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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남성은 어떤 난관에 봉착했을까? 현대 사회에서 남성들이 겪는 위기와 어려움을 심도 있게 탐구한 책이다.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연구원이 교육과 노동, 가족, 정체성 등 여러 측면에서 남성들이 뒤처지고 고립되는 현실을 미국을 중심으로 데이터와 사례를 통해 분석하고 원인과 해법을 제시했다. 남성이 겪는 어려움은 통계로 드러난다. 책에 따르면 미국에서 15세 남학생이 읽기와 수학 기본 능력 시험에서 실패할 확률은 여학생보다 50% 높다. 또 캘리포니아주에서 15∼44세 남성의 자살률은 여성의 3배나 된다. 최근 캘리포니아 주지사 개빈 뉴섬이 “너무나 많은 젊은 남성과 소년이 공동체와 단절된 채 고통받고 있다”며 이들을 지원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바 있다. 책은 1, 2장에서 남성이 경제적 불안정, 정서적 고립에 빠지는 현상을 다룬다. 일부 남학생들이 뇌 발달 지연으로 겪는 학업 부진 문제, 일자리 감소를 제시한다. 특히 미 남성의 약 15%는 가까운 친구가 없고 외로움과 우울증에 빠지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극단적인 온라인 커뮤니티로 뒷걸음질을 치게 된다고 한다. 문제는 세상이 이러한 현상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해로운 남성성(toxic masculinity)’ 같은 단어로 프레임을 씌워 비난한다는 데 있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사회와 정치가 기존에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다뤄 왔는지를 살피는 한편 해결책을 제시하는 3∼5장이다. 3장에서는 남자아이들에게 역할 모델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흥미롭다. 미국에선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남교사 비율이 1980년대 초 33%에서 현재 24%로 떨어졌다. 남성 사회복지사 비율도 1980년 이후 18%에 불과하고, 심리학자도 부족하다. 그 탓에 남성들이 학교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 편하게 상담할 남성이 부족하다고 한다. 4장은 미국의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이 남성 문제 해결에 실패한 원인을 분석했다. 저자는 좌파 정책은 주로 여성을 중심으로 한 성평등과 급진적 페미니즘에 치중해 남성들이 마주한 어려움을 간과했다고 짚는다. 반면 우파 정책은 전통적 남성성 유지에만 집착하며, 교육 개혁이나 사회 복지 지원엔 소극적이다. 그 탓에 저소득층과 교육 수준이 낮은 남성들은 경제적 기회를 더 박탈당하게 됐다. 저자는 정치 이념을 넘어 교육 체제와 노동 시장, 사회 시스템이 남성과 소년들을 포함한 모든 성별에게 공정하고 적응 가능한 환경을 구축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 대안도 제시했다.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직업 내 여성 비율을 높이는 데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HEAL(건강, 교육, 행정, 문해력) 직군에 남성이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등의 제안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이 책을 여름휴가 때 읽을 추천 도서 중 하나로 꼽았다. 저자가 2017년 현대 미국의 계급 역학을 파헤친 ‘20 VS 80의 사회’는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국내에선 이달 1일 출범한 ‘성평등가족부’에 ‘성형평성기획과’가 신설돼 성별 불균형을 담당할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관련 이슈들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일독할 만한 책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외벽에 조각을 설치했던 이불, 같은 미술관 그룹전 ‘괴물 같은 아름다움’에 출품한 이수경, 뉴욕 현대미술관(MoMA) PS1에서 11월부터 개인전을 열 예정인 김아영…. 최근 뉴욕에선 한국 현대미술가들의 활동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가운데, 미술관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약하는 한국인들도 늘고 있다. 그 가운데 휘트니미술관의 ‘살림꾼’으로 13년간 활약한 유니스 리(43)를 지난달 24일 휘트니미술관에서 만났다. 그는 이전엔 없던 직책인 ‘전략파트너십 디렉터’를 2019년부터 맡기도 했다. 방문 당시, 미술관은 이 디렉터가 주도한 현대자동차와 휘트니미술관의 파트너십으로 탄생한 ‘현대 테라스 커미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태어난 이 디렉터는 2세 때 미국으로 이주해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을 거쳐 2012년부터 휘트니미술관에서 근무했다. 그는 한인 커뮤니티가 좀 더 활성화된 LACMA에서 한국 미술계, 기업과의 교류를 경험했던 것을 살려 휘트니미술관에서 기업 파트너십과 멤버십의 새로운 물꼬를 텄다. 이 디렉터는 “일본, 중국과 달리 한국은 새로운 것에 열려 있어 미국 미술관 후원도 일찍 시작한 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외벽 커미션(제네시스), LG 구겐하임 어워드(LG), MoMA 미디어 아트 전시(현대카드) 등 한국 기업들이 미술관과 다양한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이 디렉터는 “한국 기업의 후원 덕에 내게도 여러 좋은 기회가 생겨 자랑스럽고 감사하다”고 했다. 휘트니미술관은 풀 네임이 ‘휘트니 미국 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으로,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거나 일정 기간 활동한 작가만 전시할 수 있다. 때문에 이 디렉터가 처음 미술관에 왔을 때만 해도 한국과 접점은 거의 없었다. “백남준이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 전시를 한국에 가져갔지만, 중간에 인연이 끊긴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이 디렉터는 당시 관장인 애덤 와인버그와 매년 한국을 찾았다. 한국의 관심과 환대에 반한 와인버그 관장은 광주 비엔날레,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도 직접 찾았다. 2023년엔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를 서울시립미술관과 공동 기획했다. 이 디렉터는 이런 과정에서 “어릴 때부터 익힌 한국인의 섬세한 배려와 ‘정’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부모님이 항상 저에게 ‘누군가의 집에 빈손으로 가지 마라’, ‘이렇게 행동하면 버릇이 없다’ 등 강조한 게 있어요. 그걸 기억해 관장님에게 ‘물건을 주고받을 땐 두 손으로 해야 한다’거나 ‘명함은 꼭 챙겨가야 한다’는 등의 팁을 드렸죠. 아무리 매너가 좋은 미국인이라도 알기 어려운 문화적 차이예요.” 최근 10년 사이 뉴욕 미술계에는 한국인이 무척 늘었다. 그들 사이의 네트워크도 끈끈하다. 이 디렉터는 “미국에서 자랐지만, 신기하게도 한국 사람을 만나면 정이 샘솟는다”며 “서로 돕고 알려주는 문화가 한국인의 힘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런 ‘배려’와 ‘정’의 힘은 말뿐만이 아니다. 이 디렉터는 휘트니에 근무하며 미술관 건물 신축 등 7억6000만 달러(약 1조800억 원) 규모의 예산 확보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현대자동차와 휘트니미술관의 10년 파트너십도 구상했다. 최근엔 휘트니 연례 갈라에서 600만 달러를 모금해 미술관 역사상 가장 많은 금액을 모았다. 이 디렉터는 “미술관에서 여러 크고 재밌는 일을 많이 했지만, 가장 소중한 기억은 한국과의 교류와 협업”이라고 강조했다. 이 디렉터는 이제 또 다른 도전에 나선다. 휘트니미술관이 미국인만 전시할 수 있다는 한계에 아쉬움을 느낀 그는 7일(현지 시간)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의 최고사회공헌책임자(CPO·Chief Philanthropy Officer)로 선임됐다. 20일 샌프란시스코로 떠날 예정인 이 디렉터는 “한국 미술을 더 제대로 알리는 데 더욱 욕심을 내보고 싶다”고 다짐했다.뉴욕=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했던 강화 정족산사고지에 만들어진 특별 전시관에서 현대미술 전시가 열리고 있다. 4일 개막한 ‘시간’전은 한지를 재료로 하는 김문정 작가부터 사진을 주로 다루는 강홍구, 노순택, 수묵화가인 허달재를 비롯해 김이오 박동진 송명진 유별남 정원철 함명수 등 중견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한다.전시 장소인 정족산사고지 특별전시관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인 ‘장사각’이다. 이 건물 옆에는 왕실의 족보를 보관했던 ‘선원보각’이 있다. 두 건물은 1998년 복원한 것으로 옛 현판만 그대로 달았다. 이곳에 있던 기록들은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현재 전시장에는 국가유산 보물인 묘법연화경 목판이 가운데에 설치되어 있고, 벽면에 예술 작품이 걸렸다.‘시간’전은 4일부터 12일까지 열리는 ‘삼랑성역사문화축제’와 맞물려 개최되는 전시로, 1년에 한 번 이 전시가 열릴 때 정족산사고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정족산사고 특별전시관에서 현대미술전은 올해로 18회째를 맞는다. 전등사에서는 현대미술가들이 참여해 2012년 만든 법당 ‘무설전’에서도 미술 작품을 전시한다. 전시 지원 공모를 통해 선정된 청년 작가 설진화의 개인전이 4~12일 열린다.삼랑성역사문화축제조직위원회 공동위원장인 장윤 스님(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전등사 회주)은 “부처님의 사리를 나누어 모신 ‘탑’이 종교와 예술이 만나는 첫 지점이 되었듯, 전등사의 유서 깊은 장소인 정족산 사고지에서 예술가들의 정신적 사리라 할 수 있는 작품을 걸었다”며 “전시가 오랜 기간 이어지고 여러 사람이 그림을 관람해왔으니 이 자체가 자비 실천이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시간’전은 19일까지 열린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술에 기대 살아온 문학 연구자와 담배를 끊지 못하는 정신과 의사가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서간집이다. 두 사람은 각자 감춰온 중독의 이력과 트라우마를 솔직하게 풀어낸다. 어떻게 하면 중독을 끊을 수 있는지에만 관심이 쏠리는 요즘 시대에, 중독의 대상을 ‘기대는 것’이라고 접근해 신선하다. 이 책의 가장 독특한 관점은 중독을 ‘쾌락 추구’가 아니라 ‘고통의 경감’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술, 담배, 약물, 도박부터 게임, 쇼핑, 소셜미디어까지 여러 중독을 임상적·사회적·철학적으로 해석한다. 단순히 끊는 것을 목표로 하기보다 ‘위험 감소’에 초점을 맞춘다. 중독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절이 아닌 ‘연결’에서 가능하다고 저자들은 강조한다. 책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중독은 회복의 시작이며, 중요한 것은 내가 혼자가 아님을 아는 것.” 요코미치는 도벽, 성 중독, 과식, 알코올에 기대 살아온 자신의 경험을 풀어놓으면서 중독이 결코 남 얘기가 아님을 증명한다. 마쓰모토는 수많은 의존증 환자를 진료해 온 일본의 권위자. 익명 자조 모임, 가족 지원 프로그램, 민간 재활 시설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며 ‘회복 공동체’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두 사람의 문체는 때로 날것처럼 거칠게 다가오고 때로는 따뜻하게 마음을 파고든다. 책의 탄생 배경 또한 흥미롭다. 요코미치를 처음 만난 편집자는 그가 대낮부터 술병을 들고 나타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이에 중독 치료 전문인 마쓰모토와 편지 교류를 제안한 게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계기라고 한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팝페라 전설’ 임형주는 평소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인 조혜련, 황광희를 초대해 추석에 어울리는 한 상을 대접하고 집과 공연장이 결합된 450평 규모의 4층 집을 전부 공개한다. 임형주는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부모님이 가수가 되는 것을 반대해 16세에 여행 간다고 거짓말을 한 뒤 홀로 유학길에 올랐다. 햇빛 없는 차고에서 생활해 곰팡이 핀 청바지를 입고 오디션을 봤던 고생담으로 절친들을 놀라게 한다. 이후 17세 때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남성 성악가 최연소로 독창회 진행, 2015년 이탈리아 로마시립예술원을 졸업해 동양인 최초 석좌교수로 임명됐고, 2017년에는 팝페라 가수 최초로 그래미상 심사위원에 위촉됐다. 14년 지기 황광희는 임형주의 반전 일상을 폭로한다. 집에서 홀케이크 한 판을 해치운 뒤 다이어트 걱정을 하고, 계산할 때 통신사 할인받으며 ‘저 아시죠?’라고 셀프 어필을 한단다. 조혜련과 음악 선생님으로 만난 인연을 회상하며 임형주는 공연 중 조혜련이 무대에 난입해 함께 노래를 불렀다는 일화도 공개한다. 공연으로 바쁘게 지내느라 남들보다 늦게 ‘사십춘기’가 온 것 같다는 속마음을 드러낸 임형주는 1998년 ‘이소라의 프러포즈’ 데뷔 무대에서 울었던 기억에 아직도 그 무대를 보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데뷔 28년 차임에도 늘 자신을 채찍질한다면서 눈시울을 붉힌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프랑스 파리 오랑주리미술관의 소장품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전시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지난달 20일 개막했다. 한국과 프랑스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오랑주리-오르세 미술관 특별전: 세잔, 르누아르’는 오르세와 오랑주리미술관이 협력하고 예술의전당, 지엔씨미디어가 공동 주최했다. 이 전시는 19세기 프랑스 인상파 화가인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와 후기 인상파 화가 폴 세잔(1839∼1906)의 예술 세계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르누아르는 빛과 공기의 흐름을 따뜻하고 섬세한 색채로 표현하며 감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인상파 대표적 화가.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잔은 간결하면서도 기하학적인 구성을 통해 회화에 구조적 질서를 불어넣었다. 두 화가는 같은 시대를 살며 서로 교류했으며 인상주의에 뿌리를 둔 공통점을 지녔다. 하지만 회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극명히 달랐다. 이들의 예술적 성과는 후대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한 20세기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특히 세잔의 유산은 입체주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전시는 두 작가의 작품 세계를 모두 6개의 섹션으로 나눠 비교 조망한다. 첫 번째 ‘야외에서’는 인상주의의 출발점이 된 자연과 빛의 탐구를 보여주며, 르누아르의 부드러운 붓질과 세잔의 구조적 필치가 대비를 이룬다. 두 번째 ‘정물에 대한 탐구’에서는 일상의 오브제를 두고 색채와 공간을 해석한 각기 다른 접근 방식을 감상할 수 있다. 세 번째 ‘인물을 향한 시선’에서는 따뜻한 인체 묘사로 친밀한 순간을 담아낸 르누아르와 구조적 일관성을 강조한 세잔의 작품이 나란히 전시된다. 네 번째 ‘폴 기욤의 수집’에서는 20세기 초 소장가인 폴 기욤이 구축한 컬렉션을 통해 당대 미술의 흐름에서 두 화가가 어떻게 자리매김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어 다섯 번째 ‘세잔과 르누아르’에서는 풍경·정물·인물 작품을 직접적인 비교 형식으로 제시, 두 화가가 평생 서로 어떤 자극을 주고받았는지, 차별성은 어떻게 유지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마지막 ‘두 거장과 피카소’에선 세잔의 분석적 회화가 입체주의로, 르누아르의 색채와 선에 대한 탐구가 피카소의 고전적 시기로 이어진 과정을 추적한다. 내년 1월 25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프랑스 파리 오랑주리미술관의 소장품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전시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지난달 20일 개막했다. 한국과 프랑스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오랑주리-오르세 미술관 특별전: 세잔, 르누아르’는 오르세와 오랑주리미술관이 협력하고 예술의전당, 지엔씨미디어가 공동 주최했다.이 전시는 19세기 프랑스 인상파 화가인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와 후기 인상파 화가 폴 세잔(1839~1906)의 예술 세계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르누아르는 빛과 공기의 흐름을 따뜻하고 섬세한 색채로 표현하며 감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인상파 대표적 화가.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잔은 간결하면서도 기하학적인 구성을 통해 회화에 구조적 질서를 불어넣었다.두 화가는 같은 시대를 살며 서로 교류했으며 인상주의에 뿌리를 둔 공통점을 지녔다. 하지만 회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극명히 달랐다. 이들의 예술적 성과는 후대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한 20세기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특히 세잔의 유산은 입체주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전시는 두 작가의 작품 세계를 모두 6개의 섹션으로 나눠 비교 조망한다. 첫 번째 ‘야외에서’는 인상주의의 출발점이 된 자연과 빛의 탐구를 보여주며, 르누아르의 부드러운 붓질과 세잔의 구조적 필치가 대비를 이룬다. 두 번째 ‘정물에 대한 탐구’에서는 일상의 오브제를 두고 색채와 공간을 해석한 각기 다른 접근 방식을 감상할 수 있다. 세 번째 ‘인물을 향한 시선’에서는 따뜻한 인체 묘사로 친밀한 순간을 담아낸 르누아르와 구조적 일관성을 강조한 세잔의 작품이 나란히 전시된다.네 번째 ‘폴 기욤의 수집’에서는 20세기 초 소장가인 폴 기욤이 구축한 컬렉션을 통해 당대 미술의 흐름에서 두 화가가 어떻게 자리매김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어 다섯 번째 ‘세잔과 르누아르’에서는 풍경·정물·인물 작품을 직접적인 비교 형식으로 제시, 두 화가가 평생 서로 어떤 자극을 주고받았는지, 차별성은 어떻게 유지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마지막 ‘두 거장과 피카소’에선 세잔의 분석적 회화가 입체주의로, 르누아르의 색채와 선에 대한 탐구가 피카소의 고전적 시기로 이어진 과정을 추적한다. 내년 1월 25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960년대 지어진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공장 기숙사를 리모델링한 예술 공간 ‘성수나무’가 개관했다. 성수나무는 중정(中庭)의 아흔 살이 넘은 나무를 오래된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의 공간이다. 노동자들이 머물렀던 방들과 부엌의 벽을 허물어, 1층의 절반을 전시 공간으로 만들었다. 지난달 11일 개관에 맞춰 선보인 전시는 박인성 작가의 개인전 ‘레지두(RESIDUE): 존재, 시간, 색, 기억의 파편’이다. 1층의 나머지 공간은 예술가들이 입주하는 작업실로 사용될 예정이다. 연말까지 시범 운영을 거친 뒤 내년부터 공모를 통해 입주 예술가를 선발한다. 성수나무를 운영하는 에이렌즈의 박민경 대표는 “1960년대 젊은이들이 각자의 꿈을 품고 상경해 공장 기숙사에 머물렀던 것처럼, 실력 있는 예술가가 성장하도록 돕고 해외로 연결되는 가교 역할도 하는 게 목표”라며 “예술가와 예술 커뮤니티가 이곳에서 나무처럼 견고하게 자랐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름을 성수나무라고 지었다”고 했다. 성수나무 주변에선 1960년대 공장에서 일했던 사람들 중 일부도 여전히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성수나무는 이들이 예술을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도록, 주민 대상 영화 상영 프로그램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박 작가의 전시는 27일까지 열린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7세기 이탈리아 신학자 토마소 캄파넬라의 책 ‘태양의 도시’는 이상적 도시 국가를 그립니다. 이불 작가는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설치 작품 ‘태양의 도시 Ⅱ’를 제작하죠. 그가 만든 태양의 도시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받침대 삼은 지도 모양의 판자들이 바닥에 펼쳐진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발을 잘못 디뎌도 작품을 망가뜨릴까 봐 불안한 마음으로 감상하게 되죠. 또 벽면에는 거울이 부착돼 있지만, 그 표면이 일그러져 ‘예쁜 인증샷’을 찍을 순 없고 희미한 자신의 모습만 비칩니다. 이불 작가는 인류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수많은 ‘이상향’을 이처럼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지만 버티고 서 있는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묘사해 왔습니다. 리움미술관에서 지난달 4일 개막한 ‘이불: 1998년 이후’전은 이런 이불 작가의 이상향에 관한 탐구를 담은 연작 ‘몽그랑레시(Mon gran recit)’를 중심으로 약 30년간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이 전시의 큐레이터인 곽준영 전시기획실장에게 전시 구성 과정부터 애착이 가는 작품까지 물어봤습니다. ―리움미술관은 왜 지금 이불 작가를 조명하게 됐나요? “올해 전시를 하겠다고 생각했던 건 아닙니다. 이불 작가는 오래전부터 리움에서 전시하고 싶은 작가 리스트에 있었죠. 다만 우리 미술관에서만 전시하기보다 국제 투어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홍콩 M+ 미술관과 공동 기획하여 해외 기관으로 투어 전시를 열게 됐습니다. 2002년 로댕갤러리 개인전 이후 23년 만에 삼성문화재단 산하 미술관에서 전시를 개최해 뜻깊습니다.” ―전시 장소가 미술관 내 블랙박스와 그라운드 갤러리입니다. 장소를 선정한 과정도 궁금합니다. “작품의 성격과 규모가 맞아떨어졌습니다. 이불 작가의 연작 ‘몽그랑레시’는 이상향을 꿈꾸었던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건축과 미술을 비판적으로 탐구하고 재해석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요. 블랙박스와 그라운드 갤러리는 렘 콜하스가 설계한 곳으로, 콜하스가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건축에서 자주 쓰인 콘크리트를 창의적으로 사용하고 여기에 유리를 접목했다는 특징이 ‘몽그랑레시’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블랙박스 공간 구성에선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나요. “블랙박스에 어떤 작품을 전시할지는 일찍부터 결정됐습니다. 이불 작가는 이 공간에서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 같은 공상과학(SF), 우주적 분위기를 상상했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지닌 ‘태양의 도시 Ⅱ’를 거대한 풍경으로 두고, 그 안에 1990년대 후반부터 발표된 초기작 ‘사이보그’ ‘아나그램’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Ⅰ’ 등의 작품이 서로를 반사하며 혼란스러운 광경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전시의 멜랑콜리한 서곡과도 같은 곳입니다.” ―블랙박스에서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면 터널을 통과해야 아래 전시장이 보이는 구조가 흥미로웠습니다. “그 터널은 2012년 작품 ‘수트레인’인데요. 이 작품은 늘 전시장 입구에서 다른 세계로 연결되는 문처럼 설치됐습니다. 제목 ‘수트레인’이 프랑스어로 지하 혹은 감춰진 공간을 의미합니다. 이 작품은 지하 공간으로 안내하는 통로이며, 입구에서는 작품의 전체 구조와 외형을 파악할 수 없도록 한 것이 설치 의도입니다. 이 작품을 그라운드 갤러리 입구에 둔 것은 작품의 원래 의도를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수트레인’을 빠져나오면 빈 공간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작품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결정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가득 채우자’고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2005년부터 전개된 ‘몽그랑레시’ 연작의 주요 작품들을 한곳에 모으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많은 작품을 선보이게 된 것입니다. 더불어 여러 작품이 벽면이 없이 서로 겹치고 겹치는, 중첩된 풍경은 이 연작의 특성을 살린 겁니다. ‘몽그랑레시’는 하나의 커다란 서사 대신, 다수의 파편적인 작은 서사들을 비선형적으로 연결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들이 서로 겹치며 또 하나의 거대한 풍경을 만들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거나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는다면….“하나를 꼽기는 정말 어렵지만, 이번 전시에서 입구에 있는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과 지난해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메트)에 전시했던 ‘롱 테일 헤일로: CTCS #1’의 조합이 미술관의 건축과 정말 잘 어울리는 설치라고 생각합니다. 콜하스의 육중한 검은 콘크리트를 배경으로 거대하지만 불안정한 몸체를 드러내는 비행선, 검은 콘크리트로 빚어낸 듯한 조각이 함께 놓였을 때 희열과 감동이 생생합니다. ‘롱 테일 헤일로’는 메트에서 제시간에 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는데 무사히 전시하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1998년부터 올해까지 작품을 봤는데, 앞으로 이불 작가의 예술은 어떤 길을 가게 될 것 같나요. “이불 작가는 인류의 과거와 현재를 공부하고 가능한 미래에 대해 열린 사유를 해온 작가이지만, ‘규정’을 거부하는 사람이기에 예측이 어렵습니다. 끊임없는 호기심과 열정으로 앞으로도 시대를 성찰하는 작업을 지속할 거라는 것 이외에는….”※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을 하시면 e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1960년대 지어진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공장 기숙사를 리모델링한 예술 공간 ‘성수나무’가 개관했다.성수나무는 중정(中庭)의 아흔 살이 넘은 나무를 오래된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의 공간이다. 노동자들이 머물렀던 방들과 부엌의 벽을 허물어, 1층의 절반을 전시 공간으로 만들었다. 지난달 11일 개관에 맞춰 선보인 전시는 박인성 작가의 개인전 ‘레지두(RESIDUE): 존재, 시간, 색, 기억의 파편’이다.1층의 나머지 공간은 예술가들이 입주하는 작업실로 사용될 예정이다. 연말까지 시범 운영을 거친 뒤 내년부터 공모를 통해 입주 예술가를 선발한다. 성수나무를 운영하는 에이렌즈의 박민경 대표는 “1960년대 젊은이들이 각자의 꿈을 품고 상경해 공장 기숙사에 머물렀던 것처럼, 실력 있는 예술가가 성장하도록 돕고 해외로 연결되는 가교 역할도 하는 게 목표”라며 “예술가와 예술 커뮤니티가 이곳에서 나무처럼 견고하게 자랐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름을 성수나무라고 지었다”고 했다.성수나무 주변에선 1960년대 공장에서 일했던 사람들 중 일부도 여전히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성수나무는 이들이 예술을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도록, 주민 대상 영화 상영 프로그램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박 작가의 전시는 27일까지 열린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25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의 맨해튼 서부. 허드슨 강변의 여객선 터미널을 리노베이션한 스포츠·엔터테인먼트 복합 단지 ‘첼시 피어’ 전시장에 들어서자 벽면을 가득 채운 바닷물이 쏟아질 듯 거센 파도를 일으켰다. 빔 프로젝터 영상이지만, 높은 화질과 정교한 컴퓨터그래픽(CG) 덕에 진짜 바다보다 더 실감 나게 다가왔다. 또 다른 전시장에선 벽면에 화려한 꽃들이 가득했고, 관객의 발자국을 따라 꽃잎이 흩날리기도 했다.한국 특유의 감각과 고도의 기술을 살린 몰입형 디자인 전시 브랜드 ‘아르떼뮤지엄’이 뉴욕에 진출했다. 중국 홍콩과 청두(成都), 미 라스베이거스와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를 거쳐 이뤄낸 성과. 개관 기념 행사가 열린 이날 현장은 ‘K아트’의 또 다른 도약을 기대할 만한 자리였다.● 뉴욕 마천루와 한국 민화의 만남아르떼뮤지엄은 강원 강릉과 제주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만큼 사랑받는 콘텐츠다. 이날 뉴욕 전시장에선 폭포와 꽃, 해변, 파도, 숲 등 아르떼뮤지엄 대표 테마인 ‘영원한 자연’을 주제로 한 콘텐츠 16점이 펼쳐졌다. ‘꽃’ 전시장은 무궁화 씨앗의 생애에 관한 영상과 관객 움직임에 따라 영상이 변하는 인터랙티브 요소가 추가됐다. 마지막 전시장 ‘가든’에선 뉴욕의 대표적인 풍경과 한국의 산수화, 민화 등 전통문화를 결합한 ‘뉴욕 이즈 아트(Newyork is Art)’ 영상이 상영됐다. 아르떼뮤지엄을 운영하는 ‘디스트릭트’ 부사장이자 콘텐츠 총괄 기획자인 이상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영향인지 현지 관객들이 십장생 등 동양적 요소를 좋아해 적극 활용했다”며 “안견의 몽유도원도도 삽입했는데, 이 그림이 일본에 있지만 한국의 작품임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약 4800㎡ 규모인 아르떼뮤지엄 뉴욕은 2023년 개관한 ‘아르떼뮤지엄 라스베이거스’의 약 2배 크기. 주변엔 각종 운동이 가능한 대규모 시설도 있어 주말을 즐기는 가족이나 관광객이 많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날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은 특히 ‘꽃’과 ‘정원’에 큰 관심을 보였다.● ‘누적 관객 천만’ K아트의 도전 뉴욕 진출은 야망 있는 문화 콘텐츠 제작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보는 일. 디스트릭트는 2011년 세계 최초로 실내 4D 테마파크인 ‘라이브 파크’를 만들었고, 2020년 서울 코엑스 대형 전광판에서 상영한 ‘웨이브(WAVE)’로 주목받았다. 같은 해 제주에 ‘아르떼뮤지엄’을 개관했는데, 이때부터 뉴욕 진출을 꿈꿨다고 한다.“2021년 뉴욕 ‘원 타임스 스퀘어’ 전광판 운영사의 초청을 받아 ‘워터폴 NYC’를 선보였을 때 반응이 뜨거워, 그때부터 전시장 개관을 맘먹었습니다. 하지만 팬데믹에다 개관 절차나 규제 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5년이나 걸렸지만 무척 자랑스럽습니다.”(이 부사장) 세계 곳곳에 포진한 아르떼뮤지엄을 찾은 전체 누적 관객은 지난달 기준으로 1000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2023년 선보인 라스베이거스 지점이 가장 큰 매출을 냈다고 한다. 입장료가 한국보다 3배가량 높지만, 지난해 연매출이 2059만 달러(약 290억 원)로 디스트릭트 전체 매출의 35%를 차지할 정도다. 올해도 하루 평균 방문객이 1485명으로 지난해보다 40% 늘었다. 디스트릭트 측은 “한국 전시장의 경우 개관 후 몇 년이 지나면 관객이 다소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지만, 미국은 해외에서 오는 관광객이 꾸준히 유입되는 특징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19일 정식 개관한 아르떼뮤지엄 뉴욕은 앞으로 10년 동안 이 공간에서 상설 전시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 부사장은 “어제 전시를 보러 온 한 미국 할머니가 우리를 붙잡고 ‘정말 감동받았다. 이런 전시는 처음이다’고 말해 놀랐다”며 “한국의 뛰어난 몰입형 미디어 콘텐츠를 보여줘 하나의 ‘문화 브랜드’로 성장할 계기를 뉴욕에서 만들고 싶다”고 다짐했다.쉽고 강렬하게… 대중을 파고든다한국형 ‘몰입형 미디어’ 생존법“글로벌 팬덤 공략한 K팝처럼쉬운 주제에 디지털기술 활용”‘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적 해석이나 긴 설명은 가급적 자제하고, 피부로 와닿는 감각을 제대로 느끼게 한다.’ 한국 관객의 적극적인 반응을 바탕으로 업그레이드를 거듭해온 디스트릭트의 콘텐츠를 보면 K아트 역시 최근 세계에서 사랑받는 K컬처가 지닌 공통적인 특징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화려한 비주얼과 귀에 꽂히는 음악으로 글로벌 팬덤을 공략한 K팝처럼 ‘아르떼뮤지엄’ 역시 대중의 취향을 철저히 공략한다. 이를테면 ‘꽃’ 전시장은 꽃의 줄기나 뿌리 같은 복잡한 요소는 없애고 화려한 꽃잎이 흐드러진 모습만 강조했다. ‘폭포’ 전시장도 원래 폭포 옆에 있을 바위나 흙은 모두 지우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의 힘찬 모습만 화면에 가득 채웠다. 여기에 영화 ‘부산행’, ‘놈놈놈’, ‘도둑들’ 등 100여 편의 영화에서 음악을 작업한 베테랑 음악 감독 장영규가 사운드를 만들었다. 전시장에선 프랑스 조향사가 만든 향도 맡을 수 있다.‘자연’을 주제로 삼은 것도 전략적인 선택이다. 바다와 파도, 해, 달, 별 같은 자연 속 요소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런 영상들이 주는 강렬하면서도 공감이 큰 느낌을 고도의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구현하는 게 아르떼뮤지엄의 강점이다. 이상진 디스트릭트 부사장은 “회오리바람을 경험할 수 있는 ‘토네이도’는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다양한 기물을 활용하는 과학 체험관과 달리, 전시장 안에 오로지 수증기와 공기의 흐름만이 보이도록 고심했다”며 “디자이너와 기술자, 개발자 등 다양한 직군의 제작자들이 아이디어부터 제작까지 함께 난상 토론 과정을 거쳐서 내놓은 산물”이라고 말했다. 특히 디스트릭트는 이번 뉴욕 진출이 2012년 세상을 떠난 최은석 전 대표가 탄탄하게 밑바탕을 다진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이 부사장은 “최 전 대표는 콘텐츠의 디테일을 끝까지 밀어붙였다”며 “그의 완벽주의 스타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최 전 대표가 이끌었던 시절 디스트릭트는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등 국내 기업의 해외 론칭쇼나 글로벌 브랜드의 행사에 쓰이는 디지털 콘텐츠를 제작하며 주목받았다. 아르떼뮤지엄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라이브 파크’ 역시 고인의 아이디어였다. 디지털 디자인업계에서 촉망받던 그가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출장 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디스트릭트는 한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라이브 파크’의 경험을 바탕으로 디지털 테마파크인 ‘플레이케이팝’을 열었던 게 분위기 전환에 주효했다. 이는 아르떼뮤지엄의 성공으로도 이어졌다. 이성호 디스트릭트 대표는 “최 전 대표가 아르떼뮤지엄 뉴욕 개관을 보며 하늘에서 흐뭇하게 웃고 있을 것”이라며 감회에 젖었다.뉴욕=김민 기자 kimmin@donga.com}

25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의 맨해튼 서부. 허드슨 강변의 여객선 터미널을 리노베이션한 스포츠∙엔터테인먼트 복합 단지 ‘첼시 피어’ 전시장에 들어서자, 벽면을 가득 채운 바닷물이 쏟아질 듯 거센 파도를 일으켰다. 빔 프로젝터 영상이지만, 높은 화질과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CG) 덕에 진짜 바다보다 더 실감 나게 다가왔다. 또 다른 전시장에선 벽면에 화려한 꽃들이 가득했고, 관객의 발자국에 따라 꽃잎이 흩날리기도 했다.한국 특유의 감각과 고도의 기술을 살린 몰입형 디자인 전시 브랜드 ‘아르떼뮤지엄’이 뉴욕에 진출했다. 중국 홍콩과 청두(成都), 미 라스베이거스와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를 거쳐 이뤄낸 성과. 개관 기념 행사가 열린 이날 현장은 ‘K아트’의 또 다른 도약을 기대할 만한 자리였다.● 뉴욕 마천루와 한국 민화의 만남아르떼뮤지엄은 강원 강릉과 제주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만큼 사랑받는 콘텐츠다. 이날 뉴욕 전시장에선 폭포와 꽃, 해변, 파도, 숲 등 아르떼뮤지엄 대표 테마인 ‘영원한 자연’을 주제로 한 콘텐츠 16점이 펼쳐졌다. ‘꽃’ 전시장은 무궁화 씨앗의 생애에 관한 영상과 관객 움직임에 따라 영상이 변하는 인터랙티브 요소가 추가됐다. 마지막 전시장 ‘가든’에선 뉴욕의 대표적인 풍경과 한국의 산수화, 민화 등 전통문화를 결합한 ‘뉴욕 이즈 아트(Newyork is Art)’ 영상이 상영됐다. 아르떼뮤지엄을 운영하는 ‘디스트릭트’ 부사장이자 콘텐츠 총괄 기획자인 이상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영향인지 현지 관객들이 십장생 등 동양적 요소를 좋아해 적극 활용했다”며 “안견의 몽유도원도도 삽입했는데, 이 그림이 일본에 있지만 한국의 작품임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약 4800m² 규모인 아르떼뮤지엄 뉴욕은 2023년 개관한 ‘아르떼뮤지엄 라스베이거스’의 약 2배 크기. 주변엔 각종 운동이 가능한 대규모 시설도 있어 주말을 즐기는 가족이나 관광객이 많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날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은 특히 ‘꽃’과 ‘정원’에 큰 관심을 보였다.● ‘누적 관객 천만’ K아트의 도전뉴욕 진출은 야망 있는 문화 콘텐츠 제작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보는 일. 디스트릭트는 2011년 세계 최초로 실내 4D 테마파크인 ‘라이브 파크’를 만들었고, 2020년 서울 코엑스 대형 전광판에서 상영한 ‘웨이브’(WAVE)로 주목받았다. 같은 해 제주에 ‘아르떼뮤지엄’을 개관했는데, 이때부터 뉴욕 진출을 꿈꿨다고 한다.“2021년 뉴욕 ‘원 타임스 스퀘어’ 전광판 운영사의 초청을 받아 ‘워터폴 NYC’를 선보였을 때 반응이 뜨거워, 그때부터 전시장 개관을 맘먹었습니다. 하지만 팬데믹에다 개관 절차나 규제 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5년이나 걸렸지만 무척 자랑스럽습니다.”(이 부사장)세계 곳곳에 포진한 아르떼뮤지엄을 찾은 전체 누적 관객은 지난달 기준으로 1000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2023년 선보인 라스베이거스 지점이 가장 큰 매출을 냈다고 한다. 입장료가 한국보다 3배가량 높지만, 지난해 연매출이 2059만 달러(약 290억 원)로 디스트릭트 전체 매출의 35%를 차지할 정도다. 올해도 하루 평균 방문객이 1485명으로 지난해보다 40% 늘었다. 디스트릭트 측은 “한국 전시장의 경우 개관 몇 년이 지나면 관객이 다소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지만, 미국은 해외에서 오는 관광객이 꾸준히 유입되는 특징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19일 정식 개관한 아르떼뮤지엄 뉴욕은 앞으로 10년 동안 이 공간에서 상설 전시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 부사장은 “어제 전시를 보러 온 한 미국 할머니가 우리를 붙잡고 ‘정말 감동받았다. 이런 전시는 처음이다’고 말해 놀랐다”며 “한국의 뛰어난 몰입형 미디어 콘텐츠를 보여줘 하나의 ‘문화 브랜드’로 성장할 계기를 뉴욕에서 만들고 싶다”고 다짐했다.뉴욕=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사진)의 출간되지 않은 첫 소설 원고가 뒤늦게 발견됐다. 21일(현지 시간) 영국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울프가 1907년 집필한 소설 ‘바이올렛의 삶’이 다음 달 7일 출간된다.‘바이올렛의 삶’은 울프의 첫 소설로 알려졌던 ‘출항’보다 8년이나 앞선 원고로 거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 3편으로 구성됐다. 울프가 이 소설을 집필하기 전 줄거리만 정리한 초안이 미국 뉴욕 공립도서관에 남아 있었지만 전문가들은 울프가 초안만 쓰고 실제 소설은 완성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해 왔다. 하지만 우르밀라 세샤기리 미국 테네시대 교수가 울프의 자서전 에세이 ‘지난날의 스케치’에 대해 연구하던 중 우연히 영국 워민스터 인근에 있는 한 귀족의 저택에서 완성된 원고를 발견했다. 이 귀족은 울프의 가족과 교류가 잦았던 인물이다. 세샤기리 교수는 이 저택의 기록 보관실에 갔다가 타자로 완성된 원고를 찾았다고 한다. 이 원고가 출간되지 않았던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세샤기리 교수는 발견된 원고에 대해 “작가가 우울하고 어려운 주제만 다뤘다는 인식을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25m 길이 캔버스 천에 그려진 전남 신안 바다. 파도가 일렁이는 해변을 묘사한 듯한 작품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쓰레기로 점령된 해안가의 현실이 보인다. 비닐, 페트병, 폐그물, 부표가 뒤섞인 풍경. 바다는 더 이상 낭만적 기억이 아닌 지구적 위기의 현장임이 드러난다. 강홍구 작가의 개인전 ‘두 개의 바다’가 서울 종로구 전시 공간 공간풀숲에서 최근 개막했다. 전시는 바다 생태를 주제로 20여 년간 작품 활동을 이어온 강 작가의 회화 40점을 선보인다. 특히 전시장에선 작가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바다와 다시 마주한 현실 속 바다가 나란히 교차한다. 바다와 하늘을 웅장하게 담아낸 풍경 연작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닷가의 생명체와 해양 쓰레기가 한 화면에 등장하는 작품들은 오늘날 바다 생태계를 담았다. 강 작가는 이번 전시의 중심 작품인 ‘25미터 신안 바다’에 대해 “해변이 거대한 쓰레기처리장처럼 보일 때가 있다”며 “폐어망과 플라스틱을 비롯해 세계 바다를 뒤덮은 해양 쓰레기 문제를 환기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신안 어의도 출신인 강 작가는 2005년부터 고향과 바다를 오가며 작업을 해왔다. 최근에도 ‘신안바다: 뻘, 모래, 바람’, ‘무인도와 유인도―신안바다 II’ 등의 전시를 통해 신안 프로젝트를 선보여 왔다. 전시 공간인 공간풀숲은 환경·안전·보건 분야의 인재 양성과 문제 해결을 위해 2018년 설립된 비영리재단 ‘숲과나눔’이 운영한다. 숲과나눔이 만든 환경 분야 온라인 기록 시스템인 ‘환경아카이브풀숲’을 중심으로 환경 단체의 활동과 예술의 결합을 실험하고 있다. 7월 개관전으로 시민환경운동사를 담은 사진과 기록을 모은 ‘기록과 기억―함께사는길 30년’ 전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10월 18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25m 길이 캔버스 천에 그려진 전남 신안 바다. 파도가 일렁이는 해변을 묘사한 듯한 작품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쓰레기로 점령된 해안가의 현실이 보인다. 비닐, 페트병, 폐그물, 부표가 뒤섞인 풍경. 바다는 더 이상 낭만적 기억이 아닌 지구적 위기의 현장임이 드러난다.강홍구 작가의 개인전 ‘두 개의 바다’가 서울 종로구 전시 공간 공간풀숲에서 최근 개막했다. 전시는 바다 생태를 주제로 20여 년간 작품 활동을 이어온 강 작가의 회화 40점을 선보인다. 특히 전시장에선 작가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바다와 다시 마주한 현실 속 바다가 나란히 교차한다. 바다와 하늘을 웅장하게 담아낸 풍경 연작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닷가의 생명체와 해양 쓰레기가 한 화면에 등장하는 작품들은 오늘날 바다 생태계를 담았다. 강 작가는 이번 전시의 중심 작품인 ‘25미터 신안 바다’에 대해 “해변이 거대한 쓰레기처리장처럼 보일 때가 있다”며 “폐어망과 플라스틱을 비롯해 세계 바다를 뒤덮은 해양 쓰레기 문제를 환기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신안 어의도 출신인 강 작가는 2005년부터 고향과 바다를 오가며 작업을 해왔다. 최근에도 ‘신안바다: 뻘, 모래, 바람’, ‘무인도와 유인도-신안바다 II’ 등의 전시를 통해 신안 프로젝트를 선보여왔다.전시 공간인 공간풀숲은 환경·안전·보건 분야의 인재 양성과 문제 해결을 위해 2018년 설립된 비영리재단 ‘숲과나눔’이 운영한다. 숲과나눔이 만든 환경 분야 온라인 기록 시스템인 ‘환경아카이브풀숲’을 중심으로 환경 단체의 활동과 예술의 결합을 실험하고 있다. 7월 개관전으로 시민환경운동사를 담은 사진과 기록을 모은 ‘기록과 기억-함께사는 30년’ 전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10월 18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처음 (한국 소설) 번역 일을 시작할 때는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알린다는 마음을 원동력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국어를 영어로 옮길 훌륭한 번역가가 정말 많아졌어요.”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번역해 2016년 영국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을 받은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 씨(38)가 화상 강연으로 한국 독자들을 만났다. 스미스 씨는 20일 서울 용산구에서 열린 ‘2025 현대카드 다빈치모텔’ 행사에서 열린 강연 ‘한국 문학을 세계로 이끈 번역의 힘’에 강연자로 나섰다. 그는 “영문학을 전공하고 생업에 대해 고민하던 중에, 영국 사람들이 잘 모르는 언어를 배우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며 “당시엔 한국어는 번역본을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한국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스미스 씨는 런던 도서전에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여하면서 한강 작가의 작품을 번역할 기회를 갖게 됐다. 그는 “사람들은 제가 한국 문학 수백 권을 읽은 뒤 한 작가의 작품을 골랐을 거라 생각하지만, 실은 두 번째로 읽은 책”이라며 “하지만 수백 권을 읽은 뒤였더라도 제 선택은 ‘채식주의자’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미스 씨는 이날 한 작가의 작품 중에서 ‘소년이 온다’를 특별히 언급하기도 했다. 작품 속 몇 장면을 좋아하는 대목으로 꼽았다.“광주의 소년 ‘동호’가 양치질을 하거나 한옥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부분의 구체적인 묘사가 그 시대 소년의 평범한 삶을 보여줍니다. 그의 죽음을 통해 독자는 과거를 돌아보게 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단순한 계산기에서 시작해 이제는 인간과 비슷한 의사소통 능력을 갖추기까지 인공지능(AI)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AI는 정말로 창의성을 지닐 수 있고 도덕적인 판단마저 가능해질까. 우리의 일상에 빠른 속도로 스며들고 있는 AI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을 비전문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명료하고 친근한 문체로 풀어낸 책이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UNSW)에서 AI를 연구하는 저자는 AI 분야에서 500편이 넘는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 여러 국제 학술지의 편집장과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자동 추론, 제약 프로그래밍, 기계 학습 등 AI의 다양한 영역을 연구한 저자가 책에서 강조하는 건 AI가 인간의 지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AI는 본질적으로 ‘인공적’이다. 저자는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흉내내며 발전해 온 과정을 크게 두 가지 단계로 나눠 보여준다. 첫 번째는 ‘기호의 시대’로 AI가 단순한 계산을 하는 수준에서 시작해 스스로 사고하는 존재로 성장하는 초기의 여정을 말한다. 그다음 ‘학습의 시대’는 이른바 ‘딥러닝’이라고 불리는 시기. 컴퓨터가 인간처럼 무언가를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과정에 돌입한 걸 의미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AI가 감정이나 상식이 결여된 기계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그러면서도 이 기술이 인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거대한 변혁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짚는다. AI 윤리 문제 등을 보다 진지하게 논의하고, 대중과 전문가에게 AI 지식을 알기 쉽게 전달할 의무가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저자의 의도대로 책은 역사적인 사례와 실생활의 예시가 적절히 배치돼 있다. 독자가 AI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이나 과도한 기대를 갖지 않도록 돕는다. 또 AI가 현재와 미래 사회에 미칠 긍정적 영향과 부작용을 모두 짚은 점도 인상적이다. 우리는 이제 AI와 관련된 윤리적·사회적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고민이 필요한 시기니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김상민 전 검사가 김건희 여사에게 고가의 그림을 건네고 공천을 청탁한 혐의로 18일 구속됐다. 그가 전달한 그림은 이우환 화백(89)의 ‘점으로부터 No.800298’. 하지만 이 그림은 진위 여부가 계속 논란이 됐다.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회에서는 위작으로, 진품 감정서를 발급했던 한국미술품감정센터는 진품으로 판단했기 때문. 같은 작품을 두고 왜 이렇게 판단이 엇갈린 걸까.최근 국내에선 미술품 진위 논란이 자주 주목받고 있다. 최근까지 법정 소송이 이어진 천경자 화백(1924∼2015)의 ‘미인도’가 대표적 사례다. 미술계에서 작품을 두고 공방을 벌이는 건 해외도 마찬가지. 한국도 감정이나 유통 측면에서 좀 더 투명한 시스템을 만들어 논란 가능성을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엇갈린 판정’ 안목 감정의 한계 먼저 이 화백의 그림을 위작으로 판단한 이유를 보자.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회가 가장 큰 문제로 본 대목은 ‘유통 과정’이다. 해당 작품이 대만 경매에서 3000만 원에 낙찰된 뒤 한국 갤러리에서 1억 원대에 거래되기까지의 과정이 ‘비정상적’이라는 지적이다. 이 밖에도 물감의 색이나 캔버스 재질이 오리지널과는 차이가 난다는 의견도 나왔다고 한다. 반면 진품으로 본 한국미술품감정센터는 구체적인 사유를 밝히지 않고 있다. 센터 관계자는 “해당 작품을 어떻게 판단했는지는 물론이고 감정을 했는지도 확인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두 기관의 감정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두 기관의 모체는 모두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감평원)이다. 2019년 감평원에서 1, 2대 주주가 나와서 만든 기관이 한국미술품감정센터이고, 같은 해 감평원이 문을 닫은 뒤 화랑협회는 자체적으로 감정을 진행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감정 방식이다. 미술계의 한 관계자는 “대부분 갤러리 대표나 딜러, 미술사 연구자나 평론가 등이 참여해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안목 감정에 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때문에 어떤 작품이 갤러리에서 진품 감정서를 받더라도, 이를 100% 진품이라고 신뢰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작품을 거래하는 갤러리가 진품을 보증한다는 의미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사동의 한 갤러리 대표 A 씨는 “이 화백의 작품은 작가가 살아 있는데, 이해 당사자인 딜러가 포함된 제3자가 진위를 보증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카탈로그 레조네’ 만들어야 결국 ‘점으로부터 No.800298’의 진위는 이 화백이 직접 나서지 않는 한, 확실한 결론을 내는 게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이 화백은 2016년 위작이 대량 유통되는 사건으로 홍역을 치른 뒤 한국 미술계와 거의 교류를 끊고 있다. 미술계 관계자는 “과거엔 이 화백도 한국 갤러리들이 요청하면 진위 여부를 확인해 주곤 했다”며 “하지만 요즘은 해외 갤러리하고만 전속 계약을 맺고 한국 갤러리엔 작품을 거의 주지 않는 상황”이라고 했다. ‘미인도’ 위작 논란도 여전히 결론을 내기 어려운 상황. 2016년경 작가는 생존 당시 위작이라고 했는데, 검찰은 진품이라고 판단해 사회적 논란이 일었다. 천 화백의 유족은 검찰을 상대로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했지만 4일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했다. 다만 법원은 이 과정에서 작품의 진위 여부는 판단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미술품은 공산품이 아니기 때문에 위작 감정이나 유통에 섬세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미 오래전에 작고한 작가가 아니라면, 해외처럼 ‘카탈로그 레조네’(한 작가의 작품 전체를 기록한 도록) 제작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한 미술계 전문가는 “결국은 작품 출처를 확실하게 만들고, 작가가 진품임을 보증하는 작품을 소장하는 게 최선이다”라고 조언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사진)가 넷플릭스 콘텐츠 가운데 처음으로 누적 시청 수 3억 회를 돌파했다. 17일 넷플릭스 공식 사이트 투둠에 따르면 케데헌의 누적 시청 수는 14일 기준 3억1420만 회를 기록했다. 지금까지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화 및 시리즈를 통틀어 최다로, 이 수치가 3억 회를 넘은 것은 케데헌이 처음이다. 6월 20일 공개된 케데헌은 13주 연속 영어 영화 10위 안에 올랐으며, 이달 8∼14일에도 시청 수 2260만 회를 기록해 주간 1위 자리를 지켰다. 넷플릭스 역대 전체 시청 수 2위는 ‘오징어 게임 시즌1’의 2억6520만 회다. 케데헌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은 ‘골든(Golden)’이 통산 5주째 정상을 차지하는 등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핫 100’에 8곡이 10주 연속 동시 진입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6일(현지 시간) 세상을 떠난 로버트 레드퍼드는 20세기 ‘할리우드의 전설’로 불린 배우이자 감독, 제작자. 1960년대 베이비붐 세대와 맞물려 미 영화계에 등장한 사조인 ‘뉴 할리우드 시네마’를 대표하는 아이콘이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WP)나 버라이어티 등은 별세 직후 앞다퉈 ‘우리가 사랑했던 레드퍼드 필름’을 소개했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에서도 반향이 컸던 고인의 작품들을 골라봤다.● 사기꾼 & 열혈기자, 로맨틱가이레드퍼드의 필모그래피에서 빠질 수 없는 초기작은 역시 1969년 서부극 ‘내일을 향해 쏴라’다. 원제는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당시 국내에선 내수용으로 제목을 바꾼 경우가 많았는데, 이 작품은 한국 제목이 낫다는 의견도 있었다. 레드퍼드는 11세 연상인 ‘당대의 스타’ 폴 뉴먼에게 밀리지 않는 근사한 카리스마를 뽐냈다. 뉴먼과 다시 호흡을 맞춘 1973년작 ‘스팅’은 베트남전쟁 직후 혼란의 시기를 반영한 작품. 고인은 초짜 사기꾼 조니 후커 역을 맡아 영악하게 변해 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대공황이 배경인 범죄코미디지만, 사회 불안 등 1970년대 정신을 잘 담아낸 고전이다.사회적 현실을 반영한 영화도 많다. 1976년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에선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친 기자 밥 우드워드 역을 맡았다. 그가 “정치 스릴러의 아버지”(미 뉴욕타임스·NYT)로 불리는 결정적 계기였다. 1975년 ‘콘도르’도 냉전 시대 불신과 음모를 잘 담아냈다. 멜로 연기 역시 탁월했다. 1973년 영화 ‘추억(The Way We Were)’에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했다. 메릴 스트립과 아프리카의 서정적 로맨스를 그린 1985년작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지금도 인생작으로 꼽는 이들이 많다. 유부녀(데미 무어)를 유혹하는 억만장자로 나온 ‘은밀한 유혹’(1993년), 신입 방송인(미셸 파이퍼)을 이끄는 베테랑 앵커를 연기한 ‘업 클로즈 앤 퍼스널’(1996년)도 화제였다. ● 일흔 넘어도 도전적인 눈빛 1980년 감독 데뷔작 ‘보통 사람들’은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한 명작. 가족의 상실과 회복을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호평이 컸다. 다만 함께 후보에 올랐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분노의 주먹(Raging Bull)’을 제친 건 “오스카 사상 최악의 선택”이란 논란도 상당했다. 1992년 브래드 피트가 출연해 낚시 붐을 일으켰던 ‘흐르는 강물처럼’과 1994년 오스카 작품상·감독상 후보에 올랐던 ‘퀴즈 쇼’도 두고두고 회자된 작품. 특히 1998년 ‘호스 위스퍼러’는 고인이 감독이자 주연을 맡아 무르익은 연기력과 연출력을 보여줬단 극찬을 받았다. 말년의 대표작으론 2013년 ‘올 이즈 로스트(All Is Lost)’가 자주 언급된다. 대사가 거의 없는 1인극으로 “레드퍼드의 가장 끝내주고 도전적인(the finest and the bravest) 연기”(WP)로 평가받는다. 2018년 ‘미스터 스마일’은 노년의 갱스터를 연기하며 전설의 퇴장을 완성한 작품. 다만 스스로 “은퇴작”으로 공표했다가, 이후 ‘어벤져스: 엔드게임’ 등에 출연하며 “섣부른 결정이었다”며 사과하기도 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