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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목표는 대한민국 피구 ‘국대(국가대표)’입니다.” 피구 하면 학창 시절 가볍게 즐기던 게임을 떠올리기 십상. 하지만 이들을 얕잡아 봤다간 큰코다친다. 가벼운 예능이 아니라 국가대표라는 커다란 목표를 세우고 온몸을 던진다. 강철부대에서 혹독한 미션을 이겨냈던 그들이 이번엔 코트 위로 돌아왔다. 23일부터 매주 화요일 오후 9시 20분 방송하는 채널A 예능 프로그램 ‘강철볼-피구전쟁’은 기존 스포츠 예능과 결이 다르다. 실제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출연진도 허투루 임할 수 없다. 강철볼은 지난해와 올해 시즌 1·2로 큰 사랑을 받은 채널A ‘강철부대’의 스핀오프(외전). 강철부대 출연진 26명 가운데 엄선된 이들이 도전에 나섰다.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18일 만난 트로트 가수 박군(본명 박준우·36)과 전 국군정보사령부특임대(HID) 이동규 씨(28)는 “강철부대보다 더 힘들었다”고 고개를 저었다. 강철부대에서 인기를 모은 전 레슬링 선수 이주용 씨(28)와 해군해난구조전대(SSU) 출신 황충원 씨(33)도 서면 인터뷰에서 “연습 첫날부터 완전히 예상을 빗나갔다”고 입을 모았다. “피구를 어린애들 놀이로 생각했다간 큰일 나요. 민첩성과 순발력, 근력 등 체력적으로 모든 게 바탕이 돼야 하더라고요. 특히 연습 때 치른 서바이벌 미션은 강철부대 때보다 훨씬 긴장감이 높았어요.”(황충원 씨) 뭣보다 목표를 이루면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 수 있기에 출연진은 더욱 진지하게 임했다고 한다. 이주용 씨는 “레슬링 선수로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운동했지만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며 “종목은 다르지만 이번엔 꼭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아 한을 풀고 싶다”고 다짐했다. 이동규 씨도 “국가대표라는 게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영광이 아니지 않나. 정신적으로는 강철부대보다 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강철볼 촬영 첫날 연습장 한가운데에 대형 태극기가 펼쳐지던 순간은 모두가 뭉클했다고 한다. 출연진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박군은 “태극기를 보자마자 프로그램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졌다”고 털어놨다. “솔직히 촬영 전까진 어떻게 해서든 게임에서 이기고 싶다는 승부욕이 앞섰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 그게 아니구나’ 싶었어요. 개인적인 욕심보다 태극마크에 어울리는 선수와 팀이 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거죠. 저뿐만 아니라 다들 그랬어요. 이 역시 또 다른 경쟁이겠지만, 하나로 뭉쳐서 모두가 강해지길 원했습니다. 지금도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주며 원팀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강철볼은 국가대표 출신들이 코칭스태프로 팀을 이끈다.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골키퍼였던 김병지 축구해설가가 감독을 맡았다. 1998년 태국 방콕 아시아경기 핸드볼 금메달리스트인 최현호 전 KBS 해설위원도 코치로 힘을 보탰다. 이동규 씨는 “레전드 국가대표들이 팀을 이끈 덕분에 군대 마인드가 국대 마인드로 바뀌었다”며 웃었다. “하나를 배워도 열 개를 분석해 적극적으로 내 것으로 만드는 마음가짐이 국대 마인드가 아닐까요. 태극기 앞에서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짜 국대가 돼서 다시 뵐게요.”(이동규 씨)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우리의 목표는 대한민국 피구 국가대표입니다.” 피구를 학창시절 친구들과 즐겼던 ‘놀이’라고 얕잡아봤다가는 큰 코 다친다. 국가대표라는 목표가 세워진 순간 피구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그야말로 전쟁이다. 23일부터 매주 화요일 오후 9시 20분 방송하는 채널A 예능프로그램 ‘강철볼-피구전쟁’은 다른 스포츠예능에서 선보인 적 없던 더 높은 목표를 꿈꾼다. 바로 국가대표다. ‘강철볼’은 지난해와 올해 큰 인기를 끌었던 채널A ‘강철부대’ 시즌 1, 2 출연진 26명 가운데 일부가 피구 국가대표 선발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엄정한 선발 과정을 거친 최정예 국가대표팀이 국제대회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외국 국가대표팀과 맞붙는 만큼 출연진들의 각오는 남다르다. 지난달부터 본격적으로 피구 국가대표 선발 훈련에 참가한 박준우(트로트 가수 박군·36) 이동규 씨(28)를 18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이주용(28) 황충원 씨(33)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던 훈련 상황을 서면으로 전해줬다. 제작진과 첫 만남에서 “피구는 어린애들 놀이”라며 만만히 여겼던 출연진들. 하지만 지난달 진행한 훈련 첫 날부터 예상은 빗나갔다. “혹독했던 ‘강철부대’ 미션보다 ‘강철볼…’ 훈련 과정이 더 힘들었다”고 입을 모았다. 강철부대 시즌2에서 압도적인 미션 수행 능력을 보여줬던 국군정보사령부특임대(HID) 출신 이동규 씨는 “태극마크라는 목표 때문에 강철부대 촬영 때보다 정신적으로 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강철부대 시즌1에 출연했던 해군 해난구조전대(SSU) 출신 황 씨 역시 “피구는 민첩성과 순발력, 힘 모든 능력을 요하는 운동”이라며 “훈련 과정에서 주어지는 서바이벌 미션은 강철부대 그 이상의 긴장감을 갖고 임했다”고 전했다. ‘강철볼’은 출연진들에게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또 다른 도전이기도 하다. 전직 레슬링 선수 이주용 씨는 “한때 레슬링 선수로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 정말 열심히 운동했지만 결국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꼭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누군가 간절히 원하는 꿈이란 걸 알기에 출연진들은 태극기 앞에서 마음가짐을 바로잡았다. 강철부대 시즌 1, 2에 모두 출연한 박 씨는 지난달 진행한 훈련 첫날 운동장 한가운데 대형 태극기가 펼쳐지는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태극기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게임에서 이겨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태극기를 보자마자 마음을 고쳐먹었죠. 개인적인 욕심보다 태극마크에 걸맞은 선수와 팀이 되기 위해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하자고요.” 출연진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박 씨는 팀 리더로 솔선수범하고 있다. 재빨리 훈련 동작을 익혀 다른 팀원들에게 먼저 다가가 자세를 바로 잡아준다. 그는 “출연진들과 경쟁하고 있지만 우리는 개인보다 더 강한 하나의 팀을 원한다.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주며 하나의 팀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국가대표 출신들이 코칭스태프로 팀을 이끌며 경기력의 완성도를 높였다.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골키퍼였던 김병지 축구해설가가 감독으로, 1998년 태국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 핸드볼 레전드 최현호 해설가 코치를 맡았다. 이동규 씨는 “레전드 국가대표 두 분이 팀을 이끈 덕분에 ‘군대 마인드’였던 우리가 ‘국대(국가대표) 마인드’로 바뀌었다”며 웃었다. “시키는 것을 잘 해내는 게 ‘군대 마인드’였다면 하나를 배워도 10가지를 분석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자세가 ‘국대 마인드’예요. 태극기 앞에서 섰을 때 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국가대표에 도전하겠습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7세기 후반 러시아에는 ‘수염세’라는 게 있었다. 표트르 황제(1672∼1725)는 러시아의 이미지를 말끔하게 정돈한다는 명분 아래 전국 귀족들에게 ‘수염 면도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는 무용지물. 귀족들은 반드시 수염을 지키겠다며 반발했다. 콧대 높은 귀족을 꺾을 묘수는 없을까. 고민 끝에 황제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수염을 기르는 귀족에게 해마다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역시 결과는 세금의 승리였다. 귀족들은 목숨보다 귀하다던 수염을 깎기 시작했다. 수염에 세금을 매긴다는 발상이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지탱하는 핵심 원리는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국제통화기금(IMF) 공공재정국 부국장과 미국 미시간대 경제학과 교수인 저자들이 볼 때 온실가스 배출원에 세금을 부과하는 ‘탄소세’도 수염세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쉽게 말해 “탄소 있으면 세금을 내야 한다”와 “수염 있으면 세금을 내야 한다”는 부과 원칙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특정 행위를 저지하는 데 세금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제목처럼 세금을 다룬 책이지만 어지러운 계산과 수치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기원전 2500년 수메르 점토판에 새겨진 세금 납부 영수증부터 오늘날까지 과세제도의 변천사를 재미있게 풀어냈다. 저자들은 세계사를 바꾼 결정적 순간들이 세금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고 설명한다. 미 독립전쟁을 촉발시킨 ‘보스턴 차 사건’이 세금과 직결됐다는 건 많이 알려진 사실. 그런데 이는 과도한 세금을 물려서가 아니라 오히려 세금을 철폐해 문제가 불거졌다. 18세기 영국은 식민지를 넓히며 막대한 빚을 짊어졌는데, 동인도회사가 미 대륙에 수출하는 차 판매량이 늘어야 이를 상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밀수업이 성행했던 미국에선 세금을 물린 동인도회사 차는 경쟁력이 떨어졌다. 이에 영국이 자국 차에 과세를 철폐하자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된 밀수업자들과 영국의 지배에 반발하던 지식인을 중심으로 미국인의 분노를 샀다. 19세기 초 인도에는 ‘가슴세’가 있었다. 하층민 여성들이 집 밖에 나설 때 가슴을 가리면 세금을 내야 했다. 가슴을 가리는 건 상류 계급 여성의 특권이란 어이없는 이유를 내세웠다. 1840년 낭겔리란 여성은 스스로 가슴을 자르고 이에 저항했다. 그는 그날 목숨을 잃었지만, 이때 촉발된 저항이 거세지며 가슴세는 폐지됐다. 저자들은 ‘좋은 세금’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누구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일지는 당대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엇갈릴 수밖에 없다. 애초에 모두를 만족시킬 좋은 세금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단 얘기다. 이 때문에 좋은 세금을 만드는 해법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지닌 시민들을 설득하는 과정에 있다”고 강조한다. 1986년 미국 의회가 전반적인 세율은 낮추되 세원을 넓히는 세제개혁법(TRA86)을 통과시킨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공화당과 민주당은 당파를 넘나든 활발한 토론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뤄냈다. 이를 통해 세수 부족 문제를 해결했다. 시간이 걸려도 충분한 합의 과정을 거친 정책만이 조세 저항을 줄일 해법이라고 저자들은 강조한다. 책에는 세금의 미래도 담겨 있다. 가까운 미래에 소득세는 구시대 유물이 될 거라고 내다봤다. 인공지능(AI)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노동이 사라지면 소득세도 없어질 것이란 예측이다. 이 밖에 부가가치세나 법인세, 탄소세 등도 다양한 모습으로 바뀔 것이라 전망한다. 동의하느냐를 떠나 세금의 변화가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하면 사뭇 흥미롭다. 다양한 세금 제도의 변천사를 훑다 보면, 먼 훗날 이 시대의 세금을 어떻게 바라볼지도 궁금해진다. 표트르 황제의 수염세처럼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않아야 할 텐데…. 저자들의 조언대로 무조건 밀어붙이기보다는 충분한 합의가 전제돼야만 현 시대를 사는 이도 미래의 후손들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지금까지 문헌으로도 알려진 적 없던 지구본 모양의 조선시대 휴대용 해시계가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18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19세기 조선에서 제작한 해시계 ‘일영원구(日影圓球)’를 미국에서 환수했다”며 실물을 최초로 공개했다. 지금까지 해시계는 일반적으로 친숙한 솥 모양의 앙부일구(仰釜日晷)만 10여 점이 전해졌는데, 완전한 구형(球形)을 갖춘 해시계가 발견된 건 처음이다. 높이 23.8cm인 일영원구는 십자형 받침대 위에 지구본처럼 원구가 올려진 형태를 띠고 있다. 동으로 만든 지름 11.2cm의 구체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12지(支) 명문과 세로선 96칸이 표시돼 있다. 조선시대는 하루를 12시 96각(刻·15분)으로 계산했다. 일영원구는 시반(時盤·바닥)과 영침(影針·그림자를 만드는 막대)이 고정된 앙부일구와 달리, 해의 움직임에 따라 지구본을 돌리듯 구체를 회전시켜 시간을 맞춘다. ‘T’자처럼 생긴 바늘의 그림자가 생기게 한 다음, 구체에 파인 일직선 홈으로 그림자가 들어가게 기준점을 맞추면 현재 시간을 알 수 있는 방식이다. 앙부일구가 설치 장소에서만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반면, 일영원구는 언제 어디서라도 해만 떠 있으면 시간 측정이 가능하다. 위도도 상관없다. 이용삼 충북대 명예교수(천문우주학과)는 “12지라는 조선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위도를 조절할 수 있는 장치를 뒀다. 조선 후기 과학의 진일보를 보여주는 유물”이라며 놀라워했다. 제작자와 제작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점도 가치를 드높인다. 원구 한쪽에 ‘대조선 개국 499년 경인년 7월 상순에 새로 제작했다’는 글과 함께 ‘상직현 인(尙稷鉉 印)’이란 낙관이 새겨져 있다. 1890년 상직현이라는 인물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문화재청 등에 따르면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에는 상직현이 총어영(摠禦營) 별장(別將)과 별군직(別軍職)에 임명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임금의 호위와 궁궐이나 도성 방어를 담당하는 무관을 일컫는다. 또 상직현은 1880년 수신사(修信使) 일행으로 일본을 방문했으며, 아들 상운(尙澐)은 청나라에서 최초로 전화기를 들여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영원구는 1940년대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 장교를 거쳐 미국의 개인 소장가가 매입해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문화재청과 재단이 낙찰받았다. 일영원구는 19일부터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환수문화재 특별전에 전시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문화재청이 세계 최대 규모의 고인돌로 알려진 경남 김해시 구산동 지석묘(고인돌)를 정비 복원하는 과정에서 유적지를 훼손한 혐의로 홍태용 김해시장을 17일 경찰에 고발했다. 문화재청은 김해시가 지석묘 정비 복원 공사를 하며 당대 문화 양상을 알려주는 지층(문화층)을 훼손했다는 민원이 지난달 29일 제기돼 긴급 조사에 나섰다. 그 결과 상석(上石) 주변부 문화층 20cm가량이 유실되고 유적지 내에 저수조를 설치하려고 무리하게 굴착공사를 벌이다가 문화층 대부분이 파괴된 정황을 확인했다. 구산동 지석묘는 청동기 말부터 철기시대 무렵 무덤 형태를 보여주는 가야 유적지로, 바닥에 깔린 박석 면적이 1615m²에 달해 세계 최대 규모의 고인돌로 평가받는다. 김해시는 2020년 12월 지석묘에 대한 국가사적 지정을 추진하며 복원 정비에 나섰고 최근까지 공사를 했다. 김해시는 “경찰 조사에 성실히 응하겠다”고 밝혔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김해=최창환 기자 oldbay77@donga.com}

문화재청이 세계 최대 규모 고인돌로 알려진 경남 김해시 구산동 지석묘(고인돌)를 정비 복원하는 과정에서 유적지를 훼손한 혐의로 홍태용 김해시장을 17일 경찰에 고발했다. 문화재청은 김해시가 지석묘 정비 복원 공사를 하며 당대 문화 양상을 알려주는 지층(문화층)을 훼손했다는 민원이 지난달 29일 제기돼 긴급 조사에 나섰다. 그 결과 상석(上石) 주변부 문화층 20㎝ 가량이 유실되고 유적지 내에 저수조를 설치하려고 무리하게 굴착공사를 벌이다 문화층 대부분이 파괴된 정황을 확인했다. 구산동 지석묘는 청동기 말부터 철기시대 무렵 무덤 형태를 보여주는 가야 유적지로, 바닥에 깔린 박석 면적이 1615㎡에 달해 세계 최대 규모 고인돌로 평가받는다. 김해시는 2020년 12월 지석묘에 대한 국가사적 지정을 추진하며 복원 정비사업에 나섰다. 시·도지정문화재인 구산동 지석묘는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정비사업을 할 때 경남도지사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경남도는 정비사업에 대한 사실 관계 확인에 나섰다. 김해시는 “경찰 조사에 성실히 응하겠다”고 밝혔다. 허가 없이 매장문화재를 무단으로 발굴하면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김해=최창환 기자 oldbay77@donga.com}

다음 달 1일부터 경복궁 등 4대 궁궐에서 별도 허가를 안 받아도 예비부부를 포함해 3명까지 웨딩 촬영을 할 수 있다. 문화재청은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에서 소규모 웨딩 촬영이 가능하도록 ‘궁·능 관람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 다음 달 1일부터 시행한다고 16일 밝혔다. 기존에는 덕수궁과 창경궁에서만 웨딩 촬영을 할 수 있었고, 촬영 전 담당 기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다만 일반 시민이 궁궐을 관람하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웨딩 촬영 시 카메라는 최대 2대, 촬영 인원은 1명으로 제한했다. 이에 따라 예비부부를 포함하면 3명까지 촬영이 가능하다. 촬영 인원이 2명이거나 카메라가 3대 이상이면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올해 1∼4월 웨딩 촬영 허가 신청 건수는 덕수궁 266건, 창경궁 254건이었다. 문화재청은 “궁궐이 웨딩 촬영 장소로 각광받고 있어 보다 수월하게 촬영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2008년 화재로 소실됐던 국보 ‘숭례문’을 새로 지으며 값싼 화학안료 등을 사용한 홍찬원 전 단청장과 제자 한모 씨가 손해배상금 약 14억 원을 물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9부(부장판사 이민수)는 정부가 홍 전 단청장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공동으로 9억4550만 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10일 선고했다. 판결이 확정되면 이들은 공사가 끝난 2013년 2월부터 연 5% 지연손해금을 더해 약 14억 원을 내야 한다. 2017년 정부는 홍 전 단청장 등이 계약을 어기고 천연안료가 아닌 값싼 화학안료와 접착제를 사용해 피해를 끼쳤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숭례문은 복구한 지 약 3개월 만에 단청이 벗겨져 11억8000여만 원을 추가로 들여 재시공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최근 중국 웹소설 작가들이 한국 인기 웹소설의 표지 삽화를 제목만 바꿔치기해 무단으로 도용하는 실태가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다. 웹소설 업계는 현재 최소 수백 개의 표지 삽화가 중국 웹소설 플랫폼에서 불법 도용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 웹소설 플랫폼 두웨싱쿵(讀樂星空)에 올라온 웹소설 ‘섭정왕의 마음을 읽다(讀心后發現攝政王過分悶騷)’의 표지는 네이버웹소설에 연재 중인 한국 웹소설 ‘동백꽃 스며들어, 눈’의 삽화를 불법 도용해 만들었다. 제목만 다를 뿐 황제가 황후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은 물론이고 구도와 색감이 정확히 일치한다. 해당 삽화는 국내 웹소설 일러스트레이터 이랑이 직접 그려 저작권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 웹소설 작가가 상업적 이용 허가를 구하지 않은 채 불법적으로 표지 삽화를 베껴 쓴 사례다. 이뿐만이 아니다. 또 다른 중국 웹소설 플랫폼 A1웨두왕(A1閱讀網)에 올라온 웹소설 ‘환생한 아내가 유혹한다(重生后薄少的小甛妻太會(료,요))’의 표지 삽화는 카카오페이지에 연재 중인 국내 웹소설 ‘격렬한 청혼’을 그대로 베꼈다. A1웨두왕에 게재된 ‘악역 여주인공이 집착한다(我成了反派女主的追求對象)’의 표지 역시 2018년부터 1년여간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돼 미국 일본 등에 수출됐던 ‘악녀는 두 번 산다’의 삽화와 일치한다. 지난해 기준 중국 웹소설 시장 규모는 약 5조 원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내 저작권 및 저작권료 지불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보니 한국 웹소설 표지 삽화에 대해 상업적 이용 허가를 받거나 저작권료를 전혀 지불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베껴 쓰고 있다. 이융희 세종사이버대 만화웹툰창작과 겸임교수는 “작가나 소규모 제작사에서 대응할 게 아니라 플랫폼 기업들이 공동 대응해 국내 웹소설 창작 생태계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의 한국 콘텐츠 불법 도용 사례가 늘면서 카카오엔터테인먼트는 지난해 중화권 등에서 불법 번역된 웹툰 콘텐츠를 감시하는 ‘글로벌 불법 유통 대응 태스크포스(TF)’를 발족했다. 지난해 11월부터 5개월간 영어 및 중국어권 내 불법 유통된 번역 웹툰 224만7664건을 적발하고 이 가운데 11만1889건을 차단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은 15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 자유와 인권, 법치가 존중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독립운동의 개념을 ‘항일’보다는 ‘자유 추구’에 방점을 찍어 재해석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77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3·1독립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장, 매헌 윤봉길 선생의 독립정신을 먼저 언급한 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이같이 규정했다. 그러면서 “자유와 인권이 무시되는 전체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은 결코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과거 독립운동은 자유와 인권, 법치라는 보편적 가치를 되찾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기원을 1919년 세워진 임시정부로까지 넓게 보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한 대한민국이 ‘역사의 적통’임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간 진보 진영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보수 진영은 194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1공화국 수립을 각각 건국의 기점으로 여겨 왔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진영 간 소모적인 싸움을 해 온 ‘건국절 논란’을 뛰어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여정’으로 이해했다. 이 같은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의 범주를 일제강점기 항일 무장투쟁뿐만 아니라 독립을 위한 토양을 구축한 자강(自强) 활동, 6·25전쟁 참전 등의 호국 활동, 1960∼70년대 산업화까지로 확대했다. 윤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할 민족 역량을 키워내기 위해 교육과 문화 사업에 매진하신 분들, 공산 침략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신 분들, 진정한 자유의 경제적 토대를 만들기 위해 땀 흘리신 산업의 역군과 지도자들, 제도적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희생과 헌신을 해오신 분들이 자유와 번영의 대한민국을 만든 위대한 독립운동가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경축사에서 ‘자유’를 33회 언급했고 이어 독립(18회), 평화(9회), 경제(8회), 번영(8회) 등의 용어를 자주 썼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경축사 독회 당시 신흥무관학교를 지원한 이회영 일가, 교육·문화운동을 펼친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김성수 선생 등을 말하면서 ‘국민들은 역사를 배워서 이름을 열거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날 경축사를 놓고 전문가들은 새로운 역사 해석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윤 대통령은 특정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일제에 저항한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에서 독립운동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바라보자는 뜻”이라고 말했다.홍수영 기자 gaea@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은 15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 자유와 인권, 법치가 존중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독립운동의 개념을 ‘항일’보다는 ‘자유 추구’에 방점을 찍어 재해석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77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3·1독립선언과 상하이 임시정부 헌장, 매헌 윤봉길 선생의 독립정신을 먼저 언급한 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이같이 규정했다. 그러면서 “자유와 인권이 무시되는 전체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은 결코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과거 독립운동은 자유와 인권, 법치라는 보편적 가치를 되찾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기원을 1919년 세워진 임시정부로까지 넓게 보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한 대한민국이 ‘역사의 적통’임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간 진보 진영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보수 진영은 194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1공화국 수립을 각각 건국의 기점으로 여겨 왔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진영 간 소모적인 싸움을 해 온 ‘건국절 논란’을 뛰어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여정’으로 이해했다. 이 같은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의 범주를 일제강점기 항일 무장투쟁뿐 아니라 독립을 위한 토양을 구축한 자강(自强) 활동, 6·25전쟁 참전 등의 호국 활동, 1960~70년대 산업화까지로 확대했다. 윤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할 민족 역량을 키워내기 위해 교육과 문화 사업에 매진하신 분들, 공산 침략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신 분들, 진정한 자유의 경제적 토대를 만들기 위해 땀 흘리신 산업의 역군과 지도자들, 제도적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희생과 헌신을 해오신 분들이 자유와 번영의 대한민국을 만든 위대한 독립운동가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경축사에서 ‘자유’를 33회 언급했고 이어 독립(18회), 평화(9회), 경제(8회), 번영(8회) 등의 용어를 자주 썼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경축사 독회 당시 신흥무관학교를 지원한 이회영 일가, 교육·문화운동을 펼친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김성수 선생 등을 말하면서 ‘국민들은 역사를 배워서 이름을 열거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날 경축사를 놓고 전문가들은 새로운 역사 해석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윤 대통령은 특정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일제에 저항한 역사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에서 독립운동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바라보자는 뜻”이라고 말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진심성의 건국완성(眞心誠意 建國完成·온 마음을 다해 건국을 이뤄내자).”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1881∼1950)이 1945년 8·15 광복 직후에 남긴 친필 유묵에는 당시 새로운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 고난의 일제강점기를 이겨낸 독립지사들에게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는 ‘건국’은 진정한 독립을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김구 신익희 안창호 이시영 조소앙….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긴 독립운동가 21인이 직접 쓴 글 24점을 담은 친필유묵집 ‘독립정신(獨立精神)’이 8일 처음 공개됐다. 독립기념관은 “광복 77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화사 이관구 선생(1885∼1953)이 친필유묵들을 엮은 책 ‘독립정신’을 최근 후손에게서 위탁받았다”고 밝혔다. 이관구 선생은 항일운동단체 광복회에서 군 자금을 모으고 밀정 처단 업무를 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이 선생은 광복 직후부터 1946년까지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김구(1876∼1949)와 조소앙 선생(1887∼1958) 등에게서 직접 친필유묵을 받아 책으로 엮었다. 올해 6월 21일 이 선생의 후손이 이를 독립기념관에 위탁해 세상에 존재가 알려졌다. 해당 사료에는 광복 직후 독립지사들의 숭고한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다. 김구 선생은 ‘事莫大於合心(사막대어합심·마음을 합치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없다)’이라고 썼다. 광복 직후 남과 북으로 갈린 혼탁한 정국을 보며 민족의 단결을 호소했던 백범의 심경이 그대로 담겼다. 임시정부 내무차장을 지낸 신익희 선생(1894∼1956)이 1946년 6월 21일 쓴 ‘獨立尙未成功 吾等仍須努力(독립상미성공 오등잉수노력·사진)’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독립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으니 우리는 더욱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간절한 호소가 실렸다. 독립지사들은 새로운 조국에 대한 큰 기대도 내비쳤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1869∼1953)은 ‘성력소지 대업필성(誠力所至 大業必成)’이라는 글귀를 남겼다. 1946년 직접 쓴 이 문장은 “정성과 힘을 다하면 대업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희망이 배어 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조소앙 선생은 1934년 임정 건국강령 초안에도 쓴 문장을 다시 되새겼다. ‘首尾均平位 興邦保太平(수미균평위 흥방보태평).’ “머리와 꼬리가 균평하게 자리 잡으면 나라가 흥하고 태평이 유지되리라”라는 뜻으로 조 선생이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주창했던 ‘삼균주의’의 토대를 뜻한다. ‘독립정신’은 독특한 점이 눈에 띈다. 속표지에 ‘건국정신(建國精神)’이란 부제가 따로 적혀 있다. 정욱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위원은 “독립지사들이 남긴 친필 유묵에는 진정한 통일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독립운동의 완성이라고 여겼던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국가는 주권이 없어졌고 인간은 평등을 상실하여 모든 교섭은 치욕이 망극하다. 어찌 피 끓는 자가 참을 수 있는 일인가.” 1905년 5월 12일 영국 런던 주영 대한제국공사관. 당시 영국 주재 외교관이었던 이한응 열사(1874∼1905)는 국권이 상실돼가는 상황에 비통함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남긴 유서는 국내에도 알려지며 이후 항일운동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이 열사가 떠난 지 117년. 그가 순국한 주영 대한제국공사관은 현재 36가구가 거주하는 공공임대아파트로 바뀌었다. 런던 켄싱턴구 얼스코트 트레보버 4번지에 있는 이 건물은 별다른 안내석도 없다. 공사관은커녕 이 열사의 순국 현장이란 사실조차 알 수 없다. 대한제국이 나라를 대표해 외국에 설치했던 해외 공관 6곳의 현재 실태가 모두 확인됐다. 2012년 매입한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등 일부는 일반에 소개된 적이 있지만 전체 공사관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려진 건 처음이다.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1887년 주일 공사관을 시작으로 미국과 영국, 러시아, 프랑스, 청나라(중국)에 설치된 공사관 실태를 파악한 결과 6곳 가운데 3곳이 안내석도 없는 상태이며 한 곳은 건물이 아예 철거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8일 밝혔다. 재단 내부 보고서 ‘재외공관 건축물의 문화재적 가치 검토’에 따르면 복원공사를 거쳐 2018년 재개관한 미국 워싱턴 소재 주미 공사관에 안내석이 세워졌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프랑스 파리에 있던 공사관에도 안내석은 있지만 주러 공사관은 현재 민간아파트로, 주불 공사관은 연립주택으로 각각 바뀌었다. 일본 도쿄 도심에 있었던 주일 대한제국공사관은 해외 공관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당시 어디에 자리 잡았는지 특정 짓지 못하고 있다. 최근 일본 국회도서관 등에서 공사관의 옛 지명주소와 당시 사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긴 했으나 별다른 후속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재단 관계자는 “공사관이 여러 차례 이동했고 해당 건물이 철거됐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명확하게 확인된 건 아니다”라며 “여러 사료를 통해 추적이 가능한 만큼 기초 고증 연구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주청 대한제국공사관도 열악한 사정은 엇비슷하다. 1903년 중국 베이징 둥자오민샹(東交民巷) 거리에 설치돼 1905년까지 운영했던 주청 공사관은 1915년 건물 자체가 헐렸다. 현재는 3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이 지어졌고 은행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주청 공사관이었음을 알리는 안내석도 없고 후속 연구도 미진하다. 그나마 최근 외교부에서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아 관련 연구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학계에서는 대한제국공사관이 가진 역사적 가치가 큰 만큼 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김종헌 배재대 건축학과 교수는 “대한제국공사관은 세계 열강에 우리의 주권을 드러낸 첫 시도라는 의미가 있다”며 “이런 공간에 안내석조차 설치돼 있지 않다는 건 대한제국 외교사에 대한 기초 연구가 미진한 탓”이라고 지적했다. 재단 보고서에서는 당시 공사관들이 불리한 국제 정세에도 고군분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기며 공사 6곳이 모두 폐쇄될 때까지 대한제국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애썼다. 사료에 따르면 공사 건물의 옥상에는 국기게양대를 만들어 태극기를 게양했으며, 입구 정문에도 태극기 문양을 새겼다고 한다. 공사관 내부에도 태극기를 달고 전통 공예품을 설치해 한국 문화를 알리려 노력했다. 윤소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은 “대한제국공사관에는 망국의 위기에도 주권을 지키려 분투한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가 서려 있다. 세계 곳곳에 남아 있는 그 흔적을 우리가 지키고 기려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세계를 휩쓴 2020년은 비정규직 근로자를 비롯해 평범한 직장인에게는 최악의 한 해였다. 미국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100만 명에 육박했던 2020년 4월 초엔 7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실업수당을 신청했다는 고용지표가 발표됐다. 전형적인 불경기 때라도 2∼3년에 걸쳐야 나올 만한 실직자 규모다. 반면 미 월스트리트에서 헤지펀드 트레이더로 일하는 저자에게는 최고의 시절이었다. 저자는 “지금이야말로 트레이더로서 주어진 룰을 최대한 이용해 큰돈을 만질 수 있는 순간”이라고 자백한다. 이 책은 시타델과 숀펠드 등 세계적인 헤지펀드 회사에서 2000년부터 일한 저자가 2019년 10월부터 2020년 6월까지 쓴 일기를 재구성했다. 경제 불황에 직면한 각국 정부가 초저금리로 양적완화를 하는 임시방편을 내놓은 결과 한꺼번에 풀린 돈이 주식 시장으로 몰렸다. “돈이 복사된다”는 말이 유행하던 시기. 저자의 일기에는 내부자 시선으로 본 날카롭고 솔직한 분석이 담겼다. 저자는 빚으로 쌓아올린 주식 호황기에 가장 큰 이득을 본 이들에 속한다. 실제 그는 2020년 가장 좋은 실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는 시장을 낙관적으로 전망하거나 정부 정책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는 “세계적으로 50조 달러의 적자가 날 것 같다. 부채 거품을 더 키워나가는 꼴”이라며 양적완화 정책을 비판한다. 정부가 금리를 인하해 많은 사람들이 대출을 받고, 더 많은 기업이 빚으로 빚을 막는 상황도 마찬가지. “지금 같은 경기에서 은행의 실적 보고를 듣는 건 마치 자동차 사고를 목격하는 것 같다. 결국 사고가 날 것을 알면서도 최대한 속도를 줄이면서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을 보고만 있는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저자의 일터는 당시 호황의 최전선이자 불황의 최전선이기도 했다. 호황으로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지만, 언젠가는 이 거품이 꺼질 거라는 걸 모두가 예감했기 때문이다. 대폭락이라는 운명의 날이 다가올수록 저자 주변에는 정리해고자가 늘어났다. 저자는 2020년 4월 5일 함께 일하던 직장 동료에게 직접 해고 통보를 하기도 한다. 마치 상대의 사정은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우리 이제 각자의 길을 가자”고 말하던 스스로에 대해 “나는 그냥 로봇이고 명령을 실행할 뿐”이라고 되뇐다. 감정 없는 로봇처럼 미 경제를 진단한 저자는 매우 냉소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독자를 기만하진 않는다. 저자는 ‘최악은 지났다’는 헤드라인을 뽑으며 경제를 낙관하던 미 언론에 대해서도 “그들이 틀렸다. 새로운 부익부 빈익빈 시대에 진입했다”고 반박한다. 결과론적이지만 저자의 진단은 맞았다. 빚으로 쌓아올린 거품이 꺼지고 있다. 그게 미국뿐인가. 초저금리 시대에 ‘빚투(빚내 투자)’에 나섰던 개미들은 주식시장이 차갑게 식으면서 막대한 빚을 떠안고 있다. 책에는 부를 창출할 비법 같은 건 마지막까지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현실에서 들려오는 각종 마이너스 경제 지표는 저자의 예측을 뒷받침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여전히 잘나가는 헤지펀드 트레이더. 끝을 알 수 없는 불황에도 여전히 어디선가 VIP 고객과 샴페인 파티라도 벌이고 있을지 모른다. 냉정한 선구안을 전달하지만 읽은 뒤 밀려오는 씁쓸함을 피하기 어렵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세계를 휩쓴 2020년은 비정규직 근로자를 비롯해 평범한 직장인에게는 최악의 한 해였다. 미국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100만 명에 육박했던 2020년 4월 초엔 7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실업수당을 신청했다는 고용지표가 발표됐다. 전형적인 불경기 때라도 2~3년에 걸쳐야 나올만한 실직자 규모다. 반면 미 월스트리트에서 헤지펀드 트레이더로 일하는 저자에게는 최고의 시절이었다. 저자는 “지금이야말로 트레이더로서 주어진 룰을 최대한 이용해 큰돈을 만질 수 있는 순간”이라고 자백한다. 이 책은 시타델과 숀펠드 등 세계적인 헤지펀드 회사에서 2000년부터 일한 저자가 2019년 10월부터 2020년 6월까지 쓴 일기를 재구성했다. 경제 불황에 직면한 각국 정부가 초저금리로 양적완화를 하는 임시방편을 내놓은 결과, 한꺼번에 풀린 돈이 주식 시장으로 몰렸다. “돈이 복사 된다”는 말이 유행하던 시기. 저자의 일기에는 내부자 시선으로 본 날카롭고 솔직한 분석이 담겼다. 저자는 빚으로 쌓아올린 주식 호황기에 가장 큰 이득을 본 이들에 속한다. 실제 그는 2020년 가장 좋은 실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는 시장을 낙관적으로 전망하거나 정부 정책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는 “세계적으로 50조 달러의 적자가 날 것 같다. 부채 거품을 더 키워나가는 꼴”이라며 양적완화 정책을 비판한다. 정부가 금리를 인하해 많은 사람들이 대출을 받고, 더 많은 기업이 빚으로 빚을 막는 상황도 마찬가지. “지금 같은 경기에서 은행의 실적보고를 듣는 건 마치 자동차 사고를 목격하는 것 같다. 결국 사고가 날 것을 알면서도 최대한 속도를 줄이면서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을 보고만 있는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저자의 일터는 당시 호황의 최전선이자 불황의 최전선이기도 했다. 호황으로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지만, 언젠가는 이 거품이 꺼질 거라는 걸 모두가 예감했기 때문이다. 대폭락이라는 운명의 날이 다가올수록 저자 주변에는 정리해고자가 늘어났다. 저자는 2020년 4월 5일 함께 일하던 직장 동료에게 직접 해고 통보를 하기도 한다. 마치 상대의 사정은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우리 이제 각자의 길을 가자”고 말하던 스스로에 대해 “나는 그냥 로봇이고 명령을 실행할 뿐”이라고 되뇐다. 감정 없는 로봇처럼 미 경제를 진단한 저자는 매우 냉소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독자를 기만하진 않는다. 저자는 ‘최악은 지났다’는 헤드라인을 뽑으며 경제를 낙관하던 미 언론에 대해서도 “그들이 틀렸다. 새로운 부익부 빈익빈 시대에 진입했다”고 반박한다. 결과론적이지만 저자의 진단은 맞았다. 빚으로 쌓아올린 거품이 꺼지고 있다. 그게 미국뿐인가. 초저금리 시대에 ‘빚투(빚내 투자)’에 나섰던 개미들은 주식시장이 차갑게 식으면서 막대한 빚을 떠안고 있다. 책에는 부를 창출할 비법 같은 건 마지막까지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현실에서 들려오는 각종 마이너스 경제 지표는 저자의 예측을 뒷받침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여전히 잘 나가는 헤지펀드 트레이더. 끝을 알 수 없는 불황에도 여전히 어디선가 VIP고객과 샴페인 파티라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냉정한 선구안을 전달하지만 읽은 뒤 밀려오는 씁쓸함을 피하기 어렵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서서히 중앙 깃대를 올라가는 일장기, 그리고 귓속을 파고드는 기미가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일본을 위해 뛴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위해, 고통받는 조선 동포를 위해 뛴 것이다.” 스무네 살 청년은 나는 듯이 달렸다.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스타디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세계 27개국 선수 55명 가운데 깡마른 동양 선수가 제일 먼저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2시간29분19초2. 당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운 엄청난 질주에 10만 관중은 함성을 내질렀다.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야 할 순간. 하지만 청년은 월계관에 금메달까지 받고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슴을 짓누르는 일장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마라토너 고 손기정 선생(1912∼2002). 그의 탄생 110주년을 맞아 9일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휴머니스트)이 다시 출간된다. 1983년 처음 나온 뒤 절판됐다가 2012년 모교인 서울 양정고 동문회에서 재출간한 지 10년 만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손 선생에게 달리기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운동이야말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남은 마지막 숨통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몸으로 뛰고 달리는 운동마저 막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일본 국적으로 세계대회에 나갔을 때도 언제나 팬들에게 한글로 사인을 건네며 자신의 국적은 ‘코리아’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자서전에는 선생이 1976년 동아일보에 직접 쓴 칼럼 23편이 모두 실렸고, 이후 쓴 글도 담겼다. 그와 동아일보의 인연은 특별하다.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25일 선생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게재했다가 이듬해 6월까지 정간 처분을 받았다. 선생이 마라톤 우승 기념으로 받아야 했던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가 독일에 있다는 사실을 보도한 것도 동아일보였다. 당시 그리스 정부가 선생에게 투구를 선물하기로 했지만 일제가 이를 알리지 않았던 것. 1986년 투구를 되찾은 선생은 “이 투구는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해 1987년 보물로 지정됐다. 자서전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폐회식으로 끝을 맺는다. 선생은 4년 뒤 열리는 서울 올림픽을 소개할 대표자로 무대에 올랐을 때를 평생 잊지 못했다. “손기정, 코리아”라는 소개에 “이날이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비로소 나의 길고 긴 싸움은 끝났다”라며 감격했다. 재출간된 책에는 선생의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55)의 글이 새로 실렸다. 선생이 별세하기 전까지를 회고 형식으로 정리했다. 선생은 마지막까지도 나라 사랑이 뜨거웠다. 1997년 외환위기 땐 출연료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금 모으기 운동’ 공익 광고에 출연했다. “할아버지는 ‘나를 기억하게 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어요.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게 아니라 ‘코리아’라는 세 글자가 당연해진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남긴 당부가 아니었을까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대회가 열린 스타디움. 마지막 100m를 남겨두고 열광하는 10만 관중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2시간 20여분 전 이곳 스타디움 출발선 앞에 나란히 섰던 27개국 출신 마라토너 55명을 모두 제치고 24세 조선 청년 손기정이 나는 듯이 달려들어 결승 테이프를 가슴에 감았다. 결승 테이프를 끊은데 걸린 시간은 2시간 29분 19초 2. 올림픽신기록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시상대에 올라 금빛 메달을 목에 걸고 월계관을 쓰고도 그는 고개를 숙였다. ‘서서히 중앙 깃대를 올라가는 일장기, 그리고 귓속을 파고드는 기미가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결코 일본 사람일 수가 없다. 나는 일본을 위해 뛴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위해, 고통 받는 조선 동포를 위해 뛴 것이다.’ 대한민국의 마라토너 손기정(1912~2002) 탄생 110주년을 맞아 그가 1983년 출간했던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휴머니스트)이 9일 다시 출간된다. 그가 마라토너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가 되기까지 일생을 담은 자서전은 1976년 1월 1일부터 29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그의 칼럼 23편과 이후 1984년까지 기록한 에세이를 엮었다. 앞서 2012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모교인 서울 양정고등학교동문회에서 한 차례 자서전을 재출간한 뒤 1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왔다. 1912년 망국에서 태어난 손기정에게 달리기는 유일하게 허락된 자유였다. 그는 자서전에 ‘운동이야말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남은 마지막 숨통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몸으로 뛰고 달리는 운동마저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조선의 젊은이가 운동을 통해 일본을 누르고 쾌재를 부르며 조선 민족의 생존을 자각하게 됐는지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고 썼다. 비록 일장기가 그려진 옷을 입고 뛰었지만 그는 세계 대회에서 마주한 팬들에게 ‘손긔졍’이라는 한글 이름과 함께 ‘KOREAN’이라는 국적을 명확히 새긴 사인을 선물하곤 했다. 하지만 나라를 잃은 그에게는 올림픽 우승을 기뻐할 기회조차 없었다. 일제가 축하행사를 일절 금지시킨 탓이다. 그를 위한 축하행사는 광복 후인 1945년 12월 27일에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다. 그는 4000여 명의 선수단을 이끌고 경기장에 들어선 순간을 떠올리며 ‘태극기를 든 손이 떨려왔다. 자랑스러운 태극기를 양손에 들고 일장기 아래 울분의 눈물을 흘려야 했던 오욕의 날을 떠올렸다’는 기록을 남겼다. 손기정의 이야기는 1984년 로스엔젤레스올림픽 폐회식에서 끝난다. 1988년 열릴 서울올림픽을 소개하는 대표자로 폐회식 무대에 선 그의 귓가에 “손기정, 코리아!”라는 함성이 울려퍼졌다. 1936년 마라토너로 베를린올림픽에 참여한 이래 초청연사로 여덟 차례 올림픽에 참석했지만 이렇게 많은 관중 앞에서 그의 국적이 불린 건 처음이었다. 그가 올림픽 금메달보다 더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 이뤄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비로소 나의 길고 긴 싸움은 끝났구나. 나라를 가진 민족은 행복하다. 조국 땅 위에서 구김살 없이 달릴 수 있는 젊은이들을 행복하다. 그들이 달리는 것을 누가 막겠는가.’ 책에는 그와 영욕의 역사를 함께 한 동아일보와의 인연도 나온다. 1936년 8월 25일 동아일보는 베를린올림픽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오른 그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웠다는 이유로 이듬해 6월까지 정간 처분을 받았다. 1946년 8월 17일에는 ‘그리스 정부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를 위해 기증하기로 한 고대 그리스 투구를 빼앗겼다’는 내용의 단독 보도를 통해 훗날 투구를 되찾을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그리스 정부가 브리디니 신문사를 통해 손기정에게 그리스 투구를 선물하기로 했으나, 일제가 이 사실을 선수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독일 베를린 살로텐부르크 박물관이 소장하던 유물은 베를린올림픽 개최 50주년을 맞은 1986년 마침내 그의 품에 돌아온다. 손기정은 “이 투구는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고, 이 투구는 1987년 서구 유물 최초로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됐다. 손기정의 기록은 1984년 멈췄지만, 그의 이야기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다. 손기정의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55)은 이 책에 1985년부터 200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고인의 이야기를 채웠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그가 금 모으기 운동 공익광고 캠페인에 출연하며 “출연료를 단 한 푼도 받지 않는다는 전제로 출연하겠다”고 약속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사무총장은 “할아버지는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가장 선두에서 달려온 분”이라고 회상했다. “할아버지는 ‘나를 기억하게 해 달라’는 유언을 제게 남겼어요. 어쩌면 이 유언은 ‘코리아’라는 세 글자가 너무도 당연해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남긴 당부가 아니었을까요. 코리아라는 이름을 되찾기 위해 달려왔던 이들이 있었음을 기억해달라고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어린 시절 그에게 교과서의 모퉁이 여백은 놀이터였다. 선생님은 낙서만 해대는 그를 혼내기 일쑤였다. 한데 아버지는 달랐다. 주눅 들고 마음 졸이던 그를 언제나 다독였다. 훗날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할 당시에도 쓰레기통에 버린 습작을 아버지는 다시 책상 위에 올려뒀다. “버리기 아깝네. 잘 간직해 둬.” 아이를 격려했던 아버지는 한국의 1세대 자동차 디자이너인 박종서 전 국민대 산업디자인과 교수(75). 아들은 페라리와 벤츠 등 유명 자동차 내부 디자인을 맡으며 명성을 쌓은 박찬휘 독일 니오유럽디자인센터 수석디자이너(45)다. 박 디자이너는 “남들은 쓸데없다던 생각을 아버지는 언제나 귀하게 여겨 주셨다. 그 덕에 지금까지 남과 다른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박 디자이너는 딴생각하기를 글로 정리한 에세이집 ‘딴생각’(싱긋)을 지난달 27일 출간했다. 독일 뮌헨에 있는 그를 2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그는 “아버지를 비롯해 신차 발표회에 참석한 고객, 자녀가 던지는 일상의 모든 질문들이 딴생각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책에는 2005년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인 회사인 이탈리아 ‘피닌파리나’의 디자이너로 첫발을 내디딘 뒤 16년 동안 유럽에서 활동했던 경험이 빼곡히 담겼다. “작은 것도 지나치지 않으려고 해요. 엉뚱한 생각은 평범한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서 나오거든요. 그냥 지나쳐 버릴 게 아니라 곱씹어 생각하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로 확장시킬 수 있는 거죠.” 몇 년 전 스위스에서 있었던 우연한 만남도 그랬다. VIP 신차 공개장에서 윌리엄이란 한 남성은 “전기차는 밑바닥에 배터리팩이 생겨 버렸으니 앞으로 차 밑에 들어갈 일이 없겠다”며 아쉬워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자동차 아래에서 부품을 수리했던 추억을 아이와 나누지 못할까 봐 아쉽다는 토로였다. 별거 아닌 푸념일 수도 있지만 박 디자이너는 수첩에 메모했다. “전기차라도 운전자들이 차 아래에서 ‘뚱땅거릴’ 뭔가를 만들면 어떨까.” 이런 습관은 실제 변화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박 디자이너는 ‘왜 차에서 물병을 꽂아두는 자리는 운전석 아래에만 있을까. 눈앞에 손 뻗으면 닿는 자리에 있으면 안 될까’ 고민했다. 결국 아우디 신차 내부 디자인을 담당할 때 운전석 문손잡이 쪽에 물병을 놔두는 자리를 배치했다. 기존 엔지니어들은 “어색하다”며 대다수가 반대했지만, 아우디 임원진은 “별 다섯 개짜리 발상이다. 운전자를 배려한 혁신”이라며 극찬했다. 지난해 내놓은 아우디 전기차 Q4 e트론에는 이런 박 디자이너의 딴생각이 그대로 적용됐다. “결국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맞았어요. ‘관성적인 사고는 의심하고, 별것 아닌 일도 하찮게 여기지 마라.’ 제아무리 혁신적인 기술이 쏟아지는 세상이라도 가장 기본적인 가치는 영원불멸한 게 아닐까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돌잡이로 연필을 잡았다. 모두들 판검사가 될 거라 기뻐했지만, 그는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연필로 주구장창 낙서를 했다. 교과서 모퉁이, 버려진 달력의 뒷면이 그의 놀이터였다. 학교에서 선생님은 왼손잡이에다 교과서에 낙서만 하는 그를 혼내기 일쑤였다. 누가 내 낙서를 발견할까 언제나 마음 졸이던 아이. 유일하게 아버지 앞에서만큼은 당당히 낙서를 꺼내 보였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의 1세대 자동차 디자이너인 박종서 전 국민대 산업디자인과 교수(75). 아버지는 아들이 달력 뒷면에 끼적인 두서없는 낙서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훗날 아버지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는 아들이 분리수거함에 버려둔 습작을 다시 책상 앞에 올려두며 “이 아이디어는 버리기 아깝다. 잘 간직해 둬”라고 말하곤 했다. “남들은 쓸데없다고 여겼던 딴 생각을 아버지는 늘 귀하게 여겨주셨어요. 어쩌면 아버지 덕분에 제가 지금까지 남들과 다른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 살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매일 낙서만 하니 뭐해서 밥 벌어 먹고 살 것이냐’는 지적이 무색하게, 이제 그는 그 낙서로 엄청난 밥벌이를 한다. 그의 조그마한 그림 한 장이 3, 4년 동안 2만 명가량의 엔지니어를 움직인다. 페라리와 벤츠, 아우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최고의 차량들 내부 디자인을 맡아온 박찬휘 디자이너(45)가 지난달 27일 에세이 ‘딴생각’(싱긋)을 펴냈다. 그는 2005년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인회사 이탈리아 피닌파리나(Pininfarina)의 신입 디자이너로 첫 발을 내딛은 뒤 현재 독일의 전기차 회사 니오유럽디자인센터의 수석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박 디자이너는 2일(현지 시간) 전화 인터뷰에서 “이 책에는 내게 딴 생각을 선물해준 은인들이 나온다. 아버지를 비롯해 신차 발표회에 참석한 VIP 고객, 13세가 된 내 아이가 던지는 모든 질문들이 딴 생각의 원천”이라며 웃었다. 책 속에는 16년 동안 유럽 자동차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해온 그가 일상 속에서 떠올린 딴 생각들이 빼곡하다. 그는 사소한 질문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다. 몇 해 전 스위스에서 열린 VIP 고객 대상 전기차 공개회에서 윌리엄이라는 한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이제 전기차 밑바닥에 배터리 팩이 생겨버렸으니 내가 차 밑에 들어가서 아이와 무슨 추억을 만들겠느냐”고 불평했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하던 추억을 이제는 아이와 나눌 수 없다는 불만이었다. 전기차에 옛 부품이 사라지는 건 당연하다며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얘기였지만 박 디자이너는 달랐다. 윌리엄의 말을 곱씹어보다 수첩에 이런 메모를 남겨뒀다. ‘전기차를 만들더라도 차 아래에 뭔가 뚱땅거릴 수 있는 부분을 만들 수는 없을까.’ “실현 가능성과 관계없이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동차를 타고 그곳에서 추억을 쌓아나갈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볼 수 있어요. 다른 생각이라는 건 결국 내 주변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서 나와요. 사소하고 이상하다고 지나쳐버릴 게 아니라 기록하고 곱씹어 생각해봐야죠.” 박 디자이너가 던진 사소한 질문은 언제나 자동차에 변화를 불러왔다. 왜 물병을 꽂아두는 보관함은 운전석 아래 놓여 있을까. 손 뻗으면 닿는 편한 자리에 놓일 수는 없을까. 고민 끝에 그는 아우디 신차 내부 디자인을 맡으면서 물병 보관함 자리를 운전석 손잡이 쪽에 제작했다. 자동차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하지만 보수적인 엔지니어들은 다시 원래 자리에 물병 보관함을 두자고 고집했다. 이렇게 그의 아이디어가 빛을 보지 못하고 폐기되려던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신차 시승 테스트에 참여했던 고위급 간부단이 그의 시도에 별 다섯 개 만점을 준 것. 2021년 출시된 아우디 전기차 Q4 e-트론에는 그가 바꾼 사소한 변화가 녹아들어있다. 이 차를 타는 운전자들은 허리를 숙일 필요 없이 손을 뻗어 물병을 꺼낼 수 있다. “16년차 디자이너가 되고 보니 결국에는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다 맞았어요. ‘상식을 의심하고 보편에 충실 하라.’ 제아무리 수백, 수천 가지 기술과 디자인이 쏟아지는 세상이라도 가장 기본적인 가치는 영원불멸해요.”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

지난달 29일(현지 시간) 6년 만에 정규앨범을 발표한 미국 팝스타 비욘세(사진)가 신곡 가사를 둘러싼 장애 비하 논란에 노래를 수정해 다시 녹음하기로 했다. 미 타임지 등에 따르면 비욘세 측은 최근 7집 앨범 ‘르네상스’에 수록된 ‘히티드’가 뇌성마비 장애인을 비하했다는 지적이 일자 “악의적 의도는 없었다. 즉각 가사를 수정해 재녹음하기로 결정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문제가 된 건 히티드 가사에 나오는 ‘스패즈(spaz)’라는 단어였다. ‘뇌성마비의(spastic)’란 형용사에서 유래해 발작을 뜻하는 은어로 사용한다. 현지에선 뇌성마비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악용돼왔다. 비욘세의 신곡이 공개된 뒤 소셜미디어 등에서는 이를 두고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