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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6일)은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사진)가 순국한 지 104주기 되는 날. 안 의사의 숭고한 희생은 23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한중정상회담에서 거론될 정도로 여전히 동북아 역사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최근 세간에선 안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동영상이 화제다. ‘안중근 동영상’은 과연 존재하는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안중근 의사(1879∼1910)의 하얼빈 거사를 촬영한 필름은 과연 있는가.’ 최근 미국 잡지 버라이어티의 1909년 12월 6일자 기사가 발굴되면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순간을 담았다는 ‘안중근 동영상’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러시아 영화사가 프랑스 파리에서 판매에 나섰다는 내용의 기사인데, 이를 두고 여러 설(說)이 나온다. 진짜 존재하는지, 어디 있는지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수십 년째 이 필름을 쫓아온 근대사 다큐멘터리 제작사 ‘더채널’ 대표인 김광만 PD(59)의 도움을 얻어 전체 상황을 짚어봤다. 동영상을 언급한 자료는 의외로 적지 않다. 당시 일제의 전문(電文)과 신문기사, 러시아 기록물이 ‘이토 히로부미의 활동사진’을 여러 차례 거론했다. 대부분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동영상이 사료에 처음 등장하는 건 1909년 10월 26일, 의거 당일이다. 하얼빈 일본 영사관은 본국 외무성에 보낸 긴급 전문에 “활동사진을 찍은 러시아 촬영기사를 임시 억류했다”며 어떻게 처리할지 묻는다. 다음 날 외무성 답신은 “내버려둬라”였다. 필름을 압수했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할 것을 우려해 몸을 사린 것이다. 동영상을 찍은 러시아 촬영기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빅토르 코브체프’다. 그의 아들이 남긴 일기에 따르면 이토가 하얼빈에서 만난 러시아 장교단을 찍으러 갔다가 우연히 저격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공식 수행언론에는 끼지 못해 외곽에 자리 잡은 게 오히려 ‘역사의 현장’을 포착하는 행운이 됐다. 1910년 1월 7일 일본 시사신보는 “코브체프 씨가 도쿄에 왔다”며 그의 사진과 ‘하얼빈 무용담’을 실었다. 코브체프는 이 덕에 큰돈을 거머쥔다. 1909년 11월 18일 요리우리와 시사신보에 “치열한 경합 끝에 신문대행업체 ‘저팬 프레스 에이전시(JPA)’가 1만5000엔에 계약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지금으로 따지면 4억 원 가까운 거금이다. 동영상 내용과 관련해 요미우리신문(1910년 1월 6일자)에 재밌는 대목이 나온다. “(동영상을) 봤더니 당시 이토 공작을 수행한 고관들은 도망가고 숨기 바빴다. 필름이 공개되면 그간 용맹을 떠벌렸던 정치인들은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당시 도쿄의 한 영화관은 거사 장면이 쏙 빠진 ‘편집본’을 틀었고, 사흘 만에 막을 내렸다고 한다. 이후 필름은 더이상 사료에 등장하질 않는다. JPA의 사주였던 정치인 다노모키 게이치(賴母木桂吉)가 갖고 있었으나 종적이 묘연해졌다. 미국으로 이민 간 다노모키의 손자는 몇 년 전 김 PD와 만나 “1945년 도쿄 대공습 때 집이 전소돼 할아버지 소장품은 모두 사라졌다”고 말했다. 일본필름보관소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원본을 넘긴 1910년, 하얼빈 일본상인협회 기록에 “코브체프가 복사한 필름 1롤을 갖고 있다가 압수당했다”는 내용이 있다. 코브체프의 아들도 “아버지가 원본을 팔기 전 여러 벌을 복사해뒀다”고 밝혔다. JPA로선 코브체프에게 사기를 당한 셈인데, 덕분에 동영상은 다양한 갈래로 흩어져 살아남은 것이다. 다만, 최근 보도에서 언급된 파리 경매에 나왔다는 동영상은 프랑스 영화사 파테(Path´e) 소유가 됐지만 이토의 장례식을 담은 가짜로 밝혀졌다. 거사 당일 안 의사를 기모노 차림으로 그린 미국 뉴욕타임스(1910년 8월 14일자)의 삽화 역시 엉터리다. 의거 후 30분 뒤에 촬영했다는 시사신보(일본 신문)의 사진을 보면 안 의사는 양복 차림이기 때문이다. ‘안중근 동영상’의 행방을 놓고 한때 미국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운영한 영화재단이 사들였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가장 유력한 건 러시아다. 코브체프 유물이 당시 소련 정부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김 PD는 “2000년대 중반 비밀루트를 통해 필름 목록을 확인했다”며 “구체적인 건 밝힐 수 없지만 하루빨리 한국이 찾아와야 할 보물”이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이 12년 동안 수집한 아시아 미술품 66점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박물관은 25일 “올해 첫 기획전 ‘아시아미술 신(新)소장품’을 중근세관 테마전시실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여기엔 중국 공예품과 일본 회화, 인도와 동남아시아 불교조각이 다수 포진해 있다. 중국 유물 가운데는 8세기 당나라 인물상과 후한시대(1∼3세기) 누각(樓閣) 모형이 있다. 높이 37.7cm로 도자기처럼 빚어낸 이 인물상은 남성 복식을 갖췄는데 복스러운 얼굴에 수염이 없고 입술은 화장한 듯 표현돼 있다. 130cm 높이의 누각 모형은 고인의 안식을 기원하는 부장품으로, 당시 건축물 구조를 가늠할 중요한 사료다. 인도 미술품도 눈여겨봐야 한다. 그리스·로마 미술의 영향을 받아 유럽적 향취가 짙은 간다라 미술과 달리, 지난해 박물관이 구입한 마투라의 보살부조상은 인도인 특유의 생김새를 살렸고 생기가 넘치는 표정을 지녔다. 6월 22일까지. 무료. 02-2077-90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일단 고해성사. 솔직히 ‘노바디(Nobody)’ 하면 원더걸스부터 떠오른다. 그런 깜냥이다 보니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의 ‘세마(SeMa) 골드―노바디’ 전은 좀 버거웠다. 야구로 치면 오승환의 묵직한 ‘돌직구’ 같다고 할까. 그만큼 재외 여성작가 3인은 ‘디아스포라(Diaspora·이산)’가 얼마나 치열한 삶을 아우르는 주제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민영순(61)과 윤진미 조숙진(54)은 모두 북미에서 오래 거주해온 작가들이다. 여성이자 소수자로서 바라보는 세상은 결코 봄 햇살처럼 밝지 않다. 어디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했기에 무명(노바디)일 수밖에 없는 운명. 윤 작가가 캐나다 한인 67명의 증명사진(?)을 모은 작품 ‘67그룹(A Group of Sixty-Seven)’을 보면 괜스레 마음이 찌릿하다. 캐나다는 1867년 연방이 설립됐고, 1967년 아시아계 이민을 허용했다.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해 한국사를 관통하며 상처 입은 여성(그리고 이주노동자)을 주제로 삼은 민 작가나 죽음과 존재에 대한 고민을 파리하게 드러낸 조 작가의 작품도 다들 손에 땀이 찼다. 5월 18일까지. 무료. 02-2124-88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석굴암 본존불에 있는 균열은 (붕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속적으로 점검이 잘 이뤄져왔고, 당장 긴급한 위험이 발생할 만한 요소도 없어 보입니다.” 해외의 저명한 문화유산 구조안전 전문가가 붕괴 가능성이 제기됐던 국보 제24호 석굴암 본존불상이 안정적이란 결론을 내렸다. 유네스코 자문기구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의 건축유산 구조분석복원위원회 명예의장인 조르조 크로치 박사는 20, 21일 경주를 방문해 “사견을 전제로 본존불 미세균열은 우려할 수준이 아니다”라며 “한달 안에 이코모스 한국위원회에 공식 보고서를 제출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크로치 박사는 피사의 사탑과 카프라 피라미드(이집트), 스트라스부르 대성당(프랑스) 복원에 참여했던 세계적인 건축물 구조안전 전문가. 1995년 석굴암의 세계유산 등재 때도 안전진단에 참여해 한국과 인연이 깊다. 함께 방한한 유네스코 자문위원인 클라우디오 마르고티니 박사는 이탈리아 환경보호연구소 소속으로 북한 고구려고분군 보존사업을 진행했다. 올해 초 문화재청의 석굴암 점검 데이터를 넘겨받은 두 학자는 20일 현장조사를 벌인 뒤 21일 국내 전문가들과 함께 비공개회의를 가졌다. 이코모스 측은 사안의 민감성을 감안해 대외 인터뷰는 모두 사절했다. 회의에 참석한 김동욱 석굴암 구조안전점검단장(경기대 명예교수)은 “두 학자가 준비를 많이 해 꼼꼼하게 의견을 교환했다”며 “크로치 박사를 포함해 모두 본존불 붕괴는 부적절한 시나리오라는 데 공감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오히려 두 박사는 본존불보다 석굴 돔의 정밀한 체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일제강점기 시멘트를 바른 외벽의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었다. 이상헌 강원대 지질학과 교수는 “국내에서도 줄곧 지적해온 대목으로 일반적 수준을 넘는 우려는 아니다”며 “석굴암이 무너질 가능성은 현재 제로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안팎은 이번 유네스코 현장조사가 꼭 필요했는지 의문을 표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지난해 11월 제기된 석굴암 불상과 좌대 균열은 1970년대 전부터 존재한 게 대부분이었다. 문화재청도 1996년부터 지속적인 안전점검을 실시해왔다. 그러나 정부의 해명에도 논란이 가라앉지 않자 유네스코에 ‘객관적 검증’까지 요청하게 된 것. 홍성걸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는 “해외학자들이 이번 점검에 사용한 구조해석 프로그램은 한국에서 개발했다”며 “과신도 금물이지만 국내 학계의 의견을 너무 신뢰하지 않는 것도 큰일”이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잊을 만하면 가끔 인터넷에 떠도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사진이나 영상 편집본인데 ‘○○○의 하루’란 거다. 보통 당대의 스타 이영애 전지현 이효리가 주인공. 워낙 얼굴을 내미는 광고가 많아 그것만 엮어도 웬만한 일상을 커버한다는 얘기다. 최근엔 ‘응사의 하루’가 회자됐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흥행하자 출연진이 온갖 광고를 석권하고 있지 않은가. 웃자고 만들었으나 담긴 메시지는 은근하다. 인기에 기대 무더기로 찍어대는 광고에 거부감도 작용했겠다. 전지현 화장품 쓴다고 전지현 급 미모가 되는 것도 아니건만…. 그래도 우리는 혹하고 지갑을 연다. 이처럼 광고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생산과 소비의 음험한 순환을 세련되게 포장해 보여주는 계기판이다. 연세대 강사인 저자는 국문학 전공자이지만 근대문화, 특히 광고를 꾸준히 연구해왔다. 스스로도 “시를 공부하다 광고 연구로 변절한, 혹은 문학 연구 지형에서 꽤나 이탈한 학자”라 부른다. 광고와 같은 여러 매개체를 통해 자본주의 이전과 이후, 안과 밖이 규정하는 삶의 결을 찾는 게 관심사란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초점을 맞춘 책은 당시 주로 신문 잡지에 실린 인쇄 광고를 통해 한국 소비사회가 어떻게 형성되고 자라났는지를 훑는다. 저자는 이를 출세와 교양 건강 섹스 애국이란 5개의 범주로 나눠 살폈다. 이들이 당대의 삶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일 뿐만 아니라, 이런 사회적 준거가 소비문화와 일으키는 상호작용이 지대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출세’라는 키워드를 보자. 당시 광고에는 소비자를 부르는 새로운 호칭이 엄청났다. 당신을 비롯해 공(公), 피씨(彼氏·그분), 귀하, 신사숙녀 같은 말이 쏟아졌다. 이전까지 계집이나 아낙으로 부르다가 ‘여성’으로 호명한 것도 광고였다. 청년과 어린이란 말 역시 이때 생겼다. 물론 광고가 이런 용어를 창조한 건 아니나, 얼른 가져다 쓴 건 분명하다. 손님은 왕인데 뭐라고는 못 부를까. 여기엔 근대(혹은 자본)가 지향하는 함의가 명확하다. 조선사회에서 사대부나 들음직한 칭호가 불특정다수이긴 하나 모든 계층으로 확산됐다. 반상(班常)의 고하도 남녀 차별도 광고 속에서 무너져 내린다. ‘백보환’이란 약 광고의 “특별한 귀족 양반만 쓰던 비방 보약인데 현대에는 누구든지 자유로 쓸 수 있게 됐다”는 문구는 노골적으로 이를 드러낸다. 이는 또 다른 계급 서열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나팔 소리였다. 이제 모든 건 물건을 살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잣대가 된다. 1920∼30년대 학교와 학원, 수험서 광고가 엄청나게 늘어나는 대목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느 학교를 들어가거나 어떤 시험에 붙는다면 인생이 바뀔 것이라 유혹한다. 1935년 창간된 월간지 ‘조광(朝光)’의 ‘최신 중학 강의록’ 광고엔 “사회에 나와서 성공하는 것은 반드시 중학 졸업의 실력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시대”라고 당대를 규정한다. 이처럼 광고가 지닌 근대의 이중성은 교양이나 건강, 심지어 애국에서도 엇비슷하게 드러난다. 재밌는 것은 책도 줄곧 지적하듯, 이런 양상이 꼭 근대만의 풍경은 아니라는 점이다. 출세를 놓고 봐도, 숱한 입시와 유학 광고가 지금은 사라졌던가. 근대도 중세라는 부모가 있듯이, 현대 그리고 21세기도 근대의 자양분을 먹고 자랐다. 당시에 형성된 사회적 가치관은 여전히 시대의 연장선에서 우리를 옭아매고 있다. 여러 분야를 넘나든 학자답게 책은 한정식 한상을 제대로 차려냈다. 광고를 주로 삼았으나 문학과 예술을 적절히 인용하며 쫄깃하게 풀어내 읽는 즐거움이 푸짐하다. 다만 이런 스타일이 다 그렇듯 한 우물을 진득하게 파고드는 맛은 좀 아쉽다. 다 손이 가고 평균 이상인데 메인요리를 딱 꼽기는 애매하다고나 할까. 그래도 이런 밥상이 나중에도 생각나고 또 찾게 되리라. 우리가 자꾸만 근대를 되돌아보는 것처럼.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 요즘은 항문질환을 잘 먹어 생기는 선진국형 질환, ‘부자병(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어른들이나 기억하는 추억이 됐지만, 봄날 배곯는 이에게 엉덩이가 찢기는 아픔은 과장이 아니었다. 워낙 먹질 못하다 보니 신진대사가 원활치 않았고, 변비로 인해 고통 받는 이가 많았다. 조선시대에 이런 춘궁을 견디는 대표적 구황식물 가운데 하나가 솔잎이었다. 김호 경인교육대 교수가 쓴 글 ‘굶주린 백성에게 솔잎을’에 따르면 멀건 미음으로 끼니를 때워 체력이 떨어진 백성에게 솔잎을 빻은 가루는 영양분을 공급하는 훌륭한 대체식품이었다. 중종 36년(1541년) 안위와 홍윤창이 간행한 ‘충주구황절요(忠州救荒切要)’도 “솔잎은 먹을 수 있으니 연명에 도움이 된다. 풀죽에 솔잎가루를 섞어 먹으면 (건강에도) 훨씬 좋다”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이 솔잎에 심각한 약점이 있었으니 변비 유발이었다. 맛도 텁텁하지만 ‘하도(下道)가 막혀 용변을 볼 수 없는’ 부작용이 빈번했다. 굶주리는 것도 속상한데 항문까지 탈이 났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충주구황절요는 “날콩을 여러 차례 씹어 삼키면 통한다”고 했지만, 솔잎 뜯어먹는 처지에 콩 구하는 일이 말처럼 쉬웠을 리 없다. 당대에도 솔잎 변비는 큰 고민거리였던지 해결책을 제시한 사료도 눈에 띈다. 명종 9년(1554년) 정부가 반포한 ‘구황촬요(救荒撮要)’에는 “구황엔 솔잎이 가장 좋지만 대변 막히는 걱정이 없으려면 느릅나무 껍질 즙을 먹어라”고 권장하는 대목이 나온다. 먹을 게 없어 나뭇잎을 뜯어먹는데, 그로 인한 질환을 멈추고자 또 다른 나무껍질까지 먹어야 했다. 이래저래 똥구멍이 찢어지는 아픔은 참으로 서럽고 애달팠다.참고 자료: ‘18세기의 맛’(문학동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 요즘은 항문질환을 잘 먹어 생기는 선진국 형 질환, '부자 병'이라 부른다. 하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어른들이나 기억하는 추억이 됐지만, 봄날 배곯는 이에게 엉덩이가 찢기는 아픔은 과장이 아니었다. 워낙 먹질 못하다보니 신진대사가 원활치 않았고, 변비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이 많았다. 조선시대에 이런 춘궁을 견디는 대표적 구황작물 가운데 하나가 솔잎이었다. 김호 경인교육대 교수가 쓴 글 '굶주린 백성에게 솔잎을'에 따르면 멀건 미음으로 끼니를 때워 체력이 떨어진 백성에게 솔잎을 빻은 가루는 영양분을 공급하는 훌륭한 대체식품이었다. 중종 36년(1541년) 안위와 홍윤창이 간행한 '충주구황절요(忠州救荒切要)'도 "솔잎은 먹을 수 있으니 연명에 도움이 된다. 풀죽에 솔잎가루를 섞어 먹으면 (건강에도) 훨씬 좋다"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이 솔잎에 심각한 약점이 있었으니 변비 유발이었다. 맛도 텁텁하지만 '하도(下道)가 막혀 용변을 볼 수 없는' 부작용이 빈번했다. 굶주리는 것도 속상한데 항문까지 탈이 났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충주구황절요는 "날콩을 여러 차례 씹어 삼키면 통한다"고 했지만, 솔잎 뜯어먹는 처지에 콩을 구하는 일이 말처럼 쉬웠을 리 없다. 당대에도 솔잎 변비는 큰 고민거리였던지 해결책을 제시한 사료도 눈에 띈다. 명종 9년(1554년) 정부가 반포한 '구황촬요(救荒撮要)'에는 "구황엔 솔잎이 가장 좋지만 대벽 막히는 걱정이 없으려면 느릅나무 껍질 즙을 먹어라"고 권장하는 대목이 나온다. 먹을 게 없어 나뭇잎을 뜯어먹는데, 그로 인한 질환을 멈추고자 또 다른 나무껍질까지 먹어야했다. 이래저래 똥구멍이 찢어지는 아픔은 참으로 서럽고 애달팠다. 참고자료='18세기의 맛'(문학동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서울 중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의 한은갤러리는 언제나 ‘살짝’ 아쉽다. 옛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 탓에 장소가 협소하다. 한국 미술품을 1300여 점이나 소장했는데 시원하게 펼쳐놓을 공간이 없다. 5월 18일까지 열리는 ‘근·현대 유화 명품 30선’도 마찬가지다. 일단 20점을 먼저 선보이고, 다음 달 1일부터 10점을 교체 전시한다. 하지만 그 허기를 달랠 만큼 이번 전시 작품은 중량감이 크다. 조선미술전람회나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했던 김인승(1910∼2001)의 ‘봄의 가락’, 심형구(1908∼1962)의 ‘수변’, 박항섭(1923∼1979)의 ‘포도원의 하루’처럼 자주 접하기 어려운 명작이 많다. 미술을 잘 몰라도 서양화풍에 영향을 받은 색채가 뚜렷한 당대 분위기를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전시작 가운데 박희만의 ‘비원의 부용정’, 안기풍의 ‘봄’, 고화흠의 ‘탁상’, 황추의 ‘저녁노을’, 곽연의 ‘과일이 있는 정물’, 김세용의 ‘설악산’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 무료. 02-759-4881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천마도에 이은 또 다른 신라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 경주 천마총에서 나온 기마인물(騎馬人物)과 서조(瑞鳥·상서로운 새) 문양이 그려진 ‘채화판(彩畵板)’ 2점이 최초로 일반에 공개된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17일 “18일부터 열리는 천마총 특별전 ‘천마, 다시 날다’에서 천마총 출토품 136건, 1600여 점을 전시한다”고 밝혔다. 앞서 3일 공개했던 천마도 말다래 3점을 포함해 천마총 관련 유물 대부분을 한자리에 모은 것은 1973년 발굴 이래 이번이 처음이다. 가장 주목받는 유물은 역시 첫선을 보이는 기마인물도 채화판과 서조도 채화판. 둘 다 자작나무 껍질로 알려진 백화수피(白樺樹皮) 2장을 겹쳐 누벼서 만들었다. 바깥지름이 약 40cm로 둥그런 도넛 모양을 한 채화판은 이름 그대로 그림이 그려진 판을 뜻한다. 이런 밋밋한 이름이 붙은 데는 까닭이 있다. 출토 당시부터 천마도와 함께 큰 관심을 모았으나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구(馬具)나 관모(冠帽)의 일부가 아니겠냐는 추측도 있지만 명확한 용도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채화판은 천마도와 함께 5∼6세기 회화 작품이라 희귀하지만, 그간 상태가 좋지 않아 줄곧 수장고에 보관돼 왔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문화재 보존과학이 발전하며 공개가 가능해졌다. 다만 지금도 손상 위험을 우려해 조명을 일반적 기준보다 2분의 1가량 낮춘 80럭스 이하의 조도(照度)로 하고, 전시 기간 동안 2번 휴식기를 가질 예정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기 꽂이’는 최근 보존처리 과정에서 본래 쓰임새가 밝혀진 유물이다. 발굴 초기에는 ‘금동제 선형금구(扇形金具·부채모양 금속제품)’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깃발을 꽂는 유물이었다. 용과 봉황 무늬가 새겨진 금동그릇과 연꽃무늬를 금입사(金入絲·표면에 금을 새겨 넣는 상감기법)한 칼 조각, 주둥이에 금 장식이 달린 토기 항아리도 복원 과정을 거친 덕분에 보다 온전한 형태로 만날 수 있게 됐다. 특히 금입사 칼은 백제와 가야 지역에서는 비교적 자주 등장했으나, 신라는 지금까지 경주 호우총(壺우塚) 출토품 1점밖에 없었다. 이 밖에 천마총에서 발굴된 금관(국보 제188호)과 금제관모(제189호)를 포함한 국보 4건, 푸른빛이 영롱한 보물 제620호 유리잔을 비롯한 보물 6건도 이번에 전시된다. 6월 22일까지. 무료. 054-740-75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윤봉길, 이봉창과 함께 ‘3의사’로 꼽히는 독립지사 구파 백정기(鷗波 白貞基·1896∼1934)가 육삼정 의거 때 지녔던 ‘도시락 폭탄’의 일제 외무성 원본 사진이 처음으로 발굴됐다. 이는 윤 의사가 훙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에 투척한 폭탄과 동일한 것으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큰 상징성을 갖는 도시락 폭탄의 온전한 실체가 밝혀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육삼정 의거는 81년 전 오늘(1933년 3월 17일) 중국 상하이 음식점 육삼정에서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처치하려다 일제 헌병에 체포된 미완의 거사. 당시 일제가 백 의사 일행의 소지품을 찍은 사진을 근대사 다큐멘터리 제작사 ‘더채널’의 김광만 PD(59)가 최근 일본에서 입수했다. 도시락 폭탄은 1932년 백범 김구가 의뢰해 만들어진 7개 중 하나. 그해 4월 29일 윤 의사 거사 뒤, 백범이 남화한인청년연맹에 나머지를 보내 백 의사가 쓰려 했다. 하지만 밀정 탓에 투척도 못하고 체포됐다. 그 바람에 지금껏 형태를 알 수 없던 도시락 폭탄의 실물을 사진으로 확인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 한시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는 “엄청난 가치를 지니는 발견으로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큰 궁금증 하나가 풀렸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사진에는 폭탄의 점화장치가 뚜렷이 드러나 그간 추측만 가능했던 ‘작동 원리’도 최초로 확인됐다. 도시락 바깥으로 연결된 줄에 짧은 막대기 형태의 손잡이가 묶여 있다. 백범일지와 일본 외무성 사건기록에 따르면 윤 의사가 투척한 폭탄은 끈을 잡아당겨 점화시킨 뒤 던지면 폭발하게끔 만들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김 PD는 “사료에서 묘사돼 의견이 분분했던 도시락 폭탄의 사용법을 사진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김 PD는 육삼정 의거를 처음 보도한 당시 중국 신문 사료도 찾아냈다. 동아일보가 그해 11월 11일 국내에 보도하기 전, 일간지 신바오(新報)와 영자신문 ‘노스차이나 데일리뉴스(North China Daily News)’가 의거를 대서특필한 것. 특히 신바오는 의거 다음 날 “경찰이 총을 겨눴는데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다. 목격한 종업원은 그들이 끌려가면서도 줄곧 태연하고 당당해 지금도 이상히 여겼다. 한 사람은 경찰이 손찌검을 해도 웃으며 주눅 들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육삼정 의거는 일본 외무성 문서만 남아 있는 상태라 제3자의 입장이 담긴 해외 사료의 발굴은 의의가 크다. 이번에 함께 입수한 백 의사와 이강훈 전 광복회장(1903∼2003), 독립운동가 원심창(1906∼1973)을 찍은 원본 사진을 보면 당당한 표정과 자세가 여실히 드러나 중국 측 보도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앞서 발굴된 일본 외무성 사료를 보면 이 전 광복회장이 일제 재판관에게 “불공대천의 원수에게 무엇을 호소하겠나. 재판하느라 수고했다”고 말하는 장면도 나온다. 한편 15일에는 서울 종로구 우당기념관에서 육삼정 의거 81주년을 맞아 ‘백정기의사기념사업회’와 ‘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가 주최한 기념식이 개최됐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약 올랐다. 1978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서른일곱. 근데 방 안에서 뒹굴며 하는 일 없는 인생에 만족하다니. 또 그걸 자랑이라고 높은 실업률의 주범으로 낙인찍힌 ‘니트족(族)(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구직 노력 않는 실업 계층)’을 대변하는 책까지 냈다. 쯧쯧 혀 차는 소리도 들리지만, 부럽고 얄밉고 안쓰럽고 어이없다. 이 철없는 일본 놈팡이의 뇌 속엔 뭐가 들었을까. ―본명이 뭔가. 파(Pha)란 필명은 뭔 뜻인가. “미안하다. 실명을 밝힌 적 없다. 이름이란 자신과 타인, 사회적 인간관계의 연결고리다. 난 그 굴레에서 벗어나 실체 없이 살고 싶다. 파도 유령이나 혼령을 뜻하는 ‘팬텀(phantom)’에서 따왔다. 그저 이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다.” ―교토(京都)대까지 나온 명문대생이 뭐 하는 건가. 직장도 3년 만에 때려치웠더라. “어릴 때부터 어디에 소속된 게 싫었다. 10대 땐 맘대로 살기엔 간이 작았다. 할 게 없어 공부했다. 좀 나아질까 싶었지만, 대학도 회사도 버티기 힘들었다. 사람마다 적성이란 게 있으니까.” ―적성이 밥 먹여주나. 한국이면 ‘노력 없는 백수의 자기 옹호’라 비난받기 딱이다. “일본도 비슷하다. 어른들한테 혼 많이 난다. 반면 젊은 층은 공감하는 이가 꽤 된다. 일종의 세계관 차이인데…. 모두가 니트족이 되자는 소린 아니다. 일이 좋으면 일하고, 싫으면 관두잔 얘기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각자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지금은 젊으니까 가능해 보인다. 나중에 당신들에게 들어갈 세금이 아깝다. “나도 세금 낸다. 인터넷 광고나 중고 책 판매로 쥐꼬리만큼 버니까. 나이 들면 도움 받아야 하는 건 다 똑같다. 생각이 다르다고 사회 구성원이 아닌가. 뭣보다 국가보다 사람이 먼저다. 적게 먹고 적게 싸겠다는데, 그 정도는 이해해주라.” ―그럴듯하지만 사회에 별 관심 없는 것 아닌가? 제3세계 청년이면 꿈도 못 꿀 일이다. “인정한다. 세상사엔 흥미 없다. 의지를 가진 분들이 잘하면 좋겠다. 가난한 나라면 불가능하단 말도 맞다. 하지만 노동에 힘겨워하는 이들이 없길 바란다. 니트족이라고 타인에게 무관심한 건 아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게 우리가 바라는 세계다.” ―정신 차려라. 우리가 사는 지구는 매일 전쟁과 갈등이 벌어진다. “그게 니트족의 사고방식 때문일까. 아니다. 더 일하고 더 돈 벌고 더 가지려는 욕심이 빚은 결과다. 현대 사회는 충분히 풍요롭다. 만족하지 못하는 게 문제다. 자신을 돌아보라. 어쩌면 그런 삶을 살지 못해 흥분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맞다. 솔직히 배 아프다. 하지만 외톨이 삶이 부럽진 않다. “좋은 타협점이다. 각자의 인생에서 장점을 찾으면 된다. 책을 쓴 것도 나처럼 살라는 게 아니다. 행복을 찾는 길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자는 거다. 옛날에도 은둔자의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존중해 줬듯이. 최소한 니트족은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는다. 가만있는 게 상책인 사람들, 세상에 참 많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명망 있는 원로작가부터 톡톡 튀는 신진작가까지 국내 화가 60여 명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미술축제가 열린다. 미술평론지 미술과비평(Art&Criticism)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15일부터 ‘제7회 A&C 아트페스티벌(ACAF)’을 개최한다. 2008년부터 시작된 이 페스티벌에는 올해 회화와 조각 사진 판화 영상미디어를 아우르는 미술작품 1000여 점이 출품된다. ACAF는 기본적으로 운영위원들이 심의를 통해 공모에 당선한 신인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 하지만 구자승 김구림 김형대 김형근 민경갑 박석원 서승원 전뢰진 최종태처럼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화가도 대거 참여했다. 운영위원장인 홍석창 홍익대 명예교수(동양화)는 “한국 현대미술의 경향과 흐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라고 소개했다. 유명 작품을 구입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참여 작가의 작품 가운데 특별히 엄선한 것을 골라 100만 원 이하에 판매한다. 배병호 미술과비평 대표는 “작가와 수집가들이 소통하며 미술시장의 저변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26일까지. 02-2231-4459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9세기 일본 학자가 동해를 ‘조선해(朝鮮海)’로 표기한 세계지도 원본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됐다. 경희대혜정박물관(관장 김혜정)은 12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1844년 일본 미쓰쿠리 쇼고(箕作省吾)가 프랑스 지도를 참조해 제작한 ‘신제여지전도(新製輿地全圖)’에 조선해라고 분명하게 표기돼 있다”고 밝혔다. 신제여지전도는 지난해 국가기록원이 영인본(影印本)을 공개해 화제를 모았다. 2011년 몽골에서도 실물이 전시됐으나, 국내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지도는 22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세계 고지도로 보는 동해’에서 일반에 선보인다. 신제여지전도는 한반도를 조선이라 표기하고 동해를 조선해라고 썼다. 태평양은 ‘대동양(大東洋)’, 일본 동쪽 앞바다를 ‘대일본해(大日本海)’라고 기록해 동해가 일본해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김 관장은 “제3자는 물론이고 일본조차 동해가 우리 바다임을 인정한 실증자료”라고 설명했다. 동서양 지도 70여 점을 전시하는 특별전에는 조선해를 명시한 지도 원본이 여럿 나왔다. 1810년 일본 에도(江戶)막부 천문 담당 관리였던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가 막부의 명을 받아 만든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도 동해를 조선해, 일본 동쪽을 대일본해라고 표기했다. 1853년 일본에서 제작한 ‘지구만국방도(地球萬國方圖)’도 마찬가지다. 1760년 프랑스에서 만든 ‘아시아전도(L'ASIE DRESS´EE)’도 동해를 ‘한국해(MER DE COR´EE)’로 표기했다. 이 밖에 1770년 신경준(1712∼1781)이 제작한 ‘함경도·경기도·강원도 지도’(보물 제1598호) 가운데 울릉도와 독도가 그려진 강원도 지도와 고대 그리스 천문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를 15∼16세기 다시 그린 세계지도도 만날 수 있다. 다음 달 6일까지. 2500∼5000원. 02-580-1657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중국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왕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장 교수는 2010년 북한 학계와 연계해 개성 지역 고려 황릉을 직접 방문 연구했으며, 2012년 중국에서 현지 실태조사를 벌였다. 장 교수는 고려도 황제국을 자처했기에 왕릉 대신 황릉이라 부르는 게 옳다고 봤다. 고려와 금은 능 위치를 선정하는 기준부터 송과 달랐다. 세 나라 모두 풍수사상을 바탕에 뒀으나 적용하는 방식이 달랐다. 고려 황릉은 북쪽은 산이 둘러싸 높고, 남쪽은 낮고 물이 흐르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요지에 조성됐다. 흔히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도 하는데, 과학적으로도 겨울철 차가운 북서풍을 막고 물 공급도 용이하단 장점을 지녔다. 금나라도 장풍득수의 기준을 적용했다. 다만 태양을 숭배하는 여진족 성향이 반영돼 동남쪽으로 15% 정도 방향이 틀어져 있다. 반면 송나라는 능묘의 하관이 대략 서쪽으로 향한다. 송 황가는 조(趙)씨인데 오행설(五行說)의 목(木), 서쪽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치도 산을 앞에 두고 물을 뒤에 두는 배수면산(背水面山)을 선호했다. 장 교수는 “고려와 금은 산자락에 능을 조성하는데 송은 평지를 선택했다는 점도 다르다”고 설명했다. 규모나 부대시설도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고려와 금 황릉은 ‘검박함’을 기본으로 했다. 고려는 태조 왕건 때부터 백성에게 부담이 없도록 간략한 절차를 미덕으로 여긴 까닭이다. 금은 여진족 시절 별다른 국장제도가 없다가 고려를 따라 작은 규모의 황릉을 조성했다. 행궁(行宮·왕이 임시로 머무는 거처)과 능실(陵室·제례를 지내는 건물) 정도만 세우는 것도 닮았다. 반면 송 황릉은 마치 또 다른 궁궐이라도 짓듯 여러 건물을 웅장하게 세웠다. 장례 기간도 두 나라는 한 달 정도인 데 비해, 송나라는 7개월이 넘게 걸리곤 했다. 뭣보다 황릉의 봉토(封土·무덤에 흙을 쌓는 것) 형태 자체가 달랐다. 고려와 금 황릉은 동그란 원형인데, 송나라는 중국 진한시대부터 이어진 네모난 장방형(長方形)이었다. 재밌는 것은 이후 명·청시대가 되면 봉토가 원형이나 타원형으로 바뀐다. 장 교수는 “고려와 금은 황릉 근처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는데, 송나라에는 없는 이 풍습 역시 명과 청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황릉 주변 석조물도 구분된다. 고려와 금나라는 문무석을 포함해 14∼16기를 배치했다. 송은 코끼리에 타조, 심지어 마부와 외국 사신까지 최대 64기나 세웠다. 두 나라는 문무석상 크기가 2m 안팎인데, 송나라는 4m 가까이 됐다. 석호(石虎)도 송은 1.9∼2.3m로 양국보다 2배 이상 컸다. 표현 양식도 고려와 금은 간결한 생김새에 친숙하고 해학적인 맛을 살린 데 반해, 송나라는 정교하고 구체적이나 엄숙하고 위압적이다. 장 교수는 이번 발표를 계기로 향후 고려와 금 황릉의 출토 유물, 두 나라 황릉이 조선과 후금(청)에 끼친 영향도 연구할 계획이다. 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은 “고려와 금이 같은 뿌리를 가진 민족이란 건 어느 정도 인지돼 왔으나 직접 능을 비교 연구한 건 신선한 충격”이라며 “민족의 정통성을 제고한다는 측면에서도 이번 논문은 큰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어떤 이에게 그곳은 꿈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절망이기도 했다. 혹자에겐 보금자리였으며, 다른 이에겐 터전을 빼앗는 괴물이었다. 한국인에게 아파트는 그 모든 것이었다.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이 개최한 특별전 ‘아파트 인생’은 관람할수록 감정이 혼란스러워졌다. 슬쩍 미소가 머금어졌다가 한숨이 나고, 안타까움에 가슴이 저몄다가 괜스레 너털웃음이 나왔다. 마치 우리네 인생이 그런 것처럼. 광복 뒤 1957년 처음 일반 분양했던 서울 성북구 종암아파트 이후 본격적으로 아파트단지의 시대를 연 건 1962년 마포형무소 자리에 세워졌던 마포아파트였다. 6층 10개동으로 이뤄졌던 이 아파트는 수세식 화장실과 엘리베이터를 갖춘 현대식 아파트를 표방했으나, 결과는 이도 저도 없는 어정쩡한 형태였다. 전시된 당시 살림살이를 보면 부엌엔 아궁이가 들어섰고, 창문은 창호지로 도배한 나무 창살이었다. 1960년대만 해도 아파트는 서민이나 최하층 노동자가 사는 공간이란 인식이 강했다. 정부도 골격만 지어놓고 내부 공사는 입주자가 알아서 하란 식이었다고 한다. 정수인 학예연구사는 “당시 서울시는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아파트’를 마구 세웠다”며 “1969년 한 해에만 서울에 406개동의 아파트를 건설했다”고 설명했다. 1970년 무너진 마포 와우아파트는 공사 기간이 단 3개월이었다. 1971년은 아파트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해였다. 용산구 한강맨션아파트에 최초로 싱크대를 만들었고 중앙난방을 도입했다. 본보기집(모델하우스)을 처음 선보인 것도 이 아파트였다. 같은 해 건설된 12층짜리 여의도시범아파트는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들어선 아파트였다. 아파트는 삶을 바꾸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1970년대부터 쾌적한 삶을 보장하는 중산층의 상징물이 됐지만, 반대로 아파트 건설과 함께 기존 거주자들이 쫓겨나는 아픔을 양산했다. 박물관에 따르면 당시 철거민은 서울 전체 인구의 20%, 약 70만 명에 이르렀단다. 대대적인 철거민 운동을 촉발한 계기도 아파트였다. 전시에서 가장 아련한 공간은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오랜 세월을 그곳에 보낸 이들의 옛 사진들이 벽에 붙어 있다. 1983년 입주한 이 아파트는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에겐 고향과도 같은 존재지만 조만간 재건축에 들어갈 예정. 정 학예사는 “스스로 아파트 키드라고 부르는 이들은 이제 곧 또 다른 의미의 ‘실향민’이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1978년 건립된 서초삼호아파트의 한 가구를 통째로 옮겨놓은 전시장도 인상적이다. 5월 6일까지. 무료. 02-724-0274정양환 기자 ray@donga.com}

7일 시즌2가 시작된 tvN ‘꽃보다 할배’. 지난해 방영 때 이서진은 독특한 김치찌개를 어르신들에게 대접했다. 김치 대신 독일식 양배추 절임인 ‘사워크라우트(sauerkraut)’를 넣었는데 그 맛이 거의 흡사했던 것. 근데 실은 유럽에서 자취해본 이에게 이 요리법은 낯설지 않다. 사워크라우트와 소시지에 라면 수프를 넣고 끓이는 비법(?)으로 고향 음식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곤 한다. 그런데 먹으면서도 신기했던 이 찌개 맛엔 숨겨진 역사가 있었다. 안성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부교수는 김치와 사워크라우트가 먼(어쩌면 가까운) 친척이었음을 소개한다. 고유한 전통음식이라 믿는 독일인에겐 미안하지만, 유럽을 휩쓴 몽골이 고려의 김치나 중국 김치 쏸차이(酸采)를 전파한 것이었다. 원래 사워크라우트도 ‘신맛 나는 채소 혹은 배추’라는 뜻. 독일 위키피디아도 가장 유사한 발효음식으로 한국 김치를 꼽는단다. 이 책은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18세기학회에 소속된 학자 21명이 한 주제씩 맡아 썼다. 정민(한양대) 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김시덕 이종묵 정병설 주경철(이상 서울대)…. 중량감 있으면서도 대중적 글쓰기에 능한 필진이 대거 참여했다. 일본18세기학회원인 오이시 가즈요시(大石和欣) 도쿄대 교수와 하시모토 지카코(橋本周子) 일본학술진흥회 특별연구원도 원고를 실었다. 한일 학자들이 힘을 모아 18세기 세계의 입맛을 두루두루 고찰한 셈이다. 왜 하필 18세기 음식문화에 주목했을까. 안 교수에 따르면 당시는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고급스러운 음식이 대중화되고, 이국적 음식이 세계화되는 변화가 크게 일어난 시대”다. 또 저평가됐던 맛에 대한 담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중세의 금욕적 분위기를 벗고 대중적으로 욕망과 소비를 추구하는 문화가 발흥된 때이기도 하다. 앞서 설명한 사워크라우트가 독일 민족음식으로 자리 잡고, 대항해시대가 절정기를 맞으며 선원들의 괴혈병 방지에 이 요리가 최고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도 18세기였다. 각 꼭지가 다 재밌지만, 역시 우리 음식을 다룬 글들에 눈길이 간다. 지금은 사시사철 먹는 복(鰒)은 18세기엔 봄철에만 먹는 서울 음식이었다. 봄이면 한강을 거슬러 복어 떼가 올라오는데 복사꽃이 지기 전(5월경)에 먹어야 참맛을 안다고 했다. 그 시절에도 중독 사고가 잦았는데, 사대부들조차 찬반으로 갈리어 논쟁을 벌였다. 참고로 ‘鰒’은 전복을 가리키는 한자어라 당시엔 ‘하돈(河豚)’, 물돼지라 불렀단다. 18세기 일본에서 유행한 조선 음식도 있다. 엄밀히 말하면 조선도 음식도 아닌 ‘우육환(牛肉丸·쇠고기 환약)’이다. 16세기부터 메이지유신 때까지 일본은 종교적 이유로 쇠고기 식용을 금했다. 다만 약으로 복용하는 것만 허용했는데, 이게 한반도에서 제조법이 전해진 우육환이었다. 일종의 육포로 만든 알약인데, 역시 ‘원조’의 인기가 남달랐던지 (조선과 가까운) 쓰시마 섬에서 만들어 조선 우육환이라 광고해야 잘 팔렸다. ‘18세기의 맛’은 유쾌한 책이다. 필자마다 다소 차이가 있긴 해도 인터넷에 연재했던 이력 덕분인지 글이 쉽고 편하다. 18세기 음식이란 주제로 한정했는데도 이렇게 무궁무진한 얘깃거리가 있다는 점도 놀랍다. 아쉬운 점도 있다. 사료도 부족했을 테고 취향도 작용했겠지만 너무 한국이 속한 동북아시아와 유럽밖에 없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태국 베트남 요리나, 잠깐 감자 편에서 언급할 뿐인 아메리카 대륙 음식도 소개했으면 좋았겠다. 겹치는 대목도 상당한데 영국을 네 차례 이상 다룬 건 좀 과하다. 어쨌든 책을 덮고 나니 쩝쩝 입맛 다셔지는 게 많다. 문득 정월 돼지날(亥日) 세 번에 걸쳐 담근다는 ‘삼해주(三亥酒)’에 복지리 한 사발이 확 당긴다. 카, 18세기라….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숭례문 앞 저자가 이른 새벽 열리어/칠패 사람들의 말소리 성 너머로 들려오네./바구니 들고 나간 계집종이 늦는 걸 보니/신선한 생선 몇 마리 구할 수 있겠구나.’(다산 정약용의 시 ‘춘일동천잡시’ 중) 서울 중구에 있는 남대문시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재래시장이다. 점포 약 1만 개가 밀집해 1700여 종의 상품을 취급하며, 하루 평균 이용객만 40만 명이 넘는다. 남대문시장엔 “고양이 뿔 빼고 다 있다”고도 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최근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남대문시장’을 발간해 이 시장의 남다른 역사를 조명했다. 남대문(숭례문) 주변은 조선 건국 때부터 인근 종로 시전행랑(市廛行廊)의 영향으로 크고 작은 장이 섰다. 본격적으로 시장 공간이 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였다. 조선 후기 인문지리서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한양 장시(場市·정기시장)는 4곳. 현 종각 주변인 종루가상(鐘樓街上)과 종로4가 부근 이현(梨峴), 서소문 바깥 소의문외(昭義門外), 그리고 남대문의 칠패(七牌)였다. 칠패란 원래 왕을 호위하던 어영청 소속 군인을 일컫는 말. 이들 초소가 남대문 근처에 있어 남대문시장을 칠패장이라 불렀다. 당시 남대문시장은 소금과 자기, 볏짚이나 싸리, 대나무 제품과 젓갈류를 많이 취급했다. 난전(亂廛) 성향이 강했던 시장이 지금 위치에 정착한 건 1897년 도시근대화사업의 하나로 선혜청 창고 터에 창내장(倉內場)이란 시장을 만들면서부터다. 현 남대문시장 A동과 B동 사이쯤이다. 윤남률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매일 새벽에 열리던 아침시장(朝市)과 구분되는 근대적 상설시장이 최초로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개항 직후라 해외 상인도 몰렸는데 1907년 기준 조선인 50%, 일본인 30%, 중국인 20%로 구성됐다. 당시 남대문시장은 시장 규모 2위였던 동대문시장보다 거래액이 2.6배 이상 컸다. 융성하던 시장도 일제강점기는 비켜가지 못했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 ‘시장규칙’을 반포하면서 구식시장이라며 남대문시장의 해체를 시도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시장이 살아남은 건 친일파 덕분(?)이었다. 매국노 송병준(1858∼1925)이 운영하던 조선농업회사가 운영권을 따내며 허가 취소를 막은 것. 그 대신 엄청난 자릿세를 뜯어갔다. 이후 남대문시장은 일본인 전직 관료나 경제인이 관리하며 이권을 챙겼다. 광복 이후에도 고초는 이어졌다. 6·25전쟁과 1000여 점포가 전소한 1954년 대화재도 한몫했지만, 깡패조직 명동파의 지류였던 ‘엄복만파’가 상인들의 고혈을 짜냈다. 1922년생으로 알려진 엄복만은 대화재 때 전국에서 보낸 성금까지 착복할 정도였다. 1957년 서울시가 남대문시장상인연합회에 운영권을 이양하며 주먹들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후 남대문시장은 ‘양키시장’ ‘도깨비시장’으로 불리며 발전했다. 도깨비방망이처럼 뭐든 구할 수 있고, 단속반을 피해 잽싸게 치고 빠진다는 명성을 얻었다. 1967년 동아일보 ‘횡설수설’은 “외국 언론이 (남대문시장을) ‘악마의 골목(devil's alley)’으로 번역해 소개했다”고 전했다. 월남한 실향민이 다수 정착해 ‘아바이시장’이란 별명도 얻었다. 1968년 남대문시장은 또다시 화재를 겪었지만 발 빠르게 회복하며 지금 모습으로 자리잡아갔다. 1980년대에는 주방용품 주단포목 공예품 골목이 형성되며 전문상가 중심 시장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윤 학예사는 “1990년대부터 외환위기와 동대문시장의 성장으로 부침을 겪고 있지만, 여전히 전통과 영향력을 지닌 남대문시장은 한국을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선비가 태어나 부귀와 함께하다가 기록되지 못하기보다는 한 가지 기예로라도 이름이 나야 한다고 했으니 … 겸옹(謙翁)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나 그림으로 덮인 바 있으니 이를 아는 이가 없네.” 조선 영정조 때 문신 박사해(1711∼?)가 지은 ‘창암집(蒼巖集)’에 나오는 글이다. 여기서 겸옹은 겸재 정선(1676∼1759)을 말한다. 겸재는 한반도의 산세를 독자적 필치로 표출한 진경산수의 대가다. 국보 제216호인 ‘인왕제색도’나 제217호 ‘금강전도’를 비롯한 걸작 산수화를 숱하게 남겼다. 하지만 그가 인물화, 특히 선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고사(故事) 인물화도 많이 그렸다는 사실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겸재정선기념관이 최근 창간한 학술지 ‘겸재와 미술인문학 연구’에는 겸재의 인물화에 초점을 맞춘 논문 2편이 게재됐다. 송희경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와 민길홍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각각 ‘정선의 고사 인물화’ ‘겸재 정선의 인물화’를 통해 겸재의 인물화를 새로이 조명했다. 겸재가 고사 인물화를 즐겨 그린 데는 자신의 학문적 성취와 주위 환경이 크게 작용했다. 박사해가 안타까워했듯 겸재는 상당한 내공을 지닌 유학자였다. 그만큼 옛 선인들의 고사에 해박했으며 관심이 높았다. 게다가 북악산 기슭에서 태어난 겸재는 어릴 적 안동 김씨 명문가 문하를 드나들며 성리학과 시문을 배웠다. 송 교수는 “겸재는 정통 노론에 영향을 깊이 받아 주자학에 오래도록 심취했다”며 “친교를 맺은 사대부들의 요청이 잦았던 것도 고사 인물화를 많이 그린 요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겸재가 그린 역사적 인물은 참으로 다양하다. 공자가 제자들과 경전을 읽고 음악을 즐긴다는 내용인 ‘행단고슬도(杏壇鼓瑟圖)’와 제갈량이 와룡강에 은거했을 때를 담은 ‘초당춘수도(草堂春睡圖)’, 노자를 소재 삼은 ‘기우출관도(騎牛出關圖)’, 한나라 개국공신 장량을 그린 ‘야수소서도(夜授素書圖)’도 전해진다. 그 가운데 송대육현(宋代六賢·중국 송나라 여섯 명의 성리학자인 소옹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 사마광)을 겸재는 가장 즐겨 그렸다. 특히 주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정호(程顥·1032∼1085) 정이(程이·1033∼1107) 형제에 애착이 커 ‘부강정박도(溥江停泊圖)’ ‘방화수류도(訪華隨柳圖)’ ‘정문입설도(程門立雪圖)’를 포함해 관련 고사 인물도를 여러 점 그렸다. 겸재가 그린 인물화는 주로 자연을 배경으로 고사 속 인물을 배치하는 산수인물화였다. 당대 최신 중국 화단의 흐름을 꿰뚫고 있던 그는 문인화의 대표 격인 남종화(南宗畵)를 근간으로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수묵담채화를 펼쳤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순수한 우리말 ‘ㅱ므다(잠그다)’와 ‘쇠붙이’의 합성어인 자물쇠는 삼국시대부터 사용됐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녔다. 목가구나 건물을 함부로 열지 못하게 채워두는 장석(裝錫·장식이나 개폐용으로 부착하는 쇠붙이)의 일종으로, 선조들의 과학적 예술적 노하우가 고스란히 담겼다. 국가지정문화재로는 리움이 소장한 통일신라시대 유물인 보물 제777호 ‘금동 쇄금(鎖金·자물쇠)’과 경북 김천시 직지사에 있는 고려시대 ‘예천 한천사 자물쇠’(보물 제1141호)가 있다. 자물쇠는 일반적인 ‘ㄷ’자 형태의 대롱자물쇠를 비롯해 가운데가 둥그런 함박형, 동물 모양을 본뜬 물상(物象)형처럼 생김새에 따라 다양하다. 재료는 시대에 따라 바뀌었는데, 고대에는 주로 철로 제작됐으나 조선 초·중기는 청동(구리와 주석 합금)이나 금도금을 한 금동으로 많이 만들었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황동(구리와 아연 합금), 말기에는 백동(구리와 니켈 합금) 자물쇠가 유행했다. 지금이야 생체인식기술이 도입될 정도로 보안방지시스템이 발전했지만, 한반도의 자물쇠도 여간내기는 아니었다. 전통자물쇠 전문가인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교육문화과장에 따르면 열쇠를 꽂아 돌리면 바로 열리는 단순한 것부터 여러 단계를 거쳐야 풀리는 복잡한 자물쇠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다단계 자물쇠는 경남 진주시 향토민속관(옛 태정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한 ‘백동 8단 비밀 자물쇠’다. 백동으로 만들어진 걸로 볼 때 조선 말기 것으로 추정된다. 이름 그대로 이 자물쇠는 8단계 작업을 거쳐야만 열린다. 일단 이 자물쇠 본체는 처음 보면 열쇠 구멍이 없다. 왼쪽 꽃무늬 광두정(廣頭釘·머리가 넓은 못)을 누르고 줏대를 민 다음 오른쪽 판을 180도 회전시켜야 철커덕 열쇠 구멍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대로는 열쇠가 들어가질 않고 자물쇠 밑면 광두정 하나를 다시 밀어 넣어야 열쇠 구멍이 마저 열린다. 구멍이 열렸다고 열쇠를 그냥 꽂는 것도 아니다. 일단 열쇠를 본체와 직각으로 만들어 끝에 ‘ㄱ’로 달린 부분만 안으로 감듯이 넣는다. 이후 열쇠를 돌려야 딱 걸리는 부분에서 쑥 들어가고, 다시 열쇠를 수평으로 90도 틀어서 천천히 밀면 그제야 고삐가 풀린다. 자물쇠 내부는 더 놀랍다. 본체를 해체해 보면 안쪽 아래 판은 배흘림 구조를 지녔는데, 가운데는 살짝 오목해서 스프링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오랫동안 사용해도 헐거워지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자물쇠 속 뭉치 역시 탄력을 부여해 열쇠를 뺐을 때 안쪽 장치가 원위치로 돌아가도록 세밀하게 조정돼 있다. 윤 과장은 “이런 복잡한 설계 구조를 지닌 자물쇠는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서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며 “정확한 합금 및 주조 기술을 지니지 않으면 제조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2일 K옥션이 개최하는 ‘전재국 미술품 컬렉션’은 지난해부터 이어진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환수 마지막 경매다. 하지만 미술계는 그 역사적 상징성과 별개로 이번 경매에 관심이 크다. ‘꽃의 화가’ 김홍주 목원대 명예교수(69)의 작품이 대거 25점이나 나왔기 때문이다. 김 교수의 작품은 신라호텔 로비에 걸린 꽃 그림(실제 제목은 모두 ‘무제’) 외엔 난도가 무척 높다. 특히 인물화 풍경화가 다수인 초·중기 작은 “이래서 화가들이 사랑한 화가구나”라며 머리를 긁적이게 만들었다. 대단한 듯한데 선뜻 좋단 소리는 나오질 않는다. 하지만 왠지 모를 낯선 독특함은 여운이 길었다. 한 관계자는 “전 씨가 김 교수의 시대별 작품을 이만큼 모은 걸 보면 미술관 설립을 꿈꿨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다”고 말했다. 딴 건 어려워 그냥 넘겨도 꽃 그림 4점을 동시에 보는 황홀경은 놓치기 아깝다. 작품당 최소 추정가가 3000만 원이니 입맛만 다실 뿐이지만. 11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K옥션 전시장. 02-3479-8888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