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바다서 건져 올린 ‘중세 타임캡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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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보물선의 마지막 대항해/서동인, 김병근 지음/404쪽·2만 원·주류성

1981년 신안선 제7차 발굴때 뱃고물 좌현 외곽에서 찾은 고려시대 ‘청자 해태 모양 연적’. ‘해치’라고도 불리는 해태는 선악을 구분하고 정의를 지킨다는 전설 속 동물이다. 연적은 사자를 떠올리게 하는 생김새로 표정에 생동감이 넘친다. 주류성 제공
1981년 신안선 제7차 발굴때 뱃고물 좌현 외곽에서 찾은 고려시대 ‘청자 해태 모양 연적’. ‘해치’라고도 불리는 해태는 선악을 구분하고 정의를 지킨다는 전설 속 동물이다. 연적은 사자를 떠올리게 하는 생김새로 표정에 생동감이 넘친다. 주류성 제공
섬마을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얘기가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저 앞바다에 커다란 배가 잠들어 있다”고만 했다. 다들 잠깐 눈빛을 반짝였다가도 그러려니 곧 심드렁해졌다. 1975년 8월 20일, 한 고기 잡던 어부의 그물에 청자 화병이 걸려 올라오기 전까지는.

1983년 신안선 용골을 인양하는 모습. 용골은 선박 가장 아래 놓인 일종의 대들보로 인체로 치면 척추에 해당한다.
1983년 신안선 용골을 인양하는 모습. 용골은 선박 가장 아래 놓인 일종의 대들보로 인체로 치면 척추에 해당한다.
전남 신안군 증도(曾島) 서쪽 바다. 이젠 섬에 발굴기념비가 세워져 역사를 간직한 ‘신안 보물선 인양’은 국내는 물론 세계 고고학계의 대사건이었다. 이렇게 큰 배(전체 길이 34m)에 이리도 많은 유물(2만3502점)이 쏟아져 나온 일은 유례가 없었다. 배가 발굴되며 한국은 단박에 지구상에서 중국 송대와 원대 도자기를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가 됐다. 심지어 당시 국제경매시장에서 두 시대 도자기는 워낙 귀해 몸값이 엄청났는데, 신안선에서 ‘너무 많이’ 나오는 바람에 가격이 확 떨어졌단다.

하지만 발굴 당시 세상을 휩쓴 보물선 열풍은 이제 사그라졌다. 그 옛날 전설만 떠돌던 시절로 돌아간 듯 관심이 잦아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언론이야 썼던 기사 또 쓸 리 없다. 정부는 전문가 아니면 봐도 뭔 소린지 모를 보고서를 내놓았다. 신안선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그 배를 통해 우리는 뭘 알 수 있는지 배울 기회는 점점 옅어졌다.

저자인 역사학자 서동인 씨와 김병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연구과 학예연구사는 그게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1976년 예비조사를 시작으로 1987년 마무리작업에 이르는 10년 넘는 세월, 누적인원 10만여 명이 투입됐던 발굴. 그리고 거기서 건져낸 알토란 같은 보물과 귀하디귀한 사료를 빛바랜 박제 취급하는 건 확실히 아쉽다. 김 학예사는 2일 전화통화에서 “1980년대 첫 공식보고서 출간 뒤 2006년 이를 업그레이드한 개정판이 나왔지만 아무래도 일반인은 접근도 이해도 어렵다”며 “신안선을 낱낱이 파헤치고 이를 둘러싼 당대의 이야기를 좀 더 편하게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1323년 음력 4월 중국 푸젠(福建) 성 취안저우(泉州)를 출항한 신안선은 저장(浙江) 성 원저우(溫州)를 거쳐 고려로 갔다. 허나 고려에 닿기 직전인지 아니면 들렀다 종착지 일본 후쿠오카(福岡)로 가던 중인지는 모르나, 수백 명의 꿈이 실렸던 배는 난파돼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발굴 당시는 기본 측량장비도 없던 시절이었다. 문화재관리국(이후 문화재청) 지휘 아래 목숨 걸고 바다에 뛰어든 해군 잠수사의 촉에 의지해 유물을 건져 올렸다.

고려 청자상감 국화무늬 잔탁. 13세기 전남 강진이나 전북 부안에서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청자상감 국화무늬 잔탁. 13세기 전남 강진이나 전북 부안에서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안선이 품고 있던 보물은 실로 엄청났다. ‘청자 해태 모양 연적’과 ‘청자상감 구름 학 국화무늬 베개’ ‘청자상감 국화무늬 잔탁(盞托·찻잔 받침대)’ 같은 고려청자 7점을 비롯해 도자기가 2만여 점. 일본에서 주문한 향로와 등잔 같은 불교 의례용 금속제품도 700점이 넘는다. 주사위와 약재, 벼루와 맷돌, 빗과 저울 같은 생활용품도 나왔다. 신안선이 당시 세계 최대 교역국이었던 원제국과 고려 일본을 잇는 해양실크로드의 실체가 담긴 타임캡슐로 불리는 이유다.

배 밑바닥에선 중국 동전 약 800만 개와 껍질을 벗겨 적당히 자른 자단목(紫檀木) 1000여 편도 찾았다. 동전은 당시 유통되지 않던 걸 모아 일본에서 녹여 불상을 만들려던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 가나가와(神奈川) 현에 있는 청동불상‘가마쿠라 다이부스(鎌倉大佛)’는 송나라 동전과 성분분석 결과가 똑같이 나왔다. 자단목은 고위층 가구나 불교용품 제작용이었을 터. 흥미로운 건 이 목재에 한자는 물론 알파벳도 여럿 적혀 있었다는 점이다. 서역과 유럽 상인까지 상주하던 취안저우에서 취급되던 목재다 보니 표기방식도 국제적이었다.

중국 은제 투각(透刻) 꽃무늬 향로. 일본 사찰이 불교 의식용으로 수입한 유물로 보인다.
중국 은제 투각(透刻) 꽃무늬 향로. 일본 사찰이 불교 의식용으로 수입한 유물로 보인다.
신안선을 제대로 알리고 싶다던 두 저자의 소망(?)은 꽤나 이뤄진 듯하다. 살짝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하고 세세한 설명이 가득하다. 신안선 발견과 유물 인양 과정부터 배에 실렸던 유물과 뒷얘기까지 씨줄 날줄로 엮이며 한 폭의 커다란 역사지도를 만들어냈다. 특히 당시 최고 교역물품인 차와 인삼을 소재로 백성 수탈의 역사를 되짚거나 찌꺼기만 남은 약재를 통해 인도의학이 불교와 함께 일본까지 흘러가는 과정을 기술한 대목은 잔향이 컸다. 신안선이란 그물을 당기다 보면 13세기 한중일의 문화사까지 끌려나온다. 다소 장황한 부분도 없지 않으나 크게 거슬리진 않는다.

신안선 침몰은 당시로선 많은 인명을 앗아간 불행이요 참화였다. 고려인 중국인 일본인 가릴 것 없이, 누군가는 피눈물로 목 놓아 불렀을 가족을 떠나보냈다. 허나 그 아픔이 자연에 안겼다 600여 년 만에 돌아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소리 없이 외친다. 신안선은 아직 목적지에 다다르지 않았노라고. 그 끝나지 않은 항해는 이제 우리가 짊어질 몫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신안 보물선의 마지막 대항해#유물#청자상감 국화무늬 잔탁#중국 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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