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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문협회(회장 김재호)는 일일교사 프로그램에 참가할 초중고교 150곳을 25일부터 선착순으로 모집한다. 일일교사 프로그램은 일선 취재 현장에서 뛰고 있는 신문 기자들이 신청 학교를 방문해 취재와 보도과정을 비롯해 신문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학생들의 질문에 답해주는 행사다. 5∼7월과 9∼11월 두 차례로 나눠 진행한다. 문의 www.presskorea.or.kr, 02-733-2251}

도예가 이헌정 씨(47·사진)는 개인전을 ‘여행’이라고 부른다. 예술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은 물리적인 공간 이동 못지않은 모험을 필요로 하고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26번째 여행-손’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번 개인전은 도자기에 옻칠과 나전을 접목한, 개인적으로는 처음 떠난 여행길의 기록이다. 이 여정에서 그는 전통과 현대의 충돌을 시도했다. 도자기에 옻칠을 해 반질반질 윤을 내고 나비 모양의 나전을 박거나, 집 모양의 콘크리트 위에 옻칠을 하고 자개를 박아 넣었다. 질박한 맛은 예전의 작풍 그대로인데 반짝이는 윤은 낯설다. “광을 내려고 옻칠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광을 손쉽게 내주는 재료들이 많은데 끝도 없는 손노동이 필요하다. 전통 공예가에게서 옻칠하는 법을 배우면서 내가 너무 설렁설렁 했다는 생각을 했다. 예술은 결과물이 아니다. 과정의 흔적을, 10번의 옻칠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시 작품에는 이지러지거나 깨진 달항아리에 나전을 붙인 것들이 있다. 달항아리의 감수성을 현대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달항아리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완벽하게 제어하기보다 놓는 것이다. 일정 정도 모양을 잡은 뒤 나머지는 불이 구우면서, 바람이 말리면서 해결하게 놓아두는 것이다.”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 영국의 세계적인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그의 작품을 구입해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도예가다. 세계 최대의 도자벽화인 서울 청계천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가 그의 작품이다. 13∼28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네이처 포엠빌딩 박여숙화랑. 02-549-7575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독창적인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너무 크다고요? 무엇을 기준으로 크다고 하는지 되묻고 싶네요.” 이라크 출신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 씨(64)가 11일 오후 자신이 설계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DDP) 4층 잔디사랑방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21일 DDP 개관을 기념해 이날부터 열리는 전시회 ‘자하 하디드 삼백육십도’ 홍보를 위해 방한했다.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건축가의 기자회견장은 내외신 기자들로 꽉 찼고 예정된 30분 동안 날 선 질문과 허스키하고 빠른 어조의 당당한 답변이 오갔다. 그의 건축 파트너인 패트릭 슈마허 자하하디드 건축사무소 공동대표(53)가 옆에서 “DDP를 둘러싼 논란은 디자인이 너무나 독창적이기 때문”이라고 거들기도 했다. ―어떤 점에서 DDP가 독창적인가. “건축물과 지형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그런데 DDP는 건축물 자체가 지형이 됐다. 지붕이 잔디로 덮여 있는 것만 보더라도 새로운 지형을 창조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케일이 과하다는 지적이 있다. “스케일은 건축가에게 주어진 조건이다. DDP를 설계하는 건 집 한 채, 사무실 하나 짓는 것과 다르다. 지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곡선을 많이 썼는데 박스 형태로 똑같은 기능을 하는 건물을 설계했다면 훨씬 커보였을 것이다.” ―2020년 도쿄 올림픽 주경기장도 일본 경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너무 크게 짓는다는 지적이 있다.(그가 설계한 주경기장은 8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매머드 급이다) “여러분도 크다고 생각하는지 되묻고 싶다. 부엌이나 침실은 줄여서 지을 수 있다. 하지만 경기장은 적정 수용 인원이란 기준이 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아마 일본인이 아니라 외국인이 설계를 맡아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 같다.” ―디자인 관점에서 보면 서울은 어떤 도시인가.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듯하다. 중요한 건 어버니즘(도시화)을 어떻게 구현하느냐이다.” ―어버니즘이 잘 구현된 도시란…. “새로운 건물을 짓는 일에만 열중할 것이 아니라 도시의 변화와 특성을 고려해 이를 건축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전에 여성 건축가로서 ‘끊임없이 전투를 치르는 기분’이라고 했다. “건축가라는 직업 자체가 너무나 힘들다. 다양한 사람과 끝없이 협상에 협상을 거듭해야 한다. 이런 전투가 여성에게 더 힘든 건 사실이다. 여성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동료, 스승, 건축주, 정치인을 설득해야 했다.” ―이번 전시회의 부제가 ‘스푼에서 도시까지’이다. 작은 소품을 디자인하는 것과 건축의 차이는…. “반지를 디자인하든 건물을 디자인하든 기본은 비슷할 수 있지만 결과물을 만들어내기까지 과정은 건축이 훨씬 복잡하다. 다층적 공간을 설계해야 하니까.” 이 밖에 ‘DDP는 원래 동대문운동장이 있던 자린데 이런 역사적 요소를 설계에 어떻게 반영했나’라는 질문이 나왔다. 슈마허 대표는 대신 나서서 “공간 자체가 경기장의 느낌을 준다. 추상적이나마 경기장 터라는 분위기를 살려보려 했다”고 답했다. 기자회견이 끝나자 하디드 씨는 주위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전시장인 상상놀이터 로비로 향했다. 이리저리 휘어지는 비정형 공간에 곡선미가 두드러지는 숟가락, 식탁, 킬힐, 보석류, 소파 등 토털 디자이너 하디드 씨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 40여 점이 전시돼 있는 곳이다. “이런 곳에 살려면 이런 물건 들여놓고 살아야 돼”라고 말하는 듯했다. 전시회는 26일까지 계속된다. 다음 달 4일부터는 건축물 모형을 중심으로 2차 전시가 DDP 알림터 국제회의장에서 이어진다. 12일 오후 3시 DDP 알림 1관에서는 배형민 서울시립대 교수의 사회로 하디드 씨와 슈마허 공동대표가 참여하는 자하 하디드 포럼이 열린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이수진 감독(사진)의 ‘한공주’가 8일(현지 시간) 프랑스 도빌에서 폐막한 제16회 도빌 아시아영화제에서 2등상인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한공주’는 국제비평가상과 관객상도 받아 3관왕을 차지했다. ‘한공주’는 여고생 한공주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친구를 잃은 뒤 전학 가서 겪는 이야기를 그린 성장 영화다. ‘한공주’는 지난달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 1등상인 타이거상을, 지난해 말에는 마라케시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인 금별상을 수상했다.}

“독도에만 있는 우리 고유종으로 정원을 만들어 생태 주권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전달하고 싶습니다.” 세계적인 정원 디자이너 황지해 작가(38)가 세계 최초의 3차원(3D) 미니어처 가든쇼에 독도를 주제로 한 작품을 출품했다. 영국 왕립원예협회 주최로 5∼8일(현지 시간) 런던 트래펄가 광장 스트랜드 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번 미니어처 가든쇼는 3D 프린터를 이용해 정원을 실물의 50분의 1 크기인 미니어처로 제작해 선보이는 행사다. 영국과 호주 작가 9명과 황 작가 등 세계적인 정원 디자이너 10명이 초청받았다. 황 작가가 출품한 ‘백만 년 전에 날아온 편지-독도’는 섬기린초와 섬초롱꽃을 비롯해 독도와 울릉도에만 자라는 희귀종을 표현한 미니어처 정원이다. 변화무쌍한 인생을 은유하는 파도를 기본 구조로 독도에서 가장 큰 섬인 동도와 서도를 배치한 뒤 식물을 표현했다. 전체적인 구조물은 3D 프린터로 출력하고, 식물은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어 꾸몄다. 런던에 체류 중인 황 작가는 6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우리 고유종이 독도와 울릉도에만 자라는 현실은 독도가 한반도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말했다. “세상에서 독도에만 사는 우리 식물들의 존재가 독도 영유권의 분명한 근거가 되는 셈이죠. 독도는 오래전 우리가 받은 특별한 선물입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독도의 특수성과 독도가 지닌 심미적 가치, 아울러 생태 주권의 의미를 널리 알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영국 왕립원예협회는 런던 전시가 끝난 뒤 네덜란드 로테르담, 스웨덴 고센버그, 미국 덴버, 인도 뉴델리에서도 미니어처 가든쇼의 순회전을 갖는다. 8월에는 싱가포르 가든페스티벌에 참가하며 10월에는 일본 도쿄에서도 전시회가 열릴 예정이다. 황 작가는 9월 호주 시드니 가든쇼에 초청받았는데 독도 미니어처 정원을 실제 정원으로 만들어 출품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정원 문화가 발달한 영국에서 황 작가는 ‘첼시의 여왕’으로 불린다. 세계 최고 권위의 정원박람회인 ‘첼시 플라워 쇼’에서 한국적인 정원으로 2011년(‘해우소: 마음 비우기’)과 2012년(‘고요한 시간: DMZ 금지된 정원’) 연속으로 1등상을 받았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아현고가도로 철거 소식에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 1968년 개통된 국내 최초의 고가차도이다. 서울시청∼아현∼신촌을 잇는 939m의 고가도로를 보며 고마움이나 아름다움을 느낀 적은 없다. 그럼에도 내 젊은 시절 기억의 한 귀퉁이를 차지했던 익숙한 풍경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향년 46세인 누군가의 부고를 받는 듯했다. “시민의 삶에 기여한 매우 고마운 시설물로 기억될 것”이라는 서울시의 발표도 추모사로 읽힌다. 고가도로를 철거하는 이유는 교통 흐름을 방해하고, 도시 경관을 훼손하며, 낡아서 유지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건설할 때는 근대화의 상징이었으나 이젠 쓸데없이 예산만 축내는 흉물이 돼버렸다. 이는 산업유산이 맞이해야 하는 공통된 운명이다. 공장이나 제철소처럼 가동이 중단된 산업유산의 처리는 모든 선진국이 안고 있는 난제인데 철거보다 재생 쪽에 무게를 두는 추세다. 얼마나 창의적인 해법을 제시하느냐에 따라 흉물이던 구조물은 매력적인 랜드마크로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도심의 공중에 설치된 산업유산으로 재생에 성공한 사례가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과 프랑스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이다. 하이라인은 1934년 맨해튼 공중을 가로질러 건설된 화물 수송 열차노선이었다. 열차의 운송 비중이 낮아지면서 퇴물 취급을 받다가 1990년대 말 철거 결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인근의 주민들이 공공 용도로 쓰자는 제안을 했고, 뉴욕 시는 널리 아이디어를 구한 끝에 1.6km 길이의 공원을 조성해 2009년 개장했다. 지금은 꽃과 나무, 산책로와 벤치, 카페가 있는 맨해튼의 명물이 됐고 주변 땅값도 크게 올랐다고 한다. 하이라인의 모델이 된 곳이 1993년 완공된 프롬나드 플랑테이다. 지상에서 10m 높이에 1.4km 길이로 조성된 이 공중 산책로는 1859년 파리 12구 지역에 들어섰다가 용도 폐기된 폐선을 재활용한 것이다. 고가철길 아래 아치형 구조물도 허무는 대신 ‘르 비아딕 데 자르(예술의 다리)’라는 문화예술과 상업공간으로 새 단장해 2000년 개장했는데 관광 명소가 됐다. 우리도 상상해보자. 고가도로 위에 조성된 공원에서 유모차를 끌고 산책하는 모습을 말이다. 위에서 전망을 살피면 도심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질 것이다. 도심에 새로운 녹지를 확보하기가 어디 쉬운가. 철거로 인한 폐기물 처리 걱정도 없으니 친환경이라는 시대정신과도 맞다. 무엇보다 도시의 나이테를 지우지 않아서 좋다. 2003년 철거된 청계고가로의 광교∼청계천∼용두동 노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워커힐 왕래를 쉽게 하기 위한 길이었다고 한다(손정목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최고 권력자를 위해 만들어진 길이 시민들의 산책로가 됐다면 이보다 더 생생히 민주화를 체감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김정후 박사(도시사회학)는 “재활용을 통해 만족할 만한 수준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새로 짓는 것보다 몇 배의 노력이 든다. 쇠퇴한 산업유산을 성공적으로 재활용하는 과정은 사회가 성숙한 논의와 협의 과정을 이뤄가는 훈련”이라고 했다. 서울시는 15개의 고가도로를 철거했고, 나머지 85개도 형편을 봐가며 철거하겠다고 했다. 이 중에는 공원으로 조성해도 좋을 곳이 있을 것이다. 철거냐 재생이냐를 결정하는 데는 인근 지역 주민의 재산권까지 많은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흉물이라고 없애려고만 하지 말고 고쳐 쓸 수는 없을지 시민들에게 다양한 아이디어를 구했으면 한다.이진영 문화부 차장 ecolee@donga.com}
한국신문협회(회장 김재호)는 올해 개정된 초등학교 4학년 사회과 교육과정에 맞춰 인터넷판 ‘NIE 워크북’을 만들어 배포한다고 26일 밝혔다. 협회는 “개정 사회과 교과서 내용과 순서에 맞춰 관련 신문기사 1∼4개를 기사 형태 그대로 함께 수록해 교사들이 수업시간에 NIE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워크북은 28일부터 협회 NIE 커뮤니티(www.pressnie.or.kr)를 통해 파일 형태로 무료로 제공된다.}

건물이 말을 할 리 없다. 그런데 펜션 단지 ‘모아이’는 저희들끼리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듯하다. “머리가 꽤 크시네요”라고 말을 건네면 어디선가 팔이 튀어나와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러게요” 하고 웃을 것 같다. 경기 가평군 축령산 밑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펜션 모아이 역시 비일상적인 공간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칠레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처럼 노란색 머리통이 큰 객실 6개동과 객실 앞 카페 1개동으로 이뤄져 있다. 카페 위는 수영장이다. “건물에 표정을 주고 싶었어요. 건물 7개동의 앞면 모두 인근의 수목원으로 가는 2차로 쪽을 향해 있어요. 길이 막혀 차에 갇혀 있으면 자연히 펜션 쪽으로 눈길이 가면서 ‘저건 뭐지?’ 하고 궁금증을 갖게 되죠.”(구승민 꾸씨노 대표·45) 콘크리트 덩어리임에도 모아이가 표정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비정형 건축이기 때문이다. 건물 어느 곳도 반듯한 구석이 없다. 1층(약 23m²) 위에 이보다 훨씬 넓고 높은 2층(33m²)이 4.3m 길이의 캔틸레버(외팔보) 모양으로 삐죽 나와 얹혀 있다. 2층의 옆면이나 지붕은 모두 한번쯤은 꺾여 있어 노란색 착색 유리패널과 함께 표정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 내부 공간도 외부와 같이 여기저기 꺾여 있다. 1, 2층을 연결하는 노란색 가파른 계단을 제외하면 내부 공간은 단조롭다. 2층 침실의 침대에 누우면 바로 위로 뚫어놓은 둥근 천창으로 낮엔 빛이, 밤엔 별이 쏟아져 들어온다. “일상에선 체험하기 힘든 공간이죠. 인테리어에 들일 예산이 부족해 건물 디자인으로 해결했습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건물이 움직일 리 없다. 그런데 ‘더 벡터(The Vector·방향)’는 묵직한 노출콘크리트 덩어리임에도 날이 풀리면 얼음이 녹듯 꿈틀댈 듯하다. 이 비현실적인 운동감의 비밀은 디자인에 있다. 비스듬히 기울어 있는 세로축과 가로축을 중심으로 4개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바람개비 모양을 이루는데 미묘하게 뒤틀린 채 비대칭을 이루고 있어 바람개비 끝을 툭 건드리면 회전을 시작할 듯 생동감을 준다. 이름도 사방으로 뻗어있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경기 가평군 북한강변에 서북향으로 앉은 게스트하우스 더 벡터는 일상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비일상적인 즐거움을 주는 ‘노는 건축’이다. 지하 2층, 지상 2층, 총면적이 504.87m²(약 153평)인데 국도에서 15m 아래의 강가로 내려가는 가파른 비탈길에 들어서 있어 멀리서 보면 절벽에 바람개비가 박혀 있는 듯한 모양이다. 커다란 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호명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북한강이다. “북한강이 곧 집 마당이 되는 셈이죠. 일상에서 벗어나 쉬면서 재충전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호사스러운 공간이 자연과 가까이 있는 집 아닐까요?”(최철수 초이건축 대표·48·사진) 건축주인 니콜라스 전은 “강물만 감상하고 있어도 하루 종일 지루하지 않다“고 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창에 하얗게 끼어있던 성애가 녹으면서 강물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밤엔 물 위로 별이 쏟아져 내리지요. 강물이 얼어붙는 소리와 얼음이 서서히 녹으면서 내는 소리, 그 소릴 들으며 개가 컹컹 짖는 소리까지 심심할 틈이 없어요.” 건물 안의 공간 경험도 비일상적이다. 현관으로 들어서면 거기가 벌써 4층이다. 층을 막아놓지 않아 뻥 뚫린 공간을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3층, 2층, 1층이 차례로 나온다. ‘1층엔 거실, 2층은 침실’처럼 수평으로 공간의 용도를 구분하는 관행도 깼다. 세로축에 주방, 거실, 바가 있는 놀이방을 배치하고 2, 3층에 걸쳐 있는 가로축에 침실 3개를 두었다. 건물의 중심에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공용 공간을, 건물 끝에 개인 침실을 둔 것은 동선을 따져도 꽤나 효율적인 배치다. 강가에 바짝 붙여 서북향의 집을 지으려면 채광과 습기 대책이 필요하다. 최 대표는 건물 뒤쪽 창으로 빛이 들어오는 남쪽에 성큰가든을 두었고, 통풍이 되도록 전 층을 뚫어놓았다. 완성도가 높은 건축물과 달리 배경이 되는 조경이 거칠게 마무리돼 바람개비 모양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은 점은 아쉽다. 최 대표는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베트남 일본 우루과이 스위스 미국을 오가며 살았다. 외양과 인테리어 모두 “똑같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집들을 돌며 놀던 기억이 좋아” 집 짓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됐다. 그래서인지 그는 조형성이 강한 건축 작업을 해왔다. “우리 건축은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어딘가 경직되고 딱 맞아떨어져야 하는 스타일은 우리와는 맞지 않아요. 부드럽고 풍부한 한국적인 감성이 담긴 건축을 하고 싶습니다.”가평=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세계 유명 랜드마크 건물의 건설 비화를 알고 싶다면 굳이 이 책을 사볼 필요는 없다. 이 책의 미덕은 부제인 ‘수직에서 수평으로, 랜드마크의 탄생과 진화’에 요약돼 있듯 근대도시가 성장하며 탄생한 랜드마크의 진화 과정을 꼼꼼히 짚으며 어떤 도시를 만들 것인가에 대해 분명한 주장을 한다는 점이다. 랜드마크란 땅(land)의 이정표(mark)라는 글자 그대로 멀리서도 보이는, 그 지역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자연물이나 인공 구조물이다.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인 저자는 국가의 상징으로서의 랜드마크에서 출발한다. 자유의 여신상, 에펠탑, 런던아이, 워싱턴 기념비가 여기에 속한다. 랜드마크가 되려면 우선 커야 한다. 1886년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선물로 준 자유의 여신상이 특별한 이유도 거대함 때문이다. 조각상 높이만 94m, 무게가 225t이다. 집게손가락 하나가 2.44m다. 나라를 구한 영웅의 동상도 이렇게 크게 만들어진 적이 없고, 앞으로는 더욱 그러하다. 국가의 상징이던 랜드마크는 20세기 들어 도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경제적 도구로 변화한다. 기술과 자본력을 동원해 높이, 더 높이 지어올린 빌딩은 주거 상업 문화 시설을 한데 모은 ‘수직도시’로 진화했다. 빅벤의 높이를 능가하는 랜드마크가 불가능해 보이던 런던에도 2012년 유럽연합에서 가장 높은 72층(309.7m)짜리 더 샤드가 완공됐다. 사람들은 “런던의 상징인 세인트 폴 대성당을 장난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며 비난했고, 건축가인 렌초 피아노는 “모든 사람이 만족하는 건물을 만들었다면 그건 실패다”라고 맞섰다. 껌을 뱉으면 벌금을 내고, 태형도 존재하는 나라 싱가포르는 건물 디자인도 범생이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2001년 이후 경제 위기가 닥치자 대극장 에스플러네이드를 짓고, 카지노를 즐길 수 있는 복합 리조트 마리나 베이 샌즈를 건설했다. 열대과일 두리안을 닮은 에스플러네이드와 세 빌딩 위에 바게트 빵을 얹어놓은 듯한 마리나 베이 샌즈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돼 랜드마크로 대접받고 있다. 랜드마크 얘기하면서 두바이를 건너뛸 수 없다. “무엇이든 우주에서도 보일 정도로 커야 하고 스테로이드를 맞은 건축물처럼 우뚝 솟아야 한다”는 신념하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부르즈 칼리파(828m)를 지어 올렸다. 그리고 멈출 줄 모르는 높이 경쟁을 하다 경제 위기를 맞았다. 이른바 ‘고층 빌딩의 저주’다. 이제 웬만큼 높아서는 랜드마크가 되기 어렵다. 사람들은 남보다 높아지려는 욕망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꼭 높아야만 랜드마크일까. 그리고 서 있던 랜드마크를 눕히기 시작했다. 수평적 랜드마크다. 2001년 9·11테러로 미국 뉴욕 맨해튼 남부의 랜드마크였던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다. 미국은 보란 듯 더 높은 빌딩을 짓는 대신 나지막한 기념 공간을 짓고 공원을 조성해 시각적 심리적 상실감을 극복했다. 수평적 랜드마크는 이렇듯 건축과 조경이 어우러져 사람들이 머물며 여유를 즐기는 곳이다. 서울 광화문광장, 청계광장, 선유도공원이 수평적 랜드마크다. 가장 최신형 랜드마크는 일시적인 랜드마크다. 섬이나 건물을 대형 천으로 뒤덮는 식의 랜드아트마크와 2009년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됐던 스노보드대와 같은 이벤트성 랜드마크가 이에 속한다. 저자는 랜드마크를 “고정된 건축물이라기보다 사람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기대하게 만드는 건축물”이라고 재정의한다. 21세기형 랜드마크는 높아지기보다 낮고 길어지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유의 장’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성장 저개발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자고 제안한다. “21세기형 지속가능한 도시는 투자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살고 일하며 쉬는 곳이다. 도시는 테마주가 되길 포기해야 한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MBC 신임 사장 후보가 안광한 MBC플러스미디어 대표이사 사장(58), 이진숙 워싱턴지사장(53), 최명길 인천총국 부국장(54)으로 좁혀졌다. 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는 17일 오후 임시 이사회를 열어 신임 사장 지원자 13명에 대해 투표를 거쳐 득표 수가 많은 3명을 최종 후보로 뽑았다고 밝혔다. 방문진은 21일 오후 2시 정기 이사회를 열어 후보자 3명을 상대로 면접과 투표를 거쳐 차기 사장 내정자를 정한다.}

표지 그림과 달리 논객의 계보가 나오진 않는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의 시기를 논객이 쏟아낸 말로 돌아보는 책이다. 이들이 한 수 한 수 돌을 놓는 모습을 통해 시대의 바둑판을 그려 보자는 의도다. ‘응답하라 1994’의 논객 버전이라고나 할까. 논객이란 “사회과학이 담론의 시장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21세기 변화한 환경 속에서 판단의 기준을 제공했던 그들”이며, 책에 나오는 9명은 모두 진보 논객이다. 이는 어쩌다 진보가 몰락하고 야권은 분열해 2012년 대선을 내주고 말았느냐는, 진보 편에 서서 진 게임을 복기하는 것이 집필 동기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수식어를 빌려 등장 순서대로 논객을 소개하면 이렇다. 논객 시대를 열어젖힌 강준만, 풍자와 조롱으로 싸우는 진중권, 부도난 정치도매상 유시민, 급진적 불교도 마르크스주의자인 박노자, 청년들에겐 꼰대이고 386에겐 광대인 우석훈, 지식인을 비판하는 건달 김규항,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와 음모론적 정치 선동가 김어준, 혁명 투사가 된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꺼림칙한 절필 선언문을 남기고 붓을 꺾은 고종석이다. 중학교 시절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을 읽고 논객이 된 저자는 논객의 책을 근거로 실명 비판하는 강준만식 글쓰기로 논객들을 균형감 있게 비판한다. 내 편 네 편 가리지 않고 입바른 소리를 하던 진중권은 통합진보당 총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의 부정행위에 눈감고, 2012년 대선에선 닥치고 정권 교체를 외친다. ‘개 잡고 닭 잡는 일은 진중권에게만 시키는’ 범야권세력에 굴복함으로써 본인도 총기를 잃고, 야권 세력도 패배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안철수 지지로 돌아선 강준만에 대해선 “‘김대중 죽이기’에서 박찬종을 비판할 때 썼던 논리를 고스란히 안철수를 향해 휘둘러 보라”고 따지고,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 유시민에겐 “노무현의 사후 자서전이 아니라 평전이 필요하다”고 주문한다. 저자의 촘촘한 분석과 유려한 문장 덕분인지 논객 비평은 시대를 읽어내는 괜찮은 방법론 같다. 시대를 온전히 읽어내려면 보수 논객의 논리도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비평의 대상이 될 만한 책을 낼 정도로 열정 있고 함량도 되는 보수 논객으로 누가 있을까.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SBS 인기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는 서울의 명품 건축물 둘이 등장한다. 세계적인 건축가인 영국의 자하 하디드가 설계해 다음 달 개관하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DDP)’와 스타 건축가 조민석이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설계한 최고급 주상복합 ‘부티크모나코’(2008년)다. DDP는 액션 영화에 출연하는 여주인공 천송이(전지현)가 와이어신을 찍다 사고를 당하는 장면(13회)에서 나왔다. DDP는 건물 전체를 위로 당겨 지탱하는 기술을 이용해 기둥 없이 탁 트인 공간이 많다. 드라마를 촬영한 콘퍼런스 홀인 알림1관의 경우 2991m² 공간에 높이가 20m인데 내부에 기둥이 하나도 없어 실내에서도 와이어신을 찍을 수 있었다. 천송이가 건물 내부로 들어가기 전 장면에서는 내외부 조명과 건물을 덮고 있는 알루미늄 패널이 반사한 주변 불빛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DDP의 야경이 나왔다. 김윤희 DDP경영단 홍보팀장은 “헬기캠으로 공중에서 찍은 홍보용 DDP 영상자료를 제공받는 것 외에는 따로 대관료를 받지 않았다”며 “국내 제작사는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촬영 요청이 쇄도해 촬영 관련 대관료 규정을 만들고 있다”고 전했다. 부티크모나코는 초능력을 지닌 도민준(김수현)이 악역인 이재경(신성록)을 건물 옥상에서 떨어뜨리는 장면(14회)에서 등장했다. 독일건축박물관이 주관하는 세계 최우수 고층빌딩 어워드에서 5위권 안에 들었던 수작이다. 제작사인 HB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대본에 ‘교통량이 많은 고층 건물’로 나와 있었고, 이재경이 떨어지는 장면이 중요해 건물도 멋있어야 했다”며 “이틀간 옥상을 빌려 촬영했으며 얼마를 지불했는지는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도심 속 계단은 쉼표 같은 존재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의 널찍한 계단이나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스페인 광장 계단을 떠올려 보라. 계단의 주인은 바쁘게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계단참에 앉아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연인들, 가위바위보 놀이를 하는 아이들, 계단의 높이가 선사하는 도시 풍경이나 간이 야외 공연을 감상하며 다리를 쉬는 과객들이 계단의 주인공들이다. 곽희수 이뎀도시건축 대표(47·사진)는 이런 광장 같은 야외 계단을 상업 건축에 시도했다. 충북 청주시 성화동에 최근 완공한 ‘F.S.ONE’은 제2종 근린생활시설, 쉽게 말해 상가건물이지만 건물 전면을 차지하는 대형 계단으로 기억되는 건축이다. 건물 이름도 ‘floor(층)’와 ‘stair(계단)’가 하나라는 뜻으로 지었다. “마당이 있는 임대 건물을 짓고 싶었어요. 마당은 1층이나 옥상에 둘 수밖에 없어 중간층에 사는 세입자들은 이용할 수가 없죠. 그래서 모든 층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가운데 마당 같은 계단을 둔 겁니다. 이곳에선 약혼식을 올릴 수도, 벼룩시장이나 설치미술 전시가 열릴 수도 있습니다. 계단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저도 궁금하네요.” 야외 계단은 실내 디자인도 지배한다. 지상 5층 건물의 2∼4층에 계단이 있는데, 내부도 1∼3층이 하나로 묶여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깥 계단의 기울기에 조응해 천장이 사선으로 쭉 올라가는 구조다. 천장엔 외피에 쓰인 노출 콘크리트가 서까래처럼 골을 만들며 힘 있게 뻗어 있어 역동적인 분위기를 낸다. 건축주는 공공건물의 계단처럼 건물 앞을 지나는 모든 이에게 열린 계단을 두고 싶었지만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결국 안으로만 열린 공간이 됐다. 그래서 현재 입주해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 갤러리 방문객들만 계단을 이용할 수 있다. F.S.ONE이 기존 상가건물과 다른 점은 계단만이 아니다. 임대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대한의 공간을 뽑아내도록 설계된 무표정한 빌딩들과 달리 총면적(967.3m²)이 법이 허용하는 면적의 3분의 1 규모이고, 표정도 강하다. 노출 콘크리트 외관은 육중하고 모가 났으며 돌출적이다. 웬만한 무기로는 꿈적도 않는 벙커나 근육질의 로봇 같다. 대로변에서 보이는 건 건물의 정면이 아니라 옆면이어서 옆얼굴이 보이도록 돌아앉은 모양새다. “상가 건물의 문법을 바꾸고 싶었어요. 예전과 달리 공실률이 높은 지금은 큰 땅에도 예산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작게 짓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는 주변에 ‘묻어가는’ 법이 없는 마초적인 건축 스타일로 기존의 건축 문화에 강한 문제 제기를 해왔다. 럭셔리 펜션인 ‘모켄’(2011년)으로 호텔-리조트-펜션-민박의 서열 관계를 뒤집었다. ‘고소영 빌딩’으로 불리는 서울 청담동의 상가건물 ‘테티스’(2007년)는 건물 앞에 주차를 못하도록 설계해 대문의 기능을 살려냈고, ‘원빈 집’으로 불리는 강원 정선 ‘42번 루트하우스’(2007년)는 도로 쪽에 바짝 붙여 집을 지어 국도변의 표정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얼마 전 온라인에서 해외 브랜드의 가방을 샀어요. 그런데 막상 매보니 제 체형과 맞지 않더군요. 그동안 유학파 건축가들이 우리 도시에 해외 스타일의 건축을 ‘유통’시켜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한국 도시의 역사는 50년 정도밖에 안돼 고유의 스타일이 정착되지 않았습니다. 이곳의 역동성을 담아내는, 우리 몸에 맞는 건축을 고민했던 건축가로 기억됐으면 합니다.”청주=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일본 대중문화 소비에는 정치적인 시차가 존재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1910∼1998)의 영화도 그가 죽고 난 뒤에야 볼 수 있었다. 그는 1998년 9월 별세했고 그해 10월 일본 문화가 개방돼 ‘라쇼몽’(1951년)이나 ‘7인의 사무라이’(1954년)를 합법적으로 감상하기까지 거의 반세기가 걸렸다. 이 자서전도 일본 현지에 단행본으로 나온 때가 1984년이니 국내에서 번역되기까지 30년이 걸린 셈이다. 그의 영화와 자서전을 비롯해 모든 콘텐츠의 저작권을 미국 출판사 크노프의 구로사와 프로덕션이 보유하고 있어, 이 사실을 수소문해 판권 계약을 하는 데만도 1년 반이 걸렸다고 한다. 책장을 열면 세계적인 거장의 고전 영화가 그러하듯 오래전 제작됐으나 그 빛이 바래지 않은 이야기들이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영화계 데뷔 전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네 살 위의 형이다. 수재이자 염세주의자였던 형은 28세에 자살하기 전까지 영화 평을 쓰고 무성영화 시절 변사로 활약하며 동생의 영화 수업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별 볼일 없는 화가 인생을 접고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야마모토 가지로 감독이 ‘인생 최고의 스승’이 됐다. 그리고 이 대목부터 책장을 넘기는 속도도 빨라진다. 야마모토 감독의 조감독 시절부터 데뷔작인 ‘스가타 산시로’(1943년)를 비롯한 명작이 탄생하기까지의 뒷얘기가 전시 및 전후 혼란기 무성영화에서 토키(유성영화) 시대로 접어든 일본 영화계 현장을 배경으로 영화처럼 펼쳐진다. 두 번째 작품 ‘가장 아름다운 자’(1944년)는 공장에 동원된 여성 자원봉사대의 얘기다. 그는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여배우들에게 화장을 지우고 영화 배경인 공장 기숙사에서 일반 여공들과 똑같이 먹고 자면서 매일 8시간 넘게 일하게 했다. ‘추문’(1950년)의 ‘실패’는 등장인물에게 끌려다녔기 때문이라고 적는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살아 있어 작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저절로 연필이 미끄러지듯 그의 삶을 쓰고 있었다.” 전시 내무성 검열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선 노 감독의 분노가 지면을 뚫고 나올 듯하다. 생일 케이크가 나와도 미국적이라며, 여자의 무릎만 보여도 외설적이라며 잘랐다. 전후엔 영화사 노조의 발언권이 강해 배우 채용 심사도 하고, 시나리오도 심의해 그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그는 평생 30편의 영화를 찍고, 89세를 일기로 죽기 3년 전까지 시나리오를 썼다. 하지만 자서전은 11번째 영화 ‘라쇼몽’에서 끝난다. 일본 감독이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린 첫 작품으로, 하나의 사건에 대해 등장인물들이 전혀 다른 증언을 하는 줄거리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지금으로서는 여기서 멈추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라쇼몽’ 이후의 나에 대해서는 그 뒤의 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사람의 생명, 강인한 기원을 투영하지 않는 한 진정한 감동을 주는 건축물은 태어날 수 없다. … 중요한 것은 그 땅의 지형과 ‘바람의 노래’가 들려주는 언어를 듣는 일이다.” 유동룡으로 태어나 이타미준(사진)으로 살다 간 건축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이타미준: 바람의 조형’은 재일교포 2세 건축가 이타미준(1937∼2011)의 40년 건축세계를 ‘바람’이라는 키워드로 조망하는 회고전이다. 그는 일본 시즈오카에서 태어나 건축을 시작했고 노년에 제주에서 대표작들을 남겼다. 시즈오카와 제2의 고향인 제주 모두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다. 이번 회고전에 나온 그의 드로잉 스케치 회화 모형 등 500여 점을 보면 ‘바람’은 ‘자연’으로 바꿔 이해해도 될 듯하다. ‘소재의 탐색’이 키워드인 초기(1971∼1988년)는 자연과 인공의 충돌과 대립을 실험했던 시기다. 1970년대 전후로 일본에서 태동한 전위예술운동인 ‘모노하(物派)’의 영향권에 있던 때로 ‘먹의 집’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중기(1988∼1998년)의 키워드는 ‘원시성의 추구’다. 이 시기 일본 건축계에선 유리와 철을 이용한 가벼운 건축이 대세였다. 하지만 아웃사이더였던 그는 “현대 건축에 무언가가 결여돼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체온과 건축의 야성미일 것”이라며 돌과 나무로 무거운 건축을 추구했다. ‘각인의 탑’이 대표적인 무거운 건축이다. 격렬한 건축의 시기를 거친 이타미준은 말년에 와서는 자연에 순응하는 작품 세계를 펼쳐 보인다. ‘매개의 건축’ 시기(1998∼2010년)다. 제주에 설계한 포도호텔은 제주 특유의 자연환경에 녹아들었다는 평가를, 수·풍·석(水·風·石) 미술관은 물, 바람, 돌로 쓴 시라는 찬사를 받았다. 전시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으로 이타미준의 아틀리에를 재현해놓은 공간에 들르게 된다. 그의 딸이자 건축가인 유이화 ITM유이화건축사무소 대표의 기증품과 기억으로 꾸며놓았다. 10.8m² 좁은 공간을 채운 책상 의자 책 문구류와 공예품들은 화가이고 조선 민화 전문가이자 한국 고미술 수집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낡은 ‘대한민국’ 여권에서는 재일교포의 고단했을 삶과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던 고집이 아련하게 느껴진다. 지난해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에 이은 두 번째 건축 상설 기획전으로 7월 27일까지 제5전시실(건축상설전시실)에서 이어진다. 전시 기간에 이타미준의 작품을 주제로 세미나와 강연회, 워크숍 등이 열린다. 13일 오후 2시 소강당에서 열리는 세미나에는 박길룡 국민대 건축학부 명예교수와 전봉희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박소현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책임연구원이 발표자로 참석한다. 3월부터 6월까지 매월 1회 열리는 건축 강연에는 유이화 대표, 박길룡 교수, 이타미준의 작품 사진과 영화를 찍었던 김용관 건축사진가와 정다운 영화감독이 연사로 나선다. 02-2188-0650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어느 경우든 사실은 신성하고 의견은 자유라는 철학, 바로 여기에 자유 사회의 힘이 있고 자유 언론의 빛이 있지 않을까.”(1989년 2월 7일 ‘동아시론’) 그는 언론의 힘을 믿었다. 자유롭고 공개된 시장에서 진실과 거짓이 경쟁하면 반드시 진실이 살아남는다는 믿음으로 신성한 사실을 좇는 기자로서, 시대를 통찰하는 글로 독자를 일깨우는 지식인으로서 평생을 살았다. 4일 별세한 언론인 박권상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3세의 나이로 합동통신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1962년 동아일보로 옮겨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지냈고 1973년부터 3년간 영국 특파원으로 활동했는데 당시 언론 선진국에서 목격한 자유로운 신문과 공영방송 BBC는 언론인으로서 그의 삶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전기가 된다. 자유로운 언론에 대한 믿음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으로 엄혹한 시험대에 놓였다. 동아일보 논설주간이던 그는 신군부의 검열에 5월 16일부터 5일간 사설을 게재하지 않는 ‘무사설(無社說) 저항’으로 맞섰다. 그해 7월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이 발표됐고 모든 신문이 김 씨를 죄인으로 단죄했다. 동아일보도 신군부의 압박을 받았다. 고인은 “10년 후 독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며 버티다 결국 “공정한 재판으로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사설을 썼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사설이고, 계엄사는 검열에서 전문을 삭제했다. 동아일보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침묵을 지킨 유일한 신문이 됐고, 고인은 그해 8월 ‘언론대학살’ 때 희생됐다. 훗날 그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술회했다. “진실을 밝히는 꿋꿋한 언론의 정신, 어떤 형태이든 전체주의를 배격하고 우리 사회를 민주적으로 개혁하려는 의지의 표명,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동기요 사명이었다.”(‘박권상의 시론’·1992년) 언론인으로서 고인의 인생 2막은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 KBS 사장에 임명되면서 시작됐다. BBC를 세계 공영방송의 모델로 생각했던 그는 “BBC는 섣부른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다”며 엄정 중립과 품격 있는 방송을 주문했다. 홍성규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은 “내가 보도국장으로 있는 1년 반 동안 박 사장은 보도와 관련해 한번도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다. 그것이 늘 감사했다”고 회고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는 노력은 시청자들의 신뢰로 보답받았다. KBS ‘9시 뉴스’가 MBC ‘뉴스데스크’를 제치고 앞서 가기 시작한 것이 박 사장 재임 시절이다. ‘환경스페셜’과 ‘일요스페셜’ 같은 교양 프로그램으로 공영성을 강화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협의를 통해 남북 방송 교류의 물꼬를 텄다. 1980년 고인과 함께 해직됐던 소설가 최일남은 “고인은 언론인으로서 명성을 이용해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음에도 외길만을 걸었다. 언론인에게 모범이 되는 존재”라고 추모했다. 고인의 언론에 대한 믿음은 맹목적이지 않았다. 그는 “언론의 제일 기능은 뉴스를 순결하게 전하는 것”이라며 “광주의 비극이 있은 지 9년간 때 묻지 않은 진실이 전해질 수 없다는 데 또 하나의 비극이 있다”고 했다. 수많은 ‘언론’이 그보다 더 많은 ‘설’들을 쏟아내는 인터넷 시대를 내다본 선견지명이었을까. 언론 외길을 걸어온 고인의 생각은 ‘자유언론의 명제’ ‘영국을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비롯한 다수의 저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이진영 ecolee@donga.com·우정렬 기자}

동아일보 논설주간과 KBS 사장을 지낸 언론인 박권상 씨(사진)가 4일 오전 오랜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85세. 1929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고인은 1952년 합동통신 기자를 시작으로 한국일보 논설위원, 동아일보 편집국장, KBS 사장 등 언론 외길을 걸어왔다.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장, 고려대 석좌교수, 일민문화재단 이사장,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원회 이사 등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규엽 씨와 아들 일평 씨(기업인), 딸 소희(미국 밴더빌트대 교수) 소원(영국 옥스퍼드대 영문학 박사) 소라 씨(호주 캔버라대 교수)가 있다. 빈소는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장례는 KBS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7일 오전 10시, 장지는 경기 안성시 일죽면 유토피아추모관. 02-2258-5940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이달 초 경기 양평군 단월면 산자락에 도넛과 지렁이 모양의 설치물이 들어섰다.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에 이리저리 놓인, 설치미술품 같은 이것들은 독일 유학파인 부부 건축가 심희준(37) 박수정(36) ‘건축공방’ 공동대표가 설계한 텐트다. 고급스러운 캠핑을 뜻하는 ‘글램핑(glamorous camping)’족들을 위한 ‘글램퍼스’다. 글램핑은 편안한 캠핑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문화다. 자연 속에 들어가 붙박이로 설치된, 전기가 들어오고 물도 나오는 텐트에서 지내는 거다. 캠핑과 펜션 숙박의 중간쯤 된다. ‘건축공방’이 설계한 글램퍼스는 가운데가 뻥 뚫린 도넛 모양과 구불구불한 지렁이 모양 2개 종류다. 도넛형은 면적이 50m²(약 15평), 지렁이형은 40m²(약 12평)로 모두 4인 가족이 묵을 수 있다. 강철로 뼈대를 만든 뒤 경기장에 쓰는 직물인 유럽산 멤브레인을 두 겹으로 씌웠다. 멤브레인은 자외선을 차단해주고 방수 효과가 있다. 불에 잘 타지도 않는다. 안쪽엔 거실 침실 주방 화장실 겸 샤워실이 있고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테라스가 딸려 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백화점 사장 현빈은 직원들에게 이렇게 묻곤 했다. 젓가락 디자이너 정미선 씨(35)는 끼니마다 젓가락질을 하면서도 젓가락의 디자인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변화했는데 왜 젓가락은 그대로인 거죠? 음식의 종류가 다양한데 젓가락은 왜 한 종류만 쓰나요? 서양인들이 메뉴에 따라 나이프와 포크를 바꿔 쓰듯 우리도 가벼운 채소를 먹을 때와 두툼한 고기를 먹을 때 젓가락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가 디자인하는 건 예쁜 젓가락이 아니다. 음식을 잘 집어 먹을 수 있는 최적의 모양이다. 지금까지 만든 젓가락은 약 200종. 이 중 끝 부분이 뱀의 혀처럼 두 갈래로 갈라져 면류를 먹기에 좋은 젓가락은 특허를 받았다. 젓가락 관련 디자인의장도 10개를 가지고 있다. 그는 일본의 명문 무사시노대 공예공업디자인과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젓가락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됐다. 공교롭게도 그와 일본인 지도교수 모두 젓가락질을 잘 못한다. 젓가락질이 서툴다 보니 그 기능에도 의문을 품게 된 걸까. “교수님, 일본 사람들은 왜 나무젓가락을 쓰는 거죠?” “한국인들은 쇠로 어떻게 젓가락질을 하지요? 젓가락에 대해 박사논문을 써 보는 건 어때요?” 저(箸) 문화를 연구하려면 고대 중국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는 한중일 3국의 젓가락 문화를 비교 연구하고 메뉴에 맞는 젓가락 디자인을 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대학의 한국인 박사 1호다. 젓가락은 3세기 중국에서 쓰기 시작해 4세기에 한국에, 6세기 중반엔 일본에 전파됐다. 젓가락 끝부분의 모양은 음식의 종류에 따라 다르고, 길이는 음식과 사람의 거리에 영향을 받는다. 중국 음식은 기름지고 뜨거우며 뼈를 발라낼 일이 없다. 음식과 사람의 거리가 먼 편이다. 그래서 미끄러지지 않고 뜨거운 김에 데지 않도록 플라스틱에 길이가 길고 퉁퉁하며 끝이 뭉툭한 원형 젓가락을 쓴다. 일본 젓가락은 끝부분이 뾰족하다. 생선 가시를 발라 먹을 일이 많기 때문이다. 밥그릇을 들고 먹기 때문에 길이는 짧은 편이다. 습한 환경이어서 예부터 녹슬 우려가 없는 나무젓가락을 사용해 왔다. 한국은 김밥 고기 전의 무게를 견디어내야 하기 때문에 끝이 네모난 금속제 젓가락을 쓴다. 정 디자이너는 음식 문화에 따라 저의 모양이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현대 메뉴에 맞는 최적의 디자인을 찾기 시작했다. 다양한 젓가락을 디자인해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아 축적해 놓은 데이터가 요즘 젓가락을 디자인할 때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젓가락 끝부분의 굵기를 보면 2mm는 정확성, 3mm는 균형성, 4mm는 안정성을 요구하는 음식에 적당한 굵기다. 음식물의 무게와 두께, 단단한 정도에 따라 끝부분의 모양과 길이, 재질은 모두 달라진다. “젓가락 하나로 모든 종류의 음식을 집어야 하기 때문에 손재주와 지능이 발달했는지 모릅니다. 도구가 진화하지 않으니 사람이 진화한 거죠. 그래서 제가 만든 젓가락을 보여주면 한국 사람들은 ‘신기하다’고만 하는데 젓가락질이 서툰 외국인들은 ‘이런 게 정말 필요하다’고 해요.” 그는 젓가락이 마케팅 도구도 될 수 있다고 본다. “제가 디자인한 젓가락이 나오는 국수 전문점을 차리고 싶어요. 먹고 나면 젓가락을 기념품으로 주는 식당이죠. 요즘엔 디저트용 젓가락도 만들고 있어요.”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