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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은 지난해 10월 ‘윤석열 검찰총장이 건설업자 윤중천의 별장에서 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을 보도한 데 대해 “부정확한 보도였다”며 22일자 1, 2면에 걸쳐 사과문을 냈다. 한겨레신문은 사과문에서 “당시 (법무부 과거사위원회 조사보고서에) 윤 총장이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스폰서였던 건설업자 윤중천의 별장에 들러 접대를 받았다는 윤 씨의 진술이 나왔으나 추가 조사 없이 마무리됐다고 보도했다”며 “하지만 ‘수차례’ ‘접대’ 등 보고서에 없는 단어를 기사에 사용하고, 1면 머리기사 등에 비중 있게 보도함으로써 윤 총장이 별장에서 여러 차례 접대를 받았는지에 관심이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밝혔다. 이어 “보도된 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윤 총장의 별장 접대 의혹에 대해 증거나 증언에 토대를 둔 후속 보도를 하지 못했다”면서 “정확하지 않은 보도를 한 점에 대해 독자와 윤 총장께 사과드린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799년 12월 중순 어느 날 심한 후두염에 걸린 조지 워싱턴 전 미국 대통령은 수은 화합물을 투여하고 몸의 피를 빼내는 등의 치료를 받았지만 이틀 뒤 숨졌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급성 후두개염으로 사망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감염과 싸우는 인류의 운명을 바꾼 것은 20세기에 발명된 항생제다. 이 책은 최초의 항생제인 설파제(술파닐아미드)가 만들어진 과정을 다뤘다. 최초의 항생제는 곰팡이에서 얻은 페니실린 아니었나? 실험실의 합성 화학물질도 항생제에 포함한다는 정의를 따르면 설파제가 처음이다. 책의 ‘주인공’은 훗날 노벨상을 받은 독일 의사이자 생화학자 게르하르트 도마크(1895∼1964). 꼼꼼하고 집요한 그는 독일 제약회사 바이엘에서 동료들과 함께 설파제를 발명했다. 영국에서 대규모 시험으로 효능을 인정받고,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에서 작용 기전을 밝히는 등의 이야기가 촘촘하게 담겼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제강점기 막대한 사재를 털어 문화재를 수집하고 해외 유출을 막은 간송 전형필(1906∼1962)의 후손이 재정 압박으로 소장한 불교 문화재를 매각하기로 했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은 21일 “2013년 재단 설립 이후 대중적인 전시와 문화 사업들을 병행하며 많은 비용이 발생해 재정 압박이 커졌다”며 “불교 관련 유물을 매각하고 서화와 도자, 전적이라는 중심축에 집중하려 한다”고 밝혔다. 재단은 “소장품을 매각할 수밖에 없게 돼 송구스럽다”고 덧붙였다. 간송가(家)는 소장품 가운데 보물 284호 금동여래입상과 보물 285호 금동보살입상을 27일 케이옥션을 통해 경매에 부친다. 두 불상의 경매 시작가는 각각 15억 원. 또 다른 소장품인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국보 제72호)과 금동삼존불감(국보 제73호)이 향후 매물로 나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재정 압박은 간송의 차남인 전성우 전 재단이사장이 2018년 작고한 뒤 더 커졌다. 재단은 “전성우 전 이사장이 소천하신 뒤 추가로 적지 않은 비용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전 전 이사장의 유족은 국보와 보물 등 지정문화재를 상속받았다. 간송미술관이 관리하는 지정문화재는 국보(12건), 보물(32건), 서울시유형문화재(4건)를 비롯해 모두 48건. 지정문화재의 상속은 법에 따라 비과세된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번 경매에 나오는 두 불상 역시 유족 소유다. 나머지 비지정문화재는 거의 간송미술문화재단에 기부됐다. 전 전 이사장의 아들인 전인건 간송미술관장(49)은 지난해 말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재단이 문화재를 기부받은 데 대한 지방세를 내야 한다. 세율이 비교적 높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굉장히 큰 부담이었다. 그간 정리를 못 하고 있었는데 부친 별세를 계기로 재단에 기부했다”고 말했다. 간송미술관은 최근까지 나라의 지원을 받지 않고 자체 재원으로 운영해 왔다. 그러나 향후 간송미술관의 현대식 수장고(가칭 ‘훈민정음 수장고’) 신축에 들어가는 사업비 44억여 원 전액이 국비와 지방비로 충당될 예정이고, 간송미술관으로 쓰이는 보화각 건물의 원형 복원도 지원된다. 전 관장은 21일 전화 통화에서 “(유물 매각 동기에 관한) 여러 억측이 나왔는데, (매각을 결정하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다”고 했다. 문화재는 해외 반출이 제한되지만 내국인에게는 문화재의 소재지가 확실하다면 지정문화재도 매매가 가능하다. 케이옥션은 2014∼2018년 지정문화재 경매가 28건 이뤄졌다고 밝혔다. 문화재계에서는 ‘간송 컬렉션’이 흩어지는 것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만약 국공립박물관이 아니라 개인의 수장고에 들어가면 국민이 향유할 기회가 없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풍속화라면 단원 김홍도(1745∼?)나 혜원 신윤복(1758∼?)의 걸작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적어도 주제의 다양성과 작품의 양으로 보면 19세기 말∼20세기 초 인천 부산 원산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한 기산 김준근(?∼?)이 그들을 뛰어넘는다. 김준근은 베 짜는 아낙네부터 탈춤패 모습까지 생업과 의식주, 의례, 세시풍속, 놀이를 가리지 않고 그야말로 민속의 전 분야를 그렸다. 단오에 씨름하고 그네 타며, 매사냥을 하고, 쟁기로 밭을 갈고, 손수 두부를 만들고, 가마 타고 시집장가가고, 상여를 메던 120여 년 전 한국인의 모습이 생생하다. 심지어 관아에서 시신을 부검하는 모습도, 지금은 사라진 판수(判數·점을 치거나 독경하던 시각장애인)의 모습도 그의 그림에 담겨 있다. 기산이 그린 풍속화의 구매자는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들이었다. 여행가, 외교관, 상사 주재원, 선교사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의 풍속을 종이에 담아 고국으로 가져갔다. 오늘날 여행지 사진이 담긴 엽서를 사오는 것과 비슷한 행위였을 터다. 정형호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은 “개항기 외국인이 남긴 조선 방문기와 사진이 그들의 시각에서 단편적으로 기록하고 촬영한 것임에 비해, 기산의 그림은 19세기 후반 다양한 계층의 삶을 총체적으로 옮겨놓았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준근의 그림 약 1500점 가운데 국내에 있는 것은 약 300점뿐이고 거의 해외(유럽 878점, 북미 138점 등)에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서울 종로구)은 독일 MARKK(옛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에서 대여한 기산 풍속화 71점 등을 선보이는 특별전 ‘기산 풍속화에서 민속을 찾다’를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개최한다. 이 그림들은 1894년 함부르크에서 전시된 이후 12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해외의 기산 풍속화가 이처럼 대규모로 국내에 온 건 처음이라고 박물관은 밝혔다. 지난해 박물관이 국내에서 경매로 수집한 28점도 볼 수 있다.▼ 구한말 조선의 팝아티스트… ‘천로역정’ 삽화도 그려 ▼‘저잣거리의 화가’ 기산 김준근 1890년대 이미 서양에서 작품이 정식으로 전시된 한국인 화가라 할 수 있는 김준근은 생몰연도를 비롯해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주로 활동한 시기는 1880, 90년대다. 등장인물을 조선인의 모습으로 표현한 ‘천로역정’ 번역본(1895년 간행)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독일 출신 외교관 묄렌도르프(1848∼1901), 미국 해군 제독이자 외교관인 슈펠트(1822∼1895)의 딸, 프랑스 민속학자 샤를 루이 바라(1842∼1893), 제물포에 세창양행을 설립했던 독일인 마이어(1841∼1926) 등이 그의 작품을 다수 구입한 이들이다. 이들의 구입 관련 기록에서 김준근의 활동지가 개항장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국립민속박물관에 따르면 마이어는 1894년 독일 함부르크민속공예박물관에서 자신이 소장한 기산 풍속화를 전시하기도 했다. 김준근은 ‘저잣거리의 화가’였다. 예술작품이 아니라 상품으로서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 100개가 넘는 소재를 반복해 그렸고, ‘공장’과 비슷한 화실을 차려 그림을 대량 생산하고 자신의 인장을 찍어 팔았을지도 모른다. 이경효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김준근은 한류의 원조이자 앤디 워홀 같은 팝 아티스트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그림은 민속학, 민족학 연구 차원에서 활용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최초의 한국인 신부(神父)인 김대건 신부(1821∼1846)의 유해 일부를 20세기 초 독일로 담아갈 때 사용된 주머니(사진)가 확인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최응천)은 “김 신부의 흉골(胸骨)이 안치된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선교박물관에 김 신부의 성해(聖骸)주머니와 유해증명서가 있다는 걸 확인했다”고 18일 밝혔다. 유해증명서는 상트 오틸리엔 선교베네딕도회 소속으로 한국에 파견돼 원산 감목(監牧)구장을 지낸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1877∼1950)가 1920년 작성한 것으로 김 신부와 프랑스인 선교사 3명의 유해임을 증명하는 문서다. 재단은 이 선교박물관이 소장한 한국문화재를 2016, 17년 전수 조사해 1021건(1825점)을 확인하고 최근 도록으로 발간했다. 2021년 탄생 200주년을 맞는 김대건 신부는 순교 이후 경기 안성시 현 미리내 성지에 유해가 안장됐는데 일부 뼛조각은 성유물(聖遺物)로 세계에 흩어져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50년 9월 말 6·25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세계 24개국에서 238명의 종군 특파원이 한국 전선에서 취재에 열을 올렸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원됐던 기자들의 절반에 해당하는 수였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15일 제주 서귀포시 KAL호텔에서 열린 ‘6·25와 한국 언론’ 세미나에서 ‘6·25전쟁과 언론’ 주제 발표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정 교수는 “일시에 이렇게 많은 기자가 특정한 지역에 동원된 것은 당시까지 2차 대전뿐이었다”며 “비공식적 집계에 의하면 6·25전쟁을 취재했던 해외 기자는 약 600명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날 세미나는 관훈클럽(총무 박정훈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장)이 한국언론진흥재단 후원으로 개최했다. 발표에 따르면 전쟁을 취재하던 기자 18명이 희생됐고 그중 미국 기자는 10명이었다. 8명은 총탄에 숨졌고 2명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언론사들은 부산을 비롯해 피란지를 옮겨 다니며 신문을 발간했지만 시설과 인적 손실이 막심했다. 동아일보 역시 장인갑 편집국장과 백운선 사진부장, 이길용 체육전문기자 등 약 16명이 북으로 끌려갔다. 1950년 10월 4일 서울에서 속간호를 내면서 “행방을 알 수 없는 사원들의 가족은 본사로 연락해주길 바란다”는 사고를 게재했을 정도였다. 정 교수는 “전쟁 중 납북된 언론인은 KBS 28명을 비롯해 모두 285명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북한은 남침 전부터 1950년 6월 내내 문인들을 동원해 ‘평화적 조국통일 실현’을 강조하는 글을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과 내각 기관지인 ‘민주조선’에 게재하면서 대남 선전을 강화했다. 사전 준비를 바탕으로 서울을 점령한 지 불과 나흘 뒤인 7월 2일부터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를 발행해 통치 수단으로 활용했다고 정 교수는 밝혔다. 윤상길 신한대 미디어언론학과 교수는 ‘냉전의 언론, 언론의 냉전’에서 오보의 남발을 지적했다. 윤 교수는 “군이 제공한 전황 정보에는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오보도 매우 많았다”고 말했다.서귀포=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시민운동가이자 전 법제처장(이석연), 아리랑을 연구한 화가(김정), 언론사 연구의 권위자(정진석) 등 이력으로 보면 별 관계가 없는 3명이 각자의 글을 모아 함께 낸 책이다. 우연한 계기로 오래 친분을 다져 온 3명의 공통점은 저술가라는 것.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책에서 ‘영국 기자 더글러스 스토리의 고종 밀서 사건’이나 ‘130년 전 서양 언론에 비친 우리의 모습’과 같은 주제로 자신의 연구를 돌이켰다. 각별한 열정을 기울인 저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을 쓰면서 1980년대 영국 공공기록보관소를 뒤지는 부분에서는 그가 흘린 땀의 무게가 그대로 느껴진다. 독서가로 알려진 이석연 변호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소나기가 내리는 것도 모르고 책에 몰입했던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신의 삶과 독서, 여행, 헌법을 풀어냈다. 김정 화백은 독일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아리랑을 그림으로 담아내기까지의 여정을 소개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강남달이밝아서 님의놀든곳/구름속에그의얼골 가리워젓네/물망초핀언덕에 외로히서서/물에ᄯㅡㄴ이한밤을 홀노새울가” 무성영화 ‘낙화유수’(1927년)의 동명 주제가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로 알려져 있다. 무성영화 변사(辯士)였던 김서정(1898∼1936)이 곡과 노랫말을 지었는데 큰 인기를 모아 1929년 음반이 정식 발매됐다. 당시에는 노랫말을 ‘가요시’ ‘노래시’라고도 불렀을 만큼 시가 곧 노랫말이고 노랫말이 곧 시가 될 수 있었다. ‘물에 ᄯㅡㄴ(뜬)’, ‘ᄭㅐ울 ᄯㅐᄭㅏ지(깨울 때까지)’처럼 오늘날 사용되지 않는 표기 방식이 쓰인 것도 알 수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서울 용산구)은 기획특별전 ‘노랫말―선율에 삶을 싣다’를 15일부터 10월 18일까지 개최한다. 대중가요 노랫말을 본격적으로 다룬 전시다. ‘낙화유수’부터 방탄소년단(BTS)의 ‘IDOL’까지 대중가요 190여 곡의 노랫말과 함께 각종 음반과 가사지(歌詞紙), 가사책, 축음기 등 222점을 선보인다.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넘던 이별고개/화약연기 앞을가려 눈못뜨고 헤메일때…” 반야월 작사 ‘단장의 미아리 고개’(1957년 추정)다. 한글박물관에 따르면 1950년대에는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위로한 이 같은 노래와 ‘미8군 쇼’ 등을 통해 들어온 ‘늴리리 맘보’(1957년) 같은 노랫말이 사랑받았다. ‘슈샤인 보이’(1954년)의 “헬로 슈-샤인 구두를 닦으세요”라는 경쾌한 노랫말 뒤에는 직업 전선에 뛰어든 전쟁고아들의 아픔이 숨어 있다. 1960, 70년대에는 도시의 화려한 성장과 이상을 표현한 ‘임과 함께’(1972년)나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오는 소외감이나 향수(鄕愁)를 표현한 ‘고향역’(1972년) 등이 유행했다. 이처럼 노랫말의 변화와 시기별 특징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자 대신 한글로 된 광화문 현판을 달면 어떨까. 문화예술분야 인사들이 구성한 ‘광화문 현판을 훈민정음체로’ 시민모임은 14일 서울 종로구 동네서점 ‘역사책방’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門化光(문화광)’이라고 쓰인 지금의 한자 현판 대신 세종대왕이 경복궁에서 창제한 훈민정음 해례본 한글 서체로 현판을 만들어 새로 달자”고 제안했다. 현재 광화문 현판 글씨는 1865년 경복궁 중건(重建)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이 쓴 글씨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6·25전쟁 때 광화문 문루가 소실됐기에 20세기 초의 사진에 나타난 자형(字形)을 기초로 2010년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시민모임은 “이 글씨는 작고 오래된 사진을 근거로 확대하고 다듬은 것이어서 원형의 가치가 없고 서예의 기운생동(氣韻生動) 또한 없다”고 주장했다. 시민모임은 이날 실제의 2분의 1크기로 시험 제작한 모의 한글 광화문 현판을 공개했다. 글씨는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한글 자모를 집자해 디자인했다. 한재준 시민모임 공동대표(서울여대 교수)는 “너무나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해례본의 글자꼴이자 한글의 첫 모습으로 된 현판”이라고 말했다. 강병인 공동대표(멋글씨 작가)는 “한글과 한자 현판으로 의견이 분열된다면 두 가지를 절충해서 광화문 앞쪽(광장 쪽)에는 훈민정음체 한글 현판을 내걸고 뒤쪽(경복궁 안쪽)에는 한자 현판을 다는 것도 방안”이라고 말했다. 지금의 현판은 경복궁을 1865년 중건 당시 모습대로 복원한다는 방침 아래 만들어졌다. 2010년 한자 현판을 달 때에도 한글단체는 반대했다. 이후 현판 바탕색과 글씨의 색이 잘못된 것이 밝혀지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새로운 한자 현판이 올해 내걸릴 것으로 보인다. 시민모임은 “훈민정음체로 현판을 바꾸면 광화문이 역동적이고 민주적인 시민의 광장을 상징한다는 의미가 뚜렷해질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7.’ 유리판이 갈라진 낡은 시계의 날짜판은 40년 전인 1980년 5월 27일에 멈춰 있다. 전도사로 활동하다가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전남도청 지하의 무기고를 관리했던 시계의 주인은 그날 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에 최후를 맞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특별전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을 13일부터 10월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박물관 기획전시실 등에서 개최한다. 5월 광주의 중심에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이를 목도한 시민들의 기록과 그들을 탄압한 정부와 군의 기록 등 관련 자료 160여 점을 보여준다. “각 병원마다 시체들이 즐비하게 쌓이고 있습니다. 천주님! 도와주소서. 우리 광주시민들을 보호해 주소서.”(천주교 광주대교구에서 근무하던 주이택의 일기) “연 이틀째 사람이 개새끼처럼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 … 온 시내바닥이 죽음의 거리로 변하고 있다. … 이게 과연 민주주의냐. 이게 진정한 자유의 나라냐.”(당시 전남대 4학년이던 이춘례의 일기) 학생과 주부, 전도사 등 광주 시민들이 당시의 상황을 적은 일기 16점은 서울에서는 처음 공개되는 자료다. 당시 동아일보 김영택, 최건 기자를 비롯한 기자들의 취재수첩도 전시에 나온다. 김 기자의 수첩에는 5월 21일 오후 1시경 도청 옥상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계엄군들이 시민을 향해 일제 사격을 시작했다는 내용이 그대로 적혀 있다. 운동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물건들도 많다. 시민군에게 주먹밥을 만들어줄 때 사용된, 다 찌그러진 양은 함지박은 진정 고귀한 것이 무엇인지 새삼 생각하게 만든다. 이 밖에도 계엄군 군복과 진압봉, 총탄이 뚫고 간 철제 캐비닛과 의사 가운, 계엄포고문, 국방부 상황일지, 기무사 앨범도 볼 수 있다. 정부기록물인 ‘수습상황보고’ ‘피해신고접수상황’ 등 세계기록유산 10여 점의 원본도 처음 전시된다. 전시장에 설치된 ‘도시 모형 매핑 영상’은 광주 시가지 모형에 운동의 전개와 계엄군의 탄압을 영상으로 투영해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다. 박물관 외부 ‘역사회랑’에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사진 등을 선보이며, ‘역사마당’에서는 최평곤 작가의 설치작품 ‘민주화(民主花)’가 전시된다. 주진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은 “서울에서 대규모 5·18 전시가 열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5·18은 광주의 역사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라는 것을 온 국민이 공감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5·18기념재단과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전남대 5·18연구소, 국가기록원이 공동 주최한다. 무료.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탱(幀)’인가, ‘도(圖)’인가. 국보, 보물인 불화(佛畵)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두고 문화재청이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한국의 불화는 벽화보다는 내거는 탱화가 주류였고, ‘괘불탱’처럼 탱이나 탱화로 불려 왔다. 현재 국보, 보물의 명칭에는 ‘칠장사오불회괘불탱’(국보)이나 ‘안심사영산회괘불탱’(〃)처럼 ‘탱’이 절대 다수다. 그러나 ‘문경 김룡사 영산회괘불도’(보물)처럼 ‘도’도 일부 섞여 있다. 문화재청은 불교회화 분야 국보, 보물 지정 명칭 부여 지침을 최근 마련하면서 ‘탱’이라는 단어가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보고, 명칭을 ‘도(圖)’로 변경해 통일하는 것을 추진했다. 그러나 대한불교조계종이 “성보문화재로서 불화의 조성 당시 용어를 존중하길 바란다”며 반대의견을 낸 것. 조계종은 “불교 회화는 종교적 예경의 대상이며 조성 당시 화기(畵記)에도 탱, 탱화를 사용한 만큼 이 용어가 지닌 종교적 가치와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돼야 한다”는 입장을 문화재청에 보냈다. 이에 따라 명칭 변경은 보류됐다.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들과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의견 수렴 회의를 이달 중 열어 다시 논의할 예정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성대한 공훈을 이루고 본국으로 돌아가지만 아름다운 문장 중화에 남아 있네(盛勳歸舊國 佳句在中華·성훈귀구국 가구재중화)’ 당시 전집 ‘전당시(全唐詩)’에 실린 당나라 때 인물 온정균의 시 ‘발해 왕자를 본국으로 보내며(送渤海王子歸本國·송발해왕자귀본국)’의 한 구절이다. 당대 문인이 발해를 읊은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 시는 당이 발해를 다른 나라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동북아역사재단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인식됐는지를 전근대와 근현대로 나눠 살핀 ‘한국고대사 계승 인식’ 1·2권(사진)을 최근 발간했다. 우성민 재단 연구위원은 당시와 문집을 검토한 글에서 “당대(唐代) 중국 문인들은 고구려와 발해, 신라를 모두 해동이나 삼한으로 지칭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고려는 태조 왕건부터 발해와의 혼인관계를 강조하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무도한 민족으로 적대하면서 발해에 동족의식을 보였다. 이처럼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역사는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날까지 한국사였지만 중원의 역대 왕조는 자신의 역사로 간주한 적이 없다고 ‘한국고대사 계승 인식’은 밝히고 있다. 편찬책임자인 임상선 재단 책임연구위원은 “중원의 역대 중국 왕조는 이른바 장성(長城)을 경계로 남쪽을 화(華), 바깥을 이(夷)로 구분했는데 이는 정치 경제 문화 민족적 측면에서도 공존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차이였다”며 “중국 학계가 발해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한 것은 일본이 만주를 점령한 20세기 전반에 이르러서였다”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여기가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기서 자진(自盡)하겠어요. 인간 세상에서 저런 광경을 본 이상 더는 세상에 있고 싶지가 않네요.” 가까스로 수용소를 탈출한 임신 9개월의 아내가 땅에 주저앉아 한 말이다. 이 같은 극단적 좌절의 배경은 1937년 ‘난징(南京) 대학살’이다. 일본군이 중국 난징을 침략한 뒤 반년간은 ‘살인, 노략질, 강간, 방화, 기근 한파, 폐허’뿐. 중국 해군의 관리인 소설의 주인공은 아내와 아들을 비참하게 잃고 자신도 집단 살육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일본군 장교의 하인으로 위장한 채 몰래 아군을 위한 첩보원으로 일하면서 ‘바위와 금속만으로 된, 시간이 없는 세상’을 버텨 나간다. ‘학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수정주의 역사관이 일본에서 확산되는 요즘, 중일전쟁 종전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1955년 일본인 소설가의 작품이어서 더욱 눈길이 간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으로 문을 닫았던 전국의 주요 박물관과 전시시설이 속속 재개관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은 6일 서화관 불교회화실에서 괘불전(掛佛展) ‘꽃비 내리다―영천 은해사 괘불’을 개막했다. 올 2월 25일부터 임시 휴관한 박물관이 재개관 이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전시다. 팔공산 자락에 있는 경북 영천 은해사 소장 괘불과 ‘염불왕생첩경도(念佛往生捷徑圖)’를 선보인다. 괘불은 1750년 그린 것으로 높이 11m, 폭 5m가 넘는다. 서화관에서는 이항복(1556∼1618) 종가의 기증품 전시도 함께 한다. 현존 유일 호성공신(扈聖功臣) 교서인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와 ‘이항복 호성공신상 후모본(後模本)’ 등을 볼 수 있다. 호성공신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모시고 가는 데 공이 있는 사람에게 준 칭호로 이항복은 일등공신에 책봉됐다. 국립춘천박물관도 3월 열 예정이다가 연기한 기획특별전 ‘새로 발굴된 강원의 보물’을 이날 개막했다. 영월 흥녕선원(興寧禪院) 터에서 출토된 반가사유상과 삼척 흥전리 절터 비석 조각 등 30점이 관객을 만난다. 국립대구박물관을 비롯해 경북 경주, 경남 김해, 전북 전주 등의 국립박물관도 운영을 재개했다. 문화재청 역시 이날부터 국립고궁박물관 국립무형유산원을 비롯한 실내 관람기관 및 시설 22개소를 재개관했다. 궁능유적본부 세종대왕유적관리소는 6월 28일까지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역사문화관에서 ‘조선시대 해시계와 앙부일구(仰釜日晷)’ 전시를 연다. 전남 목포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목포근대역사관에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조명하는 ‘영웅, 그날의 기억을 걷다’를 개막했다. 호림박물관은 12일 서울 강남구 신사분관에서 새 소장품을 대거 선보이는 2020년 민화특별전 ‘書架(서가)의 풍경―冊巨里(책거리)·文字圖(문자도)’를 개최할 예정이다. 재개관에도 ‘생활 속 거리 두기’는 지속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온라인 예약제를 통해 시간당 300명으로 입장 관람객 수를 제한했다. 입구에서 마스크 착용과 발열 검사를 받아야 입장할 수 있다. 다수가 참가하는 교육 프로그램과 문화행사 등은 재개되지 않았다. 사전 예약 방법 등은 각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빅뱅의 지드래곤(본명 권지용)이 한한령(限韓令) 이후 처음으로 중국 현지 브랜드 광고 모델이 됐다. 지드래곤의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는 지드래곤이 중국 회사 눙푸산취안(農夫山泉)의 음료수 브랜드 ‘차파이(茶π)’의 광고 모델 계약을 맺었다고 4일 밝혔다. YG는 “중국 본토 유명 브랜드가 현지 광고 모델로 한류 스타를 발탁한 것은 2016년 이후 처음이다”라고 설명했다. 한한령 이후 중국에서 한국 연예인 모델을 기용한 사례는 있었지만 중국에 진출한 한국 회사 제품이나 글로벌 기업 상품에 한정됐다는 것이다. 눙푸산취안은 이미 중국 전역에서 지드래곤을 모델로 한 대형 옥외 광고를 하고 있으며, 웨이보를 비롯한 온라인에도 광고를 게재했다. 중국 정부는 2016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확정 뒤부터 중국 내 한국 연예인 활동을 제한하는 한한령을 사실상 내렸다. 최근 들어 한한령 해제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성명 문체용. 1960년 당시 35세 남성. 주소 경남 마산시 상남동. 이름은 자료상 한글과 한자가 일치하지 않고, ‘문○영(文○英)’일 가능성도 있다. 그는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중성동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왼쪽 다리가 골절됐다. 학력란은 비어 있다. 부친의 직업은 농업, 경제 상태는 하(下). 장래 희망은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고, 경남도립마산병원에 입원한 심정은 “앞길을 생각할 때 한없이 슬프다”고 했다. 이는 ‘민주주의를 되찾아 뿌듯하다’처럼 시위 참여 동기나 정국 전망 관련 답변을 한 학생들의 답과 차이가 있다. 문 씨는 ‘연세대 4월혁명연구반 수집자료(4·19혁명 참여자 구술 조사서)’ 가운데 ‘부상자 실태조사서’에 등장한다. 이 자료는 1960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이던 김달중 안병준 씨(나중에 연세대 교수를 지냄)가 그해 4월 23일경부터 7월까지 당사자들을 면담해 작성한 것이다. 자료 소장처인 연세대 박물관의 이원규 학예팀 아키비스트(기록연구사)는 “당대 생산돼 시간의 경과에 따른 왜곡이 적은 1차 자료”라고 설명했다. 문 씨의 프로필은 흔히 떠올리는 4·19혁명 주역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그가 그저 시위에 휩쓸렸던 것도 아니다. 그는 데모할 때 ‘부정선거 다시 하라’ ‘무장경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을 뿐 아니라 (경찰서 등을) ‘부수지 말자’는 주장을 했다고 분명히 언급했다. 부정선거와 독재에 맞서 피로 민주주의를 지킨 4·19혁명이 올해 60주년을 맞았다. 문 씨처럼 혁명의 주역임에도 기억에서 점차 사라져 간 이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봤다. 연구자들은 4·19혁명은 광범위한 계층이 참여했음에도 학생, 그중에서도 특히 대학생과 교수를 비롯한 엘리트 중심으로 조명된 경향이 없지 않다고 지적한다. 식자층이 혁명의 한 주역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일기나 수기 등 사료가 될 수 있는 기록을 일상적으로 남겼기에 그들이 기억되기가 더 쉬웠다는 얘기다. ‘연세대 4월혁명연구반’ 자료에는 파출소에 방화했다는 누명을 씌우려는 경찰의 고문을 받은 박세현 씨(당시 22세)의 조사서도 포함돼 있다. 그의 직업은 ‘운전수’. 자료를 보면 박 씨는 다친 몸으로 6, 7명의 식구를 부양해야 한다는 사실에 근심이 가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본인의 불구 된 것은 아깝지 않으나, 제2공화국을 바로잡으며 올바른 민주주의 역사가 길이길이 영원토록 나가도록 비나이다”라고 밝혔다. 노인 시위대 역시 거의 잊힌 혁명의 주역들이다. 당시 사진에는 1960년 4월 25일 할머니 시위대가 마산시청 앞에서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 대통령 물러가라”라고 쓴 플래카드와 함께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이 생생하다.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저서 ‘민주주의 잔혹사’에서 “이승만 하야(4월 26일) 전 플래카드와 구호로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하며 퇴진을 요구하는 건 보통의 용기와 결단이 아니었다”며 “당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벌인 시위는 시민들이 합세해 수만 명이 모인 대규모로 번졌지만 관련 책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4·19혁명의 주체를 오랫동안 ‘젊은 사자들’로 표현한 것 역시 문제였다는 분석이다. ‘젊은 사자들’은 1958년 개봉해 인기를 모은 영화 제목으로, 혁명 직후 각종 간행물에서 주로 대학생들을 호명하는 관용구가 됐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수사자를 떠올리게 하는 이 표상은 혁명의 주체였던 여학생과 주부, 빈민 여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여고생들도 학도호국단 간부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학교별로 조직적인 시위에 나섰다. 4·19혁명의 서막을 연 2·28 대구 의거 당시에도 경북여고, 대구여고 학생들이 궐기했으며, 3·15 부정선거 뒤에도 진해여고(진해) 데레사여고(부산) 성지여고 마산여고 마산제일여고(마산) 청주여고(청주)를 비롯해 수많은 여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여대생들도 다수 시위에 참여했다. 오 교수는 “남자 대학생 중심의 4·19혁명 상(像)은 여성의 역할을 주변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또 고려대생이 4·18 시위를 벌이기 전 4·19혁명의 초기 주인공은 고교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교생들은 그해 2월 말부터 계획적인 시위를 지속해서 벌였으며, 혁명이 절정에 이른 순간에도 일선에서 피를 흘렸다. 4·19 당시 서울 동성고 3학년으로 경무대(청와대) 앞에서 왼팔에 총을 맞은 강대기 씨는 “우리들은 자유 민주 정의를 위해 피를 흘렸다. 어떤 반대급부도 요구하지 않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나선 것뿐이었다”(‘동성의 4·19혁명’에서)고 회고했다. 서울 경신고 2학년이던 권무웅 씨(작고)는 19일 밤 시위대와 차를 타고 경기 의정부로 가던 도중 창동에서 복부에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그는 병원에서 “이제 우리가 학생으로서 원하던 것은 다 성취된 셈”이라고 했다(연세대 4월혁명조사반 자료). 4·19혁명은 증언할 수 있는 당사자들이 있는 만큼 진상을 폭넓게 조명하려는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몇몇이 학교 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왜곡된 기록을 정정한 특정 학교의 4·19혁명 백서가 최근에 새로 나오기도 했다. ‘가짜 유공자’ ‘가짜 부상자’ 논란 역시 말끔히 정리됐다고 보기 어렵다. 한편 연세대 박물관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잦아드는 대로 서울 서대문구 박물관에서 ‘연세대 4월혁명연구반 수집자료’ 등을 소개하는 전시 ‘청년학생의 힘―정의의 깃발, 자유의 함성, 민주의 길’의 문을 열 예정이다.▼“어머니! 국가 위해 우리 아니면 누가 데모 하겠어요” 유서가 된 소녀의 편지▼ 4·19민주묘지 ‘민주열사들을 만나다’ 발간… 다시 새기는 숭고한 정신 “어머니,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서울 한성여중 2학년으로 ‘청소 시간에 땀방울을 줄줄 흘리며 마루를 닦던, 협동심이 강하고 적극적이었던’ 14세 소녀. 의사나 법조인이 돼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 꿈이었던, 1남 2녀 가운데 막내. 진영숙. 그는 1960년 4월 19일 시위대와 함께 버스를 타고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다가 안타깝게도 서울 미아리고개에서 경찰의 총탄에 스러졌다. 그날 어머니에게 미처 고하지 못하고 집을 나서며 재봉틀 서랍에 넣어둔 편지는 끝내 유서가 됐다. 국립4·19민주묘지(소장 방형남)는 4·19혁명 열사들을 조명한 ‘4·19혁명 60주년, 민주열사들을 만나다’(사진)를 19일 발간한다. 민주묘지에 묻힌 혁명 참가자들의 생전 글과 유족들의 회고, 자료와 증언을 모아 엮은 책이다. 책은 열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그대로 전한다. 서울대 문리대생이던 김치호 열사(1939∼1960)는 4월 19일 경무대(청와대)로 진격하다가 경찰의 무차별 사격에 쓰러져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됐다. 총탄 3발이 복부를 관통한 중상이었음에도 고교생들을 먼저 치료해달라며 자신의 치료를 미루다가 다음 날 새벽 운명했다. 중앙대 법학과 2학년이던 서현무 열사(1938∼1960)는 4월 19일 시위에 나섰다가 붙잡힌 뒤 경찰의 고문과 구타로 몸을 상해 고통을 겪다가 7월 2일 숨을 거뒀다. “병원에서도 그는 더 심하게 부상한 환자들을 위하여 자리를 비워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동아일보 1960년 7월 3일 기사) 가족들의 애타는 심정 역시 절절히 드러나 있다. 김창필 열사(1934∼1960)는 당시 민주당 서울시당 선전반원으로 시위의 최일선에서 맹렬히 활약했다. 아버지 김흥돈 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아들은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심장과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생을 마쳤다. 동아일보 취재 지프차는 창필의 시신을 싣고 중앙청 앞을 지나며 피 묻은 옷을 흔들었다. 나는 그곳에 서 있으면서도 그 옷이 아들의 옷이라는 것을 몰랐다. …밤새도록 아들을 기다리며 뉴스에 귀를 기울였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창필아! 너는 나보다 후에 왔으나 먼저 갔구나!”(책 ‘4·19의 민중사’ 인용 부분) 참혹한 시신으로 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 열사(1944∼1960)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1960년 5월 8일 어머니날(지금의 어버이날) 부산일보에 기고한 글에 “주열이는 바다에 던져지지 않았으면 (몰래) 화장한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 ‘주열아! 어디 갔냐?’며 얼마나 울었던지…”라고 썼다. 책의 맨 앞자리는 시위대에 박수를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초등학생 6명을 기렸다. 경찰의 무자비한 총탄은 어린이라고 피해 가지 않았던 것. 안병채(서울 동신초) 박도일(부산 성남초) 임동성(서울 종암초) 전한승(서울 수송초) 정태성(서울 금호초) 강석원(전북 전주초)이었다. 이들은 10∼14세에 불과했다. 경찰이 시위 연행자들에게 가한 잔인한 고문도 등장한다. 당시 고려대 신입생으로 시위 도중 연행됐던 김수철 씨(1942∼2009)는 “경찰이 전기고문, 손가락 비틀기, 물속으로 담그기 등등 온갖 고문을 가하더니, 간혹 깨어나면 회유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고문 후유증 탓에 국립의료원에서 2년이나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안장된 열사 445명의 인적사항과 묘역 사진, 4·19혁명 약사와 연표 등도 실렸다. 방형남 국립4·19민주묘지 소장은 서문에서 “이분들의 투쟁과 희생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민주를 향유하며 자유를 누리고 있다”며 “4·19혁명을 온전히 기념하기 위해서는 민주열사 개개인에 대한 기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 책은 4·19 유공자와 유족에게 헌정될 예정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성명 문체용. 1960년 당시 35세 남성. 주소 경남 마산시 상남동. 이름은 자료 상 한글과 한자가 일치하지 않고, ‘문○영(文○英)’일 가능성도 있다. 그는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중성동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왼쪽 다리가 골절됐다. 학력 란은 비어있다. 부친의 직업은 농업, 경제 상태는 하(下). 장래 희망은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고, 경남도립마산병원에 입원한 심정은 “앞길을 생각할 때 한 없이 슬프다”고 했다. 이는 ‘민주주의를 되찾아 뿌듯하다’처럼 시위 참여 동기나 정국 전망 관련 답변을 한 학생들의 답과 차이가 있다. 문 씨는 ‘연세대 4월혁명연구반 수집자료(4·19 혁명 참여자 구술 조사서)’ 가운데 ‘부상자 실태조사서’에 등장한다. 이 자료는 1960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이던 김달중 안병준 씨(나중에 연세대 교수를 지냄)가 그해 4월 23일경부터 7월까지 당사자들을 면담해 작성한 것이다. 자료 소장처인 연세대 박물관의 이원규 학예팀 아키비스트는 “당대 생산돼 시간의 경과에 따른 왜곡이 적은 1차 자료”라고 설명했다. 문 씨의 프로필은 흔히 떠올리는 4·19혁명 주역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그가 그저 시위에 휩쓸렸던 것도 아니다. 그는 데모할 때 ‘부정선거 다시 하라’ ‘무장경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을 뿐 아니라 (경찰서 등을) ‘부수지 말자’는 주장을 했다고 분명히 언급했다. 부정선거와 독재에 맞서 피로 민주주의를 지킨 4·19혁명이 올해 60주년을 맞았다. 문 씨처럼 혁명의 주역임에도 기억에서 점차 사라져 간 이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봤다. 연구자들은 4·19혁명은 광범위한 계층이 참여했음에도 학생, 그중에서도 특히 대학생과 교수를 비롯한 엘리트 중심으로 조명된 경향이 없지 않다고 지적한다. 식자층이 혁명의 한 주역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일기나 수기 등 사료가 될 수 있는 기록을 일상적으로 남겼기에 그들이 기억되기가 더 쉬웠다는 얘기다. ‘연세대 4월혁명연구반’ 자료에는 파출소에 방화했다는 누명을 씌우려는 경찰의 고문을 받은 박세현 씨(당시 22세)의 조사서도 포함돼 있다. 그의 직업은 ‘운전수’. 자료를 보면 박 씨는 다친 몸으로 6, 7명의 식구를 부양해야 한다는 사실에 근심이 가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본인의 불구된 것은 아깝지 않으나, 제2공화국을 바로잡으며 올바른 민주주의 역사가 길이길이 영원토록 나가도록 비나이다”라고 밝혔다. 노인 시위대 역시 거의 잊힌 혁명의 주역들이다. 당시 사진에는 1960년 4월 25일 할머니 시위대가 마산시청 앞에서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 대통령 물러가라”고 쓴 플래카드와 함께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이 생생하다.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저서 ‘민주주의 잔혹사’에서 “이승만 하야(4월 26일) 전 플래카드와 구호로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하며 퇴진을 요구하는 건 보통의 용기와 결단이 아니었다”며 “당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벌인 시위는 시민들이 합세해 수만 명이 모인 대규모로 번졌지만 관련 책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4·19혁명의 주체를 오랫동안 ‘젊은 사자들’로 표현한 것 역시 문제였다는 분석이다. ‘젊은 사자들’은 1958년 개봉해 인기를 모은 영화 제목으로, 혁명 직후 각종 간행물에서 주로 대학생들을 호명하는 관용구가 됐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수사자를 떠올리게 하는 이 표상은 혁명의 주체였던 여학생과 주부, 빈민 여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여고생들도 학도호국단 간부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학교별로 조직적인 시위에 나섰다. 4·19혁명의 서막을 연 2·28 대구 의거 당시에도 경북여고, 대구여고 학생들이 궐기했으며, 3·15 부정선거 뒤에도 진해여고(진해) 데레사여고(부산) 성지여고 마산여고 마산제일여고(마산) 청주여고(청주)를 비롯해 수많은 여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여대생들도 다수 시위에 참여했다. 오 교수는 “남자 대학생 중심의 4·19혁명 상(像)은 여성의 역할을 주변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또 고려대생이 4·18시위를 벌이기 전 4·19혁명의 초기 주인공은 고교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교생들은 그해 2월 말부터 계획적인 시위를 지속해 벌였으며, 혁명이 절정에 이른 순간에도 일선에서 피를 흘렸다. 4·19 당시 서울 동성고 3학년으로 경무대(청와대) 앞에서 왼팔에 총을 맞은 강대기 씨는 “우리들은 자유 민주 정의를 위해 피를 흘렸다. 어떤 반대급부도 요구하지 않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나선 것 뿐이었다”(‘동성의 4·19혁명’에서)고 회고했다. 서울 경신고 2학년이던 권무웅 씨(작고)는 19일 밤 시위대와 차를 타고 경기 의정부로 가던 도중 창동에서 복부에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그는 병원에서 “이제 우리가 학생으로서 원하던 것은 다 성취된 셈”이라고 했다.(연세대 4월혁명조사반 자료) 4·19혁명은 증언할 수 있는 당사자들이 있는 만큼 진상을 폭넓게 조명하려는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몇몇이 학교 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왜곡된 기록을 정정한 특정 학교의 4·19혁명 백서가 최근에도 새로 나오기도 했다. ‘가짜 유공자’ ‘가짜 부상자’ 논란 역시 말끔히 정리됐다고 보기 어렵다. 한편 연세대 박물관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잦아드는 대로 서울 서대문구 박물관에서 ‘연세대 4월혁명연구반 수집자료’ 등을 소개하는 전시 ‘청년학생의 힘!―정의의 깃발, 자유의 함성, 민주의 길’의 문을 열 예정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올해 제73회 프랑스 칸영화제의 개최가 더욱 불투명해졌다. 칸영화제 조직위원회는 14일(현지 시간) “올해 영화제가 본래 형태대로 개최되기 어렵다. 6월 말, 7월 초 개최도 불가능하게 됐다”고 밝혔다. 하루 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전국적 이동 제한령을 5월 11일까지 연장하고, 대규모 축제나 행사는 7월 중순까지 열지 못하도록 하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칸영화제는 당초 5월 12∼23일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프랑스 정부가 이동제한령을 내리면서 6월 말이나 7월 초로 미룬 상황이었다. 칸영화제 조직위는 “영화제를 다른 방식으로 개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올해 영화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화제를 전면 취소한 건 아니라는 얘기다. 온라인 개최를 검토한다는 얘기도 흘러나왔지만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그 가능성을 일축했다. 1946년 시작한 칸영화제는 1968년에는 ‘68혁명’(학생·노동자들이 주도한 사회변혁운동) 여파로 영화제 도중 취소됐다. 1948, 1950년에는 재정 문제로 열리지 못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흥보가) 보유자로 정순임 씨(78)와 이난초 씨(59)를 14일 인정 예고했다. 정 씨는 어머니인 판소리 명창 장월중선 씨(1925∼1998)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해 박송희 전 보유자(1927∼2017) 문하에서 흥보가를 이수했다. 2007년 경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흥보가) 보유자로 인정돼 전승에 힘써 왔다. 균형 잡힌 발성과 가창 능력이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씨는 고 김상용 김흥남 명창으로부터 소리를 배웠고 1980년부터 강도근 전 보유자(1918∼1996) 문하에서 흥보가를 이수했다. 전북 남원을 기반으로 많은 제자를 양성해 왔다. 두 후보자 모두 동편제 계열의 흥보가를 전승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예고 기간(30일 이상) 각계 의견을 수렴하고 무형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인정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진나라 한나라와 로마 제국의 흥망사를 다뤘다. 비슷한 시기 유라시아 대륙의 양 끝에서 세계 인구의 절반가량을 다스렸던 이 제국들 사이엔 공통점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로마와 진나라 초기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가 비교적 유리했고, 권력과 부가 중앙으로 집중됐으며 관료제가 발달했다는 것. 또 한나라와 로마는 내부의 분열과 사리사욕으로 멸망했다고 본다. 내부의 압제와 부패, 공공전략의 부재로 국력을 소진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국계 미국인으로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자다. 오랫동안 ‘문사철(文史哲)’에 관심을 두고 경계를 넘나들며 연구했다고 한다. 봉건사회를 프랙털(부분이 전체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구조)에 비교하며 “전체 구조에 대한 일체감은 프랙털 구조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는 식으로 서술하기도 한다. 제목에서 용은 중국 황제권의 상징, 독수리는 로마 제국의 상징.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