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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선 불법사채 조직이 정식 대부업체로 위장하는 일은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지난달 29일 도쿄에서 만난 우쓰노미야 겐지(宇都宮健兒·78) 변호사는 정식 업체의 가면을 쓴 불법 조직이 판치는 한국의 현실과 관련해 이렇게 단언했다. 그는 50년 넘게 불법사채 피해자를 지원해 온 대표적인 활동가다. 일본의 사채 문제를 다룬 소설 ‘화차’(1992) 속 변호사의 모델이기도 하다.특히 대부업체 설립 문턱이 낮고 처벌이 약한 탓에 업체 등록증이 200만~300만 원에 암거래되는 국내 현실에 대해 우쓰노미야 변호사는 “일본에선 대부업 등록 자체가 쉽지 않다”고 했다. 앞서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국내 온라인 대부중개 플랫폼에서 광고 중인 대부업체 62곳을 검증한 결과 합법적으로 영업한 업체는 3곳에 불과했다. 이에 대해 우쓰노미야 변호사는 “한국에선 아무도 (불법사채를) 단속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그의 사무실 책상엔 약 20년 전 야미킨(闇金), 즉 불법사채 피해자를 상담한 자료와 함께 신문 기사 스크랩이 앉은키 높이로 여러 더미 쌓여있었다. ‘야쿠자가 차주(채무자) 납치’, ‘일가족 자살’, ‘채무자 자살 명소로 전락한 후지산’…. 오늘날 한국보다 심각했던 일본의 불법사채 문제를 보여주는 제목들이다.하지만 지금 일본에서는 이런 광경을 상상하기도 어려워졌다. 2006년 대금업법(한국의 대부업법)을 뜯어고치고 연달아 제도를 개선한 덕분이다. 기상천외한 대책을 내놓은 게 아니었다. 도쿄에서 만난 현지 전문가들은 “단순한 두 가지 원칙을 뚝심 있게 밀어붙인 결과였다”고 입을 모았다. 아무나 대부업을 못 하게 한다. 걸리면 엄하게 처벌한다. 그 결과 불법사채 조직은 발을 붙이기 힘들어졌다.한국 정부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업 진입 단계부터 불량 업체를 걸러내고, 위법을 일벌백계하려는 시도는 다른 현안에 밀리거나 ‘시기상조’라는 우려 속에 번번이 무산됐다. 정부가 불법사채를 근절하겠다며 2년 전 출범한 범정부 태스크포스(TF)도 합동 단속이나 예방법 홍보 등 핵심을 비껴간 대책만 내놓고 있다. 불법사채가 비대면 플랫폼을 장악하도록 방치해 피해자의 고통이 커지는 한국과 이를 해결한 일본. 두 나라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자살과 납치 횡행했던 2000년대 일본‘밤마다 걸려 온 추심전화에 죽음을 결심.’2003년 6월 15일, 일본의 한 일간지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야미킨’, 즉 불법사채를 쓰고 조직의 협박을 받던 일가족 3명이 전날 오사카에서 철로에 누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일가족이 빌린 금액은 3만 엔(약 26만 원). 빚 독촉을 견디다 못해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외면당했다.이처럼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선 불법사채 조직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야반도주하거나 자살하는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후지산 자락 아오키가하라 숲에서 생을 내려놓는 채무자가 늘자 피해자 지원 단체가 숲길 입구에 “빚 문제는 반드시 해결할 수 있어요. 일단 저희랑 상의해요”라고 적힌 자살 방지 안내판을 설치했을 정도다.● 대부업체 설립비용, 한국의 45배당시 일본 불법사채 시장은 지금의 한국과 닮아 있었다. 자격 요건이 헐거워 영세 대부업체가 난립했다. 불법사채 조직도 활개 쳤다. 더 내버려둬선 안 된다는 여론이 일었다.시민사회가 먼저 움직였다. 일본변호사연합회가 참고한 건 한국이었다. 당시 한국은 불법사채 억제를 위해 대부업법을 제정한 지 4년째였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우쓰노미야 겐지 변호사는 2005년 ‘한국금리조사단’를 꾸리고 한국에 머무르며 물렀다. 결론은 ‘좌고우면하다가 제대로 된 규제를 도입하지 못한 한국처럼은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우쓰노미야 변호사는 “규제가 약한 한국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았다”고 했다.일본에선 ‘역시 강력한 규제가 필수다’라는 여론에 힘이 실리면서 국회와 정부가 대부업 관련 법 개정에 착수했다. 2006년 개정된 법에서는 대부업 등록 요건을 대폭 높였다. 대부업체를 차리려면 순자산이 5000만 엔(약 4억5000만 원) 이상이어야 했다. 18년 전부터 오늘날 한국 기준(1000만 원)의 45배에 달하는 문턱을 세운 것.업체를 차리려면 3년 이상 대출 업무 경력이 있어야 하고, 대부업 자격시험을 통과한 직원을 꼭 고용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다. 이 시험은 관련법과 재무, 회계 지식을 평가하는 국가 공인 필기시험이다. 올 3월 기준 누적 수강생 10만793명 중 2만8244명(28.0%)만 합격했다. 반면 한국은 대부업자의 자질을 평가하는 시험도, 인력 상주 규정도 없다.물론 법 개정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정식 대부업체의 문턱을 높일수록 신용이 낮은 저소득층은 불법사채로 내몰릴 수 있다는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 정부와 국회는 이런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면 시행 전까지 4년이나 계도 기간을 두고 준비했다.● “걸리면 원금까지 환수”2006년부터 불법사채 처벌도 강화됐다. 법정 상한을 넘는 이자를 요구하는 불법 고금리 영업은 5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 엔(약 8700만 원) 이하 벌금에, 미등록 영업은 10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 엔(약 2억6100만 원) 이하 벌금에 각각 처할 수 있게 했다. 반면 한국은 대부업법 위반에 따른 가장 높은 벌금액이 5000만 원이다. 범죄수익의 최고 10배까지 벌금을 물리는 특정경제범죄법이 불법사채에는 적용되지 않아서다.법이 바뀌면서 불법사채 수사에도 속도가 붙었다. 우쓰노미야 변호사는 “이전에는 경찰이 ‘야쿠자에게 팔이라도 잘려야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라며 “하지만 법 개정과 시민단체의 집단 고소가 이어지면서 전국 경찰서가 ‘야미킨 대책본부’를 꾸리고 집중 수사했다”고 회상했다. 우쓰노미야 변호사가 이끈 시민단체가 2002~2010년 고소한 불법사채 사건은 6만3458건에 이른다. 일본 경찰청은 그 무렵부터 지금까지 매년 백서를 통해 불법사채 조직 검거 현황을 따로 공개하고 있다.사법부도 이런 사회적 변화에 화답했다. 2008년 6월 일본 대법원은 “불법사채는 위법한 계약이기 때문에 (사채 조직에) 원금도 돌려줄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놓았다. 최대 규모의 야미킨 조직 ‘야마구치파’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의 결론이었다. 법조계는 이를 ‘불법사채 근절에 본보기가 된 판결’이라고 평가한다. 불법사채를 하다 걸리면 본전도 못 찾는다는 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은 불법사채로 처벌돼도 빌려준 원금과 법정 이자는 법으로 보장받는다.● 대부업체 한국의 6분의 1로 줄어일본의 정식 대부업체는 지난해 3월 기준 1548곳. 한국(8771개)의 6분의 1 수준이다. 인구 대비로는 한국의 14분의 1이다. 법 개정 여파로 영세 대부업체들이 문을 닫고 탄탄한 중견업체들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업체 수가 줄면서 촘촘한 관리·감독이 가능해지면서 대부업 시장도 투명해졌다. 강력한 단속으로 불법사채 사건도 급감했다. 일본 법무성에 따르면 검찰에 접수된 불법사채 사건이 2003년 1679건에서 2022년 231건으로 줄었다.물론 일본도 여전히 숙제가 남았다. 정식 대부업체의 대출 심사가 엄격해져 저소득층은 돈 빌리기 어려워졌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서민 금융 제도를 확대하고 민간 차원의 채무자 구제 활동을 활발하게 병행하면서 이런 ‘풍선효과’를 최대한 억누르고 있다. 도모토 히로시(堂下浩·60) 도쿄정보대 교수는 “정식 대부업체에 한해서는 법정 이율 상한을 높이는 등 ‘숨통’을 틔울 필요가 있다. 다만 불법사채는 수법이 교묘해짐에 따라 더 강력한 단속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그러게 누가 사채 쓰랬냐”는 한국…日 ‘채무자 탓 그만’불법사채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 건 부실한 규제뿐만이 아니다. 사채를 쓰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는 시선도 장애물 중 하나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만난 31명의 불법사채 피해자들은 자신을 죄인으로 여겼다. “그러게 누가 사채 쓰랬냐”는 말과 따가운 시선 때문이었다.한국보다 앞서 불법사채 문제를 겪은 일본은 일찍이 이런 인식의 개선에 힘썼다. 1970년대부터 사채 피해 구제에 힘써온 기무라 타츠야(木村 達也·80) 변호사는 서면 인터뷰에서 “당시엔 ‘차주책임론’(借主責任論·빌린 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이란 용어도 있었다”며 “이런 시선이 사채 피해가 고발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했다.1970년대 일본에서는 고리대금업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과한 추심과 채무자의 자살이 늘었다. 샐러리맨이 주로 빌리는 돈, 이른바 ‘사라킨’(サラ金)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기무라 변호사는 1976년 오사카 변호사회 안에 사채 문제 연구회를 결성했다.“세간에는 다중채무에 빠지는 사람들은 낭비나 도박, 유흥 때문이라는 인식이 주를 이뤘지만, 변호사들은 대부업의 고금리·가혹한 추심·과잉 대출이 근원이라고 생각했어요.”이듬해에는 700여 명의 젊은 변호사와 학자 등이 모여 ‘전국사라킨문제대책협의회’가 만들어졌고, 이들은 피해자 설득에 나섰다. 인식개선이 우선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에 전국 47개 도도부현에 최소 1개씩, 총 85개의 피해자 단체가 생겼다. 매년 한 번, 전국의 변호사와 피해자 약 2000명이 모여 집회를 열었다. 이를 통해 생활고, 지병, 실업 같은 피해자들의 비참한 호소가 사회에 공유됐다.기무라 변호사는 “‘빌린 사람 책임’이라던 시각이 ‘소비자 보호’로 바뀌게 된 때”라며 “집회를 통해 사채업자들의 악질적인 수법이 고발되면서 사회가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이 흐름을 타고 1983년 ‘대금업의 규제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대부업 등록이 의무화됐고, 대부계약사항과 추심에 관한 세부 조항이 생겼다. 다소 느슨했던 규제의 빈틈은 2006년 법 개정을 통해 해결해 나갔다.일본과 달리 누구나 마음먹으면 불법 사채가 가능한 한국 상황은 ‘’에서 볼 수 있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와 디지털 스토리텔링 ‘돈의 덫’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https://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불법사채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김민우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돈의 덫(상): 덫에 걸린 남자’()‘돈의 덫(하): 덫을 놓는 남자’()실제 김민우의 인터뷰를 담은 유튜브 영상()히어로콘텐츠팀▽팀장: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취재: 김소영 김태언 서지원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진: 홍진환 기자▽편집: 이승건 황준하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상아 임희래 뉴스룸디벨로퍼▽인터랙티브 디자인: 황어진 김민주 인턴▽영상: 송유라CD도쿄=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김소영 기자 ksy@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불법사채의 주 무대는 이제 거리가 아니라 휴대전화 화면이다. 대다수 조직은 더는 전단이나 명함을 뿌리지 않는다. 온라인 대부중개 플랫폼을 통해 전국에서 영업할 수 있어서다. 대출부터 추심까지 모든 게 비대면이라 흔적도 안 남는다. 지난해 3월 검거된 불법사채 조직 ‘강 실장’ 조직 역시 그랬다. 걸리지 않고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불법사채에 발을 들이는 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강 실장은 검거됐지만, 지금도 플랫폼에는 수많은 강 실장이 ‘먹잇감’을 찾고 있다.“피고인,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시죠.”“93××××입니다.”5월 29일 춘천지방법원 102호 법정. 피고인 박성훈(가명)은 판사의 물음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갈색 수의(囚衣)를 입고 있었다. 형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날은 박성훈의 항소심 첫 재판이었다.생년월일과 주소를 확인한 후 박성훈은 피고인석에 앉았다. 양옆의 공범들보다 앉은키가 주먹 하나만큼 작았다. 볼은 폭 들어갔고 피부는 푸석했다. 박성훈의 변호인은 양형 부당 등을 항소 이유로 들었다. 그는 앞서 2월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판사가 재판을 마치자 공범 2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박성훈 혼자 판사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박성훈은 재판에 넘겨진 지난해 4월 이후 이날까지 반성문을 230차례나 제출했다.지난해 봄까지 그는 불법사채 조직의 총책 ‘강 실장’이었다. 강 실장 조직은 2021년 2월부터 장사를 했다. 뒤를 봐주는 폭력조직이나 전주(錢主)는 없었다. 강 실장을 수사한 경찰은 “젊은데도 돈으로 사람을 조종하는 수를 꿰뚫고 있었다”고 했다.경찰이 압수한 강 실장 조직의 대포통장에는 피해자 1000여 명을 대상으로 1000억 원대 불법사채를 굴린 흔적이 나왔다. 지난해 3월 붙잡혔을 때까지 강 실장이 챙긴 것으로 의심된 범죄수익은 약 300억 원이다. 하지만 추징이 명령된 돈은 6억6635만 원에 그쳤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강 실장 조직이 덫을 친 과정을 재구성하기 위해 전직 조직원과 변호인, 피해자, 수사 경찰 등 18명을 인터뷰했다. 이들의 판결문 26건을 분석해 사실과 주장을 골라냈다. 주먹을 쓰지 않고 오직 휴대전화로 돈을 뜯어내는 ‘플랫폼 사채’의 세계 한가운데 강 실장 조직이 있었다. 강 실장 조직이 거액을 굴린 첫 번째 비결은 ‘대부업 등록증’이었다. ● 스물셋 총책 ‘민 실장’강 실장이 되기 전, 박성훈은 ‘민 실장’이었다. 그는 스물세 살이던 2016년 7월 불법사채 조직을 만들었다. 그때만 해도 몇몇 대부중개 플랫폼에는 아무나 광고할 수 있었다. 불법사채 광고가 문제가 되자 모든 플랫폼이 2017년부터 대부업 등록증을 요구했다. 이후 박성훈은 자기 명의로 정식 대부업체를 차렸다. 서울의 한 건물 지하에 작은 사무실을 빌리고 구청에서 대부업 등록증을 받아왔다.그렇게 박성훈은 불법사채 조직 총책이자 정식 대부업체의 사장이 됐다. ‘소액 대출 당일 가능, 금리는 법정 이율 준수’. 거짓 광고를 올렸다. 민 실장 조직은 이 ‘미끼’를 보고 연락한 사람을 표적으로 삼았다. 30만 원을 빌려주고 일주일 뒤 50만 원을 받아내는 연이율 3476% 고리 영업이 표준 방식이었다. 제때 안 갚으면 피해자를 겁박했다. 그렇게 1년 동안 21억 원을 뜯어냈다.박성훈의 이중생활은 피해자 신고로 2017년 경찰에 검거되면서 막을 내렸다. 압수수색 당시 그의 집에선 일본 사채업계를 다룬 만화책 ‘사채꾼 우시지마’가 나왔다. 그에겐 대부업법 위반뿐 아니라 범죄단체 조직 혐의가 적용됐다. 박성훈은 정식 대부업체를 운영했을 뿐인데 일부 직원이 불법을 저지른 거라고 잡아뗐다.하지만 박성훈은 실명 석 자가 적힌 등록증으로 플랫폼에 광고를 냈을 뿐 아니라 구인 광고도 직접 올렸다. 조직원과도 얼굴을 맞대고 일했다. 그게 패착이었다. 판사는 “사채 조직 전면에 나서서 조직 관리와 운영을 주도했고, (대부업 등록증은) 오직 그 명의로 광고를 내서 피해자의 전화번호를 얻는 데에만 썼다”며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항소심과 대법원 판단도 같았다. 2020년 11월 출소한 그는 다른 사람이 되기로 했다. 출소 석 달 만에 새로운 불법사채 조직을 만들고 ‘강 실장’이라는 새 가면을 썼다.● ‘강 실장’의 탄생강 실장이 된 박성훈은 첫 번째 실수를 바로잡았다. 자기를 외부에 드러내지 않고 철저히 그늘에 숨겼다. 이번엔 대부업 등록증도 돈을 주고 사 오기로 했다. 등록증 조달은 ‘막 사장’에게 맡겼다.“저는 등록증이 뭔지도 몰랐어요. 관공서에서 발급해 주는 거니, 불법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시키는 대로 한 거예요.”취재팀과 만난 막 사장은 자신은 ‘심부름꾼’이었다고 주장했다. 막 사장은 강 실장의 부탁대로 대부업체 바지사장을 수소문했다. 강 실장이 보낸 문자메시지에는 대부업 등록 절차가 상세히 정리돼 있었다. 강 실장은 등록증 한 장당 300만~500만 원을 줬다. 그렇게 강 실장이 사간 등록증이 10장 내외였다고 한다.막 사장은 인터넷주소(IP주소) 추적을 피하기 위한 휴대용 와이파이를 구해줬다. 범죄수익을 배달하는 역할도 했다. 조직원이 야산 등 인적 드문 곳에 현금 상자를 숨겨두면 막 사장이 이를 도심 모텔이나 오피스텔로 옮겼다.현금을 나를 땐 강 실장이 정한 규칙을 철저히 따라야 했다. △폐쇄회로(CC)TV가 없는 곳에 주차하고 걸어서 이동하기 △누구와도 잡담하지 않기 △퇴근할 때도 거처에서 3km 이상 떨어진 곳에 주차하기. ‘안전운전’도 수칙 중 하나였다. 조직원의 안위를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현금을 옮길 때 대포차를 사용했는데, 교통사고가 나면 들통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막 사장은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강 실장 조직에서 이렇게 여러 역할을 동시에 맡은 건 막 사장 외엔 거의 없었다. 1심 법원은 “(막 사장은) 총책으로부터 상당한 신뢰를 얻었다”고 판단했다. 막 사장도 이 부분은 인정했다. “제가 배달 사고는 안 냈거든요. 배달 물건이 뭔지 알려주진 않았지만 딱 보면 현금인 거 알잖아요. 욕심도 났지만 괜히 건드렸다간 뒤탈이 날 수도 있고, 무엇보다 ‘롱런’하고 싶었어요. 어느 날 강 실장이 그러더군요. ‘사장님은 착실히 일해주시네요’라고요.”● 그림자 총책강 실장은 조직 안에서도 철저히 자신을 숨겼다. 민 실장 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조직은 점조직으로 설계했다. 콜팀은 피해자의 연락처만 수집했다. 상담팀은 대출 계약을 맺고, 수금팀은 빚 독촉을 담당했다. 인출팀은 현금 출금을, 수거팀은 현금 배달을 맡았다. 조직원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섬처럼 각자 맡은 일만 처리했다. 이건 민 실장 때도 써먹었던 방식이다. 과거 항소심 재판부가 “매우 이례적인 방식”이라고 평가했던, 검증된 방식이었다.달라진 건 강 실장 스스로 조직원의 한 명으로 위장한 것이다. 강 실장 조직에서 1년 넘게 일한 조직원은 취재팀에게 이렇게 말했다. “강 실장은 목소리만 알았어요. 가끔 ‘자기 위에 누가 있다’고도 했어요. ‘실장’이었으니 그 말을 믿었죠. 그가 총책이라는 건 붙잡히고야 알았습니다.”신입 조직원이 들어오면 신분증뿐 아니라 가족과 지인 10명 이상의 연락처를 받아뒀다. 조직원이 다른 마음을 품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신상을 채무자나 경찰에 넘기겠다고 겁박했다. 일면식도 없는 조직원을 목소리만으로 통제했던 비결이자, 혹시 모를 ‘배신’을 막기 위한 일종의 보험이었다. 민 실장 재판에서 조직원들이 총책의 범행을 증언한 것을 강 실장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교도소에 수감 중인 한 수금팀 조직원은 2년 전 친구 소개로 조직에 합류할 땐 정식 대부업체인 줄 알았다고 했다. 열흘 정도 일했을 무렵 ‘이건 아니다’ 싶어 그만두려 했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총책이라는 사람이 ‘지금 관두면 네 신상 뿌려버린다’고 했어요.” 조직원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강 실장은 채무자도 조직원으로 끌어들였다. 통제하기 쉬운 상대였기 때문이다. 훗날 조직 서열 2위에 오른 ‘서 이사’도 처음엔 채무자였다. 조직원 중 30%가량을 이렇게 채무자 중에서 영입했다.● 고수익의 유혹나머지는 첫 조직 때 검증된 수법을 그대로 썼다. 조직원은 구인 사이트에 광고를 내서 구했다. 조직원에겐 같이 일할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은 강력했다. 조직원이 금세 80여 명으로 불어났다.신입 조직원은 합숙 교육을 받았다. 행동강령을 철저히 주입했다. 조직원끼리 이름 등 신상이나 사생활 묻지 않기, 업무 시엔 대포폰만 사용하기, 공용 와이파이 사용 금지…. 모든 보고와 지시는 대포폰과 텔레그램으로 이뤄졌다.조직원이 주로 고향 선후배를 새 조직원으로 끌어들이면서 지역 기반이 생겼다. 콜팀은 광주, 상담팀은 서울과 부산, 수금팀은 충북 청주와 충남 천안, 전남 여수에 흩어져 있었다. 여기에 모든 업무가 온라인과 전화, 문자로 이뤄졌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 범위는 전국이었다.대출 수법도 같았다. 대부중개 플랫폼에 접속한 피해자를 노렸다. 철저히 소액만 빌려줬다. 적게는 10만 원, 많아도 150만 원을 넘지 않았다. 그래야 채무자가 이자가 비싸지 않다고 착각해 돈을 더 빌리기 때문이었다. 혹시 채무자가 돈을 빌리고 잠적해도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상담팀 조직원은 실적을 채우려고 동시에 같은 피해자에게 경쟁적으로 연락하기도 했다. 돈을 잘 빌리고 갚는 피해자의 번호를 공유하며 다른 업체인 것처럼 접근해 ‘돌려막기’를 유도했다. 사채를 사채로 갚기 시작하면 그 빚은 삽시간에 불어났다. 강 실장 조직에서 25만 원을 빌렸던 한 50대 피해자의 빚이 1억5000만 원으로 늘어나는 데 걸린 기간은 불과 3개월이었다.● 총책의 아내얼마를 빌려주고, 누구를 추심하고, 현금은 어디로 배달할지까지. 조직의 모든 의사 결정은 총무팀에서 이뤄졌다. 자금도 총무팀이 관리했다. 총무팀을 이끈 건 박성훈보다 7세 어린 아내였다. 조직 내부에선 ‘아 주임’으로 불렸다. 총무팀은 이 부부의 지인으로만 채웠다. 이들만 부부의 진짜 이름을 알았다.아내는 박성훈과 따로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범행을 모두 인정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고 (총책의) 통제하에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받으면서 배정된 업무를 수행했다”고 봤다.법정에서 만난 아내는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죄송하다”, “모든 게 제 잘못”이라며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조직원이 기억하는 모습은 달랐다. “악랄했죠. 총무팀 직원 중 아 주임만 전화로 ‘일 이따위로 할 거냐’고 막말을 자주 했거든요. 검거된 이후에야 걔가 총책 와이프라는 걸 알았죠.”● 비대면 추심의 비밀수금팀은 매일 낮 12시, 오후 2시, 4시 등 하루 세 차례 실적을 보고했다. 부진하면 윗선에서 폭언을 들었다. 심지어 맞기도 했다. 내가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돈을 받아내야 했다. 피해자보다 가족을 괴롭히면 더 빨리 돈을 받아낼 수 있었다.악랄한 추심의 흔적은 경찰이 압수한 대포폰에 문자메시지 등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한 조직원은 인큐베이터에서 꼬물거리는 채무자의 갓난아기 사진을 보내며 ‘돈 안 갚으면 죽인다’고 협박했다.빚을 불리는 것도 수금팀 역할이었다. 상환 시간은 오전 10시로 정해져 있었다. 이를 넘기면 시간당 10만~20만 원을 연체료로 붙였다. 애초에 빌려준 적 없거나 이미 다 갚은 빚을 다시 받아내기도 했다. 조직에선 이걸 ‘돌림’이라고 불렀다. 여러 번 사채를 쓴 피해자는 언제 어디서 얼마를 빌리고 갚았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단, 채무자를 직접 찾아가거나 물리력을 쓰진 않았다. 직접 만나면 흔적이 남아 붙잡힐 위험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불법사채 피해자를 돕는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장은 비대면 추심이 가능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가족과 지인에게 사채를 쓴 사실이 알려지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계속 돈을 뜯기게 되는 겁니다. 번듯한 직장인처럼 잃을 게 많은 사람일수록 이런 협박에 더 취약합니다.”● 배신의 왕국박성훈은 민 실장 시절 조직원에게 감금돼 폭행당한 뒤 돈을 뺏긴 적이 있었다. 그 조직원은 박성훈의 중학교 선배였다. 300만 원만 빌려달라는 부탁을 박성훈이 거절하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강 실장이 된 박성훈은 조직원을 믿지 않았다. 조직 2인자인 서 이사에게도 본명과 나이를 숨기고 대포폰으로만 연락했다.강 실장이 총책이라는 걸 아는 소수의 조직원도 강 실장을 믿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밑에서 일한 건 돈 때문이었다. 약속한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불만이 싹텄다. 2022년 가을, 서 이사 등 핵심 간부들이 강 실장을 몰아내고 조직을 장악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했다. 강 실장이 먼저 알고 쫓아내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조직원의 배신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무렵 충북 진천에 있는 수금팀이 잠적했다. 강 실장 몰래 채무자 연락처를 빼돌려 따로 불법사채 조직을 꾸린 것. 강 실장은 인출팀을 언제라도 내칠 수 있는 채무자 출신으로 채웠다. 하지만 이들은 강 실장 조직처럼 치밀하지 못했다. 지인에게 현금 인출을 맡겼다가 흔적을 남겨 2022년 11월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이 피해자 가족의 신고로 수사에 착수한 지 2개월 만이었다.그렇게 강 실장 조직의 존재가 드러났고, 경찰 수사는 윗선을 향했다.● 가짜 총책들수사망이 좁혀오자 강 실장은 ‘가짜 강 실장’을 내세웠다. 수거팀 조직원에게 거액을 주겠다며 거짓 자수를 요구했다. 그 조직원은 서울 한 경찰서에 제 발로 찾아가 “내가 강 실장”이라고 자수했다. 박성훈은 그에게 1000만 원 정도를 건네주고 경찰 출신 변호사도 소개해 줬다. 검찰 처분이 나오면 5000만 원을 더 주겠다고 약속했다. 지킬 약속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거짓 자수가 탄로 났기 때문이다.박성훈은 지난해 3월 검거됐다. 서울 서초구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오던 길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그는 전날 필리핀으로 도주하려다가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진 사실을 알고 변호사를 급히 찾았다고 한다.수사팀 소속이던 배상민 경위(현 강원경찰청 형사기동대)는 체포 당시 박성훈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했다. “자신이 쫓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항하진 않았어요. ‘집 수색은 안 하면 안 되냐’고 하더군요. 수갑 찬 모습은 가족들에게 보이기 싫었나 봅니다.”그는 검거 후에도 빠져나갈 궁리를 멈추지 않았다. ‘석 부장’을 강 실장으로 몰아갔다. 석 부장은 고교 시절 박성훈을 폭행한 고향 선배였다. 그런데도 강 실장은 그를 핵심 측근으로 부렸다. 돈 앞에선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었다.올해 2월 14일 박성훈은 1심에서 징역 8년과 벌금 5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죄목은 범죄단체조직과 대부업법 위반 말고도 범죄수익은닉, 범인도피교사 등까지 총 7개였다.박성훈은 항소했다. 변호인은 “죄는 인정하지만 징역 8년은 너무 과하다”며 “가족 재산을 처분해 합의금을 마련했다”고 했다. 박성훈은 1심 선고를 앞두고 피해자 29명에게 10억 원의 합의금을 줬다. 항소심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 나머지 피해자와 모두 합의할 계획이라고 한다. ● 빙산의 일각경찰은 8개월간 추적한 끝에 강 실장이 부린 조직원 80여 명뿐 아니라 대포폰, 대포통장 판매자까지 123명을 검거했다. 조직원 대다수는 20대였다. 조직폭력배는 없었다. 경찰이 압수한 대포통장만 300여 개. 그 명세로 파악한 피해자는 1000명이 넘었고, 불법 대출 규모는 1000억 원대로 추산됐다.강 실장의 수익은 그중 최소 300억 원으로 추정됐다. 그는 월세 1800만 원짜리 서울 성동구 초고급 아파트인 트리마제에 살았다. 람보르기니, 벤틀리, 포르셰, 벤츠, BMW 등 초고가 외제차 7대를 몰았다.하지만 법원은 약 37억 원만 불법 대출 규모로 인정했다. 검경에 나와 진술한 피해자가 131명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수사팀을 이끈 이정만 경감(현 정선경찰서 통합수사팀장)은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피해자 대부분 연락이 닿지 않거나 진술을 거부해 모두 조사하지는 못했습니다.” 불법사채는 피해자가 신고하지 않고 숨는 경우가 많아 전체 규모를 파악하기 힘든 대표적인 암수(暗數) 범죄다. 금융감독원 미공개 조사에서 2022년 피해자가 82만 명으로 추정됐지만 그해 접수된 피해 신고는 1만350건이었다.강 실장의 경우 대출 원금과 법정 최대 이자(연 20%)를 제외한 약 15억 원만 범죄 수익으로 판단됐다. 현행법에 법정 상한을 초과한 이자는 추징 대상이지만, 원금과 법정 이자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그게 불법사채여도 마찬가지다. 그중에서도 박성훈의 추징금은 고작 6억6635만 원이었다. 수익 배분을 정확히 알 수 없어 다른 공범과 똑같이 나눴다. 결국 강 실장은 대포통장에 기록된 불법 대출액의 1%도 내놓지 않게 된 것이다.공범조차 ‘말도 안 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박성훈보다 먼저 재판받은 한 조직원은 억울하다고까지 했다. “제가 죄가 없다는 건 아닌데요. 저랑 박성훈은 재판부가 달랐거든요. 저는 검사가 구형한 그대로 추징금이 나왔는데, 박성훈은 절반 가까이 깎였더라고요.” 국세청은 지난해 11월부터 박성훈 일가에 대한 세무조사를 벌이고 있다. 수사팀 이정만 경감은 “금을 사 모았다는 진술과 정황을 찾았지만, 끝내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박성훈 변호인 측은 이런 의혹에 대해 “사실무근이다. 그 정도 자산이 있다면 합의금을 마련하려고 가족 자산을 처분하겠냐”고 되물었다.이 같은 입장을 전하자 한 조직원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다. “조직이 가장 컸을 때 하루 수익이 1억4000만 원 정도였습니다. 조직 규모가 줄었을 때도 하루 8000만 원은 벌었습니다. 박성훈이 적어도 150억 원 이상은 챙겼을 겁니다. 금으로 월급을 준 적도 있어요.”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만난 전현직 불법사채 조직원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불법사채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불법사채로 돈 벌기가 그만큼 쉽다는 뜻이었다. 불법사채를 막지 못한 원인과, 한때 불법사채로 몸살을 앓았지만 지금은 달라진 일본의 이야기는 26일 오후 공개되는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 4회에서 볼 수 있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와 디지털 스토리텔링 ‘돈의 덫’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불법사채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김민우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돈의 덫(상): 덫에 걸린 남자’()‘돈의 덫(하): 덫을 놓는 남자’()실제 김민우의 인터뷰를 담은 유튜브 영상()히어로콘텐츠팀▽팀장: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취재: 김소영 김태언 서지원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진: 홍진환 기자▽편집: 이승건 황준하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상아 임희래 뉴스룸디벨로퍼▽인터랙티브 디자인: 황어진 김민주 인턴▽영상: 송유라CD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김소영 기자 ksy@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온라인 대부중개 플랫폼에 숨어 돈을 급한 피해자를 먹잇감으로 삼은 불법사채 조직 총책 ‘강 실장’은 스물셋에 처음 불법사채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뒤를 봐주는 폭력조직이나 전주(錢主) 없이 오직 휴대전화만으로 1000억 원대 불법대출을 굴린 강 실장의 수법은 ‘강 실장의 사냥법(上)’에서 볼 수 있다 ● 총책의 아내얼마를 빌려주고, 누구를 추심하고, 현금은 어디로 배달할지까지. 조직의 모든 의사 결정은 총무팀에서 이뤄졌다. 자금도 총무팀이 관리했다. 총무팀을 이끈 건 ‘강 실장’ 박성훈(가명·31)보다 7살 어린 아내였다. 조직 내부에선 ‘아 주임’으로 불렸다. 총무팀은 이 부부의 지인으로만 채웠다. 이들만 부부의 진짜 이름을 알았다.아내는 박성훈과 따로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범행을 모두 인정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고 (총책의) 통제 하에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받으면서 배정된 업무를 수행했다”고 봤다.법정에서 만난 아내는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죄송하다”, “모든 게 제 잘못”이라며 연신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조직원이 기억하는 모습은 달랐다. “악랄했죠. 총무팀 직원 중 아 주임만 전화로 ‘일 이따위로 할 거냐’고 막말을 자주 했거든요, 검거된 이후에야 걔가 총책 와이프라는 걸 알았죠.”● 비대면 추심의 비밀수금팀은 매일 낮 12시, 오후 2시, 4시, 하루 세 차례 실적을 보고했다. 부진하면 윗선에서 폭언을 들었다. 심지어 맞기도 했다. 내가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돈을 받아내야 했다. 피해자보다 가족을 괴롭히면 더 빨리 돈을 받아낼 수 있었다.악랄한 추심의 흔적은 경찰이 압수한 대포폰에 문자 메시지 등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한 조직원은 인큐베이터에서 꼬물거리는 채무자의 갓난아기 사진을 보내며 ‘돈 안 갚으면 죽인다’고 협박했다.빚을 불리는 것도 수금팀 역할이었다. 상환 시간은 오전 10시로 정해져 있었다. 이를 넘기면 시간당 10만~20만 원을 연체료로 붙였다. 애초에 빌려준 적 없거나 이미 다 갚은 빚을 다시 받아내기도 했다. 조직에선 이걸 ‘돌림’이라고 불렀다. 여러 번 사채를 쓴 피해자는 언제 어디서 얼마를 빌리고 갚았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단, 채무자를 직접 찾아가거나 물리력을 쓰진 않았다. 직접 만나면 흔적이 남아 붙잡힐 위험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불법사채 피해자를 돕는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장은 비대면 추심이 가능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가족과 지인에게 사채를 쓴 사실이 알려지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계속 돈을 뜯기게 되는 겁니다. 번듯한 직장인처럼 잃을 게 많은 사람일수록 이런 협박에 더 취약합니다.”● 배신의 왕국박성훈은 민 실장 시절 조직원에게 감금돼 폭행당한 뒤 돈을 뺏긴 적이 있었다. 그 조직원은 박성훈의 중학교 선배였다. 300만 원만 빌려달라는 부탁을 박성훈이 거절하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강 실장이 된 박성훈은 조직원을 믿지 않았다. 조직 2인자인 서 이사에게도 본명과 나이를 숨기고 대포폰으로만 연락했다.강 실장이 총책이라는 걸 아는 소수의 조직원도 강 실장을 믿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밑에서 일한 건 돈 때문이었다. 약속한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불만이 싹텄다. 2022년 가을, 서 이사 등 핵심 간부들이 강 실장을 몰아내고 조직을 장악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했다. 강 실장이 먼저 알고 쫓아내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조직원의 배신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무렵 충북 진천에 있는 수금팀이 잠적했다. 강 실장 몰래 채무자 연락처를 빼돌려 따로 불법사채 조직을 꾸린 것. 강 실장은 인출팀을 언제라도 내칠 수 있는 채무자 출신으로 채웠다. 하지만 이들은 강 실장 조직처럼 치밀하지 못했다. 지인에게 현금 인출을 맡겼다가 흔적을 남기면서 2022년 11월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이 피해자 가족의 신고로 수사에 착수한 지 2개월 만이었다.그렇게 강 실장 조직의 존재가 드러났고, 경찰 수사는 윗선을 향했다.● 가짜 총책들수사망이 좁혀오자 강 실장은 ‘가짜 강 실장’을 내세웠다. 수거팀 조직원에게 거액을 주겠다며 거짓 자수를 요구했다. 그 조직원은 서울 한 경찰서에 제 발로 찾아가 “내가 강 실장”이라고 자수했다. 박성훈은 그에게 1000만 원 정도를 건네주고 경찰 출신 변호사도 소개해 줬다. 검찰 처분이 나오면 5000만 원을 더 주겠다고 약속했다. 지킬 약속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거짓 자수가 탄로 났기 때문이다.박성훈은 지난해 3월 검거됐다. 서울 서초구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오던 길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그는 전날 필리핀으로 도주하려다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진 사실을 알고 변호사를 급히 찾았다고 한다.수사팀 소속이던 배상민 경위(현 강원경찰청 형사기동대)는 체포 당시 박성훈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했다. “자신이 쫓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항하진 않았어요. ‘집 수색은 안 하면 안 되냐’고 하더군요. 수갑 찬 모습은 가족들에게 보이기 싫었나 봅니다.”그는 검거 후에도 빠져나갈 궁리를 멈추지 않았다. ‘석 부장’을 강 실장으로 몰아갔다. 석 부장은 고교 시절 박성훈을 폭행했던 고향 선배였다. 그런데도 강 실장은 그를 핵심 측근으로 부렸다. 돈 앞에선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었다.올해 2월 14일, 박성훈은 1심에서 징역 8년과 벌금 5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죄목은 범죄단체조직과 대부업법 위반 말고도 범죄수익은닉, 범죄도피교사 등까지 총 7개였다.박성훈은 항소했다. 변호인은 “죄는 인정하지만 징역 8년은 너무 과하다”며 “가족 재산을 처분해 합의금을 마련했다”고 했다. 박성훈은 1심 선고를 앞두고 피해자 29명에게 10억 원의 합의금을 줬다. 항소심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 나머지 피해자와 모두 합의할 계획이라고 한다. ● 빙산의 일각경찰은 8개월간 추적한 끝에 강 실장이 부린 조직원 80여 명뿐 아니라 대포폰, 대포통장 판매자까지 123명을 검거했다. 조직원 대다수는 20대였다. 조직폭력배는 없었다. 경찰이 압수한 대포통장만 300여 개. 그 명세로 파악한 피해자는 1000명이 넘었고, 불법 대출 규모는 1000억 원대로 추산됐다.강 실장의 수익은 그중 최소 300억 원으로 추정됐다. 그는 월세 1800만 원짜리 서울 성동구 초고급 아파트인 트리마제에 살았다. 람보르기니, 벤틀리, 포르쉐, 벤츠, BMW 등 초고가 외제차 7대를 몰았다.하지만 법원은 약 37억 원만 불법 대출 규모로 인정했다. 검경에 나와 진술한 피해자가 131명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수사팀을 이끈 이정만 경감(현 정선경찰서 통합수사팀장)은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피해자 대부분 연락이 닿지 않거나 진술을 거부해 모두 조사하지는 못했습니다.” 불법사채는 피해자가 신고하지 않고 숨는 경우가 많아 전체 규모를 파악하기 힘든 대표적인 암수(暗數) 범죄다. 금융감독원 미공개 조사에서 2022년 피해자가 82만 명으로 추정됐지만 그해 접수된 피해 신고는 1만350건이었다.강 실장의 경우 대출 원금과 법정 최대 이자(연 20%)를 제외한 약 15억 원만 범죄 수익으로 판단됐다. 현행법에 법정 상한을 초과한 이자는 추징 대상이지만, 원금과 법정이자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그게 불법사채여도 마찬가지다. 그중에서도 박성훈의 추징금은 고작 6억6635만 원이었다. 수익 배분을 정확히 알 수 없어 다른 공범과 똑같이 나눴다. 결국 강 실장은 대포통장에 기록된 불법 대출액의 1%도 내놓지 않게 된 것이다.공범조차 ‘말도 안 된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박성훈보다 먼저 재판받은 한 조직원은 억울하다고까지 했다. “제가 죄가 없다는 건 아닌데요. 저랑 박성훈은 재판부가 달랐거든요. 저는 검사가 구형한 그대로 추징금이 나왔는데, 박성훈은 절반 가까이 깎였더라고요.” 국세청은 지난해 11월부터 박성훈 일가에 대한 세무조사를 벌이고 있다. 수사팀 이정만 경감은 “금을 사 모았다는 진술과 정황을 찾았지만, 끝내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박성훈 변호인 측은 이런 의혹에 대해 “사실무근이다. 그 정도 자산이 있다면 합의금을 마련하려고 가족 자산을 처분하겠냐”고 되물었다.이 같은 입장을 전하자 한 조직원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다. “조직이 가장 컸을 때 하루 수익이 1억4000만 원 정도였습니다. 조직 규모가 줄었을 때도 하루 8000만 원은 벌었습니다. 박성훈이 적어도 150억 원 이상은 챙겼을 겁니다. 금으로 월급을 준 적도 있어요.”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만난 전현직 불법사채 조직원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불법사채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불법사채로 돈 벌기가 그만큼 쉽다는 뜻이었다. 불법사채를 막지 못한 원인과, 한때 불법사채로 몸살을 앓았지만 지금은 달라진 일본의 이야기는 26일 공개되는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 4회에서 볼 수 있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와 디지털 스토리텔링 ‘돈의 덫’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불법사채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김민우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돈의 덫(상): 덫에 걸린 남자’()‘돈의 덫(하): 덫을 놓는 남자’()실제 김민우의 인터뷰를 담은 유튜브 영상()히어로콘텐츠팀▽팀장: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취재: 김소영 김태언 서지원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진: 홍진환 기자▽편집: 이승건 황준하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상아 임희래 뉴스룸디벨로퍼▽인터랙티브 디자인: 황어진 김민주 인턴▽영상: 송유라CD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김소영 기자 ksy@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불법사채의 주 무대는 이제 거리가 아니라 휴대전화 화면이다. 대다수 조직은 더는 전단이나 명함을 뿌리지 않는다. 온라인 대부중개 플랫폼을 통해 전국에서 영업할 수 있어서다. 대출부터 추심까지 모든 게 비대면이라 흔적도 안 남는다. 지난해 3월 검거된 불법사채 조직 ‘강 실장’ 조직 역시 그랬다. 걸리지 않고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불법사채에 발을 들이는 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강 실장은 검거됐지만, 지금도 플랫폼에는 수많은 강 실장이 ‘먹잇감’을 찾고 있다.“피고인,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시죠.”“93××××입니다.”5월 29일 춘천지방법원 102호 법정, 피고인 박성훈(가명)은 판사의 물음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갈색 수의(囚衣)를 입고 있었다. 형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날은 박성훈의 항소심 첫 재판이었다.생년월일과 주소를 확인한 후 박성훈은 피고인석에 앉았다. 양옆의 공범들보다 앉은키가 주먹 하나만큼 작았다. 체격 차이는 더 났다. 볼은 폭 들어갔고 피부는 푸석했다. 박성훈의 변호인은 양형 부당 등을 항소 이유로 들었다. 그는 앞서 2월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판사가 재판을 마치자 공범 2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박성훈 혼자 판사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박성훈은 재판에 넘겨진 지난해 4월 이후 이날까지 반성문을 230차례나 제출했다.지난해 봄까지 그는 불법사채 조직의 총책 ‘강 실장’이었다. 강 실장 조직은 2021년 2월부터 장사를 했다. 뒤를 봐주는 폭력조직이나 전주(錢主)는 없었다. 강 실장을 수사한 경찰은 “젊은데도 돈으로 사람을 조종하는 수를 꿰뚫고 있었다”고 했다.경찰이 압수한 강 실장 조직의 대포통장에는 피해자 1000여 명을 대상으로 1000억 원대 불법사채를 굴린 흔적이 나왔다. 지난해 3월 붙잡혔을 때까지 강 실장이 챙긴 것으로 의심된 범죄수익은 300억 원이다. 하지만 추징이 명령된 돈은 6억6635만 원에 그쳤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강 실장 조직이 덫을 친 과정을 재구성하기 위해 전직 조직원과 변호인, 피해자, 수사 경찰 등 18명을 인터뷰했다. 이들의 판결문 26건을 분석해 사실과 주장을 골라냈다. 주먹을 쓰지 않고 오직 휴대전화로 돈을 뜯어내는 ‘플랫폼 사채’의 세계. 한 가운데 강 실장 조직이 있었다. 강 실장 조직이 거액을 굴린 첫 번째 비결은 ‘대부업 등록증’이었다. ● 스물셋 총책 ‘민 실장’강 실장이 되기 전, 박성훈은 ‘민 실장’이었다. 그는 스물세 살이던 2016년 7월 불법사채 조직을 만들었다. 그때만 해도 몇몇 대부중개 플랫폼에는 아무나 광고할 수 있었다. 불법사채 광고가 문제가 되자 모든 플랫폼이 2017년부터 대부업 등록증을 요구했다. 이후 박성훈은 자기 명의로 정식 대부업체를 차렸다. 서울의 한 건물 지하에 작은 사무실을 빌리고 구청에서 대부업 등록증을 받아왔다.그렇게 박성훈은 불법사채 조직 총책이자 정식 대부업체의 사장이 됐다. ‘소액 대출 당일 가능, 금리는 법정 이율 준수’. 거짓 광고를 올렸다. 민 실장 조직은 이 ‘미끼’를 보고 연락한 사람을 표적으로 삼았다. 30만 원을 빌려주고 일주일 뒤 50만 원을 받아내는 연이율 3476% 고리 영업이 표준 방식이었다. 제때 안 갚으면 피해자를 겁박했다. 그렇게 1년 동안 21억 원을 뜯어냈다.박성훈의 이중생활은 2017년 경찰에 검거되면서 막을 내렸다. 압수수색 당시 그의 집에선 일본 사채업계를 다룬 만화책 ‘사채꾼 우시지마’가 나왔다. 그에겐 대부업법 위반뿐 아니라 범죄단체 조직 혐의가 적용됐다. 박성훈은 정식 대부업체를 운영했을 뿐인데 일부 직원이 불법을 저지른 거라고 잡아뗐다.하지만 박성훈은 실명 석 자가 적힌 등록증으로 플랫폼에 광고를 냈을 뿐 아니라 구인 광고도 제 명의로 올렸다. 조직원과도 얼굴을 맞대고 일했다. 그게 패착이었다. 판사는 “사채 조직 전면에 나서서 조직 관리와 운영을 주도했고, (대부업 등록증은) 오직 그 명의로 광고를 내서 피해자의 전화번호를 얻는 데에만 썼다”며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항소심과 대법원 판단도 같았다.2020년 11월 출소한 그는 다른 사람이 되기로 했다. 출소 석 달 만에 새로운 불법사채 조직을 만들고 ‘강 실장’이라는 새 가면을 썼다.● ‘강 실장’의 탄생강 실장이 된 박성훈은 첫 번째 실수를 바로잡았다. 자기를 외부에 드러내지 않고 철저히 그늘에 숨겼다. 이번엔 대부업 등록증도 돈을 주고 사 오기로 했다. 등록증 조달은 ‘막 사장’에게 맡겼다.“저는 등록증이 뭔지도 몰랐어요. 관공서에서 발급해주는 거니, 불법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시키는 대로 한 거예요.”취재팀과 만난 막 사장은 자신은 ‘심부름꾼’이었다고 주장했다. 막 사장은 강 실장의 부탁대로 대부업체 바지사장을 수소문했다. 강 실장이 보낸 문자메시지에는 등록 절차가 상세히 정리돼 있었다. 강 실장은 등록증 한 장당 300만~500만 원을 줬다. 그렇게 강 실장이 사간 등록증이 10장 내외였다고 한다.막 사장은 인터넷주소(IP) 추적을 피하기 위한 휴대용 와이파이를 구해줬다. 범죄수익을 배달하는 역할도 했다. 조직원이 야산 등 인적 드문 곳에 현금 상자를 숨겨두면 막 사장이 이를 도심 모텔이나 오피스텔로 옮겼다.현금을 나를 땐 강 실장이 정한 규칙을 철저히 따라야 했다. △폐쇄회로(CC)TV가 없는 곳에 주차하고 걸어서 이동하기 △누구와도 잡담하지 않기 △퇴근할 때도 거처에서 3km 이상 떨어진 곳에 주차하기. ‘안전운전’도 수칙 중 하나였다. 조직원의 안위를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현금을 옮길 때 대포차를 사용했는데, 교통사고가 나면 들통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막 사장은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강 실장 조직에서 이렇게 여러 역할을 동시에 맡은 건 막사장 외엔 거의 없었다. 1심 법원은 “(막 사장은) 총책으로부터 상당한 신뢰를 얻었다”고 판단했다. 막 사장도 이 부분은 인정했다. “제가 배달 사고는 안 냈거든요. 배달 물건이 뭔지 알려주진 않았지만 딱 보면 현금인 거 알잖아요. 욕심도 났지만 괜히 건드렸다간 뒤탈이 날 수도 있고, 무엇보다 ‘롱런’하고 싶었어요. 어느 날 강 실장이 그러더군요. ‘사장님은 착실히 일해주시네요’라고요.”● 그림자 총책강 실장은 조직 안에서도 철저히 자신을 숨겼다. 민 실장 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조직은 점조직으로 설계했다. 콜팀은 피해자의 연락처만 수집했다. 상담팀은 대출 계약을 맺고, 수금팀은 빚 독촉을 담당했다. 인출팀은 현금 출금을, 수거팀은 현금 배달을 맡았다. 조직원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섬처럼 각자 맡은 일만 처리했다. 이건 민 실장 때도 써먹었던 방식이다. 과거 항소심 재판부가 “매우 이례적인 방식”이라고 평가했던, 검증된 방식이었다.달라진 건 강 실장 스스로 조직원의 한 명으로 위장한 것이다. 강 실장 조직에서 1년 넘게 일한 조직원은 취재팀에게 이렇게 말했다. “강 실장은 목소리만 알았어요. 가끔 ‘자기 위에 누가 있다’고도 했어요. ‘실장’이었으니 그 말을 믿었죠. 그가 총책이라는 건 붙잡히고야 알았습니다.”신입 조직원이 들어오면 신분증뿐 아니라 가족과 지인 10명 이상의 연락처를 받아뒀다. 조직원이 다른 마음을 품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신상을 채무자나 경찰에 넘기겠다고 겁박했다. 일면식도 없는 조직원을 목소리만으로 통제했던 비결이자, 혹시 모를 ‘배신’을 막기 위한 일종의 보험이었다. 민 실장 재판에서 조직원들이 총책의 범행을 증언한 것을 강 실장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교도소에 수감 중인 한 수금팀 조직원은 2년 전 친구 소개로 조직에 합류할 땐 정식 대부업체인 줄 알았다고 했다. 열흘 정도 일했을 무렵 ‘이건 아니다’ 싶어 그만두려 했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총책이라는 사람이 ‘지금 관두면 네 신상 뿌려버린다’고 했어요.” 조직원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강 실장은 채무자도 조직원으로 끌어들였다. 통제하기 쉬운 상대였기 때문이다. 훗날 조직 서열 2위에 오른 ‘서 이사’도 처음엔 채무자였다. 조직원 중 30%가량을 이렇게 채무자 중에서 영입했다.● 고수익의 유혹나머지는 첫 조직 때 검증된 수법을 그대로 썼다. 조직원은 구인 사이트에 광고를 내서 구했다. 조직원에겐 같이 일할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은 강력했다. 조직원이 금세 80여 명으로 불어났다.조직원이 주로 고향 선후배를 새 조직원으로 끌어들이면서 지역 기반이 생겼다. 콜팀은 광주, 상담팀은 서울과 부산, 수금팀은 충북 청주와 충남 천안, 전남 여수에 흩어져 있었다. 여기에 모든 업무가 온라인과 전화, 문자로 이뤄졌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 범위는 전국이었다.대출 수법도 같았다. 대부중개 플랫폼에 접속한 피해자를 노렸다. 철저히 소액만 빌려줬다. 적게는 10만 원, 많아도 150만 원을 넘지 않았다. 그래야 채무자가 이자가 비싸지 않다고 착각해 돈을 더 빌리기 때문이었다. 혹시 채무자가 돈을 빌리고 잠적해도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상담팀 조직원은 실적을 채우려고 동시에 같은 피해자에게 경쟁적으로 연락하기도 했다. 돈을 잘 빌리고 갚는 피해자의 번호를 공유하며 다른 업체인 것처럼 접근해 ‘돌려막기’를 유도했다. 사채를 사채로 갚기 시작하면 그 빚은 삽시간에 불어났다. 강 실장 조직에게 25만 원을 빌렸던 한 50대 피해자의 빚이 1억5000만 원으로 늘어나는 데 걸린 기간은 불과 3개월이었다.하루 수익 1억4000만 원에 이르는 거대한 불법사채 왕국을 세운 박성훈은 자신을 배신한 조직원들이 남긴 흔적 때문에 경찰에 쫓기게 된다. 가짜 총책까지 내세운 박성훈은 수사망을 피해 해외로 도주하려다 검거됐다. ‘강 실장’ 조직의 몰락과 법의 심판대에 선 박성훈의 이야기는 ‘강 실장의 사냥법(下)’에서 이어진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와 디지털 스토리텔링 ‘돈의 덫’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불법사채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김민우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돈의 덫(상): 덫에 걸린 남자’()‘돈의 덫(하): 덫을 놓는 남자’()실제 김민우의 인터뷰를 담은 유튜브 영상()히어로콘텐츠팀▽팀장: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취재: 김소영 김태언 서지원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진: 홍진환 기자▽편집: 이승건 황준하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상아 임희래 뉴스룸디벨로퍼▽인터랙티브 디자인: 황어진 김민주 인턴▽영상: 송유라CD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김소영 기자 ksy@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오후 2시 39분, 사무실 책상에 널린 휴대전화 중 한 대를 집어 들었다. 오전에 새로 개통한 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것이었다. 010-6210-××××. ‘대출○○’ 등 주요 대부중개 플랫폼 5곳에 광고를 올린 한 대부업체의 전화번호로 통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2시 41분. 2분 뒤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 번호는 010-5722-××××. 처음 보는 번호였다.“안녕하세요. 대출 문의 주셨죠? 몇 가지만 빠르게 여쭤볼게요.”상담원은 이름과 나이, 사는 지역, 직업, 재직 기간, 월급, 급여일, 기존 대출 유무, 그리고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 물었다. 50만 원이 필요하다고 하자 상담원은 친절한 목소리로 대출 조건을 알려줬다.“50만 원 빌리시면 1주일 뒤에 90만 원으로 갚으시면 돼요.”1주일 이자 40만 원은 연이율로 따지면 4171%였다. 법정 상한(연 20%)의 200배가 넘는 명백한 불법이었다. 취재팀이 서울 강서구로 적힌 이 업체의 주소로 가보니 3.3㎡(1평)도 안 되는 빈 사무실이 나왔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정식 대부업체의 가면을 쓴 불법사채 조직을 추적하기 위해, 대출 이용자로 가장해 취재했다. 62곳 중 단 3곳. 취재팀이 검증한 대부업체 가운데 법정 이율(연 20% 이내)을 지키면서 대부업 등록번호를 공개한 곳이다. 온라인 대부중개 플랫폼 여러 곳에 광고하며 활발히 영업하는 정식 대부업체만 접촉했는데도 그랬다. 36곳은 많게는 연 4000%가 넘는 고리를 요구하거나 미등록 업체라고 당당히 밝혔다. 명백한 불법이다. 나머지 23곳은 이자나 등록번호를 묻자 답을 피하거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불법이 의심되는 비정상적인 영업 행태다.온라인 대부중개 플랫폼에 광고하는 수백 개 업체는 “전화 한 통 OK” “이율 준수” 등 문구로 급한 돈이 필요한 서민을 유혹한다. 하지만 ‘상담 한 번쯤은 괜찮겠지’라며 전화하는 순간, 불법사채 조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이율 수천 %’가 기본 공식현행법상 대부업자는 정식 업체든 아니든 연 20%가 넘는 이자를 받을 수 없다. 이를 어기면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개인끼리 돈을 빌려줄 때도 이자가 연 20%를 초과하면 처벌된다. 하지만 취재팀이 접촉한 62곳 중 26곳은 불법 고금리를 요구했다. 상담원은 하나같이 친절했다.“웬만하면 1주일에 (원금) 50(만 원)에 (상환액) 70이나 80은 생각하셔야 돼요. FM(공식)이에요.”“60에 90이에요. 원래 60에 95인데 좋은 조건으로 해드리는 거예요.”“지금 처음 써봐서 모르는 것 같은데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요.”대출 이용자의 신용이 낮은 약점을 노리고 엉뚱한 명목으로 돈을 더 뜯어내는 경우도 있었다. 수고비, 착수금, 거마비, 공증비…. 이름은 다양했지만 전부 이자로 계산해야 한다.“첫 대출엔 공증비라는 게 있어요. 50만 원에서 5만 원 떼고 45만 원을 드려요.”전부 광고에선 적법한 이자를 내세웠다. 취재팀이 더 비싼 이자를 요구하는 이유를 묻자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다.“못생긴 사람이 미용실에 가서 차은우처럼 머리를 해달라고 하면 일단 ‘해드리겠다’고 하잖아요? 저희도 똑같아요. 손님도 은행에서 대출 안 되고 주변에서 빌리기 민망하니까 저희를 찾으신 거잖아요. 저희도 말씀 잘 드려서 (사채) 쓰게 하는 게 일인 거죠.”● 등록번호 묻자 “원래 없어요”대부업체는 금융위원회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등록번호를 받아야 영업할 수 있다. 미등록 영업은 5년 이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는 불법 행위다. 등록번호는 사무실에 게시하고, 광고할 때도 밝혀야 한다. 이를 어기면 과태료를 최고 5000만 원 물린다. 이용자가 돈을 빌리려는 곳이 등록 업체인지 확인하려면 등록번호를 알아야 한다. 금융당국은 등록번호를 알려주길 거부하면 불법사채업자로 본다.그러나 62곳 중 24곳(14곳은 불법 고금리도 요구)은 대부업 등록번호가 없다고 했다. 대놓고 불법을 인정한 것.“저희는 따로 등록된 게 없어요. 어느 업체를 다 전화해 보셔도 등록된 데는 없어요.”취재팀이 ‘등록하지 않고 영업해도 되냐’고 묻자 질문의 의도를 의심했다.“지금 대부업 하려고 저한테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렇게 걱정이 많으시면 다른 데 알아보세요.”등록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것을 당연시하는 업체도 있었다.“제가 이 바닥에서 오래 일했는데 그런 말 처음 들어보고요. 누구한테 그런 소릴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이런 거 알려달라고 하면 알려주는 사람 하나도 없어요.”이자나 등록번호를 묻자 답을 피하거나 연락을 받지 않은 업체는 23곳이었다.● ‘1명당 500원’ 불법 조직에 팔리는 연락처불법사채 조직과 연결된 업체 36곳 중 33곳은 처음 전화했을 때 받지 않거나 담당자를 연결해 주겠다고 한 뒤 다른 번호로 연락해온 경우였다. 전화가 다시 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짧게는 1분, 통상 15분이었다. 나머지 3곳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플랫폼에 광고 중인 정식 대부업체에 전화했는데, 불법 조직으로 연결된 이유가 뭘까. 전현직 불법사채 조직원에 따르면 그 연결고리는 2가지로 요약됐다.하나는 불법사채 조직이 정식 대부업체를 ‘자회사’로 둔 경우다. 대다수는 바지사장을 내세운다. 조직원을 총알받이로 내세우거나, 돈이 궁한 사람에게 200만 원 안팎을 주고 등록 명의를 사 온다. 등록증은 통장 잔액 1000만 원을 증명하고 사무실 계약서, 18시간짜리 한국대부금융협회 교육 이수증 등만 내면 2주 안에 나온다.실제로 채무자 3610명에게서 고리를 뜯어내 2020년 검거된 ‘황금대부파’가 조직원을 대부업체 사장으로 내세워 플랫폼에 광고를 올렸다. 지난해 7월 각각 징역 6개월과 3개월을 선고받은 한 ‘부부 사채꾼’은 과거 불법 대부업으로 처벌받은 전력 때문에 자기들 명의로 등록증이 나오지 않자 등록증을 사들여 영업했다.또 다른 방법은 정식 대부업체가 대출 문의 고객의 연락처만 모아서 불법사채 조직에 팔아넘기는 것이다. 업계에선 이런 연락처를 ‘DB(데이터베이스)’라고 부른다. 5월 구속 기소된 20대 불법사채업자 최모 씨도 이렇게 사들인 DB로 고객을 꼬드겼다.이런 DB는 보안 메신저에서 은밀하게 거래되고 있었다. 이달 14일 취재팀은 DB 구매자인 척 텔레그램에서 한 판매업자를 접촉했다. 그 업자가 제시한 가격은 대출 문의 고객 1명당 500~1000원이었다. 그는 자기 물건에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저희 DB가 재구매율이 좋은 편이에요. 한번 쓰면 계속 써요. 전날 대출 물어본 사람 정보를 오늘 팔거든요.”● “번호 장사가 나쁜가요?” 당당한 업체들취재팀에 불법 고금리를 요구한 업자 2명은 DB 구매를 인정했다.“거기(플랫폼에 광고 중인 정식 대부업체)는 등록증만 있지 대부업 하는 곳이 아니에요. 거기서 번호를 뿌려주고 그걸 제가 받은 거예요.”“다 그런 식이예요. 그 사람들(정식 대부업체)은 ‘번호 장사’ 하는 거고, 저희는 받아서 영업하는 거고요. 그게 나쁜 건가요?”취재팀은 대출을 문의한 휴대전화 번호를 불법사채 조직에 넘긴 것으로 의심되는 정식 대부업체 36곳의 대표에게 연락해서 해명을 요청했다. 그중 11명은 “그럴 리 없다”거나 “나도 모르겠다”고 했다. 나머지 3명은 문의해온 연락처를 다른 대부업체에 넘겼다고 했다. 22명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이렇게 취재했습니다62개.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이번 취재를 위해 개통한 휴대전화 번호 수다. 취재팀이 검증 대상으로 정한 정식 대부업체는 62곳이었다. 25개 플랫폼에 등록된 업체 818곳 중에서 광고를 4개 이상 사이트에 게재한, 활발히 영업하는 업체였다. 이들 뒤에 숨어 있는 불법사채 조직을 특정하려면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새 번호가 필요했다.불법사채 조직과 연결된 업체에 한 번만 전화해도 그 번호는 여러 경로를 거쳐 조직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 경로를 역추적해 최초 유포자를 찾는 건 수사기관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취재팀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 번호는 오직 업체 1곳을 검증하는 데에만 ‘일회용’으로 사용하는 원칙을 세웠다. 불법사채 조직으로 연결되는 정식 대부업체를 특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불법 여부를 검증하기 위해 돈을 빌리려는 이용자를 가장해 대출 조건과 대부업 등록번호, 업체명을 물었다. 취재팀이 만난 피해자들은 정식 대부업체에 대출을 문의했지만 연락이 온 건 불법사채 조직이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과 수사기관은 이런 피해 유형이 있다는 것만 알 뿐, 어느 업체를 통해 불법사채 조직으로 연결되는지까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 연결고리를 확인하려면 위장 취재가 불가피했다. 불법적인 제안을 한 곳엔 재차 연락해 기자 신분을 밝히고 해명을 요청했다.금융감독원과 법률 전문가에게 자문해 정한 기준에 따라 △법정 상한을 초과한 이자를 요구한 업체 △대부업 등록번호가 없다고 밝힌 업체가 불법사채 조직으로 분류됐다. 이자나 대부업 등록번호를 물었을 때 대답을 피하거나 연락을 받지 않은 업체는 비정상적인 영업이 의심됐지만 그 자체로 위법은 아니기 때문에 불법 조직으로 분류되지 않았다.새 휴대전화는 모두 동아일보 편집국 소속 기자의 명의로 정식 개통했다. 명의자의 개별 동의를 받았고, 휴대전화 개통 절차도 준수했다. :법률 자문:노희정 경기복지재단 불법사금융피해지원팀장, 박정만 경기도 서민금융복지지원센터장(변호사), 박현근 한국파산회생변호사회장, 안민석 법률사무소 강물 대표변호사, 윤정원 변호사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불법사채 조직과 손잡은 정식 대부업체 36곳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그 주소지를 모두 방문했다. 그 결과 17곳이나 대부업체의 흔적조차 없는 ‘유령업체’였다. 전국을 돌며 추적한 결과는 ‘합법 위장한 플랫폼 사채(下)’에서 이어진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와 디지털 스토리텔링 ‘돈의 덫’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불법사채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김민우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돈의 덫(상): 덫에 걸린 남자’()‘돈의 덫(하): 덫을 놓는 남자’()실제 김민우의 인터뷰를 담은 유튜브 영상()히어로콘텐츠팀▽팀장: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취재: 김소영 김태언 서지원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진: 홍진환 기자▽편집: 이승건 황준하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상아 임희래 뉴스룸디벨로퍼▽인터랙티브 디자인: 황어진 김민주 인턴▽영상: 송유라CD김소영 기자 ksy@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앞선 ‘합법으로 위장한 플랫폼 사채 추적기(上)’에서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이용자를 가장해 대출을 문의해봤다. 그 결과, 대부중개 플랫폼 여러 곳에 광고하며 활발히 영업하는 ‘정식대부업체’ 62곳 중 정상적으로 영업한 곳은 단 3곳이었다.대부중개 플랫폼은 현재 서민이 이용하는 대부 시장의 표준이다. 급전이 필요할 때 ‘대출’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대출○○’ 등 사이트들이다. 그래서 지방자치단체에 정식 등록된 대부업체만 광고할 수 있다. 그런데 금감원 조사에서 피해자 4313명 중 3455명(80.1%)이 플랫폼에서 처음 불법사채를 접했다고 했다.실제로 취재팀이 접촉한 36곳은 많게는 연 4000%가 넘는 고리를 요구하거나 미등록 업체라고 당당히 밝혔다. 명백한 불법이다. 이들은 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취재팀이 직접 찾아가 봤다.“저희는 영업 안 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지난달 2일, 취재팀이 연이율 365%의 고리로 대출을 제안한 한 정식 대부업체 대표에게 해명을 요구하자 그는 발뺌부터 했다. 취재팀은 앞서 대출 이용자를 가장해 이 업체에 연락하자, 한 달 안에 65만 원을 갚는 조건으로 50만 원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법정 상한의 18배가 넘었다.녹취록이 있다고 하자 대표는 그제야 “저한테 전화가 오면 번호를 다른 대부업체에 넘겨줬다”고 인정했다. 번호를 넘긴 업체 이름에 대해선 “어쩌다 알게 됐다”며 말을 아꼈다. 취재팀은 불법사채와 손잡은 정식 대부업체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려고 이 업체의 주소지로 향했다.‘광주 광산구 XXX 203호 G0016’. 금감원 ‘등록대부업체 통합조회 사이트’에서 확인한 주소에는 4층짜리 상가 건물이 있었다. 203호는 스터디카페였다. ‘소곤소곤 대화 금지’라고 적힌 유리문 안에서 수험생 2명이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었다. 좌석마다 번호가 붙어있었지만 G0016은 없었다.현행법상 대부업은 반드시 사무실이 있어야 영업할 수 있다. 사무실이 없는 업체가 불법을 저지르면 적발하기 어렵다는 지적에 2010년 생긴 조항이다. 하지만 취재팀이 3주간 전국을 돌며 확인한 현실은 법과 딴판이었다. ● “점검 나오면 직원인 척 해드려요”불법사채 조직과 연결된 정식 대부업체 36곳의 주소지를 4월 24일~5월 14일 모두 방문했다. 그 결과 서류상 주소만 있는 ‘유령업체’가 17곳이었다. 다른 12곳은 사무실은 있었지만 비어있었고, 일부는 전용면적이 3.3㎡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 7곳은 접근이 막혀 있어 사무실 상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유령업체 17곳은 광주뿐 아니라 경기, 인천 등 전국에 흩어져 있었다. 모두 공유오피스였다. 공간을 빌려준 공유오피스 측에 묻자 해당 대부업체는 전부 ‘비(非)상주 서비스’를 이용 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무실을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고 주소만 등록해뒀다는 뜻이다.일부 공유오피스는 유령 대부업체를 위한 ‘맞춤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었다. 취재팀은 인천 부평구 소재 공유오피스에 대부업체 사장으로 가장해 비상주 서비스 이용을 문의했다. 불법사채 조직과 한패로 의심되는 한 정식 대부업체가 이 공유오피스에 주소지를 두고 있었다.“구청 현장점검 일정만 미리 알려주시면 돼요. 빈 곳에 명패랑 노트북 비치해서 원래 사무실이 있던 것처럼 꾸며드려요. 당일엔 저희가 대부업체 직원인 척 역할 대행도 해드리니 직접 안 오셔도 됩니다.” 공유오피스 관계자는 취재팀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대부업은 현장점검에 대비하는 게 최고로 중요한 것 알지 않냐”며 이렇게 말했다. 불법 영업을 위한 생태계가 완성돼있었다.● 14평 사무실에 대부업체 56개취재팀이 방문한 12곳은 공유오피스 안에 사무실이 있긴 했다. 하지만 상당수는 너무 좁아 정상적인 업무는 불가능해 보였다. 1곳은 아예 ‘임대 문의’가 붙어 있는 빈 사무실이었다. 나머지 7곳은 접근이 막혀 있어 사무실 상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대구 남구 소재 공유오피스는 우편함부터 수상했다. 한국대부금융협회가 보낸 우편물이 56통 쌓여있었다. 그런데 수신자로 표시된 대부업체는 주소만 같고 이름이 전부 달랐다. 건축물대장으로 확인한 이 공유오피스 전용면적은 45㎡(약 14평), 업체 1곳당 0.8㎡(약 0.2평)만 쓸 수 있는 셈이었다. 평일 대낮인데도 문이 잠겨 있었고 오랫동안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듯 우편물 도착 안내서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불법사채 조직과 연결된 한 정식 대부업체가 이 공유오피스에 주소를 두고 있었다. 업체 대표에게 해명을 요구하자 “기분이 나쁘다”며 불쾌해했다. 그리고 이틀 뒤 자진폐업했다.경기 용인시 소재 다른 정식 대부업체 사무실도 마찬가지다. 이 업체가 빌린 공간은 전용면적 0.6㎡(약 0.2평)에 불과했다. 책상과 의자만 겨우 들어갔다. 외부로 연결된 창문도 없어 사실상 창고와 다름없었다.이러고도 아무 제재를 받지 않은 건 비정상적인 공간을 대부업체 사무실로 등록하는 게 불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업법 시행령과 금융위원회 해석에 따르면, 정식 대부업체의 사무실은 숙박시설이 아닌 건물 내부이면서 다른 공간과 벽으로 구분되고, 출입문만 따로 있으면 된다. 면적이나 상주 여부에 관한 규정은 없다. 공중전화 부스만큼 비좁은 공간을 사무실로 등록해도 문제가 없는 셈이다.● ‘미리 대비하세요’ 엉터리 점검취재팀은 관할 지자체에 이런 실태를 파악하고 있는지 물었다. 특히 유령업체는 불법이라, 지자체가 강제로 등록을 취소할 수 있다. 하지만 유령업체 17곳의 관할 지자체는 모두 유령업체가 있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직접 가서 보면 누구나 알 사실을 관리 당국만 모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정식 대부업체에 등록증을 내줄 때 현장실사가 필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임대차 계약서와 건축물대장 등 서류만 제출하면 된다.이미 등록한 업체도 현장점검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대부업 관리·감독 지침에는 지자체가 3년에 1회 이상 현장점검을 실시하라고 적혀 있지만, 권고사항일 뿐이다. 일부 지자체는 연중 현장점검을 실시하지만 전수조사도 아니다.그마저도 사전에 예고하고 나간다. 담당 공무원으로선 허탕 치지 않는 게 중요해서다. 불시에 갔는데 직원이 없으면 강제로 안에 들어갈 권한이 없고, 나중에 다시 방문해야 하므로 일이 많아진다. 아예 관련 지침에 “가급적 불시에 하되 부재중일 가능성이 크니 사전예고로 효율성을 도모한다”라며 권장하고 있다. 수도권 한 지자체의 담당 공무원은 “혼자 100곳 넘는 대부업체를 담당하면서 다른 업무도 병행한다. 일일이 가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책임 떠넘기는 금감원-지자체-경찰물론 플랫폼에 광고 중인 모든 대부업체가 불법 조직과 연계된 건 아니다. 취재팀의 대출 문의에 법정 기준에 맞는 이자를 제시하면서 등록번호도 알려준 업체가 3곳 있었다. 이 중 한 곳의 상담원은 “50만 원은 1주일 뒤에 80만 원으로 갚으라는 업체들 있죠. 지인 연락처도 달라고 하고요. 그거 무조건 불법이에요. 절대 쓰지 마세요. 진짜 위험해요”라며 걱정해주기도 했다.한국대부금융협회 관계자는 “정식 대부업체들이 싸잡아 매도당해 이미지에 타격을 입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정식 대부업체 이용자는 2017년 247만 명에서 2022년 98만 명으로 줄었는데, 불법사채 이용자는 같은 기간 52만 명에서 82만 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추정됐다.돈을 빌리려는 사람 입장에서는 플랫폼에 광고 중인 업체 중 누가 불법인지 구별할 수 없다. 반면 대부업체를 관리 감독하는 기관은 의지만 있다면 옥석을 가려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책임을 미뤘다.금감원 관계자는 “대다수가 지자체에 등록된 업체라서 관리 감독도 기본적으로 지자체 책임”이라고 말했다. 불법사채 조직으로 연결된 업체 36곳의 관할 지자체 담당자들은 “불법은 경찰 수사로 밝혀낼 일”이라고 했다. 반면 경찰은 불법사채 조직이 대포폰과 대포통장, 텔레그램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미 범행한 후에 추적하는 건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다.대부중개플랫폼협의회 관계자는 “대부업 등록증 도용을 막기 위해 대부업체가 광고를 하기 전에 본인 인증과 등록증 사본 확인을 거치고 피해자의 민원이 접수된 업체는 광고를 올릴 수 없도록 하고 있다”면서도 “플랫폼이 정식 대부업체들과 불법사채 조직의 연결고리까지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플랫폼 업계에서도 정식 대부업체로 위장한 불법사채 조직을 걸러내는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대부 이용자를 가장해 접촉한 불법사채 조직원들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1000억 원대 불법 대출을 굴렸던 전국구 조직 ‘강 실장’ 또한 마찬가지다. 2년간 대부중개 플랫폼에 숨어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을 벼랑으로 내몬 강 실장 조직의 민낯은 25일 오후 4시 공개되는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 3회에서 볼 수 있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와 디지털 스토리텔링 ‘돈의 덫’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https://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불법사채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김민우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돈의 덫(상): 덫에 걸린 남자’()‘돈의 덫(하): 덫을 놓는 남자’()실제 김민우의 인터뷰를 담은 유튜브 영상()히어로콘텐츠팀▽팀장: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취재: 김소영 김태언 서지원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진: 홍진환 기자▽편집: 이승건 황준하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상아 임희래 뉴스룸디벨로퍼▽인터랙티브 디자인: 황어진 김민주 인턴▽영상: 송유라CD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김소영 기자 ksy@donga.com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앞선 ‘합법으로 위장한 불법사채 추적기(上)’에서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이용자를 가장해 대출을 문의해봤다. 그 결과, 대부중개 플랫폼 여러 곳에 광고하며 활발히 영업하는 ‘정식대부업체’ 62곳 중 정상적으로 영업한 곳은 단 3곳이었다.대부중개 플랫폼은 현재 서민이 이용하는 대부 시장의 표준이다. 급전이 필요할 때 ‘대출’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대출○○’ 등 사이트들이다. 그래서 지방자치단체에 정식 등록된 대부업체만 광고할 수 있다. 그런데 금감원 조사에서 피해자 4313명 중 3455명(80.1%)이 플랫폼에서 처음 불법사채를 접했다고 했다.실제로 취재팀이 접촉한 36곳은 많게는 연 4000%가 넘는 고리를 요구하거나 미등록 업체라고 당당히 밝혔다. 명백한 불법이다. 이들은 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취재팀이 직접 찾아가 봤다.“저희는 영업 안 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지난달 2일, 취재팀이 연이율 365%의 고리로 대출을 제안한 한 정식 대부업체 대표에게 해명을 요구하자 그는 발뺌부터 했다. 취재팀은 앞서 대출 이용자를 가장해 이 업체에 연락하자, 한 달 안에 65만 원을 갚는 조건으로 50만 원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법정 상한의 18배가 넘었다.녹취록이 있다고 하자 대표는 그제야 “저한테 전화가 오면 번호를 다른 대부업체에 넘겨줬다”고 인정했다. 번호를 넘긴 업체 이름에 대해선 “어쩌다 알게 됐다”며 말을 아꼈다. 취재팀은 불법사채와 손잡은 정식 대부업체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려고 이 업체의 주소지로 향했다.‘광주 광산구 XXX 203호 G0016’. 금감원 ‘등록대부업체 통합조회 사이트’에서 확인한 주소에는 4층짜리 상가 건물이 있었다. 203호는 스터디카페였다. ‘소곤소곤 대화 금지’라고 적힌 유리문 안에서 수험생 2명이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었다. 좌석마다 번호가 붙어있었지만 G0016은 없었다.현행법상 대부업은 반드시 사무실이 있어야 영업할 수 있다. 사무실이 없는 업체가 불법을 저지르면 적발하기 어렵다는 지적에 2010년 생긴 조항이다. 하지만 취재팀이 3주간 전국을 돌며 확인한 현실은 법과 딴판이었다. ● “점검 나오면 직원인 척 해드려요”불법사채 조직과 연결된 정식 대부업체 36곳의 주소지를 4월 24일~5월 14일 모두 방문했다. 그 결과 서류상 주소만 있는 ‘유령업체’가 17곳이었다. 다른 11곳은 사무실은 있었지만 비어있었고, 일부는 전용면적이 3.3㎡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 8곳은 접근이 막혀 있어 사무실 상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유령업체 17곳은 광주뿐 아니라 경기, 인천 등 전국에 흩어져 있었다. 모두 공유오피스였다. 공간을 빌려준 공유오피스 측에 묻자 해당 대부업체는 전부 ‘비(非)상주 서비스’를 이용 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무실을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고 주소만 등록해뒀다는 뜻이다.일부 공유오피스는 유령 대부업체를 위한 ‘맞춤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었다. 취재팀은 인천 부평구 소재 공유오피스에 대부업체 사장으로 가장해 비상주 서비스 이용을 문의했다. 불법사채 조직과 한패로 의심되는 한 정식 대부업체가 이 공유오피스에 주소지를 두고 있었다.“구청 현장점검 일정만 미리 알려주시면 돼요. 빈 곳에 명패랑 노트북 비치해서 원래 사무실이 있던 것처럼 꾸며드려요. 당일엔 저희가 대부업체 직원인 척 역할 대행도 해드리니 직접 안 오셔도 됩니다.” 공유오피스 관계자는 취재팀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대부업은 현장점검에 대비하는 게 최고로 중요한 것 알지 않냐”며 이렇게 말했다. 불법 영업을 위한 생태계가 완성돼있었다.● 14평 사무실에 대부업체 56개취재팀이 방문한 11곳은 공유오피스 안에 사무실이 있긴 했다. 하지만 상당수는 너무 좁아 정상적인 업무는 불가능해 보였다. 1곳은 아예 ‘임대 문의’가 붙어 있는 빈 사무실이었다.대구 남구 소재 공유오피스는 우편함부터 수상했다. 한국대부금융협회가 보낸 우편물이 56통 쌓여있었다. 그런데 수신자로 표시된 대부업체는 주소만 같고 이름이 전부 달랐다. 건축물대장으로 확인한 이 공유오피스 전용면적은 45㎡(약 14평), 업체 1곳당 0.8㎡(약 0.2평)만 쓸 수 있는 셈이었다. 평일 대낮인데도 문이 잠겨 있었고 오랫동안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듯 우편물 도착 안내서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불법사채 조직과 연결된 다른 한 정식 대부업체도 이 공유오피스에 주소를 두고 있었다. 업체 대표에게 해명을 요구하자 “기분이 나쁘다”며 불쾌해했다. 그리고 이틀 뒤 자진폐업했다.경기 용인시 소재 다른 정식 대부업체 사무실도 마찬가지다. 이 업체가 빌린 공간은 전용면적 0.6㎡(약 0.2평)에 불과했다. 책상과 의자만 겨우 들어갔다. 외부로 연결된 창문도 없어 사실상 창고와 다름없었다.이러고도 아무 제재를 받지 않은 건 비정상적인 공간을 대부업체 사무실로 등록하는 게 불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업법 시행령과 금융위원회 해석에 따르면, 정식 대부업체의 사무실은 숙박시설이 아닌 건물 내부이면서 다른 공간과 벽으로 구분되고, 출입문만 따로 있으면 된다. 면적이나 상주 여부에 관한 규정은 없다. 공중전화 부스만큼 비좁은 공간을 사무실로 등록해도 문제가 없는 셈이다.● ‘미리 대비하세요’ 엉터리 점검취재팀은 관할 지자체에 이런 실태를 파악하고 있는지 물었다. 특히 유령업체는 불법이라, 지자체가 강제로 등록을 취소할 수 있다. 하지만 유령업체 17곳의 관할 지자체는 모두 유령업체가 있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직접 가서 보면 누구나 알 사실을 관리 당국만 모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담당 공무원이 가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정식 대부업체에 등록증을 내줄 때 현장실사는 필수가 아니다. 임대차 계약서와 건축물대장 등 서류만 제출하면 된다.이미 등록한 업체도 현장점검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대부업 관리·감독 지침에는 지자체가 3년에 1회 이상 현장점검을 실시하라고 적혀 있지만, 권고사항일 뿐이다. 일부 지자체는 연중 현장점검을 실시하지만 전수조사도 아니다.그마저도 사전에 예고하고 나간다. 담당 공무원으로선 허탕 치지 않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불시에 갔는데 직원이 없으면 강제로 안에 들어갈 권한이 없고, 나중에 다시 방문해야 하므로 일이 많아진다. 아예 관련 지침에 “가급적 불시에 하되 부재중일 가능성이 크니 사전 예고로 효율성을 도모한다”라며 권장하고 있다. 수도권 한 지자체의 담당 공무원은 “혼자 100곳 넘는 대부업체를 담당하면서 다른 업무도 병행한다. 일일이 가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책임 떠넘기는 금감원-지자체-경찰물론 플랫폼에 광고 중인 모든 대부업체가 불법 조직과 연계된 건 아니다. 취재팀의 대출 문의에 법정 기준에 맞는 이자를 제시하면서 등록번호도 알려준 업체가 3곳 있었다. 이 중 한 곳의 상담원은 “50만 원은 1주일 뒤에 80만 원으로 갚으라는 업체들 있죠. 지인 연락처도 달라고 하고요. 그거 무조건 불법이에요. 절대 쓰지 마세요. 진짜 위험해요”라며 걱정해주기도 했다.한국대부금융협회 관계자는 “정식 대부업체들이 싸잡아 매도당해 이미지에 타격을 입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정식 대부업체 이용자는 2017년 247만 명에서 2022년 98만 명으로 줄었는데, 불법사채 이용자는 같은 기간 52만 명에서 82만 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추정됐다.돈을 빌리려는 사람 입장에서는 플랫폼에 광고 중인 업체 중 누가 불법인지 구분할 수 없다. 반면 대부업체를 관리·감독하는 기관은 의지만 있다면 옥석을 가려낼 수 있다.하지만 이들은 서로 책임을 미뤘다. 금감원 관계자는 “대다수가 지자체에 등록된 업체라서 관리·감독도 기본적으로 지자체 책임”이라고 말했다. 불법사채 조직으로 연결된 업체 36곳의 관할 지자체 담당자들은 “불법은 경찰 수사로 밝혀낼 일”이라고 했다. 반면 경찰은 불법사채 조직이 대포폰과 대포통장, 텔레그램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미 범행한 후에 추적하는 건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다.대부중개플랫폼협의회 관계자는 “대부업 등록증 도용을 막기 위해 대부업체가 광고하기 전에 본인인증을 하는 절차를 거치고 피해자의 민원이 접수된 업체는 광고를 올릴 수 없도록 하고 있다”면서도 “플랫폼이 정식 대부업체들과 불법 사채조직의 연결고리까지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플랫폼 업계에서도 정식 대부업체로 위장한 불법사채 조직을 걸러내는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대부 이용자를 가장해 접촉한 불법사채 조직원들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1000억 원대 불법 대출을 굴렸던 전국구 조직 ‘강 실장’ 또한 마찬가지다. 2년간 대부중개 플랫폼에 숨어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을 벼랑으로 내몬 강 실장 조직의 민낯은 25일 오후 4시 공개되는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 3회에서 볼 수 있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와 디지털 스토리텔링 ‘돈의 덫’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불법사채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김민우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돈의 덫(상): 덫에 걸린 남자’()‘돈의 덫(하): 덫을 놓는 남자’()실제 김민우의 인터뷰를 담은 유튜브 영상()히어로콘텐츠팀▽팀장: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취재: 김소영 김태언 서지원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진: 홍진환 기자▽편집: 이승건 황준하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상아 임희래 뉴스룸디벨로퍼▽인터랙티브 디자인: 황어진 김민주 인턴▽영상: 송유라CD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김소영 기자 ksy@donga.com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62곳 중 단 3곳. 대부업체 중에서 정상적으로 영업한 곳이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4월 15일부터 한 달간 대출 이용자로 가장해 문의하고 주소지를 찾아간 결과다. 온라인 대부중개 플랫폼 여러 곳에 광고하며 활발히 영업하는 정식 대부업체만 접촉했는데도 그랬다. 대부업체는 법정 이율(연 20% 이내)을 지키면서 대부업 등록번호를 공개해야 하는데, 이를 지킨 업체가 극소수였다는 뜻이다.현재 온라인 대부중개 플랫폼은 서민이 이용하는 대부 시장의 표준이다. 플랫폼에 접속하면 정식 대부업체라고 써 붙인 광고 수백 개가 “전화 한 통 OK” “이율 준수” 등 문구로 유혹한다. 하지만 ‘상담 한 번쯤은 괜찮겠지’라며 전화하는 순간, 불법사채 조직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이 학원비 등 40만 원을 대려다 딸까지 불법사채의 늪으로 빠진 강선주(가명·48)도, 빚을 탕감해준다는 유혹에 조직에 합류했던 김민우(가명·37)도 그렇게 ‘플랫폼 사채’의 덫에 걸렸다.실제로 취재팀이 접촉한 36곳은 많게는 연 4000%가 넘는 고리를 요구하거나 미등록 업체라고 당당히 밝혔다. 명백한 불법이다. 주소에 가보니 태반이 사무실도 없는 유령업체였다. 나머지 23곳은 이자나 등록번호를 묻자 답을 피하거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대부중개 플랫폼은 어쩌다 불법사채 조직의 소굴이 됐을까.오후 2시 39분, 사무실 책상에 널린 휴대전화 중 한 대를 집어 들었다. 오전에 새로 개통한 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것이었다. 010-6210-××××. ‘대출○○’ 등 주요 대부중개 플랫폼 5곳에 광고를 올린 한 대부업체의 전화번호였다.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2시 41분. 2분 뒤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 번호는 010-5722-××××. 처음 보는 번호였다.“안녕하세요. 대출 문의 주셨죠? 몇 가지만 빠르게 여쭤볼게요.”상담원은 이름과 나이, 사는 지역, 직업, 재직기간, 월급, 급여일, 기존 대출 유무, 그리고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 물었다. 50만 원이 필요하다고 하자 상담원은 친절한 목소리로 대출 조건을 알려줬다.“50만 원 빌리시면 1주일 뒤에 90만 원으로 갚으시면 돼요.”1주일 이자 40만 원은 연이율로 따지면 4171%였다. 법정 상한(연 20%)의 200배가 넘는 명백한 불법이었다. 취재팀이 서울 강서구로 적힌 이 업체의 주소로 가보니 3.3㎡(1평)도 안 되는 빈 사무실이 나왔다. 정식 대부업체의 가면을 쓴 불법사채 조직을 추적하기 위해 위장 취재를 시작한 지 이틀째인 4월 16일이었다.● ‘연이율 수천%’가 기본 공식현행법상 대부업자는 정식 업체든 아니든 연 20%가 넘는 이자를 받을 수 없다. 이를 어기면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개인끼리 돈을 빌려줄 때도 이자가 연 20%를 초과하면 처벌된다. 하지만 취재팀이 접촉한 62곳 중 26곳은 불법 고금리를 제안했다. 상담원은 하나같이 친절했다.“웬만하면 1주일에 (원금) 50(만 원)에 (상환액) 70이나 80은 생각하셔야 돼요. FM(공식)이에요.”“60에 90이에요. 원래 60에 95인데 좋은 조건으로 해드리는 거예요.”“지금 처음 써봐서 모르는 것 같은데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요.”대출 이용자의 신용이 낮은 약점을 노리고 엉뚱한 명목으로 돈을 더 뜯어내는 경우도 있었다. 수고비, 착수금, 거마비, 공증비…. 이름은 다양했지만 전부 이자로 계산해야 한다. “첫 대출엔 공증비라는 게 있어요. 50만 원에서 5만 원 떼고 45만 원을 드려요.”전부 광고에선 적법한 이자를 내세웠다. 취재팀이 비싼 이자를 요구하는 이유를 묻자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다.“못생긴 사람이 미용실에 가서 차은우처럼 머리를 해달라고 하면, 일단 ‘해드리겠다‘고 하잖아요? 저희도 똑같아요. 손님도 은행에서 대출 안 되고 주변에서 빌리기 민망하니까 저희를 찾으신 거잖아요. 저희도 말씀 잘 드려서 (사채) 쓰게 하는 게 일인 거죠.”● 등록번호 묻자 “원래 없어요”대부업체는 금융위원회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등록번호를 받아야 영업할 수 있다. 미등록 영업은 5년 이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는 불법 행위다. 등록번호는 사무실에 게시하고, 광고할 때도 밝혀야 한다. 이를 어기면 과태료를 최고 5000만 원 물린다. 이용자가 돈을 빌리려는 곳이 등록 업체인지 확인하려면 등록번호를 알아야 한다. 금융당국은 등록번호를 알려주길 거부하면 불법 사채업자로 의심한다.그러나 62곳 중 24곳은 “대부업 등록번호가 없다”고 하거나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일부 업체는 대놓고 불법을 인정했다.“저희는 따로 등록된 게 없어요. 어느 업체를 다 전화해보셔도 등록된 데는 없어요.”취재팀이 “등록하지 않고 영업해도 되냐”고 묻자 질문의 의도를 의심했다.“지금 대부업 하려고 저한테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렇게 걱정이 많으시면 다른 데 알아보세요.” 말을 빙빙 돌리며 등록번호를 알려주지 않다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업체도 있었다. 등록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것을 당연시하는 업체도 있었다.“제가 이 바닥에서 오래 일했는데 그런 말 처음 들어보고요. 누구한테 그런 소릴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이런 거 알려달라고 하면 알려주는 사람 하나도 없어요. ”● ‘1명당 500원’ 불법조직에 팔리는 연락처불법사채 조직과 연결된 업체 36곳 중 33곳은 처음 전화했을 때 받지 않거나 담당자를 연결해주겠다고 한 뒤 다른 번호로 연락해왔다. 전화가 다시 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짧게는 1분, 통상 15분이었다. 나머지 3곳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플랫폼에 광고 중인 정식 대부업체에 전화했는데 불법 조직으로 연결된 이유가 뭘까. 전현직 불법사채 조직원에 따르면 그 연결고리는 2가지로 요약됐다. 하나는 불법사채 조직이 정식 대부업체를 ‘자회사’로 둔 경우다. 대다수는 바지사장을 내세운다. 조직원을 총알받이로 내세우거나, 돈이 궁한 사람에게 200만 원 안팎을 주고 등록 명의를 사 온다. 등록증은 통장 잔액 1000만 원을 증명하고 사무실 계약서, 18시간짜리 한국대부금융협회 교육 이수증 등만 내면 2주 안에 나온다.또 다른 방법은 정식 대부업체가 대출 문의 고객의 연락처만 모아서 불법사채 조직에 팔아넘기는 것이다. 업계에선 이런 연락처를 ‘DB(데이터베이스)’라고 부른다. 이런 DB는 보안 메신저에서 은밀하게 거래되고 있었다. 이달 14일 취재팀은 DB 구매자인 척 텔레그램에서 한 판매업자를 접촉했다. 그 업자가 제시한 가격은 대출 문의 고객 1명당 500~1000원이었다. 그는 자기 물건에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저희 DB가 재구매율이 좋은 편이에요. 한번 쓰면 계속 써요. 전날 대출 물어본 사람 정보를 오늘 팔거든요.”● “번호 장사가 나쁜가요?” 당당한 업체들취재팀에게 불법 고금리 대출을 제안한 업자 2명은 DB 구매를 인정했다.“거기(광고 업체)는 등록증만 있지 대부업하는 곳이 아니에요. 거기서 번호를 뿌려주고 그걸 제가 받은 거예요.”“다 그런 식이예요. 그 사람들(광고 업체)은 ‘번호 장사’하는 거고 저희는 받아서 영업하는 거고요. 그게 나쁜 건가요?”취재팀은 대출을 문의한 휴대전화 번호를 불법사채 조직에 넘긴 것으로 의심되는 정식 대부업체 36곳의 대표에게 연락해서 해명을 요청했다. 그중 11명은 “그럴 리 없다”거나 “나도 모르겠다”고 했다. 3명은 문의해온 연락처를 다른 대부업체에 넘겼다고 시인했다. 나머지 22명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이렇게 취재했습니다62개.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이번 취재를 위해 개통한 휴대전화 번호 수다. 취재팀이 검증 대상으로 정한 정식 대부업체는 62곳이었다. 25개 플랫폼에 등록된 업체 818곳 중에서 광고를 4개 이상 사이트에 게재한, 활발히 영업하는 업체였다. 이들 뒤에 숨어 있는 불법사채 조직을 특정하려면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새 번호가 필요했다.불법사채 조직과 연결된 업체에 한 번만 전화해도 그 번호는 여러 경로를 거쳐 조직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 경로를 역추적해 최초 유포자를 찾는 건 수사기관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취재팀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 번호는 오직 업체 1곳을 검증하는 데에만 ‘일회용’으로 사용하는 원칙을 세웠다. 불법사채 조직으로 연결되는 정식 대부업체를 특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불법 여부를 검증하기 위해 돈을 빌리려는 이용자를 가장해 대출 조건과 대부업 등록번호, 업체명을 물었다. 취재팀이 만난 피해자들은 정식 대부업체에 대출을 문의했지만 연락이 온 건 불법사채 조직이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과 수사기관은 이런 피해 유형이 있다는 것만 알 뿐, 어느 업체를 통해 불법사채 조직으로 연결되는지까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 연결고리를 확인하려면 위장 취재가 불가피했다. 불법적인 제안을 한 곳엔 재차 연락해 기자 신분을 밝히고 해명을 요청했다.취재팀은 법정 상한을 초과한 이자를 제안하면 불법사채 조직으로 판단했다. 또 대부업 등록번호가 없거나, 밝히기 거부한 업체도 불법으로 봤다. 이런 기준은 금감원과 법률 전문가의 의견을 받아 정했다.새 휴대전화는 모두 동아일보 편집국 소속 기자의 명의로 정식 개통했다. 명의자의 개별 동의를 받았고, 휴대전화 개통 절차도 준수했다. :법률 자문:노희정 경기복지재단 불법사금융피해지원팀장, 박정만 경기도 서민금융복지지원센터장(변호사), 박현근 한국파산회생변호사회장, 안민석 법률사무소 강물 대표변호사, 윤정원 변호사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불법사채 조직와 손잡은 정식 대부업체 36곳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그 주소지를 모두 방문했다. 그 결과 17곳이나 대부업체의 흔적조차 없는 ‘유령업체’였다. 전국을 돌며 추적한 결과는 ‘합법 위장한 플랫폼 사채 추적기(下)’에서 이어진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와 디지털 스토리텔링 ‘돈의 덫’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불법사채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김민우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돈의 덫(상): 덫에 걸린 남자’()‘돈의 덫(하): 덫을 놓는 남자’()실제 김민우의 인터뷰를 담은 유튜브 영상()히어로콘텐츠팀▽팀장: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취재: 김소영 김태언 서지원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진: 홍진환 기자▽편집: 이승건 황준하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상아 임희래 뉴스룸디벨로퍼▽인터랙티브 디자인: 황어진 김민주 인턴▽영상: 송유라CD김소영 기자 ksy@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불법사채는 가장 절박한 이를 노려 마지막 고혈을 빨아낸다. 정부의 미공개 조사에서 이 덫에 걸린 사람은 2022년 82만 명으로 추정됐다. 물가가 치솟고 경기가 악화해 서민들이 벼랑으로 몰리면서 5년 새 30만 명이 늘었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올 2월부터 5개월간 전·현직 불법사채 조직원과 피해자 등 157명을 통해 불법사채의 세계를 취재했다. 그중에는 빚을 탕감받는 조건으로 불법사채 조직에 합류했다가 인생이 뒤바뀐 김민우(가명·37)도 있었다.“대리님, 저 한 번만 더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딱 한 번 만요….”휴대전화 너머로 50대 여성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사채를 사채로 갚는 ‘돌려막기’를 하느라 스무 번 넘게 돈을 빌린 그녀가 애원하는 대상은 불법사채 조직의 말단 조직원 ‘이 대리’였다.“더 빌리면 감당 못 하실 텐데요.”이 대리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흐느낌은 멈추지 않았다. 며칠 뒤, 이 대리는 찜찜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그녀가 넘긴 ‘비상연락망’에 남편 번호가 있었다. 전화를 걸자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의 남성이 받았다.“저희 집사람이 쓰러져서 중환자실에 있는데…. 누구시죠?”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이 여자, 나랑 전화하고 나서 쓰러진 건가. 텔레그램으로 상사에게 보고하자 평소보다 들뜬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어차피 남편은 그 여자가 얼마나 빌린 줄 모르는 거지? 그럼 남편한테 더 뜯어내면 되겠네. 오케이. 넌 신경 쓰지 마.”전화를 끊자 대포폰 검은 액정화면에 새하얗게 질린 자기 얼굴이 비쳤다. 그가 불법사채 조직에 쫓기던 채무자 김민우였을 때의 얼굴이었다. 사경을 헤매는 사람도 한 푼 더 뜯어낼 먹잇감으로 보는 불법사채의 세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불법사채의 덫에 걸려 고통받던 민우가 밑바닥 조직원 이 대리가 되어 덫을 놓던, 2022년 8월경의 얘기다.● 먹잇감을 넘기면 펼쳐지는 지옥조직에 합류하기로 한 첫날. 민우는 스스로 ‘이 대리’라는 닉네임을 붙였다. 가짜 성에 직함을 붙인 닉네임을 쓰는 다른 조직원들처럼. 그리고 한 달간 조직원으로 거듭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매일 아침 8시 서울 종로구의 A 호텔로 향했다. 저녁 6시까지 객실에 틀어박혀 직속 상사 ‘박 팀장’에게 배운 건 불법사채라는 지옥 입구에 먹잇감을 물어다 나르는 법이었다.‘김지영/주식회사XX/서울 강북구/100만 원/010-7733-XXXX’ 이름, 직장명, 거주지, 필요 금액, 연락처가 담긴 메시지. 일명 DB(데이터베이스)가 매일 100개씩 조직의 텔레그램 대화방에 올라왔다. ‘상담팀’ 소속이었던 이 대리는 DB 속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대출 계약을 맺고 ‘비상연락망’이라며 가족 친구 직장동료 등 10명의 연락처를 받아냈다. 이를 ‘수금팀’에 넘기면 1건당 2만 원을 받았다.먹잇감이 수금팀으로 넘어가면 본격적인 지옥이 펼쳐졌다.‘니네 회사 부장한테 연락가게 해줘?ㅋㅋ’ 메시지 한 통이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왔다. 사채를 쓴 사람은 주변 사람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걸 가장 두려워했다.채무자들은 가족상을 치르다가도 장례식장 구석에서 꼬박꼬박 답장했다. 주변에 연락가는 게 싫으면 벗은 몸을 찍어서 보내라는 요구도 거절하지 못했다.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가 바지만 겨우 내린 채 사진을 찍을 정도였다.이 대리가 하루 대출 계약 10건을 채운 날. 박 팀장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야, 이제 졸업해도 되겠다.”그리고 ‘졸업 선물’로 맥북을 건넸다. 하루 전화 10통으로 1주일에 100만 원을 벌 수 있다니. 두툼해지는 지갑이 반가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물어온 먹잇감들이 지옥 속에서 어떻게 고통받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지난 6개월 동안 이 대리가 갈망한 건 돈뿐이었으니까.● 출구 없는 미로의 시작민우의 첫 직장은 촉망받는 스타트업이었다. 하지만 회사가 기울면서 월급 220만 원을 주는 중소기업으로 옮겼다. 고소득 전문직인 아버지는 탐탁잖아 하며 “돈을 더 주는 회사에 다니는 게 낫지 않냐”고 했다.더 벌고 싶은 건 민우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일을 찾다가 보험 영업에 도전했지만 쉽지 않았다. 고객들이 연달아 계약을 해지하면서 2021년 10월경엔 두 달 정도 월급을 받지 못했다. 생활비로 쓴 카드값 200만 원을 갚을 돈이 필요했다. 4대 보험을 적용받지 않는 민우에게 은행 대출의 문턱은 높았다. 저소득·저신용자를 위한 정부 대출 상품 ‘햇살론’도 알아봤지만, 과거 빌린 대출금이 소득보다 많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가족 앞에선 돈 얘기가 안 나왔다. 민우는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걸 숨기고 있었다. 정규직도 아니고 소득이 일정치 않은 보험설계사는 중소기업 사원보다 더 아버지의 눈에 차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카드값 얘기를 하면 “요새 뭘 하고 다니길래 그 돈이 없냐”고 캐물을 게 뻔했다.친구들에게 얘기해볼까. 휴대전화에 저장된 연락처를 위아래로 훑었다. 전화를 해도 돈 얘기는 입 안에서 맴돌았다. 별일 없지. 그래. 말만 빙빙 돌리다 전화를 끊었다.● 점점 더 깊은 미로 속으로포털사이트에 ‘200만 원 소액대출’을 검색하자, 한 대부중개 플랫폼이 나왔다. 수백 개의 정식 대부업체들이 광고하고 있었다. 업체 몇 곳에 전화를 걸어봤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30분 뒤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대출 문의하셨죠?”왜 엉뚱한 번호로 전화가 오는 거지. 의아했지만 상대가 알려준 업체명은 금융감독원 사이트에서 검색까지 되는 정식 대부업체였다. 대출 심사를 받으려면 ‘비상연락망’이 필요하다는 말에 가족과 친구들의 연락처를 넘겼다.하지만 심사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상대는 “제대로 돈을 갚는 사람이라는 신용이 필요하다”며 일단 10만 원을 빌려줄 테니 1주일 뒤에 20만 원으로 갚으라고 했다. 하루라도 빨리 카드값을 막고 싶어 3일 만에 돈을 보냈다. 그런데 말이 바뀌었다. 자꾸만 소액부터 갚으면 원하는 금액을 빌려주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왜 말을 바꾸냐고 따지면 돌변했다.“그럼 니네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사채 쓴 거 알려줄게.”아버지에게 전화가 가면 집안이 뒤집힐 게 뻔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돈을 빌리고 또 빌렸다. 갚기로 한 시간보다 조금만 늦어도 연체비가 시간당 5~10만 원씩 붙었다. 상환 기간을 미루려면 수십만 원의 연장비를 내야 했다. 여유가 없어지자 돌려막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녹음파일을 들려줬다“니 아들 새X가 돈을 안 갚는다고. 이 씨XX아.”평소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과호흡으로 쓰러지곤 했던 어머니가 이런 전화를 또 받게 할 수는 없었다. 돌려막기가 계속됐다. 연락처를 넘긴 친구들에게는 눈을 질끈 감고 전화를 걸어 말했다.“내가 어디서 돈을 좀 빌렸는데. 상황이 꼬였어. 모르는 번호로 전화 오면 일단 받지 말아봐…. 나중에 얼굴 보고 다 설명할게.”밤낮으로 주차장 발렛 파킹 아르바이트와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6개월 동안 쓴 사채 원금은 255만 원. 이미 약 1000만 원을 보냈는데도 갚아야 할 돈 130만 원이 남아 있었다. ● 출구가 보인다는 착각“돈 때문에 힘든 것 같은데 여기서 일해 볼래요? 지금 남은 130만 원, 까줄 수 있는데.”그날 걸려 온 불법 사채업자의 전화는 평소와는 달랐다. 반말하던 그가 갑자기 존댓말을 쓰며 조직에 들어오면 남은 빚을 탕감해주겠다고 했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끔찍한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니. 흔들렸다.일단 만나서 얘기하자는 말에 다음 날 약속 장소였던 A 호텔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박 팀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너만 잘하면 한 달에 1500만 원도 벌 수 있어. 못해도 500만 원은 벌 거고.”그리고 퀵서비스로 도착한 대포폰 2대를 건넸다.위험한 제안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자신 때문에 고통받던 가족들의 괴로움까지 끊어낼 기회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한 달에 1500만 원까지 벌 수 있다니.‘그래. 돈만 바짝 벌고 금방 관두면 괜찮을 거야.’평범한 영업사원이었던 민우가 불법사채 조직에 몸담은 첫날이었다.● 고객도 경찰도 속이다교육을 마친 이 대리는 대포폰과 노트북만 들고 모텔을 전전하며 일했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배운 그대로 뱉으면 됐다.“고객님. 처음에 10만 원이나 15만 원을 쓰시고 1주일 뒤에 20만 원이나 28만 원으로 상환해 주시면, 이제 신용이 쌓여서 고객님께 100만 원 대출을 진행해드릴 수 있습니다.”‘조금씩 많이’ 빌리게 꼬드긴 뒤, 비상연락망을 인질 삼아 악착같이 돈을 뜯어내는 게 이들의 표준 수법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하루 세 번 계약 실적을 텔레그램으로 보고하기 전에는 고객이 보낸 비상연락망의 진위도 확인했다. 수금팀이 채무자의 가족에게 연락해 협박하려면, 비상연락망이 진짜여야만 하니까. 채무자의 비상연락망이 가짜면 그가 빌려 간 돈의 절반을 담당 상담원의 주급에서 깎았다.“택밴데요. 여기 101동 501호 XXX 씨 집 앞인데 문 앞에 두고 갈까요?”“우리 아들이 시킨 건가 보네. 근데 501호가 아니라 502호예요.”대포폰으로 택배 기사인 척 전화하면 고객이 넘긴 가족의 연락처와 주소가 진짜인지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일하는 동안 피해자 신고를 받은 경찰이 6차례 연락해 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 대리가 “그냥 제가 빌려준 돈 받는 거예요”라며 ‘배 째라’ 식으로 나간 뒤 전화를 끊으면 그만이었다. 대포폰과 대포통장, 텔레그램을 쓰기 때문에 경찰 수사가 쉽지 않다는 걸 조직원들은 잘 알고 있었다.조직의 행동강령은 철저했다. 조직원끼리는 서로 이름과 나이, 연락처를 밝히지 않았다. 대포폰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기능은 끄고, 수당은 무인택배함을 통해 받았다.교육 장소였던 A 호텔이 종로경찰서와 300m 거리인데도 박 팀장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덴 이유가 있었다. ● 휴대전화 너머의 ‘민우’들이 대리는 고객도 경찰도 속여가며 1주일에 180만 원까지 벌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찜찜했다. 채무자들에게서 자꾸만 민우의 모습이 보였다. 대부업체 이름을 물어보는 고객에겐 금감원 사이트에 올라온 업체 중 아무거나 하나 골라 말했다. 민우가 그랬듯, 이 대리의 고객들도 대부업체 이름을 듣고 나면 안심했다.“정신 차려 보니까 서른네 번이나 빌렸어요. 저 와이프도 있고 아기도 있는데.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어느 날, 돌려막기의 늪에 민우보다 더 깊숙이 빠져 있었던 40대 남성이 추심을 막아달라며 애원했다. 냉정하게 전화를 끊고 나니 민우보다 더 고통스럽겠다는 생각 때문에 정신이 멍해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런 이 대리를 보며 다른 조직원 중 한명은 말했다.“야, 다른 채무자 출신 애들은 잘만 하던데 넌 왜 그러냐?”이 대리를 포함한 상담팀 직원 6명 중 4명은 ‘채무자 출신’이었다. 이 대리보다 10살쯤 어린 20대 남성들이었다.● 이 대리의 마지막 고객점차 돈이 전부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특히 쓰러진 50대 여성의 소식을 조직에 알린 그날. 스무 번 넘게 사채를 써 조직에서 ‘VIP’로 통한 그녀가 죽음의 문턱 앞에서 ‘VVIP’가 된 그 순간. 더 이상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만두기로 마음을 굳힌 뒤 떠오른 사람은 26살 박상아(가명)였다. 어머니의 병원비를 대느라 늘 돈이 필요했던 상아. 조직원들은 상아를 ‘우리가 데리고 노는 애’라고 부르며 여러 번 돈을 빌리게 유도했다.어린 상아에게 못 할 짓을 했다는 생각에 평생 죄책감이 들 것 같았다. 망설이다 상아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가 정말 병원에 있는 게 맞냐고 물었다.그리고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으로 향했다. 혹시 누가 볼까 싶어 본인과도 상아와도 관련 없는 동네를 골랐다. 물품보관함에 100만 원을 넣고 다시 상아에게 전화해 비밀번호를 알려주며 말했다.“저는 일 그만둡니다. 제가 돈 줬다는 건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마세요. 이 핸드폰으로 고맙다는 문자 같은 것도 보내지 마시고요.”이 대리의 대포폰 마지막 통화였다.● 영원히 따라다닐 그림자상아와 통화를 마친 뒤 팀장에게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하자 한 남성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하루 15건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전화를 걸어 앳된 목소리로 욕을 퍼붓던, 그래서 조직의 가장 ‘윗선’이라고 생각했던 그 남자.“너 정말 후회 안 하겠어? 어디 가서 이런 돈 만질 수 없을 텐데. 지금 나가면 다시는 이 바닥에 못 들어와.”돈 이야기뿐이었던 대화는 욕 한마디 없이 금방 끝났다. 생각보다 쉽게 이 대리를 놔준 건, 또 다른 대리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 대리로 산 4개월이 끝났다.조직에서 빠져나온 뒤엔 경찰에서 연락이 올까 두려웠다. 처음 조직에 합류할 때 신분증이랑 등본 사본을 넘겼다. 경찰 수사망이 좁혀오면 ‘꼬리 자르기’를 하기 위해 그 정보만 넘길 수도 있었다. 한 달 동안 민우의 휴대전화는 비행기 모드였다.‘5000% 살인 이자… 불법 사채조직 검거’이 뉴스를 본 건 1년쯤 지난 뒤였다. 익숙한 닉네임과 수법들이 눈에 들어왔다. 민우에게는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돈의 무서움을 뼛속 깊이 깨달은 그는 모든 일의 시작과 끝에 돈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못한다. 누군가를 지옥으로 몰아넣고 빠져나오지 못하게끔 사지를 단단히 묶어두는 인간의 악랄함을 보고 나니, 더 이상 사람도 믿지 못하게 됐다.지금 평범한 회사원인 민우의 주변 사람 중 누구도 한때 이 대리로 불렸던 시간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시절은 불법사채가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처참하게 파괴하는지 생생히 증언한다. 그 때의 어두운 기억은 앞으로도 한낮의 그림자처럼 민우의 곁을 계속 따라다닐 것이다.민우는 정식 대부업체에 연락했는데 어쩌다 불법사채 조직의 손아귀에 떨어졌을까. 조직의 ‘먹잇감’이 모인 DB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80% 넘는 피해자가 불법사채를 접한 곳인 대부중개 플랫폼에 숨어든 불법사채 조직을 추적했다. 그 추적기는 24일 오후 4시 공개되는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 2회에서 이어진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와 디지털 스토리텔링 ‘돈의 덫’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불법사채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김민우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돈의 덫(상): 덫에 걸린 남자’()‘돈의 덫(하): 덫을 놓는 남자’()실제 김민우의 인터뷰를 담은 유튜브 영상()히어로콘텐츠팀▽팀장: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취재: 김소영 김태언 서지원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진: 홍진환 기자▽편집: 이승건 황준하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상아 임희래 뉴스룸디벨로퍼▽인터랙티브 디자인: 황어진 김민주 인턴▽영상: 송유라CD김소영 기자 ksy@donga.com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불법사채는 가장 절박한 이를 노려 마지막 고혈을 빨아낸다. 정부의 미공개 조사에서 피해자는 2022년 82만 명으로 추정됐다. 물가가 치솟고 경기가 악화해 서민들이 벼랑으로 몰리면서 5년 새 30만 명이 늘었다.이들을 착취한 건 소수의 ‘사채왕’이 아니었다. 불법사채 조직은 ‘급전 대출’ 등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온라인 대부중개 플랫폼에 숨어 있었다. 금융감독원 조사에서 피해자 4313명 중 3455명(80.1%)이 플랫폼에서 불법사채를 접했다고 했다.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올 2월부터 5개월간 전·현직 불법사채 조직원과 피해자 등 157명을 통해 불법사채의 세계를 취재했다. 그중에는 아이 학원비를 대려다 불법사채의 늪에 빠진 강선주(가명·48)도 있었다.오후 4시쯤이었다. 하굣길이었을 중학생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강선주(가명·48)는 반가운 마음에 “딸!” 하고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딸은 앞뒤 없이 말을 쏟아냈다.“엄마, 나한테 막 이상한 문자들이 와. 이게 다 뭐야?”선주는 직감했다. 그놈들이 내 딸한테도 연락했구나. 일하다 말고 집으로 뛰어갔다.지병 탓에 학교에서 쓰러져도 자기 입으로 이야기한 적 없는 아이였다. 엄마의 마음을 먼저 걱정하던, 일찍 철든 아이. 그런 딸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 발견한 딸은 피가 날 정도로 손톱을 뜯어대고 있었다.띵동! 띵동! 띵동! 딸의 휴대전화로 문자가 쏟아졌다. 모두 [국제발신]이라 적힌 알 수 없는 번호였다.“대구 76년생 강선주 딸 하윤(가명)아. 지금 사람 한 명 보냈거든. 그 아저씨한테 X주면 돼. 알겟(겠)지??”“넌 몇 살이야? 우리 하윤이 걸X면 오빠가 좀 그런데.”심장이 쿵쾅거렸다. 물에 빠진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엄마 나 어떡해? 너무 무서워.” 딸의 목소리마저 웅웅거려 잘 들리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현관문을 향해 뛰었다. 걸쇠를 건 선주는 몸을 떠는 딸을 안으며 말했다. 엄마 휴대전화가 해킹당한 거야. 괜찮아. 괜찮아.하지만 선주는 알고 있었다. 그놈들은 돈을 갚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란 사실을. 두 아이를 지키기 위해 손댔던 사채가 거꾸로 가족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선주가 문자 한 통에 돈의 덫에 갇혔던 올 4월 25일 얘기다.● 누군가에겐 당연할 쌀값“엄마는 맨날 일하는데 왜 돈이 없어?”외식하자는 아이들에게 군색하게 군 날, 초등학생 아들이 옆에 와 앉았다. 말없이 웃으면 아들은 꼬깃꼬깃한 천 원 몇 장을 꺼내 건넸다. “이거 엄마 써!” 그 작은 손을 보며, 선주는 야속한 인생이라고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서른둘 나이에 아기용품 사업 시작, 2년 만에 당한 사기, 빚 8000만 원을 갚느라 8년. 마흔셋에 작은 수선집을 마련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괜찮았다. 좋아하던 뜨개질을 할 수 있었으니까. 내겐 의젓한 딸과 명랑한 아들이 있었으니까.다짐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2022년 11월. 남편이 해고당했다. 코로나19로 회사 사정이 안 좋아졌다는 이유였다. 며칠 내리 누워만 있는 남편의 등을 보았다. 남편도 얼마나 놀랐을까? 기죽지 말자고요, 내가 더 힘내볼게. 그날 선주는 남몰래 일기를 눌러 적었다.남편은 수선집을 함께 키워보자고 했다. 하지만 많아 봐야 월 100만 원인 수익. 네 식구에겐 턱없이 모자랐다. 꿈에서도 미싱을 돌렸다. 그곳에서라도 바쁘면 깨어나 기분이 좋았다. 오전 8시 수선집으로 출근해 적은 일기는 매일 같았다. ‘오늘은 손님이 많았으면 좋겠다.’1년 만에 모아뒀던 돈이 바닥났다. 친척과 지인들에게 5만 원, 10만 원씩 빌려 아이들 밥을 먹이고 학원을 보냈다. 한참 뜸 들이다 돈 이야길 꺼내면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빌려주겠다”던 친구 몇몇은 연락을 차단했다. 그때마다 아이들만 생각했다. 올 3월 초에도 돈 나갈 구멍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어머니, 이번 달 학원비가 비어요.”“엄마! 나 마라탕 먹고 싶어!”“엄마, 동생 밥해 먹이려는데 집에 쌀이 없어.”어디 쌀 훔쳐 올 곳 없을까, 이런 생각까지 하던 그때. 지잉, 지잉, 휴대전화가 요란스레 울렸다.집으로 달려가 보니 곳곳이 빨간딱지였다. 은행 빚이 밀렸던 터였다. 일부인 30만 원을 내면 당장 압류는 정지할 수 있다고 했다. 학원비, 쌀값, 월세…. 계산이 꼬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결국 다음 날 휴대전화를 열었다. 더 이상 지인들에게 빌릴 생각은 없었다. 적선하듯 보는 눈초리, “쌀 살 돈도 없으면서 애는 왜 키우냐”는 찬 소리.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 편했다. 포털에 ‘대출’을 쳤다.한 대부중개 플랫폼에는 수백 개의 대부업체 광고가 떠 있었다. ‘정식 등록업체’ ‘안전하고 빠른 대출’ 쏟아지는 광고 문구 속 ‘당일 대출 가능’을 봤다. 3월 5일 문자를 보냈다.“돈이 필요해요.”● 박 실장의 친절함에 속다문자를 보내자마자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그는 자신을 박 실장이라 소개했다. 문자 보낸 대부업체의 협력업체 직원이라고 했다. “경기가 참 어려워요. 아이는 키우시나요? 너무 힘드셨겠어요.” 오랜만에 듣는 따뜻한 말투였다.꽤 긴 시간 서러움을 토했다. 수화기 너머로 안타깝다는 듯한 숨소리가 들렸다. 선주는 제 처지를 알아주는 박 실장이 다정하다고 생각했다.전화를 끊은 그는 돈을 빌리는 데에 필요한 서류 목록을 보냈다. 신분증과 등본, 초본, 가족관계증명서, 그리고 비상연락망. 가족과 친구, 거래처의 연락처를 보내자 답장이 왔다. 그중엔 딸의 전화번호도 있었다. ‘빨리 받으실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당장 돈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숨이 쉬어졌다.박 실장이 빌려준 돈은 40만 원, 일주일 뒤 갚아야 할 돈은 60만 원이었다. 연이율로 따지면 2607.1%. 법정 상한의 130배였다. 5일 뒤 거래처에서 선금을 받으면 갚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발주가 미뤄지며 계획이 틀어졌다. 상환 당일, 박 실장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저…오늘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요. 내일 드려도 될까요?’ 그 말을 끝으로 그에게서 다정함은 볼 수 없었다.‘야, 장난치냐? 개소리 말고 빨리 입금해라.’그는 빌려서라도 갚으라며 다른 사람을 연결했다. 박 실장의 원금은 김 실장에게 빌렸고, 김 실장의 원금은 임 실장에게 빌려 갚았다. 상환일을 며칠만 미루려 해도 수십만 원의 연장비를 요구했다. 갚기로 한 시간보다 1분만 늦어도 연체비가 5만~10만 원 붙었다.그렇게 6주 사이 돈 빌린 사람만 8명. 40만 원은 583만 원이 돼 있었다. 8명의 독촉 전화는 밤낮이 없었고,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 대출을 권하는 문자도 수십 통이 날아왔다. 이자 대신 다른 대가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끼리 ‘또라이돈’이라고 불렀다. “원나이트 해주고 싼 이자로 돈 빌려주는 거예요.” 제안을 거절하고 전화를 끊은 선주는 치를 떨었다.욕설이 섞인 폭탄 문자에 “돈 갚으라고 함. 전달”이라는 문구가 딸려 올 때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채무자들이 불법사채 조직한테 협박당해서 보낸 것이었다. 놈들은 이자를 몇 푼 깎아주겠다며 절박한 피해자를 범죄에 동원하고 있었다.휴대전화를 못 쓸 정도로 전화가 걸려 왔다. 누구에게 얼마를 갚아야 하는지도 헷갈렸다. 박 실장의 전화를 피했다. 그러자 메시지가 왔다. “안 되겠네. 너, 내가 칼로 쑤셔줄게.”누구라도 가게 앞을 지나면 몸이 움찔거렸다. 세워둔 차가 보이면 가게 문을 잠갔다. 들어오는 손님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 사람이 박 실장일까?’ 혼자 있는 시간에는 가게 불을 끄고, 문을 잠그고, 구석으로 가 미싱을 돌렸다. 그들은 날 알지만, 나는 그들을 모른다는 불안감. 지켜보고 있다는 공포에 손이 떨렸다.그러던 4월 23일, 메시지가 도착했다. “평생 니 딸년 괴롭혀 줄게.” 이어 도착한 문자에는 딸아이의 학교와 반, 선생님 이름과 번호, 교무실 번호가 적혀 있었다. 더는 혼자 안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경찰서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남편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 40만 원의 대가“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네가 저질렀으니 네가 해결해야지.”해고당한 후 내내 무기력증에 빠져있던 남편의 첫 마디였다. 차갑다 못해 매서웠다. 원통했던 건 남편 말이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식당 일을 겸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수선집 일을 마치면 밤 12시. 잠시 소파에 눈을 붙이면 금세 해가 밝았다. 그 햇살이 ‘지금 잠을 잘 자격이 있냐’고 묻는 듯했다.점점 남편과 함께 있는 자리에선 말도 잘 나오질 않았다. 이혼 이야기가 오갔다. 뇌졸중과 고지혈증으로 처방받았던 약을 쓸어모았다. 한 번에 털어 넣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포털에 ‘살기 싫을 때’를 썼다. 자살예방상담전화 번호가 떴다. 전화를 거니 “우울감이 심해 보인다. 병원에 가라”고 했지만, 돈이 없었다. 그렇게 몇 번 더 그 번호로 전화해 속을 털어놓았다.“돈 빌린 것, 다 제 잘못 맞아요. 그런데 살고 싶어서 선택한 일인데, 왜 이렇게까지 돼야 할까요.”그놈들에겐 “경찰에 신고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조롱만 돌아왔다.“가서 신고해ㅋㅋ 대포폰 써서 니넨 우리 못 잡아.”말문이 막혔다. 정말로 경찰에서 들은 말이 그거였다. 놈들은 경찰이 손쓰지 못하는 걸 알기라도 하듯 더 날뛰었다. 초 단위로 문자와 전화가 왔다. 오전 8시 18분부터 시작된 임 실장의 전화는 4시간 32분 동안 이어졌다. 총 764통이었다. 견딜 수 없던 건 내 손으로 번호를 넘긴 사람에게도 연락이 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4월 25일, 딸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나한테 막 이상한 문자들이 와. 이게 다 뭐야?”● 엄마의 소원그날 이후 딸은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등하굣길은 어쩔 수 없이 친구들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아파트 입구에 낯선 이라도 있는 날엔 한참을 걷다 들어온다고 했다. 초인종 소리도 무서워해 문 앞에 ‘누르지 마세요’ 쪽지를 붙여놓았다.언젠가 일기에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딸은 누구보다 날 닮았다고. 살갑진 않지만 정 많은 모습이 비슷했다. 무뚝뚝한 것 같다가도 자는 엄마의 휴대전화를 열어 남몰래 편지를 써놓는 아이였다.‘요즘 내가 말 안 들어서 미안해. 근데 알아? 엄만 완벽해! 나를 매일 웃게 만들어 주잖아. 엄마한테 태어나서 진짜 다행이란 생각을 할 만큼 너무 좋아. 언제 읽을지 모르지만, 언젠간 읽겠지? 힘내! 그리고 정말 많이 사랑해.’이제는 바란다. 딸은 엄마의 삶과 닮지 않기를. 그저 자신이 딸의 엄마인 것이 미안하다던 선주의 소원은 딱 하나.“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요. 가족들, 친구들이 저를 알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 사람들이 고통받는 건 다 저와 아는 사이여서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까 저와 인연을 맺기 전으로,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선주는 정식 대부업체에 연락했는데 어쩌다 불법사채 조직의 손아귀에 떨어졌을까.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80% 넘는 피해자가 불법사채를 접한 곳인 대부중개 플랫폼에 숨어든 불법사채 조직을 추적했다. 그 추적기는 24일 오후 4시 공개되는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 2회에서 이어진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트랩 : 돈의 덫에 걸리다’와 디지털 스토리텔링 ‘돈의 덫’ 등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불법사채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김민우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돈의 덫(상): 덫에 걸린 남자’()‘돈의 덫(하): 덫을 놓는 남자’()실제 김민우의 인터뷰를 담은 유튜브 영상()히어로콘텐츠팀▽팀장: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취재: 김소영 김태언 서지원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진 : 홍진환 기자▽편집: 이승건 황준하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상아 임희래 뉴스룸디벨로퍼▽인터랙티브 디자인: 황어진 김민주 인턴▽영상: 송유라CD대구=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김소영 기자 ksy@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불법사채는 가장 절박한 이를 노려 마지막 고혈을 빨아낸다. 정부의 미공개 조사에서 이 덫에 걸린 사람은 2022년 82만 명으로 추정됐다. 물가가 치솟고 경기가 악화해 서민들이 벼랑으로 몰리면서 5년 새 30만 명이 늘었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올 2월부터 5개월간 전·현직 불법사채 조직원과 피해자 등 157명을 통해 불법사채의 세계를 취재했다. 그중에는 빚을 탕감받는 조건으로 불법사채 조직에 합류했다가 인생이 뒤바뀐 김민우(가명·37)도 있었다. “대리님, 저 한 번만 더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딱 한 번 만요….”휴대전화 너머로 50대 여성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사채를 사채로 갚는 ‘돌려막기’를 하느라 스무 번 넘게 돈을 빌린 그녀가 애원하는 대상은 불법사채 조직의 말단 조직원 ‘이 대리’였다.“더 빌리면 감당 못 하실 텐데요.”이 대리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흐느낌은 멈추지 않았다. 며칠 뒤, 찜찜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그녀가 넘긴 ‘비상연락망’에 남편 번호가 있었다. 전화를 걸자 기운 하나 없는 목소리의 남성이 받았다.“저희 집사람이 쓰러져서 중환자실에 있는데…. 누구시죠?”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이 여자, 나랑 전화하고 나서 쓰러진 건가. 텔레그램으로 상사에게 보고하자 평소보다 들뜬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어차피 남편은 그 여자가 얼마나 빌린 줄 모르는 거지? 그럼 남편한테 더 뜯어내면 되겠네. 오케이. 넌 신경 쓰지 마.”전화를 끊자 대포폰 검은 액정화면에 새하얗게 질린 자기 얼굴이 비쳤다. 그가 불법사채 조직에 쫓기던 채무자 김민우였을 때의 얼굴이었다. 사경을 헤매는 사람도 한 푼 더 뜯어낼 먹잇감으로 보는 불법사채의 세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불법사채의 덫에 걸려 고통받던 민우가 밑바닥 조직원 이 대리가 되어 덫을 놓던, 2022년 8월경의 얘기다.● 먹잇감을 넘기면 펼쳐지는 지옥조직에 합류하기로 한 첫날. 민우는 스스로 ‘이 대리’라는 닉네임을 붙였다. 가짜 성에 직함을 붙인 닉네임을 쓰는 다른 조직원들처럼. 그리고 한 달간 조직원으로 거듭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매일 아침 8시 서울 종로구의 A 호텔로 향했다. 저녁 6시까지 객실에 틀어박혀 직속 상사 ‘박 팀장’에게 배운 건 불법사채라는 지옥 입구에 먹잇감을 물어다 나르는 법이었다.‘김지영/주식회사XX/서울 강북구/100만 원/010-7733-XXXX’ 이름, 직장명, 거주지, 필요 금액, 연락처가 담긴 메시지. 일명 DB(데이터베이스)가 매일 100개씩 조직의 텔레그램 대화방에 올라왔다. ‘상담팀’ 소속이었던 이 대리는 DB 속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대출 계약을 맺고 ‘비상연락망’이라며 가족 친구 직장동료 등 10명의 연락처를 받아냈다. 이를 ‘수금팀’에 넘기면 1건당 2만 원을 받았다.먹잇감이 수금팀으로 넘어가면 본격적인 지옥이 펼쳐졌다. ‘니네 회사 부장한테 연락가게 해줘?ㅋㅋ’ 메시지 한 통이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왔다. 사채를 쓴 사람은 주변 사람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걸 가장 두려워했다.채무자들은 가족상을 치르다가도 장례식장 구석에서 꼬박꼬박 답장했다. 주변에 연락가는 게 싫으면 벗은 몸을 찍어서 보내라는 요구도 거절하지 못했다.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가 바지만 겨우 내린 채 사진을 찍을 정도였다.이 대리가 하루 대출 계약 10건을 채운 날. 박 팀장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야, 이제 졸업해도 되겠다.”그리고 ‘졸업 선물’로 맥북을 건넸다. 하루 전화 10통으로 1주일에 100만 원을 벌 수 있다니. 두툼해지는 지갑이 반가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물어온 먹잇감들이 지옥 속에서 어떻게 고통받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지난 6개월 동안 이 대리가 갈망한 건 돈뿐이었으니까.● 출구 없는 미로의 시작민우의 첫 직장은 촉망받는 스타트업이었다. 하지만 회사가 기울면서 월급 220만 원을 주는 중소기업으로 옮겼다. 고소득 전문직인 아버지는 탐탁잖아 하며 “돈을 더 주는 회사에 다니는 게 낫지 않냐”고 했다.더 벌고 싶은 건 민우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일을 찾다가 보험 영업에 도전했지만 쉽지 않았다. 고객들이 연달아 계약을 해지하면서 2021년 10월경엔 두 달 정도 월급을 받지 못했다. 생활비로 쓴 카드값 200만 원을 갚을 돈이 필요했다. 4대 보험을 적용받지 않는 민우에게 은행 대출의 문턱은 높았다. 저소득·저신용자를 위한 정부 대출 상품 ‘햇살론’도 알아봤지만, 과거 빌린 대출금이 소득보다 많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가족 앞에선 돈 얘기가 안 나왔다. 민우는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걸 숨기고 있었다. 정규직도 아니고 소득이 일정치 않은 보험설계사는 중소기업 사원보다 더 아버지의 눈에 차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카드값 얘기를 하면 “요새 뭘 하고 다니길래 그 돈이 없냐”고 캐물을 게 뻔했다.친구들에게 얘기해볼까. 휴대전화에 저장된 연락처를 위아래로 훑었다. 전화를 해도 돈 얘기는 입 안에서 맴돌았다. 별일 없지. 그래. 말만 빙빙 돌리다 전화를 끊었다.● 점점 더 깊은 미로 속으로포털사이트에 ‘200만 원 소액대출’을 검색하자, 한 대부중개 플랫폼이 나왔다. 수백 개의 정식 대부업체들이 광고하고 있었다. 업체 몇 곳에 전화를 걸어봤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30분 뒤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대출 문의하셨죠?”왜 엉뚱한 번호로 전화가 오는 거지. 의아했지만 상대가 알려준 업체명은 금융감독원 사이트에서 검색까지 되는 정식 대부업체였다. 대출 심사를 받으려면 ‘비상연락망’이 필요하다는 말에 가족과 친구들의 연락처를 넘겼다.하지만 심사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상대는 “제대로 돈을 갚는 사람이라는 신용이 필요하다”며 일단 10만 원을 빌려줄 테니 1주일 뒤에 20만 원으로 갚으라고 했다. 하루라도 빨리 카드값을 막고 싶어 3일 만에 돈을 보냈다. 그런데 말이 바뀌었다. 자꾸만 소액부터 갚으면 원하는 금액을 빌려주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왜 말을 바꾸냐고 따지면 돌변했다.“그럼 니네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알려줄게.”아버지에게 전화가 가면 집안이 뒤집힐 게 뻔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돈을 빌리고 또 빌렸다. 갚기로 한 시간보다 조금만 늦어도 연체비가 시간당 5~10만 원씩 붙었다. 상환 기간을 미루려면 수십만 원의 연장비를 내야 했다. 여유가 없어지자 돌려막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녹음파일을 들려줬다“니 아들XX가 돈을 안 갚는다고. 이 씨XX아.”평소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과호흡으로 쓰러지곤 했던 어머니가 이런 전화를 또 받게 할 수는 없었다. 돌려막기가 계속됐다. 연락처를 넘긴 친구들에게는 눈을 질끈 감고 전화를 걸어 말했다.“내가 어디서 돈을 좀 빌렸는데. 상황이 꼬였어. 모르는 번호로 전화 오면 일단 받지 말아봐…. 나중에 얼굴 보고 다 설명할게.”밤낮으로 주차장 발렛 파킹 아르바이트와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6개월 동안 쓴 사채 원금은 255만 원. 이미 약 1000만 원을 보냈는데도 갚아야 할 돈 130만 원이 남아 있었다. ● 출구가 보인다는 착각“돈 때문에 힘든 것 같은데 여기서 일해 볼래요? 지금 남은 130만 원, 까줄 수 있는데.”그날 걸려 온 불법 사채업자의 전화는 평소와는 달랐다. 반말하던 그가 갑자기 존댓말을 쓰며 조직에 들어오면 남은 빚을 탕감해주겠다고 했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끔찍한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니. 흔들렸다.일단 만나서 얘기하자는 말에 다음 날 약속 장소였던 A 호텔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박 팀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너만 잘하면 한 달에 1500만 원도 벌 수 있어. 못해도 500만 원은 벌 거고.”그리고 퀵서비스로 도착한 대포폰 2대를 건넸다.위험한 제안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끔찍한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자신 때문에 고통받던 가족들의 괴로움까지 끊어낼 기회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한 달에 1500만 원까지 벌 수 있다니.‘그래. 돈만 바짝 벌고 금방 관두면 괜찮을 거야.’평범한 영업사원이었던 민우가 불법사채 조직에 몸담은 첫날이었다.● 고객도 경찰도 속이다교육을 마친 이 대리는 대포폰과 노트북만 들고 모텔을 전전하며 일했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배운 그대로 뱉으면 됐다.“고객님. 처음에 10만 원이나 15만 원을 쓰시고 1주일 뒤에 20만 원이나 28만 원으로 상환해 주시면, 이제 신용이 쌓여서 고객님께 100만 원 대출을 진행해드릴 수 있습니다.”‘조금씩 많이’ 빌리게 꼬드긴 뒤, 비상연락망을 인질 삼아 악착같이 돈을 뜯어내는 게 이들의 표준 수법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하루 세 번 계약 실적을 텔레그램으로 보고하기 전에는 고객이 보낸 비상연락망의 진위도 확인했다. 수금팀이 채무자의 가족에게 연락해 협박하려면, 비상연락망이 진짜여야만 하니까. 채무자의 비상연락망이 가짜면 그가 빌려 간 돈의 절반을 담당 상담원의 주급에서 깎았다.“택밴데요. 여기 101동 501호 XXX 씨 집 앞인데 문 앞에 두고 갈까요?”“우리 아들이 시킨 건가 보네. 근데 501호가 아니라 502호예요.”대포폰으로 택배 기사인 척 전화하면 고객이 넘긴 가족의 연락처와 주소가 진짜인지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일하는 동안 피해자 신고를 받은 경찰이 6차례 연락해 오기도 했다. 하지만 “불법사채가 아니라 제가 빌려준 돈 받는 거예요”라며 ‘배 째라’ 식으로 나가고 전화를 끊으면 그만이었다. 대포폰과 대포통장, 텔레그램을 쓰기 때문에 경찰 수사가 쉽지 않다는 걸 조직원들은 잘 알고 있었다.조직의 행동강령은 철저했다. 조직원끼리는 서로 이름과 나이, 연락처를 밝히지 않았다. 대포폰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기능은 끄고, 수당은 무인택배함을 통해 받았다.교육 장소였던 A 호텔이 종로경찰서와 300m 거리인데도 박 팀장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덴 이유가 있었다. ● 휴대전화 너머의 ‘민우’들이 대리는 고객도 경찰도 속여가며 1주일에 180만 원까지 벌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찜찜했다. 채무자들에게서 자꾸만 민우의 모습이 보였다. 대부업체 이름을 물어보는 고객에겐 금감원 사이트에 올라온 업체 중 아무거나 하나 골라 말했다. 민우가 그랬듯, 이 대리의 고객들도 대부업체 이름을 듣고 나면 안심했다.“정신 차려 보니까 서른네 번이나 빌렸어요. 저 와이프도 있고 아기도 있는데.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어느 날, 돌려막기의 늪에 민우보다 더 깊숙이 빠져 있었던 40대 남성이 추심을 막아달라며 애원했다. 냉정하게 전화를 끊고 나니 민우보다 더 고통스럽겠다는 생각 때문에 정신이 멍해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런 이 대리를 보며 다른 조직원 중 한명은 말했다.“야, 다른 채무자 출신 애들은 잘만 하던데 넌 왜 그러냐?”이 대리를 포함한 상담팀 직원 6명 중 4명은 ‘채무자 출신’이었다. 민우보다 10살쯤 어린 20대 남성들이었다.● 이 대리의 마지막 고객점차 돈이 전부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특히 쓰러진 50대 여성의 소식을 조직에 알린 그날. 스무 번 넘게 사채를 써 조직에서 ‘VIP’로 통한 그녀가 죽음의 문턱 앞에서 ‘VVIP’가 된 그 순간. 더 이상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만두기로 마음을 굳힌 뒤 떠오른 사람은 26살 박상아(가명)였다. 어머니의 병원비를 대느라 늘 돈이 필요했던 상아. 조직원들은 상아를 ‘우리가 데리고 노는 애’라고 부르며 여러 번 돈을 빌리게 유도했다.어린 상아에게 못 할 짓을 했다는 생각에 평생 죄책감이 들 것 같았다. 망설이다 상아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가 정말 병원에 있는 게 맞냐고 물었다.그리고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으로 향했다. 혹시 누가 볼까 싶어 본인과도 상아와도 관련 없는 동네를 골랐다. 물품보관함에 100만 원을 넣고 다시 상아에게 전화해 비밀번호를 알려주며 말했다.“저는 일 그만둡니다. 제가 돈 줬다는 건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마세요. 이 핸드폰으로 고맙다는 문자 같은 것도 보내지 마시고요.”이 대리의 대포폰 마지막 통화였다.● 영원히 따라다닐 그림자상아와 통화를 마친 뒤 팀장에게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하자 한 남성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하루 15건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전화를 걸어 앳된 목소리로 욕을 퍼붓던, 그래서 조직의 가장 ‘윗선’이라고 생각했던 그 남자.“너 정말 후회 안 하겠어? 어디 가서 이런 돈 만질 수 없을 텐데. 지금 나가면 다시는 이 바닥에 못 들어와.”돈 이야기뿐이었던 대화는 욕 한마디 없이 금방 끝났다. 생각보다 쉽게 이 대리를 놔준 건, 또 다른 대리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 대리로 산 4개월이 끝났다.조직에서 빠져나온 뒤엔 경찰에서 연락이 올까 두려웠다. 처음 조직에 합류할 때 신분증이랑 등본 사본을 넘겼다. 경찰 수사망이 좁혀오면 ‘꼬리 자르기’를 하기 위해 그 정보만 넘길 수도 있었다. 한 달 동안 민우의 휴대전화는 비행기 모드였다. ‘5000% 살인 이자… 불법 사채조직 검거’ 이 뉴스를 본 건 1년쯤 지난 뒤였다. 익숙한 닉네임과 수법들이 눈에 들어왔다. 민우에게는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돈의 무서움을 뼛속 깊이 깨달은 그는 모든 일의 시작과 끝에 돈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못한다. 누군가를 지옥으로 몰아넣고 빠져나오지 못하게끔 사지를 단단히 묶어두는 인간의 악랄함을 보고 나니, 더 이상 사람도 믿지 못하게 됐다.지금 평범한 회사원인 민우의 주변 사람 중 누구도 한때 이 대리로 불렸던 시간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시절은 불법사채가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처참하게 파괴하는지 생생히 증언한다. 그 어두운 기억은 앞으로도 한낮의 그림자처럼 민우의 곁을 계속 따라다닐 것이다민우는 정식 대부업체에 연락했는데 어쩌다 불법사채 조직의 손아귀에 떨어졌을까. 조직의 ‘먹잇감’이 모인 DB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80% 넘는 피해자가 불법사채를 접한 곳인 대부중개 플랫폼에 숨어든 불법사채 조직을 추적했다. 그 추적기는 24일 오후 4시 공개되는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 2회에서 이어진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와 디지털 스토리텔링 ‘돈의 덫’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불법사채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김민우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돈의 덫(상): 덫에 걸린 남자’()‘돈의 덫(하): 덫을 놓는 남자’()실제 김민우의 인터뷰를 담은 유튜브 영상()히어로콘텐츠팀▽팀장: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취재: 김소영 김태언 서지원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진: 홍진환 기자▽편집: 이승건 황준하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상아 임희래 뉴스룸디벨로퍼▽인터랙티브 디자인: 황어진 김민주 인턴▽영상: 송유라CD김소영 기자 ksy@donga.com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불법사채는 가장 절박한 이를 노려 마지막 고혈을 빨아낸다. 정부의 미공개 조사에서 이 덫에 걸린 사람은 2022년 82만 명으로 추정됐다. 물가가 치솟고 경기가 악화해 서민들이 벼랑으로 몰리면서 5년 새 30만 명이 늘었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올 2월부터 5개월간 전·현직 불법사채 조직원과 피해자 등 157명을 통해 불법사채의 세계를 취재했다. 그중에는 아이 학원비를 대려다 불법사채의 늪에 빠진 강선주(가명·48)도 있었다.4월 25일, 어쩐지 고단하게 느껴지는 오후 4시쯤이었다. 마침 하굣길이었을 중학생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반가운 마음에 “딸!”하고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앞뒤 없이 말을 쏟는 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엄마, 나한테 막 이상한 문자들이 와. 이게 다 뭐야?”선주는 순간 직감했다. 그놈들이 내 딸에게도 연락했구나. 일하다 말고 집으로 뛰어갔다. 딸은 피가 날 정도로 손톱을 뜯어대고 있었다. 띵동! 띵동! 띵동! 딸의 휴대전화로 문자가 쏟아졌다. 모두 [국제발신]이라 적힌 알 수 없는 번호였다.“대구 76년생 강선주 딸 하윤(가명)아. 지금 사람 한 명 보냈거든. 그 아저씨한테 X주면 돼. 알겟(겠)지??”“넌 몇 살이야? 우리 하윤이 걸X면 오빠가 좀 그런데”심장이 쿵쾅거렸다. 물에 빠진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엄마 나 어떡해? 너무 무서워.” 딸의 목소리마저 웅웅거려 잘 들리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현관문을 향해 뛰었다. 걸쇠를 건 선주는 몸을 떠는 딸을 안으며 말했다. 엄마 휴대전화가 해킹당한 거야. 괜찮아. 괜찮아.하지만 선주는 알고 있었다. 그놈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놈들은, 빌린 돈을 갚지 못하자 딸의 몸을 빌려달라 했다.● 누군가에겐 당연할 쌀값“엄마는 맨날 일하는데 왜 돈이 없어?”외식하자는 아이들에게 군색하게 군 날, 초등학생 아들이 옆에 와 앉았다. 말없이 웃으면 아들은 꼬깃꼬깃한 천 원 몇 장을 꺼내 건넸다. “이거 엄마 써!” 그 작은 손을 보며, 선주는 야속한 인생이라고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서른둘 나이에 아기용품 사업 시작, 2년 만에 당한 사기, 빚 8000만 원을 갚느라 8년. 마흔셋에 작은 수선집을 마련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괜찮았다. 좋아하던 뜨개질을 할 수 있었으니까. 내겐 의젓한 딸과 명랑한 아들이 있었으니까.다짐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2022년 11월. 남편이 해고당했다. 코로나19로 회사 사정이 안 좋아졌다는 이유였다. 며칠 내리 누워만 있는 남편의 등을 보았다. 남편도 얼마나 놀랐을까? 기죽지 말자고요, 내가 더 힘내볼게. 그날 선주는 남몰래 일기를 눌러 적었다.남편은 수선집을 함께 키워보자고 했다. 하지만 많아 봐야 월 100만 원인 수익. 네 식구에겐 턱없이 모자랐다. 꿈에서도 미싱을 돌렸다. 그곳에서라도 바쁘면 깨어나 기분이 좋았다. 오전 8시 수선집으로 출근해 적은 일기는 매일 같았다. ‘오늘은 손님이 많았으면 좋겠다.’1년 만에 모아뒀던 돈이 바닥났다. 친척과 지인들에게 5만 원, 10만 원씩 빌려 아이들 밥을 먹이고 학원을 보냈다. 한참 뜸 들이다 돈 이야길 꺼내면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빌려주겠다”던 친구 몇몇은 연락을 차단했다. 그때마다 아이들만 생각했다. 그렇게 또 몇 개월을 보내던 올 3월 초, 그 주에도 돈 나갈 구멍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어머니, 이번 달 학원비가 비어요.”“엄마! 나 마라탕 먹고 싶어!”“엄마, 동생 밥해 먹이려는데 집에 쌀이 없어.”어디 쌀 훔쳐 올 곳 없을까, 이런 생각까지 하던 그때. 지잉, 지잉, 휴대전화가 요란스레 울렸다.집으로 달려가 보니 곳곳이 빨간딱지였다. 은행 빚이 밀렸던 터였다. 일부인 30만 원을 내면 당장 압류는 정지할 수 있다고 했다. 학원비, 쌀값, 월세…. 계산이 꼬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결국 다음 날 휴대전화를 열었다. 더 이상 지인들에게 빌릴 생각은 없었다. 적선하듯 보는 눈초리, “쌀 살 돈도 없으면서 애는 왜 키우냐”는 찬 소리.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 편했다. 포털에 ‘대출’을 쳤다. 한 대부중개 플랫폼에는 수백 개의 대부업체 광고가 떠 있었다. ‘정식 등록업체’ ‘안전하고 빠른 대출’ 쏟아지는 광고 문구 속 ‘당일 대출 가능’을 봤다. 3월 5일 문자를 보냈다.“돈이 필요해요.”● 박 실장의 친절함에 속다문자를 보내자마자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그는 자신을 박 실장이라 소개했다. 문자 보낸 대부업체의 협력업체 직원이라고 했다. “경기가 참 어려워요. 아이는 키우시나요? 너무 힘드셨겠어요.” 오랜만에 듣는 따뜻한 말투였다.꽤 긴 시간 서러움을 토했다. 수화기 너머로 안타깝다는 듯한 숨소리가 들렸다. 선주는 제 처지를 알아주는 박 실장이 다정하다고 생각했다.전화를 끊은 그는 돈을 빌리는 데에 필요한 서류 목록을 보냈다. 신분증과 등본, 초본, 가족관계증명서, 그리고 비상연락망. 가족과 친구, 거래처의 연락처를 보내자 답장이 왔다. 그중엔 딸의 전화번호도 있었다. ‘빨리 받으실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당장 돈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숨이 쉬어졌다.박 실장이 빌려준 돈은 40만 원, 일주일 뒤 갚아야 할 돈은 60만 원이었다. 5일 뒤 거래처에서 선금을 받으면 갚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발주가 미뤄지며 계획이 틀어졌다. 상환 당일, 박 실장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저…오늘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요. 내일 드려도 될까요?’ 그 말을 끝으로 그에게서 다정함은 볼 수 없었다.‘야, 장난치냐? X소리 말고 빨리 입금해라.’그는 빌려서라도 갚으라며 다른 사람을 연결했다. 박 실장의 원금은 김 실장에게 빌렸고, 김 실장의 원금은 임 실장에게 빌려 갚았다. 상환일을 며칠만 미루려 해도 수십만 원의 연장비를 요구했다. 갚기로 한 시간보다 1분만 늦어도 연체비가 5만~10만 원 붙었다.그렇게 6주 사이 돈 빌린 사람만 8명. 40만 원은 583만 원이 돼 있었다. 8명의 독촉 전화는 밤낮이 없었고,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 대출 상담을 권하는 문자도 수십 통이 날아왔다. 이자 대신 다른 대가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끼리 ‘또라이돈’이라고 불렀다. “원나잇 해주고 싼 이자로 돈 빌려주는 거예요.” 제안을 거절하고 전화를 끊은 선주는 치를 떨었다.욕설이 섞인 폭탄 문자에 “돈 갚으라고 함. 전달”이라는 문구가 딸려올 때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채무자들이 불법사채 조직한테 협박당해서 보낸 것이었다. 놈들은 이자를 몇 푼 깎아주겠다며 절박한 피해자를 범죄에 동원하고 있었다.이젠 누구에게 얼마를 갚아야 하는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두려운 마음에 박 실장의 전화를 피했다. 그러자 메시지가 왔다.‘안 되겠네.’ ‘이제 시작해보자.’ ‘너, 내가 칼로 쑤셔줄게.’누구라도 가게 앞을 지나면 몸이 움찔거렸다. 세워둔 차가 보이면 가게 문을 잠갔다. 들어오는 손님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 사람이 박 실장일까?’ 혼자 있는 시간에는 가게 불을 끄고, 문을 잠그고, 구석으로 가 미싱을 돌렸다. 그들은 날 알지만, 나는 그들을 모른다는 불안감. 지켜보고 있다는 공포에 손이 떨렸다.그러던 4월 23일,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평생 니 딸 괴롭혀줄게.’ 이어 도착한 문자에는 딸아이의 학교와 반, 선생님 이름과 번호, 교무실 번호가 덩그러니 적혀있었다. 더는 혼자 안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경찰서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남편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 40만 원의 대가“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네가 저질렀으니 네가 해결해야지.”해고당한 후 내내 무기력증에 빠져있던 남편의 첫 마디였다. 차갑다 못해 매서웠다. 원통했던 건 남편 말이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식당 일을 겸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수선집 일을 마치면 밤 12시. 잠시 소파에 눈을 붙이면 금세 해가 밝았다. 그 햇살이 ‘지금 잠을 잘 자격이 있냐’고 묻는 듯했다.점점 남편과 함께 있는 자리에선 말도 잘 나오질 않았다. 이혼 이야기가 오갔다. 뇌졸중과 고지혈증으로 처방받았던 약을 쓸어모았다. 한 번에 털어 넣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포털에 ‘살기 싫을 때’를 썼다. 자살예방상담전화 번호가 떴다. 전화를 거니 “우울감이 심해 보인다. 병원에 가라”고 했지만, 돈이 없었다. 그렇게 몇 번 더 그 번호로 전화해 속을 털어놓았다.“돈 빌린 것, 다 제 잘못 맞아요. 그런데 살고 싶어서 선택한 일인데, 왜 이렇게까지 돼야 할까요.”그놈들에겐 “경찰에 신고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조롱만 돌아왔다. “가서 신고해ㅋㅋ 대포폰 써서 니넨 우리 못 잡아.” 말문이 막혔다. 정말로 경찰에서 들은 말이 그거였다. 놈들은 경찰이 손쓰지 못하는 걸 알기라도 하듯 더 날뛰었다. 초 단위로 문자와 전화가 왔다. 오전 8시 18분부터 시작된 임 실장의 전화는 4시간 32분 동안 이어졌다. 총 764통이었다. 견딜 수 없던 건 내 손으로 번호를 넘긴 사람에게도 연락이 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4월 25일, 딸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나한테 막 이상한 문자들이 와. 이게 다 뭐야?”● 엄마의 소원그날 이후 딸은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등하굣길은 어쩔 수 없이 친구들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아파트 입구에 낯선 이라도 있는 날엔 한참을 걷다 들어온다고 했다. 초인종 소리도 무서워해 문 앞에 ‘누르지 마세요’ 쪽지를 붙여놓았다.언젠가 일기에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딸은 누구보다 날 닮았다고. 살갑진 않지만 정 많은 모습이 비슷했다. 무뚝뚝한 것 같다가도 자는 엄마의 휴대전화를 열어 남몰래 편지를 써놓는 아이였다. 요즘 내가 말 안 들어서 미안해. 근데 알아? 엄만 완벽해! 나를 매일 웃게 만들어 주잖아. 엄마한테 태어나서 진짜 다행이란 생각을 할 만큼 너무 좋아. 언제 읽을지 모르지만, 언젠간 읽겠지? 힘내! 그리고 정말 많이 사랑해.’이제는 바란다. 딸은 엄마의 삶과 닮지 않기를. 그저 자신이 딸의 엄마인 것이 미안하다던 선주의 소원은 딱 하나.“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요. 가족들, 친구들이 저를 알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 사람들이 고통받는 건 다 저와 아는 사이여서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까 저와 인연을 맺기 전으로,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선주는 정식 대부업체에 연락했는데 어쩌다 불법사채 조직의 손아귀에 떨어졌을까.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80% 넘는 피해자가 불법사채를 접한 곳인 대부중개 플랫폼에 숨어든 불법사채 조직을 추적했다. 그 추적기는 24일 오후 4시 공개되는 ‘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 2회에서 이어진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트랩 : 돈의 덫에 걸리다’와 디지털 스토리텔링 ‘돈의 덫’ 등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불법사채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김민우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돈의 덫(상): 덫에 걸린 남자’()‘돈의 덫(하): 덫을 놓는 남자’()실제 김민우의 인터뷰를 담은 유튜브 영상()히어로콘텐츠팀▽팀장: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취재: 김소영 김태언 서지원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진 : 홍진환 기자▽편집: 이승건 황준하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상아 임희래 뉴스룸디벨로퍼▽인터랙티브 디자인: 황어진 김민주 인턴▽영상: 송유라CD대구=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김소영 기자 ksy@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올해 가요계는 레전드 가왕과 30대 솔로 강자, 유망 신인 그룹이 이끌 것으로 전망된다. 조용필, 이문세, 아이유, 지드래곤 등 내로라하는 강자들의 컴백이 펼쳐진다. SM엔터테인먼트, 하이브 등 대형 기획사들이 준비 중인 신인 그룹들도 눈길을 끈다.● 레전드 가왕들의 복귀 올해는 거물들의 신곡이 팬들의 귀를 호강시켜 줄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해 데뷔 55주년을 맞아 대규모 공연을 이어온 조용필은 올해 정규앨범 20집을 내놓는다. 2013년 19집 ‘헬로’ 이후 11년 만의 정규 앨범이라 많은 관심이 쏠린다. 그는 지난해 4월 싱글 ‘라’, ‘필링 오브 유’를 내며 20집 발표에 시동을 걸었다. 소속사 YPC는 “과거와는 다르게 2022년과 2023년 연이어 싱글을 발매하는 등 정규 앨범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노래하는 시인’ 이문세도 올 상반기(1∼6월) 중 정규 앨범 17집을 발표한다. 2018년 이후 6년 만에 내놓는 정규 앨범이다. 앞서 지난달 21일 신보 수록곡 중 하나인 ‘웜 이즈 베터 댄 핫’을 먼저 선보였다. 재즈클럽에서 듣는 듯한 생생한 악기 연주가 매력적인 곡이다. 이문세는 3월부터 전국 투어 ‘2024 씨어터 이문세’를 시작하며 먼저 무대에서 팬들과 만날 예정이다.● 30대 솔로 강자들의 컴백 레전드 가왕들 못지 않게 30대 솔로 강자들의 컴백 무대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지드래곤은 올 상반기 중 새로운 앨범 발표를 예고했다. 그는 최근 인공지능(AI) 메타버스 기업 갤럭시코퍼레이션에 새 둥지를 텄다. 지난달 21일 자필 편지를 통해 “저의 책임을 다하며 컴백해 아티스트로서의 책임도, 사회적 책임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이유도 올 상반기 2021년 미니 앨범 ‘조각집’ 발표 이후 3년 만에 돌아온다. 아이유는 그룹 방탄소년단(BTS) 멤버 슈가의 토크 콘텐츠 ‘슈취타’에 최근 출연해 “5∼6곡이 담긴 미니앨범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1월에는 한국에 거의 없다. 새로운 그림을 담고 싶어 해외에서 막바지 작업을 할 것 같다. 컴백 이후에는 투어도 돈다”고 말했다. 아이유의 신곡 뮤직비디오에 BTS 멤버 뷔가 출연하기로 해 화제가 됐다.● 일본 진출 등 주목받는 신인 그룹들 대형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 의욕적으로 선보이는 신인들도 주목할 만하다. 이 중 그룹 ‘투어스(TWS)’는 하이브 계열의 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가 세븐틴 이후 9년 만에 내놓는 보이그룹이다. 플레디스 측은 “탄탄한 퍼포먼스와 비주얼, 탁월한 음악 감각을 지닌 최정예 6명”이라고 소개했다. 22일 데뷔 앨범을 내놓을 예정이다. ‘아이돌 맛집’으로 통하는 에스엠도 상반기 6인조 보이그룹 ‘NCT NEW TEAM’(가칭)을 선보인다. 일본 현지를 중심으로 활동할 예정인 이들은 정식 데뷔에 앞서 지난달 일본 9개 도시에서 24회에 걸쳐 데뷔 투어를 진행했다. 에스엠은 지난해 2월 ‘SM 3.0’ 전략을 발표하며 “이들을 마지막으로 NCT의 무한 확장 콘셉트를 종료하겠다”고 밝혔었다. 에스엠은 올해 중 그룹 에스파에 이어 4년 만에 걸그룹을 출범시킬 예정이다. YG엔터테인먼트의 신예 그룹 베이비 몬스터도 올해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앞서 이들은 지난해 11월 디지털 싱글을 발매하며 데뷔했다. 올해는 2월 신곡 ‘스턱 인 더 미들’을 내놓는 데 이어 4월에 첫 미니 앨범을 발표하며 활동 반경을 넓힐 계획이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Z세대(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걸쳐 태어난 세대)를 중심으로 최근 몇 년 새 ‘빠른 호흡’의 음악 소비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원곡을 1.5배속, 2배속 등 빠른 속도로 감상하는 것이 새로운 문화가 된 것. 수년 전 발표된 곡이라도 재생 속도를 빠르게 할 경우 가수의 목소리나 곡의 분위기가 바뀌어 신선하게 느껴진다는 반응이다. 지난해 12월 21일 국내 최대 음원 플랫폼인 멜론 차트 톱100에서 1위를 차지하며 발표 10년 만에 역주행에 성공한 보이그룹 엑소의 곡 ‘첫 눈’이 대표적이다. 원곡은 잔잔한 어쿠스틱 팝이지만 최근 한 틱토커가 빠른 배속 버전의 ‘첫 눈’에 맞춰 춤을 추는 영상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화제가 되며 주목받았다. 일명 ‘댄스 챌린지’로 대중의 인기를 얻으며 원곡 ‘첫 눈’의 음원 역시 2013년 발표 이후 10년 만에 재조명됐다. ‘배속 음원 문화’ 트렌드는 틱톡, 쇼츠(유튜브), 릴스(인스타그램) 등 60초 이내의 짧고 간결한 동영상이 대세로 자리 잡은 쇼트폼(short form) 콘텐츠의 홍수 현상과 맞물려 있다. 이들 영상에 빠른 호흡의 곡이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며 새로운 경쟁력을 지니게 된 것. 지난해 데뷔 4개월 만에 빌보드 ‘핫100’ 차트에 진입한 그룹 피프티 피프티의 곡 ‘큐피드’도 배속 버전이 틱톡에서 유행하며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가요 기획사와 가수들은 Z세대의 취향을 반영해 ‘스페드 업(Sped Up)’ 버전을 따로 내놓기도 한다. 스페드 업은 특정 노래의 속도를 원곡에 비해 120∼150%가량 빨리 돌려 듣는 2차 창작물이다. 걸그룹 에스파는 지난해 11월 발표한 곡 ‘드라마’와 ‘징글 벨 록’의 스페드 업 버전을 지난해 12월 15일 내놓았고, 또 다른 걸그룹 ‘르세라핌’ 역시 지난해 10월 첫 영어 디지털 싱글 ‘퍼펙트 나이트’를 발매하며 스페드 업 버전을 내놓았다. 힙합그룹 다이나믹 듀오는 9년 전 발매한 곡 ‘AEAO’를 스페드 업 버전으로 재해석해 지난해 8월 발표했다. 해외에서도 ‘스페드 업’ 곡들이 주목받고 있다. 팝가수 레이디 가가의 2011년 발표곡 ‘Bloody Mary’ 역시 한 틱톡커가 넷플릭스 시리즈 ‘웬즈데이’의 한 장면에 빠른 버전의 ‘Bloody Mary’를 삽입한 영상이 SNS에서 화제가 되며 2022년 각종 음원 파트를 역주행했다. 결국 레이디 가가는 11년 만에 해당 곡의 스페드 업 버전을 공식 발표했다. 비슷한 시기 영국 팝스타 샘 스미스도 2014년 곡 ‘I’m Not The Only One’의 스페드 업 버전을 내놓았다. ‘스페드 업’ 버전의 곡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대개 보컬이나 악기 녹음을 따로 하진 않고, 원곡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원곡 음의 속도나 높이를 조정하는 식이다. SM엔터테인먼트 ONE 프로덕션 장샛별 A&R 리더는 “댄스 챌린지는 이제 하나의 놀이가 됐다. 빠른 속도의 곡에 댄스의 난도가 높아지면 소비자들에겐 더욱 도전적인 오락 활동으로 인식된다”며 “이는 원곡 음원 소비의 증가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문화계 전반에 퍼져 있는 배속 문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대중문화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쇼트폼 콘텐츠가 인기를 끌면서 빠른 템포의 곡이 생겨났다”며 “이러한 경향이 심화될수록 음악과 영상 등 콘텐츠의 원래 속도에 대해 쉽게 지루해진다. 제작자 역시 자극적이고 빠른 전개에 대한 강박으로 이어지는 부작용이 생긴다”고 지적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홀로 지샌 긴 밤이여” 1985년 발매된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은 녹음 과정에 좌충우돌이 있었다. “아름다운 재…” 조용필이 노래하자 녹음실에서 황급히 정지 버튼을 눌렀다. “아니 아니 재가 아니고 죄!” 자꾸 버튼을 누르자 조용필도 성질이 났는지 노골적으로 “재!” 했단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곡의 작사가인 저자는 “가만 생각하니 조용필 씨가 맞다”며 “사랑은 아름다운 죄가 아니라 아름다운 재, 세월의 먼지처럼 날아가 버리는 아름다운 재일 뿐”이라고 말한다. 책은 수많은 명곡의 작사가인 저자가 30곡을 선별해 각 곡의 탄생 비화를 밝힌 에세이다. ‘킬리만자로의 표범’(1985년)은 김희갑 작곡가에게 “대중가요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실컷 하는 방법은 없나요?”라고 물었던 저자가 위로의 글을 풀어놓은 작품. ‘립스틱 짙게 바르고’(1987년)는 전설적인 스파이 마타하리가 변장을 하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체포되는 순간의 사진으로부터 시작했다. 또 다른 볼거리는 사진과 그림이다. 곳곳에는 저자가 간직해온 악보들과 그 시절 음악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신재흥 작가의 자작나무 그림 또한 소소하고 잔잔한 글과 함께 감상하기 적합하다. 글의 말미에는 QR코드가 있어 노래가 탄생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드라마 ‘남과여’는 연애에 관한 현실 공감 포인트가 상당한 작품이에요.” 26일 오후 10시 반 첫선을 보인 채널A 새 드라마 ‘남과여’의 주연 배우들이 드라마 방영에 앞서 이날 열린 온라인 제작발표회에서 작품에 대한 질문에 공통적으로 내놓은 답이다. 2014, 2015년 네이버웹툰 연재 당시 평점 1위에 올랐던 동명 웹툰이 원작이다. 사귄 지 7년째 되던 날 모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른 이성 곁에 있는 서로를 마주하게 된 정현성(이동해)과 한성옥(이설), 친구에서 연인이 된 오민혁(임재혁)과 김혜령(윤예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안시후(최원명)와 윤유주(백수희)까지, 20대 세 커플의 연애 이야기와 성장통을 그렸다. 오민혁 역을 맡은 임재혁은 “군대에서 원작 웹툰을 봤다. 당시 만나던 여자친구와 이별하고 웹툰을 접했는데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아 보면서 울었다”고 말했다. 이어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출연하고 싶었다”며 “시청자들도 많이 공감할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배우들은 드라마의 또 다른 장점 중 하나로 배우 간의 ‘케미스트리’를 꼽았다. 7년 차 장기 연애 커플을 연기하는 이동해와 이설은 풋풋함과 익숙함을 동시에 표현해야 했기에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동해는 “이설 배우를 처음 만났는데 첫 촬영이 이별하는 장면이었다. 그냥 이별도 아니고 7년 세월의 마지막이라 솔직히 너무 어려웠다”고 했다. 그는 “영상통화로 자주 연락하고 밥도 같이 먹으며 시간을 많이 보내다 보니 3개월의 촬영 기간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지낸 사람 같다. 촬영 기간이 7년 같았다”고 밝혔다. 임재혁도 상대 역인 윤예주를 칭찬했다. 임재혁은 “민혁이 중학교 동창으로 만나 15년 동안 친구 사이로 지낸 혜령에게 낯선 감정을 느끼고 이를 부정하는 시기가 있는데 이때 연기가 참 어려웠다”며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을 때 윤예주 씨가 이해해주고 함께 고민해줘 잘 그려낼 수 있었다”고 했다. ‘남과여’는 방송 전부터 원작 캐릭터와의 높은 싱크로율이 화제가 됐다. 이설은 “저는 싱크로율이 85% 이상인 것 같다. 원작 작가인 혀노 씨가 ‘생각했던 캐릭터의 실제 성격, 체격, 눈매, 목소리와 비슷하다’고 말했다”며 웃었다. 임재혁 역시 “(싱크로율이) 90% 이상 되는 것 같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남과여’에선 남녀 간의 로맨스 외에도 동성 간의 진한 우정을 실감나게 그려낸다. 이설은 절친 류은정 역의 박정화에 대해 “작품에 몰입하다 보니 진짜 친구가 됐다. 둘이 따로 만나기도 하고 저희 집에 초대해 밤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고 말했다. 박정화도 “회차가 거듭될수록 이설 씨와 사이가 끈끈해져서 촬영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다”고 했다. 극 중에서 일명 ‘전계동 진상들’로 불리는 남자 배우들의 ‘케미’도 시선을 끈다. 이들은 짠내 나는 청춘들의 고민으로 많은 공감을 살 예정이다. 이동해는 “전부터 하고 싶었던 연기 중 하나가 브로맨스였는데 이들을 만나 성공했다”며 “시청자들도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때 저랬는데’라고 느낄 것”이라고 했다. 모태 솔로인 김형섭 역을 맡은 김현목은 “서로 놀리기 바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에게 의지하는 순간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26일 시작한 ‘남과여’는 총 12부작으로 매주 화요일 오후 10시 반에 방영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26일 오후 10시 반 첫선을 보이는 채널A 새 드라마 ‘남과여’는 청춘들의 현실 공감 연애 이야기를 다룬다. 주요 캐릭터인 20대 청춘 세 커플 가운데 중심 서사를 이끄는 주인공은 권태기를 겪고 있는 장기 연애 커플 정현성과 한성옥이다. 이들은 만난 지 7년째 되던 날, 모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른 이성 곁에 있는 서로를 마주한 뒤 서서히 결별한다. 서울 마포구 동아디지털미디어센터(DDMC)에서 패션 디자이너 정현성 역의 배우 이동해(37)와 주얼리 디자이너 한성옥 역의 이설(30)을 14일 만났다. 두 배우는 드라마 ‘남과여’에 대해 “선택이 참 쉬웠던 작품”이라고 입을 모았다. 슈퍼주니어 출신인 이동해는 “대본 자체가 너무 재밌어서 캐스팅 제안이 왔을 때 안 하면 후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4부 대본까지만 봤는데도 뒷이야기가 계속 기대됐다”고 말했다. 드라마의 원작인 혀노 작가의 동명 웹툰 팬인 이설은 “제목을 듣자마자 대본도 읽지 않고 하겠다고 했다”며 웃었다. 그는 “보통은 사랑을 시작하는 과정부터 그리는데, ‘남과여’는 연인이 헤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별할 때 겪는 많은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고 말했다. 원작 캐릭터와의 높은 싱크로율은 방송 전부터 화제가 됐다. 두 배우는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배역과 실제 성격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이설은 이동해에 대해 “다정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라며 “무신경한 현성이와는 많이 다르다”고 했다. 이동해 또한 이설에 대해 “생각이 많고 상대를 기다리는 데 익숙한 성옥과는 달리 하려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두 배우는 작품 속 커플을 보며 많은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이설은 “캐릭터들에게 ‘대화 좀 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며 “서로에게 맞는 화법이 있었다면 현성이와 성옥이에겐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이동해도 “촬영 내내 ‘익숙함에 속지 말자’라는 뻔한 말을 피부에 와닿게 배운 느낌”이라며 “먼저 알아주길 바라지 않고 좀 더 솔직하게 표현했더라면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을 것”이라고 했다. ‘남과여’는 현실 연애를 그린 드큐멘터리(드라마+다큐멘터리)를 표방한다. 두 배우가 중점적으로 고민했던 지점도 “날것 같은 연인 간의 표현법”이었다. 이동해는 “촬영 시간 외에도 이설 씨와 자주 통화하고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며 가까워질 수 있었다”며 “최고의 파트너”라고 했다. 촬영 현장에서 이설은 ‘대장’으로 불린다.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이설은 이동해에게 “해외 일정이 많아 피곤할 법도 한데, 늘 흔쾌히 응답해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두 배우가 꼽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현실성을 잘 살린 것들이다. 이설은 양치를 하며 성적(性的)인 얘기를 덤덤하게 하는 ‘욕실 장면’을 꼽았다. 그는 “오래되고 익숙한 관계에서만 나눌 수 있는 대화가 진행된다. 다행히 많이 친해진 막바지 촬영 때 찍었다”고 했다. ‘엘리베이터 장면’을 선택한 이동해는 “다른 이성과 함께 있는 연인을 모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다는 상황 자체가 주는 많은 감정이 있다. 계속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고 했다. “연애하고 있다면 ‘어? 나 정신 차려야지’, 연애를 시작한다면 ‘좀 더 설레는 연애를 해봐야지’, 헤어진 분들은 ‘더 늦기 전에 내 사람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실 거예요.”(이동해) “‘내가 저랬지, 너도 저랬지, 걔도 그랬잖아’ 같은 다양한 만남과 헤어짐을 돌아볼 수 있는 드라마였으면 해요.”(이설) 26일부터 시작하는 드라마 ‘남과여’는 총 12부작으로 매주 화요일 오후 10시 반에 방영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인공지능(AI), 전쟁, 위로…. ‘올해의 책’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동아일보 올해의 책 선정위원들이 1표 이상씩 추천한 책에는 2023년 한 해를 설명해주는 키워드가 녹아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전 분야에서 낙관론과 비관론이 팽팽하게 맞서는 시기라는 점에서 과거를 분석해 교훈과 방향을 모색하는 책이 여럿 포함된 것도 눈에 띈다. 챗GPT를 비롯한 AI 개발이 화두인 가운데 과학 서적이 추천을 많이 받았다. 과학자인 저자가 챗GPT와 대화한 내용을 담은 ‘챗GPT에게 묻는 인류의 미래’(김대식, 챗GPT 지음·동아시아)를 비롯해 ‘조선시대의 반도체’로 여겨지는 닥나무를 분석한 ‘장인과 닥나무가 함께 만든 역사, 조선의 과학기술사’(이정 지음·푸른역사)가 꼽혔다. 박상준 민음사 대표는 ‘휘어진 시대’(남영 지음·궁리)를 추천하면서 “놀라운 과학적 발견의 연관을 ‘뭉클한’ 과학 인물 열전으로 담아냈다. ‘한 시대의 평전’으로 고전이 될 책”이라고 했다. 과학교양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김상욱 지음·바다출판사), ‘우리 우주의 첫 순간’(댄 후퍼 지음·해나무)도 추천을 받았다. 장기화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스트롱맨’ 지도자들의 확산, 허위 정보 범람 등 세계적인 각종 위기 현상을 반영한 책도 많았다. ‘일론 머스크’(윌터 아이작슨 지음·21세기북스), 소설 ‘푸틴을 죽이는 완벽한 방법’(김진명 지음·이타북스)이 꼽혔다. 조성웅 유유출판사 대표는 ‘전두환의 마지막 33년’(정아은 지음·사이드웨이)을 추천하며 “독재자가 어떻게 권력을 얻었고 멀쩡하게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는지에 관한 인문적 조망이 돋보이는 수작”이라고 했다. 책을 찾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위로일 것이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강용수 지음·유노북스)에 대해 “절망의 바닥에서 행복을 찾는 그의 철학이 와닿을 것”이라고 했다. 청소년 소설 작가가 일기의 효능과 가치를 알려주는 ‘어느 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이경혜 지음·보리출판사)와 성선설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무엇이 우리를 다정하게 만드는가’(스테퍼니 프레스턴 지음·알레), 에세이 ‘딸이 무너져 있었다’(김현아 지음·창비)도 꼽혔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26일 오후 10시 반 첫선을 보이는 채널A 새 드라마 ‘남과여’는 2014, 2015년 네이버웹툰 연재 당시 평점 1위에 오를 만큼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동명 웹툰이 원작이다. 드라마는 만난 지 7년째 되던 날 모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른 이성 곁에 있는 서로를 마주하게 된 한 커플 정현성(이동해)과 한성옥(이설)을 비롯해 친구에서 연인이 된 오민혁과 김혜령,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안시후와 윤유주 등 20대 청춘 세 커플의 연애 스토리와 성장통을 그렸다. 원작 웹툰의 작가인 혀노(본명 정현호·32)를 18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2012년 시니 작가와 함께 ‘죽음에 관하여’로 데뷔한 그는 ‘네가 없는 세상’(2013∼2015년), ‘남과여’ 등 내놓는 작품마다 높은 평점을 얻으며 인기 작가가 됐다. 그는 올해 9월 채널A 드라마 ‘남과여’ 촬영 현장을 찾았던 당시를 떠올리며 “제 망상이 현실이 된 느낌이었다. 뭉클하고 또 신기했다. 내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 잘됐나 실감이 나지 않았다”며 웃었다. 웹툰 ‘남과여’는 연재 당시 20대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드라마 예고편이 공개된 뒤 20대 젊은층을 중심으로 “웹툰 캐릭터와 드라마 주인공들이 높은 싱크로율을 보인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와 관련해 혀노 작가는 “배우들과 캐릭터의 싱크로율도 좋지만, 제작진이 옷이나 헤어 등에 신경을 많이 써주신 게 감사하다. 특히 민혁 역할을 맡은 임재혁 배우는 제 머릿속에 있던 캐릭터가 그대로 나온 수준이다”고 말했다. 그는 웹툰의 영상화가 뿌듯하면서도 다소 낯부끄럽다고도 했다. 실제 원작은 혀노 작가가 20대 시절 본인과 친구들의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최근 원작을 다시 본 그는 “‘왜 그렇게 폼을 잡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며 웃었다. “캐릭터들의 나이가 당시 제 나이와 같아서 더 몰입해 그렸다”는 그는 연재 당시를 “청춘병 걸렸던 시절”이라고 했다. “후회된다는 건 아녜요. 20대 때만큼 다른 사람을 원하고, 헤어지면 미칠 것 같은 때가 없잖아요. 지금 와서 보면 그 감정이 ‘너무 과장되지 않았나’ 싶지만, 그 감정의 과함 역시 젊은 시절에 꼭 경험해 봐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남과여’만의 소중한 느낌인 것 같아요. 지금 다시 그리라고 하면 사랑, 이별 다 별것 아닌 것처럼 그리겠죠.” 웹툰은 18세 이상 관람가지만, 드라마는 15세 이상 관람가다. 드라마에선 일부 외설적인 장면들을 덜어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혀노 작가는 “당시엔 저도 겉멋이 들어서 이건 10대도 30대도 공감할 수 없는 ‘20대만의 이야기’라고 착각했다”고 고백했다. 이어 “원작에서도 밝은 부분들을 잘 표현하고 싶었지만, 잘 안 됐다”며 “오히려 드라마에서 그 부분을 살려주신 것 같다”고 말했다. 그에게 올해 12월은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한 연말이다. ‘남과여’의 드라마 방송 시작은 물론이고 1년간 휴재했던 ‘별이삼샵’을 23일부터 재연재하기 때문이다. ‘별이삼샵’은 2000년대를 배경으로 10대들의 우정과 사랑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남과여와 별이삼샵은 제겐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애정이 큰 작품이에요. 남과여는 당시 저 자신 그 자체를 그렸다면, 별이삼샵은 제 옛 추억을 그린 작품이죠. 두 웹툰 모두 제 인생 이야기라 더 애착이 가요. 하하.” 26일부터 방영되는 드라마 ‘남과여’는 총 12부작으로 매주 화요일 오후 10시 반에 방영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영화 ‘300’(2007년), ‘맨 오브 스틸’(2013년), ‘저스티스 리그’(2017년)에서 시원시원한 액션을 연출해 온 잭 스나이더 감독(57)이 우주를 배경으로 한 전사들의 이야기를 내놨다. 그는 22일 넷플릭스에 영화 ‘레벨 문: 파트1 불의 아이’(레벨 문)를 공개한다. 우주를 지배하는 제국 원더랜드가 왕위를 찬탈한 발리사리우스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발리사리우스는 평화로운 변방 행성 벨트에도 손을 뻗친다. 위기에 빠진 벨트를 구하기 위해 2년 전 이곳에 정착한 이방인 코라(소피아 부텔라)가 나선다. 원더랜드 왕의 근위대 장교였던 코라는 발리사리우스 군대에 대항하기 위한 혁명군을 꾸린다. 파트1은 코라가 우주 곳곳의 전사들을 모으는 과정을 그렸다. 광활하고 황폐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 화려한 액션이 돋보인다. 코라가 숨겼던 전투력을 드러내는 장면을 시작으로 발동 걸린 액션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혁명군의 면면도 눈길을 끈다. 전설적인 지휘관이었던 타이투스 장군(자이먼 운수), 반란군을 이끄는 다리안 블러드액스(레이 피셔), 신화적 생물체와 교감하는 능력을 가진 타라크(스태즈 네어) 등이다. 그중 눈에 띄는 전사는 네메시스(배두나)다. 네메시스는 갓을 쓰고 쌍칼을 휘두른다. 거대한 거미 괴물과 일대일 격투를 벌이며 등장하는 네메시스는 과묵하고 무표정해 저승사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나이더 감독은 대학 시절 이 이야기를 구상하고 약 20년 전부터 시나리오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감독은 작품의 세계관을 형상화한 그림 4000여 장을 직접 그렸고, 이는 대규모 프로덕션과 시각특수효과(VFX)를 통해 그대로 화면으로 옮겨졌다. 제작진은 약 2만 m²(약 6050평) 규모의 땅에 마을을 짓고 언어학자와 협업해 새로운 언어 3가지를 만들어냈다. 스나이더 감독은 “약자의 이야기, 악당이 착한 사람을 과소평가하지만 결국 선한 이가 기대 이상의 뭔가를 해내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며 “이런 주제는 내 영화에서 변함없이 이어졌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