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일제강점기 민족의 앞날이 보이지 않는 엄혹한 현실에서 선열들은 독립의 깃발을 치켜들고 대한이 ‘임금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가 됐음을 전 세계에 선언하며 임시정부를 세웠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와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회장 임재경)는 임정 수립 101주년 기념일(11일)을 하루 앞둔 10일 오후 학술회의 ‘동아시아 역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개최했다. 학술회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청중 없이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려 유튜브로 생중계됐다. 이날 학술회의는 임정과 한국 독립운동이 동아시아 각국의 근현대사에 미친 영향과 여러 나라의 임정에 대한 인식을 조명했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기조발제 ‘20세기 초 동아시아 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수많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 나라의 혁명운동에 목숨을 내던졌다”면서 “보편주의에 입각한 수평적 국제연대를 일상적 과제로 제기한 것이야말로 한국 독립운동의 특징”이라고 밝혔다. 잊히다시피 했던 한국과 베트남 독립운동의 연대를 밝힌 발표도 나왔다. 윤대영 서강대 책임연구원은 발표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베트남 근현대사’에서 각각 일본과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양국 독립운동가들의 연대를 살폈다. 발표문에 따르면 임정이 설치한 파리위원부는 1919, 20년 파리에서 베트남 독립을 호소하는 혁명가 호찌민(1890∼1969)의 선전 활동을 도왔다. 김원봉(1898∼1958)은 1925년 반석(潘石)이라는 베트남 혁명가의 도움을 받아 인도차이나에서 귀국하던 전 조선통감부 부통감 야마가타 이사부로(1857∼1927)의 처단을 시도했다. 국내 언론도 베트남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을 환기했다. 동아일보는 1924년 6월 베트남인 팜홍타이(범홍태·范鴻泰)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 메를랭에게 폭탄을 투척한 일을 여러 차례 보도했다. 그해 7월 7일에는 팜홍타이의 이력과 사진을 유서와 함께 공개하며 “비분 장쾌한 말”이라고 평했다. “안남(베트남)의 민족이 세계 위에 완전히 살게 된다면 구천의 아래에서도 감사히 생각하겠노라”라고 쓰인 이 유서는 그의 한국인 동지 서흥아(徐興亞)가 공개했다. 1925년에는 베트남 독립군 1개 사단이 중월(中越) 국경을 돌파해 하노이를 습격한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조덕진이 동아일보에 기고한 것이었다. 이 밖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근현대사’(한상도 건국대 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일본 근현대사’(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등의 주제 발표도 이어졌다. 정부는 11일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독립공원에서 제101주년 임정 수립 기념식과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기공식을 연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곤봉 엇개(어깨) 맞다” “깡패에 다리 부상 7일 치료” “머리 터지다” “천일백화점 근처에서 깡패의 몽둥이로 후두부를 맞고 失神(실신)”…. 1960년 4·19혁명 하루 전인 4월 18일 ‘4·18 고려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부상한 학생들의 명단(초안)에 나오는 표현이다. 학과와 학년, 번호, 이름, 장소, 맞은 정도 등 항목에 따라 다양한 필체와 필기도구로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작성돼 있다.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4·19혁명 참여 고려대 학생 부상자 명단’을 비롯한 ‘4·19혁명 문화유산’ 7건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 추진한다고 9일 밝혔다. ‘연세대 4월혁명 연구반 수집 자료’도 등록 대상에 포함됐다. 4·19혁명 당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생들이 주축이 된 ‘4월혁명 연구반’이 참여자와 목격자, 주민을 조사해 작성한 구술기록 자료다. 서울뿐 아니라 대구 2·28, 마산 3·15 시위 참여자까지 조사했다. 비상계엄령하에 각종 포고문 등도 수집돼 있다. 문화재청은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촬영한 김주열 열사 사진 △자유당 부정선거 자료 △이승만 대통령 사임서 △마산 지역 학생 일기 △서울 동성고 학생들의 시위 참여 경위가 기술된 이병태 학생의 일기 등도 등록 대상에 포함했다. 문화재청은 “지방자치단체와 관계 기관의 추천을 받아 관련 유물 179건을 찾았다”며 “민주화 문화유산이 국가등록문화재가 되는 것은 처음”이라고 밝혔다. 문화재위원회 심의 등을 거쳐 문화재가 되면 법적 보호와 관리의 대상이 되며, 보수·정비와 활용 사업 지원이 가능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곤봉 엇개(어깨) 맞다”, “깡패에 다리 부상 7일 치료”, “머리 터지다”, “천일백화점 근처에서 깡패의 몽둥이로 후두부를 맞고 失神(실신)”… 1960년 4·19혁명 하루 전인 4월 18일 ‘4·18 고려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부상한 학생들의 명단(초안)에 나오는 표현이다. 학과와 학년, 번호, 이름, 장소, 맞은 정도 등 항목에 따라 다양한 필체와 필기도구로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작성돼 있다.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4·19 혁명 참여 고려대 학생 부상자 명단’을 비롯한 ‘4·19 혁명 문화유산’ 7건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 추진한다고 9일 밝혔다. ‘연세대 4월혁명 연구반 수집 자료’도 등록 대상에 포함됐다. 4·19혁명 당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생들이 주축이 된 ‘4월혁명 연구반’이 참여자와 목격자, 주민을 조사해 작성한 구술기록 자료다. 이 가운데 ‘데모사항조사서’에는 참여 동기와 시간, 장소, 충돌 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됐다. 서울뿐 아니라 대구 2·28, 마산 3·15 시위 참여자까지 조사했다. 비상계엄령 하에 각종 포고문 등도 수집돼 있다. 문화재청은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촬영한 김주열 열사 사진 △자유당 부정선거 자료 △이승만 대통령 사임서 △마산지역 학생 일기 △서울 동성고 학생들의 시위 참여 경위가 기술된 이병태 학생의 일기 등도 등록 대상에 포함했다. 문화재청은 “지방자치단체와 관계 기관의 추천을 받아 관련 유물 179건을 찾았다”며 “민주화 문화유산이 국가등록문화재가 되는 것은 처음”이라고 밝혔다. 문화재위원회 심의 등을 거쳐 문화재가 되면 법적 보호와 관리의 대상이 되며, 보수·정비와 활용 사업 지원이 가능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푸른 하늘에 태양이 빛나고 드넓은 대지에 맑은 바람이 불도다. 산하엔 초목이 무성하고 온갖 꽃들이 만발하며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힘차게 뛰어오르니 천하 만물에 생명과 광명이 충만하도다. 동방의 무궁화동산, 2000만 조선 민중은 새로운 공기에서 호흡하며 새로운 빛을 목도하노라. 이는 실로 살아 있음이고 부활이다. 혼신의 힘으로 저 먼 길을 가고자 함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의 발달이다. 세계 인류의 운명은 지금 일대 전환점을 맞았도다. 차르 황제나 카이저 황제 같은 구시대의 발상은 떠나가고, 자본의 탐욕은 신성한 노동의 도전에 직면했으며, 무력에 기초한 침략주의 제국주의는 평화 정의 인도주의에 길을 내주는 형국이다. 인민 노동 정의에서 비롯된 자유정치 문화창조 민족연맹이 우리 앞에 신세계를 펼쳐 보이도다. 우리는 몽상가가 아니라,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찌 하늘과 이상만 바라보고 이 땅과 현실을 망각하리오. 세계의 대세를 있는 그대로 논하고자 함이니, 한쪽엔 새로운 세력이 있고 또 한쪽엔 이와 대립하는 구세력이 있어 서로 투쟁하는 형국이 아닐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 해방과 개혁의 운동이 있는가 하면 이를 억압하려는 움직임이 분명 존재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아, 신구의 충돌과 진보 보수의 다툼이 어찌 이 시대에만 있는 일일까. 그건 인류 역사 어느 시대에도 늘 있어 온 일이었다. 추위가 가고 볕이 다시 드니, 쌓인 눈과 단단한 얼음이 녹고 온갖 만물이 하나둘 다시 살아나도다. 이는 분명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 의연한 봄의 전령을 누가 감히 거부할 것인가. 신구의 충돌은 그 자체로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북소리를 울려 옛 시대의 몰락을 알리는 것이다. 저 도도한 흐름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새로운 시대가 분명 승리할 것이다. 물론, 이미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새로운 세계가 벌써 전개되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지만, 투쟁과 진통을 거쳐 저 멀리 수평선에 신문명의 웅대한 한 자락과 신시대의 서광 한 줄기가 보이기 시작하도다. 자 보라, 서광 한 자락을 위해 수천만 민중이 하나같이 모두 몸부림치고 있음을. 이러한 시대에 동아일보가 태어났도다. 아, 동아일보 창간을 어찌 우연이라 할 것인가. 돌아보건대 한일강제병합이 일어난 지 10년, 그 사이에 조선 민중은 일대 악몽의 늪에 빠져야 했다. 조선 민중은 그 또한 사람인지라 어찌 사상과 희망이 없었을까만 그것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 또한 사회인지라 어찌 집단적 의사 표현의 충동이 없었을까만 능히 이뤄내지 못했다. 그 또한 민족인지라 어찌 고유한 문명의 특장과 생명의 미묘함이 없었을까만 그것을 드러내지 못했다. 부르짖고 싶어도 부르짖을 수 없었고, 달음질치고 싶어도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지난 10년, 2000만 조선 민중은 그렇게 악몽에 빠져 있었다. 그렇기에 그곳은 바로 사지(死地)였고 함정이었다. 자유가 사라져 발전을 기약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조선 민중은 실로 고통스러웠다. 혹은 울고 혹은 노하였다. 그 분노, 어찌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만의 분노일 것인가. 조선 민중의 삶은 늘 이 땅의 역사와 함께했으니, 4000년 역사적 생명까지 모두 분개하도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여 언론의 자유가 다소 용인된다고 하니, 조선 민중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그것을 전달해주는 친구를 열망하고 기대하고 있다. 이에 동아일보가 세상에 태어났으니 그것을 어찌 우연이라 말할 수 있으리오. 실로 민주의 열망과 시대의 동력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에 그 뜻을 선명하게 밝힘으로써 창간사를 대신하고자 한다.1.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소수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특권계급의 기관이 아니라 2000만 민중 전체의 기관으로 자임한다. 그 민중의 의사와 이상과 목표와 희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보도할 것을 약속하노라.2.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이는 국체(國體)나 정체(政體)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삶의 원리이자 정신을 의미한다. 무력을 배척하고 개인의 인격에 기초한 권리와 의미를 주장한다. 따라서 국내 정치에서는 자유주의요, 국제 정치에서는 연맹주의다. 사회생활에서는 평등주의요, 경제에서는 노동 본위의 협조주의다. 특히 동아시아에 있어선 각 민족의 권리를 인정하며 친목과 단결을 추구한다. 전 세계에 있어서는 정의와 인도를 승인하고 평화를 추구한다. 다시 말하건대, 폭력과 무력을 거부하고 양심을 존중함으로써 삶의 다양한 관계를 규율코자 함이니, 옛 왕도의 정신이 바로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만천하 백성들의 경복(慶福)과 광영을 위하여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3.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이는 개인이나 사회의 삶을 충실하고 풍부하게 하기 위함이다. 곧 부를 증진하고, 정치를 완성하고, 도덕을 순수하게 하고, 종교를 풍요롭게 하고, 과학을 발전시키고, 철학과 예술을 심원하고 오묘하게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조선 민중이 세계 문명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하고 삼천리강산을 문화의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니, 이는 곧 우리 조선 민족의 사명이요 생존의 가치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동아일보는 태양의 무궁한 광명과 우주의 무한한 생명을 삼천리강산, 2000만 민중 속에서 실현하고 나아가 자유의 발달에 이르고자 한다. 그리하여 1) 조선 민중이 각자의 인성과 천명을 바르게 하고, 서로 화합하는 문화를 수립하도록 하고 2) 조선 민중이 자신의 위치에서 차별 없이 일대 낙원을 건설하는 데 힘을 모으도록 하는 것이 동아일보 창간의 근본적인 취지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앞날은 심히 험난하도다. 그 운명을 과연 누가 예측할 것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오직 조선 민중의 동지로서, 그들과 더불어 생사 진퇴를 함께하기를 약속하노라. ▼ “창간호 받아쥔 서울시민 ‘동아일보 만세’ 외쳐” ▼사장 지낸 국어학자 이희승 회고“동아일보야, 너는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이다. 권리보호자이다. 문화소개자이다. 조선 민중의 기관수며 우편배달부며….” 동아일보 창간호 1면에 창간사와 함께 실린 논설 ‘아보(我報)의 본분과 책임’의 한 대목이다. 필자는 ‘황성신문’을 창간해 독립정신을 고취했던 언론인 석농 유근(1861∼1921). ‘동아일보’라는 제호도 그가 제안했다. 동아일보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던 양기탁(1871∼1938)과 유근을 창간 편집감독(고문)으로 모셔 조선 말기 민간신문의 애국계몽 전통을 이었다. 3·1운동의 흥분이 가시지 않았던 1920년 민족의 자강 없이 독립은 없다는 선각자들이 민족의 구심점으로 동아일보를 탄생시켰다. 3·1운동 1주년이 되는 날 창간호를 내고자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4월 1일이 창간일이 됐다. 3·1운동 민족대표로 투옥된 인사들이 나중에 동아일보에서 일할 수 있도록 창간 당시 임직원의 일부 자리를 비워 뒀다. 대표적 인물이 고하 송진우(1890∼1945)다. 그는 출옥 이듬해인 1921년 3대 사장으로 합류했다. 창간 당시 기자들은 당대의 준재(俊才)들이었다. 장덕준 기자(1892∼1920)는 간도참변을 취재하러 떠났다가 일제에 의해 피살된 독립운동가다. 한기악 기자(1898∼1941)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 막 귀국한 길이었다. 일본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려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염상섭 기자(1897∼1963)는 오사카에서 본보 기자로 발령됐다. 한국 언론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유학파 김동성(1890∼1969),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1886∼1965) 등도 창간 기자였다. 전국 팔도의 민심을 하나로 모은다는 취지에서 지역을 돌아다니며 주금(株金)을 모집했으나 가뭄과 불황으로 매우 어려웠다. 그 난관을 헤치고 발기인으로 최준(1884∼1970), 안희제(1885∼1943)를 비롯한 각 도의 애국인사와 유지를 망라했다. 사옥은 중앙학교 교사(校舍)로 쓰였던 서울 종로구 화동 138번지. 언론인 설의식(1900∼1954)은 “창문은 깨지고 벽은 허물어져 바람과 눈을 막지 못했고, 기와가 떨어져나가 더위를 피할 수 없던 집”이라고 회고했다. 동아일보 설립 신청 서류를 작성했고, 나중에 사장을 지낸 국어학자 이희승(1896∼1989)은 “동아일보 창간호를 받아 쥔 서울시민 가운데는 거리를 뛰어다니며 ‘동아일보 만세’를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고 회고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여자의 활동을 요구하는 이때에, 특히 운동열이 왕성한 이때에 일차의 대회가 없었음은 우리의 수치다. 이런 때에 본사 주최의 이번 대회는 실로 절처(絶處)의 봉생(逢生).” 동아일보는 1923년 7월 5일자로 제1회 전국여자연식정구대회에 대한 기사를 게재하면서 대회 관중이 3만 명에 가까웠다고 소개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30만 명이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비상한 관심 속에 열기는 뜨거웠다. 당시는 국내에 여자 운동 대회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해괴한 짓을 벌인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가족을 제외한 남성 관객은 입장 불가’라는 조건을 내건 뒤에야 겨우 대회를 열 수 있었다. 이 대회 개최 목적은 흥행이 아니었다.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한 사회적 캠페인이었다. 동아일보는 대회 개막에 앞서 1923년 6월 14일자로 ‘운동의 권장은 여자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방 안에만 있는 시간이 많아 허약한 조선 여자의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대회 개막일인 1923년 6월 30일자 사설을 통해선 ‘남자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과 직업의 기회 균등을 주장(한다)’이라고 밝혔다. 이 대회는 올해까지 98년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국내에서 제일 오래된 단일 종목 대회가 바로 동아일보기 전국 정구(소프트테니스) 대회다. 동아일보기는 2006년에야 남자 선수 참가를 허용했다. 여성들의 활동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한 동아일보의 노력은 다방면으로 이어졌다. “남녀는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습니다. 우리 조선의 여성이 남자의 지위와 대등하게 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살림살이다운 살림살이를 하게 될 것입니다!” 1925년 3월 20일 서울 천도교 기념회관에서 열린 ‘전조선여자웅변대회’의 첫 연설 ‘남녀평등을 부르짖노라’의 한 대목이다. 연사는 평양에서 온 김화진 여사. 동아일보가 주최한 최초의 전조선여자웅변대회에는 전국에서 6개 단체와 6개 학교의 대표가 참가했다. 개막 1시간 전에 만원을 이뤘고 회관에 들어오지 못한 이만 3000명이 넘었다. 전례 없이 청중 투표로 결정된 우승자는 평양의 여자엡윗청년회(단체부), 평양의 정미유치사범과 대표(학생부)였다. 당시 동아일보 사설(3월 19일자)은 “세계적 영향을 수(受)하야 여자의 언행을 일종 호기심으로 관망하던 보수적 사상은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대회 개최 취지를 밝혔다. 일제의 수탈에 항거한 여성들의 운동도 자세히 보도하며 힘을 실었다. 1931년 5월에는 평양의 고무공장 여성 노동자 강주룡이 을밀대 위에 올라 파업을 벌였다는 내용을 이틀에 걸쳐 게재했고, 해녀들의 시위도 지면에 여러 차례 다뤘다.황규인 kini@donga.com·조종엽 기자}

《암울한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 4월 1일. 청년정신을 바탕으로 태어난 동아일보는 문화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던 시절 문화주의를 사시(社是)의 하나로 내걸고 창간했습니다. 민족정신을 고취한 신춘문예와 마라톤대회 등을 처음으로 만들었고, 여성의 외부 활동을 금기시하던 시절 여자정구대회를 창설해 인습에 도전했습니다. 음악·무용·국악콩쿠르와 연극상을 만들어 기초 예술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습니다. 수영 사이클 빙상 등 비인기 종목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문화강국이 되기까지 국민과 함께 발걸음을 내디딘 동아일보는 다음 100년에도 청년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지난 100년의 혁신과 도전을 돌이켜 봅니다.》“용장한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서서히 뜨기 시작하여… 공중으로 웅장하게 날아오르니 수만 군중의 환호하는 소리는 여의도 넓은 마당이 떠나가는 듯하고….” 1922년 12월 10일, ‘기다리던 날’. 동아일보가 다음 날 신문에 1개 면을 할애해 ‘반도의 천공에 최초의 환희, 혹한을 정복한 동포의 열성’이라고 보도한 ‘이날’은 한국인이 한반도 하늘을 처음으로 난 날이었다. 주인공은 안창남(1901∼1930·건국훈장애국장). 그는 기체에 한반도 모양을 그려 넣은 ‘금강호(金剛號)’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해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돈 뒤 묘기 비행을 3차례 선보였다. 혹한의 날씨에도 전국에서 임시열차 등을 타고 모여든 관중 약 5만 명이 이 광경을 지켜보며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날의 비행은 조선의 미래와 희망, 그 자체였다. 일제의 지배를 받으며 침울해 있던 조선 청년들의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안창남의 도전은 동아일보의 도전이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일본에서 민간항공대회에 입상한 안창남이 고국 방문 비행을 할 수 있도록 1922년 10월 ‘안창남 고국방문비행후원회’를 조직하고 사무소를 동아일보사 사옥에 마련했다. 비행에 앞서 사설로 “안창남 군의 1회 비행이…조선인도 노력하면 이와 같이 될 것이라 하는…교훈으로 오인(吾人)의 두뇌에 인각(印刻)할 것이 아닌가”라고 분위기를 띄웠다. 오늘날의 진취적인 한국인상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동아일보 역시 이처럼 민족과 함께 끊임없는 혁신과 도전에 나섰다. 이는 29세의 창립자, 27세의 편집국장, 26세의 정치부장과 20대 기자들이 오늘날 스타트업처럼 젊은 도전정신으로 창간한 신문이었기에 가능했다. 상당한 비용과 노력이 들었음에도 1920년 창간한 민간신문 3개지 가운데 동아일보만 유일하게 사진기자를 도입한 것도 새로운 실험의 일환이었다. 그 결과는 창간 직후 ‘우리 손으로 찍은 최초의 백두산 사진’으로 이어졌다. 반만년 동안 말과 글로만 전해지던 백두산 천지의 모습이 1921년 8월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한국인의 뇌리에 사진으로 박혔다. 본보 창간부터 합류한 사진반 야마하나 기자(1890∼1935)와 사회부 민태원 기자(1894∼1935)를 비롯한 특파원들이 촬영의 주역이었다. 본보는 8월 21일부터 18회에 걸쳐 등반 리포트를 연재하는 한편 ‘백두산 강연회’를 열고 환등(幻燈)으로 실경 사진을 공개했다. 3·1운동 민족대표들의 재판 과정을 찍은 화보도 본보를 통해 독자에게 전해졌다. 일제강점기 언론 출판 문화면에서도 ‘최초’의 도전과 혁신을 이어갔다. 1929년에는 최초로 서체를 민간 공모했다. 구약성경 개역에도 참여했던 이원모(1875∼?)의 서체가 당선됐고, 본보는 4년간의 실험 끝에 1933년 4만여 종의 독자적인 명조체와 고딕체 활자를 개발했다. 이 서체를 본보는 6·25전쟁 전까지 썼는데, 국내 출판물뿐 아니라 북한과 일본, 미국에서도 1958년까지 폭넓게 사용됐다. 지방판 발행도 우리 신문 역사상 동아일보가 처음(1924년)이다. 이 같은 혁신과 도전은 3대 사시(社是) 가운데 “조선 민중으로 하여금 세계 문명에 공헌케 하며 조선 강산으로 하여금 문화의 낙원이 되게 함”인 문화주의에 따른 것이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6·25전쟁 70주년과 4·19혁명 60주년을 맞아 관련 문화재를 발굴하고 정비하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11일 발표한 ‘2020년 업무계획’에서 6·25전쟁과 4·19혁명 관련 기록물 200여 건을 목록으로 만들고 참전용사 유물 등 10여 건을 문화재로 등록 지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관리의 사각지대에 있던 비지정문화재까지 보호하기 위해 문화재 전수조사도 실시한다. 지상에 노출돼 훼손, 멸실 우려가 있는 건조물이나 역사유적을 우선 조사한다. 올해는 대구경북 강원 지역이 대상이다. 국내 유네스코 세계유산, 인류무형유산을 거점으로 내외국인의 관광을 확대하는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도 벌인다. 산사와 서원 왕릉 역사유적지구 등을 ‘문화유산 방문코스’로 선정하고 정보를 제공하며 공연 전시 등의 행사를 연계한다. 문화재 구역의 위치와 범위 등이 담긴 문화재공간정보 원본 자료 15만 건은 전면 공개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한다. 그동안은 신청자에게만 공개했다. 문화재 보존과 문화유산 콘텐츠 개발에 첨단기술을 적극 활용하게 된다. 문화재청은 “문화유산 관리체계를 혁신하고 문화재 산업을 육성하는 한편으로 국민이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문화재 관련 불편은 줄여 나가겠다”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일본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낸 한국 영화가 됐다. CJ ENM은 ‘기생충’의 일본 매출이 8일 기준으로 40억4716만 엔(약 477억 원)을 기록했다고 9일 밝혔다. 이는 2005년 일본 박스오피스 정상에 오르며 한국 영화 수익 1위였던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매출(30억 엔)을 훌쩍 뛰어넘은 수치다. 지난해 12월 27일 일본에서 개봉한 ‘기생충’은 개봉 초기 박스오피스 5위였다가 지난달 미국 아카데미상을 휩쓴 뒤 입소문을 타고 상영관이 확대되며 순위가 뛰었다. 일본 영화 전문 사이트 에이가닷컴에 따르면 ‘기생충’은 지난 주말(7, 8일) 박스오피스 3위를 차지했다. ‘기생충’은 영국에서도 역대 외국어 영화 가운데 최고의 흥행 성적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달 7일(현지 시간) 개봉한 뒤 이달 6일까지 1108만8149파운드(약 174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북미에서는 5281만 달러(약 634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는 리안(李安) 감독의 ‘와호장룡’(1억2810만 달러),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5720만 달러), 장이머우 감독의 ‘영웅’(5370만 달러)에 이어 역대 북미 외국어 영화 가운데 네 번째다. ‘기생충’의 전 세계 수입은 2억4590만 달러(약 2953억 원)로 집계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3·1운동 당시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는 2만1000장. 전국에서 벌어진 거족적 항일운동의 수요를 어떻게 감당했을까. ‘3·1 독립선언서 등사본’을 최근 연구 중인 김도형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은 “각 지역에서는 여러 조직을 통해 전달받은 독립선언서를 보고 이를 다시 등사해 배포하면서 만세 시위에 돌입했다”며 “3·1운동 확산에 크게 기여한 건 등사본 선언서”라고 밝혔다. “유(惟) 아(我) 민족은 세계의 대세에 조(照)하며 정의와 인도에 기하여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하여 최대의 결심과 최후의 성의(誠意)로써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노라.” 함경북도 성진군 만세시위에서 사용된 선언서의 첫머리다. 3·1독립선언서가 여러 단락에 걸쳐 서술한 내용이 압축돼 있다. 김 연구위원에 따르면 등사판 선언서는 경남 하동에서 사용한 것을 비롯해 이처럼 종이 한 장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든 요약본이 많았다. 만세시위 현장에서 읽고 바로 시위에 들어갈 수 있게 가능한 한 간략하게 만들었던 것. 최남선이 기초한 3·1독립선언서가 한문이 많이 섞여 시위 현장에서 대중이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다. 김 연구위원은 “‘세계개조’ ‘민족자결’ ‘정의·인도’ 같은 핵심 대목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등사판에 맞췄기에 선언서 종이의 크기가 작았던 것도 요약을 한 또 다른 이유다. 독립기념관이 소장한 한 등사판 선언서(정석해 제작)는 가로 32cm, 세로 24cm 정도다. 등사본 제작자는 등사판을 만든 경험이 있는 면서기, 학교 교원과 학생, 천도교·기독교 관계자 등이었다. 일제는 선언서를 등사해 배포하는 경우에도 민족대표와 마찬가지로 출판법 위반죄를 적용해 처벌했다. 소지만으로도 일제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었기에 남아 있는 등사판 선언서는 수량이 많지 않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81년 전 광란의 일제강점기 말 ‘연극인들의 마지막 고투’로 평가되는 동아일보 주최 ‘제2회 연극경연대회’ 팸플릿(사진)이 발견됐다. 서지학자이자 근대 문헌 수집가인 오영식 근대서지학회장은 “1939년 3월 개최된 이 대회 팸플릿을 최근 입수했다”며 9일 본보에 공개했다. 팸플릿은 표지를 포함해 6쪽으로 출품작 4편의 공연 일정(각 5회)과 줄거리, 제작진 명단 등이 실려 있다. 양승국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이날 본보와의 통화에서 “이 대회 팸플릿은 지금까지는 공개된 게 없었다”고 의의를 말했다. 팸플릿이 발견되면서 한국 연극사에서 이 대회가 갖는 의미가 새삼 주목된다. 일제가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직후인 당시는 전시총동원체제가 구축되면서 문화예술계를 더욱 압박하던 때였다. 전쟁을 선전하는 연극 ‘시국극(時局劇)’을 직접 제작한 조선총독부는 조선 지식인들이 도입한 서구적 근대극인 신극 운동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대표적 신극 단체인 ‘극예술연구회’는 활동을 중지해야 했다. 반면 일제가 허용한 ‘흥행극’은 성황을 이뤘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일보는 1938년 2월 신극계가 결집한 가운데 ‘종합예술의 정화인 연극의 대중화’를 목표로 제1회 연극경연대회를 주최했다. 공연장인 부민관(현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건물)은 연일 초만원을 이뤘다. 양 교수는 “신극이 힘들어지고 연극계가 일제의 ‘국민연극’으로 전환되던 시기에 전체 신극인이 참여해 신극을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이었다”고 의의를 평가했다. 특히 이듬해 열린 제2회 대회는 ‘우리의 연극예술을 창조하자’는 목표로 “이 땅 사람의 정서를 그린” 창작극만 참가하도록 했다. 1회와 달리 “번안, 각색은 불허”한 것. 근대 희곡의 명작으로 꼽히는 함세덕(1915∼1950)의 ‘동승’이 처음 소개된 것도 2회 대회다. 극예술연구회 후신 ‘극연좌’의 대회 참가작인 ‘도념’이 바로 ‘동승’이다. 이 대회는 일제의 한국어 말살 정책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으로 평가된다. 2회 대회를 앞두고 본보가 개최한 좌담회 ‘조선연극의 나아갈 방향’에서 참석자들은 일부 번역극의 대사가 “조선말답지 않다”며 되풀이해 부자연스러움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2013년 나온 논문 ‘동아일보사 주최 연극경연대회와 신극의 향방’(이민영, ‘한국극예술연구’ 42집)은 “대회 심사 후기 역시 조선어다운 자연스러움과 어조, 단어 선택 등을 지속적으로 강조했고, 이는 한국어 말살에 나선 일제의 정책과 전면 배치된다”며 “연극경연대회의 취지가 식민지 조선에 불어 닥치던 전쟁 분위기와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에 역행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또 “이 대회는 전시체제로 접어들던 1930년대 말 조선 신극계가 벌인 마지막 고투의 현장”이라고 덧붙였다. 2회 대회 심사 결과 ‘청어’를 상연한 ‘통천예우극장’이 단체상을 받았고 극연좌와 ‘중앙 무대’의 배우들이 개인연기상을 받았다. 신설된 희곡상은 ‘낭만좌’가 공연한 박향민 작 ‘상하(上下)의 집’이 받았다. ‘상하의 집’은 가난에 시달리다 연극을 포기할 지경에 이른 연극인들의 현실을 드러내며 식민지의 구조적 문제를 은밀히 드러냈다는 평가다. 1939년 3월 본보가 연재한 심사 후기에서 평론가 임화(1908∼1953)는 이 작품 등을 두고 “절망적인 각본이 나온 건 이 시대 인텔리의 운명인 것을 작자가 느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된다”고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대사헌을 지낸 권상일(1679∼1759)은 19세 때부터 죽기 전까지 일기를 썼다. 1754년 2월 일기에는 과거를 못 보게 된 조카 권수의 아쉬운 사연도 기록했다. 오랜만에 특별 과거시험이 경상도에서만 열렸는데 권수의 아버지인 현감 권상룡이 시험관으로 발탁된 것. 조선은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아버지가 감독관으로 있는 시험장에서 자식이 시험 보는 걸 법으로 금지했다. 권수는 현감이던 아버지를 원망했을까? 한국국학진흥원이 번역한 옛 선비들의 일기 20종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골라 설명했다. 조선 사람들의 일상 속 희로애락과 중앙 정치권력이 향촌에 미친 영향 등을 볼 수 있다. 인조반정 뒤 경상도 안동에서도 향회를 열고 축출된 대북파와 관련된 이들을 동네에서 내쫓으며 집을 헐어버리는 광경도 담겼다. 일기 원문이 일부라도 함께 실리지 않은 점은 살짝 아쉽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700년 가까이 된 고려 말 불경과 과거합격증 등이 잇따라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문화재청은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 찍힌 홍패(紅牌·문과와 무과 합격증)와 고려 후기 간행한 불경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 1책, 조선 후기 백자 항아리 1점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3일 밝혔다. 홍패는 고려 말∼조선 초 활동한 문신 최광지가 1389년 문과에 급제해 받은 문서로 발급연월 위에 명나라 황제가 고려에 내린 고려 국새가 찍혀 있다. 고려시대 홍패는 이 외에도 6점이 있지만 국새가 찍힌 것은 이것뿐이다. 육조대사법보단경은 중국 선종(禪宗)의 제6대 조사인 당나라 혜능(638∼713)의 사상이 담긴 불경으로 1300년 강화 선원사에서 판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쇄한 것이다. 같은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가치가 높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경남 사천시 백천사가 소장하고 있다. 함께 보물로 지정 예고된 백자 항아리는 높이가 52.6cm에 이르는 대형으로 17세기 말∼18세기 초 관요(官窯·왕실용 도자기를 굽는 가마)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문화재는 예고 기간(30일)과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로 최종 지정된다. 앞서 문화재청은 충남 부여군 무량사 오층석탑 안에서 발견된 고려∼조선 초기 금동불상 4구와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 파손되지 않고 출토된 약 1500년 전 거북 장식 가야 도기 1건, 함경도 지역 요충지를 그린 조선시대 지도 ‘관북여지도’를 보물로 지정했다. 1971년 8월 오층석탑 해체 수리 중 탑신에서 발견된 무량사 금동불상은 고려 금동보살좌상 1구와 조선 초기 금동아미타여래삼존좌상 3구다. 문화재청은 “조각 기법이 우수하고 당시 불교 신앙의 모습을 드러내 역사 학술 예술적으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가야 도기는 1980년대 부산 복천동 11호분의 석실 서남쪽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출토된 한 쌍의 기대(器臺·그릇 받침)와 항아리다. 기대에 거북이 모양 토우(土偶)가 붙어 있는 것도 특징이다. 형태가 안정적이고 문양 표현이 세련돼 가야시대의 대표적 도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는 100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 인연은 때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했고, 사회에 희망을 북돋기도 했습니다. 여러 인물들이 돌이켜보는 지난날의 기억과 미래에 관한 당부를 ‘내 삶 속 동아일보’ 시리즈를 통해 만나봅니다.》“살렸어야 했는데….” 33년 전 그날을 기억하며 오연상 오연상내과 원장(63)은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1987년 1월 14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이미 숨이 끊어진 박종철 씨(당시 22세)에게 한 시간 가까이 심폐소생술을 했던 기억이었다. 당시 중앙대용산병원 전문의였던 오 원장이 대공분실에 부랴부랴 도착했을 때 박 씨는 이미 동공이 풀리고 맥박과 호흡이 끊겨 있었다. 오 원장은 16일 진료실을 찾아온 기자에게 자신이 목격한 진실대로 ‘물고문’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증언을 했다. 그의 증언은 다음 날 “좁은 수사실 바닥에 물기, 왕진 갔을 땐 숨져 있었다”는 동아일보 기사로 보도되며 박종철 열사의 진짜 사인(死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지난달 본보와 만난 오 원장은 당시 고문치사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동아일보를 보며 “심지어 어느 날에는 1면부터 마지막 면까지 거의 박종철 기사로 채워진 날도 있었다. 속으로 ‘내 일생에 이런 신문을 다 보는구나’라고 감탄했다”고 회고했다. ▼ “물고문 흔적 최선다해 증언… 東亞가 연일 가장 강력하게 보도” ▼ “이 방이었지….” 지난달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 5층 9호를 마주한 오 원장의 첫마디는 탄식이었다. 출구의 위치가 보이지 않는 건물의 좁고 긴 복도를 따라 오 원장의 기억도 3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가끔 꿈에서도 나와요, 처음 복도를 봤을 때의 인상이…. 맨 끝 창문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 말고는 온통 컴컴했거든요. 공포영화처럼 분위기가 음산했어요.” 1987년 1월 중앙대병원 내분비내과 전문의였던 오 원장은 연구실에서 응급실장의 급한 전화를 받았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학생이 상태가 안 좋다니, 서둘러 가 봐.”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말부터가 생소했다. 구급차를 타고 5분쯤 갔을까. 같이 탄 대공분실 형사가 말했다. “조사받던 학생이 갑자기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술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갈증이 난다고 물을 많이 먹더라.” 폭이 한 뼘도 안 되는 창문이 달린 조사실은 바닥이 온통 물바다였다. 심폐소생술을 하는 동안 바닥에 닿은 그의 가운에 흙탕물이 배었다. 한 시간 정도가 흘렀다. 오 원장은 이미 사망했다고 했지만 경찰은 병원 응급실에 데려갈 것을 요구했다. 형사들이 정신없이 시신을 옮기는 사이 오 원장은 대공분실 1층 사무실에서 병원에 전화해 몰래 “시신을 응급실로 들여보내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라 병원 응급실 앞에서 교수들이 팔짱을 끼고 “이미 사망했으니 영안실로 가는 게 맞다”며 시신의 진입을 막았다. 시신은 경찰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응급실로 들이면 사망 선고를 응급실에서 하게 되고 사망 장소가 대공분실이 아니라 병원이 됩니다. 많은 게(실체적 진실이) 희석되겠지요. 남영동의 형사도, 저도 그런 걸 예상했던 거지요. 이게 그나마 제가 한 일 중에는 잘한 일 같습니다.” 진실이 드러나는 데 대한 오 원장의 기여는 그뿐이 아니다. 16일 병원 진료실을 기자들이 찾아왔다. 오 원장 역시 직접 본 것이 아닌 이상 ‘물고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물’과 관련된 증언을 했다. 오 원장은 “동아일보 기자분이 질문을 주도하다시피 했다”라고 회고했다. 오 원장의 증언은 “호흡 곤란으로 사망한 것으로 판단됐으며 물을 많이 먹었다는 말을 조사관들로부터 들었다” “복부 팽만이 심했으며 폐에서 사망 시 들리는 수포음이 전체적으로 들렸다” “조사실 바닥에 물기” 등이었다. 이 내용은 17일 동아일보 지면에 그대로 실렸다. 이는 “신문 도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는 경찰의 주장을 뒤집는 것이었다. 본보의 전날(16일) 특종 기사로 박 열사의 죽음이 경찰의 고문 탓임이 드러났고, 오 원장의 증언에 따라 그 수법이 ‘물고문’인 것까지 뚜렷해졌다. 보도 뒤 그의 집과 병원에 “앞으로 재미없다” 등의 협박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오 원장은 검찰과 신길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은 뒤 잠시 몸을 피했다. 그동안 동아일보는 당국의 보도 통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1월 19일자에는 1면 톱부터 마지막 사회면까지 6개 면을 고문 관련 기사로 가득 채우기도 했다. TV 프로그램면과 문화·스포츠면 등을 빼면 거의 모든 지면이었다. 오 원장이 보고 ‘이런 신문도 있구나’ 했던 지면이다. 당시 그는 인터뷰에서 “의사로서 환자의 편에서 알고 있는 것을 솔직히 말했을 뿐”이라고 했다. 본보는 1987년 12월 ‘올해의 인물’로 오 원장을 선정했다. 오 원장은 이날 민주인권기념관 방명록에 “제자리에서 자기 할 일을 다하는 것이 국민 된 도리다”라고 썼다. 서울 중앙고를 졸업한 오 원장은 1974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당시 ‘3학년 7반 일동’이라는 명의로 광고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오 원장은 “고교에 입학해 가장 먼저 들은 말이 인촌 김성수 선생의 좌우명 ‘공선사후(公先私後)’였다”면서 “내 선택에 그런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 원장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동아일보가 가장 강력하게 보도했다”면서 “동아일보가 전통과 역사를 지켜 나가면서 대한민국의 여론을 선도하는 역할을 해 달라”고 당부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저번 인편에 적으신 편지 보고 든든하오며, 그 사이에 인편이 간혹 있사오되 글씨 쓰는 일이 매우 힘들어 못했으니 죄가 많사옵니다. 오죽이나 꾸짖어 계시오리이까? …호방이 내려가기에 바빠서 이내 그치오며, 내내 평안하시길 바라옵니다.” 서울에 있는 32세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1818년 4월 대구에 있는 가족에게 쓴 한글 편지다. 답장을 못 보냈다고 ‘죄가 많다’며 자책하는 걸 보면 수신자는 아버지나 어머니였을까. 웬걸, 받는 사람은 아내 예안 이 씨다. 김정희는 아내에게 항상 극존칭으로 편지를 썼다.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1766∼1837)도 마찬가지였다. 추사 집안의 한글 편지 85통을 현대어로 옮기고 해설한 책이다. 이 편지들은 조선에서 남존여비 사상이 극심했고, 집안일은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다는 통념을 깬다. 추사 집안의 남성들은 안살림과 노비 관리, 제사나 혼인 등 많은 일을 해냈음이 여러 편지에서 드러난다. 남자들은 의복과 음식을 잘 알았고, 옷감이나 반찬거리를 뒷바라지했으며, 직접 살림을 하기도 했다. 김노경은 이런 꼼꼼한 편지도 썼다. “일전에 창녕(둘째 아들 김명희)의 생일에 만두를 하여 먹으니, 메밀은 먹물을 들여 놓은 것 같고 침채(김치)가 없어 변변히 되지 않았으니, 앞으로 인편에 메밀가루를 조금 얻어 보내고 메밀국수 만드는 법을 기별하면 다시 만들어보겠지만 잘될지 모르겠다. 갓과 우거지를 작년에도 많이 보내어 겨울을 났거니와 올해도 조금 넉넉히 얻어 보내어라.” 남자는 부엌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금기는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 출가한 딸이 자주 친정에 가는 등 가깝게 지냈던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초빙교수로 역사 속 소외 계층에 대한 책을 주로 써 온 저자는 “조선 후기 남성은 여성과 협력해 각종 집안일을 일상적으로 했다”면서 “권력의 향유자라기보다 집안의 대표자 역할을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그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짓밟히고 있는 반도 만세!”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파고든 일본의 문학가 모리야마 게이(1904∼1991)가 1928년 5월 ‘센키(戰旗)’ 창간호에 발표한 소설 ‘불’의 마지막 문장이다. 소설의 무대는 1919년 3월 3일 경기 수원 인근. 일본에서 탄광 광부로 일하던 주인공 이진유는 귀향해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이야기를 듣고, 소학교 운동장에서는 집회가 열린다. “나는 한 시간 전에 경성에서 급히 달려왔소! … 누구나 다 마지막 한 명까지 나아가려 했다. 누구나 모두 오랫동안 기다렸어. … 젊은 몇백 명의 여자들이 말이야. … ××를 향해 기가 꺾이지 않고 맨 앞에서 행진했다.” 명백한 3·1운동 묘사다. 이진유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목구멍이 마를 때까지” 만세를 불렀지만 군중은 속아서 교회 안으로 몰려들고, 경관들이 우글거리는 가운데 복병처럼 나타난 ‘××’들이 총질을 시작한다. “거기에는 독살스러운 연기와 불길이 날아올라 가는 교회 건물 안에서, 몇백 명의 사람들이 소리를 내고 있는 아비규환이 아닌가. 세찬 바람이 부추겨서 불은 의기양양한 듯이 건물과 건물 안의 사람을 불태우고 있었다. … 그리고 이러한 잔악함을 계획한 인귀(人鬼)들을 보라. 그들은 창문으로 빠져나가려 하는 사람을 ××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접근하는 마을사람들을 같은 마지막으로 내몰고 있었다.” 검열 탓에 주요 단어가 ‘×’로 표시되기는 했지만 일본군이 수원 제암리(지금의 화성시)에서 자행한 집단학살의 현장이 문학 작품으로 변형, 재현된 것이다. 한국 문학 연구자인 세리카와 데쓰요 일본 니쇼가쿠샤대 명예교수는 3·1운동 101주년을 앞두고 일본 작가들이 3·1운동을 표현한 문학 작품을 번역하고 해설한 ‘일본 작가들의 눈에 비친 3·1독립운동’(지식산업사)을 최근 출간했다. 여러 작품들은 식민 지배를 받는 한국인의 울분과 독립 의지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평가다. 소설 ‘조선의 여인’(스미 게이코·1920∼2012)에서 ‘희열 할머니’는 장날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헌병에 끌려간다. 처참한 고문을 당한 끝에 돌아오지만 끝내 목숨을 잃는다. 작가가 일본의 조선인 마을에 살면서 만난 여인들의 삶이 창작의 동기가 됐다고 한다. 세리카와 교수는 “조선 여자들의 삶을 통해 식민지가 된 민족의 비애와 통분을 꿰뚫어 보고자 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책에는 모두 10편이 실렸다. 광복 전 작품으로는 ‘불’을 비롯한 소설 ‘불령선인’(나카니시 이노스케), ‘간난이’(유아사 가쓰에)와 시 ‘어떤 살육사건’(사이토 다케시), ‘살육의 흔적―사이토 다케시 씨의 어떤 살육사건을 읽고’(사이토 구라조), ‘간도 빨치산의 노래’(마키무라 히로시)가 담겼다. 광복 후 작품은 ‘조선의 여인’을 비롯한 소설 ‘이조잔영’(가지야마 도시유키), ‘조선·메이지 52년’(고바야시 마사루)과 시 ‘수양버들처럼 흔들린 손’(아키노 사치코)을 다뤘다. 일부 작품에는 한국에서 살며 한국을 고향이라고 생각했던 작가의 체험이 반영됐다. ‘간난이’는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살던 작가 유아사 가쓰에(1910∼1982)가 목격한 수원의 3·1운동이 담겼다. 이 소설은 한국인들에게도 비교적 널리 읽혔다고 한다. 세리카와 교수는 “‘독립을 바라는 조선인들의 마음에 감동받아 울면서 썼다’는 작가의 진지한 자세와 골목골목까지 잘 알던 수원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점에 끌렸을 것”이라며 “소설 속 간난이의 죽음은 유관순의 이미지와도 겹친다”고 설명했다. ‘수양버들처럼…’과 ‘이조잔영’, ‘조선·메이지 52년’ 등도 마찬가지다. 세리카와 교수는 “10편 가운데 5편이 3·1운동 탄압의 상징적 사건으로 제암리 학살을 직간접적 테마로 다루고 있어 인상적”이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현재 남아 있는 3·1독립선언서 원본(보성사판)에 민족대표 33인 명단 위치가 조금씩 다른 까닭은 막판까지 수정한 명단 부분만 연판(鉛版·활자를 짠 원판에 대고 지형(紙型)을 뜬 뒤 납 등의 금속을 녹여 부어서 뜬 인쇄판)을 새로 만들어 붙였기 때문이라는 연구가 나왔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3·1운동 101주년을 앞두고 출간되는 학술지 ‘동아시아문화연구’ 80호에 싣는 논문 ‘3·1독립선언서 인쇄 과정과 판본의 검토’에서 이같이 밝혔다. 보성사판 3·1독립선언서는 33인 명단 부분이 약간 위로 올라간 것과 아래로 내려간 것 등 세 가지 부류가 있다. 논문에 따르면 1919년 2월 27일 오후 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직원들은 사장 이종일의 지시에 따라 인쇄기 3대에 걸기 위해 연판 3개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3·1운동의 주도자 가운데 한 명인 오세창이 민족대표 성명을 변경해 달라고 전화로 요청했다. 이에 만들어놓은 연판 가운데 본문을 살리고, 명단 부분만 잘라낸 다음 연판 3개를 새로 만들어 본문에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인쇄기에 본문과 명단을 이어 고정하는 과정에서 명단이 어떤 것은 약간 올라가거나 내려갔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3·1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27일 밤 2만1000부가 인쇄됐고, 그 전에는 인쇄된 적이 없다”고 논문에 밝혔다. 독립선언서가 여러 차례에 걸쳐 모두 3만5000부 인쇄됐다는 설은 오늘날도 꽤 퍼져 있다. 이는 앞선 2월 20∼25일 선언서 1만여 부를 인쇄했다는 ‘묵암비망록’ 내용에 기인한 것이다. 이 비망록은 이종일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한 것이 2월 24일 밤이었고, 25∼27일 민족대표의 명단을 정했는데 그 전에 민족대표의 명단이 들어간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논문은 밝혔다. 논문은 또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돼 있는 독립선언서 2종 가운데 이른바 ‘신문관판’은 당시 인쇄된 게 아니라 이병헌이라는 인물이 적어도 광복 이후 뒤늦게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잘못 걸리면 죽어요, 아주. 호되게 맞고….” 충남 청양군에 사는 일제 말기 인천조병창 강제동원 피해자의 증언이다. 인천조병창은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해 1941년 인천 부평지역에 세운 무기제조 공장이다. 적어도 1만 명 이상이 동원된 것으로 파악된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조광)는 인천조병창에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 12명의 생생한 구술 증언을 담은 ‘일제의 강제동원과 인천조병창 사람들’을 최근 간행했다. 조병창은 높은 담장과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군인들이 항상 엄격하게 단속했다. 공장을 감시하는 헌병대는 “(군 내무반 같은 규율을 어기면) 데리고 가서, 죽는 소리 나게 때렸다”고 한다. 배고픔에 시달린 것은 물론이고, 부상이나 사고를 당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피해자들은 회고했다. “기계 일하는 데서 어떤 사람은 다리가 잘려서 오고, 손목도 잘려서 왔다”고 했다. 국민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들을 비롯해 나이 어린 학생들의 사고도 잦았다. 한 피해자는 “어떤 아이가 옷이 기계에 빨려 들어가는 바람에 팔 하나가 떨어졌다”고 증언했다. 그만둘 자유는 없었다. 12명의 구술자 중 3명은 광복 이전에 조병창을 탈출했다고 증언했다. 경기 여주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조병창에 동원된 한 증언자는 “붙들리면 죽지 않으면 영창”인 상황에서도 죽기 살기로 탈출했다. 밤에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빠져나온 뒤 철조망을 뜯고 탈출해 산길을 열흘쯤 걸어 도망쳤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휴가증을 위조해 탈출한 구술자도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국내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인천조병창 관련 강제동원 진상 규명에 기여할 것”이라고 발간의 의미를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기이하다. 은둔한 선비의 원림(園林)에 들어선 듯 댓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가 들리다가도 어떻게 보면 마치 조선판 ‘돈키호테 쇼핑’의 문을 연 것 같다. 매우 실용적인가 하면 쓸데없는 ‘고퀄’의 물건들이 이어지고, 고졸(古拙·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멋)한가 하면 장식적인 물건들이 책 속에 가득하다. 풍류가 밴 물건과 매우 기능적인 물건들이 함께 등장하는 이 책은 조선의 실용지식 대백과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가운데 ‘이운지(怡雲志)’다. 임원경제지는 농학의 대가인 실학자 서유구(1764∼1845)가 홍문관 부제학에서 물러난 뒤 손수 농사를 짓고 은거하면서 18년 동안 편찬, 집필한 책이다. 113권 54책으로 250만 자가 넘는다. 이 책을 번역 중인 임원경제연구소가 총 16개 부분(志·지) 가운데 다섯 번째로 선비들의 취미생활을 소재로 한 ‘이운지’를 최근 번역 출간(풍석문화재단)했다. 총 4권. ‘이운(怡雲)’은 “산중에서 구름을 즐기는 일은 혼자만 할 수 있다”는 중국 남조 대 인물인 도홍경(456∼536)의 시에서 따 왔다. “맑은 마음으로 고상함을 기르고 한가로이 소요하며 유유자적하는” 서유구의 이상이 담긴 이운지에서 조선 선비들이 꿈꾼 ‘웰빙’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책은 선비가 은거할 곳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은거할 집은 “크거나 넓게 짓지 않는다”, “무궁화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고, 띠를 엮어 정자를 만든다”는 시작 부분은 오늘날의 통념 그대로다. 그러나 여러 건축물과 정자 소개는 선비들의 이상적 은거생활이 과연 소박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방대하고 다양하다. “바람이 잔잔하고 볕이 좋을 때마다 차를 담은 병이나 술동이를 가지고 정자에 이르러 난간에 기대고 낚싯대를 드리우며…새벽에는 오리가, 저녁에는 기러기가 물 위에 넘쳐나고….” 저수지에 짓는 정자인 ‘수사(水榭)’에 대한 설명이다. 이 밖에 강가, 채소밭, 시냇가에 딸린 정자가 따로 있다. 휴식공간인 원실을 비롯해 습기를 막는 온각(溫閣), 차 마시는 공간, 금(琴) 연주실, 서재, 약제실, 장서각(藏書閣), 응접실, 서당, 활 쏘는 정자, 누에 치는 방, 길쌈하는 방이 잇달아 소개된다. 웬만큼 여유 있는 사대부도 따라 하기 어려울 정도다. 연구소는 “이런 건물을 다 갖추라는 게 아니라 처지에 따라 용도에 맞게 세우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소확행’의 방법도 알려준다. 선비가 ‘꽃을 가꾸고, 대나무를 심는 일’을 즐길 형편이 안 되면 어떻게 할까. 이운지는 “혹시 사는 곳이 낮고 좁거나 거처를 자주 옮겨야 한다면 ‘담병(膽甁·목이 길고 배가 불룩한 병)’에 꽃을 꽂아두었다가 수시로 바꿔준다”고 했다. 그러면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 더구나 “이 즐거움은 가진 자들이 탐하지 않고, 얻으려는 자들이 다투지 않음에도 잠시라도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은거지에 연못을 팔 처지가 아니라면 항아리로 ‘분지(盆池·항아리를 이용한 못)’를 만들 수 있다. “큰 항아리를 줄 세워서 땅에 묻고 항아리 사이사이 틈에 갈대와 부들을 심으면” 진짜 연못처럼 보인다고 한다. “물을 항아리에 가득 채운 다음 수면에는 개구리밥 잎을 던져 띄우고, 연 따위를 심으며 그 속에는 물고기를 기른다.” 오늘날 캠핑용품 못지않은 도구도 많다. ‘택승정(擇勝亭)’은 이동식 정자다. 기둥과 도리(기둥 위를 건너지르는 나무), 장막을 필요한 곳에서 조립하는 방식이다. “봄날 아침 꽃이 핀 교외나 가을날 저녁 달 밝은 마당”에 세우면 된다. “가고 싶은 곳이 있을 때 장정 1명이면 이 정자를 가지고 갈 수 있다”고 했다. 휴대용 찬합인 ‘제합(堤盒)’에서 술잔과 호리병, 젓가락과 접시를 꺼내 술을 마시고, 휴대용 화로인 ‘제로(堤爐)’에서 숯불을 피워 물을 끓이면 금상첨화다. 이것저것 다 귀찮으면 휴대용 술통인 ‘생황호(笙簧壺)’ 하나만 챙겨도 된다. 술을 담는 대나무통 아래 안주와 과일을 담는 나무통이 악기 생황처럼 일체화된 모양이다. 이 밖에도 임원의 즐길 거리인 차(茶)와 향(香), 금(琴)뿐 아니라 서재와 도서 관리, 골동품과 예술품 감상법 등을 꼼꼼히 소개한다. 정명현 임원경제연구소장은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으며, 가정용품이나 음식을 만들고 직물을 염색하는 임원경제지 속 선비의 모습은 기존 통념과는 전혀 다르다”며 “이운지에서는 평화롭고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즐기려 했던 여가의 경지와 품격의 다양성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죽음이 임박한 사람은 시간 감각도 변하고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도 약해진다. 그러나 오는 사람마다 “제가 누군지 아세요”라고 묻는 건 의식이 있는 환자를 지치게 만들 수 있다. 그냥 “저 누구예요”라고 밝히는 게 좋다고 한다. 의학정보를 대중화하는 데 힘쓰는 요양병원 원장이 고독사 존엄사 치매 간병 장례 사별 같은 각종 죽음에 관한 지식을 담았다.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임종 과정에서의 자기 운명 결정권은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등의 질문을 던지고 답한다. 저자는 말기 환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마지막까지 지켜주는 호스피스는 단순한 간병과는 다르다고 했다. 의료와 사회복지,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의학적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아직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얘기다. 부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근대적 독립주권국으로 발돋움하려는 고종의 의지가 담긴 국새 대군주보(大君主寶)와 영조대 제작한 효종 어보(御寶)가 해외로 반출된 지 약 70년 만에 돌아왔다. 문화재청은 국새와 어보를 19일 공개했다. 고종 지시로 1882년 만든 대군주보는 1876∼1889년 제작한 외교용 국새 6종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이 확인돼 가치가 있다. 조선은 외교문서에 중국에서 받은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사용했으나 고종대에 여러 국새를 만들어 썼다. 대군주보에 황제의 도장에 쓰는 ‘보(寶)’를 새긴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은으로 주조한 뒤 수은아말감 기법으로 도금했다. 몸체(印板·인판)에 은색 거북이 모양 손잡이(龜紐·귀뉴)가 달렸다. 효종 어보는 1740년 효종에게 ‘명의정덕(明義正德)’이라는 존호를 올리며 제작됐다. 문화재청은 “조선의 국새와 어보는 모두 412점 제작됐는데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의 혼란, 6·25전쟁을 거치며 흩어져 73점은 소재를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국새와 어보는 미국 뉴저지의 교포 이대수 씨(84)가 1990년대 후반 경매로 구입해 이번에 기증했다. 이날 공개회에 온 이 씨의 아들은 “아버지는 구입했을 때부터 한국에 돌려보낼 생각이 확고했다”고 말했다. 국새와 어보는 20일부터 다음 달 8일까지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특별 전시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