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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차 좋지요, 좋은데 데이트할 때는 좀….” “가족여행 다니려면 안전한 게 제일인데, 역시 큰 차가….” 자동차 딜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다가 당초 예산보다 훨씬 비싸고, 옵션이 잔뜩 붙은 차를 사는 일이 적지 않다. ‘경차 사러 갔다가 벤츠 계약하고 왔다’는 농담이 나오는 이유다. 요즘은 온라인쇼핑몰,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의 마케팅 수법이 오프라인보다 더 교묘해졌다. 그중에도 소비자의 눈과 판단을 흐리는 사기적 상술을 ‘다크 패턴(dark pattern)’이라고 한다. ▷다크패턴은 쇼핑몰, 앱의 안내에 따라 클릭, 터치를 계속하다 보면 속아서 피해를 보거나, 비합리적 지출을 하게 만들어진 사용자인터페이스(UI)다. 영국의 UI 디자이너 해리 브링널이 원치 않는 행동을 하도록 소비자를 유도하는 온라인 마케팅 방식을 통칭해 2011년 다크 패턴이라고 이름 붙였다. 재작년 한국소비자원 조사에서는 국내 100개 전자상거래 모바일앱 가운데 97%에서 다크 패턴이 발견됐다. ▷원하는 상품을 다른 곳보다 훨씬 싸게 파는 온라인 쇼핑몰을 발견하면 소비자는 혹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마음을 정하고 결제 정보를 입력하는 단계가 돼서야 ‘배송료, 세금, 봉사료 별도’ ‘특정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가격 할인’ 같은 중요한 정보가 나온다는 점이다. 그것도 화면 하단에 눈에 띄지 않는 작고 흐릿한 글씨로. ‘또 낚였다’는 생각이 나도 들인 손품이 아까워 그냥 결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공정거래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비슷한 경험을 한 온라인 소비자의 비율이 71.4%다. ▷‘1개월 무료 체험’ 같은 조건으로 유혹해 앱을 깔게 하고, 이 기간이 지나면 소비자에게 알리지 않고 유료로 전환해 자동 결제하게 만드는 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 구독 서비스에 많은 수법이다. 통장 지출 내역을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쓰지 않는 서비스 이용료가 매달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고 지나간다. 물건을 사거나 회원에 가입하는 절차는 간편한데, 구매를 취소하거나 탈퇴하는 방법은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미궁 같은 앱도 많다. ▷공정위는 현행법으로 제재할 수 없는 6가지 다크 패턴 유형을 규제하기 위해 전자상거래법을 고치기로 했다. 다크 패턴은 일상에 바쁜 소비자들이 온라인으로 상품, 앱을 구매할 때 세세한 데까지 신경 쓰는 걸 귀찮아하는 심리적 허점을 노린다. 속았는데 속은 줄도 모르는 ‘호갱 소비자’가 주요 타깃이다. 결제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한 번 더 따져보는 깐깐한 소비자가 많아지지 않으면 어둠 속에서 지갑을 노리는 다크 패턴을 뿌리 뽑을 수 없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도쿄 주변 삼나무 전통가옥을 2만3000달러에 사서 살고 있는데 만족스럽다.” 일본인 부인과 몇 년 전 도쿄 북동쪽 이바라키현의 단독주택으로 이주한 호주 출신 40대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사연이 최근 뉴욕타임스에 소개됐다. 집주인 사망 후 지방자치단체가 보유하던 ‘아키야(空き家)’를 경매에서 낙찰받았다고 한다. 열차로 도쿄까지 45분 거리에 건평 250㎡, 대지 330㎡짜리 집을 불과 3000만 원에 샀다니 한국인들에게도 솔깃할 일이다. ▷버블경제의 거품이 걷히고,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버려진 빈집이 아키야다. 노무라증권에 따르면 2018년 850만 채였던 아키야는 2033년에는 2000만 채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집값이 싸다 보니 일본 이주를 원하는 외국인들의 관심이 높다. 최근에는 이들을 상대로 빈집을 수리해 판매하는 업체도 여럿 생겼다. 부동산 세수가 줄어 고민하는 일본의 지자체들로서도 반길 만한 일이다. ▷고령자 비율이 높은 지역에 더 많지만 수도인 도쿄에서도 주택의 10% 정도가 빈집으로 방치돼 있다. 낡은 집을 수리하는 데 큰돈이 들고, 상속세율까지 높아 고령 거주자 사망 후 물려받으려는 자손이 많지 않다. 빈집이 늘면 도시가 슬럼화하고, 범죄 위험도 커진다. 일본의 지자체 가운데 처음으로 교토가 2026년부터 빈집, 사용하지 않는 별장 등 1만5000여 채 소유주에게 ‘빈집세(稅)’를 물리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도 ‘빈집 위험국’이다. 지방 도시에서 황폐화한 폐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집계 방식마저 통일이 안 돼 있다는 점이다. 5년마다 방문조사 때 당일 비어 있는 집을 집계한 통계청 조사에서 재작년 전국의 빈집은 139만 채로 전체 주택의 7.4%였다. 전기·상수도 사용 여부를 기준으로 하는 국토교통부의 작년 통계는 10만8000채로 이보다 훨씬 적다. 정부는 지난해에야 여러 부처에 흩어져 있는 빈집 관리 업무를 통합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빈집과 달리 도쿄, 교토 도심의 새집 값은 급등세다. 버블 붕괴 후 집을 사려는 이가 줄자 새 주택을 많이 짓지 않아서다. 달러화에 비해 엔화의 가치가 크게 떨어진 ‘킹 달러’ 현상 때문에 한국의 아파트와 비슷한 맨션에 투자하는 외국인이 늘어난 영향도 크다고 한다. 작년 일본 수도권에서 팔린 신축 맨션 중 8.4%는 가격이 1억 엔(약 9억8500만 원)을 넘어서 1980년대 중후반 버블 시기의 집값을 되찾았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에겐 비싸게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의 아파트 중간가격은 올해 2월에야 겨우 10억 원 밑으로 떨어졌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처음엔 ‘재미 한번 보자’는 식으로 시작한다. 일단 발을 들이면 점점 더 깊이 빠져든다. 덜 독하고 부담이 적은 쪽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더 유해하고 파탄에 이르는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의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들을 통해 누군가 이득을 챙기는 구조가 굳어지면 다시는 원상태로 돌아가기 어렵다. 포퓰리즘은 이렇게 마약과 비슷한 점이 많다. 그래서 정치인이 국민 세금을 멋대로 퍼주는 인기영합주의 정책을 ‘정치적 마약’이라고 한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은 마약 청정국이었다. 지금은 생활 속 깊숙이 마약이 침투했다. 서울 강남 한복판 학원가에서 마약 탄 음료를 학생들에게 먹이는 범죄가 벌어졌다. 유명인이 마약하다 걸린 뉴스에도 “그럴 것 같았어”라는 심드렁한 반응이 나올 정도로 익숙해졌다. 10만 명당 마약사범이 20명 미만인 청정국 지위를 한국은 2016년 잃었다. 한국의 중앙 정치무대에 퍼주기 포퓰리즘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10년 남짓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맞붙은 2012년 대선이 시발점이다.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 월 20만 원을 약속한 박 후보는 기초연금을 5년에 걸쳐 2배(9만→18만 원)로 올리자는 문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임기 첫해 “약속을 못 지켜 죄송한 마음”이라며 대상을 소득하위 70%로 축소했지만 정치적 이득은 톡톡히 챙겼다. 그때 일을 문재인 대통령은 단단히 기억해 뒀던 모양이다. 21대 총선을 하루 앞둔 2020년 4월 14일 그는 헌정사상 첫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결정했다. ‘고무신 선거’의 부활이란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전 국민에게 지급하자”고 먼저 제안한 건 야당인 미래통합당 쪽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은 대승을 거뒀고, 4인 가족 기준 100만 원이 전 국민에게 지급됐다. ‘오랜만에 한우 맛을 봤다’는 반응에 문 대통령은 “가슴이 뭉클하다”고 했다. 작년 3월 대선은 한국 포퓰리즘사의 신기원이었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실행에 수백조 원이 드는 ‘기본 시리즈’를 앞세웠다. 이행 불가능한 공약이란 지적이 나와도 그는 “앞으로도 그냥 포퓰리즘을 하겠다”고 했다. 포퓰리스트라는 낙인이 정치인에게 불명예가 아닌 시대가 열렸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도 질세라 ‘병사 월급 200만 원’으로 응수했고, 선거 막바지엔 ‘50조 원 자영업자 손실보상’ 공약을 내놨다. 총선을 1년 앞두고 다시 포퓰리즘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정부가 보증을 서서 전 국민에게 최대 1000만 원을 최장 20년간 낮은 이자로 빌려주는 ‘기본대출’ 카드를 꺼냈다. 대출 원금에만 수백조 원이 들고, 나중에 갚지 않는 돈을 얼마나 세금으로 메워 넣어야 할지 가늠하기 힘든 정책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모든 정책을 당정이 협의하라”고 내각에 지시한 후 여당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지지율을 의식한 전기·가스요금 동결이었다. 막대한 비용이 들어갈 광주 군공항 이전 특별법, 대구·경북 신공항 건설 특별법도 여야는 주고받기식으로 통과시킬 계획이다. 한국에서도 포퓰리즘에 제동을 걸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명박 정부 말기인 2012년 박재완 장관이 이끌던 기획재정부는 ‘박근혜·문재인 대선캠프 복지공약 이행에 최소 268조 원이 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여야의 반발, 선거관리위원회의 반대로 포퓰리즘의 싹을 도려내는 데 실패했다. 그 후 10여 년간 포퓰리즘은 한국 정치판에 뿌리를 내렸다. 포퓰리즘에 깊이 중독됐다가 빠져나온 나라는 세계적으로 전례를 찾기 어렵다. 한국을 ‘포퓰리즘 청정국’으로 돌이키려면 온 국민이 포퓰리즘 정치와 한판 전쟁이라도 치러야 하는 걸까.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이권 카르텔’이란 말을 공식 석상에서 처음 쓴 건 재작년 6월 29일이다.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에서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하면서 그는 “정권과 이해관계로 얽힌 ‘소수의 이권 카르텔’은 권력을 사유화하고, 책임의식과 윤리의식이 마비된 먹이사슬을 구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후 표현 강도는 점점 세졌다. 같은 해 11월 국민의힘 대선후보 수락 연설에선 “적폐, 부패의 카르텔을 혁파하고 반드시 정권교체를 해내겠다”고 강조했다. 대통령 취임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카르텔’이란 말은 작년 12월에 다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민노총 화물연대의 집단 운송거부 사태에 정부가 법과 원칙에 따라 강경 대응해 화물연대 측이 백기를 든 직후다. 대통령은 “일자리 세습, 기득권의 일자리 지키기를 위한 이권 카르텔”이란 말로 노동계를 비판하면서 이권 카르텔과의 전선에 복귀했다. 이후 현 정부 개혁과제 중 최우선 순위로 떠오른 노동 카르텔과의 전쟁에서 정부여당은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정부의 회계 투명성 강화 요구는 필요성이 너무 자명해서 ‘노조 탄압’이란 노동계의 반발이 국민들에게 먹혀들지 않고 있다. 경찰 수사로 드러난 건설 현장 노조의 폭력적 행태들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노동계 이권 카르텔의 실체를 확인시켜 줬다. 지지율까지 끌어올린 승전고에 고무됐던 것일까. 지난달 15일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대통령은 예상치 못한 쪽으로 전선을 확대했다. 5대 은행, 3개 이동통신사였다. 정부의 인허가를 받아 과점적 지위를 누리는 이들이 고금리, 고물가로 고통받는 국민을 상대로 높은 대출금리, 비싼 통신요금을 통해 이익을 챙기는 걸 비판하면서 대통령은 ‘카르텔’을 거론했다. 역대 정부에서 비슷한 일을 경험한 은행들은 앞다퉈 대출금리를 낮췄고, 통신사들은 중간요금제 출시 계획을 내놨다. 그런데 그 정도로는 역부족이었다. 과도한 상여금 등 기업의 도덕적 해이가 경범죄라면, 카르텔은 조직범죄다. 해법의 스케일도 달라져야 했다. 금융위원회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경쟁을 촉진해 과점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해당 분야에 진출할 새로운 사업자를 찾기 시작했다. 경제 검찰인 공정거래위원회도 은행, 통신사 조사에 뛰어들었다. 문제는 규제 강도가 세계 최고인 한국 은행업에 진출하려는 기업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급기야 최근엔 새로 허가할 특화은행 모델로 금융당국이 검토해온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하는 일까지 생겼다. 글로벌 금융권이 요동치는 지금은 건전성에 큰 탈이 없는 국내 은행에 당국이 오히려 고마워할 상황이다. 통신 부문도 수조 원을 투자하면서 선진국보다 크게 낮은 수익률에 만족할 제4 이동통신사업자 후보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음식점 소주, 맥주 가격이 6000원, 7000원으로 오른다는 말이 나온 뒤에는 주류업체들도 고물가를 틈타 독점적 이득을 챙기는 집단으로 지목됐다. 카르텔이라 부르지 않았을 뿐 정부가 대하는 태도는 은행, 통신사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공장 출고가가 100원 오를 때 식당 술값이 1000원 단위로 오른다는 사실이 확인돼 정부만 머쓱해졌다. 술값을 올려 전기·가스요금 상승을 벌충하려는 식당 주인들까지 이권 카르텔로 매도할 순 없었을 것이다. 1년 8개월 전 대통령이 지목한 카르텔은 정치권력을 장악한 좌파 운동권 세력과 이들과 연계해 이권을 챙기는 집단이었다. 지금은 정부가 원하는 방향에 어긋나게 움직이는 기업, 세력에 카르텔이란 이름이 붙고 있다. 문재인 정부 때 ‘적폐’란 말이 비슷한 식으로 쓰였다. 넓어져 가는 이권 카르텔 전선에서 나오는 이상 신호에 정부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그분은 6·25에 대해 경험이 없으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지 잘 모르겠다. 왜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말하면서 천안함 사건이나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은 언급하지 않는가.”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 부의장인 송시영 서울교통공사 올바른노조 위원장이 민노총 위원장의 발언을 받아치면서 한 이야기가 보름이 지나도 귓가에 맴돈다. 새로고침 노협은 지난달 출범한 30대, 사무직 중심인 MZ 노조들의 협의체다. 앞서 양경수 민노총 위원장은 2002년 발생한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MZ세대로 일컬어지는 분들은 이런 대중적 반미투쟁 당시 아주 어렸거나 아예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노조 활동을 하다 보면 정치 문제 개입이 노동자, 서민의 삶을 바꾸는 데 중요한 의제라는 사실에 동의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MZ 노조가 반미, 반정부 정치투쟁을 지양하고 노동자 권익, 처우 개선이란 ‘노조의 본질’에 집중하겠다고 밝힌 데 대한 반응이었다. 표현이 좀 순화됐을 뿐 ‘젊고 경험 없는 세대라 뭘 몰라서…’라는 말처럼 들린다. 120만 조합원을 거느린 민노총은 정치권도 절절매는 거대 노조이자, 우리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기성 권력이다. 이들에게 “천안함, 서해 공무원 피격은 왜…”라고 당당히 묻는 MZ세대를 보면서 1980년대 대학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좌경화 이념교육을 막 받기 시작한 대학 신입생 가운데 궁금증이 많은 이들은 북한 체제와 정권을 칭송하는 선배에게 “그럼 북한이 쳐들어와도 총 들고 싸우지 않을 겁니까”라고 묻곤 했다. 그럴 때 나오는 대답은 십중팔구 이랬다. “의미 없는 질문이다. 같은 민족인 우리에게 북한이 총부리를 겨누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문답이 오가던 1980년 중후반에 태어난 세대가 지금 MZ 노조의 주축이다. 북한이 차근차근 핵 개발에 성공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갖춘 사실상 핵보유국이 되는 과정,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폭침(2010년)을 보면서 성장했다. 최근에는 김여정이 남쪽을 향해 핵미사일을 쏠 수 있다고 공언해도 북한에 싫은 말 한마디를 않는 기성 노조의 태도를 평소 가슴 깊이 담아 뒀을 것이다. 4050세대와 다른 시대를 살아온 MZ세대는 기업관도 완전히 달라졌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최근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MZ세대의 35.1%는 기업에 ‘호감’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11.3%인 ‘비호감’의 3배가 넘었다. 호감 가는 기업인 유형으로는 ‘삼성·현대차 등 거대 재벌 기업의 창업자’가 1위였다. 지난해 말 화제였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등장인물 중에서 진양철 회장의 인기가 유독 높았던 게 우연이 아니다. 주식에 투자하는 500만 2030세대에게 대기업은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곳일 뿐 아니라 자산을 불려주는 원천이기도 하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시대에 노동운동을 시작한 60년대 출생, 80년대 학번과 그들의 이념체계를 그대로 물려받은 40대 후반이 지금 한국의 노동운동을 이끌고 있다. 젊어서 ‘대기업은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매판자본’이라고 배웠고, 지금도 기업을 보는 눈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MZ 노조가 경험을 더 쌓는다고 생각이 비슷해질 리가 없다. 인간의 이념은 20대에 형성돼 평생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30년 만에 후진국에서 선진국이 된 한국 같은 사회에선 개인과 조직의 정신적 성장이 변화를 못 따라잡는 일이 자주 생긴다. 자기가 멈춰 있는 건 잊고, 시대를 앞서가는 젊은 세대에게 자꾸 뭔가 가르치려 드는 사람을 ‘꼰대’라고 한다. 지금 민노총은 MZ 노조에 충고할 때가 아니다. 뭐라도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당신은 일하려고 살지만,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질색을 한다는 넷플릭스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미국 마케팅기업이 인수한 파리의 명품 전문 마케팅업체에 파견된 본사 직원 에밀리가 업무에 강한 의욕을 보이자, 이를 불편해하는 프랑스인 선임 직원이 해주는 충고다. 달리 말하면 “너무 무리해 주변 사람 힘들게 만들지 말고, 살살 하자”는 거다. 미국인 시각에서 프랑스인 삶의 태도를 과도하게 전형화한 것은 맞지만 어느 정도 진실도 담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추진하는 연금개혁의 핵심은 일하는 나이를 현재 62세에서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64세로 올리는 부분이다. 은퇴자 증가로 불어나는 재정 악화, 미래세대의 세금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다. 프랑스는 정년과 은퇴 연령을 일치시켜 놔서 일도 2년 더 해야 한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 퇴직 연령은 60.6세다. 10명 중 6명은 60세 이전 은퇴를 원한다. 실제 프랑스의 평균 은퇴 연령도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몇 년씩 빠르다. “더 오래 일하자”는 마크롱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이유다. 연금개혁의 큰 파도를 맞은 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1988년 도입된 국민연금은 초기 가입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내는 돈에 비해 너무 많은 보상을 약속했다. 소득의 9%인 현재 보험료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절반 수준인 데다, 고령화 속도가 빨라져 올해 33세 근로자가 연금을 받기 시작할 2055년에 기금이 완전히 고갈된다. 이걸 아는 2030청년들이 “받지도 못할 국민연금 차라리 탈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다. 하지만 한국은 프랑스와 분명히 다른 게 있다. 재작년 통계청 조사에서 한국의 55∼59세 장년층이 희망한 은퇴 연령은 70세. 프랑스인들보다 9년 이상 늦다. 다만 현실은 많이 달라서 가장 오래 일하던 일터를 떠날 때 남성 근로자의 평균 연령은 51.2세, 여성은 47.7세다. 한국의 55∼64세 장년층 고용률도 66%로 77%인 일본, 72%인 독일보다 크게 낮다. 한국의 중장년층은 기회가 없을 뿐 더 일하고, 연금을 더 오래 낼 의욕이 여전히 넘쳐난다. 이들을 더 일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60세 법정 정년과 하락하는 생산성에 맞춰 임금을 낮출 수 없게 만드는 연공서열식 호봉제다. 역대 정부와 정치권은 ‘청년 일자리를 중장년층이 뺏는다’라는 비판, 강성노조의 반발, 그로 인한 득표 손해를 의식해 문제를 방치해 왔다. 이런 생각이 그릇된 선입견일 수 있다는 증거가 요즘 속속 나오고 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최근 2030세대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60세 정년을 연장하는 데 반대한 청년은 25%, 찬성은 그 3배인 75%였다. 찬성의 첫 번째 이유는 ‘노년 빈곤 문제 해결’(46%), 두 번째가 ‘청년층 국민연금 부담을 줄인다’(20%)였다. 부모·삼촌 세대가 더 일해 줘야 미래에 자신들이 져야 할 짐이 가벼워진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이 훨씬 많다는 뜻이다. 청년 알바 구하기에 지친 자영업자들도 구직 광고에 ‘중장년층 환영’이라고 써넣기 시작했다. 인구는 줄고, 더 좋은 일자리를 찾는 청년들 대신 나이 든 세대가 할 일이 생겨나고 있다. 한국 베이비부머의 대표 격인 ‘58년 개띠’들이 올해 65세다. 그 뒤 10년간 태어난 이들의 ‘더 일할 의욕’은 연금개혁 등을 둘러싼 K부머와 MZ세대의 대립적 관계를 괜찮은 궁합으로 바꿀 수 있는 한국만의 자산이다. 일반인 500명을 모아 토론하자며 개혁을 미루고, 임기 끝날 때쯤에나 개혁 완성판을 내놓겠다는 정치권과 정부가 그 가치를 제대로 모를 뿐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많게는 100만 원 넘는 세금을 연초에 돌려줘 ‘13월의 보너스’로 불리던 연말정산. 요즘 다수의 월급쟁이들에게 연말정산이 반갑지 않은 ‘신년 세금폭탄’으로 바뀌고 있다. 2021년 근로소득에 대한 작년 초 연말정산 결과 세금을 조금도 돌려받지 못하고, 오히려 더 낸 직장인이 전체 근로소득 신고자의 19.7%인 393만4600명이었다. 1인당 평균 97만5000원, 총 3조8373억 원의 세금을 추가로 납부했다. 세금을 일부라도 돌려받은 근로자는 67.7%다. ▷연말정산 결과 내야 할 근로소득세보다 원천 징수된 세액이 적을 경우 세금을 더 내는 일이 벌어진다. 월급은 올랐는데 이전 기준으로 세금을 매긴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년 달라지는 소득공제 항목도 영향을 미친다. 코로나19 첫해인 2020년분 정산 때에는 평균임금 상승률이 1.2%로 낮고, 공제 혜택이 일시적으로 커져 세금을 돌려받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2021년분 정산에선 임금이 3.9% 오르고, 공제 혜택이 줄면서 추가로 세금 낸 사람이 전년보다 42만 명 증가했다. 다만 소득이 낮은 근로자 35.3%는 근로소득세를 전혀 내지 않았다. ▷막 시작된 2022년분 연말정산 결과도 불안하다. 작년 근로자의 임금 상승률은 3.8%로 높은 세율 구간에 새로 진입한 근로자가 적지 않다. 문제는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공급망 갈등의 영향으로 소비자물가가 5.1%나 올라 실질소득은 오히려 감소했다는 점이다. 높은 물가 때문에 구매력이 줄었는데도, 화폐로 표시된 ‘명목소득’이 늘어 소득세를 더 내게 되는 전형적인 ‘인플레이션 세금’ 현상이다. ▷같은 직장, 비슷한 월급을 받는 동료가 세금을 돌려받았다면서 좋아하는데 자신은 세금을 더 토해내야 한다면 큰 손해를 본 것처럼 느끼게 마련이다. 2015년 초 터진 ‘연말정산 파동’이 그런 경우였다. 출산·다자녀가구, 독신가구의 공제 혜택을 줄인 소득세법 개정으로 동료 근로자보다 세금을 더 내게 된 월급쟁이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박근혜 정부가 사과하고, 연봉 5500만 원 이하 근로자 541만 명에게 8만 원씩 세금을 돌려줬지만 성난 민심을 달래기가 쉽지 않았다. ▷세금 나갈 일은 늘었지만 연말정산 자체는 쉬워졌다. 국세청은 신용·체크카드, 현금영수증 결제 내역, 기부금 액수 등 소득공제에 필요한 대부분의 자료를 간소화 서비스로 제공한다. 올해는 신용카드·대중교통 결제, 무주택 가구주가 집을 얻느라 대출한 금액 등의 공제 혜택이 늘었다. 꼼꼼히 혜택을 챙겨 한 푼의 세금도 억울하게 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한국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까지 거리는 6800∼7600km. 몇 달 새 이들 산유국과 한국의 간격이 확 좁혀진 느낌이다. 작년 11, 12월 두 달간 한국인들은 카타르에서 들려오는 월드컵 소식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11월 방한한 사우디 왕세자는 ‘현대판 만리장성’으로 불리는 네옴시티 건설 등과 관련해 한국 기업과 40조 원 투자협약을 맺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방문한 UAE는 300억 달러의 한국 투자를 약속했다. 미국의 강한 견제를 받는 중국이 성장률·인구까지 정점을 찍고 하강세로 돌아서면서 새로운 돌파구 마련이 절실한 한국 경제는 ‘제2 중동 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1970∼80년대 오일쇼크 때 중동 건설로 오일머니를 벌어들여 위기를 극복했던 ‘1차 중동 붐’ 재현에 대한 기대다. 산유국들이 기름값 폭등으로 번 돈을 ‘포스트 오일 시대’를 위해 쏟아붓는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하면 금세라도 꽉 막힌 국내 청년실업 문제의 숨통이 트일 것만 같다. 다만 걱정거리가 하나 있다. 우리 청년들이 기성세대처럼 중동 붐을 자신의 미래를 향해 열린 기회로 받아들일까 하는 거다. 먼저 중동 진출을 놓고 벌어졌던 8년 전 논란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015년 4월 중동 순방을 마친 박근혜 대통령은 무역투자진흥회의를 주재하면서 “대한민국에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중동 진출을 해보라. 다 어디 갔느냐고, 다 중동 갔다고…”라고 했다. 성장 둔화, 청년실업 악화의 돌파구를 중동에서 찾자는 주문이었는데,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 때 중동 붐의 기억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청년들의 반응은 싸늘함을 넘어선 분노였다. 영화 ‘친구’ 유명 대사를 패러디한 ‘니가 가라, 중동’이란 말은 금세 유행어가 됐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이 거론한 중동 일자리는 정보기술(IT), 의료 등으로 1970년대 할아버지 세대들이 맡았던 건설노동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청년들 귀엔 ‘국내에 일자리가 없다고만 하지 말고 열사의 사막에 가서 땀 흘려 일하라’는 말로 들렸던 거다. 평소 국민과의 소통 부재, 특유의 썰렁한 꼰대 유머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2차 붐을 통해 한국 기업들이 중동 진출을 꾀하는 산업은 원전, 방산, 플랜트, 바이오, 스마트팜 등 첨단 분야다. 사우디의 ‘미스터 에브리싱’ 빈 살만 왕세자는 한국의 게임, 콘텐츠 산업에 관심이 많아 국부펀드를 통해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최근 막대한 투자를 결정했다. 사우디 미래도시에는 네이버의 로봇 기술이 채용될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한국 게임에 1인당 가장 많은 돈을 쓴 나라 1, 2위는 카타르, 아랍에미리트였다. 이런 프로젝트들이 성공하려면 한국 청년 인재들이 해외에 나가 미래를 개척할 마음이 생겨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을 거란 조짐이 적지 않다. 서울 등 수도권 일부 지역을 벗어나면 인재를 못 구해 “지방에선 벤처가 불가능하다”고들 한다. 중소기업·자영업자들은 “최저임금보다 더 준대도 청년 알바 씨가 말랐다”고 하소연이다. 양질의 일자리 부족, 청년인구 감소란 이유가 있긴 해도 작년 늘어난 일자리의 55%를 60세 이상이 채운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이 겪는 문제들을 20년 정도 앞서 경험해온 일본에선 청년들이 자국 내의 친숙한 삶에 안주해 해외 유학, 근무를 기피한다는 한탄이 나온 지 오래다. 최근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서 판교의 IT 기업들이 재택근무를 줄이자 사무실에 자주 나가는 데 반발한 젊은 직원들의 노조 가입률이 급증했다고 한다. 해외에서 일자리를 발굴하는 것보다 지금 우리 경제의 더 급한 숙제는 청년들 가슴속에 잠자는 ‘야성’을 흔들어 깨우는 것일지 모른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노조 △△한테 얘기하면 된다더라.” “○○ 아들은 벌써 내정이 됐다던데….” 현대자동차 노조가 최근 ‘채용 관련 어떠한 불법행위도 근절한다’는 제목의 특이한 보도 자료를 냈다. 올해 700명의 생산직 근로자 채용을 앞두고 온갖 소문이 다 돌고 있기 때문이다. 노조는 “채용 과정에 청탁·압력·강요·금품·향응은 있을 수 없다. 비리 연루자는 법적 책임을 묻고 일벌백계하겠다”고 했다. ▷노조가 직원 채용과 관련해 이처럼 이례적인 입장 표명을 한 건 18년 전 현대차·기아 채용비리 사건의 트라우마가 생생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기아는 2004년 10월 광주공장 생산계약직 근로자를 뽑으면서 1079명의 채용 인원 중 30%에 대한 ‘추천권’을 노조에 준 사실이 이듬해 초 드러났다. 원래 1000명으로 예정됐던 인원이 늘어난 것도 너무 많은 청탁이 몰렸기 때문이란 말이 나왔다. 추천권을 행사하는 노조 간부에게 거액의 사례금을 건네고 입사한 근로자 중에는 나이, 학력을 속인 부적합자가 적지 않았다. ▷당시 기아 노조위원장이 “인사 청탁이 관행화되면서 광주공장 노조 간부처럼 도덕적 불감증에 빠져 입사자들로부터 금품을 수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고 없는 응시자는 사실상 입사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노조 관계자들이 채용에 깊숙이 개입했다. 2005년 5월에는 현대차 쪽까지 사태가 번졌다. 노조 간부, 대의원들이 취업 청탁을 대가로 사례금을 챙겼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일부는 구속됐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같은 우려가 나오는 건 현대차·기아가 청년들이 선호하는 최고의 직장이기 때문이다. 현대차 생산직의 2021년 평균 연봉은 9600만 원으로 한국 근로자 평균 연봉(4024만 원)의 2.4배다. 60세 정년이 보장될 뿐 아니라 퇴직 후 계약직으로 1년 더 다닐 수도 있다. 재직 중에는 30%, 장기근속자는 퇴직 후에도 25%의 할인율이 현대차를 살 때 적용된다. 블루칼라 근로자들에겐 꿈의 직장인 셈이다. 게다가 현대차의 생산직 신입 채용은 2013년 4월 이후 10년 만이다. ▷최근에는 기아 단체협약의 ‘고용세습’ 조항이 문제로 떠올랐다. 노동당국은 작년 말 ‘정년퇴직자 및 장기근속자 자녀를 우선 채용한다’는 기아 단협을 고치라는 시정명령을 의결했다. 헌법상 평등권, 채용 때 차별을 금지하는 고용정책기본법 취지에 어긋난다는 이유다. 현대차 노사는 2019년 삭제한 조항이지만 기아 노조는 여전히 ‘협약 사수’를 외치고 있다. 좁은 취업문을 넘으려고 애쓰는 MZ세대 청년들의 눈에 이런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두렵지 않은가.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부동산, 기숙사, 준비, 광고…. 베트남 호찌민이나 하노이, 한국 관광객이 몰리는 다낭, 호이안 거리에 걸린 프랑스식 알파벳 간판을 찬찬히 소리 내 읽어 보면 한국말로 뜻이 통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어와 베트남어 어휘 가운데 한자어 비중은 양쪽 모두 60% 이상. 오랫동안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보니 발음까지 똑같은 단어가 많은 것이다. 유교 전통이 강한 점도 비슷하다. 이렇게 닮은 데가 많은 두 나라의 경제 관계가 더 긴밀해지고 있다. ▷한-베트남 수교 30주년이었던 작년 한국이 가장 많은 무역수지 흑자를 낸 상대국에 처음으로 베트남이 올랐다. 610억 달러어치 상품을 수출하고, 267억 달러어치를 수입해 무역흑자는 343억 달러였다. 재작년 1위(352억 달러)였던 홍콩은 작년 3위(258억 달러), 재작년 3위(243억 달러)였던 중국은 22위(12억5000만 달러)로 내려앉았다. 미중 공급망 갈등,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홍콩을 경유하거나, 직접 중국으로 간 대중 수출이 급격히 준 탓이다. ▷1986년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개혁개방정책 ‘도이머이’를 시작한 베트남은 최근 들어 후발국 프리미엄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미국 등 서방 세계의 중국 견제가 본격화한 가운데 대체 생산기지로 베트남의 존재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베트남 통계청이 내놓은 작년 경제성장률 추정치는 8.0%로 1997년 이후 최고다. 한국 1%대, 중국도 4%대 성장이 예상되는 올해에도 베트남 경제는 6%대의 성장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베트남의 급성장에는 현지에 진출한 9000여 개 한국 기업들의 기여가 컸다. 누적 기준으로 베트남에 대한 외국인 투자에서 한국은 수년째 건수, 금액 모두 압도적 1위다. 재작년 베트남 전체 수출액의 20%는 삼성그룹이 올렸다. 전 세계에서 팔리는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절반, LG전자의 많은 가전제품들이 베트남에서 생산된다. 미중 패권경쟁으로 인한 ‘지경학 리스크’를 피하려는 애플 등 미국 기업들도 베트남 생산을 늘리려고 한다. 1980, 90년대 선진국 자본이 일본의 높은 인건비 등을 피해 한국 투자를 늘린 것과 닮은꼴이다. ▷1992년 5억 달러로 시작한 한국과 베트남의 교역 규모는 31년간 175배로 성장했다. 한국의 교역대상국 중 중국, 미국에 이은 3위다. 아직 수출품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석유화학 등 중간재가 많지만 의류, 화장품, K컬처 상품 수출이 빠르게 늘고 있다. 인구 1억 명, 평균 연령 32.5세의 젊은 나라 베트남은 이미 한국에 없어선 안 될 경제 파트너다. 따져 보면 무척 닮은 두 나라의 인연이 점점 깊어져 간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너희 그거 알아? 통계 방식이 달라서 그렇지 미국식으로 따지면 소련 GDP(국내총생산)가 미국보다 훨씬 많다고….” 1980년대 대학가 운동권 선배들이 신입생을 앉혀 놓고 반미(反美) 교육을 하면서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양하던 말이다. 당시 많은 좌파 지식인들도 비슷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물론 1991년 소련 붕괴 후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났다. 철의 장막을 들추고 본 소련 경제는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도 훨씬 형편없었다. 생산과 분배를 당 중앙이 통제하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보고 단계마다 통계가 분식되는 일이 벌어졌다.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하달받고, 달성 못 하면 질책당하는 하급자들로선 대안도 없었다. 전국적으로 ‘제로 코로나’ 반대 시위가 발생하자 허겁지겁 ‘위드 코로나’ 체제로 전환한 중국에선 지금도 비슷한 일이 생긴다. 화장장이 미어터져도 정부가 발표하는 사망자 숫자는 턱없이 적다. 비판이 쏟아지자 결국 중앙정부 차원의 통계 발표를 중단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소득주도성장(소주성),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감추기 위해 많은 통계가 분식됐다는 의혹이 커지고 있다. 소득, 고용, 집값 등 주요 통계에 청와대 관계자들이 부당하게 개입했는지에 대한 감사원 조사가 마무리 단계다.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아 ‘알고 보니 문 정부의 진짜 경제정책은 소주성이 아니라 통주성(통계주도성장)’이라는 농담까지 나왔다. 제일 이상한 일은 2018년 황수경 통계청장 교체를 전후해 벌어졌다. 문 정부가 소주성 기조에 따라 최저임금을 16.4%나 올린 그해 1분기에 저소득층 소득이 급감하고, 소득 격차가 최악으로 벌어졌다는 통계가 나왔다. 당시 문 대통령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 등을 근거로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라고 반박했다. 얼마 뒤 취임한 지 13개월밖에 안 된 황 청장이 바로 그 보고서를 쓴 강신욱 청장으로 교체됐다. “좋은 통계를 만들어 보답하겠다”고 한 강 청장 취임 후 가계소득 통계 방식이 바뀌어 그 이전과 소득분배 수준을 비교할 수 없게 됐다. 나중에 ‘비정규직 제로(0)’ 정책을 펴는 정부에서 비정규직이 사상 최대가 됐다는 통계가 나오자 강 청장은 “비정규직 분류 방식이 바뀌어서”라고 했다. 백미는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2020년 국회에서 한 집값 발언이었다. 그는 한국부동산원 전국 통계를 들어 “(문 정부 3년간) 11% 정도 올랐다고 알고 있다”고 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같은 기간 서울 전체 집값 34%, 서울의 아파트값은 52% 올랐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통계 방식 차이”라고 했지만 어느 쪽이 진실인지 헷갈리는 사람은 없었다. 통계가 아니어도 대통령 발언 속 숫자의 진위 논란이 지난 정부에서 끊이지 않았다. 작년 1월 문 전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지난해(2020년) 한국 성장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라고 자랑했는데 다른 나라 통계가 모두 나온 뒤 확인된 순위는 6위였다. 이전 정부에서도 성장률을 반올림하는 수준의 ‘통계 마사지’는 있었다. 하지만 문 정부처럼 통계 체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적은 없다. “세상엔 세 종류 거짓말이 있는데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이 현실이 될 때에는 꼭 필요한 조건이 있다. 그릇된 정책을 선택해 놓고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잘했니”라고 다그쳐 묻는 절대권력 앞에서 통계라는 ‘정책의 거울’은 자주 거짓말을 한다. 역대급 좌파 경제정책을 추진한 정부에서 생긴 일이라는 것도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그래서 통주성은 실패한 소주성보다 더 고약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지난해 초 가수 아이유와 쏙 빼닮은 외모로 틱톡에서 인기를 끌던 중국의 뷰티 인플루언서가 화제가 됐다. 아이유 특유의 깜찍한 옷차림, 표정을 따라할 뿐 아니라 눈매, 얼굴형까지 흡사해 중국의 아이유, ‘차이유’로 불리던 인물이다. 하지만 중국 누리꾼이 폭로한 차이유의 실제 외모는 아이유와 전혀 닮지 않았다. 영상 합성 기술 딥페이크로 만든 가짜 얼굴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건들을 통해 ‘퍼블리시티(Publicity)권’에 대한 관심이 국내에서 확산됐다. ▷법무부가 내년 상반기 중 ‘인격표지(標識) 영리권’을 넣어 민법을 고치기로 했다. 미국 36개 주와 독일, 일본, 프랑스 등이 인정하는 퍼블리시티권을 한국에 도입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성명, 초상, 음성, 그 밖의 인격표지를 영리적으로 이용할 권리를 갖는다’는 조항이 신설된다. 권리를 위임하거나 물려주는 것도 가능해진다. 상속 후 권리 존속 기간은 30년이다. 자녀가 부모의 퍼블리시티 권리를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이다. ▷법이 도입되면 ‘차이유 사건’ 같은 일이 생겼을 때 손해배상 청구 등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퍼블리시티권을 명문화한 법이 없어 한국 법원은 유명인 초상권이 상업적으로 무단 사용된 경우 부정경쟁방지법 등에 따라 판단해 왔다. 아이돌 가수가 기획사에 초상권 활용 권한을 위임할 수 있는지 불분명했는데 이런 권리관계도 명확해진다. 신념에 어긋나는 등 중대 사유가 발생하면 위임을 철회할 수도 있다. ▷퍼블리시티권과 많이 혼동되는 권리가 저작권이다. 저작권은 노래, 영화, 문학작품 등 창작물을 보호할 뿐 창작자 개인의 특성까지 보호하진 않는다. 퍼블리시티권에는 초상권, 음성권, 성명권뿐 아니라 특색 있는 개인의 몸짓, 말투까지 포함될 가능성도 있다. 유명 배우의 말투, 인기 개그맨의 유행어를 성우 등 다른 사람이 성대모사 해 상업광고에 사용하는 게 그런 경우다. 원래의 배우, 개그맨에게 보상할 의무가 발생할 수 있다. 유명해진 범죄자가 자기 얼굴, 이름 등을 영리 목적으로 이용하려 할 때 이를 용인할 것이냐 하는 논란도 예상된다. ▷이 법이 주목받는 건 일반인도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올린 짧은 동영상 하나로 ‘벼락스타’가 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본인 의사에 반해 이름, 사진 등이 사용될 경우 손해배상도 청구할 수 있게 된다. 외모, 이름, 목소리를 자신만의 브랜드로 잘 키우면 돈도 벌고, 심지어 자녀나 배우자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인생의 과거 특정 시점으로 ‘타임 슬립’해 돌아가는 회귀, 다른 사람 몸으로 옮겨가는 빙의, 다른 시간·세계에서 새로운 인물로 태어나는 환생. 통칭 ‘회·빙·환’은 청년들이 좋아하는 스토리텔링이다. 취업, 연애, 내 집 마련, 뭐 하나 뜻대로 풀리지 않아 ‘이번 생은 망했다’고 느끼는 청년이 많은 게 인기의 이유라는 해석이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아는 걸 그때의 내가 알았더라면…”으로 요약되는 회·빙·환식 발상이 젊은 사람만의 것은 아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 역시 평생 비슷한 생각, ‘후회’를 거듭하며 살아간다. “잊혀진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수시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글을 올리고 있다. 추천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여전히 지지층을 몰고 다니는 그가 지난달 소개한 책이 ‘좋은 불평등’이다. 더불어민주당 등 진보진영 정책통으로 오래 활동한 최병천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썼다. 저자는 지난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 그중에서도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의도와 반대로 불평등을 심화시켰다고 평가했다.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임기 초 2년간 문 정부가 최저임금을 30% 가까이 올렸을 때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그런 이유로 위험성을 경고했다. 최저임금이 급등하자 가족 중 여럿이 편의점, 식당에서 일해 근근이 살아가던 저소득층 가정에서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신문 사회면에 자주 등장하는 안타까운 가족동반 사망 사건 가운데 몇몇에는 최저임금 급등의 충격이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 전 대통령은 이 책을 두고 “주장이 새롭고 신선하고 흥미 있다”면서도 “2018년 고용시장 충격을 들어 실패 또는 실수라고 단정한 것은 정책 평가로서는 매우 아쉽다”고 했다. 소주성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사실상 판가름 났는데도 ‘실패한 것이 아니다’라고 다시 항변한 것이다. 5년 전 대통령이었을 때로 회귀한다 해도 최저임금을 올렸을 분위기다. 소주성만큼 실패로 확인된 정책이 탈원전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가격이 폭등하자 문 정부 탈원전 정책의 모델이던 독일을 비롯해 대다수 선진국들이 낡은 원전의 수명을 늘리고, 새 원전을 지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국에선 싼 원전의 비중을 줄이고 비싼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을 늘린 영향으로 한전의 적자가 폭증하고, 전기요금이 오르고 있다. “월성 1호기 영구 가동 중단은 언제 결정할 계획인가요”라는 대통령의 댓글에 화들짝 놀라 반응한 관계부처 장관, ‘죽을래 과장’, ‘신내림 서기관’은 지금 재판을 받고 있다. 이 모든 걸 지켜보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같은 댓글을 달 것인지 문 전 대통령에게 묻고 싶어진다. 최근 그는 “부디 도를 넘지 않길 바란다”라는 글을 SNS에 올렸다.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관련해 서훈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직후다. 자신을 향한 수사의 칼날이 불쾌하더라도, 명확한 증거도 없이 ‘월북자 가족’ 낙인이 찍힌 이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내놓기 힘든 반응이다. 그들의 억울함에 공감하고, ‘내가 그때 달리 판단했다면…’ 하고 돌아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다니엘 핑크는 ‘후회의 재발견’이란 책에서 “후회는 건강하고 보편적이며 인간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후회는 가르침을 준다”고 했다. 어느 정부, 어떤 대통령도 정책에 실패할 수 있다. 국민을 화나게 하는 건 실패 자체가 아니라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것’이라는 그들의 후회를 모르는 태도다. 진심 어린 후회가 뭔지 배우려면 회귀·빙의·환생이라도 필요한 걸까.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친구들 결혼 때마다 꼬박꼬박 내왔다면 본인이 ‘비혼(非婚)주의’를 선언하고 요구할 경우 당연히 줘야 한다.” “축하하려고 낸 거지 순번 정해 타려고 곗돈 부은 건 아니잖나. 돈 아까워 회수하겠다는 심보다.” 몇 년 전부터 온라인 커뮤니티에 자주 논쟁거리로 등장하는 비혼 축의금 논란의 찬반양론은 이렇게 요약된다. 중장년 세대에겐 농담처럼 들릴 수 있지만 ‘공정’을 중시하는 MZ세대 솔로 청년들은 정색하는 문제다. ▷작년 1월 PD 겸 방송인 재재가 한 TV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비혼식(式)’ 경험을 공개했다. 친구들을 모아 비혼을 선언하고 축의금도 받았다고 했다. 올해 4월에는 한 인터넷 동호회에 ‘비혼이니까 축의금 안 내겠다는 친구’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고등학교 동창 중 하나가 첫 번째로 결혼하는데 다른 친구가 “나는 결혼하지 않을 거니까 축의금을 내지 않겠다. 결혼식 참석은 하되 밥도 안 먹겠다”고 했다는 내용이다. 나중에 번거롭게 비혼 선언하고 축의금을 돌려받느니 아예 처음부터 안 내겠다는 거다. ▷결혼에 대한 청년들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다 보니 이런 일이 생겼다. 통계청의 ‘2022년 사회조사’에 따르면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거나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결혼 안 한 여성은 22%, 결혼 안 한 남성은 37%뿐이다. 결혼하지 않는 이유로는 남성의 35%, 여성의 22%가 ‘결혼 자금 부족’을 들었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결혼을 피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주변 사람들의 결혼에 부담스러운 축의금을 내는 게 부당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LG유플러스가 내년 1월부터 비혼 직원에게 기본급의 100% 축의금, 유급휴가 5일을 주기로 결정하면서 논란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 회사는 근속 5년 이상, 만 38세 이상 직원이 사내 경조 게시판에 ‘비혼 선언’을 등록하면 결혼하는 직원과 동일한 혜택을 주기로 했다. 다만 ‘먹튀’를 막기 위해 축의금 등을 받고 2년 안에 이직하면 페널티를 준다. 다른 직원과 형평성을 고려해 나중에 생각이 바뀌어 결혼하더라도 중복 지원은 하지 않는다. ▷롯데백화점도 올여름 만 40세 이상 결혼 안 한 직원에게 경조금과 휴가를 주는 제도를 도입했고, 결혼식 화환 대신 반려식물을 보내주기로 했다. 매년 ‘비혼 선언의 날’을 정해 신청한 직원들에게 유급휴가와 축의금을 주는 외국계 화장품 회사 한국지사가 화제가 된 적도 있다. 기업들까지 독신자를 ‘아직 결혼 못한’ 미혼(未婚)이 아니라 ‘결혼 안 하기를 선택한’ 비혼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제 비혼 축의금에 거부감을 드러냈다간 ‘꼰대’란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전 국민이 이태원 핼러윈 참사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지난주 경기 고양 일산, 김포 주민 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뉴스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일산대교를 지나는 차에 통행료를 물리는 게 타당한가를 따진 일산대교 주식회사와 경기도의 소송 결과다. 작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선에 출마하려고 경기지사직을 던지면서 임기 중 마지막 결재로 통행료를 무료화한 데 대한 1심 판결이었다. 결과는 일산대교 측 승리. 지난해 10월 26일 당시 이 지사의 조치에 지역 주민들은 환호했다. 한강 다리 가운데 유일하게 비싼 통행료를 받는 일산대교를 지나다니며 쌓인 불만을 단번에 털어내는 사이다 결정처럼 보였다. 150만 지역 표심에도 영향을 미쳐 이 대표의 대권 행보에 날개를 달아줄 터였다. 하지만 그가 내린 경기도의 공익처분으로 시작된 무료 통행은 곧바로 제동이 걸렸다. 직후 일산대교 측이 낸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경기도가 2차 공익처분을 내려 무료 통행을 연장했지만 일산대교 측도 다시 가처분 신청을 했고, 이 또한 받아들여져 작년 11월 18일 통행료는 되살아났다. 경기도는 일산대교가 총 22일간 받지 못한 통행요금 18억 원을 도민 세금으로 물어줘야 했다. 그리고 지난주 수원지법 행정4부는 “통행료가 부담되는 것은 사실이나, 그 정도가 이용자 편익에 대비해 기본권이 제약될 정도로 크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일산대교 측 승소 판결을 내렸다. 경기도의 3전 3패다. 후임 민주당 소속 김동연 지사가 항소 방침을 밝혔지만 법원의 일관된 판단을 볼 때 2심 승소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애초부터 상대가 만만치 않았다. 일산대교 주식회사는 국민연금의 100% 자회사다. 2008년 다리를 준공해 30년간 운영해 투자금을 회수하려던 대형 건설사들이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어려움에 빠지면서 운영권을 국민연금에 넘겼다. 8년 적자를 내다가 간신히 흑자로 돌아선 이 다리를 지자체가 권한을 행사해 무료화할 경우 미래에 벌어들일 수입까지 물어줘야 한다. 시장이 평가하는 가치는 6000억∼7000억 원 정도다. 결정 당시 이 대표는 “보상 금액은 2000억 원대”라며 가치를 깎아내렸지만 제값을 안 치를 경우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국민연금이 손해를 본다. 경기도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간 배임 문제도 발생한다. 작년 문재인 정부의 국민연금이 가처분 신청과 소송을 낸 이유다. 경기도가 제값을 치르려면 관련 지자체들과 함께 큰돈을 나눠 내야 하는데 다리를 주로 이용하는 이 지역 운전자를 위해 다른 지역 주민, 비운전자가 낸 세금을 써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 대표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이 건이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국민연금이 정권의 눈치를 보고 알아서 일산대교의 미래 가치를 축소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다만 큰 후유증이 따른다. 지난 정부가 담당 공무원과 한국수력원자력을 윽박질러 월성 원전 1호기 경제성을 낮춰 잡음으로써 수명보다 일찍 폐쇄했을 때 바로 그런 식이었다. 일산대교 건설은 김대중 정부 때였던 2002년 새정치국민회의 소속 임창열 경기지사가 결정했다. 당시 경제성이 낮게 평가돼 정부 예산 대신 민간자본을 끌어들여야 했다. 기업의 투자 없이는 세워지지 못했을 다리다. 20년 지나 그런 기억은 희미해지고 통행료 부담은 남았다. ‘사이다 맛 포퓰리즘’이 먹히기 딱 좋은 상황이다. 공공 부문이 상황에 따라 안면을 싹 바꾸는 일이 자주 생기면 더 이상 한국에 일산대교 같은 다리는 지어지기 어렵게 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플로리다주 비스케인만 해변에 위치한 미국프로농구(NBA) 마이애미 히트 안방구장의 이름은 ‘FTX 아레나’다. 거래량 세계 3위, 미국 1위 가상화폐 거래소 소유주 샘 뱅크먼프리드(30)가 작년에 1억3500만 달러를 주고 명명권을 구입해 간판을 고쳐 달았다. 코인 투자자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가상화폐로 돈을 벌어 현실 세계에 꿈의 구장을 사들였다”고 환호했다. ▷이 곱슬머리 청년은 재작년 포브스 선정 미국 400대 부자 중 32위를 기록했다. 20대로는 유일했다. 매사추세츠공대(MIT)를 졸업하고 월가 트레이더로 일하다가 2019년 FTX를 세운 지 2년 만이었다. ‘코인계의 워런 버핏’이란 명예로운 별명까지 얻었다. 하지만 FTX 파산 사태로 1주 전 160억 달러(약 21조1000억 원)에 달했던 그의 재산은 이제 0원이 됐다. ▷FTX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는 설립 목표에 따라 수수료 수입의 1%를 기부해 왔다. 공식 석상에도 반바지 차림으로 등장하는 수더분한 MZ세대 가상화폐 스타에 청년세대는 열광했다. 이런 면모도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사석에서 무례한 말투를 썼다는 증언이 쏟아진다. 급성장 비결이 정치권 로비라는 말도 나온다. 최근 미국 중간선거 직전 그는 정치후원자 순위 6위에 올랐는데 그의 회사는 500억 달러(약 66조 원)의 빚을 지고 있었다. ▷밖에선 코인의 제왕으로 추앙받았지만 업계 안에서는 미운털이 박혔다. 정부의 가상화폐 통제 강화에 찬성했기 때문이었다. 파산의 직접 계기도 업계에서 시작됐다. 1위 거래소 바이낸스는 지난주 FTX 자체 발행 코인의 신뢰성을 문제 삼아 모두 처분했다. 미국 출생인 뱅크먼프리드는 바이낸스 최고경영자 자오창펑이 중국계란 걸 조롱하곤 했는데 파산 직전 자오는 그의 지원 요청을 뿌리쳤다. ▷이번 사태로 테라·루나 폭락 사태도 재소환됐다.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31)는 알고리즘으로 가치 하락을 막는다는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해 거물이 됐다가 5월 가치 폭락으로 투자자들에게 400억 달러(약 53조 원)의 손실을 끼쳤다. “실패와 사기는 다르다”며 ‘폰지 사기꾼’이란 비판을 반박했던 권 대표는 현재 해외 잠적 상태다. ▷가상화폐 가격은 투자자의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폭락하곤 한다. 뱅크먼프리드는 고객자금 일부를 착복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FTX에 투자한 글로벌 금융회사가 많아 ‘코인판 리먼브러더스 사태’ 가능성도 제기된다. 블록체인 기술 발전을 꾀하면서도 투명성,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의 재무 상태, 자산 건전성을 재점검해야 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영국 경제가 100년 만에 가장 긴 경기침체에 빠질 수 있다.” 지난주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33년 만의 자이언트스텝으로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내놓은 전망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영란은행이 예상한 침체 지속기간은 올해 3분기부터 내후년 중반까지 2년. 선진국들의 과거 평균 침체기간이 1년이 안 된 걸 고려하면 갑절 이상 길고 고통스러운 침체의 시작이다. ▷영국은 브렉시트(Brexit) 후유증까지 겹쳐 유럽 선진국 중 물가 상승률이 최고 수준이고, 연말에는 11%까지 오를 전망이다. 이에 대응해 영란은행은 작년 말부터 8번 연속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침체와 실업 증가를 감수하고라도 물가부터 끌어내리려는 것이다. 이로써 올해 3%대인 영국의 성장률은 내년에 0%대로 떨어질 전망이다. ▷코로나19가 터진 재작년 영국의 성장률(―9.9%)은 대혹한(Great Frost)이 발생한 1709년 이후 311년 만에 최악이었다. 작년에는 GDP가 7.5% 반등했는데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생산시설이 풀가동된 1941년 이후 최고였다. 올해는 리즈 트러스 전 정부의 설익은 감세정책으로 파운드화 폭락 사태를 겪었다.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롤러코스터 경제다. ▷경기는 이렇게 ‘확장-정점-침체-저점’ 사이클을 탄다. 통상 2개 분기 연속 GDP가 줄면 침체로 보지만 다른 요소도 고려하기 때문에 정점, 저점이 언제인지는 한참 뒤 알게 된다. 하지만 지난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물가를 잡기 위해 ‘천천히, 하지만 더 오래, 더 높게’ 기준금리를 높이겠다고 밝히면서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내년은 물론이고 내후년까지 글로벌 침체가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2차 대전 후 12차례 미국의 경기순환에서 확장기간은 평균 64.2개월, 침체기간은 11.1개월이었다. 침체가 닥치면 정부가 재정을 풀고,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내려 경기를 부양하기 때문에 확장보다 침체가 짧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부터 재작년 2월까지 128개월간 확장하던 미국 경기는 코로나19가 발생했을 때 단 두 달 주춤했다가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풀자 확장으로 돌아섰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 오랜 경기확장이 결국 긴 침체라는 후유증을 불렀다. 최근 들어 세계경제 사이클과 ‘디커플링’이 심해진 중국도 사정이 좋지 않다. 수출 상대국 대부분이 침체에 빠지면서 한국의 내년 성장률도 1%대로 추락할 것이란 전망이 쏟아진다. 경기침체와 고물가가 동시에 몰아치는 긴 빙하기가 다가오고 있다. 혹한을 이겨낼 체력을 갖추지 못하면 선진국 초입에서 다시 중진국으로 떨어질 수 있는 험로에 한국경제가 서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스웨덴은 조선업이 일찍부터 발달한 나라였다. 1885년에 어뢰를 탑재한 잠수정을 세계에서 처음 만들었을 정도다. 하지만 조선업을 주도하던 최남단 항구도시 말뫼는 1970년대 일본, 한국의 조선업에 밀려 빛을 잃기 시작했다. 말뫼의 대표 조선소인 코쿰스에 1973년 세워졌던 높이 140m의 골리앗 크레인은 1987년 조선소 파산 후 오랫동안 무용지물로 남아 있다가 2002년 현대중공업에 팔렸다. 가격은 단돈 1달러였다. ▷세계 조선업의 주도권이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넘어간 걸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현대중공업이 골리앗 크레인을 해체해 울산행 배에 싣던 날 스웨덴 국영방송은 레퀴엠을 튼 채 중계방송을 했다. 조선업 붕괴로 인한 실업 증가와 인구 감소를 겪고 있던 말뫼의 시민들은 이 장면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름하여 ‘말뫼의 눈물’이다. ▷2010년 전북 군산시에 세계 최대 규모 독과 골리앗 크레인을 갖춘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가 준공됐다. 준공식도 열기 전에 배를 만들어 팔았을 정도로 경기가 좋았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시작된 조선업 장기 불황으로 2017년 7월에 결국 가동이 잠정 중단됐다. 근로자 5000여 명이 일자리를 잃고, 협력업체 90%가 문을 닫거나 군산을 떠나면서 ‘한국판 말뫼의 눈물’이란 말이 나왔다. 다음 해인 2018년에 한국GM 군산공장까지 폐쇄돼 지역경제는 더 황폐해졌다. 그랬던 군산조선소가 지난달 28일 5년 3개월 만에 재가동 선포식을 열었다. ▷당초 계획보다 2개월 앞당겨진 이번 재가동은 수주 풍년 덕에 가능했다. 현대중공업의 지주회사인 한국조선해양은 올해 들어 31조4500억 원(184척)에 이르는 선박 주문을 받았다. 연간 목표를 26.5% 웃도는 수치이고, 작년에 이어 2년 연속 초과 수주다. 올해 9월 현재 세계에서 발주된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의 82%를 우리 업체들이 수주했을 정도로 한국의 조선업이 다시 살아났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LNG 운송용 선박 수요가 늘어난 데다 고부가가치 선박 제조 기술력에서 한국이 중국에 크게 앞서 있기 때문이다. ▷‘말뫼 스토리’는 눈물로 끝나지 않았다. 조선업 붕괴 후 절치부심한 말뫼시는 1998년 버려진 조선소 땅에 말뫼대를 세우고 벤처 창업을 지원했다. 친환경 도시를 목표로 470km의 자전거 길도 만들었다. 고급 인재와 함께 세계 최대 가구업체인 이케아 본사 등 유럽연합(EU)의 주요 기업이 몰리면서 말뫼는 지금 제2의 중흥기를 맞고 있다. 군산이 조선소 재가동에서 멈추지 않고 말뫼처럼 국내외 청년들이 몰려드는 활력의 도시로 거듭나길 기대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반쪽이 텅 빈 국회 본회의장에서 시정연설을 할 때 윤석열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극단적으로 둘로 쪼개진 나라에서 0.73%포인트 차로 대통령이 된 만큼 각오를 단단히 했다고 해도 속이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국정철학이 담긴 첫 예산안을 들고 연단에 올랐는데 헌정사상 첫 야당 보이콧이라니. 혹시 이런 걱정에 식은땀이 나진 않았을까. ‘이러다 공약 하나 실현 못하고 임기 5년이 끝나면 어떻게 하지….’ 대통령이 스타일을 구긴 정도면 차라리 다행이다. 이재명 대표를 향한 검찰 수사를 야당 탄압으로 규정한 거대야당 더불어민주당은 현 정부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 막아설 기세다. 그 바람에 국회 동의가 필요한 ‘윤석열표 정책’들은 줄줄이 무산 위기다. 올해 1주택자에 대한 종합부동산세 경감은 법 개정 시한을 넘겨 사실상 무산됐다. 대선 기간 중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 대표가 여러 차례 완화를 약속한 사안인데도 그렇다. ‘민간이 끌고 정부가 미는 역동적 경제’의 핵심 과제인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도 난망한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가 3%포인트 올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21.2%)보다 크게 높아진 25% 법인세율을 원상복구하자는 것인데도 야당은 ‘초부자 감세’라며 절대 반대다.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일본 대만 정부가 특단의 반도체산업 육성 방안을 추진한다는 뉴스가 날마다 쏟아져서 웬만하면 여야 만장일치로 ‘K칩스법’을 통과시킬 만도 한데 국회 논의는 전혀 진척되지 않는다. 민주당은 지역화폐 등 포퓰리즘성 예산이 삭감된 것 등을 문제 삼아 ‘예산전쟁’까지 벌이겠다고 한다. 민주당의 정신적 지주이자, 윤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고 좋아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이었다면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역정을 냈을 상황이다. 지난 정부와 이 대표에 대한 적폐청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부 우파 지지층에 ‘정부 정책 마비’는 별 걱정거리가 아닐 수 있다. 내년까지 ‘공정과 상식’을 철저히 실현해 내후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하면 모두 해결될 문제라고. 하지만 30% 안팎을 맴도는 대통령 지지율, 민주당 몽니에도 늘지 않는 국민의힘 지지 기반을 고려할 때 총선 승리는 쉽지 않아 보인다. 2년 취임덕에 이은 3년 레임덕이 올 가능성이 낮지 않다는 뜻이다. 그때가 되면 야권은 ‘이룬 게 아무것도 없다’며 대통령과 여당을 공격할 것이다. 플랜B가 필요한 이유다. 총선 후에도 여야의 극한 대치가 계속돼 ‘5년 무성과 정부’ 가능성이 커질 때 쓸 수 있는 카드 중 하나가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이라고 생각한다. 성과 없는 5년을 꼭 해야 할 일을 해낸 4년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대통령 임기 1년과 맞바꿔서라도 꼭 해내야 할 정책이 바로 연금개혁과 재정준칙 도입이다. 현 정부 치하에서 하루라도 더 살고 싶지 않은 야당 지지층이 두터운 만큼 야권도 호응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 나라의 미래를 고려하면 누군가 당장 총대를 메야 하지만 ‘표 의식하는 정치인은 절대 못 한다’는 게 연금개혁이다. 정치권에 빚진 게 가장 적고 이미 대통령 자리에 있는 윤 대통령이 적임자다. 대통령이 이번 시정연설에서 ‘재정 건전성’을 강조했지만 헌법, 법률이 정하는 재정준칙을 못 만들면 돈 퍼주기를 선호하는 정권이 들어서는 순간 모두 허사가 된다. 물론 현 정부의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태가 계속된다면 YS의 금융실명제, DJ의 인터넷 강국, 노무현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같이 나라의 물길을 바꾼 정책 업적은 기대하긴 어렵다. 그래서 더 절실해야 하고, 꼭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강원도 관광은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지평을 열 것입니다.” 올해 3월 말 춘천시 의암호 중도에서 열린 레고랜드 준공식에서 최문순 당시 강원지사는 감개 어린 표정으로 축사를 했다. 도지사가 된 첫해 시동이 걸린 레고랜드 사업이 11년의 긴 임기 종료를 3개월여 앞두고 비로소 끝났기 때문이다. 5월 5일 어린이날에 맞춰 문을 연 레고랜드는 초등학생 자녀와 부모가 함께 갈 만한 테마파크다. ▷덴마크 조립식 장난감 레고를 테마로 한 이 놀이공원이 이번 주 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나비 효과의 진원지가 됐다. 강원도와 레고랜드 운영사인 영국 멀린엔터테인먼트그룹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출자해 만든 강원도중도개발공사(GJC)의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이 문제였다. GJC는 공사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부동산 자산 등을 담보로 재작년에 2050억 원어치의 기업어음을 발행했다. 강원도가 지급보증을 선 이 어음을 10여 개 증권사가 샀다. ▷이 기업어음 지급 기일이 지난달 29일이었다. 그런데 7월 취임한 김진태 도지사가 지급을 거절했다. 여기에 더해 강원도는 법원에 GJC의 기업회생을 신청하겠다고도 밝혔다. 회생 절차를 통해 회사 자산을 팔아 빚을 갚겠다는 취지였다. 민주당 소속 최 전 지사가 레고랜드 사업을 추진하면서 생긴 빚을 국민의힘 소속 새 지사가 막대한 예산을 써가며 떠안을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시장은 받아들였다. 기업어음은 이달 6일 최종 부도 처리됐다. ▷급격한 금리 인상, 기업들의 실적 악화 속에서 빌려준 돈이 떼일까 봐 불안해하던 투자자들은 이 소식에 황급히 지갑을 닫았다. 국가와 같은 수준으로 신용등급을 인정받는 지방자치단체가 보증한 어음이 부도를 낸 데 쇼크를 받았다. 레고랜드 기업어음을 많이 들고 있거나, 부동산 개발사업 대출이 많은 증권사들이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는 말이 돌고 있다. 분양시장이 얼어붙어 자금이 달리는 일부 건설업체들도 덩달아 부도설에 휩싸였다. 강원도는 뒤늦게 “예산을 편성해 내년 1월 29일까지 돈을 갚을 것”이라고 했지만 자본시장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경제는 지금 미세한 충격이 막대한 파급 효과를 낳을 수 있는 살얼음판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관계자, 월가의 투자은행 수장, 저명한 경제학자의 자극적인 말 한마디에 각국 주가와 환율이 요동을 친다. 엔-달러 환율 150엔 선이 깨지자 1997년 태국에서 시작돼 한국 등으로 순식간에 번졌던 ‘아시아 외환위기’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커지고 있다.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지방정부, 금융시장 참가자와 기업들 모두 최대한 신중히 판단하고 움직여야 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