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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아이들의 팔다리가 날아가고 있는데, 모스크바에서는 18일(현지 시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8주년 기념축제가 열렸다. 행사장 안팎에는 20여만 명이 몰렸고 모두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연설에 열광했다. 국내에서 러시아 침공 규탄 집회를 주도하고 있는 올레나 쉐겔 한국외국어대 우크라이나어학과 교수(41)는 “이 전쟁을 ‘푸틴이 잘못해서’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대부분 푸틴 탓으로 보지 않습니까. “한국에 있는 러시아 사람들 중에 제게 미안하다고 한 사람은… 20년 전 유학 와서 룸메이트도 함께한 친구 단 한 명뿐이었어요.” (주변에 러시아분들이 꽤 있을 텐데요.) “러시아 정부의 프로파간다(선전선동) 영향도 있겠지만, 다른 (러시아) 사람들은… 미안하다는 말은 고사하고 아예 말을 안 해요.” (포로로 잡힌 러시아 군인들은 ‘훈련인 줄 알았다’ ‘모르고 왔다’고 합니다만.) “저는 잡히면 그렇게 말하라고 교육받았다고 생각해요. 국경까지 올 때야 훈련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런데 국경을 넘었는데, 그리고 민간인을 향해 총을 쏘고 병원을 폭파시키면서도 훈련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이 전쟁을 푸틴만의 잘못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지도자가) 잘못된 전쟁을 하면 국민들이 들고일어나야죠. 100만 명이 나서는데도 전쟁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그 친구는 뭐라 하던가요. “(전쟁 직후) 전화가 왔는데 못 받겠더라고요.” (왜요?) “그 친구가 우크라이나말을 몰라서 러시아어로 말해야 하거든요. 제가 러시아어로 얘기해야 한다는 게 너무 싫었어요. 그러다가 3, 4일 후에 받았는데… ‘부모님은 잘 계시느냐’고 묻더라고요.” ―편하게 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부모님과 몇 시간만 연락이 안 돼도 미칠 것 같은 상황에서 제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래 어떨 것 같으냐. 너희 나라에서 이렇게 폭격하고 있는데 괜찮을 것 같으냐….” (그런 생각이 든 건가요.) “아니요. 대놓고 말을 했어요. 그 친구는 평소에 푸틴에 대해 비판적이에요. 그 친구가 전쟁을 일으킨 게 아니라는 것도 알죠. 머리로는 아는데….” ―러시아말을 하는 것조차 싫은데, 내 나라 수도를 러시아식 표기로 매일 보고 들어야 하는 건 더 힘들었겠습니다. “원래 주한 우크라이나대사관에서 우크라이나 발음으로 바꾸는 운동을 추진해 왔는데 그동안은 잘 안 됐어요. 그런데 전쟁이 나면서 바뀐 거죠. 한국에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내 나라 지명을 침략자 발음으로 매일 보고 들어야 한다는 건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에요. 다행히 한국 언론에서 바꿔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이달 초부터 그동안 러시아식으로 표기되던 수도 키예프는 키이우, 하리코프는 하르키우, 리비프는 리비우 등으로 바뀌었다. ―혹시 우리가 본의 아니게 우크라이나분들에게 실수한 점은 없습니까. “오늘 하나 있기는 한데… 인터뷰를 했는데 제가 말하지도 않았고, 한국분들이 보면 화날 수 있는 제목을 뽑은 거예요.” (뭐라고 했습니까.) “한국이 6·25 때 받았던 빚을 갚아야 한다고….” (당시 우크라이나가 도와줬으니 이번에 갚으라는 뜻으로 오해받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니까요. 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6·25전쟁 때 한국에 해준 것도 없어요. 설사 해준 게 있어도 빚 갚으라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않나요? 국제사회의 도움을 부탁한 것뿐인데…. 저는 우크라이나가 한국에 어떤 도움을 요구하거나 요청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단지 부탁을 할 뿐이지요. 그런데 이런 기사가 나가면 한국분들이 좋게 보지 않을 거 같아요. 그래서 인터뷰를 안 하는 게 더 나을지 고민도 했어요.” ※이 기사는 이날 오후 내내 인터넷에 게재됐다. 이후 일부 수정이 있었지만 이미 원본이 곳곳에 퍼진 상태다. ―교수님이 아니면 한국에서 우크라이나 입장을 들을 통로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 “침공 직전 푸틴이 대국민 연설을 할 때 기자분들에게 연락이 많이 왔어요. 푸틴 주장 중에 어떤 게 진짜고 가짜인지 묻기 위해서죠. 한국에 우크라이나 사람은 300여 명밖에 없고, 그중에서도 한국어를 하는 분은 많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알리지 않으면 한국에서는 미국이나 러시아, 또는 유럽의 시각으로만 상황을 보겠죠. 특히 러시아발 뉴스의 진위는 가리기 힘들 테고요.” ―집회도 주도하셨던데요. “제가 주도한 건 아닌데 그렇게 보여서…. 전쟁이 터지고 너무 힘든데 제가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보려고 재한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모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커뮤니티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집회를 하자는 의견이 이미 나왔어요. 그런데 관할 경찰서까지 근무시간 안에 직접 가서 집회 신청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는 거예요. 다들 생업이 있고, 지방에 계신 분도 있고, 무엇보다 한국어가 돼야 하니까요. 그래서 제가 신청하고, 성명서도 읽다 보니…. 모두가 자기 몫을 했어요.” ―한국도 뒤늦게 보내기는 했습니다만 필요한 물품이 한둘이 아닐 것 같습니다. “현지에서 간호봉사 하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어요. 울면서… 혹시 한국 정부가 붕대나 의료용품 같은 걸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봐달라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됐습니까.) “제가 아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 국회에서 우크라이나 상황 설명을 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필요한 물품 목록을 드리고 부탁을 하는 정도죠. 다행히 종교·시민단체분들이 긴급구호연대를 결성했는데 실제로 물품을 보내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려요. 지원 물품 중에도 소용없는 게 너무 많대요.” ―소용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예를 들어 구호 물품이 든 컨테이너 하나가 오면 그 안에 진짜 필요한 건 30% 정도밖에 안 돼요.” (나머지는 뭔가요.) “곰돌이 인형 같은 거… 마음은 고맙지만 지금 곰돌이 인형을 어디에 쓰겠어요.” (음식은 어떻게….) “우크라이나군이 장악하고 있는 곳은 물자 공급이 되는데, 러시아군에 포위된 곳은 정말 힘들어요. 눈이 있을 때는 녹여 마시고, 지하실 파이프에 고인 물을 마시기도 하고…. 협상 중에는 인도주의적 통로를 열어두기로 했지만 말뿐이에요. 우리가 화물차를 보내면 바로 포격하니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코미디언 출신임에도 대통령이 된 게 이전 정치세력이 워낙 썩어서였다고 하던데…. “2012년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때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재임 2010∼2014년) 통역을 했는데….” (2014년 시민혁명으로 쫓겨난 친러 대통령 말인가요.) “네 맞아요. 푸틴의 꼭두각시인데 군 복무기간도 2년 반에서 1년으로 단축하고, 막판에는 6개월까지 줄이려 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정상회의에 애인을 데려왔어요.” (네?) “영부인이 아니고 자기 요리사 출신의 불륜 관계인 여자를….”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에는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 중국 후진타오 국가주석 등 50여 개국 정상이 참석했다. ―죄송합니다만 믿기 힘들군요. “그러실 거예요. 도착 당일 통역을 한 뒤에 다음 날 정상회의가 있으니까 몇 시까지 오면 되느냐고 물었더니 정상회의 때는 필요 없다고 하더라고요.” (회의 통역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닙니까?) “저도 이해가 안 돼서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까 내일 그 애인과 측근들 관광쇼핑 통역을 해달래요. 점심을 한국 전통식으로 예약해 달라고 했는데….” (궁중요리 같은 걸 원했나요?) “종류는 상관없고 1인당 100달러 이하는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현지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부모님과 여동생은 키이우에 있다가 외곽으로 피란했는데 얼마 전에 폴란드로 넘어갔어요. 사실 손녀만 아니었으면 부모님은 키이우에 남으셨을 거예요. 제 여동생에게 18개월 된 아기가 있는데 너무 위험해서 여동생이 혼자라도 나가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차마 혼자 보낼 수 없어서 함께 수도 외곽으로 피했는데 거기도 포격이 심해지니까 도저히 있을 수가 없어서….” (다른 지인들은 어떻게….) “연락이 안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죽었다고 생각하면 너무 견딜 수 없어서 그냥 연락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전화기를 잃어버렸거나 통신이 안 돼서 그런 것뿐이라고….” ※후원계좌 174-910024-87105(하나은행)예금주 우크라이나 대사관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코로나19 확진자가 한창 폭증하던 2일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를 인터뷰 했습니다.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은 모르는 바 아니지만 확진자가 폭증하는데 방역은 점점 더 완화하는 상황이 좀 앞뒤가 안 맞았기 때문이지요. 이 교수는 이런 정부 대응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지난달 중순 정부 코로나19 일상회복지원위원회 위원직을 사퇴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인터뷰를 한 2일은 마침내 처음으로 확진자 20만 명을 넘은 날이지요. 그때 다음주면 30만 명을 넘을 수 있다고 했는데 정말 3월 8일 34만 명을 찍었습니다.이 교수가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제 확진자가 너무 늘어나서 정부가 다 관리해줄 수가 없기 때문에 정부가 국민들에게 상황을 솔직하게 말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이 위기라는 것이죠. 델타보다 증상이 약하다고는 하지만 오미크론 자체도 아직 완전히 무시할 정도는 아닌데다 델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확진자가 폭증하면서 또 다른 문제들이 파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의사도 감염되면 일주일 동안 자가 격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부는 경증이면 3~5일만 격리하고 나와서 일하라고 합니다. 환자나 다른 의료진의 감염은 어떻게 하나요? 이 교수가 근무하는 병원에는 흉부외과 교수 두 명이 에크모(ECMO·인공심폐기)를 돌리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이분들이 격리되면 코로나 환자가 아닌 사람도 기계를 제대로 못 돌려 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최근에 코로나에 걸린 영유아들이 잇달아 숨졌다는 기사를 보셨을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증상이 악화돼서, 병상이 다 차서 그런 일이 벌어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소아응급체계가 무너진 슬픈 우리 의료현실이 있었습니다. 출산율이 줄면서 소아과가 돈이 안 되니 인기가 없어진 것이죠. 메이저 대학병원 정도를 빼면 소아과 레지던트가 있는 병원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레지던트가 있는 곳도 낮 근무 때문에 밤에 당직은 못 세우고요. 그래서 대부분의 대학병원에서 소아과는 밤에 응급 콜을 안 받고 있다고 하는 군요. 야간에 소아응급을 받는 곳을 찾다보니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코로나가 2년이나 지났는데 왜 지금 와서 문제가 드러났냐고요? 그 전까지는 지금처럼 확진자가 폭증하지 않았기 때문에 메이저 병원에서 감당할 수 있었지요. 지금은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고요.이 교수는 “확진자가 너무 늘어서 집중관리군 외에는 정부가 관리해 줄 수가 없다. 그러면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처럼 국민들에게 지금이 위기이고, 국민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솔직히 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지금까지 너무 잘해왔다고 자부하다 보니, 위기를 인정하는 걸 마치 방역을 포기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죠. 재택치료, 수동감시 등의 이상한 이름도 그런 이유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집중관리군 외에는 아무 것도 못해주는데 ‘재택치료’라니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확진자 동거인은 격리여부를 스스로 결정하라고 하면서 ‘수동감시’라니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마치 뭔가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으니 이런 용어를 만들어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우리 몸은 우리가 지켜야만 하는 시기가 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지난 인터뷰 기사에서 다 쓰지 못한 자가진단키트의 정확성 문제를 얘기해야겠군요. 자가진단키트를 너무 믿고 ‘두 줄(코로나 양성)’이 안 나왔다고 안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교수는 “증상이 있는 사람은 50~60% 정도, 증상이 없는 사람은 20% 정도 밖에 못 잡아낸다”고 하는 군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정부는 늘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 기준을 충족했다고 합니다. 민감도(감염자가 양성으로 진단되는 비율)는 90%, 특이도(비감염자가 음성으로 나오는 비율)는 99%를 충족했다고요.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이 말이 자가진단키트로 실제 환자를 검사했을 때 90%, 99%가 나오는 줄 압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이 수치는 제조회사 실험실에서 환자 검체를 모아 조금씩 희석시키면서 어느 정도까지 바이러스를 잡아내는지를 보여주는 시험 결과라고 합니다. 제조회사가 특이도, 민감도를 자체 검사하고, 그 결과와 시험 과정을 식약처에 제출하는 방식이라는 군요. 그래서 이 교수는 “마음만 먹으면 99%를 만들기는 쉽다”고 합니다. 일종의 자동차회사에서 연비 선전하는 것과 비슷한 거죠. 사실 진짜 90%, 99%면 굳이 유전자증폭(PCR)검사를 또 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이 교수는 “우리나라 키트가 다른 나라 것보다 위양성(가짜 양성비율)도 높다”고도 했습니다. “키트로는 양성인데 PCR검사에서는 음성으로 나오는 비율이 20%정도나 된다”고 했지요. 신속항원검사는 바이러스를 잡아내는 확률은 좀 낮아도, 일단 잡아내면 이 사람은 확실하게 걸렸다고 얘기해주기 때문에 쓰는 겁니다. 그런데 키트에서는 양성인데 PCR에서 음성이면, 애초에 키트 자체를 믿을 수가 없는 거지요. 아, 이 얘기는 꼭 해야겠습니다. 2월 18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대형마트 QR인증을 폐지하고, 식당 카페 등의 영업시간을 밤 10시까지 한 시간 더 연장하는 거리두기 조정안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방역정책을 완화하면서 전날인 17일까지 한 달 동안 일상회복지원위원회는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위원회가 조정안을 검토할 시간도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 전날 열린 회의에서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전주 대비 환자 수가 2배 이상 급증했고… 위중증·사망자가 지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행 정점 시기와 규모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 유행 정점까지는 안정적인 상황 관리가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완화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왜 정부는 밀어붙였을까요? 2월 18일 확진자는 10만2211명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안 된 3월 8일 34만2446명으로 늘었습니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하면서 다음 주면 하루 확진자가 35만 명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반면 방역정책은 점점 더 완화되는 상황. 정부가 영업제한 시간을 오후 11시까지로 연장하는 거리 두기 조정안을 발표한 4일에는 역대 하루 최다인 216명이 사망했다. 최근 정부 코로나19 일상회복지원위원회를 사퇴한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정부가 3만 명 예상할 때 ‘20만 명 갈 수 있다’고 했더니 나보고 비관론자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오늘(2일 0시 기준) 확진자가 처음으로 20만 명을 넘겼다. 비관론자는 아닌 것 같은데…. “정부 쪽에서 맥시멈(Maximum) 3만 명 볼 때 20만 명 얘기했더니 정부와 일하는 전문가들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나와 정재훈 가천대 길병원 예방의학과 교수는 비관론자라고…. 나는 일상회복지원위원이었고, 정 교수는 김부겸 국무총리 특보다. 우리는 정부랑 일을 안 했나. 정부 내 전문가 중에 잘못된 사인을 주는 그룹이 있다.” ―그 전문가들이 방역 정책 완화에 일조하고 있다는 건가. “바이러스는 정직하다. 대응하면 줄고, 안하면 는다. 지금 거리 두기는 영업제한 시간을 빼면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하지않나. 방역 패스도 풀고, 역학조사도 안 하고. 확진자 수가 정점을 찍었을 때 완화해도 되는 걸 한창 폭증하는 상황에서 왜 앞당겨 푸는 지 이해가 안 간다. 오미크론이 델타보다는 위험성이 낮고, 백신접종률도 높으니까 걸릴 만큼 걸려서 이번 유행을 마지막으로 만들어보자고 각오한 게 아니면 절대로 이런 방향으로 가면 안 된다.” ―의료진 감염까지 속출하고 있는데 정부는 경증이면 3∼5일만 격리하고 업무에 복귀해도 된다고 한다. “경증이라 일은 할 수 있다고 치자. 환자나 다른 의료진의 감염은 어떻게 하나. 병원이 멈출 정도의 상황이라면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나오라고 말하면 안 된다. 확진 후 7, 8일이 지나 격리가 해제돼도 바이러스가 20% 이상 나온다. 3∼5일이면 아프고 열나는 것과 상관없이 바이러스가 한창 뿜어올 때인데 안 아프면 나오라니. 내가 경증이라고 나한테 옮은 사람도 경증인가? (정부 쪽) 전문가 중에 병원에서 일해보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현장은 지옥인데 현장을 모르는 사람들이 정책에 관여한다.” ―당신은 의료체계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했다. “병상이 다 차면 더 이상 환자를 받을 수 없지 않나. 의사가 감염되면 일주일 동안 수술이나 진료를 할 수가 없다. 경증이면 그냥 하라고? 마취과도 들어오고, 간호사들도 붙고, 다른 의사들도 있는데…. 우리 병원에 흉부외과 교수 두 명이 에크모(ECMO·인공심폐기)를 돌리는데 만약 이분들이 격리되면 기계도 제대로 못 돌린다. 코로나 환자만 죽는 게 아니다.” ―그런 상황이 오면 외국처럼 록다운(lockdown·이동제한령)이라도 해야 하나. “필요한 상황이 오면 할 수도 있다고 보는데…문제는 임기 말 정부가 록다운 같은 강력한 행정조치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레임덕이라 제대로 지킬지도 의문이고, ‘다 끝난 우리가 왜?’라고 생각하지는 않을는지. 새 정부 입장에서도 시작부터 그렇게 고통스럽고 인기 없는 정책은 하고 싶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앞으로 몇 달이 방역 정책적으로는 굉장히 애매하고 이상한 시간이 될 수 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코로나 중환자가 최근 한 달간 6배가 늘었다는데,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는 게 무슨 말인가. “확진자 중에 인공호흡기나 에크모 등 기계에 호흡을 의존하는 경우만 코로나 중환자로 집계하기 때문이다.” (확진자 중 뇌졸중, 협심증 등은 숨만 스스로 쉴 뿐 중환자 아닌가.) “당연하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 대한 환자 분류 체계를 안 만들었다.” ―분류 체계를 안 만들었다니…. “전에는 코로나에 걸리면 주로 폐에 문제가 생겼다. 자가 호흡 중환자는 일부라 분류가 별로 의미가 없었는데 오미크론으로 확진자가 폭증하면서 이런 중환자도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이없는 일?) “병상 배정은 보건복지부가 하는데 국·과장급에 의사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의료 현장을 잘 모른다. 그러다보니 자가 호흡 중환자가 코로나 중환자 병상에 누워있으니까 ‘이 사람들이 왜 여기 있느냐, 빨리 빼라’고 하는 거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자가 호흡 중환자’는 2월 1일 104명에서 3월 1일 597명으로 5.7배로 늘었다. ―숨만 스스로 쉴 뿐 중환자인데 병상을 빼면 어디로 가라는 건가. “갈 데가 없다. 코로나에 감염된 심부전 투석 환자를 일반 중환자실에서 돌볼 수는 없지 않나. 그런데도 분류 체계상으로는 (코로나 중환자가)아니니까 빼라는 거다. 병원에서 난리를 치니까 지난달에야 관련 지침에 ‘기타 질환에 의한 중환자도 수용할 수 있다’는 한 줄을 넣었다. 그 한 줄 넣는데 참 오래 걸렸다.” ―최근 영유아들이 이송 중이나 재택치료 중에 잇달아 숨졌다. “그게 병상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소아과가 인기가 없어진 탓도 있다. 출생률이 줄면서 돈은 안 되는데, 부모들의 항의는 많아지니까 소위 일하기 힘든 분야가 된 거다. 메이저 대학병원 정도를 빼면 소아과 레지던트가 있는 병원이 거의 없다. 레지던트가 있는 곳도 낮 근무 때문에 밤에 당직은 못 세운다.” (밤에 응급 소아는 어떻게 하라고.) “대부분의 대학병원에서 소아과는 밤에 응급 콜을 안 받는다. 우리 병원도 소아 응급진료는 못 본다. 코로나와 별개로 우리나라 소아 진료 체계 중에 응급 부분은 이미 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다.” (왜 이제야 그런 문제가 드러난 건가.) “델타 이전까지는 소아 감염이 많지 않아서 메이저 병원에서 감당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 수를 넘었으니까. 확진자가 폭증하면서 이런 문제들이 파생됐다. 그런데 완화라니….” ―일상회복지원위원회는 왜 그만뒀나. “1∼2월에 오미크론이 막 퍼지는데 방역은 완화 기조로 자꾸 바뀌었다. 뭐라고 말을 해도 받아들여지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그 중요한 시기에 위원회는 한 달 동안이나 회의를 하지 않았다. 자가 격리나 재택치료, 역학조사 포기 등 다뤄야할 중요한 사안이 많았는데도 안 했다. 그래서 위원회 방역·의료분과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에 ‘이럴 거면 저는 더 이상 참여할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나왔다. 사실 더 빨리 그만두려고 했다.” ※위원회는 1월 12일 7차 회의 후 한 달여 만인 2월 17일 8차 회의를 열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다음 날인 2월 18일 대형마트 QR인증을 폐지하고 식당, 카페 영업은 오후 10시까지 한 시간 더 연장하는 거리 두기 조정안을 발표했다. 이 때문에 위원회 회의가 사실상 형식적으로 열린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갈등이 좀 있었나. “지난해 11월 1일부터 시작된 ‘단계적 일상회복’을 준비할 때였는데 우리는 5단계 정도로 천천히 완화하는 식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3단계 안을 가져왔다. 옥신각신하다가 그거라도 중간에 브레이크 장치(긴급 방역 강화제도)만 넣는다면 방역분과에서 동의할 수 있겠다고 했는데….” (발표 때는 중증환자 입원 병상 가동률이 75%가 넘으면 발동하겠다고 했는데 정작 넘어도 안 하던데.) “그래서 브레이크 장치를 넣는 조건으로 동의한 건데 시행을 안 하면 위원회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정부는 3단계가 아닌 2단계 안을 하고 싶어 했는데 소리를 질러가며 싸워서 막았다. 회의에서 ‘정말 중환자실에서 몇 백, 몇 천 명씩 죽는 꼴 보고 싶냐’고 난리를 쳤으니까.”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게… 지난달 17일 위원회에서 정은경 질병청장은 거리 두기 완화에 부정적인 의견을 냈는데 다음 날 정부는 완화된 조정안을 발표했다. “질병청과 보건복지부 눈에는 문제가 생길 게 뻔히 보였겠지만… 청와대나 총리실에서 워낙 푸는 쪽으로 가니까. 그때도 전문가들은 왜 (정부가) 상황과 동떨어진 판단을 하는지 의아해했다.” ※17일 8차 일상회복지원위에서 정 청장은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전주 대비 환자 수가 2배 이상 급증했고… 위중증·사망자가 지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행 정점 시기와 규모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 유행 정점까지는 안정적인 상황 관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당신은 지금 가장 중요한 게, 정부가 위기를 위기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확진자가 너무 늘어서 집중관리군 외에는 정부가 관리해 줄 수가 없다. 그러면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처럼 국민들에게 지금이 위기이고, 국민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솔직히 말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너무 잘해왔다고 자부하다 보니, 위기를 인정하는 걸 마치 방역을 포기하는 것으로 여긴다. 지금 정부는 적어도 소통 부분에서는 이전 정부들과는 다를 줄 알았는데… 똑같다는 생각밖엔 안 든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베이징 겨울올림픽이 20일 끝났다. 특히 쇼트트랙에서 우리 선수들이 겪은 불이익은 온 국민이 공분했을 정도.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고도 석연치 않은 실격 처리로 중국에 금메달을 빼앗긴 김민정 전 국가대표 선수(37)는 “올림픽뿐만 아니라 각종 세계 대회에서 우리 선수들이 겪는 견제와 반칙, 편파 판정은 상상, 그 이상”이라고 말했다.》 ―우리 선수들이 특히 많이 당하는 이유라도 있나. “제일 잘하니까. 다른 나라는 우리 정도로 당하지는 않는다. 오죽하면 우리가 발 내밀기 기술로 금메달을 자꾸 따자 없던 규정을 만들어 제대로 못하게 만들까.” (어떻게 바꿨기에?) “원래는 다리를 자유롭게 들 수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선수들이 자꾸 이 기술로 금메달을 따니까 규정을 바꿔 스케이트 날을 빙판에 붙인 채 내밀도록 했다.” ※발 내밀기는 1992년 알베르빌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에서 김기훈 선수가 처음 선보였다. 이후 1994년 릴레함메르, 1998년 나가노에서 우리 선수들이 이 기술로 잇따라 금메달을 따자 중국 등 다른 나라들이 항의를 했고, 이후 규정이 바뀌었다. ―외국 선수들도 발을 뻗으면 되지 않나. “흔히 ‘그까짓 거 마지막 순간에 발 쭉 뻗으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정말 하기 힘든 기술이다. 마지막 바퀴는 체력이 완전히 극한까지 고갈된 상태에서 정신력으로 버틴다. 마지막 젖 먹던 힘을 짜내서 내밀어야 하는데, 그게 굉장히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 그냥 들어온다. 더군다나 오직 정신력으로만 버티는 상황에서 왼발로 할지, 오른발로 할지, 코너를 나오자마자 왼발부터 뻗은 뒤에 하는 게 승산이 더 있을지, 인코스로 할지, 아웃코스로 할지 등을 생각해야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편파판정도 심하다던데… 밴쿠버 때 당신이 출전한 우리 여자 계주팀은 세계신기록을 세우고도 실격 처리됐다. “눈 뜨고 코 베였다는 게 그런 게 아닐까? 나는 지금까지도 당시 동영상을 찾아본 적이 없다. 보면 너무 속상하니까. 기가 막힌 건… 심판이 실격 사유도 명확하게 짚지 못해 말할 때마다 달랐다.” (당시 기사마다 반칙 사유가 다른 게 그 때문인가.) “왜 실격이냐고 항의하니까 처음에는 내가 중국의 쑨린린에게 크로스트래킹(cross tracking·진로방해)을 했다고 하다가, 다시 임피딩(impeding·밀기 반칙)이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중국 선수(장후이) 얼굴에서 피가 난 게 내 스케이트 날에 찍혀서라고 했다. 난 그 선수와 같이 달린 적도 없는데….”(당시 비디오를 판독한 전문가들이 반칙은 없었다고 했던데.) “오히려 쑨린린이 내 스케이트 뒷날을 쳤다. 그래서 넘어질 뻔했는데 되레 내가 반칙을 했다며 우리 팀을 실격 처리하더라.” ※한국 팀(박승희 이은별 조해리 김민정)은 4분7초07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1위로 들어왔다. 하지만 김 선수가 반칙을 했다는 이유로 실격 처리돼 중국이 금메달을 가져갔다. 장후이의 피는 중국 선수들이 자축하는 과정에서 베인 것으로 나중에 확인됐다. ―공교롭게 심판이 2002년 솔트레이크 에서 김동성 선수를 실격 처리해 미국의 안톤 오노에게 금메달이 돌아가게 한 호주의 제임스 휴이시였는데…. “태극기 들고 세리머니를 하는데, 다른 심판들은 끝났다고 가려고 하는데 휴이시만 계속 비디오 판독기 앞에 있는 게 보였다. 좀 불안했지만 그래도 워낙 우리가 깔끔하게 잘 타서 별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휴이시가 우리 코치 박스로 가더라. 그 순간에 느낌이 ‘쎄∼’했다. ‘뭐지?’ ‘왜 가지?’ 1등인 걸 알려주려고 가는 일은 없으니까.” ※남자 1500m 결선에서 김동성 선수가 1위로 들어왔다. 그러나 휴이시는 진로방해라며 김 선수를 실격 처리했고, 이 때문에 금메달은 할리우드 액션을 한 오노에게 돌아갔다. 전명규 감독이 휴이시에게 “Are you crazy?”했더니 그는 “Yes, I‘m crazy”라고 했다고 한다. ―경기 전에 좀 걱정되지 않았나. “정말 그렇게까지 할 줄 누가 알았겠나. 그런데 우리 팀을 실격시키고 나니까 언론에서 얼마나 휴이시가 한국에 편파적이었는지 줄줄이 기사가 나오더라.” (그러면 안 되지만 분노한 한국 누리꾼 수사대가 휴이시의 야동 다운로드 내역까지 파헤쳤다.) “‘휴이시, 이번엔 그냥 안 넘어 간다’는 기사를 본 것 같기는 한데. 하하하.” ※휴이시는 2002년 김동성 이승재(솔트레이크 겨울올림픽), 2006년 최은경(토리노 겨울올림픽), 안현수(세계선수권대회), 2007년 송경택(밀라노 월드컵), 2008년 진선유(ISU 2차 월드컵), 2010년 성시백(밴쿠버 겨울올림픽) 등을 줄줄이 실격시켰다. 당시 언론에는 연일 ‘휴이시, 그는 누구인가’ ‘휴이시, 한국 싫어하나’ 등의 기사가 게재됐다. ―베이징에서도 그랬지만 쇼트트랙은 왜 제소를 해도 받아주질 않나. “쇼트트랙이…국제빙상연맹(ISU)에 제소를 하고, 뭘 해도 번복이 안 된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심판 권한이 굉장히 크다. 예를 들어 명백히 나온 비디오 화면을 들고 가서 ‘봐라, 부딪힌 게 없지 않느냐’고 해도 심판이 ‘내가 본 각도에서는 부딪혔다’고 해버리면 끝이다. 황대헌 선수, 헝가리 류 사오린 선수에게 실격을 준다는 게 말이 되나.” ※남자1000m 결선에서 중국 런쯔웨이가 헝가리 류 사오린 샨도르를 두 손으로 잡아채 밀어내는 장면이 화면에 잡혔다. 사오린은 1위로 들어왔는데 심판이 실격 처리해 중국이 금, 은을 땄다. 준결선에서 황대헌, 이준서 선수가 실격 처리된 그 종목이다. 사오린은 아버지는 중국인, 어머니는 헝가리인인데도 당했다. ―황대헌, 이준서 선수 실격 사유인 레인변경 반칙이 심판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큰 규정이라고 하던데. “예전에는 직선 코스에 줄이 없었는데 올해부터 생겼다. 그 선을 기준으로 자기 진로에서 많이 벗어난 선수에게 레인변경 반칙을 준다. 예를 들어 누가 나를 추월하려고 하는데 내가 옆으로 넓게 벌려서 진로를 막으면 실격 처리된다. 그런데 이게 되게 애매한 게… 모두 붙어서 빠른 속도로 질주하다 보니 심판이 보는 각도에 따라 실제 상황과 다르게 보이기가 쉽다. 쇼트트랙은 추월이 묘미인데, 추월할 때든, 막을 때든 자기 레인에서 약간씩은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누구에게 레인변경 반칙을 주려고 작정하면 추월했든(황대헌 경우), 추월을 막았든(이준서 경우) 다 줄 수 있는 거다. 항의가 들어와도 앞서 말했지만, ‘내가 볼 때는 많이 벗어났다’고 하면 끝이니까.” ―황 선수를 실격시키며 ‘레인 변경이 늦어서 신체접촉을 유도할 수 있다’고 했던데, 가능성도 반칙 사유가 되나. “되긴… 그런 예측성 반칙이 어디 있나.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거지. 황 선수 경기 다음 날 쇼트트랙 코치들끼리 모여서 얘기하는데… 이준서처럼 앞에 있어도 실격, 황대헌처럼 뒤에서 추월해도 실격,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달려야 하냐는 말까지 나왔다. 오죽하면 동네 운동회보다 못 하다는 말이 나오겠나.” ―중국이 다른 대회에서도 반칙을 많이 하나. “중국 선수들이 다른 나라 선수들에게 어떻게 반칙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우리 선수들에게는 굉장히 많이 한다. 반칙도, 이상한 판정도 많다. 다른 나라 선수들은 중국처럼 막 잡아당기거나, 미는 행동을 많이 하지는 않는다.” (중국도 잘하는 편 아닌가? 굳이 왜 그런 반칙을….) “밴쿠버 때는 오히려 중국이 우리보다 실력이 위였다. 중국은 힘과 순발력은 좋지만 작전의 다양성은 별로 없는 편이다. 반면에 우리는 훈련도 열심히 하지만 기술과 작전이 워낙 다양하다 보니 큰 대회에 굉장히 강하다. 그러다 보니 견제 심리가 강한 것 같기는 하다.” ―갈수록 견제가 심해지면 우리 선수들이 정말 힘들 것 같은데. “그래서 제자들이 한 점의 흠도 없이 완벽하게 이기게 하려고 더 꼼꼼하고 철저하게 가르치고 있다. 나같이 어처구니없게 금메달을 놓치는 선수들이 더 이상 없게. 길게 보면 중국은 참 안된 거다. 당장은 반칙과 편파판정으로 금메달을 가져가 기쁘겠지만, 그런 방법으로 이득을 봤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런 안 좋은 방법을 가르치고 배우려 할 테니까. 반면에 우리는, 당장은 억울하고 속상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빌미 하나 주지 않는 완벽한 체력과 기술을 개발하려고 애를 쓸 테고. 베이징에서 보듯 대한민국 쇼트트랙이 괜히 세계 정상인 게 아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설 연휴가 끝난 다음날인 3일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을 인터뷰 했습니다. 그는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출신으로 2020년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대선이 한 달 정도 남은 시점이라 장애인 정책과 관련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만났지요.독자 여러분은 25만 명에 달하는 발달장애인들이 이번 대선에서 사실상 투표를 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16년 지적장애, 자폐 등 발달장애인들도 투표보조인의 도움을 받아 투표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4년간 시행되던 이 지침이 2020년 갑자기 삭제됐지요. 이유는 투표 보조인이 투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헌법이 부여한 투표권은 있지만 사실상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셈입니다. 발달장애인들의 장애 유형은 매우 다양합니다. 판단 능력이 부족한 경우도 있고, 판단 능력에는 문제가 없는데 기표소에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투표용지 접는 것을 깜빡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옆에서 조금만 도와주면 아무 지장 없이 투표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일괄적으로 이들 모두를 싸잡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로 치부한 것입니다. 시각·신체 장애인들은 투표 보조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김 의원도 지난 총선에서 어머니 도움을 받았지요. 손이 없는 장애인의 투표용지는 투표보조인이 대신 접어줄 수 있는데, 발달장애인의 투표용지를 접어주는 건 판단에 영향을 끼치는 행위인가요? 사회적 약자들은 대규모 재난에 더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힘들다보니 그들의 어려움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난 2년간 코로나19 때문에 투표소에서 지급한 비닐장갑을 끼고 기표를 해야 했습니다. 방역을 위해 당연히 필요한 일입니다만, 중증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예상치 못한 불편함도 있었습니다. 비밀투표를 위해 점자 투표지는 만들 수 없다고 합니다. 대신 투표지 위에 덮어씌우는 얇은 종이 한 장을 주는데 여기에 점자로 후보 번호와 이름, 기표하는 파여진 홈이 있다고 하는 군요. 이 종이를 손으로 만져 기표를 해야 하는데, 비닐장갑이 손에 딱 안 맞고 손 끝에 남는 부분이 있다보니 점자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중도 실명을 한 분이나 촉감 능력이 좀 떨어지는 분들은 더 힘들었을 거라 하더군요. 어려움은 투표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오미크론 확산 때문에 방역정책이 대폭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자가 검사를 해 양성이 나와야만 PCR검사를 받을 수 있지요. 이게 중증시각장애인들에게는 날벼락이 됐습니다. 점자 설명서를 갖춘 자가진단키트가 없기 때문이지요. 코에 넣었던 면봉을 시약통에 넣은 뒤. 시약통의 용액을 검사용구에 떨어트려야하는데 시각장애인은 이를 보면서 분량을 조절하기가 어렵습니다. 검사용구에 나타나는 선을 보고 양성 여부를 알 수 있는데 누군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중증시각장애인들이 무슨 재주로 확인하겠습니까. 활동지원을 해주는 분들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수시로 해야 하는 자가 검사 때마다 부를 수는 없겠지요. 무엇보다 감염 우려가 있는데 어떻게 부르겠습니까. 2020년 기준 등록장애인은 260만 명에 달합니다. 이 중 시각장애인이 약 25만 여명, 발달 장애인이 25만 여명 정도입니다. 200만 명에 달하는 청각, 언어 등 다른 장애를 가진 분들이 코로나 속에서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을지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시각장애인들은 버스도 타기 힘들다고 합니다. 정류장에서 음성으로 버스번호를 알려줘도, 두 대 이상이 동시에 오면 어느 버스가 내가 타야할 1234번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하차 벨과 카드단말기도 버스마다 고정된 위치가 조금씩 달라 더듬거리며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받았듯이,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물려줄 의무가 있습니다. 지금보다 나은 세상이 첨단 AI를 개발하고, 입자가속기를 설치해주고, 몇 조원을 들여 공항을 만드는 게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지금보다 나은 세상은, 우리가 지향하는 선진국은, 모두가 겪는 엄청난 재난이 닥쳤을 때, 사회적 약자들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해줄 수 있는 사회가 아닐 런지요. 대선 후보들이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정작 우리는 후보 부인들의 무성의한 사과 기자회견이나 보고 있으니 암담합니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헌법 제24조)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대선 후보들은 저마다 서민과 약자를 위하겠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25만여 명에 달하는 발달장애인들이 이번 대선에서 사실상 투표할 수 없게 됐다는 걸 알까.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42)은 “2020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관련 지침을 삭제하면서 사실상 투표권이 박탈됐다”고 말했다. 시각장애 피아니스트 출신인 그는 비례대표로 21대 국회에 입성했다.》 ―투표권을 사실상 박탈당했다니…. “2016년 선관위가 지적장애, 자폐 등 발달장애인들도 보조인의 도움을 받으면 투표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했다. 그런데 4년간 시행하다 2020년 갑자기 투표 보조인이 투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지침을 삭제했다. 투표권만 있지 사실상 투표를 할 수 없게 된 셈이다. 그래서 발달장애인들도 신체·시각장애인처럼 투표 보조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개정안을 냈는데… 대선이 코앞인데 아직도 논의가 안 되고 있다.”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를 다 했다는 건데 왜 지금 와서….) “보조인이 투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본인들이 영향을 안 받고 할 수 있다는데 남이 아니라고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우려가 있다면 보완을 해서 참정권을 확대하는 게 맞지 않을까.” ―투표소 참관인들이 도와주면 영향을 미칠 우려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서 요청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개정안을 낸 거다. 정치개혁특위 위원장과 양당 간사에게 이번 대선에 적용될 수 있도록 빨리 논의해 통과시켜 달라고 부탁 및 사정 및 요청 등등을 드렸는데, 휴… 별로 관심이 없다.” ※발달장애인들이 투표 시 겪는 어려움은 다양하다. 혼자 기표소 안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투표용지 접는 것을 잊기도 한다. 의사결정과는 무관한 경우다. ―당신도 지난 총선에서 투표 보조를 받았다고. “평소 같으면 혼자 했을 텐데 지난 총선이 중요하다 보니….” (출마했으니까?) “하하하, 다른 때와 달리 정당 간 간격이 너무 좁아서 어머니께 정확히 찍었는지만 봐 달라고 했다. 잘못 찍거나 무효 처리되면 안 되니까.” ※2020년 21대 총선은 비례대표 선거 참여 정당이 35개에 달해 용지 길이는 역대 최장인 48.1cm, 정당 간 칸 간격은 2mm에 불과했다. ―투표용지가 너무 긴 데다 간격도 좁아 투표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나 같은 시각장애인에게는 얇은 종이 한 장(투표보조용구)을 주는데 거기에 점자로 후보 번호와 이름이 적혀 있고, 기표하는 부분은 홈이 뚫려 있다. 이 종이를 투표용지 위에 정확히 맞추고 손으로 짚어 기표를 한다. 그런데 2020년 총선 때도 그랬지만 이번 대선에서도 시각장애인들은 비닐장갑 때문에 지장이 많을 것 같다.” ―방역상 끼는 비닐장갑에 문제가 있나.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손가락이 짧아서 딱 맞지 않고 손끝에 공간이 남았다. 우리는 점자와 홈을 만져야 투표를 할 수 있는데, 손끝에서 남는 비닐이 돌아다니니까 많이 힘들었다. 실명한 지 오래되지 않은 분들이나, 촉각이 예민하지 않은 사람은 지장이 클 것 같다.” ―선거만 힘든 건 아닐 것 같은데. “시각장애인들은 뭘 많이 만져야 하니까…. 이제는 자가 검사를 한 뒤에 양성이 나와야 유전자증폭(PCR) 검사를 받을 수 있게 바뀐것도 걱정이다.” (혼자서는 검사가 힘들 것 같은데.) “활동 지원을 해주시는 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시간 제약도 있고, 지금 검사할 거니 당장 와 달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고. 설사 시간이 돼도 감염 우려 때문에 요청할 수 있을까? 저시력 장애인은 어떻게 한다 해도, 저처럼 완전히 안 보이고, 또 혼자 사는 분들은 정말 어려울 것 같다.” ※점자 설명서를 갖춘 자가진단키트는 없다. 콧구멍에 넣었던 면봉을 시약통에 넣은 뒤, 시약통의 용액을 검사키트에 떨어뜨려야 하는데, 시력의 도움을 받기 어려우니 손끝 힘으로만 분량을 조절해야 한다. 검사키트에 점자가 없으니 혼자서는 양성 음성 여부를 알기도 어렵다. ―발의한 법안들을 보면서 든 생각인데, 성격이 좀 순한 편인가. “왜 그런 생각을?” (100건이 넘는데 대부분 안 지켜도 벌칙이 없더라. 점자법 개정안도 그렇고.) “법을 지키는 이유가 규제와 벌금 때문이라면 그건 너무 1차원적이지 않을까? 이상적일지는 몰라도 자발적으로 지키는 게 좋고, 그게 더 오래간다고 생각해서….” ※점자법 개정안은 점자 문서 제공을 요구받은 공공기관 등이 제공 실적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제출하고, 장관은 이를 국회 소관 상임위에 보고하도록 했다. 2020년 11월 통과됐다. ―점자 문서 제공을 의무화했는데도 법원조차 점자 프린터가 없다고 안 주지 않나. “나도 기사를 봤는데 법원조차 법이 정한 걸 제공하지 않았다는 데 깜짝 놀랐다. 그래서 장관에게 제공 실적을 보고하게 하면 지키지 않을까 싶어 개정안을 냈던 거다.” (기계가 법원이 부담 될 정도로 비싼가?) “400만∼500만 원부터 하는데… 공공기관이 못 살 가격도 아니지만 굳이 살 필요도 없다. 지역마다 점자도서관이나 시각장애인 복지관이 있기 때문에 필요할 때 여기에 요청하면 된다. 점자 문서 요청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없는 거지.” ※2019년 시각장애 1급인 A 씨가 법원에 점자판결문 교부 거부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재판 관련 문서가 일반 활자라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인데 법원은 점자 기계 미비를 이유로 제공하지 않았다. ―한두 가지는 아니겠지만 우리 사회가 장애인들을 위한 세심함이 부족한 부분이 꽤 있을 것 같은데. “음… 시각장애인들은 갤럭시보다 아이폰을 많이 쓴다. 볼 수 없으니까 음성지원 기능이 필수인데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 갤럭시는 이용하기 좀 불편하다는 인식이 있다. 기능이 있기는 한데 자신의 장애 상태에 맞게 설정해 쓰는 과정이 여의치 않다고…. 그래서 나도 아이폰을 쓴다. 사과 그려진 회사가 사용자 접근성에 대한 배려가 더 세심한 것 같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 따르면 갤럭시도 다양한 손쉬운 조작 방법을 제공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이폰처럼 사용자 요구에 따라 입력 방식을 변경할 수는 없다고 한다. ―댓글을 음성으로 들으면 상처가 더 클 것 같은데. “어휴… 장난 아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기사만 보고 댓글은 안 본다. 전에 요즘은 어떤 악플이 트렌드인가 한번 알아보고 싶어서 봤다가….” (욕은 표기가 안 되는데.) “그래서 숫자로 대신 쓰거나 ㄱㅅㄲ 이렇게 자음만 쓰는 사람도 있는데, 보다 보면 한편으로 좀 웃기기도 하다. 안 써지는 걸 알면서 저렇게까지 저 말을 쓰고 싶었을까 싶어서. 그 노력과 의지가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 (ㄱㅅㄲ은 어떻게 읽어주나.) “그냥 똑같이. 댓글이 ‘이진구 ㄱㅅㄲ’ 이러면 ‘이진구 기역 시옷 쌍기역’ 이렇게.” ―혹시 의원이 되고 안 좋아진 게 있나. “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졌다. 롯데마트 건도 그렇고 시각·청각장애 안내견 출입을 막는 곳이 아직도 많다. 그래서 안내견 출입을 환영하는 식당들을 찾아서 사장님 소개를 하는 식으로 칭찬 릴레이 유튜브 영상을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나는 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 (누가?) “선관위가. 지역구 의원은 자기 지역만 벗어나면 할 수 있는데, 비례대표는 전국이 지역구라 공직선거법상 안된다는 거다. 아직은 적지만 설명서에 점자 표기를 해주는 의약품, 화장품 회사들이 있다. 그런 착한 기업도 유튜브를 통해 소개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안 된다더라.” (그건 또 누가?) “선관위….” (다음에 또 출마할 것도 아니지 않나. 너무 기계적으로 접근하는 것 같은데.) “아닌데도….” ―조이가 우리 사회의 안내견 인식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는데 괜찮은가. “괜찮다는 게 무슨 말인가.” (사람도 여의도 오면 이상해지니까.) “하하하, 아직까지는. ‘국개의원’이라 그런지 나보다 적응을 더 잘하는 것 같다. 그런데 얘가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특이하게 어떤 의원들에 대해서는 불러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혹시 국민의 지탄을 받는?)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구나 들을 수 있고, 누구나 계단을 오를 수 있고, 누구나 복잡한 공약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애인도 헌법이 보장하는 선거권을 부여받았고, 당연히 이를 행사할 권리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감이 아닌 배려로만 보장되고 있는 장애인 참정권은 아직 반쪽입니다.”(김예지 의원)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7일(현지 시간) 미국에서 세계 최초로 유전자를 교정한 돼지 심장이 사람에게 이식됐다. 수술을 받은 데이비드 베닛(58)은 보름여가 지난 지금까지 생존 중. 박정규 전 바이오이종장기개발사업단장(서울대 의대 교수)은 “미국도 한 해 6000여 명이 대기 중 사망할 정도로 기증 장기가 부족하다”며 “장기 이식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환자들에게는 가뭄 끝에 단비 같은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8월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세계 최초로 무균돼지의 췌도를 당뇨병 환자에게 이식하는 임상시험을 신청해 승인을 기다리는 중이다.》 ―베닛이 어느 정도 생존하면 성공이라고 볼 수 있나. “이식 직후 48시간이 가장 위험한데 그 시간은 무사히 넘겼다. 이종장기 이식의 첫 번째 목표는 ‘브리지(bridge)’ 개념인데, 사람 장기를 이식 받을 때까지 견뎌주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2∼3개월만 베닛이 생존해도 엄청난 성공이다. 보통 원숭이로 시험했을 때는 6개월 정도 생존하면 충분히 성공한 걸로 본다.” ―그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던데, 사람 장기이식은 왜 못한 건가. “인공심장은 부정맥이 심해 달 수 없었고, 사람 심장은 의사 말을 안 들어서 받을 수 없었다고 하더라.” (말을 안 들었다고?) “과거에 한 번 사람 심장을 이식 받은 적이 있는데 이후 의사 지시를 잘 안 지켜서 면역 거부반응이 일어났던 것 같다. 면역억제제를 제대로 복용하지 않은 거지. 이런 사람들은 대기자 리스트에서 완전히 바닥으로 밀린다. 장기이식을 받는 건 굉장한 행운이다. 그 어려운 걸 받았는데 의사 지시를 안 따라서 다시 문제가 생겼으니 또 해주겠나.” (말 잘 듣게 보이지는 않더라.) “그가 ‘죽거나 돼지 심장을 이식받는 것 외에는 선택이 없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게 그런 까닭이다.”※이식 환자들은 면역체계가 이식된 장기를 외부 물질로 인식해 공격하는 거부반응을 막기 위해 평생 면역억제제를 복용해야 한다. ―베닛이 선택된 이유가 있을까. “속사정이…베닛을 수술한 미 메릴랜드대학팀은 돼지 심장을 원숭이에게 이식해서 3년 동안 살리는 등 아주 오랫동안 이종이식 연구를 해왔다. 그래서 미 식품의약국(FDA)에 이종장기이식 임상시험을 신청했는데, FDA에서 개코원숭이 10마리를 더 시험한 결과를 가져오라고 했다. 돈이 없어서 못하고 있었는데 그때 베닛이 나타난 거다.” (개코원숭이가 비싼가.) “우리 돈으로 한 마리에 약 5억 원 정도 한다. 베닛이 직접 정보를 안 건 아닌 것 같고, 심장 질환으로 입원 중이었으니까 의사가 인공심장은 안 되고, 사람 심장은 받기 어려우니 돼지 심장 이식을 받아보겠냐고 권유한 것 같다.” ―돼지 췌도를 사람에게 이식하는 임상시험을 신청했는데, 임상이 성공하면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건가. “췌도 세포에서 인슐린을 거의 만들지 못하는 게 제1형 당뇨병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걸리기 때문에 소아나 청소년 환자가 많은데, 췌도 이식이 가장 좋은 치료법이지만 현실적으로 사람의 췌도 이식은 굉장히 어렵다.” (기증자가 적기 때문인가.) “췌도는 췌장 안에 있는데, 마치 섬처럼 띄엄띄엄 박혀 있다. 그래서 췌장을 떼어낸 뒤 다시 췌도만 골라내야 하는데 아무리 수술을 잘해도 손실이 발생한다. 또 뇌사자에게서 장기를 적출할 때 췌장을 가장 마지막에 떼어내기 때문에 장기에 손상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2∼4명 것을 모아야 한 사람에게 이식할 수 있다. 장기이식 자체가 대기자의 10% 정도만 기회가 오는데, 췌도는 2∼4명분을 모아야 하니 더 어려운 거다. 어른도 물론이지만 고통 받는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어떻게든 구해야 하는데….”※1형 당뇨병은 징병검사에서 5급(제2국민역)에 해당한다. 크론병, 모야모야병, 양성뇌종양, 검사로 확인된 뇌전증 등이 같은 등급이다. ―기증 장기가 워낙 부족하다 보니 불법인 줄 알면서도 장기 밀매를 하는 환자가 많다고 하던데…. “중국이나 파키스탄, 인도 이런 데서 수술 받고 오는 사람이 많은데… 심각하다. 국내에서 이식 수술을 받은 기록은 없는데, 이식 후 면역치료를 받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보면 된다. 더군다나 고령화로 기증을 해도 쓸 수 없는 것도 늘고 있다. 각막은 라식을 하면 쓸 수도 없고. 그래서 이종장기이식이 대안인데 갈 길이 너무 멀다. 사회적 관심도 많이 부족하고. 지금도 미국에서 돼지 심장 이식을 했으니까 관심을 받는 거지 만약 그런 게 없었으면 이종이식이 뭔지도 몰랐을 거다.” ―임상을 승인 받는 게 그렇게 힘든가. “사연이 좀 긴데… 2004년 보건복지부 지원으로 바이오이종장기개발사업단이 출범했지만 10여 년이 지나도록 법이 없어서 임상을 할 수 없었다. 복지부와 식약처는 서로 넘겼고.” (핑퐁게임을 한 건가.) “복지부는 돼지 췌도 세포 이식은 세포치료제의 일종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식약처에 신청하면 검토할 수 있을 거라 하고, 식약처는 이름은 세포지만 췌도가 장기로 구분되기 때문에 세포치료제에 속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하고….” ―임상을 하지 못하면 연구한 게 다 물거품이 되지 않나. “그래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데… 임상을 하려면 관련 법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연구를 시작할 때부터 그 준비를 했다. 그런데 법안 초안을 만들고, 정부 입법이 어려울 것 같아 국회의원들도 찾아갔는데 별로 관심이 없더라. 이게 언제 된다고 지금 만드느냐는… 그런 반응이었다.” (연구가 다 끝날 때가 돼서야 간신히 법이 만들어졌던데.) “2018년 5월 급하게 미국으로 갔다. 이듬해 5월이면 사업단을 해체해야 했는데, 그 오랜 시간을 고생해 연구하고 임상도 못하고 없어지면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게 되니까. 외국 전문가들에게 우리 임상계획서를 보여주고 가능한지 검토해 달라고 했다. 이후 국내 실사 등을 거쳐 검토 결과를 발표했는데 미 FDA에서도 승인 받을 수 있을 정도라는 기사가 나가자 식약처에서 연락이 왔다. 검토해 보겠다고.”※이종장기이식 임상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첨단재생의료 및 첨단바이오의약품 안전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은 2019년 8월에야 통과돼 2020년 9월 시행됐다. ―그런데 왜 아직도 승인이 안 난 건가. “처음 있는 일이다 보니 신중을 기하기 위해 추가 자료 요구가 많았다. 돼지는 인간에게 없는 바이러스(레트로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감염 우려를 확실하게 없애야 했다. 면역거부반응도 없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담당자가 바뀌기도 했고….” ―사업단 차원에서 임상을 하면 안 됐던 건가. 금지하는 법은 없었다던데…. “금지하는 법은 없었지만, 동물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하면 인수공통감염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동물에 있던 이상한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들어가 신종 바이러스 질환이 생겼는데, 이 사람이 세계 여행을 다니면서 퍼뜨리면 마치 코로나19처럼 될 수 있는 거다. 그래서 세계보건기구(WHO), 세계이종이식학회(IXA) 등 국제기관들이 합의한 게, 반드시 국가의 법체계 안에서 임상시험을 하도록 하고 있다.” ―기술의 발달을 보다 보면 문득 무서워질 때가 있는데… 영화 ‘아일랜드’처럼 인간복제 시대가 정말 올까. “기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시기가 올 거다. 요즘은 그 전 단계 기술이 개발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돼지가 사람의 췌장을 갖고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동물이 사람 장기를 갖고 태어난다고?) “집쥐의 어떤 유전자를 제거하면 췌장을 안 갖고 태어나게 할 수 있다. 여기에 착상 때 생쥐 줄기세포를 넣어주면 생쥐의 췌장을 가진 집쥐가 태어난다. 이런 식으로 돼지가 사람의 장기를 갖고 태어나게 만드는 거다. 자기 세포를 넣는 거니까 면역거부반응도 거의 없다는 장점이 있다.”※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 ‘아일랜드’는 부유층의 장기 대체용으로 복제된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다. ―임상 승인은 언제쯤…. “2월 중 승인이 날 걸로 예상했는데 추가 자료를 요구해서 조금 늦어질 것 같기는 하다. 이번에 요구한 자료가 거의 마지막 단계라 희망적으로 보고 있다.” (베닛이 얼마나 오래 사는지도 중요할 것 같은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아무래도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까. 흉악범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베닛의 수술로 인해 인류가 얻을 수 있는 자료가 엄청나게 많다. 그동안 얻은 자료는 원숭이까지였는데 이제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게 된 거니까. 그래서 이 수술이 굉장히 의미가 있고,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된 거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지난해 5월 본보를 통해 부모 빚을 대물림 받는 아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졌다. 빚 상속은 영·유아를 가리지 않았고, 성인이 돼 월급 통장이 압류된 후에야 빚의 존재를 알게 된 경우도 있었다. 상속과 관련된 법 개정이 시급하다는 여론이 들끓자 국회에서는 한 달여 만에 몇 건의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그뿐. 각 당이 대선 경선에 들어가면서 해를 넘긴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 지난해 1억 원이 넘는 빚을 대물림 받은 유철이(가명·당시 18세)의 개인파산을 신청한 대한법률구조공단 정경원 변호사(38)는 “엊그제도 8개월 된 갓난아기가 엄마 빚을 떠안은 건이 들어왔다”며 “대법원도 법을 고치라고 했는데 국회는 뭐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8개월 된 아기가 어떻게 빚을 떠안게 된 건가. “엄마가 지난해 12월에 사망해서….” (아빠는….) “작년 4월에 태어났는데, 서류상 아버지가 없는 걸 보면 미혼모인 것 같다. 그러니까 이 갓난아기가 상속인이 된 거지. 자녀가 있으면 나이에 상관없이 법상 그 아이가 모든 재산과 채무를 승계하는 1순위자다. 8개월여 만에 엄마를 잃고 상속인이 된 건데, 지자체에서 상황을 파악하다가 빚이 있어 보여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지금 파악 중이다.” (엄마는 나이가….) “스물일곱….” ―도와줄 방법이 있나. “물려받은 재산 안에서만 빚을 갚는 상속 한정승인을 신청할 생각이다. 재산과 빚을 모두 포기하는 상속포기도 있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모르는 재산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그것보다는 한정승인으로 해주는 게 낫다. 그래도 이렇게 알게 되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다. 어떻게든 도와줄 수 있으니까. 파악이 안 돼서 그렇지 성인이 돼 갚을 때까지 족쇄를 차고 살아야 할 아이들도 많을 거다.” ※미성년자가 빚을 대물림 받지 않으려면 상속포기, 한정승인, 특별한정승인을 신청해야 한다. 특별한정승인은 한정승인 신청 기간(3개월)이 지난 뒤 빚을 알게 됐을 때 이용할 수 있다. ―구제 제도는 있지만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던데. “미성년자는 직접 법률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법정대리인이 신청해야 한다. 친권자가 있으면 다행이지만 없는 경우도 있고, 있어도 오래전에 헤어져서 이제는 나 몰라라 하는 부모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누군가가 친권 정지 재판을 해서 이기지 못하면 법정대리인도 세울 수 없다. 친권 정지 재판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상속포기, 한정승인 신청기간이 3개월로 너무 짧은 것도 문제다. 남편이나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마음을 추스르기도 부족한 시간인데 그 안에 재산 정리를 다 해보고 신청하라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하는 거다.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지난한 법 절차까지 밟게 하는 건 한참 잘못된 것 아닌가.” ※상속 한정승인을 잘 활용한 사람 중 하나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다. 조 전 장관의 부친은 웅동학원을 설립하며 진 빚을 다 갚지 못하고 2013년 사망했는데 남긴 재산은 21원이었다. 법원은 조 전 장관의 모친 18억 원, 조 전 장관 형제는 각각 12억 원을 채권자인 캠코에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조 전 장관 일가는 물려받은 재산 안에서만 빚을 갚는 한정승인을 신청했기 때문에 갚지 않아도 됐다. 그는 2014년 6월 ‘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란 책을 출간했다. ―채권자들이 신생아에게까지 빚 독촉장을 보낸다던데, 갚지 못하는 걸 뻔히 알면서 왜 보내는 건가. “그게 내막이… 금융권에서 채권을 대량으로 사온 회사들이 무조건 기계적으로 뿌리기 때문이다.” (채권을 산 회사들?) “회수 가능성이 거의 없는 채권을 금융권에서 아주 싼값에 대량으로 사들이는 회사나 개인들이 있다. 채권의 5∼10%, 심지어 1∼2% 가격으로도 산다. 금융권에서는 회수 가능성이 거의 없으니까 얼마라도 손실을 보전하려고 그렇게 판다. 대량으로 사와서 일괄적으로 뿌리기 때문에 대상이 어른인지 청소년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안 한다.” ―그런 채권을 사면 이득이 있나. “전액은 아니지만 다만 얼마라도 갚겠다는 사람이 나온다. 1000만 원짜리 채권을 20만∼30만 원에 사왔는데 채무자가 100만 원이라도 갚으면 엄청나게 남는 장사 아닌가. 이런 일을 하는 회사와 개인들이 엄청 많다. 일괄 독촉장을 보낸 뒤 반응이 없으면 소송을 건다.” (돈을 받아내기 위해서?) “그런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일단 채권 시효를 늘리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상행위로 인한 채권은 소멸시효가 5년이다. 그런데 소송을 하면 확정된 날부터 10년이 더 늘어난다.” ―유철이는 불이익이 큰 개인파산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던데. “기초생활수급자인 유철이 어머니는 남편이 사망하고 5개월 후에 찾아왔다. 상속포기나 한정승인 신청기간은 지났기 때문에 처음에는 특별한정승인을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문제?) “아버지가 생전에 빚 소송을 당했는데 그때 어머니도 공동 피고였던 사실을 모른 거다. 그래서 특별한정승인도 신청할 수 없었다.” (남편이 다 처리했다면 살림만 하는 아내는 모를 수도 있지 않나.) “실제로 몰랐던 것 같기는 한데, 입증할 방법은 없으니….” ―담당 판사조차 개인파산 말고 다른 방법이 없냐고 물었다던데. “유철이 경우에는 설사 특별한정승인을 받더라도 채권자가 다시 소송을 걸 게 분명했다. 어머니가 과거에 공동 피고였는데 어떻게 특별한정승인이 나올 수 있냐며 효력을 없애 버릴 수가 있다. 문제는 채권자가 언제 소송을 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유철이가 개인파산을 신청하고 면책을 받는 데 1년 정도 걸렸다. 그러고 나면 5년간 신용정보원에 신용불량자로 등재된다. 신용거래가 아예 안 되는 거지. 작년에 유철이가 고3이었다. 만약 채권자가 몇 년 후에 소송을 걸고, 그 결과가 나온 후에 파산·면책을 받으면 빨라도 20대 중후반까지 신용불량자가 된다. 신용불량자는 휴대전화도 개통할 수 없다.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할 때 그런 일이 벌어지기보다는 차라리 대학생 때 겪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휴대전화도 개통을 못 하나. “파산·면책을 받으면 신용등급이 최하위로 떨어지고 신용카드, 대출 등 모든 신용 거래가 제한된다. 휴대전화는 보통 단말기를 할부로 사니까 못하는 거지. 물론 일시불로 다 주고 사면 개통할 수 있지만 파산 신청을 하는 사람이 그럴 돈이 어디 있나.” ―프랑스는 빚의 대물림이 발생하지 않는다던데. “프랑스는 미성년 상속인의 법정대리인은 한정승인만 가능하고, 상속 재산이 빚보다 많은 게 명백한 경우에만 법원의 허가를 얻어 단순승인을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니 대를 물려 빚이 이어질 수가 없다. 프랑스였다면 유철이는 상속 즉시 한정승인이 되기 때문에 파산 신청을 할 필요도 없고, 당연히 신용불량자가 될 일도 없었을 거다.” ―앞서 말했지만 3개월인 신청 기간은 너무 짧은 것 같다. “독일은 빚이 있는 걸 모르고 재산을 상속했다면 이를 취소할 수 있는 기간이 30년이나 된다. 또 미성년자가 빚을 물려받아도 성인이 된 시점에 가진 재산만큼만 갚도록 하고 있다.” (우리도 10년 정도로 늘려주면 안 되나.) “안 될 건 없다고 본다. 단지 채권자 입장에서는 빨리 결정이 나야 포기든, 법적 조치든 할 텐데 그게 10년 정도 어정쩡한 상태로 있으면 좀 곤란하기는 할 거다. 돈을 받아야 할 사람의 권리도 있으니까.” ―그럼 독일은 왜 30년이나 주는 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쪽에 더 방점을 둬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는 거지. 달리 선진국일까. 우리도 프랑스, 독일처럼 가야 하지 않나 싶다. 미성년자는 빚이 생기는 과정에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빚이 생기는데도, 구제 신청을 기간 내에 못 한 것도 본인 탓이 아니다. 책임의 원칙에도 반하는데 법적으로 빚을 갚아야 하는 건 너무너무 억울하지 않나. 흙수저 무(無)수저 이런 말을 하는데…, 이 아이들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족쇄를 차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어른들이 방치하면 어떻게 하나.”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지난해 12월 중순 청년정의당 강민진(27) 대표를 인터뷰했습니다. 청년정의당은 정의당 내 35세 미만의 당원들로 구성된 당 내 당이지요. 강 대표를 인터뷰 한 것은 그가 지금 주목받는 청년 청년정치인 중의 한 명인데다, 거대 양당 대선후보들의 비호감도가 역대 최고라면서도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반사이익조차 못 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독자여러분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각 대선 후보들은 자신들의 지지율이 왜 오르지 않는지, 왜 내려가는지 정말 모르는 걸까요. 저는 안다고 확신합니다. 남의 지지율이 내려가는 이유를 물으면 이래서 그렇다고 말을 하니까요. 유권자의 선택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배우거나, 양자 역학을 이해하거나, 빅뱅이론을 공부해야만 알 수 있는 난해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상식만 있으면 알 수 있는 문제죠. 강 대표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정의당이 양념 같은 역할을 하는데 만족한다면 지금처럼 이념성향이 강해도 무방하지만, 대선에서 다수 유권자의 표를 얻으려면 당의 이념성향이 좀 더 대중적이 돼야하지 않느냐고요. 강 대표 자신도 언급했지만 정의당이 중점을 두는 분야는 다소 범위가 제한된 면이 있습니다. 과문한 탓인지는 모릅니다만 노동, 여성, 인권, 환경 같은 분야는 목소리가 높은데, 상대적으로 경제, 외교, 국방 등의 분야에 대해서는 잘 듣기 어렵지요. 선입관일수도 있습니다만 노조나 노동자 보호에는 앞장서도, 어떻게 하면 기업이 자유롭게, 막말로 돈을 더 잘 벌 수 있게 도와 줄 수 있을까하는 고민은 적은 것 같습니다. 이 기업이라는 단어를 재벌로 바꾸면 아마 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것입니다. 5~10석 정도의 소수정당에 그친다면 소금 같은 역할로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국가를 운영하겠다면 달라져야하지 않겠습니까. 일반 국민에게 ‘정의당이 집권한다면 기업하기 더 좋은 나라가 될까요’라고 묻는다면 어떤 답이 더 많이 나올까요. 그렇다고 지금 정의당에서 기업 규제를 풀어주고, 경영자가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자는 주장이 대세가 될 수 있을까요?저는 여기에 정의당의 딜레마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당은 당원 충성도가 매우 강한 집단입니다. 더군다나 노동·민주화·시민사회운동이 출신 배경인 사람들이 다수인 곳이죠. 그런 특성 때문인지 선거 공약에도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것도 많습니다. 2020년 총선 공약으로 발표한 최고임금제가 그런 경우죠. 공공기관의 최고임금은 최저임금의 7배, 민간기업은 30배로 제한한다는 내용입니다. 국회의원은 5배입니다. 물론 이런 고민이 왜 나왔는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정의당은 이 공약을 발표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능력과 성과에 따른 임금의 차이를 인정하는 제도이고, 정의당은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월 250만 원을 못 벌고 있는데, 민간기업, 공공기관, 금융기관의 최고경영자들이 수십 배에서 수백 배에 이르는 임금을 받는 것은 건전한 시장경제하의 정당한 임금격차로 볼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공약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공약을 지지하고, 이 공약에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볼 수 있을까하는 점입니다. 부도덕한 경영진의 월급을 깎으면 화는 풀리겠지만 그렇다고 내 월급이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민간기업의 월급을 국가가 어떤 이유로 제한 할 수 있다면, 같은 논리로 다른 모든 분야도 이유만 있으면 제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도한 임금을 받는 부도적한 경영진을 근절한다는 시각에서 보면 그럴듯하지만, 이런 시각이면 빌게이츠나 스티브 잡스는 나올 수 없겠지요.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최저임금의 30배 밖에 못 받는다면 잡스가 회사를 차리겠습니까. 그런 규제를 안 받는 ‘잡(job)’을 찾거나 규제가 없는 나라에 가서 하겠지요. 강 대표는 인터뷰에서 지금 정의당에 필요한 것은 의외성이라고 했습니다. 정의당하면 늘 떠오르는 것 말고 국민이 보기에 신선한, 그 무엇을 얘기해야한다는 것이죠.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힘에도 마찬가지로 통용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굳어온 습관이, 소위 말하는 정체성이란 것이, 그 습관에 굳어진 당원들이, ‘의외성’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것과 다른 말과 행동을 하면 “정체성이 흐려진다” “그런 말하려면 국민의힘으로 가라” “집토끼가 도망간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또 한 편으로 외연을 넓혀야한다, 중도를 잡아야한다고 합니다. ‘웃프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하지 않을까요? 아무런 마찰과 아픔 없이 정체성도 지키면서 외연도 넓힐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왜 고민이겠습니까. 다수 유권자의 표를 받고 싶다면 자신들의 생각이 다수 유권자의 보편적인 생각을 따라가야지요.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고 싶다면 그 정체성을 지지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이면 됩니다. 정체성은 유지한 채 표는 얻고 싶으니 이상한 공약을 남발하게 되고, 결국 당선 후에 지키지 못합니다. 이런 일이 너무 만연하다보니 이제는 아예 취임 초에 지킬 수 없는 것은 지킬 수 없다고 확실하게 말하는 것이 좋은 정치의 모습처럼 됐습니다. 좋은 정치는 애초에 이상한 공약을 남발하지 않는 것이죠. 질러놓고 못하겠다고 선언하는 게 아니고요. 대통령 당선자에게 우리가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는 특정 정당의 후보가 아니라 전 국민의 대통령이 돼달라는 것이지요.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선거는 비록 특정 정당을 기반으로 해 치렀지만 이제부터는 생각과 행동을 전체 국민과 국가 입장에서 해달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특정 정당의 후보로 당선됐다고 그 정당의 가치관과 지향점을 전 국민에게 강요하는 것은 전체 국민과 국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거는 특정 정당을 기반으로 치렀지만 당선 후에는 그 좁은 그릇을 털고 나와야지요. 그런데 각 정당 대선 후보 중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정의당은 늘 거대 양당 프레임 때문에 지지율이 안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런 면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되겠다고 합니다. 엄청난 자기모순이지요. 마크롱이 4~5% 지지층 입맛에 맞는 얘기만 했다면 마크롱이 됐겠습니까? 4~5%만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왜 지지율이 안 오를까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좀 안타깝기도 합니다. 비호감도가 역대 최대라는 거대 양당 후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상한 말과 행동을 계속하니까 비호감도가 높아지는 것이지요.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지 않으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을, 그것은 하지 않고 엉뚱하게 토론을 하자고 하고, 신발을 벗고 절을 합니다. 이제부터는 정신을 차리고 모든 것을 바꾸겠다는데 왜 모든 것을 바꿀까요? 자신들만 바뀌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바뀔 텐데요.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1993년 8월 20일, 처음 치러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은 “암기 위주인 학력고사의 한계를 극복하고, 비정상적인 교육 풍토를 쇄신하려는 의지가 담겼다”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몇 년 안돼 사교육비 증가의 주범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문제 오류와 난이도 조절 실패로 해마다 논란에 휩싸였다. 수능 창시자로 불리는 박도순 초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79·고려대 명예교수)은 “대학이 수능 점수로 줄을 세워 뽑으면서 모든 것이 변질됐다”고 말했다.》 ―수능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게 잘못됐다는 건가. “원래 목적은 이 학생이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만 평가하고, 학생 선발은 대학이 스스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학별고사(본고사)도 치를 수 있게 했다. 그런데 대부분 대학이 본고사 대신 수능으로 뽑으면서, 수능 점수는 수험생을 줄 세우는 도구가 됐다. 그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1994학년도 입시에서 대학은 △내신 △내신+수능 △내신+본고사 △내신+수능+본고사 중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별 본고사를 치른 대학은 9곳뿐이다. 나머지 129곳은 내신+수능으로 선발했다. ―비극의 시작? “늘 문제가 되는 난이도라는 건 처음 만들 때는 고려하지도 않았다.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해한 학생이면 누구나 풀 수 있는 문제를 낸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변별력이 없지 않나.) “학생을 줄 세우기 위해 만든 시험이 아니니까. 수능은 고교과정을 충실히 이수했는지를 보는 거고, 충실히 배웠으면 좋은 점수를 받는 게 당연하다.” ―대학은 늘 학생 선발에 정부가 관여하지 말라고 하는데. “말은 그렇게 하는데 실제로는 아니다. 돈도 많이 드는 데다 보안 등의 문제가 생기면 감당이 안 되니까. 제대로 시험을 치를 능력이 안 되는 곳도 많다. 또 능력이 되는 대학도 수능으로 뽑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있다.” (좋은 곳은 왜?) “전국에서 몇 등이나 되는 학생을 뽑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수능뿐이니까.” ―올해도 평가원장이 사퇴했는데, 왜 출제 오류가 끊이지 않는 건가. “해당 과목 교수·교사들이 출제와 검토를 맡지만 어떤 과목을 많이 안다고 좋은 문제를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문항 출제는 그 자체로 별도의 공부와 경험이 필요한데 우리는 그런 전문 인력이 없다. 미국에서 대학입학자격시험(SAT)이 생긴 이유도 그런 고민 때문이었다.” (하버드, 예일대 교수들이 좋은 문제를 못 낸다고?) “미국 대학들은 해당 분야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로 학생을 선발하지 않는다. 학문을 배울 능력이 있는가를 본다. 그래서 SAT를 대학입학자격시험이라고 부르는 거다. 최고의 석학들은 수두룩하지만 그들은 이런 문제를 내본 경험이 없다. 그래서 몇 개 대학이 공동으로 SAT를 만들었는데, 해보니까 유익해서 ETS를 만들어 주관하게 한 거다.”※SAT는 1926년 처음 시행됐다. ―SAT라고 오류가 없을 수는 없지 않나. “SAT는 우리 수능처럼 단기간에 출제하고 시험 보지 않는다. 문제은행식이라 평상시에 문제를 만드는데, 전문 연구원들이 10가지가 넘는 검토 과정을 거친 뒤 문제로 확정한다. 그래서 오류도 적지만 만에 하나 오류가 있어도 큰 의미가 없는 게 참고자료로만 쓰지, 그걸로 당락을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상시에 출제하면 문제 유출 등 보안 문제는 없나.) “그 사람들은 걱정 안 한다. 물론 출제자가 비밀엄수 각서는 쓴다. 하지만 별 의미가 없는 게 자신이 출제한 문제가 5년 후에 쓰일지, 10년 후에 쓰일지 모른다. 보통 5년 정도 후에 출제되기 때문에 지금 빼내 봐야 소용이 없고 문항 추출을 컴퓨터가 무작위로 하기 때문에 빼낸 문제가 나올지 알 수도 없다.” ―늘 물수능, 불수능 논란이 이는데 난이도 맞추기가 그렇게 어렵나. “난이도가 높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어렵다는 뜻 아닌가?) “다들 그렇게 아는데 학문적으로는 반대로 문제가 쉽다는 뜻이다. 난이도를 말할 때 기준은 정답률이다. 정답자가 많으면 정답률이 높으니 난이도는 쉬운 거고, 적으면 어려운 거고. 수능처럼 수 십만 명이 시험을 보면 점수가 거의 정상 분포에 가깝게 나온다. 전체 수험생 점수가 정상 분포를 보였다면 난이도 논란은 무의미하다. 그런데 왜 늘 불수능, 물수능 논란이 벌어지냐 하면 상위권 학생들에게 쉬웠느냐, 어려웠느냐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평가원은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늘 난이도 조절 실패를 자인하나. “그게 참 어렵다. 화가 나 있는 수험생과 학부모들에게 ‘당신들이 잘못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평가원장(1998∼2000년) 할 때 이런 항의도 있었다. 문제를 주고 ‘다음 중 X의 값은?’이라고 물었는데 그게 어디에 나온 질문이라는 거다.” (X값이 뭐냐는 건 그냥 물음일 뿐인데.) “그렇지. 그런데도 항의를 한다. 평가원장을 할 때는 화형식을 당한 적도 있다. 당시 평가원이 서울 삼청동에 있었는데 그 앞에서 수능 반대 단체가 내 화형식을 했다.” ―그래도 만든 당신이 수능이 없어져야 한다고 하는 건 좀…. “처음 설계했던 수능이 아니니까. 단순 암기력만 측정하는 학력고사를 탈피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수없이 변질되더니 결국 똑같아졌다. 이런 수능은 없애야 한다. 다시 학력고사로 돌아가든지.” (처음에는 언어, 수리 두 분야만 보겠다고 발표했던데.) “대학 수업을 듣고 이해하는 능력과 논리적으로 사고하는지만 평가하려 했으니까. 그래서 제도 설계 때는 대학교육적성검사라고 불렀다. 당연히 언어는 국어시험이 아니고, 수리도 수학시험이 아닌 일종의 지능검사와 비슷했다. 그렇게 새 대입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는데 바로 과학계에서 밀고 들어왔다. 과학 한국을 만들자면서 어떻게 과학을 뺄 수 있냐고. 그래서 정원식 문교부 장관에게 ‘노태우 대통령에게 꺾이지 말고 처음 계획대로 해야 한다고 말해 달라’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고 갔다.” ―결과는 우리가 아는 바대로 인가. “대통령도 못 막더라. 정 장관이 다녀오더니 ‘과학은 좀 넣어주자’고 했다. 과학이 들어가니까 이번에는 사회 쪽에서 밀고 들어왔다. ‘사회를 빼고 탐구를 논할 수 있느냐’ 이러면서.” (탐구?) “처음 수능제도 계획을 발표할 때 ‘언어, 수리’만 한다고 했기 때문에 대분류를 늘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수리’ 옆에 점을 찍고 ‘탐구’를 붙인 뒤 탐구 안에 과학 영역을 넣는 고육책을 썼다. ‘언어, 수리·탐구’ 이렇게. 그 탐구 안에 과학과 사회 문제를 낸 거다.” (영어가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났을 것 같은데 의외다.) “영어는 영어 쪽이 아니라 대학들이 요구했다. 원서를 많이 보는데 독해능력은 측정해줘야 한다고. 한 번 무너지니까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독해 평가를 넣었는데 조금 지나니까 의사소통이 중요하다며 듣기 평가를 요구했다. 그렇게 모든게 다 바뀌어 갔다.” ―수능으로 사교육도 잡겠다고 했다. “사교육 감소는 처음부터 정책 목표로 두지 않았다. 수능을 도입한 목적은 암기 위주 교육 탈피였다. 그런데 정치가 개입하더니 교육부에서 있지도 않던 사교육 감소 효과도 있다고 발표했다. 나는 그런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했다.” (거짓말?) “사교육은 경쟁이 사라지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는다. 제도가 바뀐다고 경쟁이 없어지는 게 아니지 않나.” ―수능은 최소한 공정하다는 믿음이라도 있지 않나. 숙명여고 쌍둥이 자매 사건, 조국 사태, 정유라의 이대 입학 등 입시 부정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온 국민이 분노했다. “그건 강한 처벌로 응징해야지. 부정행위가 발생할 때마다 제도를 바꾸면 남아날 제도가 어디 있겠나. 그런데 참 어이없는 게, 힘 있는 사람들을 막을 방법은 애초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수능은 아니고 과거에 석사장교 선발심사위원장을 했을 때인데 커트라인 밑에 있던 지원자가 합격하는 일도 있었으니까.” (누가 점수를 올려준 건가?) “그건 범죄니까 못하고 그 지원자가 속한 분야 정원이 기존보다 두 배로 늘었다. 다른 분야는 줄이고.” ※석사 학위자를 선발해 장교로 6개월 임관시키고 전역시키는 제도. 1982년에 생겨 1991년 없어졌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정치가 다양해지길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우리 정치에서 거대 양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의 존재감은 작은 편이다. 대부분 선거 때마다 명멸을 거듭하고, 그 중 오래됐다는 정의당도 대선후보 지지율이 5% 정도에 그치고 있다. 강민진(26) 청년정의당 대표는 “거대 양당 체제가 워낙 공고한데다, 국민들이 심상정 후보를 궁금해 하지 않다보니 지지율이 정체된 것 같다”고 말했다. 청년정의당은 정의당 내 35세 미만의 당원들로 구성된 당 내 당이다.―국민들이 왜 심 후보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솔직히 말해 국민들이 심 후보에 대한 거의 고정된 이미지를 갖고 있다. 늘 해왔던 얘기를 똑같이 반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런 얘기해도 되나?) “청년정의당을 만든 이유가 그런 말을 자유롭게 하라는 건데…. 그래서 지금 심 후보와 정의당에는 의외성이 필요하다. 물론 지금의 정체성을 모두 버리고 완전히 다른 길로 가자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기에 ‘어? 지금까지와는 다른 말을 하네?’ ‘어? 좀 신선하네?’ 이런 게 없으면 존재감을 키우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외성을 말하는 건가?) “지금까지 진보 정당이 주로 이야기해온 영역은 좀 한정된 면이 있다. 노동, 복지, 인권, 여성 등…. 반면에 성장이나 국제사회에서의 우리의 역할, 과학기술 이런 부분은 덜 이야기해온 게 사실이다. ‘정의당이 그런 얘기도?’ 이렇게 평가받는 부분이 있어야 할 것 같다.”―그건 완주를 전제로 한 말 아닌가.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함께 ‘위성정당방지법’을 만들자며 단일화 구애를 하고 있고, 진보진영 안에서도 단일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다. “급하니까 후보 단일화를 위해 자꾸 찌르는데…한마디로 (거대 정당의) ‘갑질’이고, 단일화 압박 수단이라고 본다. 안 그러면 총선이 2024년인데 왜 지금 갑자기 얘기를 꺼내겠나. 만약 위성정당 창당이 진심으로 잘못한 일이라 생각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한다. 그때 당선된 의원들을 그대로 두고 입으로만 잘못됐다고 하면 뭐하나. 그리고 나는 정의당이 더 이상 민주당과의 단일화 프레임에 말려들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단일화 프레임?) “여전히 선거를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로 보는 세대가 많다. 그런 세대 입장에서 보면 정의당이 무슨 말을 하던 간에 일단 국민의힘이 집권하는 걸 막기 위해서는 민주당을 찍어야하는 거다. 세상은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이니까. 하지만 그런 프레임은 이미 시효가 다했다. 문재인 정권을 거치면서 조국 사태, 안희정 박원순 오거돈 성폭력 사건 등 무수한 사안을 봤지만 민주당이 국민의힘보다 나은 게 뭐가 있나. 이제는 민주 대 반민주라는 프레임이 정당의 우열을 가르는 제대로 된 도구가 아닌 거다. 그 생각을 버릴 수 없는 세대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정의당은 2019년 말 민주당과 함께 ‘준연동형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제도로 20석 가까이 확보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비례대표 선출용 위성정당을 만듦으로써 비례대표 5석에 그쳤다.―정의당이 최근 ‘김어준의 뉴스공장’ 출연 보이콧을 선언했던데.“김 씨는 자기 유투브 채널에 이재명 후보 지지를 표명한 사회심리학자를 불러 심 후보가 단일화를 하지 않는 이유가 심리에 문제가 있어서라는 식으로 인신공격을 했다. 선동을 해도 어떻게 그렇게 질 나쁘게 선동하는지….” ※김어준은 지난달 19일 자신의 유투브(다스뵈이다)에 ‘2020·2022 이재명론’ 공동 저자인 김태형 사회심리학자를 초대해 이재명 후보와 단일화 하지 않는 심 후보의 심리를 분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태형 씨는 심 후보가 ‘2남2녀 막내딸이라 인정 욕구가 강해서’ ‘성공욕, 명예욕,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인물’이라고 말했다. 김어준은 “진보 유권자 입장에서 누구에게 표를 줘야하나”고 물었고, 김태형 씨는 “적폐의 부활을 막으려는 쪽으로”라고 답했다. ―그런데 진짜 단일화를 원한다면 심 후보와 정의당 지지층을 회유해도 모자란 판에 왜 화가 나게 했을까?“실력 행사… 우리를 구슬려서 단일화 하려는 게 아니라 민주당 지지층의 조직적 압박을 통해 굴복시키려는…. 민주당 지지자가 우리보다 월등히 많으니까 그런 공세가 가능하다고 본 것 같다.”―일부 정치인들이 여성을 위한 정책을 폐지해서 ‘이대남’ 표심을 잡으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던데.“일부 정치인들이 여성 할당제 폐지, 여성가족부 폐지, 군 가산점 부활 이런 걸 주장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좀 ‘남초’커뮤니티의 목소리가 실제보다 과잉 대표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정치권에서 보니 실제로 평범한 청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데가 많지 않더라. 평범한 청년들이 목소리를 낼 공간도 마땅치 않고. 과거처럼 청년들이 학생회, 운동권, 노조 이런데 묶이는 시대도 아니다보니 청년들이 다 개별화, 파편화돼있다. 그런 중에 거의 유일하게 조직력을 보이고 있는 집단이 남초 커뮤니티다. 모든 20대 남자들이 다 그들처럼 여자도 군대 보내야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않겠나.” ―정의당도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 초기에는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이라고 지칭했던데. “그 단어가… 사실 운동권이나 시민사회단체에서는 많이 쓰던 말이다.” (원래 쓰던 말이라고?) “시민사회, 운동권 내에도 성폭력 사건들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공동체적 해결이 필요할 때 피해자, 가해자, 또 공동체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한 담론들이 만들어져 온 역사가 있다. 거기서 일단 피해 사실을 누군가가 이야기를 했는데, 아직은 확정적인 조사까지는 안 갔을 때는 ‘피해호소인’ ‘가해지목인’ 이렇게 불러왔다. 민주당이 그때 처음 만든 게 아니라 그들도 운동권에 있었기 때문에 그 단어를 아는 거다.”※지난해 7월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빈소에서 당시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피해호소인에 대한 신상 털기나 2차 가해는 절대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심 후보는 올 9월 정의당 대선후보 경선 토론회에서 “피해호소인은 피해자 변호인이 등장하기 전까지 당 내에서 그렇게 정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강 대표는 처음부터 ‘피해자’로 불렀다. ―의외로 진보계열에서 성문제에 이상한 논리를 들이미는 경우가 있다. 당신은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 줍고 있느냐’는 말이 가능했던 시대도 있었다고 비판했던데.“그게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했다고 알려진 말인데, 본인은 안했다고 하지만…. 그런데 그 말이 진보 진영에서 좀 광범위하게 쓰인 건 사실이다.” (무슨 뜻인가?) “큰 문제가 앞에 닥쳤는데 진보진영 안에서 일어난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건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를 줍는 행위 같은 거란 의미다. 성폭력 문제 같은 건 사소한 문제로 취급하는 게 과거 86세대들이 가졌던 관점이다.” ※이 발언은 2003년 당시 유시민 개혁국민정당 집행위원이 당 내 성폭력 사건 해결을 요구하는 당원들에게 한 말로 알려졌다. 당 내 여성위원회가 2003년 4월 보궐선거를 앞두고 지도부의 미진한 조치를 문제 삼은 데 대한 것이다. 유시민은 이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06년 보건복지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그는 “여러 일정을 제쳐두고 당내의 작은 일로 시간이 소모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해변에서 조개껍질 들고 놀고 있는 아이와 같다’고 한 것이 왜곡됐다”고 해명했다. ―최근 벌어진 각 당의 영입인사 낙마는 정당이 사람을 키우지 않고, 선거 때만 갑자기 스펙이 화려한 사람을 갖다 쓰는 행태가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지적이 많다.“그게 진짜 문제다. 조동연 전 민주당 상임선대위원장의 사생활을 문제 삼는 건 반대한다. 하지만 원래 정치를 하던 분도 아닌 사람을 송영길 민주당 대표와 함께 공동 상임선대위원장을 시켰는데… 솔직히 뭔가 스펙도 그럴듯해 보이고, 데리고 오면 이재명 후보 이미지에 훨씬 더 좋을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영입한 거 아닌가. 오직 선거를 위해 갑자기 ‘픽업’한…. 그건 이 사람을 정치적 동료로 맞이하는 게 아니고 선거를 위한 장식품으로 쓰는 행태다. 그러다보니 그런 참사가 벌어지는 거지. 지금 민주당과 국민의힘에서 청년 인재영입을 많이 하고 있는데 다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당 안에서 성장하려는 청년 정치인들한테 굉장한 박탈감을 준다.”―박탈감?“어차피 외부 인사를 고르는 권력은 어느 당이든 당 내 기득권, 기성세대에게 있다. 그들이 선거 때만 되면 청년 인재영입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기준과 입맛에 맞는 청년들을, 반짝반짝해 보이는 청년들을 데려온다. 당 안의 청년정치인들은 소외되는 거지. 그런데 또 선거가 없는 평상시에는 당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이 크는 걸 직간접적으로 막는 현상이 벌어진다.” (평상시에는 청년들이 크는 걸 막는다는 게 무슨 말인가.) “어느 당이든 자리가 한정돼있으니까. 새로 진입하는 청년들이 당 안에서 성장해서 자기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길 바라지 않는 거다. 그래서 청년정치인들이 성장하는 걸 억제하거나, 벽에 부딪히게 하는 현상들이 발생하는데… 그러다가 또 선거가 닥치면 청년 표를 얻어야한다고 외부에서 갑자기 데려오는 일이 반복된다.”―정의당은 다른가.“없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당 안에도 그런 세대 갈등이 있다. 지난해 총선에서 비례대표 1, 2번을 청년에게 할당해 류호정, 장혜영 의원이 당선됐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해 찬반양론이 굉장히 격돌했다. 청년할당제가 잘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당시에 그랬다는 건가.) “아니, 지금까지도 여전히…. 청년들에게 자리와 기회를 주는 조치를 했을 때 이게 반대로 기존에 당에서 오래 활동해온 사람들에게는 자원분배의 문제가 되니까.” (일종의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것 같은 건가?) “그런 셈이다. 2018년 지방선거 비례대표 경선 때 청년후보들에게는 60%의 가산점을 줬다. 자신이 받은 표의 60%를 가산해 주는데 사실 청년들은 기본적으로 받는 표가 적기 때문에 가산점을 줘도 대부분 떨어진다. 가산점 비율을 더 올리지는 못하고 같은 규정을 내년 지방선거 비례 경선에 적용하자는 안을 전국위원회에 올렸는데 간신히 통과됐다.”※가산점 60%란 100표를 받으면 160표로 환산해주는 것이다. 청년들은 인지도가 부족으로 애초에 받는 표가 적기 때문에 가산점을 받아도 당선되는 경우가 드물다.―간신히? 전과 같은 안인데?“그만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청년들에게 그렇게 과도한 가산점을 주는 게 과연 맞느냐는 거다.” (60%도 실효성이 적다면 가산점을 더 올린 안을 올렸어야하는 거 아닌가.) “우리 청년정의당 안에서는 더 센 안을 논의하기는 했는데 어쨌든 그 안을 올렸다. 정의당 안에서도 청년할당제가 아니면 사실상 청년들이 스스로 크기는 쉽지 않다는 얘기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에게 정치를 저질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나라의 장관을 하고, 집권여당 당 대표도 하고, 대선후보 경선에도 나온 분이 다른 정당 대선후보 부인의 확인도 안 된 과거나 공격을 하고 있다는 게, 우리 정치가 얼마나 후진적인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그렇게까지 정치를 저질로 만들어야하는지. 추 전 장관은 윤 후보 부인에 대해 언급하면서 ‘대선 후보는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주변 친인척, 친구관계 모두 다 깨끗해야한다’고도 했다. 타 후보 부인에게 ‘깨끗하지 못하다’는 걸 암시하는 발언이 더 지저분한 것 같다.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자리가 공직자도 아니고 국모는 더더욱 아니지 않나. 정치인이나 공직자 가족에 대한 검증은 범위를 한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가족이 어떤 비리나 부정부패에 관련돼있을 경우 등으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부부처럼….” (그 분은 참 안 걸리는 데가 없다.) “하하하. 조 전 장관 부인은 자녀의 입시와 관련해 역할을 한 게 문제가 됐으니까 그런 부분은 당연히 검증해야한다. 후보 본인에 대해서도 검증할 게 많은데 민주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왜 후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배우자의 과거를, 그것도 여성의 성적인 부분을 이용해 공격하는 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저질 공격은 하면할수록 하는 쪽은 손해, 받는 쪽이 이득이라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대선이 희망을 보는 장이 아니라, 거대 양당의 복수혈전에 그친다면 나라에 미래가 있을까. 후보들은 저마다 자신이 대통령이 돼야한다지만 누가 되든 대선 후가 더 걱정이라는 사람들도 상당수다. 금태섭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승패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어떻게 하면 선거 이후에 우리 사회가 한 걸음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지 고민하고 행동해야한다”고 말했다.―2년 전 한창 당에 쓴 소리 할 때 “공천은 걱정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걱정 안 한다”고 했다.“하하하, 그때는 진짜 걱정하지 않았다. 경쟁자도 없고, 지역구 관리도 자신이 있었으니까. 내가 떨어지면 큰일 난다고 걱정해주는 사람도 당에 많았다. 예뻐서라기보다는 내가 공천에 탈락하면 중도층이 이반해 당 전체가 타격을 입을 거라는 분위기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걱정 안 했는데, 내 생각과는 달리 당은 중도층 포용이 아니라 지지층만 보고 가는 전략을 썼다. 그런 전략으로 갈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2019년 9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가 끝난 직후 당시 민주당 소속이던 그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조 전 장관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이로 인해 지지층으로부터 3000여 통이 넘는 문자폭탄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그 전략으로 민주당이 이겼는데.“그게 결국 독이 됐다. 이후로는 당 내에서 건전한 비판의 목소리가 쑥 들어갔으니까. 그 뒤에 민주당이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보지 않았나.” (당에서는 당신이 지역구 관리를 안 해서 진거라 하던데.) “하하하, 결과적으로 졌으니까 지금 와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해봐야 다 핑계처럼 보이겠지만…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사람이 나를 이겼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는 그때 아직 이사도 못 온 상태였다.”※2020년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163석, 비례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이 17석, 유사 위성정당인 열린민주당 3석으로 범여권이 183석을 얻었다. 당시 미래통합당은 84석, 비례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 19석으로 103석을 얻었다. 경선에서 금 전 의원을 이긴 강선우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실제 경선 운동을 7일 밖에 못했다고 밝혔다.―입을 좀 다물었다면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 텐데 후회하지는 않나.“그럴 리가. 우리 사회에 이런 습성이 있는데… 학생 때 집회나 시위를 하려고 하면 주변에서 ‘지금은 공부를 하고 나중에 해라’라고 한다. 회사 초년병 때 부조리를 보고 말하려고 하면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니 좀 더 익히고 힘을 가진 뒤에 해라’라고 한다. 그렇게 어… 하다가 은퇴하는 순간이 온다. 조국 사태나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 주변에서 재선도 해야 하니까 이제 그만하는 게 어떠냐고 조언을 많이 했다. 그런데 국회의원조차도 ‘아직은 초선이니까…’이런 생각으로 입을 닫으면 누가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나. 3선, 4선이 된 후에? 국민의 대표라면, 국민이 느끼는 것을 그대로 대변해야지 이거 재고, 저거 재고, 자기 재선 고려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윗사람이 밥까지 사주면서 부탁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더라.”―윗사람? “공수처법 투표 전날 이해찬 대표가 나와 조응천 의원을 불러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이 대표는 ‘공수처법에 찬성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공수처의 문제점을 말하면 ‘그런 면이 있었네’하는 정도였다.” (그걸 꼭 말을 해야 아나?) “당 대표가 소속 의원에게 명시적으로 찬성하라고 한다는 건, 책임을 함께 나눠지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 대표가 끝까지 그런 말을 안 하는데 밥 얻어먹고 내가 찬성으로 돌아서면 알아서 기는 것이 된다. 나는 그런 정치를 할 생각이 없고, 그건 내가 알던 민주당 모습도 아니다. 알아서 기기 시작하면 그게 무슨 민주정당인가.” (대놓고 부탁했다면 찬성했을 건가.) “하하하, 그때는 총선 공천 전이라… 아마 ‘대단히 미안합니다’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당신이 반대해도 통과에 지장은 없었는데 이후에 징계까지 주면서 왜 그렇게 야박하게 몰아댔을까.) “그게 더 정치적으로 얻을 게 많으니까.”―당신을 몰아붙이면 당이 더 정치적으로 이득을 본다고? “강성 지지층이 그걸 좋아하니까. 국회의원들이 실력이 없는 것 같아도 정치적인 감각은 다 있다. 민주당이 변한 걸 내가 처음 느낀 게… 김경수 경남지사가 1심에서 예상 밖으로 유죄 판결 받고 법정 구속됐을 때였다. 핵심인사에게 판결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있는데 판사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그랬더니 오히려 지금은 공격을 해야 된다는 거다. 지지층 마음을 달래줘야 된다고…. 너무 기가 막혀서 전화통을 붙잡고 한 시간을 싸웠다.”―조국 전 법무부 장관, 윤미향 의원,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오거돈 부산시장 문제가 발생했을 때 민주당이 보인 모습은 상식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뭐가 민주당을 그렇게 변하게 만든 건가. “성공했으니까. 예전에는 그렇게 이상한 행동을 하면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행정부도 차지하고, 국회도 개헌 선에 가까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지지율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그러니까 승리에 취해서 계속 이상해지고 있는 거다. 파병된 청해 부대원들이 코로나19에 집단 감염됐는데,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문재인 대통령이 보고를 받으시자마자 참모회의에서 바로 누구도 정말 생각하지 못했던 공중급유 수송기를 급파하라고 지시했다’고 자랑하는 거는 정상이 아니다. 대장동 사건 같은 경우는 정말 사과해야 되는 거다. 본인이 설계했다고 해 놓고, 설사 뇌물을 받은 사람 중에 국민의힘 쪽이 많다고 해도 그게 어떻게 자신을 면책시키는 논리가 되나.” (민주당은 국민의힘 게이트라고 주장한다.) “그런 진짜 이상한 말을 당 대표, 원내대표라는 사람들이 받아서 우기니…. 어찌어찌 해서 민주당이 대선에서 또 이기면 진짜 괴물이 될 거다.”―국민의힘이 집권하면 달라질까. “하… 그게… 그래서 선거 후가 더 걱정이 되기는 한다. 정권교체는 필요한데 국민의힘도 전국 단위선거에서 4연패를 하고 비상대책위원회가 4번이나 들어섰는데도 별로 변한 건 없지 않나. 지도부가 추석 전에 곽상도 전 의원 아들이 화천대유에서 50억 원 받은 걸 알았다 면서도 아무 말 안한 걸 보면…. 당연히 밝히는 게 상식 아닌가? 그래서 리더들의 자각이 정말 중요한데… 그런 걸 밝히는 게 정치적으로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당신은 정권 교체가 필요하다고 보는 쪽 같은데.“김대중 대통령은 DJP연합으로 간신히 대통령이 됐지만,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들에게도 대통령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경상도 출신인 김중권 비서실장을 기용하고,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전두환 전 대통령을 청와대로 불러 밥도 먹었다. 그런 게 한 나라의 대통령다운 모습이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 때부터 점점 그런 모습이 사라지더니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을 거쳐 지금은 완전히 없어졌다. 문 대통령도 취임사에서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들도 섬기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정말 철저하게 편 가르기를 했다. 한 명이라도 우리 편이 많아서 이기면, 다른 쪽은 신경도 안 쓴다. 청와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과 견해가 다르다고 국민을 친일파, 토착왜구로 모는데… 그런 말을 어떻게 국민에게 쓰나. 하면 안 되는 행동을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해서. 오직 그것만 생각한다.” (그런 탓인지 우리 사회가 굉장히 안 좋아졌다.) “출세하기 위해 안달하는 정치인들이 롤 모델이 되고 있으니…. 당 내에서 눈치를 보다가, 뉴스공장에서 김어준이 뭐라고 하는 지 듣고, 댓글 보고 따라가는 식이다. 정치인들이 국민의 모범이 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도록 이끌어야하는데 되레 강성 추종자들을 따라만 가고 있다. 이런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억지로라도 새 피를 수혈해야하는데, 오히려 조국 수호 집회 다녀온 사람, 무슨 시민단체 이런 쪽에서만 끌어당기니… 그래서 바뀌기는 해야 할 것 같다.”―당신의 생각이 올바른 건 맞는데… 미안하지만 사람들은 비난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흑석’ 김의겸, 김남국 의원 같은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래서 책임감이 생겼다.” (책임감?) “조국 집회 몇 번 나가서 옹호발언한 사람들이 국회의원 되는 걸 보고 젊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할까. ‘저렇게 해야 성공하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내가 쓰러지면 그들의 잘못된 성공방식이 맞다는 걸 되레 증명해주는 꼴이 될 수 있다. 그럴 수는 없으니까. 옳은 것이 이긴다는 걸 꼭 보여주고 싶다.” (그렇게 믿고 싶지만…정말 될까?) “나는 이긴다고 믿는다. 역사를 보면 항상 옳고 합리적이고 열린 쪽이 이겨왔다. 편협하고 편 가르기 하는 쪽은 잠시 기세를 올리더라도 결국 패배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김남국 의원은 2019년 10월 5일 8차 조국 수호 집회 연단에서 “검찰이 조국을 장관에 임명하지 말라고 대통령에게 협박했다”고 말했다. 수차례 강성발언으로 인지도를 높인 그는 이듬해 민주당 공천을 받고 국회의원이 됐다.―민주당은 못 들어가고, 국민의힘은 안 들어간다 했고, 제3지대는 안 모이는데 무슨 힘으로 당신이 생각하는 정치를 구현할 수 있나.“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는데, 마크롱 같은 경우도 있고….” (정치인들이 툭하면 마크롱을 예로 드는데 세계사적으로 유래 없는 희귀 케이스를 너무 쉽게 갖다 붙인다.) “하하하, 그렇긴 하다. 2013년에 제 3당(새정치연합) 창당 작업을 하다가 안철수 대표가 갑자기 민주당으로 불쑥 합당해 버려가지고 무너졌는데, 그때를 생각해 보면 제3지대를 만드는 건 정말 어렵다. 좀 노골적으로 말하면 1, 2등은 민주당, 국민의힘으로 가고 3등이 오는데 안받으면 오만하다고 하고, 받으면 새 정치한다면서 왜 그런 사람들을 받느냐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정치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가 보수 정당의 혁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선거 때가 정치를 변화시키는 에너지가 가장 많을 때니까 어떤 식으로 대선에서 역할을 하는 게 도움이 될지 고민하고 있다.”―진중권 전 교수, 권경애 변호사와 ‘선후포럼’을 만든 게 그런 이유인가.“선거 이후를 생각하는 모임이란 뜻인데… 우리가 선거 때만 되면 늘 승패에만 관심을 갖는데 더 중요한 건 선거 이후에 사회가 한 발이라도 더 좋아지도록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대선 후보들도 불러서 얘기도 듣고, 비판도 하고, 조언도 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었다.” (지금 경청하고 명심하겠다고 하는 건 다 공수표 아닌가.) “그렇더라도. 포럼에서 대선 후보들에게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와 그 해법이 무엇인지를 강력하게 물을 생각이다.” (지금까지 각 당 경선도 보고, 포럼에 출연도 시켰는데 그런 해법을 가진 사람이 있던가.) “하하하.” (하하하?) “그동안은 경선이니까 당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본선에서는 대통령답게 생각하시기를 바란다.” (미루어 짐작이 가는데….) “하하하.”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1일 ‘위드 코로나’ 시작 직전 정기석 전 질병관리본부장을 인터뷰했습니다. 대비가 너무 부족한 상태에서 서둘러 시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결국 위드 코로나 보름여 만에 입원 병상 가동률이 75%를 넘었습니다. 정부는 입원 병상 가동율이 75%가 넘으면 ‘서킷 브레이크(긴급방역강화제도)’를 발동하겠다고 했지요. 하지만 서킷 브레이크는 발동되지 않고 있고, 정부는 아직은 견딜만하다고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백신 접종률이 늘고 있다는 점만 강조합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11월 18일 0시 기준으로 전 국민의 78.5%가 접종을 완료했습니다. 1차 접종을 받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누적 접종률은 82%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독자 여러분, 절대로 이 누적 접종률 수치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이 수치에는 백신은 맞았지만 이제는 백신 효과가 상당히 떨어진 ‘무늬만 접종자’가 굉장히 많이 포함돼있으니까요. 우리가 부스터 샷을 맞고 있다는 점이 그 반증입니다. 국내 코로나 백신 접종은 올 2월부터 시작됐습니다. 벌써 9개월 전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최근 추가 접종(부스터샷)의 접종 간격을 4~5개월로 단축했지요.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2~4월에 백신을 맞은 사람들은 접종자이긴 하지만 백신 효과는 굉장히 떨어진 상태입니다. 11월 18일 0시 기준 일일 신규 확진자는 3292명입니다. 위드 코로나 직전인 10월 31일 0시 기준으로는 2052명이었지요. 보름 새 1000여명이 넘게 폭증했는데 여전히 정부는 백신 누적 접종자 수만 강조합니다. 아마 내년 이맘때도 올 2월에 맞은 사람까지 포함 시켜 90%가 넘었다고 자랑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부가 또 말하지 않고 있는 게 있습니다. 일일 위중증 환자 발생 수치입니다. 질병청에 따르면 국내 재원 중 위중증 환자는 17일(0시 기준) 522명에서 18일 506명으로 16명이 줄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치 위중증 환자가 감소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같은 기간 누적 사망자가 3158명에서 3187명으로 29명이 늘었으니까요. 조금 이해하기 어렵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사망자가 29명이 아니라 16명이라면? 위중증 환자 발생이 줄어서 준 게 아니라 죽어서 준 것이죠.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려면 확진자수도 필요하지만, 위중증 환자가 매일 얼마나 발생하는 지가 중요합니다. 위드 코로나를 시작하면서 정부는 앞으로 증상이 경미한 확진자는 집에서 치료하고, 위중증 환자 위주로 전환하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하루에 위중증 환자가 얼마나 발생하는 지는 공개하지 않습니다. 위드 코로나 시작 전인 10월 31일 입원 중인 위중증 환자는 332명이었습니다. 지금(18일)은 506명이지요. 이걸 보고 ‘그동안 174명이 늘었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병이 나아 퇴원한 사람과 사망자까지 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질병청은 당연히 일일 위중증 환자 발생수를 알고 있습니다. 왜 공개를 안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알리는 게 유리하고. 정부의 방역 대응을 자랑할 수 있는 수치라면 안 할 리가 있겠습니까? 백신 누적 접종률처럼. 지난 할로윈데이 때 이태원은 100m를 걸어가는데 10여분이 걸릴 정도로 붐볐습니다. 마스크만 쓰고 다닐 뿐 거리두기나 방역에 대한 경각심이 사라진 모습도 이제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위드 코로나를 하더라도 방역에 대한 경각심을 풀어서는 안 되지요. 그런데 정부부터 불리한 통계는 알리지 않고, 자랑하고 싶은 수치만 공개하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위드 코로나도 당초 11월 9일 경쯤이면 가능할 거라고 했다가 이유도 모른 채 1일로 앞당겼지요. 국민을 위한 방역 정책을 해야 지, 권력과 선거를 위한 방역 정책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질병청장은 현미경으로 바이러스를 연구하거나 확진자를 모니터링하는 직책이 아닙니다. 위에서 잘못된 정책을 펴면 전문가로서 바로 잡으려고 말을 해야지요. 방역이 정치에 좌지우지되면 피해를 보는 것은 국민입니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1막 1장 연극이 끝난 분장실. 거울 앞에서 한 노인이 분장을 지우고 있다. 무대를 호령하던 왕의 얼굴이 조금씩 백발의 평범한 노인으로 바뀌어 간다.(이 인터뷰는 배우 이순재가 거울 속의 자신과 대화하는 형식을 차용했습니다.)거울: 천천히 지워주게. 조금 더 함께하고 싶으니.순재: (흠칫 놀라며) 누구…?거울: 이런… 꽤 섭섭하군. 그렇게 오래 함께했는데. 나는 무대 위의 자네라네. 65년 전 캡틴 닉스코터(지평선 너머)부터 윌리 로먼(세일즈맨의 죽음), 돈키호테, 야동 순재… 지금은 리어왕이구먼. 순재: 왜 이제서야 말을 건네는 건가.거울: 지난 60여 년간 나는 자네의 결정을 따랐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지만 이제는 알고 싶군.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제 우리의 해도 저물어 가고 있지 않나. 왜 무대를 선택한 건가. 자네는 좋았겠지만 나는 무척 춥고 힘들었다네. 순재: (깊은 한숨을 쉬며) 그랬겠지. 아내가 애들 돌반지 팔아 만두가게를 연 적도 있으니까. 이대 무용과 나온 사람을 데려와서는…. 그때가 시작이었을까? 피란 시절 우연히 한 여고 예술제에서 본 그 연극. 까까머리 고등학생의 가슴이 왜 그리 뛰던지. 그 길로 학교로 뛰어가 선생님을 붙잡고 연극 한 번 만들어 보자고 졸랐지. 그때 대전고에서 청강을 했는데 그분이 마침 ‘햄릿’을 가르쳐 주셨거든. 거울: 연극이 뭔지는 알았나.순재: 몰랐지. 선생님이 작품을 쓰고 내가 기획을 했는데, 정작 난 출연은 안 했어. 그 작품이 뭐더라…. 잘 생각이 안 나는구먼. 재미있는 친구가 끼어 있던 건 기억해. 김창준이라고. 혹시 아나? ※1993∼99년 미 연방하원의원을 한 김창준 씨(3선·공화당)다. 거울: 서울대 다닐 때는 해체된 연극부를 재건했지? 그렇게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구먼. 순재: 이 사람들이 연극에 몰두하다 보니 영수증 처리를 제대로 못해 학교에서 예산 남용으로 없앤 거야. 하루에 계란을 150개나 먹은 식으로 올렸으니…. 다시는 그런 일 없게 하겠다고 내가 대표로 각서를 쓰고, 단과대별로 흩어진 연극부를 하나로 모아 공연을 했지. 동랑 유치진 선생의 ‘조국’이었어.거울: 작품 이름이 하필….순재: 응?거울: 아, 아닐세. 그런데 취미로 해도 되지 않았나. 직업으로는 좀….순재: 처음 연극할 때는 한 10년 정도 거의 돈을 벌지 못했지. TV를 한 것도 먹고살기 위해서였으니까. 집안의 반대는 말도 못했고. 10여 년을 거의 쉬지도 못하고 드라마, 영화를 쉴 새 없이 찍고 간신히 25평짜리 집하나 마련했으니까. 거울: 요즘 애들이 들으면 화나네.순재: 응? 이 분야가 묘한 마력이 있어. 한 번 물들면 못 헤어 나온다고. 어떻게 하겠어. 이 길이 아니면 안 되겠는데. 거울: 직업 때문에 헤어진 사람도 있었지. 말이 나와서인데 자네와 달리 난 그녀가 참 마음에 들었다네. 집도 부자고. 순재: 그 사람은 내가 방송국에 다니는 것만 알고 배우인 줄은 몰랐지. 그런데 만난 지 몇 달 지나 TV에서 날 본 거야. 얼굴이 새파래져서 배우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생활에 절제가 없어 안 된다고 하더군. 일류가 되면 밥은 굶지 않을 거고, 우리는 아직 아니었지만 외국에서는 당당한 직업이라고 반박했지. 사생활은… 잘사는 사람도 많다고 했지만 자존심이 무척 상했던 것 같아. 그 뒤로 연기든, 생활이든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고 이를 악물었어. 그 상처가 지금의 나를 만든 셈이 됐구먼.2막 1장거울 뒤로 보이는 ‘리어왕’ 포스터거울: 그런데 자네 나 몰래 보약 먹나? 3시간 20분 공연을 월요일 하루 쉬고 어떻게 20일을 매일 하나? 토요일은 두 번하고. 나 죽겠네.순재: 이거?거울: 그건 박카스고. 체력은 둘째 치고 사람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 않나. 더군다나 코로나 시국인데 대역도 없으면 어떻게 하나. 자네는 걱정도 없나. 순재: 속으로야 많이 걱정했지. 내가 쓰러지면 끝이니까. 극단 망하는 거지. 그런데 내 이름을 단 공연인데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보여줄 수는 없지 않나. 아직은 체력적으로도 감당할 수 있겠다 싶었고.거울: 하긴 자네는 어머니 상중에도 공연을 했으니까. 그런데 ‘이순재의 리어왕’이라고 이름 붙인 건 자네 생각인가?※연극(Life in the Theatre) 공연 중이던 2008년 7월 30일 오전 그의 모친이 돌아가셨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보러오는 관객들과의 약속이라며 이날 두 차례의 공연을 예정대로 진행했다. 순재: 내가 하자고 한 건 아니고 기획사에서 한 건데…. 겸손이 아니라 난 사실 무척 부담스러웠다고. 그냥 ‘리어왕’이라고 하면 도망갈 구석이 있잖아? 그런데 내 이름을 떡 붙여놓으니까 모든 걸 내가 책임져야 할 입장이 된 거지. 다행히 잘 돼서 모두에게 고마워.거울: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고 했는데, 다른 이의 리어왕과 다른 점이 뭔가.순재: 미안한데 사실 내가 다른 리어를 본 적이 별로 없어.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원전 그대로 3시간이 넘는 리어왕을 한 적이 거의 없으니까. 단지 관객들에게 이 말은 하고 싶군. 셰익스피어의 진수는 줄거리가 아니라 대사에 있다고. 물론 처음 보는 관객들도 대사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배우들이 잘 전달해야 하는 게 맞지. 그런데 워낙 대사가 길고 어려운 말이 많다 보니 쉽지는 않아. 3막 4장테이블 위에 놓인 소품용 왕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재거울: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을 통해 뭘 말하고 싶었을까.순재: 하하하. 자식들에게 먼저 재산을 물려주지 말라는 거? 아주 실감나는 교훈이야. 죽을 때까지 갖고 있어야지 절대로 먼저 주면 안돼. 내가 천만다행으로 생각하는 게… 우리 어머니가 96세로 돌아가셨는데 만약 내가 일을 안 하고 내 아들들이 뒷바라지를 했다면 우리 어머니 입장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그 다음에는… 흔히 이 부분을 많이 놓치는데, 통치자는 늘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배려해야 한다는 거지. 회사 사장이든, 자영업자든, 리더 역할을 하는 사람은 다 마찬가지야. 거울: 리어는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 후에야 비로소 백성의 어려움을 깨닫더군.순재: (벌떡 일어나며 대사를 읊는다.) 너희, 집도 없는 가난한 이들이여. 어디서든 이 잔인한 폭풍우를 견디고 있을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아, 머리 눕힐 집 한 칸 없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창문같이 숭숭 뚫린 누더기를 걸치고, 어떻게 이런 험한 날씨를 감당하려느냐. 오, 나는 이들에게 너무도 무관심했구나. 부자들아! 가난뱅이의 고통을 스스로 겪어봐라. 그리하여 넘치는 것을 그들과 나누고, 하늘의 정의를 실천하여라.거울: 자네 갑자기 왜 흥분하나.순재: 이 대사가 셰익스피어가 리어왕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이지. 나도 국회의원을 해봤지만 권력은 국민이 위임한 거라네. 그런데 위정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원래부터 갖고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지. 지금도 비슷하지 않나? 리어가 외치는 ‘잔인한 폭풍우’는 포악한 권력이라네.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을 통해 포악한 권력에 시달리고 억눌린 백성의 어려움을 대변하고 있는 거지. 안타깝게도 리어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직언하는 충신을 물리치고, 끔찍한 경솔함을 거듭한 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그것을 깨닫지만. 거울: 인간은 왜 늘 잃은 뒤에야 소중함을 알고, 앞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비로소 진실의 눈이 떠질까.순재: 그 양반들이 꼭 이 공연을 보고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았으면 좋겠구먼. 대사 곳곳에 새겨 들을 말이 많은데.거울: 그 양반들? 대통령과 대선 후보들을 말하나. 이미 늦었네. 전 회, 전석 매진이라. 그건 그렇고, 자네 언제까지 연기를 할 건가. 자네 위로 송해 선생님밖에 없다네. 순재: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는 그날까지. 나는 아직도 지금보다 더 나은 연기를 보여주는 꿈을 꾼다네. 하하하. 미쳤다고? 꿈꾸는 자와 꿈꾸지 않는 자, 도대체 누가 미친 건가? 인생이 한 편의 연극이라면 공연을 마치는 곳은 병원이 아니라 무대 위가 돼야 하지 않겠나.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1일부터 ‘위드 코로나’(단계적 일상 회복)가 시작된다. 하루라도 빨리 일상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우리에게 충분한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위드 코로나는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많다. 정기석 전 질병관리본부장(한림대 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은 “아직 치명률도 높고, 재택치료 시스템도 미비한데 어떻게 위드 코로나를 한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며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너무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 정은경 질병청장의 직전 전임자였다.》 ―위험한 게임이라니…. “위드 코로나는 코로나19 대응을 확진자보다 위중증, 사망자 중심으로 전환한다는 의미다. 지금까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확진자는 생활치료센터나 병원으로 보냈지만 앞으로는 모든 확진자를 집에 머무르게 한 뒤 심한 사람만 병원으로 보내겠다는 거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각 병원 중환자실이 어디가 비고 찼는지, 갑자기 증상이 악화된 중환자를 당장 보낼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시스템이 없다.” (선후가 바뀌었다는 건가.) “재택치료로 전환한다기에 정부 관계자에게 물어봤다. 왜 이렇게 서두르느냐고…. 불과 며칠 전에 재택치료 중인 확진자가 이송이 늦어져 숨졌다. 중환자 병실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시스템이 없으면 구급차가 빙빙 도는 사이에 사망할 확률이 굉장히 높다.”※10월 21일 재택치료 중인 A 씨가 갑자기 증상이 악화돼 119에 신고했으나 이송 중 숨졌다. 이송에 1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일반구급대가 도착했지만 코로나 확진자란 사실을 모르고 출동해 이송할 수 없었고, 전담 구급차는 방역조치를 완료하고 출발하느라 지체됐다. ―재택치료란 건 사실상 없다고 했는데…. “말이 좋아 재택치료지 실제로는 모두 자택 격리다. 이건 치료가 아니다.” (정부는 ‘치료’라고 했다.) “위드 코로나가 시작되면 확진자가 더 늘 가능성이 높다. 1만 명, 2만 명 이야기도 나오니까. 재택치료로 전환한다고 선언을 안 하면 확진자를 모두 생활치료센터나 병원으로 보내야 하는데 감당할 수 없으니까 머리를 쓴 거지.” (의사가 일일이 왕진 다닐 수는 없지 않나.) 모니터링을 통해 전화로 상태를 듣는 게 전부일 거다. 청진기 한 번 못 대면 진찰도 안 되는데 치료라니…. 아직은 치료약도 없는데 자택 격리 상태에서 무슨 치료를 하나? 타이레놀이나 주는 게 고작이지. 더군다나 지자체에 재택치료 업무를 넘겼으니 제대로 운영이 안 되는 곳이 속출할 거다.” ―보건소 인력은 완전 탈진 상태 아닌가. “일이 너무 힘들다 보니 휴직자가 많다. 직원을 모집해도 오는 사람이 없다. 특별한 대접을 해주는 것도 아니니까.” (같은 질문을 또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미비점을 보완한 뒤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재택치료로 전환하면서 또 지자체에 진료반과 격리반 두 개를 만들게 했다. 업무가 가중된 거지. 격리반은 행정에서 한다지만 진료반은 보건소 인력이 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탈진인데 앞으로는 집집마다 찾아다녀야 한다. 제대로 된 대응이 가능할까? 그리고 진짜 큰 문제가 있다.” ―진짜 큰 문제라니…. “혼자 있다가 코로나로 저산소증에 빠지면 환자가 자기 상태를 알리지도 못하고 죽을 수 있다.” (숨쉬기 힘들면 알 것 같은데.) “저산소증에 빠지면 당장 숨이 찰 것 같지만 증상이 그렇지 않다. 서서히 몽롱해지다가 임계점이 넘으면 그냥 죽는다. 환자가 자신의 몸에서 산소 농도가 떨어지는 걸 모를 수 있다는 말이다. 정부에서 산소포화도 측정기를 준다지만 그 상태에 빠지면 스스로 측정할 생각조차 못할 수 있다. 늘 손에 끼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냥 죽은 채로 발견될 수 있는 거지. 도대체 무슨 준비가 돼 있다는 건지. 지금 코로나 치명률이 0.78% 정도다. 앞으로 좀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아직은 어마어마한 수치다.” (0.78%면 얼마나 위험한 건가?) “신종플루 치명률이 0.032%였다. 독감은 0.03%이고….” ―병상보다 중환자가 많으면 어떻게 되나. “그걸 의료체계 붕괴라고 하는 거다. 일단은 중환자실과 일반병실 사이인 준중환자실로 보낼 거다. 전국에 500개 정도가 있는데 당연히 진료의 질은 중환자실보다 떨어진다. 말이 500개지 여기까지 중환자를 보내는 상황이면 더 줄여야 한다. 기계를 설치할 공간이 필요하니까. 지금 중환자실 1000개 중에 400여 개가 차 있는데 돌볼 의료 인력이 모자라 탈진 상태다. 그런데 중환자실이 다 차서 준증환자실까지 넘어온 중환자들을 치료한다? 침대만 있으면 뭐하나.” ―그렇다고 아무도 안 돌볼 수는 없지 않나. “지금은 중환자실 환자는 다 교수가 보게 돼 있다. 그래서 의료의 질이 아주 높다. 그런데 앞서 말한 상태가 되면 교수로는 안 되고 대학병원 같으면 경험이 적은 전공의들까지 매달리게 될 거다. 중환자는 늘고, 의료의 질은 낮아지면 당연히 죽는 사람이 많아지지 않겠나. 정부에서 입원병상 가동률이 80%를 넘으면 ‘서킷 브레이크(긴급방역강화제도)’를 한다고 하는데 어이가 없는 게… 80% 됐을 때 스톱시키면 한두 주 지나면 100%가 된다. 병이 악화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처럼 자꾸 왜 저러는지….” ※서킷브레이크는 당초 80%였으나 시행을 앞두고 75%로 변경됐다.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 방역당국에 의사가 많은데. “방역정책에 참여하는 전문가들 중에 제목소리를 안 내는 사람들이 많다. 또 의사라도 한 번도 중환자실에서 자기 환자를 치료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중환자실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피상적으로만 안다. 그래서 작년부터 긴급 상황을 대비해 평소에 중환자를 보던 전문의가 아니더라도 가정의학과, 일반외과, 심장내과 의사 등으로 일종의 의료 예비군을 양성해 놓자고 했는데 전혀 안 됐다.” ―당신 말을 들으면, 위드 코로나를 결정한 의학적 근거는 오직 백신 접종률 70% 달성뿐인 것 같은데…. “그런 것 같다. 정부는 전 국민의 70% 이상이 접종한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고 자화자찬하지만 70%란 수치에 속으면 안 된다. 누적 수치니까. 지금 무늬만 접종 상태인 사람도 많을 거다.” (무늬만 접종자라니?) “최근에 나오는 델타변이 바이러스 자료를 보면 2차 접종을 한 뒤 4, 5개월이 지나면 효과가 50% 밑으로 떨어진다. 모두 일시에 맞은 게 아니라 2월부터 시작해서 지금 8개월이 지났기 때문에 초기에 맞은 사람들은 백신 효과가 크게 떨어졌다. 얀센은 접종 후 두 달 지나면 부스터샷을 맞게 하지 않나. 70% 접종했다고 축하할 일이 아니다. 중환자수와 치명률이 더 떨어지는 걸 확인하고 가야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부스터샷을 얼마 만에 맞아야 하는지 정확한 자료도 없다.”※10월 31일 0시 기준 2차 접종 완료자는 75.3%다. ―얀센은 두 달, 다른 건 6개 월 정도라고 하던데…. “그건 남의 나라 자료고…. 이미 전 국민의 70%가 백신을 맞았다. 그러면 접종자 혈액을 뽑아서 우리나라 국민의 항체 형성률이 어느 정도인지, 효과가 떨어지는 데 어느 정도 기간이 걸리는지, 그중에 돌파 감염은 어느 정도인지 등 우리만의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발표된 자료가 없다. 그런 일을 하라고 국립보건연구원 내 감염병연구소를 만들었는데도.” (여력이 없는 걸까.) “생각이 없는 거지. 접종자가 동의만 하면 검사 결과는 하루면 나온다. 그걸 계속 축적해 분석해야 언제 부스터샷을 맞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거다. 그냥 미국이 하는 거 보고 6개월이라고 하는데… 내가 아는 자료로는 6개월은 늦다.” ―분명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11월 9일경이라고 했는데 갑자기 앞당겨졌다. “뭔가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건지… 기간을 앞당긴 의학적 근거는 없다. 왜 이렇게 과격하게 갑자기 푸는지 모르겠다. 사실 그동안 해 왔던 거리 두기 단계가 엉터리였다는 걸 자인하는 건데… 지금까지 했던 거리 두기 단계가 제대로 만들어진 거라면 그걸 한 단계씩 낮춰 가면 점진적 일상회복이 되는 거 아닌가. 방역은 절대로 이렇게 갑작스럽게 선언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왜 그렇게 갑자기 한다고 생각하나. 선거?) “그 외에 달리 뭐가….”※10월 7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은경 질병청장은 “11월 9일부터 단계적 일상회복이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에 “시작해볼 수 있겠다”고 답했다. 70% 접종 예상일이 10월 25일이고, 항체 형성 기간 2주를 감안한 날짜다. 하지만 왜 11월 1일로 당겨졌고, 근거가 뭔지 알려진 것은 없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오영수 선생님과의 인터뷰는 이달 중순 선생님 자택 앞 공원 벤치에서 진행됐습니다. 볕이 따뜻한, 날이 아주 좋은 오후였지요. 오징어게임이 개봉한지 얼추 한 달 가까이 되던 시점이었습니다. 뵙자마자 가장 궁금한 것부터 여쭤봤습니다. 전 세계가 오징어게임에 빠졌는데 어떻게 그동안 인터뷰 기사가 없는지 이해가 안 갔거든요.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이 없을 리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 알고 보니 홍보 쪽에서 개봉 한 달 정도까지는 인터뷰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더군요. 인터뷰를 하다보면 아무래도 작품 내용이 언급될 수밖에 없고, ‘오일남’이 어떤 인물인지 알려지면 재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다른 배우들의 인터뷰가 거의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합니다. 저는 어떻게 할 수 있었냐고요? 재수가 좋았지요. 인터뷰 날이 개봉한 지 얼추 한 달 가까이 된데다, 기사가 나가는 날도 한 달이 지난 이달 18일이어서 괜찮았다고 합니다. 오징어게임은 지난달 17일 공개됐습니다.선생님이 모 치킨 광고를 거절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오징어게임의 주제를 함축한 ‘깐부’란 말의 의미가 훼손되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하셨죠. 그런데 선생님의 작품에 대한 애정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인터뷰 사진촬영을 위해 저는 마른 오징어와 소주 한 병, 라면을 소품으로 준비해갔습니다. 첫 번째 게임(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후 게임이 무산된 뒤에 편의점 앞에서 일남과 기훈이 생라면 안주에 소주를 마시는 장면처럼 사진을 찍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서로 소주 한잔 기울이며 안주로 오징어 다리를 들고 있는 모습을 찍으면 작품 제목과도 어우러져 괜찮은 사진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는데 완곡하게 “조금 진지하게 했으면 싶은데…”라고 하시더군요.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치킨 광고 거절 이유를 듣고 나니 이해가 갔습니다. 선생님이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건 아니지만 자신의 모습이 다소 희화화되는 것이 작품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개봉 이후에도 작품의 이미지를 위해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한다고 할까요. 진심을 다하는 모습은 팬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났습니다. 인터뷰가 끝날 때 쯤 주변을 보니 산책 중인 주민들이 선생님을 알아보고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서있더군요. 10여 명 쯤 됐는데, 선생님은 모든 사인에 緣(인연 연)자를 써주셨습니다. 이렇게 만난 것이 다 인연이기 때문이라고 하시더군요. 인터뷰 기사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작품을 위해 거액의 광고를 거절한 것을 칭찬하신분도 계셨고, 조금이라도 더 갖기 위해 아옹다옹하는 세상에서 뭔가 더 숭고한 가치를 지향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참된 어른을 만난 것 같다고 하신 분도 계셨고, 연기력을 칭찬한 분도 계셨지요. 선생님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당신도 남들에게 주면서 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 모두가 선생님께 이미 아주 큰 것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편법과 술수를 쓰지 않고, 묵묵히 성실하게 한 길을 걷는 것은 결코 바보짓이 아니라는 믿음이지요.주위를 돌아보면 온통 어지럽고, 암울한 모습뿐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하루아침에 수천억원을 꿀꺽하고도, 고작 6년 일하고 퇴직금으로 50억원을 받고도 정당한 노력의 대가라고 우기지요. 자기 자식 의사 만들기 위해 대학 교수라는 부모가 허위 경력에 표창장까지 위조해주고도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모 국 사태가 한창일 때 아주 유명한 한 대학교수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녀들끼리의 논문 품앗이는 대학 교수 사회에서는 얘깃거리도 안 될 정도로 만연된 현상이라고.선생님도 사람인데 성공과 인기, 돈을 싫어할 리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에게 인기와 부는 연기를 하는 이유가 아니라 그 길을 다 걷고 난 뒤에 따라오면 좋고 아니면 할 수 없는 것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걸 못 견디지요. 노력한 만큼 얻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시작을 안 합니다. 노력한 만큼 얻는 것은 당연하고, 그 이상 얻어야 정당한 노력의 대가를 받았다고 여기지요. 적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얻는 게 잘하는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 최근 뉴스를 도배하는 대장동 사태, 모 국 교수 부부의 파렴치한 행동 등이 다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사람들이 배우 오영수에게 감동을 받은 것은 단순히 대박 난 작품에 출연해서도, 연기력이 탁월해서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있을 것입니다만 더 큰 것은, 우리가 믿고 싶지만, 나만 손해볼까봐 꺼려했던 어떤 삶에 대한 자세가 사실은 맞는 것이고, 충분히 걸을 만한 길이라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믿음은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아주 드물게, 간간히만 알려주지만… 그때마다 우리에게 그래도 아직 세상은 살만하다는 위안과 살아갈 힘을 주지요. 누군가에게 그런 위안을 줄 수 있는 삶이 많아진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깐부 천지인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어두운 방 안(자정 무렵)의문의 초대를 받은 기훈. 그곳에 죽은 줄 알았던 일남이 있다. 놀라 다가가는 기훈. 얼굴 C.U.(Close Up) 괘종시계의 분침이 12시를 향한다. (※ 이 인터뷰는 오징어게임 기훈-일남의 마지막 만남 장면을 차용했습니다.)기훈=당신… 살아… 있었습니까.일남=물 좀… 주겠나.기훈=(물을 건네주며) 당신은… 누구입니까. S#1. 오영수가 되던 날일남=나? 오…세강. 그동안은 오영수로 불렸지. 지금은 오일남으로 더 알지만….기훈=오…세…강?일남=그게 내 본명이야. 영수는 예명이고. 젊을 적 막 연극을 시작했을 때 돌아가신 오세강 선생이 형, 아우 하자며 지어줬지. 그 시절에는 연극 하는 게 그리 환영받는 일이 아니라서 본명을 안 쓰는 경우가 많았거든. 배우로서의 인생이 시작된 날인 셈이지.기훈=배우는 어떻게 하게 된 겁니까. 연극영화과를 나왔던데….일남=대학에서 연극영화과를 다녔다는 건 사실이 아니야.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정말 모르겠어. 연기를 시작한 건 제대하고 1967년 극단 광장에 들어가면서였으니까. 20대 초반이었을 때지.기훈=그 전에는 연기를 안 했습니까. 일남=그때는 경험이 없어도 극단에 들어갈 수 있었어. 물론 쉽게 무대에 오를 수는 없었지만…. 몇 년을 청소하고, 잡일 하고 그랬지.기훈=50여 년을 주로 연극만 고집한 이유가 있습니까.일남=순수성이라고 할까? 우리 세대 때는 그런 게 있었지. TV나 영화 이런 데를 기웃거리면 순수성을 잃는다고 보는…. 대배우인 고 장민호 선생조차 칠성사이다 광고를 찍었더니 스승인 이해랑 선생이 거기까지만 하고 더는 하지 말라고 혼을 내던 시절이니까. 그렇다고 내가 TV나 영화를 전혀 안 한 건 아니야. 40, 50대 때는 ‘나는 왜 연극만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을 했으니까. 경제적으로도 좀 어려웠고…. 그래서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교육방송에서 성우도 몇 년 했어.기훈=절충할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일남=고민을 하긴 했는데 마침 그때 국립극단에 들어가게 됐거든. 공무원 신분이 되니까 경제적으로 좀 안정이 됐고 다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지, 허허허. 지금 생각하면 잘한 선택 같아. 사실 그동안도 TV나 영화 제의는 꽤 있었어. 그런데 배역에 대한 생각이 서로 좀 안 맞아서 못 한 게 많지. 좀 너무하다 싶은 것도 있었고….기훈=너무하다니요.일남=그래도 내가 연극판에서 50여 년을 있었는데 단역 한두 마디 하는 걸 하라고 하니… 자존심이 좀 상했던 것 같아. 그런데 또 상대방은 나를 ‘알려지지도 않았으면서…’ 이렇게 보는 것 같고… 그래서 못 한 게 많아. 서로 좀 맞았으면 좀 더 빨리 했을 거야. 하지만 지금까지 거의 한길을 걸었으니 이제는 이것저것 그동안 안 해본 걸 좀 해보고 싶어.S#2. 영수에서 일남으로기훈=그래서 이 게임에 참여한 겁니까.일남=꼭 그런 건 아닌데…. 전에 황동혁 감독이 영화 ‘남한산성’을 하자고 했는데 일이 있어서 거절을 했어. 황 감독이 기분이 안 좋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다 잊고 오징어게임을 하자며 연락하더라고. 대본을 봤는데 말도 살아 있고 참 좋았지. 그래서 나도 내 연기를 보여주고 싶어서 마침 그때 하고 있던 연극(‘노부인의 방문’)을 보러 올 수 있냐고 했어. 정말 오더라고? 그렇게 인연이 된 거지.기훈=‘무궁화 …’ 게임에서 혼자만 즐거워하는 건 감독이 요청한 겁니까.일남=그 장면에서 웃으면서 게임 하라는 말은 없었어. 황 감독이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도 선생님은 좀 다르게 할 수 있다’고는 했지. 일남 역에 대해서도 특별한 주문은 없었어. 그냥 ‘어떤 인물인지 아시죠?’ 그러더라고? 문제 되는 게 있으면 현장에서 말하겠다면서. 그런데 별로 말이 없었던 걸 보면 내 연기가 감독 생각이랑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같아.기훈=‘무궁화 …’ 게임은 해봤습니까.일남=우리 어릴 땐 없던 게임이라…. 구슬치기, 딱지치기는 잘했지. 깐부도 있었고. 내게도 동네 딱지 우리가 다 따먹자고 맺었던 깐부가 있었어. 누구였을까…. (과거를 회상하며 눈을 감는 일남. 멀리서 아이들 노랫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누군지 기억도 안 나지만….기훈=일남 역을 위해 준비한 건 없었습니까.일남=따로 준비할 게 별로 없는 게… 지금 내가 약간 치매기가 있어서 돌아다니면 그냥 일남이랑 비슷할걸? 허허허. 나이도 그렇고….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변신을 잘하냐고 하는데 별로 변신한 게 없어. 맨 꼭대기 침대 위에서 ‘그만해, 이러다가 다 죽어’라고 절규하는 장면이 좀 힘들기는 했지. 고소공포증이 있거든. 그래도 한번 해보려고 올라갔는데 아이쿠…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몸에 안전장치를 매고 했지. S#3. 깐부는 치킨이 아닙니다.기훈=치킨 광고는 왜 거절한 겁니까. 배우로서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고?일남=(손사래를 치며) 아니야, 아니야. 완곡히 고사를 하기는 했지만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내가 한 말이 아니야. 억울해…. 그 말 때문에 마치 내가 상업적인 것은 전혀 안 하고, 마치 순수 예술만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인 것 같은데…. 전에도 이동통신 광고도 찍고 TV나 영화도 다 했는데 무슨…. 이순재, 신구 선배가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도 들고…. 그분들도 다 광고 찍고 하는데 내가 뭐라고. 그렇게 써서 내가 아주 이상해졌어. 기훈=그럼 왜 거절한 겁니까.일남=이유가… 구슬치기할 때 자네가 나를 속여서 거의 다 땄잖아. 그걸 알면서도 나는 자네에게 마지막 구슬을 주고 죽음을 선택했지. ‘우린 깐부잖아’ 하며…. 깐부끼리는 내 것, 네 것이 없는 거니까. 서로 간의 신뢰와 배신, 인간성 상실과 애정 이런 인간관계를 모두 녹여 함축한 말이 ‘깐부’야. 작품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고. 난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전달하고 싶어서 혼신의 힘을 다해 깐부 연기를 했어. 그런데 내가 닭다리를 들고 ‘○○치킨 맛있어요’라고 하면 사람들이 깐부에서 뭘 연상하겠어? 그건 작품이 지향하고자 하는 뜻도 훼손시키는 것이고…. 그래서 안 한다고 한 거지. 내가 광고니 뭐니 아무것도 안 하고 오직 배우로서의 길만 걷기 위해서 안 하겠다는 게 아니거든.기훈=당신은… 돈이 아쉽지 않습니까. 쉽게 벌어온 삶도 아닐 텐데.일남=자네도 벌어봤으니 알 테지. 그게 쉽던가? 내가 왜 돈을 생각하지 않겠나. 집사람이 그러더군. ‘좀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내 뜻을 이해해줘 다행이지. 요 근래에는 광고가 많이 들어오긴 해. 그래도 할 만한 걸 해야지 들어온다고 다 할 수는 없잖아? 좀 가벼운 광고가 많았거든. 그래서 ‘콘티를 좀 보고 얘기하자’ 이런 식으로 완곡하게 고사한 것도 여러 편이 있어. 지금 얘기가 오가는 것도 있지만…. 내가 광고는 다 안 한다고 한 게 아니야. 단지 내 손으로 ‘깐부’의 의미를 훼손시킬 수는 없다는 거지. 기훈=꼭 해보고 싶은 역이 있습니까.일남=파우스트 박사 역. 30대 중반에 한 번 하고 지금껏 못 했는데, 그때 내가 죽을 쒔거든. 젊을 땐데도 지쳐서 공연 중에 잠깐 의식을 잃었지. 한 30초 정도 멈췄을 거야. 사실 파우스트라는 인물을 30대 중반에 연기한다는 게 무리한 거지. 인생에 대해 뭘 안다고…. 이 나이가 되니까 좀 알 것 같은데 아직 기회가 없어. 죽기 전에 꼭 한번 해보고 싶은 바람이지. 그리고 지금껏 받은 걸 사람들에게 돌려주고도 싶고…. 나는 아직도 사람을 믿으니까.기훈=사람을… 믿는다?일남=내가 지금껏 존재할 수 있는 건 크든 작든 사람들에게 뭐든 받았기 때문이겠지. 나를 믿으니까 줬을 테고…. 지금 이렇게 인터뷰 자리가 생긴 것도 다 내가 받는 거 아닌가? 이제는 나도 그동안 받은 것만큼 뭔가를 줘야겠지.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는 일남.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얼굴 C.U.)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제73주년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군 혁신의 핵심은 인권”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올해처럼 군 인권이 참담하게 무너진 적이 또 있을까. 육해공군을 돌아가며 연이어 성범죄가 벌어졌고, 피해자의 절규를 무시한 결과는 여성 부사관들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졌다. 14년간 육군 법무관을 지낸 이지훈 변호사(44·예비역 소령)는 “밑바닥에 곪아 있는 문제들을 수술하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은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군에 꽤 오래 있었는데 혹시 당신은 성 차별이나 피해를 겪은 적이 있나. “법무관이다 보니 신체적으로 당한 적은 없다. 언어적 성희롱을 겪은 적은 있는데… 소령 때 육군본부 헬스장에서 리모컨을 잘못 눌러 옆 사람 트레드밀(러닝머신) TV채널이 돌아갔다. 그랬더니 화를 내며 ‘어디 여자가 감히’라고 하더라. 체육복 차림이라 낮은 계급의 여군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너무 화가 났는데 법무장교인 나 자신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참을 만해서 그런 건가. “문제 삼고 싶었지만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니 하기 힘들었다. 문제를 삼으려면 일단 알려야 하지 않나. 그러다 보면 소문이 날 수 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나한테 이런저런 걸 물어보는 데 시달려야 하고…. 그 과정에서 또 이상한 시선을 받을 테고…. 그런 게 싫고 부담스러웠다. 언어적 성희롱도 알려졌을 때 벌어질 상황이 고민스러운데 더 심각한 피해를 입은, 계급도 나보다 낮은 여군들은 어떨까. 여군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는 군 시설만 봐도 알 수 있다.” ―여군을 위한 시설이 많이 열악한가. “2005년 입대해 유격훈련을 받는데 남자들과 같은 목욕탕을 시차만 두고 썼다. 언제 씻으라고 시간도 안 정해줘서 남자들이 오기 전에 다들 굉장히 허겁지겁 씻고 나왔다.” (1980년대도 아닌데… 항의는 안 했나.) “나도 그렇고 다들 사회 경험도 없이 들어와서 그때는 미처 생각을 못 했다. 사단급 등 상급부대는 시설이 좀 나았지만 연대나 대대급에는 본관 건물에도 여자 화장실이 따로 없는 곳이 수두룩했다. 야외 시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런 거 개선하라고 군 양성평등센터가 있는 것 아닌가. “국가인권위원회가 여군 화장실 인프라를 개선하라고 한 게 언제인지 아나?” (당신 입대 시절인가?) “2018년이다.” (최근까지도 그런 상태였다는 건가?) “모 부대 유격장에서 벌어진 일인데, 주임원사가 여군 화장실은 대대장이 쓰게 하고, 여군에게는 차로 이동해야 할 거리에 있는 화장실을 쓰도록 했다. 물론 차량 지원은 없었고. 해당 여군이 이 사실을 육군본부 양성평등상담관에게 알렸더니 ‘성 문제가 아니라 도와주기 힘들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서 다시 국가인권위에 진정한 거다. 시설이라는 게 여군에 대한 배려나 생각이 있어야 개선하는 것 아닌가. 군 내 성범죄가 끊이지 않는 게 우연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해당 여군은 열악한 부대환경 때문에 급할 때는 탄약통을 요강으로 사용한 뒤 세면대에 버린 적도 있다고 한다. ―폐쇄적인 근무문화 때문에 군 사법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2사단 법무실장 할 때인데 우리 사무실에 군 검사, 국선변호장교, 징계장교, 군법원 서기가 다 함께 있었다. 민간으로 치면 검찰과 법원이 함께 있는 셈이다. 군 검사가 사건을 올리면 내가 같이 검토한 뒤 사단장에게 보고한다. 심판관제도에 따라 재판관이 될 일반 장교는 누구를 시키겠다고 결재도 올리고…. 최근에 폐지됐지만 전에는 지휘관 감경권이 있었으니까 판결 결과를 보고하면서 필요하면 감형 의견도 상신한다.” ―사단장이 검사에게 보고받고, 재판관 중 한 명을 지정하고, 감형까지 해줄 수 있으면 견제가 불가능하지 않나. “그래서 늘 재판의 독립성이 문제가 되니까 이번에 감경권과 심판관제도는 폐지했는데, 그 외에도 문제가 많은 게 한둘이 아니다. 특히 재판이 필요 없는 징계는 정말 ‘노(NO)답’이다.” ―징계는 일정한 기준에 따라 내리는 것 아닌가. “언론에 알려져 커지면 세게 내리고 아니면 그냥 묻히고…. 한 번은 모 장군이 징계위원장으로 들어온 적이 있는데 장군이 위원장을 할 정도면 피의자 계급도 높고 큰 사건이다. 그런데 그분 말 한마디로 징계가 ‘휙휙’ 좌우됐다. 이런 징계를 왜 하느냐 이러면서…. 군 감찰도 진짜 문제가 많다. 마음만 먹으면 사건을 키울 수도, 줄일 수도 있다.” ―군사경찰이나 법무관들이 지켜보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사건이 들어오면 항상 수사보다 먼저 감찰 조사를 시작하고 지휘관에게 모두 보고한다. 지휘관이 거의 100을 안 상태에서 수사가 시작되는 거지. 지휘관 판단에 따라 감찰 내용을 모두 수사에 넘길 수도 있고, 선별해 넘길 수도 있다. 사건을 줄이고 싶다면 선별해 수사에 넘기고, 수사가 다시 몇 개를 추려서 법무로 보낸다. 수사하는 데는 규율도 많고 권한도 한계가 있지만 감찰은 그런 게 없다. 모든 걸 다 할 수 있으니 수사기관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이미 갖게 되고, 그게 그대로 지휘관에게 보고된다. 체계상으로는 법무가 뭘 결정하는 위치 같지만 사실은 법무가 가장 조금 안다.” ―군 내 성범죄를 줄이기 위해 여성 지휘관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글쎄… 남성 중심 조직에서 상위 직급에 올라간 여성 중에는 오히려 더 남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여군 대령이 유부남 소령과 미혼 여성 대위의 불륜 사건 징계위원으로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이분이 징계위에서 여군 대위에게 뭐라고 했냐면 방문을 왜 열어줬냐는 거다.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이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이분이 위촉된 이유가 징계위원이 다 남성이라 여성의 시각에서 들어보라는 취지였다. 여군 대령이 그러니까 남자 위원들도 자유롭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징계위 결정은 남자는 정직, 여자는 해임이었다.” (헐….) “여성이 국방부에 항고해서 최종적으로는 정직으로 내려왔지만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런 말이 징계위 속기록에 적히면 곤란할 텐데.) “징계위 속기록은 취지만 적고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 기록하지는 않는다. 공개하지도 않고. 그래서 그 안에서 엄청난 인권유린이 벌어진다.” ―지금 군에 2차 가해로 엮이는 게 두려워 피해자의 불법을 묵인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했는데…. “최근 모 부대에서 남자 부사관이 여자 부사관에게 언어적 성희롱을 한 사건이 있었다. 가해자가 전출되는 걸로 끝났는데 이후에 피해자가 가해자를 찾아가 일과시간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그게 불법인가?) “우리나라 법은 사적 제재를 금지하고 있다. 군인복무기본법도 사적 제재를 금하고 있고, 이를 알았을 때는 의무적으로 신고해야 한다. 피해자는 당연히 보호돼야 하지만 그렇다고 피해자에게 사적 제재 권한을 준 건 아니다. 마침 지나가다 그 상황을 본 상사가 중지시키니까 피해자가 ‘내가 피해자인데 이 정도도 못하냐’며 화를 냈다. 그런데 문제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공교롭게 그 직후에 성 관련 2차 가해 실태에 대한 전군 전수조사가 벌어졌다. 올해 성추행 공군 부사관 사망사건이 워낙 커서 그 후속 조치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피해자가 자신의 사과 요구를 중지시킨 상사를 2차 가해자로 지목했고, 그 상사는 징계위에 회부돼 서면 경고를 받았다.” (불법을 막았는데 왜 징계를 받나?) “해당 상사가 너무 황당해서 피해자의 사적 제재 행위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더니 위에서 ‘그건 불문에 부친다’고 했다. 공군, 해군에서 2명이 죽은 뒤다. 피해자의 잘못을 문제 삼았다가 만에 하나라도 또 무슨 일이 벌어지면 정말 큰일이 나니까 그냥 넘어간 거다. 군 내부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서 이제는 문제가 있어도 아무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 ―일반 장교야 조직논리 때문에 문제를 지적할 수 없다고 해도 법무관은 그럴 필요가 없지 않나. “예전에는 법무관들이 기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진급은 당연히 신경도 안 썼고. 그런데 요즘은 변호사 시장이 어렵다 보니까 웬만하면 안 나가려 하고, 안 나가려면 진급을 해야 한다. 계급 정년이 있으니까. 그러려면 인사고과가 좋아야 하는데 그걸 주는 사람이 지휘관이니 똑같아지는 거지….”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해마다 명절을 앞두고 빼놓지 않고 인터뷰 기사가 나는 분이 있습니다. 퇴계 이황 선생님의 17대 종손인 이치억 공주대 윤리교육과 교수지요. 네, 1000원 짜리 지폐에 나오시는 그 이황 선생님 맞습니다. 이황 선생님 제사상은 과일 몇 개에 전, 포 정도가 전부입니다. 명절 스트레스란 말이 나올 정도로 변질된 우리의 제사 모습과는 많이 다르지요. 오죽하면 몇 년 전에는 한 여대생이 30여 년간 수십 명 친인척의 명절 뒤치다꺼리를 도맡아온 어머니를 위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명절 폐지를 간청합니다’란 글까지 올렸겠습니까. 재작년 추석을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이 교수는 “주자가례에도 ‘홍동백서 조율이시(紅東白西 棗栗梨枾)’란 말을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제사상에 통닭을 올린 적도 있다고 합니다. 명절을 앞두고 언론이 이 교수를 찾는 것은 마음보다 형식에 더 치우친 우리 제사문화를 바꾸자는 취지지요.문득 코로나19 시대에 퇴계 선생 집안은 어떻게 제사를 지내고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코로나19로 ‘올해는 내려오지 않는 게 효도다’라는 플래카드까지 붙는 세상이니까요. 원래도 간소했지만 코로나는 역시 종가집의 제사도 바꿔놓았습니다. 올 설 제사도 평소에는 최소 20여명은 모였는데 3명 정도만 참석하고, 대신 화상회의 시스템인 ‘줌(zoom)’을 이용해 비대면 제사로 지냈다고 하더군요. 모였다가 병에 걸리면 그게 불효라는 생각 때문이지요.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 종류는 원래부터 간단했지만 코로나 시대에는 참석자가 적다보니 양도 확 줄었다고 합니다. 덩달아 그에게 쇄도했던 언론 인터뷰도 과거에 비해서는 많이 줄었다네요. 코로나19 때문에 안 내려가도 되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 명절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도 줄어서 굳이 그런 기사를 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겠지요. 아, 참고로 퇴계 선생 가문에서는 추석 때는 차례를 지내지 않고, 설 명절에만 차례를 지냅니다. 원래 아주 옛날에는 계절의 변화에 맞춰 지내는 사시제(四時祭)가 더 중요해서 돌아가신 날에 각각 맞춰 제사를 지내지 않고 사시제에 맞춰 함께 차례를 지냈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추석 차례 대신 중양절(음력 9월9일)에 시제를 지내는데, 중양절은 연휴가 아니다보니 매년 10월 셋째 주 일요일에 한다고 합니다. 코로나19로 많은 것이 바뀌고 있습니다만 관혼상제도 그런 부분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모임이 줄면 당연히 그로 인한 스트레스도 함께 줄 수밖에 없으니까요. 명절 스트레스 때문에 이혼까지 생각하는 며느리들이 만든 음식을 드시는 조상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증조할아버지 성함은 모르면서 제사상 홍동백서를 따지는 건 코미디지요. 우스개 소리입니다만, 저 자신도 간혹 차례를 지낼 때마다 ‘우리 증조할아버지 체하시는 거 아니야?’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며칠 전부터 음식 준비하고, 예법에 신경을 쓰는 것에 비하면 너무 빨리 수저를 거두니까요. 마음보다 형식에 더 신경을 쓴다는 반증이겠지요. 그럴 바에는 할아버지 생전의 사진이라도 한 장 꺼내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이 교수가 늘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제사는 미풍양속인데 그걸 지키기 위해서라도 제사가 변해야한다고요. 지키기 힘든 형식을 계속 유지하려다보면 가족간에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고 결국 ‘이럴 바엔 차라리 없애는 게 낫다’는 쪽으로 갈 것이라는 것이죠. 코로나 때문이라는 게 유쾌하지는 않습니다만, 제사가 간소화되고 그로인해 가족간의 갈등이 준다면 그 자체는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장례 문화도 코로나로 인해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감염 우려 때문에 과거와 달리 가족끼리만 치르는 경우가 많아졌으니까요. 슬픔을 나눈다는 취지는 아름답지만 솔직히 그동안 슬픔을 나누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회생활, 회사 생활을 위해 참석한 적이 더 많지 않았는지요. 한 때는 신문의 부고란에 망자가 자신의 이름이 아닌 누구의 부(父), 누구의 모(母)로 명기된 적도 있었으니까요. 장례식장에 즐비하게 늘어선 사람들과 화환이 망자가 아닌 그의 성공한 자식들 때문에 온 것이라면 그런 장례문화는 바뀌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이 교수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중학생인 장남은 퇴계 이황 선생님의 18대 종손이 되겠지요. 당시 인터뷰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엉겁결에 “아…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었지요. 2년 전이니까 코로나가 발생하기 한 참 전인데 이 교수는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르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문하더군요. 퇴계 이황 선생님의 18대 종손이 결혼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세상이 온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 제사 문화가 바람직하게 바뀌었다는 바로미터가 아닐 런지요.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오죽하면 원조받은 돈의 절반만 제대로 썼어도 카불은 두바이가 됐을 거란 말이 나왔을까. 미국이 국익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을 버렸다는 비난도 있지만, 지켜주려야 지켜줄 수 없을 정도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면…. 진기훈 전 주아프간 대사는 “20년간 그 많은 돈을 지원받고도 작은 공장 하나 없을 정도로 아프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2015년 10월∼2018년 1월 아프간 대사, 이후 지난해 말까지 인접한 투르크메니스탄 대사를 지내며 아프간이 곪아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거두절미하고, 얼마나 부패했던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 때 미국에서 특별검사가 와서 지원한 돈과 물자가 제대로 집행되는지 감사한 적이 있다. 그런데 주유소 하나 짓는 데 통상 드는 비용의 140배를 빼먹었다고 하더라. 주유소 140개 지을 돈으로 한 개 지은 거지. 고스트 폴리스(ghost police)라고는 들어봤나?” (군인의 태반이 유령군인이라고 하던데 경찰도 그런가.) “아이고, 경찰이 더하다. 우리 같은 경찰이라기보다는 준군인에 가까운데, 아프간 사람들은 군인은 전방에서 싸우는 사람, 경찰은 후방에서 싸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탈레반과 싸운다는 명목으로 엄청난 지원을 받았는데 거의 다 허투루 쓴 거지. 내무부 차관이 만날 때마다 어떻게 하면 경찰개혁을 할 수 있냐고 고민을 토로할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가 잘 모르는 부분인데… 국제사회의 엄청난 원조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국민 중에는 원조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등록된 군인 30만 명 중 25만 명이 유령군인이라고 한다. ―미국이 지원한 돈만 2조 달러가 넘는데 못 느낀다니…. “미국이 그러더라. 아무리 지원해줘도 아프간 중앙은행에 달러가 안 쌓인다고. 예를 들면 국제기금에서 들어온 돈으로 월급을 주는데 그걸 자루에 넣어 인출한 뒤 외국으로 보낸다. 돈이 다시 은행으로 돌아와야 그 돈으로 공장도 만들고 산업을 일으킬 텐데 다 증발해 없어지는 거다. 아프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철도도, 고속도로도, 기업도…. 수도에 중앙역이 없으니까. 그리고 원조 방식도 구조적으로 누수가 많을 수밖에 없다.” ―중간에서 떼먹는 경우가 많은가. “워낙 위험한 곳이다 보니 각 나라가 국제기구로 돈과 물자를 보내면, 국제기구는 그걸 아프간 현지 NGO로 내려보내고, NGO가 집행하는 방식으로 원조가 이뤄진다. 그러다 보니 아래에서 새는 게 굉장히 많다.” (국제기구에서 모니터링을 안 하나.) “너무 위험해서 현장까지 직접 가서 확인하는 게 쉽지 않다. 그리고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국제사회도 그렇게 철저하게 모니터링을 하려고 하지는 않더라.” (우리도 20년간 1조 원이 넘게 지원했는데….) “나름대로 확인해 보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 우리 국민 세금이니까 당연히 확인할 권리도 있고. 그런데 각 나라가 지원한 돈을 합쳐서 주다 보니 우리 돈만 어떻게 쓰였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 현장에 가본 적도 있지만 그 정도로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아프간 정부 고위층은 20년 동안 뭘 한 건가. 탈레반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죽는 게 자신들인 걸 모를 리가 없지 않나. “보면서도 안타까웠던 게… 장관이나 고위 관료들을 만나 보면 의식 수준이 받쳐 주지 못했다. 힘들고 어려워도 어쨌든 작은 공장이라도 만들어 스스로 먹고살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냥 원조 받아 나눠 먹는 식이니까. 지방은 사병을 거느린 군벌들과 탈레반 때문에 행정력이 안 미친다. 행정력이 안 미치는데 원조를 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나라를 바꿔 보고 싶어 했지만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돈 싸들고 해외로 도망갔다고 욕을 먹던데….) “그런 뉴스가 나오긴 하던데 정확하게 확인된 건 아닌 것 같고… 대통령 한 사람 힘으로 상황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지 않나 싶다.” ※가니 대통령의 전임자인 하미드 카르자이 전 대통령은 재임 중 파키스탄 대통령에게 마약 단속을 요구했다가 “당신 동생이나 잘 단속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의 동생 별명이 ‘마약왕’이었다. ―당신은 국제사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했다. “자립할 수 있게 산업화 기반을 마련해 주는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그냥 밥을 먹여주는 식이 많았으니까. 미국도 엄청난 돈을 퍼부었지만 군사 부분을 제외하면 주로 민주주의 보급, 인권, 여성의 지위 향상 이런 분야에 지원을 많이 했다.” (필요한 지원 아닌가?) “중요한 분야지만 먼저 먹고사는 것부터 해결하는 게 순서 아닌가. 아프간 여성들의 처지가 워낙 참혹하다 보니 여성 인권도 중요하고, 민주주의를 보급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걸 넘어서는 뭔가를 했어야 했는데 그걸 못했다. 그래서 미국에 물어봤다. 너희들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이래야 워싱턴에서 먹힌다’고 하더라. 그래야 사인을 받을 수 있다고….” ―혹시 연락되는 아프간 고위층이 있나. “얼마 전 친하게 지냈던 여성 국회의원이 비서를 통해 메일을 보냈다. 지금 카불에 숨어 있는데 탈출하는 걸 도와달라고…. 국회의원 교류 프로그램으로 한국에도 왔던 사람이다. 안타깝기는 한데 내가 어떻게 해줄 방법이 없어서 일단 파키스탄으로 피신한 뒤에 연락하라고 했다. 아프간 사람들은 파키스탄에 뭔가 하나씩은 끈이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로 오는 방문 비자 정도는 알아봐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재직 시 알던 다른 고위층 인사들에게도 전화를 해봤는데 신호는 가는데 받지는 않았다.” (우리는 전투병을 파병한 것도 아니고 원조만 했는데 왜 우리를 도운 현지인들까지 목숨이 위험한 건가.) “내가 있을 때도 요리사, 운전기사, 비서 등 대사관에서 일하는 아프간 직원들은 늘 협박 전화를 받았다. 외세에 부역했으니 가만 두지 않겠다는 거지. 미국과 가까운 나라는 더 그렇게 여긴다.” ―우리 대사관에서 6월 20일까지 우리 국민은 모두 철수해 달라고 공지를 했는데 왜 아프간 협력자들은 두 달 후에야 데리고 들어온 건가. “지금 상황은 나도 잘 모르는데… 내가 있을 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철수하는 매뉴얼은 있었지만 협력자들까지 단계적으로 어떻게 대피시킨다는 계획은 없었다.” (협박까지 받는 걸 안다고 하지 않았나.)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갑자기 붕괴될 거라 예상하지는 못했다. 미국이 탈레반과 협상해 어느 정도 평화가 보장되는 상태는 만들어 놓고 나갈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 협력자들까지 어떻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못한 거지. 내 입으로 현지 직원들에게 한국은 전투도 안 하고 원조만 했으니 탈레반이 들어와도 당신들은 안전할 거라고 말했으니까.” ―대사관 직원들은 어떻게 생활을 했나. 외출도 힘들었을 것 같은데…. “우리를 직접 대상으로 한 테러는 없지만 묻지 마 테러를 당할 수 있어 외출은 거의 안 한다. 갑자기 옆에서 폭탄 조끼를 입은 사람이 터지거나, 양 몸통에 폭탄을 감은 뒤 터뜨리는 일이 종종 있으니까. 미 대사관에서 주재하는 회의나 외부 행사에 참석하는 정도가 전부다. 사실 갈 데도 없다. 일본 대사는 허리띠에 여권하고 3000달러를 차고 있더라. 외부에 있다가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바로 공항으로 가라는 거지. 대사관 외부는 아프간 경호업체와 경찰이 경비를 서고, 내부는 무장한 한국 민간경호회사가 지켰다.” (무장? 테러범을 가스총으로 막을 수는 없을 텐데….) “파병됐던 오쉬노 부대원 20여 명이 잠시 대사관을 지킨 적이 있는데 철수하면서 두고 간 총과 실탄이 있었다.” ―군대가 총과 실탄을 두고 갔다는 건가. “군용기가 아니라 민항기로 귀국하기 때문에 총기 반입이 안 돼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 내가 부임하니까 그 상태였다. 대사관 경비를 위해서는 무기가 필요한데 한국에서 총을 가져올 수도 없고, 현지에서 사려면 너무 비싸서 감당이 안 됐다. 그래서 국방부, 외교부, 경찰청 등과 협의해서 그 총을 경호회사에 무상 임대하는 방식으로 제공했다.” (로켓 포탄은 어떻게 대비하나.) “한 달에 한두 번은 늘 대피 경보가 울렸다. 미국이 카불 상공에 레이다가 설치된 대형 풍선을 띄운 게 있다. 그걸로 로켓 발사를 파악해 각 대사관에 경보해 준다. 그러면 지하실로 대피하는 거지. 그런데 경보음이 울리면 우리나 다른 나라 대사관에서 더 겁냈다.” (우리에게 쏘는 건 아닐텐데….) “우리랑 미국 대사관은 200m 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다. 그런데 탈레반의 로켓 거치대가 정교하지 않아서 늘 엉뚱한 데 떨어진다. 일본 대사관 유리창에 맞았는데 방탄유리라 뚫지는 못하고 마당에 떨어진 적도 있다.” (미국·일본대사관 유리창은 방탄인가?) “방탄이다.” (우리도?) “우리는 아니고….”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