說 說 說 안중근 거사 촬영 필름… “러시아에 사본 있을 가능성”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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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기… 저격 동영상 둘러싼 진실은
‘더채널’ 김광만PD 증언

오늘(26일)은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사진)가 순국한 지 104주기 되는 날. 안 의사의 숭고한 희생은 23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한중정상회담에서 거론될 정도로 여전히 동북아 역사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최근 세간에선 안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동영상이 화제다. ‘안중근 동영상’은 과연 존재하는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 ‘안중근 의사(1879∼1910)의 하얼빈 거사를 촬영한 필름은 과연 있는가.’ 최근 미국 잡지 버라이어티의 1909년 12월 6일자 기사가 발굴되면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순간을 담았다는 ‘안중근 동영상’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러시아 영화사가 프랑스 파리에서 판매에 나섰다는 내용의 기사인데, 이를 두고 여러 설(說)이 나온다. 진짜 존재하는지, 어디 있는지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

수십 년째 이 필름을 쫓아온 근대사 다큐멘터리 제작사 ‘더채널’ 대표인 김광만 PD(59)의 도움을 얻어 전체 상황을 짚어봤다. 동영상을 언급한 자료는 의외로 적지 않다. 당시 일제의 전문(電文)과 신문기사, 러시아 기록물이 ‘이토 히로부미의 활동사진’을 여러 차례 거론했다. 대부분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요미우리와 함께 동영상 관련 보도를 지속했던 시사신보는 1909년 11월 30일 안 의사를 ‘흉한 안응칠’이라고 부르며 거사 30분 뒤에 찍은 사진을 실었다. 김광만 PD 제공
요미우리와 함께 동영상 관련 보도를 지속했던 시사신보는 1909년 11월 30일 안 의사를 ‘흉한 안응칠’이라고 부르며 거사 30분 뒤에 찍은 사진을 실었다. 김광만 PD 제공
동영상이 사료에 처음 등장하는 건 1909년 10월 26일, 의거 당일이다. 하얼빈 일본 영사관은 본국 외무성에 보낸 긴급 전문에 “활동사진을 찍은 러시아 촬영기사를 임시 억류했다”며 어떻게 처리할지 묻는다. 다음 날 외무성 답신은 “내버려둬라”였다. 필름을 압수했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할 것을 우려해 몸을 사린 것이다.

동영상을 찍은 러시아 촬영기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빅토르 코브체프’다. 그의 아들이 남긴 일기에 따르면 이토가 하얼빈에서 만난 러시아 장교단을 찍으러 갔다가 우연히 저격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공식 수행언론에는 끼지 못해 외곽에 자리 잡은 게 오히려 ‘역사의 현장’을 포착하는 행운이 됐다. 1910년 1월 7일 일본 시사신보는 “코브체프 씨가 도쿄에 왔다”며 그의 사진과 ‘하얼빈 무용담’을 실었다.

코브체프는 이 덕에 큰돈을 거머쥔다. 1909년 11월 18일 요리우리와 시사신보에 “치열한 경합 끝에 신문대행업체 ‘저팬 프레스 에이전시(JPA)’가 1만5000엔에 계약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지금으로 따지면 4억 원 가까운 거금이다.

1910년 1월 6일자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실린 안중근 의사의 거사 동영상 관련 기사(굵은 선 안). ‘이토 공 조난(遭難) 사진 도착’이란 제목 아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코브체프 씨가 필름을 갖고 일본에 도착했다”고 썼다. 김광만 PD 제공
1910년 1월 6일자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실린 안중근 의사의 거사 동영상 관련 기사(굵은 선 안). ‘이토 공 조난(遭難) 사진 도착’이란 제목 아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코브체프 씨가 필름을 갖고 일본에 도착했다”고 썼다. 김광만 PD 제공
동영상 내용과 관련해 요미우리신문(1910년 1월 6일자)에 재밌는 대목이 나온다. “(동영상을) 봤더니 당시 이토 공작을 수행한 고관들은 도망가고 숨기 바빴다. 필름이 공개되면 그간 용맹을 떠벌렸던 정치인들은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당시 도쿄의 한 영화관은 거사 장면이 쏙 빠진 ‘편집본’을 틀었고, 사흘 만에 막을 내렸다고 한다.

이후 필름은 더이상 사료에 등장하질 않는다. JPA의 사주였던 정치인 다노모키 게이치(賴母木桂吉)가 갖고 있었으나 종적이 묘연해졌다. 미국으로 이민 간 다노모키의 손자는 몇 년 전 김 PD와 만나 “1945년 도쿄 대공습 때 집이 전소돼 할아버지 소장품은 모두 사라졌다”고 말했다. 일본필름보관소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원본을 넘긴 1910년, 하얼빈 일본상인협회 기록에 “코브체프가 복사한 필름 1롤을 갖고 있다가 압수당했다”는 내용이 있다. 코브체프의 아들도 “아버지가 원본을 팔기 전 여러 벌을 복사해뒀다”고 밝혔다. JPA로선 코브체프에게 사기를 당한 셈인데, 덕분에 동영상은 다양한 갈래로 흩어져 살아남은 것이다. 다만, 최근 보도에서 언급된 파리 경매에 나왔다는 동영상은 프랑스 영화사 파테(Path´e) 소유가 됐지만 이토의 장례식을 담은 가짜로 밝혀졌다.

거사 당일 안 의사를 기모노 차림으로 그린 미국 뉴욕타임스(1910년 8월 14일자)의 삽화 역시 엉터리다. 의거 후 30분 뒤에 촬영했다는 시사신보(일본 신문)의 사진을 보면 안 의사는 양복 차림이기 때문이다.

‘안중근 동영상’의 행방을 놓고 한때 미국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운영한 영화재단이 사들였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가장 유력한 건 러시아다. 코브체프 유물이 당시 소련 정부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김 PD는 “2000년대 중반 비밀루트를 통해 필름 목록을 확인했다”며 “구체적인 건 밝힐 수 없지만 하루빨리 한국이 찾아와야 할 보물”이라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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