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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기이(紀異)편 제2에는 백제 30대 무왕(580∼641)이 못가에 미륵사를 세우는 장면이 나온다. 고려 후기 승려 일연(1206∼1289)은 무왕이 미륵사를 세우기 위해 “산을 허물고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절이 얼마나 크기에 산까지 허물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찰나, 역자가 달아 놓은 각주가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준다.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 미륵사 터가 있는데 4m 높이의 당간지주(부처나 보살의 공덕을 나타내는 깃발을 걸기 위해 세운 기둥)가 남아 있어 그 규모를 유추할 수 있다.” 판과 쇄를 거듭하며 10만 부 이상 팔린 김원중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 번역의 ‘삼국유사’(민음사) 개정판(사진)이 14년 만에 나왔다. 김 교수는 2년에 걸쳐 원고를 다시 손질하면서 현대 독자들에게 친숙한 표현으로 바꾸고 사기, 삼국지 등 삼국유사에 인용된 중국 문헌의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했다. 그를 지난달 25일 서울 강남구 민음사에서 만났다. “독자들의 오랜 사랑에 친절한 번역서로 보답하고 싶어 현장 답사를 통해 현장감을 불어넣고자 했습니다. 우리말의 결을 살리기 위해서도 노력했죠.” 그는 개정판을 준비하며 경북 경주와 충남 논산 등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장소를 답사했다. 2007년 첫 번역본을 내놓을 땐 하지 못한 작업이다. 이를테면 가락국 설화에 등장하는 고대 가요 ‘구지가’를 소개하는 대목에선 배경이 되는 경남 김해 수로왕릉의 ‘천강육란석조상(天降六卵石造像·가락국 설화에 나오는 6개 알과 9마리 돌거북을 묘사한 1976년 작 조각상)’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다. 의상법사가 강원 양양 낙산사에서 관음보살을 만나는 장면에선 이곳의 원통보전(圓通寶殿·관음보살을 모신 전각)을 소개한다. 김 교수는 삼국유사에는 직접 현장을 찾지 않으면 쓸 수 없을 정도로 자세히 서술된 부분이 많다는 걸 실감했다고 한다. 자신의 답사 기록을 각주에 담는 게 원문을 해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 이유다. 그는 “삼국유사를 챙겨 들고 여행지를 찾아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보는 것도 즐거운 독서 경험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쉴 새 없이 새로운 번역서와 번역 개정판을 출간하는 걸로 유명하다. 올 2월엔 9권짜리 ‘김원중 교수의 명역 고전 시리즈’(휴머니스트)를 5년 만에 완간했다. 이 중 ‘논어’는 3년, ‘손자병법’은 4년 만에 개정판을 냈다. 그의 번역서 중 대표작인 ‘사기열전 시리즈’(민음사)도 2011년 완간 후 두 차례 개정했다. 김 교수는 “번역이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고전을 최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소명으로 생각하기에 성실하게 작업하려고 한다. 5년마다 개정 작업을 하는 걸 원칙으로 삼지만 잘 안 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에게 삼국유사는 민족의 자부심과 동의어다. 그는 일연이 우리 역사를 중국과 대등하게 서술한 점에 주목한다. 예컨대 기이편 제1에서 일연은 “단군왕검은 당요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고 썼다. 중국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수평적으로 기술했다는 것. “삼국유사는 한반도 고대사를 담은 극소수의 문헌 중 하나입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단군 신화를 다루진 않았지요. 우리 민족의 뿌리를 아는 데서 역사에 대한 주체성과 자부심이 피어납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세상에는 재밌는 게 끝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 소재와 아이디어, 그리고 제가 만들 이야기도 끝이 없지 않을까요?” ‘회색인간’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김동식(36)이 10권짜리 초단편 소설집 시리즈에 최근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9번째 소설집 ‘문어’와 10번째 ‘밸런스 게임’을 잇달아 발표했다. 15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지금도 카카오페이지 연재를 위해 사흘에 한 편씩 이야기를 짓고 있어 바쁜 건 여전하다”며 웃었다. 초단편 소설이란 5000자 안팎의 짧은 작품이다. 이 때문에 초단편 소설집 한 권에는 약 20편의 작품이 들어간다. 이번에 발표한 문어와 밸런스 게임에도 각각 22개 작품이 포함됐다. 그가 지금껏 내놓은 10권짜리 소설집 전체를 놓고 보면 작품 수는 225편에 달한다. 김동식은 2017년 12월 ‘회색인간’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13일의 김남우’ 등 초단편 소설집 세 권을 한꺼번에 내놓았다. 이후 3년여에 걸쳐 일곱 권의 소설집이 더 나왔다. 그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심심풀이로 이야기를 연재하던 시절부터 응원한 팬들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한다. 김동식은 자신이 특정 소재를 소설화하는 작업은 간단하다고 했다. 예컨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본 “작은 방에 갇혀 한 달을 버틸 경우 1억 원을 받는다면 사람들은 과연 도전할까”라는 질문을 도시 단위로 확장했다. 그리고 대척점에 선 두 인물을 창조해 이들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했다. 초단편 ‘서울 안에서 100억? 서울 밖에서 10억?’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간단하다지만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발상의 전환이다. 아이디어가 많다고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는 “시리즈 후반으로 갈수록 식상하다는 비판이 아프게 들려왔다”고 고백했다. 처음 이야기를 쓸 때만 해도 그의 목표는 오로지 ‘재미’였다. 그러나 책으로 엮으면서 누군가 값을 내고 볼 소설의 목적과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새롭고 실험적인 세계관을 창작하기보다 진부해도 안전한 방식을 선택할 때가 많아졌다. 김동식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으면서도 참신한 이야기를 만들려고 지금도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 번도 글쓰기 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중고교를 검정고시로 마쳤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헤쳐 온 그는 이 때문에 글쓰기 꿈나무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서울에 살지만 학교나 공공단체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먼 지방이라도 바쁜 시간을 쪼개 달려간다. “조금 비틀어 생각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꾸준히 글쓰기를 연습하는 성실함만 있다면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요.”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전쟁으로 폐허가 된 어느 미래.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 ‘한’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대량살상무기 사용 여부를 놓고 고민에 빠진다. 이를 사용하려면 작동 암호를 몸 안에 이식한 소녀 ‘나이마’의 몸을 갈라 캡슐을 꺼내야 해서다. 인류를 지키기 위해 이 시스템을 고안하고서도 나이마를 딸처럼 아끼는 ‘테지’는 “외부에 새로운 암호를 만들어 너를 죽일 필요가 없게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나이마는 어떤 사람도 대량살상무기를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 제안을 거절하고 담담히 시를 써 내려간다. “나는 당신을 주저케 하려고 여기에 있다. 당신은 내가 없기를 바랄 테지만.”(S L 황, ‘내 마지막 기억 삼아’) 휴고상 수상작 등 미국 공상과학(SF) 수작을 모아 매년 발행하는 ‘올해의 SF 걸작선(The Year‘s Best Science Fiction)’ 2020년판 1·2권이 번역돼 나왔다. 1권 첫 번째 수록작인 ‘내 마지막 기억 삼아’에는 미래 기술과 이를 다루는 새로운 정치체가 등장하지만, 지금의 세계 시민들이 풀어야 할 고민과 크게 동떨어져 있지 않다. 1권에는 대중적이고 흥미로운 최신 SF 단편소설 15편이 담겼다. 켄 리우는 ‘추모와 기도’에서 증강현실(AR)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가 총기 난사 사건을 추모하는 방식을 그렸다. 총에 맞아 숨진 소녀 ‘헤일리’는 AR 기술로 살아 돌아온 것처럼 재현돼 총기 규제 완화론자들의 도구로 활용된다. 그러나 반대 세력이 득세하며 헤일리의 모습은 훼손되고 조롱을 당한다. 사진보다 선명한 AR 기술에 위로받은 유족들이 가상현실에서 온전한 헤일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심리적 피해를 입은 뒤였다. 국내 독자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테드 창은 ‘2059년에도 부유층 자녀들이 여전히 유리한 이유’에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유전자 조작’ 자선사업이 벌어지는 미래사회를 상상했다. 유전자는 빈부격차의 근원이 아니며, 이 같은 사업이 오히려 더 심각한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작가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2권에는 실험적인 단편 12편을 엮었다. 다소 무겁고 난해할 수 있지만 탁월한 정밀함으로 SF 마니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작품들이다. 지난해 휴고상을 수상한 N K 제미신의 ‘비상용 피부’에는 황폐해진 지구를 떠나 외계 행성에 자리를 잡은 인류와 지구에 남은 이들 사이의 대립이 그려진다. 두 인류의 만남으로 각 행성이 건설한 국가의 이상이 서로 충돌한다. SF 작가 김초엽, 천선란이 주목받고 국산 SF 영화 ‘승리호’가 흥행한 걸 계기로 SF에 관심이 생긴 독자라면 미국의 유수 SF 작가들이 쓴 최신작을 음미해볼 만하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웃음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봄날…금방이라도 속마음을 들킬 것 같은 노랑 짧은 봄날이 노랑노랑 익어간다 화사하게” 출판사 창비의 시 큐레이션 애플리케이션(앱) ‘시요일’이 22일 서비스한 ‘오늘의 시’는 김현서의 ‘봄’이다. ‘웃음’ ‘노랑’ ‘화사’와 같은 시어들이 봄을 맞는 이용자들의 마음을 간질인다. 오늘의 시는 매일 낮 12시 40분 스마트폰 화면에 팝업 창으로 제공된다. 바쁜 일상의 한가운데로 훅 들어온 시 구절에 젊은 독자들이 지친 마음을 위로받고 있다. 시요일은 2030 젊은 독자들이 시를 향유하는 방식을 바꾸고 있다. 가장 아날로그적인 콘텐츠로 여겨진 시가 디지털과 만나는 지점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것. 이용자들은 시집을 펼쳐 시를 읽는 대신 스마트폰으로 그날 분위기에 어울리는 시를 감상하고, 인스타그램에 마음에 드는 구절을 손 글씨로 적어 올린다. ‘시요일’ 기획위원으로 시 큐레이션을 맡고 있는 신미나 시인은 “필사나 캘리그래피 형태로 감상을 표현하는 독자들이 부쩍 늘었다. 밀레니얼 세대는 독자가 단순한 수용의 주체가 아닌 생성의 주체가 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창비에 따르면 성별과 연령대 등을 밝힌 시요일 유료회원 중 30대(27.4%)와 20대(23.3%)가 가장 많았다. 2030이 꼽는 장점은 시의성과 편의성. 3년째 ‘시요일’을 이용한 직장인 김모 씨(29)는 “시집을 따로 챙기지 않아도 이동 시간에 틈틈이 시를 읽고 메모할 수 있어서 좋다. 그날의 기분이나 상황에 맞는 시를 만날 때면 지친 일상에 큰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2017년 4월 이 앱이 나올 때만 해도 출판계에선 “종이 시집도 팔리지 않는 마당에 즐길 거리가 많은 스마트폰으로 시를 받아볼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월 5000원(1년 3만 원)의 유료 서비스라는 점도 부담 요소로 여겨졌다. 하지만 서비스 1년 만인 2018년 3월 기준 앱스토어의 무료 앱 다운로드 2위에 올랐다. 현재 이용자 수는 약 12만4000명. 김수현 미디어창비 출판본부 시요일 담당자는 “약 7000명을 제외한 대다수는 앱에서 제공하는 시 일부만 열람할 수 있는 무료 회원이지만, 앱을 통해 시집 구매로 이어지는 수요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시를 즐기는 방식이 과거와 달라졌지만 독자들이 시에서 찾고자 하는 건 변함이 없다. 신 시인은 “예술적 완성도가 있으면서도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정서를 끌어내는 시가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고 했다. 지난달 1일부터 이달 19일까지 시요일에서 가장 많이 읽힌 시는 ‘개안’(최영숙). 4위에 오른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유병록)와 더불어 봄이 주는 설렘과 위로를 담았다. ‘별의 어깨에 앉아’(강은교) ‘있다’(진은영) 등 그리움과 슬픔의 정서를 노래한 시들도 인기를 끌었다. 시요일 큐레이션을 맡은 안희연 시인은 “독자들이 장벽 없이 시에 접근할 수 있도록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시 구절을 소개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고 설명했다. 자극적인 오락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시는 무얼 할 수 있을까. 두 시인은 자기 자신을 보살피게 하는 기능이 시에 있다고 말했다. “너무 잦은 감탄은 사실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주파수를 찾듯 자신의 내밀한 언어를 시에서 찾다 보면 무너진 하루도 일으켜 세워진답니다.”(신미나) “펜데믹 상황에서 시만이 할 수 있는 몫을 고민하다가 고요, 혼자, 다짐, 시작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렸어요. 이번에 ‘안부’라는 키워드로 시요일 시선집 ‘내일 아침에는 정말 괜찮을 거예요’를 출간했는데 모두에게 꽃다발 같은 시집이 되길 바랍니다.”(안희연)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제 소설은 현대판 ‘미녀와 야수’입니다. 이 동화 속 주인공인 ‘벨’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나요?” 지난 한 해 뜨거운 화제작이자 문제작이었던 영화 ‘365일’의 폴란드 원작 소설 작가 블란카 리핀스카(36)의 답변은 간명했다. 그는 ‘365일’을 둘러싼 각종 논란에 대해 “성인은 현실과 소설을 분리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받아쳤다. 지난달 다산북스에서 ‘365일’의 한국어 번역판을 출간한 리핀스카를 서면으로 만났다. ‘365일’은 마피아 가문의 수장인 남주인공 마시모가 시칠리아로 휴가를 온 여주인공 라우라를 납치해 ‘당신도 나를 사랑하게 되기까지 365일간의 시간을 달라’는 요구를 하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라우라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지만 점차 마시모의 매력에 빠지고 그를 향한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하기에 이른다. 리핀스카는 이 소설로 2019년 폴란드 내에서만 150만 부의 판매량을 올리며 유명 작가로 거듭났다. 스트리밍 서비스 랭킹 사이트 ‘플릭스패트롤(FlixPatrol)’에 따르면 영화 ‘365일’은 넷플릭스 서비스 영화 중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시청한 콘텐츠다. 넷플릭스는 시청률 누적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제가 읽은 대부분의 소설에는 ‘나쁜 애정 신’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애정 신’을 담은 소설을 쓰기로 했고 꽤 잘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365일’의 인기 요인은 여성의 성적 판타지에 충실한 서술 방식에 있었다. 작가는 솔직하고 당당한 라우라라는 인물을 앞세워 여성 캐릭터의 욕망을 생생하고 조밀하게 표현했다. 리핀스카는 “연인과의 이별이 이 소설을 집필하게 된 계기다.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썼던 소설이어서 여성적인 성적 환상이 더 충실하게 반영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납치와 감금 등 범죄 행위를 소설의 요소로 사용했다는 점은 언제나 비판의 지점이 됐다. 라우라가 이끌어 가는 서사를 ‘주체적 욕망의 표출’과 ‘범죄 미화’ 중 무엇으로 독해할지 독자들의 평가도 엇갈리는 지점이다. 특히 소설이 영화화되면서 라우라의 감정 변화 과정이 개연성 있게 연출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 때문에 “라우라는 여성의 욕망을 대변하기는커녕 성범죄 피해 여성에게 해로운 인물”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영화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자 “서비스를 중단하라”는 일부 이용자들의 비판이 빗발쳤다. 틱톡에서는 영화의 폭력성을 문제 삼자는 뜻에서 멍과 피로 범벅이 된 분장을 하고 사진을 찍어 올리는 ‘#365dayschallenge’(365일챌린지)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 같은 논란에 대해 리핀스카는 “범죄 행위가 등장하는 많은 영화들이 오락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서사나 캐릭터가 영화로 완벽히 구현되지는 못했지만 공을 들여 쓴 애정 신만큼은 아름답게 표현됐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소설 ‘365일’은 ‘오늘’, ‘또 다른 365일’이라는 제목의 3부작으로 이어진다. 폴란드에선 모두 출간됐지만 한국엔 1부, 영미권에는 2부까지만 출간된 상태다. 리핀스카는 “두 사람의 애정을 설명하는 데 범죄 행위를 끌어들인 이유를 3부까지 모두 읽는 독자는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인종적 동기가 없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순진하고 그 자체로 인종차별적입니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벌어진 총격으로 아시아계 여성 6명을 포함해 모두 8명이 희생된 사건에 대해 한국계 미국인 가수 에릭 남(33)이 미 시사주간지 타임지에 인종주의적 미국 사회를 비판하는 기고문을 게재했다. 19일(현지 시간) 에릭 남은 ‘만약 당신이 애틀랜타에서 벌어진 아시아계 대상 폭력에 놀랐다면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던 겁니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인종주의라는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는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비판했다. 애틀랜타에서 태어나고 자란 에릭 남은 “검찰과 경찰이 이번 사건을 증오범죄로 규정할지를 여전히 토론하는 동안 나를 포함한 수백만 명의 아시아·태평양계 사람들(AAPI·Asian Americans and Pacific Islanders)은 버려진 기분을 느낀다”고 썼다. 그러면서 “AAPI의 경험은 불안과 정체성 위기로 가득 차 있다. 미국 문화는 백인 우월주의와 조직적 인종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 속에서 아시아인은 ‘영구적인 외국인’이거나 ‘모범적인 소수민족 신화의 주인공’이었다”고 지적했다. 현지 경찰이 사건을 총격범 로버트 에런 롱의 성 중독 문제로 접근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AAPI는 배제되고 억압받았으며 성적 대상이 됐다”며 “왜 우리 공동체의 여성들을 당신들의 성 중독 해소 대상이자 희생자로 표현하나.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나”고 썼다. 에릭 남은 “이제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 지금 침묵하는 것은 곧 공모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해 절실히 필요한 변화를 능동적으로 만들어 가야만 한다”고 덧붙였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치매를 앓는 아버지에게 수면제를 먹이는 딸, 옥수수 밭 한가운데의 집으로 찾아와 계약을 강요하는 보안업체 직원들. 이들이 지키려는 건 약속대로 상대방의 재산과 목숨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 독자들은 편혜영의 신작에서 이 석연찮은 관계를 바라보며 불편함에 빠져들게 된다. 이 책은 저자의 여섯 번째 단편소설집이다. 각 작품에서 인물들은 모두 현재 머물던 공간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새로운 공간은 소도시나 시골이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장소에서 이들은 고립과 위협에 시달린다. 몰아치지 않으면서도 긴장감을 쌓아가고 어느새 독자를 서늘한 진실의 공간으로 안내하는 ‘편혜영표 서스펜스’가 펼쳐진다. 단편 ‘호텔 창문’에선 죄 없는 죄의식을 그렸다. 주인공 ‘운오’는 물에 빠진 자신을 살리다가 목숨을 잃은 사촌형으로부터 19년째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다. 사촌형의 기일을 맞아 찾아간 큰아버지 집에서 운오는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자책의 유혹에 이끌리는 인물들의 대화에서 작가의 메시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반면 단편 ‘리코더’에선 어떤 감정을 떨쳐낼 수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빚더미에 앉은 ‘무영’이 고등학교 동창 ‘수오’의 집에 얹혀살게 된 지 얼마 안 돼 수오가 증발하듯 사라진다. 이 두 사람은 고교 시절 수련장 붕괴 사고에서 가까스로 구조된 생존자들. 수오의 실종을 뒤쫓는 과정에서 무영은 수오가 사고 후 지금까지 자신과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혀 살았음을 알게 된다.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흔히 볼 수 없던 물기 어린 시선을 이 작품에선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홀리데이 홈’ ‘플리즈 콜 미’ ‘후견’ 등 이어지는 단편들에서 작가는 한층 더 깊고 치밀해진 시선을 보여준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언제나 처음에 쓰려던 이야기와 조금 다른 자리이거나 전혀 다른 지점에서 멈춘다. 이제는 도약한 자리가 아니라 착지한 자리가 소설이 된다는 걸 알 것 같다”고 썼다. 작가조차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의 결말이 독자들에게 긴 여운을 남길 것이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진보, 보수와 같은 프레임이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게 합니다.” 신작 장편소설 ‘장자의 비밀정원’ 출간을 앞둔 김호운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71·사진)은 17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김 이사장이 이 책을 쓴 계기는 본의 아니게 휘말린 정치 세태 때문이었다. 김 이사장은 지난해 7월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의 발언을 비판한 이후 일각의 공격을 받게 됐다. 추 전 장관이 국회에서 아들의 군 휴가 미복귀 의혹 질의를 받자 “소설 쓰시네”라고 받아친 게 발단이었다. 한국소설가협회는 “한 나라의 법무부 장관이 소설을 ‘거짓말 나부랭이’ 정도로 취급하는 나라에서 문학을 융성시키기 어렵다. 소설 쓰는 것을 거짓말하는 행위에 빗대어 소설가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준 정치인들은 각성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 이사장은 “당시 성명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단지 소설가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발표됐다. 하지만 이후 협회는 일부 여권 인사와 지지자들로부터 심한 조롱과 모함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에 따르면 일부 여권 지지자들은 그의 출신지(경북 의성)를 근거 삼아 보수정당 지지자로 몰아가고, 흐릿하게 찍힌 보수 집회 사진을 두고 김 이사장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허위 정보를 퍼뜨리기도 했다. 그는 “당시 목도한 한국의 정치 세태가 이번 소설을 쓰게 된 계기”라고 밝혔다. ‘장자의 비밀정원’은 중국 춘추시대 등 과거의 이곳저곳을 비행하는 나비를 화자로 내세워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장자의 철학을 재조명하는 작품이다. 김 이사장은 “모든 사람이 본성을 이해하고 지혜롭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썼다”고 말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배송 차량이 일주일에 서너 번씩 집 앞을 지나다니는 걸 보고 우리 동네에 이용자가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서울 강남구에서 초등학교 2학년 자녀를 키우는 A 씨(35·여)는 스마트폰에 설치한 ‘우리집은 도서관’(우도)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어린이 책을 빌리고 있다. 이 앱은 이용자들이 집에 소장한 도서를 서로 빌려 볼 수 있는 도서 공유 서비스. A 씨는 “학년별 필독서는 물론이고 공공 도서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영어 원서 동화책까지 등록돼 있어 다양한 책을 아이에게 읽힐 수 있다”고 말했다. 유·초등 자녀를 둔 부모들을 중심으로 ‘비대면 도서 공유 서비스’ 이용자가 최근 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등교 수업이 준 데다 공공 도서관 이용이 제한되면서 아이에게 책을 읽힐 새로운 수단이 필요한 데 따른 것. 2019년 12월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약 37만8000권의 도서가 우도 앱에 등록됐다. 이 중 약 17만8000권(47%)이 올 들어 새로 등록된 책이다. 이용자들은 신간은 물론이고 희귀한 책들을 집에서 받아볼 수 있다는 것과 도서관에 비치된 책에 비해 상대적으로 책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는 걸 장점으로 꼽는다. 각 가정에서 아이들의 다양한 취향이 반영된 책들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한 이용자는 “유아용 도서 중에는 CD가 포함된 게 많은데 도서관에는 분실 우려로 이를 빼놓는 경우가 많다”며 “공유 서비스에서 책을 빌리면 부속품을 함께 이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고 했다. 우도 앱에 등록된 도서는 2주 동안 빌려 볼 수 있다. 이용자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책을 100권 이상 앱에 등록해야 다른 사람에게 대여료를 받고 책을 빌려줄 수 있다. 대여료는 이용자가 정하는데 통상 500∼2000원 수준이다. 이 중 70%는 대여자가, 30%는 앱 운영 업체가 각각 가져간다. 책 대여자는 대출자와 직접 만나 책을 전달하거나 앱 업체에 배송을 맡길 수 있다. 서울 서초 강남구 등 일부 지역은 업체가 직접, 나머지 지역은 배달업체가 배송한다. 대출을 신청하면 통상 3, 4일 내로 현관 문고리에 걸린 책가방에 책을 넣어준다. 앱 운영 업체인 스파이더랩에 따르면 이용량의 70%가 서울 서초 강남 송파 등 강남 3구와 강동구, 경기 성남시 분당구 등 교육열이 높은 지역에 집중돼 있다. 대출 도서의 85%는 5∼13세 대상 어린이 도서다. 이에 따라 학년별 추천 도서와 필독서를 제안하는 서비스도 운영 중이다. 원용준 스파이더랩 대표는 “지금은 서울과 수도권 일부 지역에 이용자가 집중돼 있지만 향후 직배송 서비스를 확대해 지방 서비스에도 주력할 생각”이라며 “올해 전국 등록 도서 100만 권을 달성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지난해 5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 클럽 집단감염 발생 당시 방역당국이 수집한 개인정보가 이후에 어떻게 처리됐는지 묻는 사람이 있나요?” 한국인 최초이자 유일한 유엔 시민적·정치적권리위원회 위원인 서창록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60)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되짚으며 이같이 말했다. 자신이 코로나19 확진자이기도 했던 서 교수는 방역의 중요성과 의료현장의 긴박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감했다. 하지만 그는 “방역과 인권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코로나19 확진자이자 완치자로 경험한 내용을 엮어 에세이 ‘나는 감염되었다’(문학동네)를 9일 출간했다. 책에는 인권 전문가의 시선으로 읽어낸 한국 사회의 면면이 촘촘히 기록됐다. 그는 11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 완치 수개월 뒤에도 서울 성북구청 웹사이트에 남아있는 ‘성북구 13번 확진자’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구청에 직접 전화를 걸어 삭제 요청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성북구 13번 확진자’는 그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순간 그의 신분이 된 타이틀. 방역당국은 그의 동선을 파악하기 위한 구두 조사와 신용카드 결제기록 외에도 얼굴사진을 요구했다. 매장 내 폐쇄회로(CC)TV 녹화 화면과 서 교수의 얼굴을 대조하기 위해서였다. 역학조사를 위한 목적이었지만 ‘거짓말 할 가능성을 의심 받아도 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경험은 서 교수에게 낯설었다. 그는 “성별과 나이, 직업, 동선이 순식간에 언론에 전파됐다. 동선을 제외한 정보들이 방역과 무슨 상관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서 교수가 국립중앙의료원에 입원할 때도 낯선 경험은 이어졌다. 당시 자가 격리 이탈자뿐 아니라 방역수칙을 충실히 이행하는 일반 자가 격리자에게도 이른바 ‘안심밴드’를 채워야한다는 주장이 나왔었다. 서 교수는 책에서 “(자가 격리자는) 범죄에 연루된 것도 아니고 확진을 받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범죄자 취급을 할 수 있는가”라며 “긴급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한국에선 너무 적었다”고 썼다. 책에는 사회에 대한 비판만큼이나 자기반성의 메시지도 담겼다. 서 교수는 지난해 3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체제학회’에 참석한 이후 코로나19에 감염됐다. 그는 당시 만난 동유럽 국가 출신 이민자와 중국인 교수를 향해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었다고 고백했다. 제목 ‘나는 감염되었다’에는 서 교수 스스로도 코로나 확진자와 접촉자에 대한 혐오 시선에 젖어있었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어찌 보면 자신의 치부를 솔직히 드러낸 이유를 묻자 그는 담담히 답했다. “저도 대중과 비슷한 편견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제 코로나19 감염은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 됐으니까요.”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노란 햇살을 맞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식물들을 가만히 바라볼 때, 흙냄새를 맡으며 녹음이 우거진 길을 거닐 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누구나 해본 적이 있을 테다. 복잡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한숨 돌리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랬을까? 30년간 정원을 가꿔 온 미국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수 스튜어트 스미스는 식물이 인간의 정신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과학적으로도 증명 가능하다고 말한다. 마당이 있는 집보다 공동주택에 사는 이들이 더 많은 한국에서조차 홈 가드닝 열풍이 부는 이유가 집에 갇힌 사람들의 무료함 때문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전쟁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저자의 외할아버지는 트라우마로 고통받다 식물을 가꾸며 일상을 회복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저자의 어머니 역시 인생의 위기 때마다 땅을 파고 잡초를 뽑으며 상실의 고통에 대처했다. 저자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된 후 식물이 사람을 치유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식물을 두고 전 세계에서 이뤄진 각종 연구 결과를 그러모아 이 책에 담았다. 식물은 특히 도시생활자에게 중요하다. 도시는 경제의 엔진이고 문화의 중심지이지만 도시 생활에는 대가가 따른다. 시끄럽고, 붐비고, 오염된 환경에서 도시인들은 내면에 좌절, 피로감, 불안, 적대감을 쌓아 간다. 땅은 부동산으로서의 가치와 그에 대한 수요 때문에 대도시에 남아 있는 소규모 녹지는 늘 위협을 받는 처지다. 저자는 가로수의 존재만으로도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 시카고대 환경과신경과학연구소가 2000년대 초반 캐나다 토론토의 한 주거지에서 벌인 연구에 따르면 블록마다 나무 열 그루만 더 있어도 소득이 1만 달러(약 1100만 원) 늘어나는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정신적 스트레스가 감소한다. 미국 일리노이대는 나무와 정원을 갖춘 건물 근처에서는 범죄율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녹지가 부족한 곳에 정원을 꾸미거나 나무를 심으면 범죄율을 7%까지 낮출 수 있다. 원예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연구자들은 최초의 원예가 5만3000년 전 동남아시아 보르네오섬의 열대 숲에서 시작됐다고 본다. 이곳 정글의 토양과 강우 패턴을 분석한 결과 거주민들은 낙뢰 맞은 땅을 보고 불의 힘을 이용해 땅을 비옥하게 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사람들은 물길을 만들고 잡초를 뽑고 모종을 이식하며 자연을 인간의 손길로 가꿨다. 경작은 거친 땅을 ‘인간화’하는 작업이다. 영어 단어 ‘culture(문화)’의 어원은 ‘cultivate(경작, 재배)’에서 왔다. 인간이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재배하기 위해 식물을 심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연구자들의 의견은 다르다. 고고학자 앤드루 셰라트는 “사치 작물을 기르는 원예에서 필수 작물을 기르는 농업으로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원예가 처음부터 문화의 표현이었다는 의미다. 2005년 미국 럿거스대의 연구에 따르면 선물로 꽃을 받은 집단과 다른 물건을 받은 집단을 비교했을 때 꽃을 받은 이들은 모두 ‘뒤센 미소’(진짜 기쁨과 행복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웃음)를 지었다고 한다.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요즘, 소중한 사람에게 싱그러운 식물을 선물하는 건 어떨까.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아프리카 초원에서 살아가는 사자 ‘와니니’와 그의 친구 하이에나, 버펄로, 하마들의 이야기. 생경한 풍경에서 펼쳐지는 야생동물들의 이야기가 어린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난달 출간된 이현 작가의 동화 ‘푸른 사자 와니니’ 시리즈(창비) 3권은 출간 1주 만에 예스24 어린이문학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더니 출간 3주가 지난 현재까지 3만 부가 제작됐다. 1권과 2권은 각각 20만, 10만 부가 판매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지난해부터 동화책 시장에 순풍이 부는 가운데 여기에 힘입은 출판계가 다양한 콘셉트의 동화책 기획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2017∼2019년 아동 분야 신간은 4200권 내외를 유지했지만 지난해 4617권으로 증가했다. 특히 어린이 문학과 교양서가 각각 150권, 270권 늘어 증가 폭이 컸다. 시리즈물 제작에 나서는 출판사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 특징 중 하나다. ‘푸른 사자 와니니’의 경우 2019년 1월 1권을 출간할 때만 해도 단행본으로 제작됐다. 독자들의 지속적인 요청으로 같은 해 8월 2권이 출간됐고, 3권 제작 단계부터는 아예 총 10권짜리 시리즈로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유병록 창비 어린이출판부장은 “동화책 시장이 성장세에 들어섰다고 판단해 비용이 많이 드는 시리즈 제작에도 자신감을 얻게 됐다. 흥미로운 영상 콘텐츠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은 이야기가 이어지는 문학 작품들에 큰 매력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출간 10년이 지난 단행본이 뒤늦게 시리즈로 제작된 사례도 있다. 비룡소는 2010년 펴낸 동화책 ‘만복이네 떡집’의 2, 3권인 ‘장군이네 떡집’ ‘소원 떡집’을 지난해 4월 출간했다. ‘만복이네 떡집’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심술을 부리던 주인공 ‘만복이’가 신비한 떡집을 발견해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김리리 작가의 작품이다. 출간 이후 현재까지 30만 부가 넘게 판매됐다. 2권은 1권 말미에 잠깐 나오는 ‘장군이네 떡집’을 전면에 내세웠다. 박지은 비룡소 편집주간은 “2, 3권이 각각 10만 부 이상 판매되면서 10년 전 작품인 1권도 10만 부가 더 팔렸다. 동화책 시장이 침체기일 때는 시리즈물을 쉽게 시도하지 못했는데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고 말했다. 인기 콘텐츠를 스핀오프한 동화책도 제작됐다. 지난해부터 3권째 출간되고 있는 ‘흔한 남매 안 흔한 일기’ 시리즈는 구독자 214만 명을 자랑하는 인기 유튜브 채널 ‘흔한 남매’의 스핀오프 동화책이다. ‘흔한 남매’ 영상에는 코미디언 장다운, 한으뜸이 출연해 남매를 콘셉트로 다양한 상황극을 펼친다. 인기가 높아지자 아이세움은 이 콘텐츠의 스핀오프 만화책과 동화책을 제작했다. 이현정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담당자는 “어떤 콘텐츠가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같은 설정을 가지고 매체와 형식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가공하려는 움직임이 돋보이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중국 헤이룽장성 동북부에 있는 면적 12만 km²의 삼강평원에서는 두만강, 연해주 일대에서 발굴된 집자리, 토기와 비슷한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두만강 유역에서 발흥한 옥저 계통의 문화가 삼강평원까지 북상한 흔적이다. 농사를 지어 생활했던 옥저인은 북쪽에서 찾은 기름진 땅에서 300여 년간 살며 거대한 성터를 일궜다. 이곳에서는 250여 기의 성터가 발견됐고, 이 중 가장 큰 성터는 풍납토성의 규모를 능가한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51)가 지난달 발간한 책 ‘옥저와 읍루’에는 옥저와 읍루에 대해 새롭게 발굴한 고고학적 결실이 담겼다. 옥저는 기원전 4세기∼서기 246년, 읍루는 기원전 4세기∼서기 559년경 존재했던 북방민족이다. 강 교수는 10년간 러시아와 중국, 한국을 다니며 알려진 사실이 많지 않은 북방민족인 옥저와 읍루를 연구했다. 그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양한 북방민족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중국의 역사 팽창주의를 막는 대안이 된다”고 말했다. 강 교수의 연구로 새롭게 알려진 사실은 크게 두 가지다. 그동안 삼강평원에서 발견된 성터를 옥저인이 지은 것이라고 보는 연구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강 교수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삼강평원의 각종 유물들은 옥저인의 문화와 똑같았다. 잡곡농사에 유리한 지역을 따라 이동했던 옥저인의 습성을 고려하면 이동경로 역시 설명 가능했다. 강 교수는 “이 책 출간과 비슷한 시기에 삼강평원을 연구하는 중국학자들도 이 성터의 주인을 옥저인으로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중국 헤이룽강 하류에서 쑹화강 유역에 걸쳐 있는 읍루 지역에서 기원전 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강철화된 철도끼가 발견됐다는 점도 강 교수가 꼽는 학문적 성과다. 이는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국내 연구자가 거의 없는 분야인 북방민족을 연구하는 강 교수는 “북방민족 역사가 한국의 역사가 맞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북방민족의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네 것과 내 것을 나누는 것은 한국사 왜곡의 지름길”이라며 “역사의 다변적인 흐름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김이나의 ‘김이나의 작사법’…. 문학동네의 15년 차 에세이 편집자 이연실 씨(37)가 내민 명함 앞면엔 서점 매대에서 한 번쯤은 본 책들의 제목이 빼곡했다. 뒤집어보니 원고지 양식의 빨간색 칸에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며 보호할 수 있기를’이라는 일본 만화책 ‘중쇄를 찍자!’의 대사가 쓰여 있었다. 이 씨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나누며 자꾸만 되새기고 싶은 문구라 이런 명함을 만들었다”며 멋쩍게 웃었다. 최근 ‘에세이 만드는 법’(유유출판사)을 출간한 이 씨를 5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굵직한 에세이들을 엮어내 출판계에선 ‘미다스의 손’으로 유명하지만, 본인이 직접 책을 쓴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씨는 15년간 ‘맨땅에 헤딩’하며 얻은 모든 지혜를 이 책에 담았다. “그 사람이 쓸 수 있는 단 하나의 에세이를 찾아내는 것, 그게 에세이 편집자의 역할이에요.” 한 사람이 쓸 수 있는 에세이는 무궁무진하다. 일기도 에세이다. 하지만 이 씨가 찾아 헤매는 건 그 사람이 인생에 단 한 번밖에 쓰지 못하는 이야기다. 희귀질환으로 키가 110cm까지만 자란 이지영 씨의 취직 분투기(‘불편하지만 불가능은 아니다’), 데뷔 10년을 맞는 인기 작사가의 첫 에세이(‘김이나의 작사법’)가 그런 글이다. 본인의 이번 책 역시 마찬가지다. “제가 15년 차 편집자로서 내놓는 에세이 편집법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요. 열정을 갖고 출판사에 들어온 신입 편집자들이 금세 지치는 걸 많이 봤어요. 그 후배들한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진솔하게 썼습니다.” 책에는 저자 섭외부터 보도자료 배포에 이르는 모든 출간 과정에서 편집자가 해야 하는 현실적인 고민이 적나라하게 담겼다. 이슬아 작가 에세이의 제목을 지으며 어떤 고뇌를 했는지, 김이나 작사가 책에 두를 띠지의 문구를 두고 작가와 어떤 실랑이를 벌였는지 등 인기 에세이의 탄생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묘미다. 이 씨가 엮은 책들 중에도 초판본을 소진하지 못한 에세이가 많다. 그는 이런 책들을 경기 파주시에 있는 문학동네 사무실 한곳에 모아두고 ‘1쇄의 전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가끔씩 책을 만들다 지치는 순간이 오면 이 씨는 고개를 들어 ‘1쇄의 전당’에 꽂힌 채 먼지가 쌓여 가는 좋은 책들을 올려다본다고 한다. “저 책들을 출판사가 잊고 독자가 잊고 심지어 작가마저 잊더라도 저만은 잊어선 안 된다는 마음이 매 순간 최선을 다하게 하는 원동력이랍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1927년 소련 공산당 최상부를 장악한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은 단일하고 강력한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명분하에 민간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독일에서 벌인 대량 학살은 스탈린에게서 힌트를 얻은 결과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1400여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전쟁이 아닌 히틀러와 스탈린의 ‘정책’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시체가 쌓인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연안국들에 이르는 땅을 ‘블러드랜드(bloodland)’라고 일컫는다. 미국 예일대에서 유럽사와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는 티머시 스나이더 교수가 독일, 폴란드 등 국가의 기록보관소 16곳의 자료를 토대로 쓴 연구서 ‘피에 젖은 땅’이 번역 출간됐다. ‘제2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 등 굵직한 전쟁사를 펴낸 앤터니 비버는 이 책이 “당시 스탈린과 히틀러의 이데올로기적 아집의 피해를 입은 지역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참된 유럽사를 그리기 위해서는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공간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게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관점이다. 저자가 보기에 스탈린은 1933년 우크라이나의 배고픈 농민들에게서 식량을 강제 징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 8년 뒤 히틀러 역시 소련 전쟁포로들의 식량 배급을 끊으면 어떻게 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총살과 가스실 이전에 ‘굶겨 죽이기’가 있었던 것. 1933∼1945년 블러드랜드에서 숨진 1400여만 명의 민간인 중 절반은 굶어 죽었다. 책의 미덕 중 하나는 통계와 숫자만을 가지고 살상의 역사를 기록하는 대신 죽어간 희생자들의 표정을 조명했다는 점이다. 극도의 배고픔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잡아먹었다. 가장 어려서, 혹은 가장 착해서 가족과 이웃의 먹잇감이 돼야 했던 이들의 얼굴을 저자는 놓치지 않았다. ‘생존자 카페’에서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2세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아야 했던 트라우마에 대한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은 “두 책의 주제가 이어지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전해질 울림도 더욱 클 것이라고 판단해 비슷한 시기에 펴냈다”고 말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엘리자베스 로즈너의 부모는 집단수용소나 학살지에서 살아남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다. 배고픔의 기억이 뼈에 새겨져 닭을 먹을 때면 뼈다귀의 골수까지 빨아 먹는 어머니, 평생 ‘생존자’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로즈너는 결코 집단학살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저자는 트라우마와 부모 세대의 기억을 정확히 기록하기 위해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그들의 자녀를 만나러 떠났다. ‘피에 젖은 땅’에서도 알 수 있듯 20세기 유럽 인종 학살의 양태는 단일하지 않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로즈너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언제나 나는 무엇이 우리를 분리하는가보다 우리가 무엇을 공유하는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 책은 감히 내가 평화를 위해 바치는 제물이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는 해였던 2019년, 국내 독립운동사를 다룬 박사학위 논문 6편이 심사를 통과했다. 다시 말하면 국내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려는 신진 연구자가 6명 배출됐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100주년 반짝 특수’ 성격이 있었다. 2019년을 전후해서는 관련 연구자가 거의 배출되지 않았다. 이 분야 학문 후속 세대의 명맥이 거의 끊겨 가는 양상이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중견 학자들은 “신진 연구 인력의 양성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뚝 끊긴 신진 연구자 이계형 국민대 사학과 교수가 최근 국내 독립운동사 박사학위 논문 추이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16년 0편, 2017년 2편, 2018년 1편 등 미미하다. 지난해 발표된 근대사 박사학위 논문은 총 14편이었는데, 이 중 국내 독립운동사를 다룬 것은 2편뿐이다. 1980년대에는 매년 10여 명씩 쏟아졌던 독립운동사 신진 연구자가 일 년에 한두 명 수준으로 줄어든 이유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먼저 독립운동사 연구가 누적되면서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학문적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인식이 생겨 인기가 떨어졌다. 대학들이 역사를 비롯한 인문 분야를 축소하면서 교수 채용이 줄어든 것도 영향을 미쳤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2010년대 들어서는 교수의 퇴직과 함께 사학과를 폐과하는 대학이 속속 생길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다”고 설명했다. 한 서울 사립대 사학과 교수는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신진 연구자가 너무 없다 보니 이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따기만 해도 장학금을 줘야 한다는 자조적인 목소리까지 나온다”고 침체된 분위기를 전했다. 기존 연구자들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아직 연구되지 않은 내용이 많은데, 이대로 학문 후속 세대가 끊길까 봐 우려하고 있다. 이 교수는 “3·1운동도 이미 연구가 많이 이뤄져서 더 발굴할 내용이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예컨대 전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곳과 일어나지 않은 곳은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지도자의 유무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의 연구는 여전히 미진하다. 지금까지 연구된 바에 따르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곳은 전국 약 3000개 면 중 3분의 2 정도다. 이 교수는 “똑같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때인 장날을 통해 3·1운동이 전파됐는데, 왜 어떤 곳에선 사람들이 참여했고 어떤 곳에선 참여하지 않았는지 추가 연구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발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외 독립운동사 연구도 속도가 안 나긴 마찬가지다. 이 분야는 중국과 일본, 미국 등에 걸쳐 방대한 해외 자료를 찾고 연구해야 하는 영역이라 문제가 심각하다. 해외를 무대로 한 독립운동사 박사학위 논문은 최근 5년간 2편(2018년, 2019년 각 1편)에 그쳤다. 장세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교수는 “기성 연구자들의 연구는 틈틈이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신예 학자들의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독립운동사에서 생활사로 그렇다면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젊은 학자들이 몰리고 있는 분야는 어디일까. 운동사에서 생활사로 관심이 옮겨 갔다는 게 학계의 분석이다. 박성순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영웅 중심적 서술은 과거 독립운동사의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을 때 필요했던 관점이다. 독립운동사의 기본적인 뼈대가 선 지금은 실제로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할 수 있었던 대중적 기반에 대한 물음이 중요해졌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한다는 점에서 이 같은 근대사 학계의 흐름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많다. 다만 연구가 끊기는 분야가 생기지 않도록 신진 연구 인력을 충분히 양성하려는 노력은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나온다. 이 교수는 “신진 연구자들이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현실적 토양이 마련돼야 젊은 연구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전채은 chan2@donga.com·이호재 기자}

소년 6명이 무인도에 고립됐다. 구출되지 못한 채 15개월이 흘렀다.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한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소년들의 비극적 결말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소외됐을 것이고, 다친 소년은 버려졌을 것이며, 아마도 서로를 해쳤을 것이다. 윌리엄 골딩은 소설 ‘파리대왕’(1954년)에서 어리고 순수한 소년들마저 그 본성은 추악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소설과 달랐다. 1965년 6월 태평양을 표류하다 통가제도의 바위섬에 갇혔던 소년 6명은 15개월간 고립됐을 때 나름의 규칙을 만들고 역할을 나눴다. ‘파리대왕’ 속 소년들은 불을 차지하기 위해 난투극을 벌이지만, 현실의 소년들은 힘을 합쳐 어렵게 피운 불을 1년 이상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네덜란드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리처드 도킨스와 유발 하라리가 각각 ‘이기적 유전자’ ‘사피엔스’에서 주장한 성악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성악설을 뒷받침한 실험들이 왜곡됐음을 지적하고, 서로를 믿지 못할 때 모두가 권력의 통제 대상으로 전락함을 주장한다. 이 책에 따르면 1961년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은 이미 답이 정해진 실험이었다. 밀그램은 피험자가 타인에게 전기충격을 어느 수준까지 줄 수 있는지를 측정해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험 10년 뒤 밀그램의 저서에 따르면 당시 전기충격이 실제로 이뤄지고 있다고 믿은 피험자는 56%에 불과했다. 연구진이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은 피험자에게 폭행을 가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저자는 ‘방관자 효과’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캐서린 수전 제노비스 살인사건도 일정 부분 왜곡돼 있다고 지적한다. 1964년 3월 미국 뉴욕에서 괴한의 칼에 찔려 죽어간 제노비스를 발견한 사람들이 37명이 아니라 3, 4명의 이웃이었다면 즉각 경찰에 신고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사람들이 원래 친절하게 태어났다고 믿는 건 감상적이거나 지나치게 순진한 게 아니다. 오히려 평화와 용서를 믿는 건 용감하고 현실적”이라고 강조한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1920년 3월. 러시아어가 유창했던 조선인 청년 박영빈의 요청으로 체코군 군의관 베리코프가 연해주(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총 60정을 샀다. 한 달 뒤엔 박영빈이 직접 총 300정을 사들였다. 박영빈 뒤에는 당시 러시아 지역 대한적십자회 대표였던 박처후(1883∼?)가 있었다. 미국 한인소년병학교장이기도 했던 박처후는 항일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무기 구매와 간호사 양성에 적극 나섰다. 일제강점기 대한적십자회에서 활동한 박처후와 채계복(1900∼?·여)이 다음 달 1일 열리는 3·1절 102주년 기념식에서 정부 독립유공자 훈장(애족장) 수여자로 선정됐다. 대한적십자회 활동을 주요 공적으로 정부 훈장이 수여되는 건 이들이 처음이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된 몽양 여운형이나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안정근(안중근 의사의 동생)은 일제강점기 대한적십자회 총재를 지낸 적이 있지만, 이 활동을 주요 공적으로 인정받은 건 아니었다. 1919년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총장이던 안창호 등이 세운 대한적십자회는 그동안 구호사업 등 인도주의 활동으로만 일반에 각인됐었다. 그러나 최근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의 연구 결과 대한적십자회는 1920년 2월 독립전쟁에 대비한 ‘간호원 양성소’를 설치하는 등 항일 투쟁에 적극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국제적십자사연맹에 가입해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교섭한 것도 이들 노력이었다.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적십자회가 무장 투쟁에도 적극 나섰던 것이다. 1883년 평북 순천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박처후는 24세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1905년 6월 제국신문에 “자유와 권리란 학식이 있는 자만이 아는 것이며, 학식이 있으려면 교육과 외국 유람이 중요하다”는 글을 남겼다. 이어 1908년 6월 공립신보에 ‘미주 유학생 박처후’라는 필명으로 “완전한 독립국, 완전한 자유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 1909년 9월에는 신한민보에 “동포들은 탄식만 할 게 아니라 무기를 구입하고 전 국민이 군사훈련을 받아 나라를 다시 찾고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항일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1920년 1월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연해주에서 양성한 간호사가 미국적십자사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리기도 했다. 대한적십자회에선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대거 활약했다. 이 중 채계복은 러시아 지역에서 대한적십자회를 조직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함남 문천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채성하의 맏딸인 그는 아버지의 독립운동 기록에도 수차례 등장한다. 대한적십자회 간호사였던 그는 1919년 12월 중국 간도에서 12명의 간호사가 미국적십자사로부터 간호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이른바 ‘간도 15만 원 사건’ 기록에도 그의 이름이 나온다. 이 사건은 독립군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철혈광복단이 일제의 조선은행 자금을 탈취한 것이다. 채계복은 당시 거사에서 핵심 인물이던 독립운동가 최봉설의 총상을 치료해줬다. 이후에도 채계복으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은 최봉설은 훗날 그의 이름 중간 글자를 따 ‘최계립’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박환 교수는 “대한민국 육군의 정통성이 신흥무관학교에 있다고 보듯, 국군간호사관학교의 정신적 모태는 대한적십자에 있다”고 말했다.전채은 chan2@donga.com·김태언 기자}

“에디터 J님께. 일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소설가 김초엽이 e북 플랫폼 ‘밀리의 서재’에 공개한 ‘지구 끝의 온실’ 첫 문장을 클릭하자 2개의 녹음 메뉴가 떴다. 이 중 붉은색 버튼을 누르자 기자의 목소리가 녹음되고, ‘AI(인공지능)’ 버튼은 성우 목소리로 녹음이 시작됐다. 녹음을 마친 뒤 ‘발행’ 메뉴를 클릭하니 헤드셋 아이콘이 그려진 오디오북이 개인 계정에 생성됐다. 밀리의 서재가 지난달부터 시작한 ‘내가 만든 오디오북’ 서비스다.○ ‘스타 낭독자’ 만들기로 차별화 오디오북을 찾는 독자들이 늘면서 관련 콘텐츠 업체들이 자신만의 장점을 살린 차별화에 나서고 있다. 출판계는 국내 오디오북 시장 규모를 약 100억∼150억 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다음 달에 오디오북 시장 규모 추산치를 처음 집계해 발표할 예정이다. 밀리의 서재 녹음 프로그램은 현재까지 약 1만 건이 다운로드돼 약 400개의 개인 계정에 오디오북이 만들어졌다. 이 중 약 150개는 공개 신청이 된 상태. 운영사 검수를 통해 공개된 오디오북이 3분 이상 재생되면 낭독자 계정에 100원이 적립된다. 적립금이 5만 원을 넘으면 현금으로 받을 수 있다. 밀리의 서재는 이 서비스가 자사와 이용자들에게 새로운 수익 모델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마치 유튜브 플랫폼을 통해 유튜브와 유튜버가 광고 수익을 얻는 것처럼 말이다. 이와 함께 일반인 중 ‘스타 낭독자’를 만들겠다는 복안도 갖고 있다. 오디오북은 텍스트를 그대로 읽기도 하지만 낭독자에 따라 짧은 감상이나 작품 해설을 가미하기도 한다. 같은 책이라도 누가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 셈이다. 아직 서비스 초기 단계라 일반회원들이 제작할 수 있는 오디오북 종류가 한정적이라는 아쉬움은 있다. 전솜이 밀리의 서재 홍보매니저는 “전자책 시장이 그랬던 것처럼 오디오북 제작에 뛰어드는 출판사도 점점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완독형·낱권 구매 서비스도 강연 전문 출판사 인플루엔셜의 계열사인 ‘윌라’는 ‘완독형 오디오북’으로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첫 장부터 끝까지 모든 챕터를 완독하려는 독자들을 겨냥한 전략이다. 반면 밀리의 서재의 경우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려는 독자층을 타깃으로 해 주요 챕터만 발췌해 녹음하는 제작 방식이다. 윌라는 오디오북을 전문 성우가 낭독해 콘텐츠 질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윌라 관계자는 “지난 한 해 가입자 수가 3.2배 늘어 150만 명을 넘어섰다”며 “오디오 콘텐츠 전문이란 장점을 살려 단행본은 물론이고 ‘오디오 매거진’ 등으로 경계를 확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네이버 오디오클립은 낱권으로 오디오북을 구매하거나 대여할 수 있도록 해 진입 문턱을 낮췄다. 오디오북을 부정기적으로 조금씩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효율적일 수 있다. 반면 밀리의 서재와 윌라의 경우 한 달에 1만 원 안팎의 구독 비용을 내야 한다. 두 회사는 구독 시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책을 많이 이용하는 이들에게 적합한 방식이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몸이 갈라지며 흰색 촉수를 뻗는 괴물, 낯선 고대의 의식, 기괴한 흑마술…. 미국 작가 맷 러프(56)의 소설 ‘러브크래프트 컨트리’에선 공포 문학의 거장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1890∼1937)의 작품을 읽어본 이들에게는 익숙한 모티브가 펼쳐진다. 제목만 봐선 러브크래프트의 세계관을 그대로 답습했을 것 같지만,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자가 러브크래프트의 서사를 영리하게 비꼰 흔적이 보인다. 2016년 발표한 이 작품으로 저자는 이듬해 미국의 권위 있는 공상과학(SF) 문학상인 인데버상을 받았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이 최근 은행나무에서 출간됐다. 러프의 책이 한국에 소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저자는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러브크래프트의 도덕적 실패를 인정한다고 해서 그의 예술을 즐길 수 없는 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저자가 이 작품을 통해 비판한 건 인종차별이다. 러브크래프트는 ‘검둥이들의 탄생(On The Creation of Niggers)’이라는 제목의 시를 남길 정도로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가 심했다. 저자는 “1980년대 대학에 다닐 때 친하게 지낸 흑인 친구가 인종차별이 두려워 등산조차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여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러프는 책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한 ‘짐 크로(Jim crow) 법’의 시대를 통과한 1950년대 흑인들의 삶과 고통을 정교한 방식으로 조명한다. 흑인 주인공들은 눈앞의 괴물들과 싸우는 동시에 백인 남성 중심의 권력구조에도 저항한다. 저자는 “정확한 시대 묘사를 위해 1950년대 신문기사와 ‘선다운 타운스’ 등 미국 흑인을 다룬 역사책을 깊이 연구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저자는 소설에 등장하는 개별 인물들의 설정에도 인종차별 문제를 섬세하게 고증해 반영했다. 주인공 중 하나인 흑인 청년 애티커스는 6·25전쟁 참전용사로 등장한다. 저자는 “미국엔 흑인들이 전쟁에 나가 자신의 애국심을 증명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다”며 “국가로부터 차별받는 흑인들에게 더 강한 애국심이 강요되는 역설을 지적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특히 6·25전쟁을 마지막으로 흑인부대가 해체돼 상징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미국 HBO가 이 책을 원작으로 제작한 동명 드라마는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 최우수 TV 드라마 부문 후보에 올랐다. 저자는 “작품이 새로운 독자들에게 소개되는 건 언제나 즐거운 경험”이라며 “한국에도 드디어 작품을 알리게 돼 기쁘다”고 전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