안을 세우기로 했다. 앞서 12일 발생한 규모 5.8의 지진으로 첨성대의 중심축이 북쪽으로 약 20㎜ 더 기운 사실이 확인됐다. 북쪽 지반침하로 인해 첨성대의 중심축이 매년 평균 1㎜씩 기우는 걸 감안하면 이번 지진으로 20년 치가 한꺼번에 기울어진 셈이다. 정자석도 서쪽으로 약 50㎜ 더 벌어졌으며, 19일 규모 4.5의 여진 이후 정자석은 북쪽으로 38㎜가량 이동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장기적으로 첨성대의 구조 안정성을 확보하려면 해체수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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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백제 왕궁 풍납토성, 그 한가운데 뚫린 우물의 정체는?

    2008년 9월 초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경당지구 내 우물터 발굴현장. 현 지표면으로부터 5m 아래 구덩이에서 젊은 여성 조사원의 환호가 들려왔다. 발굴책임자였던 권오영 당시 한신대 교수(현 서울대 교수)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꽃삽으로 자갈과 흙을 조심스레 걷어내던 한지선 한신대 조교(현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가 한 무더기의 백제시대 토기들을 발견한 것. 40여 점의 완형(完形) 토기들이 나란히 줄지어 선 묘한 모습이었다. 구덩이 폭이 1.5m에 불과해 조사원 한 명만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땅을 겨우 팔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위에서 돌이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지선은 철모를 눌러쓴 채 사진을 찍고 토기를 하나씩 수습했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토기들을 올려 보내고 다시 땅을 파내자 또 한 겹의 토기 무더기가 나왔다. 무려 200여 개에 달하는 완형 토기들이 5층을 이뤄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19일 발굴현장을 다시 찾은 권오영은 “1999년 1차 발굴에 이은 2008년 재발굴에서 왕궁 우물(御井·어정)의 실체가 드러났다”며 “풍납토성 안에 한성백제시대 왕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왕궁 우물 안에 토기 200개나 묻은 사연 발굴 초기 우물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우물 입구부터 자갈과 흙으로 빽빽하게 매립된 상태인 데다 얼핏 부여 제석사지, 왕흥사지와 구조가 엇비슷해 발굴팀은 목탑 터로 오인하기도 했다. 현 지표면으로부터 6m(백제시대 기준 3m) 아래 바닥까지 완전히 발굴한 뒤에야 우물터임이 드러났다. 남은 과제는 우물과 완형 토기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 고대인들에게 우물은 단순한 식수원이 아닌 신성한 존재였다. 예컨대 신라인들은 우물을 폐기할 때 토기와 각종 희생물을 함께 넣고 제사를 드렸다. 국립경주박물관 내 신라시대 우물터에서는 어린아이의 유골이 출토됐다. 경당지구 우물터에서도 폐기를 위한 제사 행위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곳에서는 토기만 나올 뿐 동물의 뼈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더구나 우물 폐기 시점에 흔히 보이는 전염병이나 전란 등 천재지변의 흔적도 없었다. 권오영은 토기들의 개별 양식에 주목했다. 분석 결과 한강 유역뿐만 아니라 우물이 축조된 4∼5세기 전라, 충청지역 토기들도 여럿 포함돼 있었다. 그는 왕궁 내 자리 잡은 우물터의 정치적 상징성과 토기양식을 감안할 때 이곳에서 백제 왕실과 지방민 사이의 복속의식이 치러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고대 일본의 도다이지(東大寺)에서 본사와 지방 말사들이 모여 합수(合水) 의식을 치른 것처럼, 각 지방 지배층이 토기에 특산물이나 물을 담아 경당지구 우물에서 회맹의식을 치른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4세기 백제 근초고왕이 전라도 지역의 마한 소국들을 정벌했지만 강력한 중앙통치가 이뤄지지 않아 학계는 한동안 이들이 반(半)자치 상태에 놓였다고 본다. 신라, 고구려와 맞서는 상황에서 막 복속시킨 지방의 충성심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한성백제시대 문자의 발견 1999년 경당지구 1차 발굴에서 발견한 한성백제시대 문자의 의미도 적지 않다. 발굴을 빨리 끝내 달라는 재개발조합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그해 12월 영하 10도의 강추위 속에서 작업이 진행됐다. 유적이 얼어붙는 걸 막기 위해 세운 비닐하우스 안에서 최장열 당시 서울대 대학원생(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뛰쳐나왔다. 그는 권오영에게 달려가 “토기 조각에 글자가 새겨진 것 같다”고 보고했다. 그때까지 한성백제시대 문자 자료는 백제왕이 일본에 하사한 칠지도가 유일했기 때문에 권오영은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토기 조각을 찬찬히 살펴보니 분명 글자가 있었다. ‘大夫(대부)’였다. 며칠 뒤 같은 유구에서 ‘井(정)’자가 새겨진 토기가 발견됐다. ‘大夫’자 토기와 같은 모양, 같은 크기였다. 해당 유구(101호)는 10마리의 말 뼈와 더불어 약 1200점에 달하는 제기용 토기가 깨진 채 쌓여 있는 제사용 폐기장으로 밝혀졌다. ‘大夫’에 대해서는 백제의 중앙관직명이라는 추측이 제기됐다. 이와 관련해 1999년 시루봉 고구려 보루에서도 ‘大夫井’이 새겨진 명문 토기가 발견됐다. 권오영은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적 친연성을 고려할 때 ‘大夫’와 ‘井’이 종교 의례와 관련된 개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학계는 풍납토성이 2∼5세기 한성백제시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유적이라고 평가한다. 인근 몽촌토성이나 석촌동고분은 4세기 이후 조성됐다. 특히 경당지구에서는 왕실 우물과 더불어 국가 제의시설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44호 유구)도 발견됐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경당지구는 토성과 더불어 한성백제 왕성의 존재를 실증하는 핵심 유적”이라고 평가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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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지진, 첨성대 기우는 속도 20년 앞당겨

    이번 경주 지진으로 매년 1mm씩 기울던 첨성대가 20mm나 기울었다. 20년 치가 한꺼번에 기운 셈이다. 전문가들은 첨성대가 당장 붕괴될 수준은 아니지만 안심할 상황은 아니라고 분석한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석조문화재에 대한 지진 대응 점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첨성대는 북쪽 지반이 침하되면서 중심축이 매년 평균 1mm씩 북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번 지진으로 20mm가 더 기운 것을 포함해 첨성대의 중심축은 224mm, 각도로는 1.2도가량 기운 상태다. 한때 붕괴 위기를 겪은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이 최대 5.5도 경사를 버티고 있는 걸 감안하면 1.2도가 위험 수준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내부가 일체식 구조인 피사의 사탑과 달리 첨성대는 돌을 하나씩 쌓아올린 불연속체 구조여서 기울기로 인한 안정성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고 분석한다. 첨성대는 강진으로 인해 최상부에 놓인 ‘井(우물 정)자’ 모양의 돌(정자석·井字石)이 떨어질 우려도 있다. 실제로 이번 지진으로 정자석의 남동쪽 모서리가 50mm가량 더 벌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게다가 첨성대는 하부 지반이 불규칙하게 내려앉으면서 석재들의 벌어짐(이격)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실제로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11년 발표한 ‘석조문화재 안전관리방안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첨성대는 정상부를 제외한 모든 단에서 평균 19mm의 이격이 발생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경주 지진으로 인해 정자석 외에도 각 석재들이 1∼5mm씩 이격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첨성대의 구조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대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장기적으론 첨성대를 해체 수리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앞서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12년부터 해체 수리에 들어가 8월 작업을 마친 석가탑은 이번에 지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내진설계가 작동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수리한 난간석이 이번 지진 때 내려앉은 다보탑은 새로운 부재로 교체하는 수리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경주 지진을 계기로 전국 석조문화재에 대한 내진 보강과 더불어 체계적인 대응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2013년 지진재해 안전성 평가에서 전국 석조문화재 152개 가운데 30개가 ‘경계’ 등급을 받았다. 한국지진공학회가 실시한 이 평가는 각 문화재를 위험, 경계, 보통, 양호, 정상 등 5등급으로 분류했는데, 위험과 경계 등급은 정밀 안전진단이 필요한 문화재들이다. 경주에서는 계측 조사 중이던 첨성대 등을 제외한 22개 석조문화재가 양호 혹은 보통으로 평가됐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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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우코크의 얼음공주’가 전하는 생생한 고대 알타이의 모습

    중국과 몽골, 러시아 접경지대에 있는 알타이 고원지대는 오래전부터 우리 고고학계의 관심을 받아 왔다. 이곳에서 경주의 적석목곽분처럼 시신을 안치한 목곽 위에 거대한 돌무지를 쌓은 무덤군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른바 러시아의 ‘파지릭 고분’이다. 무기와 마구(馬具), 금으로 만든 장식 등을 함께 매장한 것까지 서로 닮았다. 고고학계는 파지릭 고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유목문화가 신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본다. 이 책은 러시아 알타이 우코크 고원의 고분들을 1990년대 직접 발굴한 저자가 썼다. 발굴 도면과 각 유물에 대한 해설, 당시 주민들의 정신문화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았다. 이 중 일반에 ‘우코크의 얼음공주’로 알려진 여성 미라의 고분이 인상적이다.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알타이 문명전’에 전시된 바로 그 미라다. 미라가 묻힌 무덤은 영구 동토층의 얼음에 조성된 덕에 시신은 물론이고 모자, 직물, 의류, 음식 등 유기물질이 고스란히 남았다. 심지어 시신의 피부조직에 새겨진 문신까지 생생하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이를 통해 고대 알타이 주민들의 습속과 문화를 자세히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온대지방의 저습지처럼 북방고고학자들에게 영구동토층은 유물의 보고(寶庫)인 셈이다. 재밌는 건 일반적으로 남성 우위인 유목문화에서 여자를 묻은 고분은 드문데 이 미라는 남편도 없이 홀로 동떨어져 묻혀 있었다는 점이다. 시신은 고급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고 말 여섯 마리와 함께 매장됐다. 게다가 우코크 고원은 아무나 거주할 수 없는 일종의 특수공간이었다. 저자는 이 독특한 여성의 정체를 사제(무당)로 파악하고 있다. 북방고고학을 전공한 역자가 쓴 해제에는 여사제의 출생부터, 유방암으로 인한 사망, 미라 처리 등 수개월에 걸친 장례 과정이 생생하게 재현돼 눈길을 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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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자, 맹자를 낳은 ‘산둥’… 특별한 그 무엇

    중국 산둥(山東) 반도는 고대부터 한반도와 활발한 교류를 이어 왔다. 무엇보다 산둥 지역이 끼친 문명 교류의 절정은 유학(儒學)일 것이다. 이곳에서 공자와 맹자가 탄생했다. 산둥에는 저 유명한 타이산(泰山) 산과 황허(黃河) 강이 자리 잡고 있으며, 문사들의 찬란한 시작들이 여기서 잉태됐다. 한성백제박물관은 12월 4일까지 국제교류전 ‘공자와 그의 고향, 산동’ 특별전을 연다. 서울시와 산둥 성이 2014년 11월 맺은 교류협약에 따른 것으로, 산둥박물관이 소장한 주요 유물 227점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다. 이번 전시는 공자가 활약한 춘추시대를 중심으로 상나라 때부터 전국시대까지 다양한 중국 고대 유물을 망라한다. 특히 공자 화상석(畵像石·무덤이나 사당 내 돌에 장식을 새긴 것)을 통해 유가사상의 탄생과 발전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 주제 중 1장 ‘동이(東夷)의 유산’에서는 산둥 지역의 신석기 유물을 소개하고 2장 ‘상(商)과 동이의 경쟁’에서는 상나라와 동이족 방국(方國)들의 교류를 살펴본다. ‘3장 제나라와 노나라’에선 주나라의 제후국이던 노(魯)나라와 제(齊)나라의 예기(禮器)들을 전시한다. 공자의 유가사상이 탄생한 문화적 배경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4장 공자의 일생’에서는 자로(子路) 안회(顔回) 등 3000명의 제자를 키운 공자의 삶을 조명했다. ‘5장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제후국들의 약육강식과 철기 제작 기술의 보급, ‘6장 영원한 스승’에서는 산둥 지역에 널리 분포한 후한대 화상석을 통해 당시 유가사상의 융성을 보여 준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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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사담 후세인의 잔당 대거 유입된 IS의 운명은?

    이슬람 테러조직 IS를 다룬 수많은 책들이 나왔지만 이 책은 특기할 만하다. 외부인, 특히 서구인의 시각에서 IS를 비판한 다른 책과 달리 IS 전쟁의 한복판에 있는 시리아인 역사학자가 ‘목숨을 걸고’ 집필했기 때문이다. 내부인의 시각에서 IS를 바라본 이른바 ‘내재적 접근’이 갖는 차별성을 이 책은 잘 보여준다. IS의 탄생 배경을 중동의 고대사와 사상사로 설명하는 방식이 특히 그렇다.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IS의 뿌리는 놀랍게도 현재의 모습과 닮아 있다. 둘 다 외세의 침략에 대한 대응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저자는 IS의 사상적 기원을 이슬람 신학자 이븐 타이미야(1263∼1328)에서 찾는다. 타이미야가 꾸란의 초기 해석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이슬람 근본주의를 역설한 것은 1258년 몽골에 의해 바그다드가 초토화된 게 직접적인 계기였다. 그는 이슬람 세계가 무너진 것은 무슬림들이 이슬람의 진리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시계태엽을 2000년대로 돌려보자. 알카에다에 이어 IS가 발흥한 시점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다. 이라크 침공 이전에도 이슬람 테러조직이 있었지만 수준과 규모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IS처럼 시리아와 이라크의 일부 영토를 획득해 실효적으로 지배한 테러단체는 역사상 없었다. 왜 그런가. 저자는 IS가 이라크전쟁의 비극을 먹고 자랐다고 말한다. 미국의 승리로 축출된 사담 후세인의 바트당 잔당 세력이 IS의 핵심 구성원으로 흡수되면서 IS의 힘이 비약적으로 커졌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전 등을 거치면서 고도로 훈련된 바트당 장교 일당이 IS 조직원들을 효과적으로 통솔하게 된 것이다. 결국 IS의 뿌리인 타이미야의 사상과 IS의 현재에는 각각 몽골의 바그다드 침략과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IS의 조직 운영 방식이 사담 후세인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는 데 주목한다. 생화학무기를 동원해 쿠르드족을 대량학살한 후세인처럼 IS는 점령지에 극단적인 폭력을 휘둘러 공포정치를 감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마을마다 정보원들을 심어놓고 서로 감시하게 하는 통치 방식도 후세인을 닮았다. 어린 학생들이 등교할 때마다 IS 리더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의 이름을 구호로 외치게 하는 것까지 비슷하다. IS의 오늘을 가능케 한 후세인의 유산, 즉 바트당 잔당은 IS의 미래를 점치는 데 중요한 변수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이들이 IS 내에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할수록 알 바그다디의 올가미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들은 IS로 넘어가면서 수염을 기르며 전통복장을 걸친 채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만, 실상 후세인 치하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세속주의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향후 상황에 따라 서구 세계와 적당히 타협하기 위해 알 바그다디를 제거하고 IS를 정상 국가화하려는 쿠데타 시도가 일어날 수 있다고 저자는 전망한다. 역사에서 온갖 혁명과 운동이 소수 지배층의 의도대로 보수회귀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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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0년전 비파형동검, 인골과 함께 발견

    사람의 뼈와 비파형동검이 함께 묻힌 기원전 6세기∼기원전 5세기 청동기시대 무덤이 처음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발굴조사 기관인 강원고고문화연구원이 강원 평창군 하리 발굴현장에서 비파형동검과 인골(人骨)이 함께 묻힌 청동기시대 석관묘를 발견했다”고 8일 밝혔다. 인골 또는 동검이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각각 발견된 적은 있지만, 함께 출토된 것은 처음이다. 고고학계는 인골과 비파형동검이 함께 나와 당시 장례 풍습 등을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문화재청과 발굴기관에 따르면 청동기시대 석관묘 14기가 확인됐으며, 이 중 인골이 나온 무덤은 길이가 204cm로 가장 크다. 또 당시 지배층의 전유물이던 비파형동검이 부장된 점으로 미뤄 인골은 이 지역 수장급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비파형동검은 길이 26.3cm, 폭 3.8cm로 두 동강이 난 채로 석관의 동쪽 측면 가운데 묻혀 있었다. 학계는 출토 동검의 양식이 비파형동검에서 세형동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기원전 6세기∼기원전 5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변의 다른 석관묘에서 나온 토기와 석검, 관옥 등도 청동기시대 중기 유물로 분석됐다. 비파형동검 권위자인 이영문 목포대 교수(고고학)는 “동검 몸체 하부가 비파형동검 특유의 풍만한 곡선에서 벗어나 직선화된 데다 전체 길이도 30cm 미만으로 짧아진 점이 세형동검으로 넘어가는 과정임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위, 아래로 부러진 비파형동검의 가운데 부분이 구부러진 게 주목된다. 학계는 동검을 일부러 부러뜨린 상태로 매납(埋納·특별한 목적으로 물건을 묻는 것)한 정황으로 보고 있다. 앞서 여수 적량동 고인돌 유적 등에서도 부장 당시 일부러 부러뜨린 비파형동검이 여럿 발견됐다. 이는 제사용 토기를 깨뜨려 부장하는 풍습처럼 선사시대 사람들의 종교관이 반영된 장례 풍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출토 당시 두 조각의 동검이 거의 떨어지지 않은 완벽한 형태에 가깝게 발견된 점을 감안할 때 토압(土壓)으로 인해 쪼개졌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통상 부러뜨린 뒤 매납한 동검 조각들은 서로 포개져 있거나, 어느 정도 떨어진 상태에서 발견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학계는 무엇보다 인골의 보존 상태가 양호해 유전자(DNA) 분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추가 정보를 기대하고 있다. 인골에 남아 있는 콜라겐 성분을 통해 성별, 나이는 물론이고 식습관 등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굴 기관 관계자는 “현재 두개골을 비롯해 정강이뼈와 대퇴골 등이 발견됐는데 주변 토양이 알칼리성이라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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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억년전 도마뱀 발자국 화석, 한국서 세계 첫 확인

    중생대 백악기의 도마뱀 발자국 화석이 세계 최초로 국내에서 확인됐다. 이 화석은 ‘한국에서 발견된 새로운 종류의 도마뱀 발자국’이라는 뜻의 ‘네오사우로이데스 코리아엔시스(Neosauroides koreaensis)’로 명명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경남 남해군 가인리 화석산지(천연기념물 제499호)에서 중생대 백악기에 서식한 도마뱀의 발자국 화석을 찾았다”고 8일 밝혔다. 이 발자국 화석은 총 8개의 앞발자국과 뒷발자국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1억 년 전의 중생대 백악기 지층에서 나왔다. 앞서 중생대 백악기보다 시기적으로 빠른 중생대 트라이아스기(약 2억5200만 년∼2억100만 년 전)에 서식한 도마뱀인 린코사우로이데스(Rhynchosauroides)의 발자국 화석이 영국 등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 화석은 현재 미국 서부에 서식하는 산쑥도마뱀의 발자국과 비슷한 것으로 조사됐다. 임종덕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은 “중생대 백악기 한반도에 공룡을 포함한 파충류 등 다양한 척추동물이 존재했음이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나온 화석은 2013년 2월 경남 창원시 회원초등학교의 문해원 교사가 지질답사 도중 우연히 찾아냈다.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를 중심으로 미국, 스페인, 중국의 4개국 공동연구팀이 조직돼 화석을 연구해왔다. 연구결과는 중생대 백악기 연구 국제학술지인 ‘백악기연구’에 발표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 화석을 천연기념물센터 전시관에서 내년 상반기에 공개할 예정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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