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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 지금이야 명성이 자자하지만, 초창기 시집을 내놓을 땐 참으로 별 볼일 없었다. 첫 시집 ‘티무르’를 개정한 ‘알 아라프, 티무르’는 출판사를 찾지 못해 겨우 250부만 찍었다. 평단도 시큰둥했다. 예상했겠지만, 포가 세상을 떠난 뒤 이 시집의 가치는 어마어마해졌다. 구하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운 좋았던 뉴욕 공공도서관은 한 수집가가 갖고 있던 초판 1권을 기증받는다. 이후 책은 이 도서관에 있었다, 1931년 한 젊은이가 열람 신청을 할 때까지는. 그리고 사라진 시집은 인근 중고서적 거리인 ‘북로우(book row·브로드웨이 4번가)’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책은 참 신기한 책이다. 탈탈 털고 줄거리만 보자면 별게 없다. 비싼 책을 훔치는 도둑들이 있고, 이를 잡으려 뒤쫓는 도서관 특별조사관이 나오는 게 다다. 이 뻔한 소재를 ‘희귀 서적 큐레이터’란 생소한 직함을 가진 저자가 맛깔스럽게 비벼내니 너무나 흥미진진한 얘기로 탈바꿈했다. 기막힌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웬만한 범죄소설이나 스릴러영화는 저리 가라 할 정도다. 게다가 법학 박사와 문헌정보학 석사 학위를 땄다는 저자의 전문 식견도 대단하다. 아마 이 책의 매력은 사건 자체보다 은은히 배어있는 ‘아날로그적 감성’에 있지 싶다. 대공황 시절이긴 해도 1930년대란 시대적 배경과 퀴퀴하지만 정겨운 헌책방의 향취가 어우러져 근사한 앙상블을 이룬다. 이제는 CSI류 드라마를 통해 첨단과학수사에 익숙해졌는데도, 파이프를 물고 스윽 범인을 지목하는 명탐정 홈스의 매력이 여전하듯. 덧붙이자면, 빅밴드 재즈를 틀어놓고 이 책을 읽어보시라. 분위기가 훨씬 산다, 짜잔.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제목 그대로 ‘호랑이를 정복한 기록(征虎記)’인 이 책은 한국인에겐 꽤나 씁쓸한 내용이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일본인 부호가 일본과 조선 사냥꾼을 대동하고 호랑이를 잡으러 다니며 남긴 일기와 사진을 모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정호기엔 더더욱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이 담겼다. 일단 정호기는 당시 호랑이를 다룬 거의 유일한 사료다. 책에 실린 풍부한 사진은 일본이 호랑이 멸종에 나서며 내세운 해수구제(害獸驅除·인간에게 해로운 동물을 없앤다) 정책의 실상을 알 기회를 제공한다. 포획된 시체나 박제된 신세긴 하지만 100년 전 한국에 살았던 호랑이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의 원문보다는 이 책의 의미와 배경을 설명한 해제가 더 읽을 만하다. 한국범보존기금(대표 이항 서울대 교수)과 1986년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를 쓴 엔도 기미오(遠藤公男) 일본 야조회((野鳥會) 명예회장의 글을 보면 전후 맥락을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 책에도 해제가 원문보다 앞에 실렸다. 학계에선 한반도 호랑이 멸종 원인으로 병자호란 전후 발생한 우역(牛疫·소 전염병)의 영향이 더 컸을 것이란 시각이 있다. 이 책의 발굴과 해제 작업에 참여한 김동진 한국교원대 강사가 이런 주장을 담은 논문을 발표해 지난해 동아일보(4월 24일자 A22면)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와 별개로 야마모토가 “옛날 무장은 진중의 사기를 높이려 조선 호랑이를 잡았지만, 우리는 ‘일본 영토’에서 호랑이를 잡았다”고 말하는 대목은 마음이 휑해진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맛으로는 달달하기가 벌꿀만 한 것이 없다. 떡과 약과 따위도 이게 아니면 (맛이) 아름답지 않다. 조상이 살아 계실 때 꿀을 즐겼다면, 돌아가신 뒤 제사에 마땅히 써야 한다.”(이익의 ‘성호사설’에서) 벌꿀은 예부터 달콤함의 대명사였다. 고구려 주몽 시대에 양봉이 전래됐다고 알려지는데, 고려와 조선은 꿀을 귀히 여겨 일반 백성이 꿀 넣은 유과를 만드는 걸 금지하기도 했다. 구한말 서양종 벌이 보급돼 생산량이 늘 때까지 꿀은 고급품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 달짝지근한 꿀과 별개로 이를 생산하는 벌은 우리 문화에서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실생활에선 사람도 쏘는 침을 품어 조심스럽고 두려운 곤충이나, 문화적으로는 벌이 지닌 생태적 특성에 빗대 다양한 이미지를 형성했다. 최근 국립민속박물관이 강원 지역 양봉문화를 조사한 보고서 ‘강원도 인제의 토종벌과 토봉꾼’은 이러한 벌이 지닌 민속학적 상징과 의미도 함께 소개했다. 민속 문화에서 곤충은 각기 고유한 함의를 지녔다. 나비는 이상적 기쁨이나 장수를 상징했다. 개미는 부지런함과 질서를 의미했다. 매미는 한자로 선(蟬)인데 신선 선(仙)과 발음이 같아 신성함이나 불멸을 대변하는 존재로 읽혔다. 이에 비해 벌(한자로는 봉·蜂)은 다소 복합적이다. 사대부는 꿀벌을 신의와 의리의 곤충으로 극찬했다. 특히 왕에게 모든 걸 바치는 신하의 충절을 지녔다고 여겼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1731∼1783)은 시문집 ‘담헌서(湛軒書)’에서 “군신 간의 의리는 벌에게서 취해온 것이다. 성인은 만물을 스승으로 삼는다”고 적었다. 여왕벌 한 마리를 모시고 일사불란하게 명령에 따르는 습성이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 예술문화에서 독특한 형태로 발현된다. 중국에서 전파된 모란(한문으론 牧丹) 그림은 다른 꽃과 달리 새나 곤충을 그리지 않는 게 전통이었다. 당 태종이 신라 선덕여왕에게 보냈다는 모란 그림도 저의야 어땠든 법도엔 맞았던 셈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부터 궁중회화나 민화의 모란에 벌을 그려 넣는 ‘상식의 파괴’가 벌어진다. 박혜령 학예연구사는 “중국식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왕(모란)에게 충성하는 신하(벌)를 자유로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벌의 위계질서를 높이 샀던 양반 계층과 달리 민가에선 부지런함에 주목했다. 성실하게 일하며 꿀을 열심히 모으는 모습에서 벌을 재물 복과 부귀(富貴)를 가져다주는 아이콘으로 받아들였다. 조선 후기에 국가적 행사나 왕실 잔치를 맞아 제조하는 기념주화인 별전(別錢)을 보면 벌 문양을 새겨놓았다. 귀중품이나 돈을 넣어 허리에 차는 두루주머니에도 수복(壽福)과 함께 벌을 수놓은 경우가 많다. ‘재물=벌’이란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다. 여성 장신구에선 벌을 통한 성적인 코드도 읽을 수 있다. 벌 모양으로 제작한 머리 장식이나 벌 문양 귀주머니는 이를 착용한 여성에게 찾아드는 남성을 가리킨다. 박 학예사는 “벌 자체는 남성성을 드러내지만 주로 쓰인 건 여성 패션용품의 소재였다는 점이 이채롭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견훤(867∼936)이 892년 세운 후백제는 역사가 짧은 왕조였다. 한때 신라 경주를 점령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으나, 결국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936년 멸망할 때까지 45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수도였던 전주가 도성으로 기능한 기간도 37년뿐이다. 이러니 관련 사료나 유물이 거의 남지 않은 게 어쩜 당연해 보인다. 특히 견훤의 왕궁이 전주 어디쯤 있었는가는 지금까지 학계의 콜드 케이스(cold case·미해결 난제)로 남아 있다. 최근 국립전주박물관이 개최한 학술세미나 ‘후백제 유적의 정비 방안’은 이 콜드 케이스를 풀려는 시도였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견훤 왕궁 터는 현 전주시청 동쪽인 물왕멀 일대로 추정해왔다. 1940년대 일본이 이 지역 역사를 정리한 ‘전주부사(全州府史)’엔 당시 건축자재로 추정되는 막새나 석물을 수집했다고 기록돼 있다. 학자들은 이를 후백제 왕궁의 유구(옛 건축물 흔적)라 봤다. 하지만 후백제 시기 세웠다고 다 왕궁은 아니며, 이 일대가 흙으로 쌓은 토성이라 왕실 권위에 적합지 않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1980, 90년대에는 고 전영래(全榮來) 원광대 교수가 주창한 ‘동고산성설’이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당시 전주시 완산구에 있는 산성 발굴조사를 이끌었던 전 교수가 1980년 ‘전주성(全州城)’이라 새겨진 연꽃무늬 막새를 찾았는데, 이것이 후백제 유물로 밝혀지며 단박에 급부상했다. 1990∼92년에는 산성 중심부에서 길이 84.2m, 폭 14.1m의 초대형 건물 터까지 드러났다. 게다가 숙종 14년(1688년) 성황사(城隍祠)란 절을 옮기며 쓴 ‘성황사중창기’에 “이곳이 세간에서 말하는 견훤의 옛 궁성지”란 대목도 나와 더욱 힘이 실렸다. 근래엔 동고산성을 주 왕궁보단 피난성(避難城)으로 보는 시각이 더 우세하다. 실제로 왕궁으로 보기엔 산성이 너무 바위산 꼭대기에 위치했다. 게다가 겨울철을 보낼 온돌이나 음식을 해먹을 부뚜막 터가 없고, 일상생활용 유물도 거의 출토되지 않았다. 진정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견훤 왕조가 평상시엔 평지 왕궁에 머물다 위급할 때 동고산성으로 이동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말했다. 21세기 들어선 조선시대 전라감영이 있던 완산구 중앙동 일대를 왕궁 터로 보는 견해가 주목을 받았다. 2006∼2007년 전라감영 복원사업이 벌어졌는데,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와 담장, 배수시설이 발견됐다. 또 인근에선 통일신라시대 관청건물용 기와도 출토됐다. 김주성 전주교육대 교수는 “1912년 지적도를 보면 통일신라 9주5소경(九州五小京)의 격자형 도시구획이 그대로 이어진 흔적이 보인다”며 “견훤 왕궁이 통일신라기 도시구획에서 그대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가장 최근엔 곽장근 군산대 사학과 교수의 ‘완산구 중노송동 인봉리’설이 주목받고 있다. 곽 교수가 지난해 11월 한국고대사학회 학술회의에서 처음 제시한 의견이다. 현장조사결과, 이 일대에 왕성으로 추정되는 성벽의 흔적이 확인됐다. 또 인봉리는 산자락에 감싸 안겨 서쪽으로 트여 있는 형국인데, 불교에서 서방에 있다는 미륵정토를 꿈꾼 견훤이 왕궁을 서쪽을 향하도록 세웠다는 구전과 부합한다. 곽 교수는 “이곳 저수지인 인당지의 일부 제방은 후백제가 망한 뒤 궁성 서쪽 성벽을 이용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주국립박물관과 전주시는 조만간 이 일대를 발굴해 견훤 왕궁 터 가능성을 조사할 계획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이 개최한 ‘토탈 리콜: 기록하는 영화, 기억하는 미술관’은 다소 낯선 전시다. 다큐멘터리 9편을 1, 2층에서 동시에 트는데, 각자 영화감독과 미술가들이 설치한 방식으로 상영한다. 화면 앞에 서너 명이 앉을 자리를 마련한 작품도 있지만, 영상보다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 자체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설명하기도 애매하니 직접 보는 게 낫다. 작품 주제도 각각이다. 여러 국가의 다양한 이주민의 모습을 담은 김소영 감독의 ‘열린 도시의 이방인들’이나 1960, 70년대 국가 홍보 영화를 재조합해 새롭게 해석한 김경만 감독의 ‘삐 소리가 울리면’처럼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 많다. 2월 개봉해 화제를 모은 박찬욱 박찬경 형제 감독의 ‘고진감래’도 만날 수 있다. 일민미술관과 문지문화원 사이, 한국영상자료원이 공동 기획했다. 6월 8일까지. 1000-2000원. 02-2020-205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천진난만(天眞爛漫), 순진무구(純眞無垢).’ ‘꾸밈이 없고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일컫는 이 4자성어들은 주로 어린이에게 쓸 때가 많다. 둘 다 공통적으로 ‘참 진(眞)’이라는 한자가 들어 있다. 중국 도교의 장자(莊子)는 “예(禮)란 세속의 꾸밈이요, 진은 하늘로부터 받는다”고 했다.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테마전 ‘동자, 순수와 행복의 얼굴’은 이처럼 동자에 투영된 선조들의 정신과 기원을 찾는 자리다. 삼국시대 유물부터 근현대 작품까지 깃털처럼 많은 세월 동안 동자는 우리 문화에서 어떻게 소화됐을까. 모두 57점이 출품된 이번 전시는 그런 물음에 대한 단초를 꽤나 풍성하게 제공하고 있다. 동자의 맑고 바른 이미지는 먼저 삼국∼고려시대 불교문화와 융합돼 종교적 구도의 대상으로 해석됐다. 7세기 ‘금동탄생불입상’은 흔히 ‘아기 부처’라 부르는 석가모니의 탄생 설화를 형상화했다. 이광배 책임연구원은 “은은한 미소를 지닌 채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은 땅을 향한 자세는 석가가 막 태어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갈파하는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비해 고려불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의 선재동자나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의 명부동자에는 깨달음을 찾으며 공양을 바치는 구도자의 마음이 구현되고 있다. 불교에서 동자가 신성화 영역에서 사랑받았다면, 조선회화에서 나타나는 동자는 세속적 욕망을 경계하는 선비정신을 나타내는 존재였다. 문인화가 양송당 김시(養松堂 金(제,지)·1524∼1593)의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보물 제783호)’에서 이상향에 맞춤한 천혜 자연 속에서 나귀를 끄느라 안간힘을 쓰는 동자의 자태는 해학적이면서도 탈속적인 삶을 꿈꾸는 화가의 마음을 대변한다. 반면 민화에서 동자는 좀 더 원초적이고 실제적인 욕망의 표현 대상이 된다. 중국에서 유래한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는 궁중 가례(嘉禮)에서 쓰이다 이후 민간에서도 혼례 때 장식화로 유행했다. 분양왕으로 봉해진 당나라 정치가 곽자의(郭子儀·697∼781)가 자손과 신하에게 둘러싸여 연회를 즐기는 장면인데, 입신출세와 가문 번영을 기원하는 뜻을 지녔다. 실제로 곽자의는 중국에서 복성(福星)으로 불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어린이의 순수함을 화폭에 담은 박수근(1914∼1965)과 이중섭(1916∼1956), 장욱진(1917∼1990)의 근현대 명화도 함께 만날 수 있다. 내년 3월 1일까지. 2000∼4000원. 031-320-1801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듣기의 철학(와시다 키요카즈 지음·아카넷)=일본 와세다대 총장을 지내고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한 철학자인 저자가 현재의 인문학 위기를 살폈다. 철학과 인문학의 본질은 고통받는 이를 위한 것인데, 이를 간과한 소통의 부재가 현 위기를 자초했다고 진단했다. 1만500원.진보의 착각(크리스토퍼 래시 지음·휴머니스트)=미국 사회비평가인 저자(1932∼1994)가 진보라는 이념의 한계와 위험성을 경고했다. 가족과 공동체에 바탕을 둔 풀뿌리 연대 ‘서민주의’(포퓰리즘)가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1991년 나온 책이니 진보의 착각은 참 오래된 셈이다. 3만5000원.무기의 탄생(남도현 지음·플래닛미디어)=제2차 세계대전에서 적국 독일 전투기의 엔진을 공급한 영국 롤스로이스, 냉전기에 전략정찰기 U-2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갈등처럼 세계사에서 한 획을 그은 무기들의 탄생 배경을 정리했다. 2만2000원.행동하라(스티븐 프레스필드 지음·레디셋고)=너무 많은 준비와 계획은 오히려 벽 속에 갇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당장 행동으로 옮겨 두려움과 위기를 극복해야 한계를 깰 수 있다고 역설한 자기계발서. 1만3000원.느리게 배우는 사람(토머스 핀천 지음·창비)=노벨 문학상 단골 후보인 작가의 초기 단편 다섯 편을 묶었다. 국내 초역. ‘은밀한 통합’(1964년)을 제외한 나머지 ‘이슬비’ ‘로우랜드’ ‘엔트로피’ ‘언더 더 로즈’ 모두 대학생 시절에 쓴 작품이다. 1만2000원.양배추 볶음에 바치다(이노우에 아레노 지음·문학수첩)=일본 도쿄 근교 작은 마을에 환갑이 넘은 아주머니 3인방이 꾸리는 코코야라는 반찬가게가 있다. 각각 대하소설 분량의 사연을 가진 이들은 가슴 깊이 고인 슬픔을 흘려보내며 새로운 감정으로 빈 곳을 채워간다. 1만2000원. 난 왜 늘 잘못된 선택을 할까?(황선문 지음·한울)=타인보다 자신을 아는 게 더 중요하다. 스스로의 생각과 정면으로 마주 보는 훈련을 통해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지는 법을 배울 수 있으며 이는 인간관계의 성공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1만8000원.아기 운이 쑥쑥 예쁜 이름 좋은 이름(박상원 지음·동학사)=현재의 작명법이 일제강점기 때 전해진 일본식 성명학으로 우리 실정과는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훌륭한 한글에 담긴 오행의 기운을 살려 아이의 이름을 짓는 법을 소개했다. 2만 원.}

이 책, 참 얄궂다. 일본 현직 의사와 관련 연구자 8명이 공동 집필했는데, 첫 장부터 상당히 자극적이다. ‘진단 피폭’이란 용어부터 으스스하다. 한마디로 병원에서 컴퓨터단층촬영(CT) 검사로 인한 방사선 노출이 환자의 건강을 해치고 있단 뜻이다. 영국 옥스퍼드대가 2004년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일본에서 암에 걸리는 원인의 3.2%가 진단 피폭 때문이란다. 별거 아닌 거 같다고? 담배 다음으로 높은 수치다. 남 얘기도 아니다. 2008년 기준 CT 장치 설치 대수는 한국이 일본 다음으로, 세계 2위다. 게다가 CT 검사로 인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은 세포 분열이 왕성한 어린이일수록 높다. 이뿐이 아니다. 그간 충치예방의 만능통치약인 줄 알았던 ‘불소’가 실은 그다지 효력도 없거니와 과잉 섭취하면 건강을 해치는 주범이란다. 실제로 미국에서 수돗물에 불소를 첨가하는 주는 그러지 않는 주보다 암 발병률이 많게는 50% 이상 높다고 한다. ‘검진 병’도 조심해야 한다. 건강 검진을 자주 받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주장이다. 이게 무슨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검진으로 인한 스트레스나 방사선 노출이 더 문제라는 것. 게다가 고혈압이나 콜레스테롤 수치 증가는 노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이를 ‘병’으로 인식하고 억지로 고치려 드는 게 오히려 건강엔 마이너스라고 한다. ‘건강의 배신’은 읽기 불편한 책이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가시가 박히 듯 따끔따끔하다. 이전에도 의료사회의 부조리나 모순을 고발하는 책들은 꽤 됐다. 지난해 12월에는 역시 일본 의사가 쓴 ‘의사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47가지 방법’이란 섬뜩한 책도 출간됐다. 의사들이 제발 병원에 오지 말라고 강변하다니. 도대체 그럼 어쩌란 말인지. 고해성사치곤 너무 무책임하단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적하는 건 ‘현재’ 일본의 의료 시스템이다. 인간을 고치는 의술 자체를 문제 삼은 게 아니라, 온갖 이익과 기득권으로 점철된 ‘그들만의 리그’를 고발하려는 의도다. 이게 과연 일본만의 이야기인지, 이 땅의 전문가들이 더 잘 알리라. 이제 그들도 고백이든 해명이든 뭔가 할 때가 됐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조선 왕실 연희나 의례를 장식하는 가화(假花·조화)인 ‘궁중채화(宮中綵花)’를 당시 모습으로 되살린 특별전 ‘아름다운 궁중채화’가 열린다.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이귀영)은 8일부터 서울 종로구 효자로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124호 궁중채화 기능보유자인 황수로 수로문화재단 이사장이 제작한 꽃 장식을 소개한다. 이번 전시는 순조(1790∼1834)가 즉위 30년과 40세 생신을 맞은 1829년 음력 2월에 효명세자(孝明世子·뒷날 익종 추존)가 창경궁에서 올린 잔치인 ‘기축년 진찬(進饌)’을 재현했다. 궁중채화는 주로 비단이나 모시를 이용해 꽃과 곤충을 사실적으로 만드는 데 중점을 둔다. 예외적으로 여름철엔 빙화(氷花)로 제작하거나 때로 종이를 이용했단 기록도 있다. 이 가운데 윤회매(輪廻梅)는 밀랍 촛농으로 매화 꽃잎을 만들었는데, 왕실은 물론이고 문인사회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이 관장은 “궁중채화는 황 이사장이 보유한 가지 하나밖에 전해지지 않아 왕실 기록이나 사료를 바탕으로 만든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엔 프랑스 전통기법으로 꽃 장식을 만드는 장식예술가 브뤼노 르주롱의 작품도 함께 전시된다. 다음 달 25일까지. 무료. 02-3701-75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원로사진작가 윤주영 씨(86)의 개인전 ‘잔상(殘像)과 잠상(潛像)’이 9일부터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본관에서 열린다. 윤 작가는 문화공보부 장관(1971∼74년)과 민주공화당 대변인, 주칠레 대사, 조선일보 편집국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언론인. 1979년 은퇴한 후로는 줄곧 작품 활동에 투신해왔다. 35년 동안 사진집 20권을 출간했고, 전시회도 32번 열었다.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180여 점을 엄선한 이번 전시는 특별히 이름 붙이진 않았지만 회고전 성격이 짙다. 크게 7가지 주제로 엮은 이번 전시 작품들은 보도사진을 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이 물씬하다. 연작 ‘동토의 민들레’는 일제강점기 강제로 끌려가 러시아 사할린에 정착한 동포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탄광촌 사람들’ 시리즈는 한때 산업역군으로 대접받았으나 이제는 쇠락한 광원의 삶에 렌즈를 들이댔다. 윤 작가는 “이번 개인전은 머리와 가슴속에 살아 숨쉬는 잔상과 뇌리 속에만 남은 잠상을 형상화한다는 화두 아래 진행했다”며 “30여 년간 찍은 ‘자식 같은’ 사진을 정리하는 일은 즐겁고도 고마운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15일까지. 무료. 02-783-7930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아침엔 천하 미녀가 술 취한 듯 붉고, 저녁엔 하늘 향기가 옷깃 적시듯 하네(國色朝감酒 天香夜染衣).’(중국 당나라 시인 이정봉의 ‘모란시’에서) 모란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은 봄꽃이다. 기원전 약용식물로 재배하기 시작해 수나라 양제(569∼618) 시절부터 관상용으로 유행했다. 뭣보다 늦은 봄 풍성하고 화려하게 피어나는 생김새 덕에 미녀나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인기를 끌었다. 서울 종로구 평창8길 한빛문화재단 화정박물관이 올해 처음으로 개최한 특별전 ‘사계화훼(四季花卉)’는 계절별 꽃과 나무를 소재 삼은 중국 청나라 유물을 선보이는 자리다. 세월 따라 향취를 전해주는 자연의 신비로움이 예술과 일상생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음을 살필 수 있다. 모란은 그 대표적인 케이스다. 화재(畵材)로도 많이 쓰였지만, 꽃병이나 찬합에도 자주 새겼다. 전시작 가운데 ‘자수 꽃무늬 여성 상의’나 ‘분채(粉彩·도자기에 입히는 채색) 꽃무늬 병’도 모란으로 장식했다. 수선화와 버드나무도 봄을 대표한다. 다만 수선화는 고고한 문인의 절개를, 버드나무는 풍류나 이별을 나타냈다는 점이 달랐다. 복숭아나무는 독특하게도 꽃과 열매의 의미가 바뀌었다. 4, 5월 피는 복숭아 꽃(복사꽃)은 이번에 전시된 작자 미상의 ‘도화원기(桃花源記)’처럼 영원한 이상향을 표상했다. 그런데 7, 8월 열리는 복숭아는 세속적 무병장수의 상징이다. 19세기 ‘삼성도(三星圖)’에서 수명을 관장하는 수성(壽星)이 손에 쥔 게 복숭아다. 여름 꽃인 연꽃은 진흙탕에서 꽃을 피워 ‘군자의 꽃’이라 칭송받는가 하면, 씨앗을 많이 맺어 민간에선 다산(多産)의 징표로 받아들여졌다. ‘연화원앙도(蓮花鴛鴦圖)’는 부부 금실과 자손 번창을 바라는 속내가 담긴 것이다. 이 밖에 가을 국화와 겨울 소나무, 대나무를 그린 회화와 공예품까지 모두 62점의 유물이 전시된다. 모두 올해 1월 별세한 한광호 한빛문화재단 명예이사장이 수집한 작품들이다. 조희영 학예실장은 “꽃과 나무마다 지닌 상징성이 달라 이를 해석하며 보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12월 31일까지. 3000∼4000원. 02-2075-0114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섬마을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얘기가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저 앞바다에 커다란 배가 잠들어 있다”고만 했다. 다들 잠깐 눈빛을 반짝였다가도 그러려니 곧 심드렁해졌다. 1975년 8월 20일, 한 고기 잡던 어부의 그물에 청자 화병이 걸려 올라오기 전까지는. 전남 신안군 증도(曾島) 서쪽 바다. 이젠 섬에 발굴기념비가 세워져 역사를 간직한 ‘신안 보물선 인양’은 국내는 물론 세계 고고학계의 대사건이었다. 이렇게 큰 배(전체 길이 34m)에 이리도 많은 유물(2만3502점)이 쏟아져 나온 일은 유례가 없었다. 배가 발굴되며 한국은 단박에 지구상에서 중국 송대와 원대 도자기를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가 됐다. 심지어 당시 국제경매시장에서 두 시대 도자기는 워낙 귀해 몸값이 엄청났는데, 신안선에서 ‘너무 많이’ 나오는 바람에 가격이 확 떨어졌단다. 하지만 발굴 당시 세상을 휩쓴 보물선 열풍은 이제 사그라졌다. 그 옛날 전설만 떠돌던 시절로 돌아간 듯 관심이 잦아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언론이야 썼던 기사 또 쓸 리 없다. 정부는 전문가 아니면 봐도 뭔 소린지 모를 보고서를 내놓았다. 신안선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그 배를 통해 우리는 뭘 알 수 있는지 배울 기회는 점점 옅어졌다. 저자인 역사학자 서동인 씨와 김병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연구과 학예연구사는 그게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1976년 예비조사를 시작으로 1987년 마무리작업에 이르는 10년 넘는 세월, 누적인원 10만여 명이 투입됐던 발굴. 그리고 거기서 건져낸 알토란 같은 보물과 귀하디귀한 사료를 빛바랜 박제 취급하는 건 확실히 아쉽다. 김 학예사는 2일 전화통화에서 “1980년대 첫 공식보고서 출간 뒤 2006년 이를 업그레이드한 개정판이 나왔지만 아무래도 일반인은 접근도 이해도 어렵다”며 “신안선을 낱낱이 파헤치고 이를 둘러싼 당대의 이야기를 좀 더 편하게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1323년 음력 4월 중국 푸젠(福建) 성 취안저우(泉州)를 출항한 신안선은 저장(浙江) 성 원저우(溫州)를 거쳐 고려로 갔다. 허나 고려에 닿기 직전인지 아니면 들렀다 종착지 일본 후쿠오카(福岡)로 가던 중인지는 모르나, 수백 명의 꿈이 실렸던 배는 난파돼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발굴 당시는 기본 측량장비도 없던 시절이었다. 문화재관리국(이후 문화재청) 지휘 아래 목숨 걸고 바다에 뛰어든 해군 잠수사의 촉에 의지해 유물을 건져 올렸다. 신안선이 품고 있던 보물은 실로 엄청났다. ‘청자 해태 모양 연적’과 ‘청자상감 구름 학 국화무늬 베개’ ‘청자상감 국화무늬 잔탁(盞托·찻잔 받침대)’ 같은 고려청자 7점을 비롯해 도자기가 2만여 점. 일본에서 주문한 향로와 등잔 같은 불교 의례용 금속제품도 700점이 넘는다. 주사위와 약재, 벼루와 맷돌, 빗과 저울 같은 생활용품도 나왔다. 신안선이 당시 세계 최대 교역국이었던 원제국과 고려 일본을 잇는 해양실크로드의 실체가 담긴 타임캡슐로 불리는 이유다. 배 밑바닥에선 중국 동전 약 800만 개와 껍질을 벗겨 적당히 자른 자단목(紫檀木) 1000여 편도 찾았다. 동전은 당시 유통되지 않던 걸 모아 일본에서 녹여 불상을 만들려던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 가나가와(神奈川) 현에 있는 청동불상‘가마쿠라 다이부스(鎌倉大佛)’는 송나라 동전과 성분분석 결과가 똑같이 나왔다. 자단목은 고위층 가구나 불교용품 제작용이었을 터. 흥미로운 건 이 목재에 한자는 물론 알파벳도 여럿 적혀 있었다는 점이다. 서역과 유럽 상인까지 상주하던 취안저우에서 취급되던 목재다 보니 표기방식도 국제적이었다. 신안선을 제대로 알리고 싶다던 두 저자의 소망(?)은 꽤나 이뤄진 듯하다. 살짝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하고 세세한 설명이 가득하다. 신안선 발견과 유물 인양 과정부터 배에 실렸던 유물과 뒷얘기까지 씨줄 날줄로 엮이며 한 폭의 커다란 역사지도를 만들어냈다. 특히 당시 최고 교역물품인 차와 인삼을 소재로 백성 수탈의 역사를 되짚거나 찌꺼기만 남은 약재를 통해 인도의학이 불교와 함께 일본까지 흘러가는 과정을 기술한 대목은 잔향이 컸다. 신안선이란 그물을 당기다 보면 13세기 한중일의 문화사까지 끌려나온다. 다소 장황한 부분도 없지 않으나 크게 거슬리진 않는다. 신안선 침몰은 당시로선 많은 인명을 앗아간 불행이요 참화였다. 고려인 중국인 일본인 가릴 것 없이, 누군가는 피눈물로 목 놓아 불렀을 가족을 떠나보냈다. 허나 그 아픔이 자연에 안겼다 600여 년 만에 돌아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소리 없이 외친다. 신안선은 아직 목적지에 다다르지 않았노라고. 그 끝나지 않은 항해는 이제 우리가 짊어질 몫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올 2월 ‘경주 이차돈 순교비’가 보물로 지정 예고되자 ‘왜 이제야…’라는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국보급 문화재일 것 같은 유물 중엔 의외로 국가지정문화재가 아닌 것이 수두룩하다. 그동안 매매나 국외 반출 가능성이 높은 사찰, 대학, 개인 등 민간 소유 유물을 국보나 보물로 우선 지정해 왔기 때문이다.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은 관리 강화 차원에서 ‘이차돈 순교비’를 시작으로 박물관 소장 유물의 국가지정문화재 확대를 추진 중이다. 현재 1단계로 60여 건을 검토하고 2017년까지 수백 점으로 늘려갈 방침이다. 과연 어떤 ‘대어급 문화재’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될까. 청과 박물관의 도움을 얻어 유력 후보를 미리 살펴봤다. 전남 나주 신촌리에서 발굴한 백제 금동관과 금동신발은 둘 다 국보, 보물로 손색없다. 옹관(甕棺·항아리 모양 관)에 들어있었는데, 은팔찌를 비롯한 장신구와 무기 농기구도 함께 나왔다. 경주 노서동 호우총에서 출토된 ‘광개토대왕 명 청동그릇(호우)’ 역시 그동안 지정문화재가 아닌 게 어색하다. 바닥에 ‘415년 광개토대왕을 기념해 만든 그릇(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 유물로는 ‘월지(月池) 금동 초 심지 가위(금동촉협·金銅燭鋏)’를 꼽을 수 있다. 흔히 안압지로 알려진 경주 월지에서 나온 이 유물은 이름 그대로 초 심지를 자르는 가위다. 손잡이에 새겨진 방울과 당초무늬가 아름답다. 1925년 경주 남산 장창골 석실에서 옮겨온 ‘장창골 석조미륵삼존불상’은 단단한 화강암 재질인데도 부드러운 온기가 배어나온다. ‘삼화령(三花嶺) 미륵삼존불’이라 불리기도 한다. 고려시대의 불화로는 ‘노영필 아미타구존도(魯英筆 阿彌陀九尊圖)’를 꼽을 수 있다. 고려청자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청자 상감 구름학무늬 매병’과 ‘청자 상감퇴화 풀꽃무늬 조롱박모양 주전자와 받침’도 유력하다. 이 매병은 뚜껑이 남아있는 드문 유물로 구름과 학의 여유로운 조화가 일품이다. 주전자의 퇴화(堆花)란 흑토와 백토를 물에 개서 그림 그리듯 문양을 그리는 기법을 일컫는다. 조선으로 넘어가면 회화가 푸짐하다. 중국 후난(湖南) 성 경치를 담은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는 한반도 산수화의 대표적 소재다. 국립진주박물관에 있는 16세기 작자미상 작품으로 8폭 그림이 쌍으로 대칭을 이루는 구도가 인상적이다. 또 겸재 정선의 초기작인 ‘정선필 신묘년 풍악도첩(辛卯年 楓嶽圖帖)’도 눈여겨볼 만하다. 태조 이성계가 새 왕조를 열기 1년 전, 추종자 1만여 명과 금강산 비로봉에 모신 ‘이성계 발원 사리 갖춤’도 유력한 후보다. 사리를 봉안한 탑과 팔각당 모양의 그릇은 모두 은에다 금을 입히고 안쪽 은판에는 명문을 새겼다. 이를 넣은 청동, 백자그릇에도 글이 새겨졌다. 만들고 바친 시기와 참여 인사의 이름, 미륵을 기다린다는 발원이다. 그 민감한 시기에 불교성지인 금강산에 바쳐진 사리 갖춤은 무슨 뜻을 지녔을까. 조이영 lycho@donga.com·정양환 기자}

“착하며 성스럽고 문무를 겸비하고 자애롭고 효성스러우며 지혜롭고도 인자하며 엉큼스럽고 날래며 세차고 사납기가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다.”(연암 박지원의 소설 ‘호질’) 한국에서 호랑이 그림은 그 뿌리가 길고도 깊다. 선사시대의 울산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부터 고구려 고분벽화나 통일신라시대 십이지신까지 여러 유적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엔 호랑이를 소재로 한 민화가 대량 제작됐다. 한국민화센터 주최로 지난달 28, 29일 경북 경주시에서 ‘경주민화포럼 2014-왜 다시 호랑이인가’가 열렸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이 ‘조선시대 호랑이 그림의 특징’을,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장이 ‘한국의 호랑이 민화’를 발표했다. 미국 신시내티미술관의 중국계 큐레이터 허우메이 송은 ‘중국의 호랑이 그림’을 소개했다. 한국과 중국에선 호랑이가 정통 회화의 모티브임과 동시에 다양한 생활문화의 아이콘이었다. 대표적 사례가 호작도(虎鵲圖)다. 영물인 호랑이와 길조인 까치의 조합은 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인기 소재였다. 윤 관장은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대상으로 호랑이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화를 막아준다는 호랑이 그림은 종종 복을 집안에 불러들인다는 용 그림과 나란히 벽에 걸렸다. 중국에선 정치적 메시지로 쓰이기도 했다. 명나라는 ‘추우(騶虞)’라는 상상 속 호랑이가 인기였다. 추우는 시경에 ‘검은색 줄무늬에 몸보다 긴 꼬리를 지닌 상서로운 백호’로 등장한다. 송 큐레이터는 “영락제가 왕위 찬탈의 명분을 얻으려 태평성대에 출몰한다는 추우를 적극 ‘홍보’한 것이 계기”라고 말했다. 조선에서 호랑이 그림으로 처음 이름을 알린 이는 문인화가 고운이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고운의 ‘백액대호’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호랑이 그림의 정형을 성립한 이는 단원 김홍도로, 그가 호랑이를 그리고 표암 강세황이 소나무를 그린 ‘송하맹호도’와 수월 임희지가 대나무를 친 ‘죽하맹호도’는 후세의 표준이 됐다. 이 관장은 “중국의 호랑이 그림이 형태보다 의미를 중시한 데 비해, 조선 호랑이 그림은 세밀하면서도 사실적인 묘사를 추구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민화도 독특한 전통을 형성했다. 진짜 호랑이 가죽을 펼쳐놓은 듯 그린 호피도는 중국이나 일본에선 찾을 수 없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지난해 9월 성벽 일부가 무너진 충남 공주시 공산성(公山城·사적 제12호)에서 백제시대 축성 양식이 확인됐다. 공주대박물관은 1일 공산성 발굴 현장에서 “붕괴된 조선시대 돌로 쌓은 성벽 아래에서 흙을 시루떡 모양으로 다져 쌓는 백제시대 특유의 판축성벽(版築城壁)을 찾았다”고 밝혔다. 판축성벽 아랫부분에서는 백제 유물로 추정되는 기와편도 상당수 출토됐다. 공산성은 475년 백제가 공주(당시는 웅진)로 천도한 뒤 60여 년간 왕성 역할을 했던 웅진성으로 추정돼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개축한 석축 성벽이 들어서 있어 백제 성벽의 축조 시기나 양식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남석 공주대박물관장은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과 충남 부여군 부소산성에 이어 세 번째로 백제 판축성벽을 찾은 것”이라며 “흙으로 쌓은 풍납토성에서 양옆에 돌을 함께 올린 부소산성으로 석축기술이 발전하는 중간 과정을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공산성 판축성벽 발굴은 전화위복의 산물이다. 지난해 금강 옆 성벽이 무너졌을 당시 붕괴 원인을 놓고 논란이 거셌다. 4대강사업으로 아래쪽 강 토사를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주장과 원래 암반이 많아 불안정하고 산사태가 잦았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붕괴 원인 규명을 위해 조사에 착수한 덕분에 백제 토성 일부를 이번에 찾은 것. 특히 튀어나온 암벽을 일부러 ‘ㄴ’자 모양으로 깎은 뒤 판축성벽을 쌓아올린 당시의 건축 기법도 함께 확인됐다.공주=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중견화가 신홍직 화백(54)의 다채로운 유럽여행 경험이 작품으로 녹아든 개인전 ‘창, 안과 밖’이 2일부터 서울 종로구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신 화백은 2010년부터 간간이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 각지를 돌며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유럽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지난해 10월엔 크로아티아도 다녀왔다. 모든 작품이 명소를 소재로 삼진 않았건만, 거칠되 과감한 붓질을 따라 화려하되 청명한 분위기가 낯익은 듯 펼쳐진다. 다녀온 경험이 있는 도시라면 더욱더 유쾌한 추억이 떠오름 직하다. 특히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친퀘테레,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처럼 바다와 어우러진 도시의 풍광을 담은 작품들은 이국적 감성이 가득하다. 7일까지. 02-736-102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27일 경기 양주시 장흥면 온릉(溫陵). 햇살은 따습다 못해 따가웠다. 아직 잔디는 푸른빛도 찾기 힘들건만. 단출한 봉분 앞 혼유석(魂遊石) 아랜 벌써 제비꽃이 피었다. 겨우 7일 만에 왕비에서 폐출된 단경왕후(端敬王后·1487∼1557)를 토닥이는 걸까. 봄기운은 이미 흠뻑 산자락에 내려앉았다. “정말 근사하죠? 한데 할 일이 태산이에요. 얼른 서두릅시다.” 조동진의 ‘제비꽃’ 한 소절 떠올릴 틈도 없이, 조선왕릉관리소의 최길섭 수리복원팀장은 어깨를 툭 쳤다. 괜스레 무안해 둘러보니 잠시 넋 놓은 건 혼자뿐이었다. 점검반은 벌써 정자각(丁字閣)으로, 능 뒤편으로 흩어져 체크하기 바빴다. 문화재청이 조선왕릉 일체 안전점검에 나선 게 이날로 6일째. 해빙기 사고 예방조사는 해마다 실시하는 정례사업이다. 하지만 올해는 좀 특별하다. 처음으로 민관합동점검을 실시해 대한건축학회나 산림보호협회와 같은 민간 전문가들도 참여했다. 허복수 조선왕릉 서부지구 관리소장은 “외부인사들이 기탄없이 의견을 내 도움이 크다”고 말했다. 추운 겨울이 지난 이맘때가 왕릉은 손이 많이 간다. 봉분은 얼음이 녹으며 구석구석 무너져 내렸다. 지붕 일부가 뭉개진 건조물도 눈에 띄었다. 먹을 게 없는 산짐승이 내려오는 것도 이 시기다. 실제로 최근 경기 여주시 세종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은 멧돼지와 두더지 출몰로 골머리를 앓았다. 외부인 출입이 금지된 온릉에 동작 감지 센서가 달린 폐쇄회로(CC)TV 카메라가 설치된 이유이기도 하다. 온릉을 거쳐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西五陵)과 서삼릉(西三陵)을 돈 이날 점검에선 다행히 산짐승 피해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산사태 발생 가능성도 낮은 것으로 파악됐다. 사방협회 경기지부의 김윤진 사무국장은 “왕릉이 대부분 산 구릉 ‘명당’에 위치해 큰 위험은 없지만, 배수로 시설에 대한 지속적 모니터링은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날 가장 많은 논의가 오고간 대목은 정자각의 안정성 문제였다. 한자 ‘고무래 정’을 닮은 정자각은 왕릉에 세우는 제례용 건축물. 글자 생김새대로 앞쪽으로 배례청(拜禮廳)이 튀어나온 구조라 무게중심이 쏠리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온릉은 물론이고 열아홉에 세상을 떠난 덕종(德宗)의 경릉(敬陵), 명종의 장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가 모셔진 순창원(順昌園)도 기둥이 기울거나 서까래가 휘었다. 김기주 한국기술교육대 건축공학부 교수는 “특히 조선 전기 건축물은 하중을 나눠주는 받침대가 부실한 면이 있어 장기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선왕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능(陵·왕과 왕비의 무덤) 40기를 비롯해 원(園·세자나 세자빈, 왕의 생모인 후궁의 무덤) 14기와 묘(墓·그 밖의 왕실 관련 인사의 무덤) 66기를 합치면 120기나 된다. 관리가 쉽지 않아 현재 43기만 일반 출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이번 점검을 계기로 나머지 왕릉도 차츰 개방할 방침이다. 김정남 조선왕릉관리소장은 “내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英親王)과 부인 이방자(李方子) 여사가 모셔진 영원(英園)을 시작으로 2019년까지 10기를 순차적으로 공개할 것”이라며 “소중한 문화재를 시민과 함께 가꾸고 지키는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말했다.고양·양주=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삼국지 10번 읽은 사람과는 상대도 하지 마라.’ 삼국지는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이다. 여기서 삼국지라면 연의(演義), 소설을 일컫는다. 유비 관우 장비 조운 조조 제갈량…. 이름만 거론해도 짜릿하다. 다만 많이 독파해도 깨치는 건 사람마다 다르다. 솔직히 스무 번 이상 읽었는데 지금도 얄팍하다고 혼이 난다. 한데 ‘삼국지 다음 이야기’의 저자는 이를 두고 혀를 찬다. “소설 삼국지를 아무리 많이 읽을지라도 정사 삼국지를 한 번 정독하느니만 못하다. 정사 삼국지를 여러 번 정독할지라도 남북조 시대의 역사를 곁들여 한 번 보느니만 못하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라 부르는 시기(221∼589)가 400년 가까이 되는데, 왜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위촉오 삼국시대만 주야장천 얘기하느냐는 지적이다. 맞는 얘기다. 세계사 시간에 ‘위진남북조, 위진남북조’를 기계처럼 외우기만 했다. 위가 조조 집안이 세운 나라라는 것도 까먹곤 했다. 세 나라가 피 터지게 싸웠는데 천하통일은 사마의 가문이 했다더라. 아, 역사 참 묘하다. 뇌 회로도 보통 거기서 멈췄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이는 중화사상이 짙게 깔린 선입견 때문이다. 남북조시대는 흉노나 선비 같은 북방민족이 활개를 쳤던 시기다. 한족 중심 역사관에선 배알이 꼴리기도 했겠지. 하지만 우리야 그럴 필요가 있나. 오히려 선비족은 같은 혈통의 친척 아닌가. 책 부제에 등장하는 ‘오랑캐’는 다름 아닌 우리를 부르는 호칭이기도 했다. 자, 그러면 어디 그네들 말처럼 그 시대는 오랑캐 탓에 ‘혼란의 극(極)’만 펼쳐졌던 시절일까. 책을 읽다 보면 그런 기미도 꽤나 보인다. 뭔 놈의 사람을 그렇게 쉽게 죽이는지. 암투와 전투는 끊이질 않는다. 후조(後趙)의 3대 황제 석호(石虎)는 ‘만세의 폭군’이란 호칭으로도 부족하다. 아무리 자기를 죽이려 했다지만, 아들을 칼로 저미고 눈과 혀를 뽑으며 영화 보듯 관람한다. 인과 잔인이 쉴 새 없이 뒤섞인다. 근데 이거…, 삼국지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 저자 말마따나 “중국은 사계절의 순환처럼 분열과 통일의 시대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위진남북조 시대는 앞선 춘추전국시대와 상당히 닮았다. 위진시대가 춘추라면, 남북조시대는 전국이랄까. 사상적으로도 유교와 불교 도교가 치열히 경쟁하면서도 상대의 장점을 받아들여 자양분으로 삼았다. 오랑캐는 결코 야만의 문화가 아니었다. “강건한 상무정신을 토대로 뛰어난 정치 군사 문화를 독자적으로 만들었다. … 이질적인 남북조 문화를 하나로 녹이려는 각 방면의 노력이 바로 ‘호한융합(胡漢融合·북방민족과 한족의 조화)’에 기초한 수·당의 통일로 이어졌다.” ‘숨겨진 보물’ 같은 영웅도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석호의 삼촌뻘인 후조 1대 황제 석륵(石勒)은 현재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지역에서 발연한 갈족(갈族)의 후예로 노비 출신이다. 글자를 몰라 책 한 권 읽지 못하지만, 많은 학교를 세워 금쪽같은 학자를 길러냈다. 역사를 거울삼아 친히 순행하며 백성을 살폈고, 조세는 위나라 이래 가장 가벼웠다. 본인은 멸시받는 오랑캐였으나 한족을 차별하지 않았다. 2권으로 이뤄진 만만찮은 분량이나 ‘삼국지 다음 이야기’는 읽는 기쁨이 쏠쏠하다. 줄곧 간웅으로 평가받았던 위나라 조조를 향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애정에서 시작해 수문제(隋 文帝)가 진(陳)을 멸망시킬 때까지 쉴 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간다. 문장도 간결하고 적확하다. 서사의 흐름이 단 한 차례도 늘어지지 않는 게 뭣보다 강점이다. 다만 이는 읽는 이에 따라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어쩔 땐 너무 획획 지나간다. 두세 쪽 읽는데 전투가 대여섯 번 벌어져 ‘잠깐, 누구랑 싸워 이겼다는 거야’ 하고 헷갈렸다. 이 책은 시오노 나나미 스타일과 딱 대척점에 서 있다. 사실 전달과 별개로, ‘로마인 이야기’는 중언부언 반복하는 대목이 잦다. 하지만 그만큼 친절하게 설명한다. 반면 이 책은 위 이후 ‘진남북조’ 300년가량을 2권에 모아서일까. 너무 짜서 물기가 마른 행주를 쥔 기분이다. 저자는 말한다. 중국사는 오랑캐 빼면 성립되지 않는다고. 실제로 그렇다. 따지고 보면, 위진남북조는 물론이고 요, 금, 원, 청도 북방민족이 세운 국가였다. 특히 이후 수와 당으로 이어지는 통일국가 시대는 ‘5호16국’ 시절에 큰 빚을 지고 있다. 한족 중심에서 벗어나 새롭게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더구나 우리 학자의 글로 만나는 행운을 놓치지 마시길. 중국, 참 ‘재밌는’ 나라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조계종이 전국 전통사찰 942곳을 모두 조사한다.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 혜일 스님은 26일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사찰의 효율적 보존관리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올해부터 전통사찰 전수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유물이나 새로 지어진 건축물과 주변 숲까지, 사찰을 구성하는 세부사항까지 모두 포함한다. 조계종은 올해 부산 및 경남 지역 141곳을 시작으로 총 40억∼50억 원을 들여 4년 동안 전국의 모든 전통사찰을 조사할 계획이다. 타 종단 소속 사찰도 함께 조사한다. 혜일 스님은 “그간 전통사찰의 현황 파악은커녕 조사 기준도 마련하지 못해 관리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며 “연말에 보고서를 발간해 적절한 보존관리 정책을 세우겠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북한 개성은 고려 건국 이듬해인 919년부터 약 470년간 고려 왕조의 수도였다. 당시엔 ‘개경(開京)’ ‘송도(松都)’ ‘송경(松京)’으로 불렸다. 명실공히 불교문화의 중심이자 국내외 인재와 문물이 몰려드는 도시였다.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개성역사유적지구’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것도 개성이 대변하는 고려의 문화와 전통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최근 펴낸 자료집 ‘개성의 문화유적’에는 이러한 역사적 향취가 오롯하게 담겨 있다. 세계유산에 선정된 12개 유적군인 △개성 성곽 △개성 남대문 △만월대 △개성 첨성대 △고려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 △표충비 △왕건릉 △7릉군 △명릉 △공민왕릉을 중심으로 북한 국보유적의 현재를 아울렀다. 특히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실린 개성 유적의 사진을 함께 실어 문화유산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수 있다. 고려의 수도답게 일단 궁궐터와 왕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만월대는 송악산 구릉지에 잡은 고려의 정궁(正宮) 터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된 뒤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회경전을 중심으로 높은 축대를 세워 기반을 닦은 모습은 당시 황제국을 천명한 웅기가 배어 있다. 박성진 학예연구사는 “만월대는 2007년부터 남북 공동발굴조사가 진행됐으나 2011년 이후 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해 중단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태조 왕건(877∼943)과 신혜 왕후가 합장된 왕건왕릉(본명칭은 현릉·顯陵)은 943년 만수산 기슭에 조성됐다. 돌을 쌓아 방을 만든 석실분으로 내부에 매화와 청룡, 노송과 백호 벽화가 남아 있다. 공민왕(1330∼1374)의 현릉(玄陵)과 왕비 노국 공주(?∼1365)의 정릉으로 이뤄진 공민왕릉은 조선 왕릉의 모체로 평가받는 유적이나,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에 도굴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개성 하면 떠오르는 인물 포은 정몽주(1337∼1392). 그가 훗날 조선 태종이 되는 이방원 일파에게 목숨을 잃은 선죽교도 빠뜨릴 수 없다. 선죽교는 본래 난간이 없었으나 18세기에 따로 설치했다. 박 연구사는 “개성 문화유적은 민족공동의 유산인 만큼 안정적인 교류협력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뭣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