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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대학교의 사회맞춤형산학혁명선도대학(LINC+)사업단이 서울 코엑스에서 24일부터 27일까지 열린 ‘AI(인공지능)엑스포코리아2021’에서 인공지능을 이용한 자율주행 교육용 플랫폼인 a-MAP(AI-Mobility Accelerator Program)과 교구를 선보였다. 한라대는 이번 엑스포에 대학으로선 유일하게 참가했다. 한라대 LINC+사업단이 전시회에 소개한 에이맵(a-MAP)은 인공지능 기반 자율주행 모빌리티를 쉽게 학습하고 제작하기 위한 플랫폼으로 자율주행 자동차 제작 과정을 온라인으로 학습할 수 있다. 또 주행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며 하드웨어를 직접 제작하여 실제 주행도 가능하다. 함께 출품한 교육용 플랫폼인 M-Car AI는 이미지 기반 자율주행을 위한 교육용 플랫폼이다. 실제 승용차의 8분의 1 사이즈로 구성된 모형을 통해 다양한 주행 기능을 테스트할 수 있다. 이 플랫폼은 해외 경쟁사 제품과 확장성, 성능, 가격 등 모든 분야에서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새로 개발된 플랫폼은 한라대 스마트모빌리티 공학부와 정보통신소프트웨어학과 학생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등교를 할 수 없는 악조건에서 만들었다. 이들은 효율적인 제작을 위해 디지털트윈 기술을 활용하여 사이버 공간에서 설계와 프로그래밍을 먼저 완료한 뒤 제작에 활용했다. 한라대 링크사업단 서현곤 단장은 “스마트 모빌리티 분야 경쟁력 향상을 위한 새 교육용 플랫폼을 활용해 올해 400명 이상의 인공지능 기반 스마트 모빌리티 인재를 양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번에 한라대가 참가한 AI엑스포코리아는 여러 기관과 기업들이 인공지능, 정보통신기술(ICT), 사물인터넷(IoT) 등 최신 인공지능 관련 기술과 제품을 소개하고 공유하는 전시회다. 여기에는 아이디어와 기술력을 자랑하는 다양한 인공지능과 관련된 제품들이 선보였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오랫동안 잠잠하던 김여정이 ‘3년 전의 봄날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다’는 제목의 담화를 16일 노동신문에 불쑥 발표했다. 남북군사합의서 파기,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금강산국제관광국 등 대남(對南)기구 정리를 내걸고 한국을 협박했다. 하지만 김여정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남쪽에선 이미 누구나 알고 있다. 3년 전의 봄이 다시 오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코로나 방역을 내건 북한의 철저한 ‘셀프 봉쇄’가 언제 풀릴지 기약이 없다. 내년엔 곧 임기가 끝날 문재인 대통령을 김정은이 볼 일도 없을 것이다. 대통령과 장관 등 현 정부 각료들이 북한을 향해 ‘러브콜’을 시종일관 보내는 것은 할 말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장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있는 데다 내년 대선까지 관리하려면 현 정부가 내세우는 남북관계 치적을 북한이 군사적 도발로 물거품으로 만들면 안 되기 때문이다. 뺨을 맞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이왕이면 웃어줘야 침이 날아올 확률이 줄어들 게 아닌가. 물론 북한도 이 정도는 당연히 알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김여정의 이번 담화는 봄을 만들 책임을 한국에 강요하는 듯 기고만장한 모양새다. 찬찬히 한번 따져보자. ‘따뜻한 봄날’은 지금 남과 북 중에 어디에 더 절실한지, 봄이 오지 않으면 누가 더 손해일지를. 물론 한국도 추위가 좋을 일은 없지만 그래도 여기는 겨울옷이 풍족하다. 사상 최강의 대북제재로 체제를 감싸던 옷이 한 겹 두 겹 강제로 벗겨지고, 코로나 사태까지 겹쳐 조금 축적했던 지방마저 연소돼 앙상해진 북한이야말로 추위를 어떻게 견딜지 참으로 걱정이다. 옷과 지방은 북한이 지금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 돈을 비유한 것이다. 중국 세관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의 대중(對中) 수출액은 3616만 달러(약 409억 원)에 그쳤고, 중국 외 다른 국가들과의 수출 총액도 806만 달러(약 91억 원)에 불과했다. 수출 총액이 500억 원 정도면 실제 번 돈은 훨씬 적을 것이다. 김정은이 최근 야심 차게 추진하던 주요 국책사업들도 돈이 없어 마무리 짓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북한이 돈 벌 길은 점점 좁아진다. 국제사회의 감시가 강화되면서 무기 거래, 마약 판매 등 불법 행위로 버는 돈도 크게 줄었다. 그나마 지금 믿을 구석은 해외에 파견된 ‘외화벌이 전사’들의 활약이다. 현재 중국에 파견돼 활약 중인 것으로 파악되는 1000여 명의 ‘사이버 전사’들이 외주받은 일감과 해킹 등으로 국가 공식 무역에서 나오는 순수익보다 더 많은 2000만 달러(약 226억 원) 이상의 현금을 매년 버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외화벌이 전사’들의 활약도 무시할 순 없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해외에서 특권을 부여한 300∼400명의 외화벌이 인력도 운용하고 있다. 이들은 1년 과제로 5만∼10만 달러를 벌어들인다. 개별적으로 움직이며, 조직 생활도 하지 않고 보위부 감시나 통제도 없다. 국가 이동도 언제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돈만 벌면 뭐든지 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들의 존재는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의 숫자를 최소 300명으로 보고 1인당 계획 과제를 5만 달러씩 잡으면 1년에 1500만 달러, 최대 400명의 과제가 10만 달러씩이라고 가정하면 4000만 달러를 번다. 아마 실제 금액은 그 중간 어디쯤인 2000만∼3000만 달러 정도 될 것이다. 이들이 벌어서 바친 돈을 담은 현금 자루가 실제로 중국 단둥(丹東) 주재 북한영사관 전용 버스에 실려 주기적으로 압록강대교를 넘어간다. 하지만 각종 수입을 다 합쳐야 북한은 1년에 1억 달러 이상 벌기 어렵다. 체제를 지탱하기엔 턱없이 적은 금액이다. 게다가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외화벌이 전사들을 대다수 적발할 수 있다. 북한은 한국 통일부에 남북협력기금만 10억 달러 넘게 잠자고 있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자존심 때문에 받지 않기엔 무시할 액수가 아니다. 현 정부도 북한이 써주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눈치다. 나아가 북한은 군사적 합의를 깨고 남북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이 내년 대선에서 어느 세력에 유리할지도 잘 따져봐야 한다. 1997년 대선 직전 ‘총풍(銃風) 사건’으로 한국이 떠들썩했던 것이 그리 먼 옛날의 일은 아니다. 정말 김여정은 내년에도 강추위 속 ‘얼음공주’로 계속 남기를 원하는지 궁금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어두컴컴한 아이스링크 한복판에 겁에 질린 2인자가 차렷 자세로 서서 “모두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신속히 처리하겠습니다”라며 울부짖는다. 그러나 스케이트를 타고 천천히 다가온 1인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퍽을 2인자의 몸통에 날린다. 고통에 주저앉으면서도 2인자는 “앞으로 절대 허투로 일하지 않겠다. 다신 실망시키지 않겠다. 한번만 기회를 주면 분발해 잘하겠다”며 빠르게 외친다. 그럼에도 1인자는 쓰러진 그의 몸을 스틱으로 사정없이 내려친다. 혹독하게 당하고 돌아온 2인자는 부하들을 모아 매운 짬뽕을 강제로 폭풍 흡입하게 하는 벌을 내리며 일처리를 제대로 못했다고 다그친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tvN의 드라마 ‘빈센조’의 한 장면이다. 문제는 이런 장면을 봐도 시청자들은 크게 놀라지 않는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조직 보스가 2인자나 중간 보스들을 흉기로 마구 때리며 화를 내는 장면은 우리가 지금까지 조폭 영화에서 수없이 보아온 장면이기 때문이다. 때리면 다행이고, 일을 잘 처리 못했다며 부하를 죽여서 다른 조직원에게 공포감을 심어주는 장면도 흔하다. 그렇게 보스의 분노 앞에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온 중간 보스들은 다시 아래 조직원들을 모아 놓고 폭력을 휘두르며 목숨 걸고 일을 하겠다는 충성맹세를 받아낸다. 이것이 조폭 조직이 돌아가는 생리라고 할 수 있다. 요새 북한이 시끄럽다. 평년의 이맘때라면 3월초에 시작되는 한미연합훈련을 성토하고 협박하는 성명이 발표되며 시끄러웠겠지만 올해는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 한미연합훈련 비난은 일절 없다. 대신 노동신문 등 북한 언론에는 내각과 경제 간부들의 자아비판 기고문이 잇따라 실리고 있다. 9일 노동신문에는 조용덕 내각 국장이 “경제 부문 간 유기적 연계와 협동이 원만히 보장되지 못했다”며 “유기적 연계와 협동이 제대로 보장되지 못한 책임은 우리 내각 일군(간부)들에게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본위주의를 철저히 타파하고 주먹구구식으로, 되는대로 사업하던 그릇된 일본새와 완전히 결별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역시 지면에 등장한 최영일 순천지구청년탄광연합기업소 지배인은 “연간 굴진 계획을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다고 장담했지만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불 보듯 명백한 것”이라고 반성했다. 김영철 북창화력발전연합기업소 지배인은 감속기를 교체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타박만 했다가 전력 생산에 차질을 빚은 자신의 사례를 들며 자아비판을 했다. 9일부터 노동신문에 처음 등장한 ‘지상연단’이라는 코너는 앞으로 간부들의 반성문을 계속 실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 역사에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에 간부들의 자아반성문을 실은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원래 북한 언론은 김 씨 일가의 우상화와 긍정적 인물을 내세워 본보기를 따라 배우기 운동을 펼치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다. 부정적 내용은 절대 실리지 않던 신문이 간부들의 자아비판까지 게재하며 일을 똑바로 하라고 독려하는 것은 올해 김정은의 행보와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김정은은 1월 초 열린 노동당 제8차 대회 개회사에서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 수행 기간이 지난해까지 끝났지만 내세웠던 목표는 거의 모든 부문에서 엄청나게 미달하였다”며 정책 실패를 인정했다. 이어 지난달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이 당 경제 담당 경제 간부들을 향해 삿대질하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소리를 치는 사진이 공개됐다. 노동신문이 ‘보신과 패배의 씨앗’을 운운하며 “여러 부문의 사업을 신랄히 비판했다”고 보도한 것으로 보아 회의 분위기가 살벌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 회의에서 김정은은 “국가와 인민의 이익을 침해하고 당의 결정 지시 집행을 태공(태만)하는 단위 특수화와 본위주의 현상을 더 그대로 둘 수 없다”며 “당권, 법권, 군권을 발동해 단호히 처갈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 회의 결과 노동당 김두일 경제담당 비서가 해임됐음이 공식 발표됐다. 이어 지난달 24일에 열린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선 80명의 군 간부가 참가해 군 내부 규율 강화와 군 간부의 통제 강화 대책이 논의됐다. 공개된 사진에서 상좌 계급(한국의 대령과 중령 사이 계급)을 단 군 간부가 대장과 상장들이 앉는 앞줄 두 번째 줄에 앉아 있었던 것이 눈길을 끌었다. 그의 뒷줄에 상장, 중장들이 줄줄이 앉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번 회의는 계급 서열과 상관없이 진행됐다는 의미다. 실제 이날 회의 뒤 역대 대장 계급이 맡았던 해군사령관과 공군 및 반항공군 사령관에 한국의 준장 계급에 불과한 소장급 장성이 임명됐다. 노동당 전원회의가 당 최고위 간부들이 참가한 회의라면 중앙군사위원회는 군 최고위 지휘관들이 모인 자리라고 볼 수 있다. 이어 이달 8일부터 시·군당책임비서들이 참가한 강습회가 사흘 간 열렸다. 이들은 북한에서 각 지방을 책임진 간부들이다. 김정은이 이렇게 고위 간부들을 마구 다그치자 이들이 다시 아래 사람들을 모아놓고 다그치는 모습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노동신문에 실린 반성문이 대표적이다. 이달 4일 당 외곽 근로단체들은 전원회의 확대회의를 개최하고 일제히 “반사회주의, 비사회주의와의 투쟁”을 다짐했다. 각 기관, 기업소, 농장 등에서 노동자들이 나와 당의 결심을 철저히 관철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결의대회를 연일 열고 있다. 최근 북한의 이러한 행태는 흡사 조폭 조직을 그대로 연상케 한다. 보스인 김정은이 최근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에 화가 나 중간 보스들인 간부들을 모아놓고 연일 처벌과 협박을 하고, 중간 보스들이 다시 산하 조직원들을 다그치는 모양새다. 이는 과거 북한을 움직이던 시스템과 확연히 다르다. 물론 과거에도 북한은 공포의 독재 시스템으로 운영됐다. 그러나 북한 미디어에 등장하는 보스는 항상 인자하고 너그러우며, 선견지명이 있는 지도자였다. 잘못된 일은 지시할 수도 없고, 따라서 반성도 없으며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심려하시였다”는 정도로 미디어에서 공개했다. 그러나 최근 북한 미디어에 등장하는 김정은은 과거와 전혀 달라졌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자신부터 반성을 한 뒤 중간 간부들을 모아놓고 처벌하고 다그치는 등 펄펄 날뛰는 모습이 그대로 여과없이 중계된다. 겁에 질린 간부들은 노동신문을 통해 자아비판을 하며 보스에게 충성맹세를 한다. 자아비판만 하면 오히려 다행이다. 북한 소식통들에 따르면 3월 초부터 북한의 각 지역에선 대대적인 공개총살 바람이 불고 있다. 코로나 방역기간 밀수를 했거나, 한국 영상을 시청했거나, 뇌물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여러 명씩 공개재판에 끌려나와 시범으로 처형되고 있다. 중간 보스들이 명령을 어긴 부하들을 공개적으로 죽여 보스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는 중이다. 공포의 피바람은 지금 막 시작됐다. 결론적으로 볼 때 이제 북한의 통치방식은 노골적으로 조폭 조직의 운영방식으로 변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제주의 정권인 중국과 러시아도 이렇게 노골적인 조폭형 통치를 하지 않는다. 올해 북한의 보스 김정은도 과거의 인민의 ‘갓(God)’에서 ‘갓파더(Godfather)’로 변화하고 있다. 그 소름끼치는 변화는 어디까지 진화할 것인가. 이제 시작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망해가는 기업의 공통점은 쓸 데 없는 회의가 많아지고, 사장만 열심히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또한 임원들은 책임을 회피하며 뭔가 추진하다가 실패하면 희생양을 찾기에 급급하죠. 북한을 들여다보면 자금난에 빠져 망해가는 기업들을 꼭 빼닮은 징조들이 두드러집니다. 물론 원래 그랬지만 올해는 더욱 심합니다. 올 들어 두 달이 이미 지나고 3월 첫째 주도 지나가고 있지만, 북한은 아직도 중앙과 지방 할 것 없이 회의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중앙에서는 1월 5일 8차 노동당대회를 열고 14일 열병식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열흘 동안 북한 주요 간부들이 묶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17일 최고인민회의가 열려 내각의 많은 간부들이 교체됐습니다. 당 대회와 최고인민회의가 끝난 뒤 북한 각 조직에선 노동당대회에서 채택된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회의가 1월 말까지 이어졌습니다. 북한 소식통들에 따르면 1월 말에 북한의 모든 직장인들은 오전마다 회의실에 모여 당대회 내용을 학습하고 자기 직장의 실정에 맞게 어떻게 계획을 세워야 할지 의논하느라 열흘 넘게 보냈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오전에 거리에 나가면 사람이 사는 곳인지 모를 정도로 한적했다 네요. 그런데 이런 회의에도 정장을 입고 참가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결혼식에도 잘 입고 가지 않는 양복을 찾아 입느라 분주했다고 합니다. 회의 복장까지 자잘하게 지침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비본질적인 곳에 에너지를 쏟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지루한 회의를 거쳐 각 기관의 경제목표 달성 과제가 채택이 되고, 이것이 종합돼 김정은에게 보고가 올라갔습니다. 김정은이 8차 당대회에서 국가경제발전 5개년계획이 모든 부문에서 엄청나게 미달했다고 경제 실패를 자인하면서 이번에는 실현가능한 목표를 세우라고 했기 때문에 각 기관이 올려 보낸 목표는 나름 실현가능한 최대치를 담느라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2월 초에 김정은의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8일부터 11일까지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은 간부들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연말에 비판을 받지 않을 정도로 낮추어 기안하는 편향을 범했다”는 겁니다. 가령 “전력생산계획을 현재의 전력생산 수준보다 낮게 세웠다”느니, “평양시 살림집 건설계획을 당대회에서 결정한 목표보다 낮게 세웠다”느니, “신발 생산계획을 형편없이 낮게 세웠다”느니 하면서 간부들의 소극성과 보신주의를 질타한 것입니다. 김정은은 “계획을 낮게 세워놓고 연말에 가서 초과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으려고 하지 말고 실제 경제 건설과 인민 생활에 기여할 수 있게 발전 지향성과 역동성, 견인성, 과학성이 보장된 목표들을 제기해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북한 각 공장, 기업소들의 계획서를 취합해 보고한 김두일 당 경제부장은 해임됐습니다. 간부들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 달 전에는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우라고 하더니, 이제는 목표가 낮다고 또 뭐라고 하니 말입니다. 어느 기준이 김정은이 만족할 만한 기준인지 간부들이 갈팡질팡하는 가운데, 김정은은 2월 24일 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 25일 내각 전원회의 확대회의까지 직접 주재하며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고위 간부들이 김정은 앞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는 사이 북한 주민들이 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시 북한 전역에서 지루한 회의가 열렸습니다. 김정은이 ‘보신과 패배주의’를 언급하며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각 직장에선 1월말에 했던 회의에 대해 비판하고 반성하면서 “우리가 보신과 패배주의에 빠져 장군님께 심려를 끼쳐드렸다”고 자책하는 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러면서 “장군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높은 경제 정책 과제를 달성하겠다”고 각오를 다지느라 2월이 또 다 지나갔습니다. 이런 회의들을 가진 뒤 이번엔 궐기 모임이 북한 전역에서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2월 28일 황해제철연합기업소(황철) 노동계급이 당대회 결정 관철을 위한 호소문을 전국에 발표한 뒤 북한 각 부문에서 이에 호응하는 궐기 모임이 3월 초까지 이어졌습니다. 물론 황철 노동계급이 보냈다는 호소문은 그들이 자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중앙당에서 그 기업을 찍어 지시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황철 노동자들은 아침 일찍 나오라는 대로 나와 추위에 떨며 기다리다가 단상에서 여러 간부가 호소문, 맹세문, 결의문 등등을 교대로 몇 시간 낭독하면 중간에 구호들을 외치는 임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그 구호도 대열 앞 방송차에서 “관철하자”는 구호가 나오면 주먹을 높이 들며 “관철하자”를 세 번 외치면 됩니다. 황철에서 이런 행사가 끝난 뒤 노동신문은 기다렸다는 듯 “당이 제시한 5개년 계획의 첫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전인민적인 총공격전, 총결사전으로 부른 황철 노동계급의 심장의 호소는 전체 근로자들의 혁명적 열정과 견인불발(堅忍不拔)의 투쟁 의지를 비상히 격양시키고 있다”면서 “영웅적 노동계급의 절대불변의 신념이 응축된 황철의 호소 따라 온 나라가 일시에 들고 일어났다”라고 선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바람에 3월 첫째 주에 북한 주민들은 궐기 모임을 갖느라 분주하게 모였습니다. 노동신문은 내각사무국, 재령광산, 화학공업성, 전력공업성, 북창화력발전련합기업소, 석탄공업성 등등 모든 부문에서 궐기 모임이 열렸다고 전했습니다. 사실 앞에 언급한 부문들은 극히 일부고 실제 노동신문에 실린 기관들의 이름은 숨이 가빠 다 읽을 수도 없습니다. 이제 두 달 동안 당 대회 정신 학습과 목표 달성을 위한 계획회의, 다시 반성과 계획 재수정 회의, 그리고 각오를 다지는 궐기 모임까지 마쳤으니 일을 좀 시작하면 될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김정은은 다시 회의를 열었습니다. 3월 3일부터 김정은의 참석한 가운데 시·군 당책임비서 강습회가 평양에서 열렸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시장이나 군수와 맞먹는 해당 지역에서 제일 높은 간부입니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강습회는 노동당 역사에서 처음이라고 합니다. 가뜩이나 회의 종류가 다양한 북한에서 없던 회의 종류가 또 만들어졌습니다. 노동신문은 “강습회가 당의 시·군당 조직들의 기능과 역할을 높여 당의 전투력을 다지고 지방 경제와 인민 생활을 발전·향상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라고 의의를 부여했습니다. 강습회에선 김정은이 개강사를 했다고 합니다. 개강사라는 연설도 아마 북한 역사에서 처음 나오는 연설 종류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지방의 주요 당 간부들이 김정은의 개강사까지 들었으니 근로자들은 또 회의하기에 바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간부들이 내려와 중간 간부들을 모아놓고 김정은의 의도를 전달하면 중간 간부들은 다시 근로자들을 모아 놓고 학습을 시킬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장군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뜻을 인민들에게 전달하지 않는 심각한 반당반혁명 행위를 저질렀다”며 간부들이 숙청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나온 ‘황철의 호소’는 유효 기간이 얼마나 될까요. 이미 저런 수법은 김일성 때부터 닳고 닳을 정도로 써먹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은 ‘고난의 행군’에 직면하자 김정은은 지금처럼 자력갱생(自力更生), 간고분투를 외치며 온갖 지명을 가져다 무슨 정신을 창조하느라 바빴습니다. 당시에 자강도 정신, 희천 정신, 라남 정신 이런 식으로 몇 년 동안 북한의 지명들을 한 바퀴 돌면서 계속 정신만 만들어내다가 흐지부지됐습니다. 앞으로도 ‘황철의 호소’ ‘대안의 호소’ ‘나남의 호소’ 이런 것들이 계속 쏟아져 나올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인민들은 궐기 대회를 열심히 열어야 합니다. 강습회가 끝나면 이제 회의는 더 하지 않아도 될까요. 누구도 알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3월 중순까지 회의만 저렇게 지겹게 하게 되면 도대체 일은 언제 하는 건지 궁금해집니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지난달 열린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은 올해 경제계획 수립 과정의 문제점을 “관료주의와 허풍” “보신과 패배주의의 씨앗” 등의 표현을 쓰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두일 노동당 경제부장도 임명 한 달 만에 잘렸다. 김정은이 제시한 경제 분야 관련 목표 중엔 “올해 평양시에 1만 가구 살림집을 무조건 건설하기로 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지난해 김정은이 가장 야심 차게 추진했던 평양종합병원 건설도, 몇 년째 힘을 쏟았던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살림집 건설 목표가 지켜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김정은은 지난해 3월 17일 평양종합병원 건설 착공식을 열고 7개월 뒤인 10월 10일까지는 완공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평양종합병원 준공식은 아직까지 열리지 못하고 있다. 김정은이 지난해 7월 공사장을 방문해 총책임자를 비롯한 간부들을 질책하고 전원 교체했음에도 7개월 만에 완공한다던 병원은 1년이 돼 가는 지금까지 언제 준공식을 할지 기약이 없다. 그나마 가짜 준공식을 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해야 할까. 대북 소식통들에 따르면 김정은이 지난해 5월 준공식을 성대하게 열었던 순천인비료공장은 아직까지 가동되지 못한다고 한다. 평양종합병원은 외형상으로는 건물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1월 찍힌 구글어스 사진에 이미 공사에 동원했던 장비와 차량이 철수하고, 외벽 색칠과 주변 조경도 마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준공을 못 한다면 내부 의료 장비가 전혀 갖춰지지 않은 채 껍데기만 건설됐다고 볼 수 있다. 과거 경험상 만약 병원 운영에 필요한 장비의 3분의 1만 갖췄다고 해도 준공식 행사를 벌이고, 사람들이 눈물을 좔좔 흘리면서 김정은을 찬양하는 선전이 질릴 정도로 나갔을 것이다. 그걸 못 한다는 것은 의료를 진행할 형편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평양종합병원에 의료 장비를 채우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 도대체 얼마가 모자라기에 온 국민들에게 큰소리치고도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지를 알면 현재 김정은의 주머니 사정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평양종합병원은 가로 550m, 세로 120m 부지에 20층으로 건설됐다. 병원은 병상 수가 중요하지만 관련 자료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런데 평양제1병원과 옥류병원, 평양산원이 1000병상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그것보다 두 배 이상 큰 평양종합병원은 2000∼3000병상 정도 들어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적은 수는 아니다. 한국에서 최다 병상을 가진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이 2615병상이고 고려대 구로병원, 안암병원이 각각 1100병상 정도 된다. 평양종합병원이 2000병상이라 하면 의료 장비에 돈이 얼마나 들까.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10년 전 전북에 500병상 규모의 모 대학병원을 건설할 때 의료 장비 구입은 병상당 6000만 원으로 계산해 300억 원을 책정한 계획서가 보인다. 내년 광명역 인근에 오픈할 예정인 중앙대병원은 4년 전 계획을 세울 때 700병상에 의료 장비 구입비용을 700억 원으로 계산했다. 병상당 1억 원인 셈이다. 두 사례를 평균하면 병상당 8000만 원이 나온다. 준공 시기나 의료 시설 종류 등이 달라 이 숫자가 정답이라 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북한 사정을 얼추 가늠하는 잣대는 될 수 있다. 북한은 비싼 장비는 피하고 저렴한 중국산을 주로 쓰겠지만 그래도 MRI, CT 등 고가 장비는 기본 가격이 있기 때문에 절반 이하로 줄이긴 어려울 것이다. 북한이 병상당 4000만 원쯤 써도 2000병상이면 800억 원이고, 3000병상이면 1200억 원 정도 계산된다. 즉 평양종합병원이 그 나름의 현대적 기준에 맞춰 의료 장비를 갖추려면 1000억 원 안팎의 자금이 든다고 볼 수 있다. 이 계산에 몇백억 원 정도는 오차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본질은 김정은이 1억 달러 미만 자금이 없어 세상에 큰소리를 친 평양종합병원 건설을 마무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돈만 있다면 아무리 방역 때문에 국경을 폐쇄했다 하더라도 김정은이 지시한 의료 장비는 얼마든지 들여갔을 것이다. 이렇게 김정은은 자기도 주머니가 텅텅 비어 공개적으로 천명한 약속들을 지키지 못하면서 간부들을 향해 자신이 제시한 목표를 달성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으니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목을 내걸어야 하는 자리에 있는 간부들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지난주 미국 법무부가 전 세계 은행과 기업을 상대로 해킹 등 사이버 범죄를 주도한 북한 해커 3명을 기소했습니다. 이들 해커들은 세계의 은행과 기업에서 13억 달러(약 1조4400억 원) 이상의 현금 및 가상화폐를 빼돌리거나 부당 취득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공소장에 따르면 이들 해커는 라자루스그룹, APT38 등의 해킹부대를 운용하는 정찰총국 소속의 박진혁(36) 전창혁(31) 김일(27)입니다. 공소장에 올라 있는 이들의 죄명은 방대합니다. 대표적으로 이들은 2017년 5월 랜섬웨어 바이러스인 ‘워너크라이2.0’을 만들어 파키스탄 금융회사에서 610만 달러를 탈취하는 등 2015~2019년 베트남과 방글라데시, 대만, 멕시코, 말타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폭넓게 활동 무대로 삼았습니다. 미 법무부가 주목할 정도면 이들 3명은 북한 해킹부대에서 최고의 에이스들일 겁니다. 그렇다면 북한이 운영하는 해킹부대 규모는 몇 명이나 될까요. 북한 해킹부대의 역량에 대해선 세계 3위라는 보고가 나오는 등 아주 대단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탈북한 북한의 정보기술(IT) 기술자들 증언에 따르면 이는 크게 과장된 숫자라고 합니다. 북한이 해킹에 눈 뜬 것은 1990년대 후반입니다. 시작은 노동당 소속 대남공작부서인 작전부가 시작했는데,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암호를 해득하기 위해 구소련의 암호해독 전문가들을 비밀리에 데려왔습니다. 또 북한 각지 1고등중학교에서 10명 규모의 최고 인재들을 뽑아 1997년 평양시 모란봉 구역 소재 모란대학이란 것을 만들고 교육을 시켰는데 이것이 북한의 해킹 인력 양성의 시초입니다. 이후 사이버전 인력은 노동당 작전부와 군 소속 정찰국이 운용했습니다. 2009년 초 노동당과 군에서 운영하던 대남·해외 공작기구가 통합되면서 모두 정찰총국 소속이 됐는데, 이때만 해도 각각 수십 명 규모의 부대로 합쳐도 100명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작전부 소속 해커들의 실력이 더 나았습니다. 군부 소속의 미림대에서 해커들을 양성한다고 외부에 알려져 있지만 미림대 졸업생들은 군자동화 장비 담당이 태반이고, 실력도 없어 해커로 쓸 수준이 못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2009년 이전만 해도 북한 지도부의 해킹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고 큰 지원도 없었는데, 김정은이 2009년부터 정찰총국을 직접 담당하면서 사이버전을 수행할 역량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하달했습니다. 또 이때쯤부터 미국이나 한국 등에서 뭔가 해킹만 됐다고 하면 북한 소행이란 보도가 나왔습니다. 그러니 ‘해킹’의 ‘해’자도 모르던 고령의 북한군 간부들도 “해킹이 뭔지 모르겠지만 대단한 것이 분명하다”며 해킹부대 양성에 관심을 돌렸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해킹을 할 만한 실력 있는 인재는 평양시 소재 수재학교인 금성학원 컴퓨터반에서 대다수 양성됩니다. 금성학원 컴퓨터반 졸업생은 한해에 300~400명이 양성되지만 실력 있는 사람은 10%도 채 안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김일성대와 김책공대에서 2년 반 동안 공부시키고 이중 10~20명씩 정찰총국이 선발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해킹부대는 정찰총국과 적공국, 즉 적군와해공작국이라는 곳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현재 소속 인원은 적공국 100여명이고 정찰총국은 300명을 넘지 않습니다. 이들이 군복을 입고 해킹을 하는 해커들인데, 공식적인 사이버 해커의 전체 숫자는 400여명 정도이고, 이중 진짜 에이스는 50명 미만입니다. 나머지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 간부로 정찰총국이나 적공국에 들어가면 입당이 빨리 된다는 이점 때문에 실력도 없으면서 부모의 배경을 업고 들어온 고위 간부 자식들입니다. 요즘은 진짜 실력 있는 IT 수재들이 정찰총국이나 적공국에 들어오지 않고 빠지려 합니다. 장교로 근무해봐야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군사 비밀을 빼와야 승진도 잘 시켜주지 않습니다. 반면에 해외에 외화벌이하려 나간 친구들은 매달 많으면 수천 달러씩 버니 실력파는 외화벌이용 IT 회사에서 일하려 합니다. 북한에서 실력이 제일 좋은 IT 기술자들은 ‘인도유학파’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2년부터 3년 동안 한국은 북한에 소프트웨어 기술인재 양성 자금을 지원했는데, 이 돈을 유네스코가 집행해 해마다 20명씩 우수한 북한 IT 인력들을 인도에 보내 교육시켰습니다. 이 과정이 3년 동안 진행됐고, 인도에서 빌 게이츠의 이름으로 된 졸업장까지 받은 기술자들이 북한에 60명 정도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도 북한의 IT 핵심 에이스들입니다. 그런데 북한의 IT 인력 양성에서 삼성전자가 엄청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2000년 대북사업에 진출한 삼성전자는 조선컴퓨터센터(KCC)와 손을 잡고 73만 달러를 들여 중국 베이징에 ‘남북 소프트웨어공동개발센터’를 세웠습니다. 2004년까지 삼성전자가 투자한 돈은 325만 달러를 넘었는데, 이 돈은 장부상 조선컴퓨터센터의 노동당 자금 납부 실적으로 기록됐습니다. 당시 북한에서 300만 달러면 엄청난 돈입니다. 이 돈으로 북한은 글로벌 수준의 인재들을 키웠습니다. 북한의 IT 역사에서 삼성전자의 이 투자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협력이 끊기자 컴퓨터센터에 집중됐던 인력들은 해외 IT 개발 분야로 흩어졌습니다. 과거 삼성과 손잡았던 조선컴퓨터센터는 이후 ‘313총국’으로 개명한 뒤 군수 담당 2경제위원회 직속이 됐습니다. 여기에 속한 IT 인력이 버는 자금은 고스란히 북한 무기 개발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북한을 탈출한 북한 IT 인력들은 예전에 삼성에서 기술도서로 북에 기증했던 책들이 아직도 교재로 사용되고 있으며, 교재 중에는 해킹관련 도서들도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2009년 남북한 합작으로 세운 평양과학기술대 인력들도 북한 IT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북한은 과거에는 IT 분야에서 금성학원 졸업생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지만 이제는 금성학원 출신과 과기대 출신 등으로 구분됩니다. 과기대 출신들은 웹, 모바일, 데스크톱, 크랙 등 전문 분야를 선택해 집중적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크랙은 복사방 지나 등록 기술 등이 적용된 상용 소프트웨어의 비밀을 풀어서 불법으로 복제하거나 파괴하는 것을 뜻합니다. 워낙 이들은 북에서 최고 인재들을 모았기 때문에 기초과학뿐만 아니라 영어 실력도 있어 해외에 파견돼 돈을 버는데 적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기대 측은 졸업생들은 해커로 활동하지 않고 있다고 하지만 과기대가 이를 확인하기는 불가능하고, 이들 중에는 해커도 분명히 있습니다. 북한은 김정은 체제 들어 각 부처에 IT 대표단을 파견할 것을 요구했는데, 대북 제재로 줄어든 자금난을 타개할 방편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2010년대 중반부터 노동당, 인민무력부, 보안성, 보위성 등 각 내각 부처들이 IT 팀을 중국에 파견했습니다. 예전에는 중국과 더불어 말레이시아가 IT 관련 북한 외화벌이의 핵심 기지였지만 2017년 2월 김정남 살해 사건 이후 현지 파견 인력이 추방됐습니다. 앞서 유럽의 중요한 기지였던 불가리아에서도 2016년 북한 IT팀이 추방됐습니다. 중국에 나온 북한 IT 기술자들은 여러 가지로 돈을 벌어 북한에 납부합니다. 외국에 나온 이들은 해외에서 프로그램을 개발해 팔면 돈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또 해외업체와 일하는 노하우도 적지 않게 익혔습니다. 유엔의 대북 제재가 강화돼 해외파견 인력을 다 철수하게 됐지만, 북한은 노동자는 철수하면서 IT 인력은 중국 현지에 남겼습니다. 중국도 눈감아줍니다. 1000명 이상 북한 IT 인력이 여전히 중국에 있습니다. 북한이 코로나로 국경을 차단하고 이를 핑계로 해외 근로자가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는데 어쩌면 이는 IT 인력을 계속 중국에 상주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을 겁니다. 끝으로 미국 법무부가 북한 해커 3명을 기소하면 효과가 있을까요.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습니다. 2017년 9월 미 재무부는 정성화라는 북한 IT 업계의 거물을 공개 수배했습니다. 그런데 대북 소식통을 통해 들으니 그 정성화는 여전히 중국에서 아무 제약 없이 맹활약하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중국의 협조가 없으면 우리는 앞으로도 북한 해커들에게 계속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주성하의 北카페’ 연재를 시작합니다. 동아일보 19년차 주성하 북한 전문기자가 한 주간의 다양한 북한 이슈 중 한국 사회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나 북한 내부 소식통을 통해 들은 은밀한 정보를 금요일마다 독자들에게 이야기하듯 편안하게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 지난해 세계를 강타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뜻밖에 주식 광풍도 함께 몰고 왔습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 역시 주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주가가 폭락한 3월부터 코스피는 두 배 넘게 상승했고, 뒤늦게 주식에 뛰어든 초보자들을 가리켜 ‘주식’과 ‘어린이’를 합성한 ‘주린이’란 용어도 만들어졌습니다. 동학개미, 서학개미 등 신조어들도 생겨났습니다. 심지어 생전 주식이라고 사본 적이 없는 기자 역시 주린이 대열에 합세했습니다. 북한 이슈는 최근 관심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김정은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조용히 지내고 있다는 점도 이유가 되겠지만 사람들이 주식차트 보느라 다른 것을 쳐다볼 겨를이 없다는 것도 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김정은이 어지간히 ‘큰 사고’를 치지 않는 한 이젠 북한에서 벌어지는 일은 코로나와 주식 이슈를 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런데 주식에 빠져 있는 것이 비단 한국 사람들뿐이겠습니까. 세계 곳곳에서 지금 엄청난 유동성에 힘입어 투자자들이 주식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한국의 주린이와 비슷한 의미로 미국에선 ‘로빈후드’라 불리는 초보자들이 주식에 매달려 있습니다. 남들 다 버는데 나만 못 버는 것 같이 마음이 급해져서 뛰어드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 전 기자는 해외에 나와 있는 북한 무역일꾼들도 주식의 세계로 뛰어든 사람들이 많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역일꾼 정도면 북한에선 확실하게 ‘돈주’ 중의 ‘돈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주란 무역이나 장사를 통해 부를 축적한 북한의 신흥부자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국가 대표지수를 추종하는 주식만 사놓아도 1년 새 두 배씩 오르는 것을 보면서, 그들도 사람인데 어찌 욕망을 느끼지 못하겠습니까. 어쩌면 돈을 만지는 것이 직업인 무역일꾼들은 그런 욕망의 피가 부글부글 끓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북한 정보원도 경제공부를 할 수 있는 책을 구해달라고 요구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으니 묘한 느낌이 듭니다. 사실 북한 사람들에겐 주식의 세계는 신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랜 기자 생활을 하면서 해외에 나온 많은 북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봤는데, 북한 사람들이 외국에 나와서 가장 궁금해 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바로 주식이었습니다. 시장경제, 자본주의, 상장기업 등을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이 주식이고, 주식시장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선 주식이 뭔지 전혀 가르치지 않습니다. 김일성대 경제학부 정도나 주식의 개념에 대해 좀 가르칠 정도입니다. 이러다보니 북에서 좀 배웠다는 사람도 해외에 나오면 “주식이란 것이 뭔데요?”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해외에서 좀 살다보면 자연히 주식을 알게 되긴 합니다. 그들에겐 잘만 투자하면 돈이 10%, 20% 불어나는 세계가 정말 신기할 것입니다. 북한에선 투자할 곳이 거의 없습니다. 은행에 저금시키면 이자를 받기는커녕 본전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큰돈을 저금하면 불법적으로 번 돈이 아닌지 조사 받기 때문에 돈이 많아도 은행에 넣지 않습니다. 북한 부자들은 주택에 두 겹으로 된 비밀의 벽을 만들고 그 안에 돈을 숨겨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북에서 투자 개념으로 장사를 하든가, 고리대금업을 할 수는 있는데 위험 부담이 큽니다. 언제 ‘비사회주의적 행위’라고 신고 당할지 모릅니다. 그러면 돈만 떼이면 다행이고, 심할 경우 목숨도 부지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북한에서 산 사람들의 눈에 누구나 계좌를 만들어 돈을 벌 수 있는 주식의 세계는 정말 신기한 세상입니다. 물론 투자했다가 돈을 잃기도 하지만, 북한에서 돈을 만져본 사람들이 투자 실패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해외에 나온 북한 사람들이 선뜻 주식시장에 뛰어들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북한 여권으로는 계좌 개설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법은 있습니다. 이미 무역일꾼들은 그런 환경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차명계좌를 만드는 데는 달인 수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5년~2008년 사이 북한 부자들 속에서 중국 부동산 투자 바람이 분 적이 있습니다. 중국 사람의 명의로 부동산 거래를 했던 것입니다. 북한 신의주가 건너다보이는 단둥(丹東) 압록강변 많은 아파트가 북한 돈주들의 소유라는 것이 외신에까지 소개될 정도였죠.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던 북한 돈주들이 주식 열풍 속에 이제 주식시장에도 뛰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해외에 나와 있는 소수 무역일꾼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솔직히 지금 북한 무역일꾼들이 외국에서 할 일도 거의 없습니다. 북한 당국이 코로나를 이유로 국경을 차단하는 바람에 북에서 내올 물건도 별로 없고, 수입해 들여갈 물건도 없습니다. 할 일이 없어 북에 돌아가려고 해도 코로나 때문에 돌아오지 말라고 하니 발이 묶였습니다. 이렇게 너무 심심한 상태인데, 주식까지 폭등하니 어떻겠습니까. 친한 친구들끼리 누구는 뭘 해서 벌고, 누구는 뭘 해서 벌었다 소문까지 쉬쉬 돌아가면 안 하던 사람들까지 조급해 뛰어들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심리를 잘 알지 않겠습니까. 아마 지난해에 뛰어든 돈주들이라면 작년의 주식 대세 상승기에 잃을 확률보다는 벌었을 확률이 더 컸을 겁니다. 무역일꾼들이 주식을 해도 이걸 북한 당국이 알기는 불가능할 겁니다. 차명으로 하는데 북한에서 어떻게 알아내겠습니까. 주식의 신세계를 경험했고, 더구나 돈까지 벌어봤다면 북한 돈주들은 엄격한 검열과 사상투쟁 회의가 기다리고 있고, 돈마저 눈치 보면서 써야 하는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기가 싫어지지 않을까요.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비트코인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어느새 5만 달러를 넘었다. 비트코인을 장기 보유한 사람이라면 요즘 행복한 심정일 것이다. 그런데 그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 중 한 명이 김정은이라면…. 지금 북한은 몇 년째 이어지는 대북 제재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셀프 봉쇄까지 1년째 겹쳐 돈을 벌 곳이 없다. 북한은 무역의 95%를 중국에 의존하는데 지난해 대중(對中) 수출액은 4800만 달러(약 530억 원)에 그쳤다. 특히 연말로 갈수록 수출 규모는 급격히 줄어 지난해 12월 수출액은 겨우 162만 달러(약 18억 원) 정도였다. 명색이 국가인데 이 정도 무역액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럼에도 지금까지는 잘 버텨 왔다. 지난해 태풍 피해를 본 지역에 수천 채의 집을 건설했고, 노동당 창건 75주년 행사엔 신형 무기와 군복도 등장시켰다. 돈이 없어 헉헉대야 마땅할 것 같은데도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달성하겠다며 새해 벽두부터 밀어붙인다. 거기에 더해 지난해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행사 전후로 약 1억 달러의 현금이 중국 단둥(丹東) 주재 북한영사관의 전용버스에 실려 북에 들어갔다는 내부 소식통의 제보도 들린다. 수출로 돈을 번 게 언제인데, 이런 거액은 도대체 언제 만든 것일까. 최근 대북 소식통으로부터 흥미로운 정보를 입수했다. 북한의 정보기술(IT) 인력이 중국에서 오랫동안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 채굴장을 운영했다는 것이다. 2018년 9월 13일 미국 재무부는 북한 국적의 정성화(당시 48세)와 중국에 있는 북한 인력이 운영하는 IT업체인 옌볜실버스타, 그리고 이 회사의 러시아 소재 위장 기업인 볼라시스실버스타를 각각 제재 명단에 올렸다. 볼라시스실버스타가 1년 새 수십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는 것이 제재 이유였다. 그런데 미국이 밝힌 액수는 당시 북한 내부 소식통이 기자에게 제보했던 액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해외 파견 IT 인력에 대해 잘 아는 위치에 있던 소식통은 정성화가 중국에서 지휘하는 인원만 300여 명에 이르며 이들이 1년에 벌어 바치는 돈은 2000만 달러(약 220억 원)라고 증언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외화를 벌기 위해서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북한 IT 인력들이 해킹뿐 아니라 비트코인과 라이트코인, 모네로 등 암호화폐 채굴에도 뛰어들었다는 증언이었다. 중국 공장에 단체로 숙식하며 지내던, 1인당 상납금이 많지 않은 다른 북한 노동자들은 재작년 말 대다수 귀국했다. 그러나 정성화가 이끄는 ‘IT 외화벌이 전사’들은 미국 제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까지 중국에서 활동 중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은 주민 거주 지역에 월세 집을 얻어 5명 안팎의 소규모 팀으로 상주하며 외출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적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루 16시간씩 꼬박 앉아 작업을 하다 보니 허리 디스크가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학대를 당하지만 탈출은 불가능하다. 이런 ‘IT 노예’들이 중국의 외진 지역들에서 최소 5년 이상 채굴장을 운영했다면 암호화폐를 얼마나 채굴했을까. 거기에 북한 해커에 의한 암호화폐 해킹 뉴스는 너무 많아 이제는 관심도 끌지 못할 지경이다. 2019년 8월 발간된 유엔 안보리 전문가패널 보고서에는 북한이 2015년 12월부터 2019년 5월까지 최소 17개국의 금융기관과 암호화폐 거래소를 대상으로 35차례의 사이버 공격을 진행해 최대 20억 달러어치를 탈취한 혐의가 있다고 적혀 있다. 이 시기 비트코인 평균 가격은 지금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으니 보고서의 20억 달러가 지금은 60억 달러가 됐을지도 모른다. 2017년 4월과 9월 900억 원어치가 사라진 한국 암호화폐 거래소 야피존과 코인이즈의 해킹 사건도 북한 해커 집단의 소행이라고 국가정보원은 밝혔다. 이런 사례는 너무나 많다. 물론 요즘은 해킹만 됐다 하면 다 북한 소행이라고 하니 북한 해커들도 억울한 점은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북한이 오랫동안 채굴과 해킹을 해왔다면 김정은이 상당히 많은 암호화폐를 보유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이다. 매년 훔쳐간 총액은 김정은이나 알겠지만, 비트코인 1만 개만 있어도 5억 달러나 된다. 요즘 김정은은 암호화폐 지갑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하며 활짝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철저한 익명성과 급격한 가격 변동성에 의존한 암호화폐는 어쩌면 말라 죽어가는 북한을 좀비처럼 잠시 부활시켜주는 신문명(新文明)의 선물일 수도 있어 보인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지난달 14일 평양에서 진행된 제8차 노동당 대회 기념 열병식을 보면서 참가자들이 너무나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다. 김일성광장을 행진하는 군인들의 얼굴이 동상을 입은 듯 하나같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얼마나 고생했을지 얼굴들이 말해주고 있다. 북한은 열병식을 보통 1년 내내 준비한다. 이번 열병식 참가자들이 작년 10월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도 했음을 감안하면 이들은 2019년 10월에 뽑혀 1년 3개월 동안 행진 연습만 했을 것이다. 열병식 참가자들은 행사 반년 전부터 철조망으로 차단된 평양 미림비행장의 훈련장에 들어가 훈련을 한다. 이번 참가자들은 작년 4월 초 평양에 와서 1월까지 9개월 동안 외출도 거의 못 하고 살았을 것이다. 한 개 열병조는 보통 297명으로 구성되는데 지휘관과 기수 9명, 횡대 24명, 종대 14명이다. 만약을 대비해 조마다 20명 남짓의 예비 인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훈련 때는 각 조가 약 320명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김일성광장 주석단 앞 216m 구간을 보폭 70cm로 1분 40초 동안 정확히 통과하기 위해 1년을 바친다. 그나마 이번 열병식은 발을 60cm 높이로 정확하게 맞추는 ‘천리마발차기’가 없어 좀 수월했을 것 같다. 훈련생들은 오전 6시 전에 기상해 청소와 식사를 한 뒤 8시부터 열병 훈련을 시작한다. 지적을 받으면 저녁을 먹고 추가로 처벌 훈련을 받는다. 하루 종일 딱딱한 바닥에 발을 힘껏 구르니 방광이 망가져 피오줌이 나오고, 다리 근육이 굳어져 변기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야외에서 훈련하니 여름엔 더워서 죽고, 겨울엔 추워서 죽을 지경이다. 훈련에서는 횡대 24명이 가장 중요하다. 밥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24명이 다 같이 움직이고, 기합을 받아도 다 같이 받는다. 1년 넘게 이렇게 훈련하다 보면 형제처럼 친해지게 된다. 악밖에 남지 않는 지옥의 훈련장에서도 참가자들은 서로 격려하며 힘든 과정을 이겨낸다. 2시간 행진 훈련 뒤 주어지는 30분 휴식 시간엔 털썩 주저앉아 누군가 선창하는 노래를 너도나도 따라 부르는 광경이 펼쳐진다. 2002년 김일성 생일 90주년 기념 열병식 훈련장에선 이런 일도 있었다. ‘열병식노래’라고 퍼져 훈련장과 김일성광장 모의 열병식에서 모두가 떼창을 하며 힘을 얻었던 가요가 한국 민중가요인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었다. 탈북해 한국에 온 당시 열병식 참가자 3명을 만나 물어보니 이 가요가 열병식 훈련장에서 6개월 내내 압도적 인기를 끌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증언했다. 한 명은 한국에 와서 자기가 알던 ‘열병식 노래’가 한국 민중가요임을 알았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의 가사는 어쩌면 열병식 맞춤형으로 지어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된 훈련에 지친 사람들에게 딱 맞다. 특히 후렴구인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주고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 됨을 위하여’라는 구절은 열병식 참가자들이 잊지 못한다. 동작의 하나 됨을 위해 영하의 칼바람이 몰아치는 어두운 벌판에 처벌 훈련을 하느라 남겨졌을 때 아픈 다리 서로 기대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절절했을까. 그들이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가슴이 아프다. 문제는 열병식 참가자 몇만 명이 합창했던 이 노래가 한국 가요인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들 그냥 누가 우리의 마음을 담아 자작곡을 지었나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장성급부터 시작해 지휘관들이 있었지만, 직급이 높다고 한국 노래 들어본 것은 아니니 몰라서 그냥 방치한 것이다. 나중에 열병식 참가자들이 고향으로 가 퍼뜨리는 바람에 이 노래는 2002년 북한에서 최고로 유행한 가요 중 하나가 됐다. 독재 정권을 찬양하느라 준비하는 열병식에서 한국의 민중가요가 가장 사랑받는 노래가 돼 김일성광장에서까지 떼창으로 불렸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듬해 남쪽에서 참여정부(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자 이 노래는 다시 한 번 크게 유행했다. 그런데 국민의 화합과 협력을 이뤄내야 하는 집권 세력이 ‘투쟁 속에 동지 모아 마침내 하나 되겠다’고 떼창을 부르면 시대착오적이란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오늘날 이 민중가요는 어둠 속에서 지치고 힘든 북한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노래일 것이기 때문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정해진 운명북한에서 그의 삶은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꼬였다. 아니,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한반도의 가장 북쪽인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1974년 태어난 조광호 씨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비상한 소질을 보였다. 5살 때부터 아코디언과 바이올린 연주를 배웠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음악 신동이란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인민학교(초등학교) 2학년 때 인재를 찾아 전국을 순회하던 평양음악대학 교수의 눈에 들었다. 교수는 평양에 가서 영재 교육을 받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입학통지서가 오지 않았다. 인민학교 4학년을 졸업했을 때는 도 소재지에 나가 예술인재 양성 교육기관인 예술학원 입학시험도 쳤다. 거기서도 합격이란 소리를 들었지만 역시 입학통지서는 날아오지 않았다. 이유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자 온 가족이 이유를 찾기 위해 나섰다. 그렇잖아도 조 씨의 부친 역시 군 복무를 마치고 탄광 노동자로 배치돼 온 것이 석연찮았다. 몇 년을 연줄을 타고 애타게 알아보고 알아보다 드디어 원인을 밝혀냈다. 북에선 ‘토대’라고 말하는 출신성분이 걸린 것이다. 토대 문건은 노동당이나 보위부 등 일부 기관에서만 비밀리에 관리하기 때문에 일반 주민은 자신에게 따라다니는 문건을 볼 수가 없다. 그래도 대개는 자기가 왜 출신성분이 걸렸는지 짐작은 한다. 하지만 형이 6.25전쟁에 참전해 전사했다고 알고 있는 조광호 씨의 부친은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전사자 가족은 북에서 토대가 좋은 축에 들어간다. 출신성분을 관리하는 중앙당 간부에게 매달려 알아본 결과 발단은 6.25전쟁 때 양강도 갑산군에서 한 마을을 담당했던 절름발이 분주소(파출소) 주재원(보안원) 때문이었다. 형이 인민군에 입대한 뒤 전사했다는 소식이 날아오자 주재원은 새파란 나이에 과부가 된 형수에게 집적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치근거려도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그는 어느 날 “너는 앞으로 반동 집안으로 살게 될 거야”라고 저주를 퍼붓고 사라졌다. 주재원은 ‘주민요해문건’에 친척집에 놀러갔다 행불된 조 씨의 첫 번째 큰아버지는 ‘월남도주자’로, 전사한 둘째 큰아버지는 남쪽으로 도주한 것이 유력한 행방불명자로 기록했다. 1980년대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된 뒤 조 씨 집안은 출신성분을 바로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전방에 주둔한 옛 부대를 다니며 큰 아버지와 함께 싸웠고 그가 전사했다는 것을 진술할 증언자를 찾아내는 등 열심히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의 집안과 관련된 숱한 서류들을 다 검토하고 고쳐야 하는 시끄러움을 감수해 줄 간부는 없었다. 토대를 바꾸지 못하는 ‘음악신동’의 앞날은 뻔했다. 그나마 부모가 열심히 애를 쓴 덕분인지, 아니면 그 정도 토대로도 가능한 일인지 도무지 기준은 알 수는 없지만 조 씨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17세에 김정숙교원대학에 입학했다. 북한에는 중학교 교원은 사범대학에서, 인민학교 교원은 교원대학에서 양성한다. 여학생들만 가득한 교원대학에서 조 씨는 몇 안 되는 남학생으로 4년을 마치고 졸업했다. 1994년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온성군의 한 농촌 인민학교에 음악교사로 배치됐다. 농촌은 보통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가 같은 건물을 쓴다. ‘고난의 행군’이 본격 시작도 되기 전인데 이미 그 학교엔 교사 정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자격도 없는 할아버지를 불러 ‘도레미파’ 정도의 음계만 겨우 가르치는 정도였다. 조 씨는 학교에서 음악교사 역할은 물론, 미술교사, 역사교사, 국어교사까지 모두 담당해야 했다. 나중에 중학교 음악교사가 없어 중학교 음악 수업도 했다. 고난의 행군이 닥치자 농촌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기 시작했다. 조 씨는 “마을에서 매일 1~2명씩 굶어 죽어갔고, 사람들은 시간만 나면 산에 올라가 부채마나 달맞이풀과 같은 중국에 팔릴만한 약초를 캤다”고 회상했다. 농촌에서 몇 년 버티다가 1998년 드디어 그나마 작은 도시라고 할만한 곳에 나왔다. 온성군 남양노동자구에 있는 남양인민학교 음악교사로 옮긴 것이다. 남양은 중국 옌벤(延邊)조선족자치구 투먼(圖們)과 마주한 도시로, 한국 언론에 종종 사진이 많이 등장하는 곳이다. 남양에 나온 뒤 조 씨는 중국을 매일 마주보며 살게 됐다. 당시 ‘교두’라고 불리는 남양세관 주변에는 ‘왜가리’들로 꽉 차 있었다. 왜가리는 중국에 친척을 둔 사람들이 국경에 와서 중국에 도와달라고 연락한 뒤 언제 짐이 넘어오나 중국 쪽을 왜가리처럼 목을 빼고 바라본다고 해서 붙어진 별칭이다. 거처할 곳이 변변치 않은 이들은 교두 주변에서 온실에서 쓰는 비닐을 쓰고 밤을 샌다. 다음날 국경다리를 통해 차가 나올 때마다 수백 명이 우르르 몰려가 자기 짐이 아닌지 확인하지만, 그들 중 흥분해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그래도 남양은 중국과의 교류가 있어 농촌마을보다 훨씬 잘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음악을 가르쳤고, 방과 후엔 바이올린 교습도 했다. 이때만 해도 그는 중국으로 탈북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이곳에서 결혼도 하고 애도 태어나니 가장의 의무에 묶였다.# 탈북2003년 다시 온성군 탄광마을의 중학교 음악교사로 임명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흔히 한국에선 2003년쯤엔 북한이 ‘고난의 행군’에서 벗어난 줄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시 탄광마을은 여전히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에 가보니 학급 재적인원이 25명인데 매일 7~8명만 나와요. 선생이 가르치기보단 매일 학생 가정을 방문해 살아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과였어요. 막상 집에 가보면 학교에 나오란 말을 못해요. 먹지 못해 나올 수 없는 애, 옷과 신발이 없어 학교에 안 나오는 애, 나무 하러 산에 간 애, 부모가 장사하러 가서 집을 지켜야 하는 애…. 이유는 달라도 헐벗고 굶주리고 있다는 본질은 같았죠.” 학교에 겨우 데리고 나와도 문제였다. 학교에서 각종 물자를 내라는 요구가 끝이 없어 학생들은 억지로 왔다가 또 도망쳤다. 사실상 교육 시스템이 붕괴된 상태였다. 선생 생활에 회의감이 들 무렵 옆집 친구가 사라졌다. 한국에 먼저 간 딸이 고향에 남아있는 엄마와 남동생 두 명을 한꺼번에 데리고 간 것이었다. 이러저런 상황을 거치며 조 씨도 중국과 한국을 건네다 보기 시작했다. “가까운 대학 때 친구가 있었어요. 그는 출신성분이 좋다는 이유로 보안서에 들어가 젊었을 때부터 승승장구를 했죠. 성분이 나쁜 저는 평생 이 생활에서 벗어날 것 같지 않다는 절망감이 들 때 두만강 저 건너편을 보니 저긴 뭔가 새로운 세상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출신성분의 굴레에 묶여 평생 국경지역을 돌며 음악교사를 전전하는 인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난한 학생들을 그만 괴롭히고 싶었다. 그는 몰래 중국 휴대전화를 구입해 중국과 연락하며 장사를 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런데 밑천이 없는 그에게 장사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2003년 9월 중국에 친척이 있다는 마을 여인 4명을 모집해 두만강을 넘었다. 그때만 해도 가정이 있는 터라 탈북을 한다는 것보다는 중국에 가서 돈을 마련해 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첫 원정은 실패였다. 중국의 친척들도 도와줄 형편이 못됐다. 그런데 그 일이 1년도 더 지난 2004년에 꼬리가 밟혔다. 온성군에 닥친 집중검열 과정에 당시 함께 중국으로 도강을 했던 여성 한 명이 체포돼 그의 이름을 분 것이었다. 그해 12월 그는 수업 중에 체포됐고 일주일 동안 감금됐다. 제 발로 돌아왔기 때문에 바로 감옥에 보내진 않고 일주일 동안 조사만 한 뒤 집에 돌려보냈다. 가뜩이나 출신성분이 나쁜데 중국에 몰래 갔다 온 경력까지 더해지면 인생이 뻔했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이긴 했지만, 교단에서 학생들에겐 조국에 충성하라고 말할 자신도 없었다. 게다가 보안서 연줄을 찾아 알아보니 “지금은 조사할 사건이 많아 괜찮지만, 집중 검열이 마무리되면 교원에서 해임돼 1년 교화 또는 최소 6개월 노동단련대에 보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들었다. 결국 그는 탈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국에 간 옆집 친구를 수소문해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2005년 1월 5일 조 씨는 모친과 아내, 4세 딸까지 데리고 두만강을 넘었다. 친구가 탈북 루트를 잘 알려줘서 한국까지 오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1월 5일에 떠나 불과 두 달 뒤인 3월 8일 한국에 도착했는데, 이렇게 빨리 입국하는 것은 희귀한 경우였다. 조 씨는 “지금까지도 한국에 온 것을 한번도 후회하진 않는다”며 “평생 거짓말을 하고 살아야 할 선생이란 직업에서 해방돼 너무 좋고, 딸에게 미래를 줄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도돌이표 정착한국에서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북한의 음악교사가 한국에 와서 같은 전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조 씨도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라 음악을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다. 음악만 해온 인생은 31세에 끝내고, 한국에선 새로운 인생을 찾아야 했다. 2006년에 아들이 또 태어났다. 대전에 정착한 뒤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우유, 신문, 치킨 등 배달 서비스에서 시작해 청소업 등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일은 거의 다 해봤다. 1년 정도는 한 탈북자 정착지원 민간단체의 요청으로 입원이 필요한 탈북민을 상담해주는 일도 했다. 물론 월급은 쥐꼬리만했다. 도무지 가난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급기야 함께 탈북해 온 아내마저 4년 만에 “한국에 와서 사우나조차 못가고 살았는데, 당신과 살아봐야 희망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다. 이런 처지에서 남을 상담하는 일을 하는 것이 부끄러워 상담사직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경기도로 옮겨왔다. 광명과 인천 등지를 전전하며 열심히 직업을 찾은 결과 경기도청에 시간제 계약직원으로 들어갔다. 하루 6시간 일하고 1800만 원의 연봉을 받는 직업이었다. “제가 인천에 살았는데, 경기도 의정부 북부청사까지 매일 출퇴근을 했습니다. 왕복 90㎞를 오가야 했는데, 기름값이 한 달에 40만 원이나 드니 차를 타고 다닐 형편은 못돼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토바이를 타고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출퇴근했지만, 결국 이 직업도 1년 만에 그만두었다. 월급이 적은 이유보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 도청에서 일하면 탈북민 사회를 위한 정책 제안 같은 것을 할 수 있을 줄 알았죠. 그런데 가보니 시간제 계약직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더군요.”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생각해도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해외에도 눈을 돌렸다. 2013년경에 탈북민들 속에선 해외에 나가는 붐이 일었다. 한국에선 희망이 없으니 해외에 나가 영주권을 받고 살면 자녀의 삶이라도 달라지지 않겠는가는 기대 때문이었다. 물론 해외 생활이라고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외국으로 간 탈북민들을 만나 물으면 “한국에선 탈북자란 딱지를 죽을 때까지 떼지 못하지만, 해외에 나간 순간 진짜 코리안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대답이 많다. 외국에 나가면 더 이상 ‘노스’니 ‘사우스’니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디 출신이든 해외에선 똑같은 ‘이방인 코리안’이 된다. 탈북민들은 일반적으로 동등한 코리안으로 차별 없는 대접을 받는 것에 무척 큰 의미를 부여한다. 조 씨도 캐나다로 갔다. 2년을 버텼지만, 한국에서 간 탈북민에겐 끝내 영주권을 주지 않았다. 불법체류도 한계가 있었다. 다시 쫓기듯 한국으로 돌아왔다. # 애솔의 삶2015년 그는 또다시 출발선에 섰다. 한국에 온지 10년 됐지만, 여전히 안정적인 일자리는 없었다. 재혼한 아내와 두 자녀까지 먹여 살리려면 일은 해야 했지만, 괜찮은 일자리는 그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2016년에 새로 막둥이까지 태어나 자녀가 셋이나 됐다. 다섯 가족을 부양하느라 아무리 힘든 일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는 그를 눈여겨보던 지인이 ‘스카이’로 불리는 ‘고소작업차’를 해보라는 제안을 해왔다.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면 독립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 업체에 들어가 월급 180만 원을 받으며 1톤 스카이차 기사 생활을 시작했다. 욕도 많이 먹으면서 6개월 동안 버티니 기술도 배우고 자신감도 생겼다. 기술이 높아지니 다른 업체에 3.5톤 스카이를 운전하고 월 250만 원을 받기로 하고 이직도 가능했다. 한국에 와서 10년 넘게 월급 150만 원 언저리를 맴돌다가 250만 원씩 받게 되니, 드디어 인생의 직업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3.5톤 트럭을 6개월 한 뒤 그는 월급 280만 원을 받으며 5톤 스카이차 기사로 옮겨갈 수 있었다. 많이 벌 때는 월 300만 원도 벌었다. 조 씨는 42세가 돼서야 드디어 인생의 직업을 찾았다는 생각을 가졌다. 스카이차는 작업자들을 정확한 높이와 위치에 올려주고, 작업 진행에 맞추어 다음 장소로 정확하게 옮겨주어야 한다. 그는 음반을 누비던 섬세한 손가락의 감각으로 외벽과 창문이 파손되지 않도록 탑승대를 부드럽게 조종해 이동시키며, 선율의 속도와 강약을 조율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능숙하게 작업자들과의 협업을 지휘한다. 조 씨는 1년 넘게 기사로 일하다가 2017년 2월 다른 스카이 기사들이 하는 대로 독립을 했다. 1억8000만 원짜리 5톤 스카이 차량을 할부로 구입했다. ‘일조스카이’라는 회사도 만들었다. 비록 자영업자이지만, 처음으로 회사 대표 명함도 갖게 된 것이다. 그해엔 건설경기가 좋아 일감도 많았다. 한달에 1500만 원을 벌 때도 있었다.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서 일했다. 그러나 2018년부터 건설경기가 좋지 않았다. 그해 번 돈은 전해의 3분의 2 수준이었다. 2019년은 다시 수입이 줄어 2017년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코로나19로 침체된 작년 하반기에는 다시 수입이 재작년의 반으로 줄었다. 스카이를 처음 시작했던 2017년에 비하면 수입이 25%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 정착 15년차에 그가 얻은 교훈은 단 하나였다.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경과 고난 속에 다져진 자신감도 있었다. “정면으로 부딪쳐 보자. 이 많은 스카이 기사들이 다 장사가 안 된다고 그만둬도 워낙 고생을 많이 해본 나는 쥐꼬리만한 수입에도 오랫동안 버틸 자신이 있다.” 모두가 아우성일 때 조 씨는 1톤 스카이차를 9월에 또 사들였다. 5톤 스카이차는 30m까지 작업이 가능하지만 그만큼 비싼 단점이 있고, 1톤 스카이차는 18m 정도밖에 작업하지 못하지만 가격이 싸기 때문에 주문을 더 받을 수 있었다. 차 두 대를 사고 나니 거짓말처럼 갑자기 일감이 밀려들었다. 단 4개월 사이에 올해 8개월 번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스카이 차량 업계도 경쟁은 치열하다. 서울·경기권에만 5000여대의 스카이차량이 있다. 이 업계는 고공 작업자들이 일감을 받아 스카이차를 부르는 구조다. 작업자가 함께 일해 본 기사에게 만족해야 또 찾아주는 것이다. 또 이권도 엄연하게 존재한다. 일을 하러 갔는데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에 가입된 기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작업장에서 내쫓긴 적도 많다. 그럼에도 조 씨는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자신감이 넘치고 행복한 시기라고 했다. 사업 노하우도 이제는 충분히 쌓았고, 거래처도 많이 생겼다. 2017년에 구입한 5톤 트럭 할부금도 올해는 다 갚을 수 있다. 할부가 끝나 이제야 겨우 내 차가 됐지만 그는 이 차를 다시 중고로 팔아야 한다. 장비연식규제 때문이다. 5년이 넘은 노후차량은 상성이나 현대 등 대기업 작업 현장에는 아예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열심히 번 돈으로 임대주택을 졸업해 빌라이긴 하지만 다섯 식구가 살 수 있는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한국에 올 때 4살 밖에 안됐던 딸도 이제는 20살이 돼 곧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에 가게 된다. 고된 하루 일을 끝마치고 집에 들어갈 때 그는 가장 행복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 들어서면 박수쳐주는 가족이 있어 그는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한다. 조 씨의 삶은 한국에 온 3만4000여명의 탈북민 중에서 그리 특별하다고 보긴 어렵다. 북한에서 특이한 경력과 사연을 갖고 산 것도 아니고, 탈북 과정에 북송 등을 거치며 고초를 겪은 것도 아니다. 한국에 와서도 10년 넘게 제대로 잡지 못하고 떠돌았다. 몇 년 전 시작한 장비업으로 아직 큰 돈을 번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한국에 온 대다수 탈북민들과 마찬가지로 바위산에 뿌리박고 자라는 애솔과 닮았다. 소나무에서 떨어져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거친 바위산을 굴러다니던 솔방울이 마침내 뿌리를 박을 곳을 찾고 줄기를 키우는 것이다. 푸르고 굳센 소나무의 연륜은 이제부터 시작된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블록체인과 인공지능(AI) 기술로 수집한 빅데이터를 활용해 네트워크 기반의 다중제어 시스템을 제공하는 정보기술(IT) 전문기업 코핀홀딩스(대표 양문섭)가 내달 디아스타(THE ASTA) 플랫폼 서비스를 오픈한다. 디아스타는 가상자산과 화폐의 상호 가치 교환 기능을 실물경제에서 실제 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 블록체인 실용 플랫폼이다. 디아스타는 최근 다양한 모바일 바우처를 가상자산 아스타(ASTA)로 결제하고 거래할 수 있는 결제 플랫폼을 개발해 블록체인 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디아스타는 일상에서 실물자산처럼 활용되는 것을 목표로 아스타를 활용해 숙박, 쇼핑, 의료, 관광, 레저, 엔터테인먼트 등 여러 분야 업체들과 업종 간 연계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으며 실생활 결제 서비스 시장 저변 확대에 나서고 있다. 앞서 코핀홀딩스는 지난해 11월 국내 기업과 컨소시엄 공동 투자를 통해 ㈜아스타투어 홈페이지를 오픈하고 가상자산 결제 시스템과 숙박상품을 결합한 신개념 여행 플랫폼 시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최근에는 가상자산 아스타를 통해 모바일바우처를 결제하게 해 모바일커머스 시장까지 이용 폭을 넓히는 중이다. 아스타투어는 높은 기업 브랜드 가치와 큰 할인 폭으로 소비자들의 가성비를 만족시키고 있으며 국내 대형 호텔·리조트 제휴사와 판매협약을 잇따라 체결했다. 국내 대형 호텔앤드리조트 포함 116곳에서 가상자산 아스타를 이용해 결제할 경우 타 호텔 예약사이트 대비 최대 50% 할인된 금액으로 이용이 가능하다. 아스타투어는 가상자산 결제 시스템 도입과 높은 할인율을 앞세워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으며 현재 약 90만 페이지뷰를 달성하는 등 순항 중이다. 또 디아스타 플랫폼은 모바일바우처 업체와의 제휴를 통해 가상자산 아스타의 구매 기능 아이템을 확장하고 있다. 내달부터 파리바게뜨, 베스킨라빈스 등 제과·제빵 회사들, 스타벅스, 파스쿠찌 등 커피전문점, 맥도날드, KFC, 롯데리아 등 패스트푸드점에서 시중가 대비 5∼20% 할인율을 적용받아 아스타로 결제할 수 있다. 또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마트 이용권도 할인된 금액으로 구매 가능하며, 서비스 오픈 이후 더 많은 할인쿠폰, 특가상품 프로모션이 진행될 예정이다. 코핀홀딩스 관계자는 “디아스타는 앞으로 다양한 제휴사와 교류를 통해 가상자산 아스타를 이용한 신개념 비즈니스를 창출하고 가상자산 생태계 구축을 위해 사업 범위를 점차 확장할 계획”이라며 “아스타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안전하게 사용하고 고객 편익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스타는 국내 4대 가상자산 거래소 가운데 하나인 코인원거래소와 캐셔레스트, 비트소닉 거래소에 상장돼 있어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다. 한편 아스타 플랫폼의 최종 형태는 전 세계 사람들이 불편함 없이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이용 가능한 결제 시스템과 아스타를 중심으로 하는 생태계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아스타 플랫폼은 참여자와 전략적 제휴 파트너를 포함한 네트워크 참여자 모두가 더 많은 이익을 향유할 수 있도록 생태계를 확장하면서 세계 어디서나 환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글로벌 결제 수단으로 자리 잡는다는 계획이다. 코핀홀딩스 관계자는 “상호 가치 교환성을 확보한 아스타 비즈니스 플랫폼은 블록체인 기반 가상자산 결제 시스템으로서의 편리성과 신뢰성, 투명성을 통해 각종 사업 영역을 가상자산 결제 시스템에 도입할 것”이라고 말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정은 집권 10년이 돼 가는 지금까지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것 중 하나가 김여정의 남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다양한 설(說)이 있지만 증명된 것은 없다. 재작년에 누군가가 “김여정의 남편이 축구선수 홍영조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이냐”고 기자에게 물었다. 그 말을 듣자 갑자기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는 21세기 북한에서 가장 유명했던 축구선수다. 실력만 따지면 턱도 없는 비유지만 인기를 따지면 홍영조는 북한에선 한국의 박지성이나 손흥민만큼 유명하다. 홍영조는 1960년대 북한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던 박두익 선수 이후 최고 기량을 가졌다는 평가도 받았고 외모도 괜찮아서 과거 한국 언론에서 ‘인민 베컴’이란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다. 홍영조는 2011년 카타르 아시안컵에 북한 대표팀 주장으로 출전한 것을 끝으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불과 29세 전성기의 나이에 공교롭게도 김정은 시대가 시작되던 시기와 겹쳐 사라진 것이다. ‘김여정이 북한 체육계 최고 스타인 홍영조의 팬이었다면 충분히 결혼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양에 여러 선을 대 취재해 봤다. 워낙 유명한 선수였던지라 그의 근황을 아는 것이 크게 어렵진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홍영조는 김여정의 남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현재 직업이 황당해 깜짝 놀랐다. 축구선수 홍영조가 현재 평양시 검찰소 검사로 있는 것이다. 북한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5년 동안 이례적으로 외국 리그에서도 뛰었던 선수가 검사가 됐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북한이 아무리 특이한 나라라 해도 세계의 보편적 상식대로 체육계 스타는 은퇴 뒤에도 감독 등을 하면서 체육계에 종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검사가 됐다니…. 이런 생뚱맞은 일이 있나 싶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북한 사람들에겐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북한은 권력을 잡은 자가 최고인 세상이다. 아무리 체육계 스타라 해도 국가에서 주는 공급만 갖고는 살 수가 없다. 북한에선 꾸준히 뇌물을 받아먹고 살 수 있는 검사가 배급을 받는 왕년의 스타보다 훨씬 나을 수 있는 것이다. 홍영조는 그래도 해외 리그에서 5년 동안 뛰었기 때문에 북한에만 있었던 선수들에 비해선 돈 벌 기회가 있었다. 그는 2007년부터 2시즌 동안 세르비아 프로팀에서 뛰었고, 2008년 러시아로 이적해 FK로스토프팀에서 2011년까지 3년간 공격수를 맡았다. 세르비아나 러시아의 가난한 프로팀에서 뛰긴 했지만 1만 달러도 큰돈인 북한인지라 연봉만 모아도 부자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북한은 해외 진출한 선수의 월급이나 이적료는 거의 다 당국이 뺏어 간다. 그래서 홍영조는 북한 선수로는 거의 유일하게 5년 동안 해외 생활을 했어도 큰돈을 모으기 힘들었을 것이다. 홍영조가 축구계를 은퇴한 계기는 경기 중 팀 동료를 폭행한 사건 때문이라고 한다. 그 동료 역시 한국에 잘 알려진 유명한 선수인지라 놀랐는데 찾아보니 그도 홍영조가 사라진 시점과 거의 비슷한 때에 북한 대표팀에서 하차했다. 2011년 1월 카타르 아시안컵을 전후로 북한 축구대표팀을 이끌었던 김정훈 감독이 가족과 함께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고, 대표팀을 이끌던 두 스타마저 사라진 뒤 북한 축구는 침체됐다. 축구계를 떠난 홍영조는 대학에서 공부를 한 뒤 검사가 됐다. 북한은 법조인의 90% 이상이 김일성대 법학대학을 졸업한다. 법조인 자격을 얻기 위해 엄격한 시험을 쳐야 하는 한국과 달리 북한은 낙제만 면하고 얼렁뚱땅 법대만 졸업하면 당국에서 검사로 임명해준다. 유명 축구선수 출신은 김일성대 모든 학부가 탐을 낸다. 김일성대는 교내 체육대회에서 축구경기가 매우 격렬한 편인데, 유명 선수는 인기 학부에서 경쟁적으로 데려가는 전통이 있다. 홍영조 정도면 대학 다닐 때 공부는 별로 하지 않아도 체육특기생으로 학부 축구팀을 이끈 공로로 무난히 졸업하고 평양시 검사로 배치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어찌됐든 한때 북한 최고의 축구스타가 ‘범죄자’를 앞에 앉혀 놓고 책상을 치며 “똑바로 자백하라”고 호통 치는 모습은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매일유업이 생애주기별 영양설계 전문 브랜드 ‘매일 헬스 뉴트리션’을 통해 밀크세라마이드 성분과 저분자 콜라겐을 함유한 이너뷰티 제품 ‘셀렉스 밀크세라마이드’를 선보였다. 세라마이드와 콜라겐이 들어간 이너뷰티 제품은 차갑고 건조한 겨울 날씨에 장시간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요즘 피부를 효율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 ‘셀렉스 밀크세라마이드’는 밀크세라마이드 600mg과 함께 흡수율이 좋은 저분자 피시 콜라겐 1000mg을 함유하고 있다. 여기에 함께 먹으면 좋은 비타민C를 하루 권장 섭취량 수준(100mg)으로 담았고 히알루론산, 엘라스틴도 추가했다. 셀렉스 밀크세라마이드는 물 없이 먹을 수 있는 분말스틱으로 부드러운 요구르트 맛을 내 하루 1포씩 간편하게 먹을 수 있다. 매일유업 관계자는 “피부를 구성하는 세포 사이사이 지질의 35∼40%가 ‘세라마이드’ 성분으로 피부 속 세라마이드가 감소하기 시작하는 30대부터는 콜라겐과 세라마이드를 함께 먹을 것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최근 ‘펜트하우스’의 배우 김소연을 모델로 발탁한 ‘셀렉스 밀크세라마이드’는 네이버 매일유업 스마트스토어를 비롯한 주요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살 수 있다. 22일 오전 9시 25분 CJ홈쇼핑 채널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2002년 2월 20일 동아일보 기사.도라산역 인근서 북한군 1명 귀순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비무장지대(DMZ) 인근 경의선 도라산역을 방문하기 불과 10여 시간 전인 19일 밤 소총 등으로 무장한 북한군 병사 1명이 서부전선으로 귀순, 군 당국이 귀순 경위를 조사 중이다. 국방부는 20일 “북한군 주 모 상급병사(22)가 19일 오후 11시18분경 경의선 남측 최북단 도라산역 부근인 경기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리로 귀순해와 관계당국에서 합동신문 중”이라고 발표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북한군 병사는 인민군 방한복 차림에 AK 소총과 탄창 5개를 휴대하고 있었으며, 도라산역 남서쪽 1.2㎞ DMZ를 통해 귀순했다. 이 병사는 DMZ에 들어서면서 귀순 사실을 알리기 위해 공중을 향해 7발을 쐈으며, 한미 양국 대통령 방문을 앞두고 비상경계 중이던 아군 초병이 총성을 듣고 열상관측장비(TOD)로 확인해 안전하게 유도했다고 군은 설명했다. 북한군 병사는 조사에서 “부시 대통령이 방한했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도라산역에 오는 일정은 몰랐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 당국은 한미 양국 대통령의 도라산역 및 전방 미군부대 방문에 따른 경호 문제 등을 고려해 북한군 병사의 귀순 사실을 20일 오후에야 공개했다.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탈북2002년 2월 19일 저녁 10시 반경. 서부전선을 지키는 북한군 2군단 6사 소속 민경대대 심리전 제압방송국 안에선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때를 기다리던 방송국 조장 주승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고를 열었다. 탈북을 위해 소대장과 정치지도원, 보위지도원 등 장교들을 방송국으로 초대해 이른 저녁부터 술과 음식을 아낌없이 먹였다. 초소 당직자들도 함께 마셨다. 주 씨도 함께 마시는 척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마침내 술에 취한 모든 이들이 잠에 들었다.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무기고에서 자동소총과 탄약 150발이 든 탄창 5개, 수류탄 등을 꺼낸 그는 방송국 문을 열었다. 찬바람 속에서 숨을 길게 내쉰 뒤 매복호(잠복호)를 넘어 전기철조망으로 달려갔다. 북한의 전방 철조망은 50㎝ 정도 사이를 두고 4개가 설치돼 있다. 각각 1만 볼트(V), 6000V, 3000V, 2000V의 전기가 흐른다. 주 씨는 미리 봐두었던, 철조망 하단 콘크리트가 깨진 곳을 찾아낸 뒤 제일 멀리 있는 전기철조망을 향해 ‘접지봉’을 던졌다. 접지봉은 고압 전류를 합선시켜 약 2분 정도 전기를 차단시킨다. 요란한 불꽃과 굉음과 함께 빨갛게 달았던 철조망 4개가 몇 초 뒤 꺼멓게 죽었다. 주 씨는 미리 준비했던, 철조망을 들어 올릴 때 쓰는 Y자형 ‘짝지발’을 이용해 전기철조망을 차례로 통과했다. 철조망 다음은 500m 정도 넓이의 지뢰구역이었다. 망설일 수가 없었다. 전기철조망 전기가 차단되면 자동으로 비상이 걸려 5분 내로 군인들이 추격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뢰를 밟고 말고는 하늘의 뜻에 맡기고, 앞에 보이는 국군 소초(GP)를 향해 내달렸다. 한참을 달리다 선에 걸려 넘어졌다. 발목에 감긴 선을 풀며 보니 말뚝지뢰였다. 설치한지 오래됐는지 터지지는 않았다. 천운이었다. 다시 내달렸다. 5분도 안 돼 북한군 초소 쪽에서 사이렌이 울리고 총소리가 들렸다. 북한군 적외선 탐지초소에 발각됐는지 총알이 정확히 날아오는 느낌이었다. 기를 쓰고 달렸다. 군사분계선에 도착한 그는 허공에 연발로 총을 쐈다. 귀순자가 있으니 총을 쏘지 말라는 신호였다. 냅다 달려 한국군 GP까지 도착했지만, 그곳을 지나쳐 뒤쪽 일반전초(GOP)를 향해 내달렸다. 북한군 추격조가 비무장지대 내에선 분계선을 넘어 한국군 GP까지 오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실제로 당시 북한군 추격조가 한국군 GP까지 왔다고 한다. 한참 달리니 남방한계선 철책이 나타났다. 방송국을 떠나 얼추 20분 정도 걸린 듯했다. 북한군이 총을 난사하고, 자신도 총을 쏘며 달려왔으니 국군 병사가 마중 나와 있을 줄 알았지만 누구도 없었다. 철책은 뛰어넘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다 사살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포기했다. 그는 철책을 따라 200~300m 정도 거슬러 올라갔다. 오랜 전방 경험상 매복초소가 있을 만한 곳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그는 철조망 기둥을 군화로 찼다. 한참을 찼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화가 나 더 힘껏 한참 찼더니 그제야 국군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군 병사는 총을 겨누고 “누구냐”고 물었다. “저기 앞에 북조선 민경초소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무기를 버리고 옷을 벗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무기는 버릴 수 있지만 군복은 벗을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전방에서 근무하다보면 한국에서 날아오는 삐라를 엄청 많이 봅니다. 한번은 과거 우리 부대에서 귀순한 병사의 사진이 삐라에 실려 왔는데, 내복만 입고 후줄근한 모습이더군요. 아마 귀순 즉시 찍은 사진 같았습니다. 옷을 벗으란 말을 듣자 저는 ‘내 모습도 내복차림으로 찍혀 북한에 삐라로 뿌려지면 어쩌지’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목숨 걸고 넘어왔는데 그런 모습으로 옛 전우들에게 보여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뒤에서 추격조가 당장 달라붙을까봐 정말 불안했지만, 끝까지 버텼죠.” 북한군 엘리트 군인의 자존심으로 “무기는 버려도 옷은 벗지 못 하겠다”며 버티자 한국군이 결국 양보했다. 절단기를 가져다 철책을 뜯고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군 당국은 기자들에게 “비상경계 중이던 아군 초병이 총성을 듣고 열상관측장비(TOD)로 확인해 안전하게 유도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주 씨는 “마중 나온 사람도 없었고, 철책을 따라 한참 올라가 스스로 매복초소를 찾아 군화발로 자고 있던 군인들을 깨웠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렇지만 분계선에서 마주보며 근무를 섰던 같은 군인의 처지에서 그들이 불이익을 받을까봐 걱정돼 지금까지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가 넘어온 지역은 도라산역에서 불과 1.2㎞ 떨어진 곳이었다. 그 곳에는 10시간 뒤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방문이 예정돼 있었다. 그런 곳에서 총성이 울렸으니 군이 발칵 뒤집힐만한 사건이었다.# 민경부대에 입대하다북한의 대남심리전의 최전방에 서 있던 주 씨가 탈북한 것은 가정에 닥친 불행, 한국에 대한 동경 등 복합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는 198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공군부대 군관이었고, 태어날 당시 모친도 같은 부대 군관이었다. 부모 모두 군관인 가정에서 태어나 군부대 가족 마을에서 자라다보니, 학교를 마치고 군에 가서 군관이 되는 것이 주 씨의 자연스러운 포부가 됐다. 그래서 학교 때 공부보다는 국방체육 같은 운동에 더 열심이었다. 군에 간다고 해도 공군은 절대로 가기 싫었다. “북한군 육군의 견장은 빨간색 바탕이고, 공군은 파란색 바탕입니다. 그런데 공군 병사들이 도시에 나가면 육군에게 자꾸 얻어맞고 와요. 공군 병사들이 약하다고 인식하는 거죠. 그래서 공군 병사들은 외출 나갈 때 빨간 견장으로 바꿔달고 나갑니다.”원래 공군 군관 가족은 자식들도 공군에 보내는 것이 전통이다. 주 씨가 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몇 년 동안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겪었다. 시내로 나가면 굶어죽은 시신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주 씨의 공군부대 마을은 국가 공급이 그럭저럭 이뤄져 배는 곯지 않았다. 1997년 군에 갈 시기가 다가왔다. 북한은 전방 민경대대, 비행사, 잠수함 승조원, 호위국을 ‘특수병종’으로 구분하고, 학교를 돌며 출신성분과 체력조건 등을 심사해 일반 병종보다 먼저 모집한다. 성분도 좋고, 체격도 좋은 주 씨는 특수병종 입대 대상자가 됐다. 주 씨는 가장 혹독한 훈련을 하는 민경에 가고 싶었다. 부모들은 공군에 가야 나중에 대학 갈 때 힘을 써줄 수 있다고 주 씨를 설득했지만 ‘강한 사나이’가 되고 싶었던 주 씨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부친이 결국 손을 들었다. 대신 조건을 달았다. 2군단 민경에 가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가보니 부친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전방에 주둔한 북한군 1,2,4,5군단 민경대대 중 개성을 끼고 있는 2군단 민경만이 ‘도시민경’으로 불렸다. 깊은 산속에 주둔한 다른 군단 민경부대는 ‘산골민경’이라 했다. 민경 신병훈련소는 일반 신병훈련소보다 기간이 두 배 긴 1년 과정이었다. 철봉, 격술, 사격 등 일반 병사들보다 혹독한 훈련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더 잘 먹이는 것도 아니고 공급은 일반 보병훈련소와 똑같았다. 신병훈련소를 마칠 무렵 인사참모가 그를 찾더니 어느 보직으로 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입대할 때 주 씨는 조국통일의 성전(聖戰)에 가장 앞장서는 최전방 부대에서 강한 군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훈련소 생활을 거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막상 가보니 민경부대의 전투력은 제 생각보다 훨씬 떨어졌고, 군관들은 먹고 사는데 급급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전방 경비병이 되겠다는 생각을 접고 무전병으로 보내달라고 인사참모에게 말했습니다.” 인사참모는 고민에 빠졌다. “그거 부탁자들 자리인데….” 부탁자는 특별히 봐주라고 지시가 떨어진, 한마디로 ‘빽’ 좋은 간부 자식들을 의미한다. 개성의 2군단 민경에는 고위 간부들의 자식들이 많이 입대했다. 당시 간부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자식이 최전방 민경에 있으면 한번은 봐주라는 지시가 하달됐을 때였다. 또 민경에 있으면 노동당 입당이 빠르고 제대한 뒤 출세도 탄탄대로였다. 일반 인민들의 자녀들은 당시 13년을 군복무해야 했지만, 고위 간부들은 자녀들을 5~6년 정도 복무시켜 입당시킨 뒤 ‘위탁생’이란 이름으로 제대시켜 대학에 보냈다. 위탁생 제도는 군에서 사회대학에 위임해 교육을 시키는 제도인데, 사실은 고위 간부들이 자녀들을 일찍 제대시켜 간부로 키우기 위해 만든 특권 제도였다. 힘없는 집 자녀들이 13년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할 때 쯤, 고위 간부 자녀들은 그 기간 군 복무 경력과 대학 졸업, 노동당 입당 등 모든 자격을 갖추고 간부가 돼 있었다. 민경에선 무전병이 ‘부대의 꽃’이라고 불렸다. 가장 ‘꽃보직’이란 의미였다. 민경소대는 일반 부대와 달리 장교가 셋이 있었다. 소대장, 정치지도원, 보위지도원이 장교였는데, 무전병은 항상 이들 장교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편한데다 간부의 신임을 받기 쉬워 입당도 빨랐고, 일반 대학과 군관학교 추천도 잘 된다. 그래서 아들을 민경에 보낸 고위 간부들은 부대에 부탁해 무전병 보직을 달라고 요구했다. 난감해하던 인사참모는 그를 잘 보았는지 결국 무전병으로 임명해주며 “내가 쓸 자리를 너에게 준다”며 엄청 생색을 냈다. 주 씨의 아버지가 공군 장교인데다 그의 친척들도 군에서 고위급이 많았던 덕을 본 듯했다. 주 씨 역시 입대할 때 아버지가 5년만 군 복무를 하면 군관학교에 보내준다고 약속했다. “무전병이 되니 인사참모는 왜 그렇게 생색을 냈는지 알겠더군요. 우리 대대 무전병 중 제가 제일 힘이 없었어요. 저 다음에 힘이 없는 무전병이 김격식 당시 2군단장 조카일 정도였으니까요. 제 선임병이 강원도 2인자인 조직비서 아들이었는데, 저는 제대할 때까지 이 친구 얼굴을 본적이 없어요. 몸이 아프다고 집에 가 있는데 대신 1년에 두 번 수산물을 실은 트럭을 부대에 보냈어요. 이 친구는 끝내 부대에 나타나지 않고 버티다가 몇 년 뒤 위탁생으로 김일성대에 가더군요.” 그가 배속된 2군단 6사 민경대대는 판문점에서 임진강까지를 관할로 두고 있다. 그 안에 개성공단도 있다. 민경대대는 1800명으로 사실상 연대급이었다. 그래서 민경대대장은 계급과 대우도 일반 부대 연대장급 대우를 받는다. 민경대대는 15개 초소를 지키는데, 1개 초소에 1개 소대가 들어가 두 달간 전방에서 근무한 뒤 후방의 다른 부대와 교대한다. 민경 소대는 45~50명으로 일반 부대보다 많은데 소대마다 무전병이 있다.#기정동 대남제압방송국주 씨의 첫 근무지는 개성시 판문군 판문점리였다. 한국에는 개성시 평화리 기정동으로 알려져 있다. 높은 철탑에 커다란 인공기가 펄럭이는 마을이다. 기정동 맞은 편 한국 지역이 역시 큰 태극기 철탑이 있는 대성동이다. 기정동과 대성동은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원래 강릉 김씨 집성촌이었다. 그러다 정전협정으로 평화로운 마을이 둘로 갈라졌고, 친척들이 영영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공산주의 선전마을이 된 기정동은 농사를 지으면 3년을 먹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땅이 비옥한 마을이었다. 그렇지만 1년 소출을 국가에 바치고 나면 농민들이 먹고 살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기정동은 또 집집마다 문을 잠그지 않고 사는 북한에선 보기 힘든 동네였다. 민경군인 외의 외지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도둑맞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민경군인도 이 지역에서 뭘 훔치면 바로 탄로가 나기 때문에 민가를 습격하지 않았다. 주 씨가 처음 기정동에 가니 감시망루에서 분계선 남쪽지역까지 거리가 딱 10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남쪽 지역은 철조망을 따라 도로가 쭉 깔려 있었다. 이곳에서 3년 정도 병사로 근무하다보니 무전병보다 더 좋은 ‘꽃보직’이 눈에 띄었다. 바로 대남 제압방송국이었다. 주 씨의 민경대대에는 3개의 대남방송국이 있었는데, 이들은 3가지 임무를 수행했다. 우선 제작된 대남방송을 남쪽에 확성기로 쏘는 역할을 했고, 두 번째는 인근 부대와 마을에 3방송이라 불리는 내부 유선방송을 전송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이런 임무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한국의 대북확성기 방송을 제압하는 일이었다. 한국의 확성기는 출력이 좋아 북한 깊숙한 곳까지 소리가 도달한다. 그래서 북한은 대북확성기 방송에 대응해 대남확성기 방송의 출력을 최대로 높여 방송한다. ‘소리로 소리를 제압한다’는 의도였다. 대남방송국은 정원이 15명 정도였지만, 실제 소속 대원은 늘 정원의 2~3배였다. 방송국에 최고위 간부의 자녀들인 ‘부탁자’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편하게 군복무를 하고 5년 안에 대학을 추천받아 사라졌다. 최전방 민경군인은 대학 입학이나 승진 등에서 일반 제대군인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받는다. 무전병에서 제압방송국으로 옮기는 것은 대대 당위원회에서 결정해야 한다. 주 씨는 3년 동안 장교들과 어울리고 심부름을 다니는 무전병 생활을 십분 활용해 대대장과 대대 정치지도원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2000년에 방송국으로 옮겨갔다. 1년 뒤에는 4명의 대원을 부하로 둔 제압방송조장이라는 보직도 맡게 됐다. 이제 2년만 편하게 지내다가 아버지가 힘을 써줘 군관학교에 가면 됐다.#절망 속에 찾은 길2001년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전보가 날아왔다. 공군 부대에 상급 기관의 집중 검열이 시작됐는데, 부친은 엄청난 강도의 조사를 받고 집에 돌아온 뒤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휴가를 받고 집에 갔다 온 뒤 주 씨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북한에서 조사 중 사망했다는 것은 출신 성분에 노란딱지를 받았다는 의미다. 아버지가 없으면 군관학교의 꿈도 날아갔다는 것을 뜻했다. 북에선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절망에 빠지자 남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엔 나의 새로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는 최전방, 특히 한국과 가장 가까운 기정동에 있으면서 그동안 남쪽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처음 왔을 때 남쪽 자유로에 차가 너무 많아 놀랐다. 북한에선 부대로 오는 군용차를 어쩌다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남쪽엔 차들이 줄지어 다녔다. 정치지도원에게 “저긴 왜 저리 차가 많은가”고 물었더니 “남조선은 서울에서 부산이나 대전 같은 남쪽으로 차를 타고 가려면 대북심리전을 위해 반드시 분계선 앞쪽으로 에돌아가게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계속 남쪽만 감시하는 병사가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맑은 날엔 멀리 북한산과 김포공항에 이착륙하는 비행기도 보였다. 벌거숭이가 된 북한의 산과 나무가 울창한 한국의 산도 인상이 깊었다. 저긴 전기도 풍부하고, 나무도 많고, 차도 많은, 잘 사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 남쪽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기정동엔 온갖 삐라가 수북하게 쌓였다. 삐라를 회수하는 것도 민경 대원의 일과였다. 처음엔 “남조선 괴뢰들이 삐라에 독을 발라 만지면 손이 썩는다”는 거짓말을 믿고 삐라만 봐도 손이 떨렸다. 하지만 나중엔 일부러 찾아보게 됐다. 삐라 내용과 그가 직접 눈으로 건네다 보는 한국의 실상은 일치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게 된 그는 오랜 고민 끝에 남쪽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적절한 날짜를 2002년 2월 19일로 잡았다. 2월 16일은 김정일 생일로 3일 동안 비상근무 체제에 돌입하게 된다. 비상근무가 풀리는 날인 19일은 그동안의 긴장이 풀어져 초소 장교들이 술도 마시고 일찍 잠에 든다는 것을 감안했다. 그는 이날을 위해 술과 기름진 음식을 잔뜩 준비했다. 방송조장이 한 턱 낸다는 말에 간부들은 별 의심 없이 기뻐하며 마음껏 술과 음식을 먹고 곧 잠에 골아 떨어졌다. 그의 계산대로 된 것이다. 그는 남쪽을 향해 자신의 운명을 내던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운명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민경 출신의 국회 몸싸움 2002년 6월 그는 하나원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다. 막상 와보니 ‘삐라에 속았다’는 생각에 ‘멘붕’에 빠졌다. 삐라 속에서 봤던 엄청난 포상금과 자유로운 삶은 존재하지 않았다. 군 귀순자이니 직업은 줄 거라는 기대도 산산이 부셔졌다. 중국을 거쳐 오며 어느 정도 사회를 알고 오는 다른 탈북민과는 달리 주 씨는 16세에 입대해 군에만 있다가 전혀 문화가 다른 곳에서 사회생활이란 것을 처음 하게 돼 충격은 더욱 컸다. 먹고 살기 위해 직업도 스스로 찾아야 했다. 하나원을 나온 다음 달 집 주변 주유소에서 일자리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일자리를 구했더니 ‘조선족이냐’고 물었다. 탈북자라고 하자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주유소 알바 자리도 얻지 못했을 때 너무나 절망했어요.” 그가 벼룩시장을 보고 찾은 첫 알바는 모텔 청소부였다. 그는 모텔이 뭔지도 몰랐다. 며칠 동안 일하다보니 너무 비참한 느낌이 들어 스스로 그만두었다. “북한 동료들이 제가 남쪽에서 남의 잠자리 뒷정리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비웃겠어요. 내가 이러려고 왔나 싶은 생각이 들어 그 일은 절대 못하겠더라고요.” 여름이라 집 주변 수락산 정상에 물병을 메고 올라가 판매하는 일도 했다. 믿을 것이라곤 체력밖에 없으니 동네마트에서 물을 사 산에 올라 팔아서 차익을 남겼다.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9월에야 서울 종로의 한 일식집에서 알바자리를 얻었다. 배달을 하고 주방과 테이블을 청소하는 이 직업은 꽤 오래 버틸만했다. 청소를 하면서 이곳에서 성공하려면 대학을 졸업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탈북민 특례입학제도 덕분에 그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는 입학했다. 하지만 그동안 공부와 담을 쌓고 온 그가 영어와 수학 등을 따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지만 첫 학기에 학사경고를 받았다. 탈북민의 학비는 정부에서 주지만 학사경고를 받으면 학비 지원이 끊긴다. 그는 방학에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알바를 했다. 알바 자리 하나로 돈을 벌 수 없어 밤잠도 자지 않고 2~3개 알바를 동시에 했다. 겨우 학비를 마련해 2학기 수업을 들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애쓰는 그를 눈 여겨 보던 일식점 사장이 3번째 학기 등록금 일부를 보태주면서, 이번에도 학사경고를 받으면 일본에 가서 식당을 하게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너무 고마웠다. 그러나 학사경고를 더 이상 받지 않아 대학에 다닐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대학 4년을 단 한 학기도 휴학하지 않고 마쳤다. 통일부 공무원이 “대학에 입학해 휴학 없이 졸업한 탈북민은 당신이 처음”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2007년 대학을 졸업한 뒤 외국을 경험하고 싶었던 그는 보증금을 빼 캐나다 토론토에 가서 6개월 동안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왔다. 한국에 오니 마침 총선 시즌이었다. 한나라당 모 의원실에서 보좌관으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왔다. 대학에서 배운 정치외교학을 드디어 쓸 수 있다는 생각에 국회로 갔다. 어느 날 국회 예산심의를 둘러싸고 여야 간 격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한나라당 지도부는 보좌진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군 출신 보좌관은 앞으로 나오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주 씨는 머뭇거렸다. 군 출신은 맞는데 북한군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모 당직자가 “그럼 어때, 무려 특수부대 출신이구만”하며 좋아하더니 열심히 싸우라며 그를 앞장세웠다. 북한군 민경부대 실력을 발휘하는가 싶었지만, 하루 만에 대치 상태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보좌하는 의원이 폭행당해 병원에 실려 갔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주 씨는 국회 생활에 회의감을 느꼈다. 이렇게 정치에 소모되기보다는 차라리 법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2009년 그는 연세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휴학 없는 질주는 이어졌다. 대학원 학비를 벌기 위해 중간에 롯데, 금호석유화학, 동양그룹 등 대기업에 입사해 관리팀과 인사팀 등을 거쳤다. 2011년 석사 학위를 따고, 연이어 다시 박사과정에 도전했다. 3년 만인 2014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 33세 박사. 탈북민 최연소 박사라는 기록을 세웠다.#“콘라트 슈만은 되지 않을 겁니다”박사 학위를 땄지만, 꽁꽁 얼어붙은 남북관계 속에 일자리를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2014년부터 그는 시간강사 자리를 전전했다. 외래교수, 초빙교수, 강의전담 등 타이틀은 그럴듯했지만 그래봤자 비정규직 강사에 불과했다. 11개 대학을 전전하며 6년 동안 고생한 끝에 지난해 9월 부산 고신대에서 처음으로 북한과 통일, 남북관계 등을 가르치는 전임교수 자리를 얻었다. 탈북민이 한국 대학에서 전임교수를 하는 것은 모름지기 주 씨가 최초 사례인 듯하다. 최연소 박사, 최연소 탈북민 전임교수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지만 그의 한국생활 19년은 눈물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19년 만에 비로소 눈물 젖은 빵에서 졸업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주 씨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경영학도 배우고 싶었다. 2018년 모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마친 뒤 지금 또 서울 소재 한 대학에서 경영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한국에 와 10년 넘게 공부해 박사와 교수가 됐는데 왜 또 이런 도전을 하는지 궁금했다. “통일이 되면 통일학 박사의 쓸모는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북한에서 인적관리와 경영을 아는 전문가들이 필요할 거라고 봅니다. 통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경제적 통합이라고 생각되는데, 언제 통일이 될지 모르니 늘 대비하고 준비해야죠.” 과거 주 씨가 썼던 책이나 글에는 분노와 절망이 흘렀다. 목숨을 걸고 귀순했는데 삐라에서 봤던 것과 전혀 달리 거친 광야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면서 만난 주 씨의 표정은 평온해보였다. 한국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솔직히 과거에 고생도 많이 했고 박탈감도 많이 느끼긴 했지만, 한국에 온 것 자체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보니 한국은 기회의 땅이란 말을 이제야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처음 와서 주유소에서 쫓겨났던 제가 대기업 인사팀에서 채용을 담당했고, 지금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출신 성분에 묶이면 아무리 인재라 해도 위로 올라갈 수 없는 북한과 달리 여기는 출신을 따지지 않는 것 자체가 위대한 사회라는 증거입니다.” 과거 고생 경험을 통해 최근에 한국에 온 탈북민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물었다. “일비희비하지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저처럼 학사경고를 받아가며 시작해 박사까지 됐는데 요즘 한국에 오는 젊은 탈북민들은 재능도 많고 웬만하면 저보다 머리도 좋지 않을까 싶네요. 극복하지 못할 난관은 없다고 믿고 열심히 노력하면 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청년이면 가능한 학문이든, 기술이든 상관없이 대학을 다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100세 인생 시대에 4년을 공부하는 것은 아깝지 않은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오래 전부터 탈북 청년들과 함께 모임도 만들어 친목도 다지며 늘 교류한다. 통일이 내일이라도 불현듯 찾아온다면 준비했던 자들에게 기회가 온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마음속에는 항상 콘라트 슈만이란 이름이 자리 잡고 있다. 1961년 동독에서 장벽을 세울 때 20세 동독군 병사 콘라트 슈만은 철조망을 뛰어넘어 서베를린으로 왔다. 그가 탈출하는 사진은 ‘자유를 향한 도약’이란 제목으로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억유산에 등록되기도 했다. 탈출 사진으로 전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슈만은 베를린에서 영웅이 됐다. 그러나 독일이 통일된 이후인 1998년 57세라는 젊은 나이에 목을 매 자살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그는 동독에 가 가족과 만났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를 배신자라고 외면했다. 슈만은 가족의 냉대를 받고 우울증에 빠졌다. 자유를 향한 도약의 끝은 37년 뒤 자살로 마무리됐다. 인터뷰 말미에 주 씨는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저는 절대 콘라트 슈만은 되지 않을 겁니다. 통일이 준 선물이 비극이 된 사람이 아닌, 통일을 선물처럼 만들어가는 가치 있는 삶을 만들어나갈 겁니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약 1년 전 개봉된 영화 ‘백두산’에서는 특전사 조인창(하정우) 대위가 특수임무를 받고 북한에 침투해 지하에 숨겨놓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서 핵탄두를 분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ICBM과 핵탄두 개발 성공을 이미 오래전에 발표한 김정은도 영화처럼 어딘가에 이런 ‘최후의 무기’들을 숨겨두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장소가 어딘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김정은이 최근 몇 년 사이 ‘최후의 병기창’인 핵탄두 저장고를 자강도 만포시에 비밀리에 만들었다는 정보가 얼마 전 입수됐다. 지금까지 북한 핵문제를 말할 때 평안북도 영변의 핵시설이 언론에 단골로 등장했지만 만포가 언급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북한 핵무기 개발의 양대 거점은 황해북도 평산 우라늄정련공장, 평안북도 영변 우라늄농축시설이다. 여기에 더해 자강도 만포 핵탄두 저장고까지 포함하면 핵무기 제작 및 보관의 3대 축이 완성되게 된다. 요약하면 북한의 핵무기 생산 시스템은 평산에서 우라늄 정광을 캐서 현지에서 정련한 뒤 영변에 싣고 와 농축시켜 핵탄두를 만들고 이 탄두를 만포에 싣고 가서 보관하는 것이다. 세 지역은 철길로 연결돼 있다. 순서대로 나열하면 평산군 청수리에 위치한 ‘남천화학단지’에서는 인근 광산에서 캔 우라늄 광석을 정제해 ‘옐로케이크’라고 불리는 1차 원료를 만든다. 이것을 영변에 싣고 가 원심분리기로 고농축시켜 핵무기 제조용 우라늄을 생산한다. 그런데 소식통에 따르면 몇 년 전부터 평산과 영변 단지의 운영은 사실상 중단됐다고 한다.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공장 중 하나가 있는 평산군 청수리는 과거엔 정전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날이 비일비재하기 시작했다. 이는 우라늄을 필요한 만큼 다 생산해 평산 우라늄정련공장은 자기 역할을 끝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위성사진으로 확인해 봐도 청수리엔 최근 정전에 대비해 태양광발전 패널을 단 집들이 크게 늘었다. 영변 핵 단지와 그에 포함된 인근 분강지구 역시 현재는 거의 가동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2018년 베트남 하노이 북-미 회담에서 김정은이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이미 영변의 용도도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북한은 핵탄두 몇십 개만 보유하고 있어도 전략적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다.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으며 영변 핵시설을 끊임없이 가동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북한이 이미 만든 핵무기를 어디에 숨겼을까 하는 것이다. 김정은도 숨겨둘 곳을 엄청 고심해 정했을 것이고, 선택된 지역이 바로 자강도 만포라고 한다. 김정은은 북방의 외진 지역인 만포를 2017년 12월에 방문했고, 이듬해 6월에도 또 방문했다. 핵무기 저장고 건설과 관련된 시찰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왜 만포를 선택했을까. 만포는 압록강 옆 국경도시이다. 이곳 산 아래 깊숙한 곳에 저장고를 건설해 입구를 중국 쪽 산비탈로 빼면 타격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미사일을 쏘면 산이 막아서고, 중국 영공에 들어가지 않고선 공습도 어렵다. 특히 만포엔 아연광산이 많은데, 이는 이곳이 지질학적으로 단단하다는 뜻이다. 또 만포는 평양과 직통 철도로 연결돼 있다. 전쟁이 터지면 김정은은 빠르게 만포로 달아날 수 있지만, 공격자의 입장에선 제일 마지막에 함락할 수밖에 없는 도시가 만포다. 이는 김정은의 처지에서 볼 때 최악의 경우 마지막까지 핵무기를 껴안고 흔들며 협박을 할 수 있는 최후의 지역이 만포라는 의미다. 물론 만포가 국경도시라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하루아침에 핵무기를 탈취해 갈 수 있다는 위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이 핵을 가진 북한을 방패로 끼고 있어야 할 이유가 더 크기 때문에 김정은은 그런 위험은 감수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이 만포뿐만 아니라 백두산 아래에도 몇 개 더 숨겨놨을 수도 있지만, 유사시 그곳까지 갈 이동수단이 마땅치 않다. 김정은이 핵탄두를 만포에 숨겼다는 증언이 나온 이상 앞으로 국제사회는 이곳을 집중적으로 주시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미국도 이미 용도 폐기됐다는 영변 핵시설이나 평산 핵시설에 현혹되지 말고 만포의 숨겨진 핵탄두 저장고까지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정은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꽁꽁 닫았던 빗장을 마침내 풀 결심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내년 1월부터 방역이 가능한 물자에 한해 수입을 허용한다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한다.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이 지시에 “수출도 못하는데, 무슨 돈으로 수입을 하냐”며 냉소적 반응을 보이는 현장 간부도 많다고 한다. 북-중 무역통계에 따르면 10월 북-중 무역 규모는 166만 달러(약 18억4000만 원)에 그쳤다. 작년 동기 대비 99.4% 줄어든 규모다. 대중 수출액은 10월에 140만 달러(약 15억5000만 원)에 불과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중국 당국은 도와주지 않고 있다. 또 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9월 중순 북한에 달러와 위안화를 싣고 들어가던 현금 수송 차량을 중국 정부가 압류했다. 대북제재로 정상적인 금융망을 이용할 수 없는 북한은 올해 4월부터 해외에서 벌어들인 외화를 차로 운반했다. 단둥(丹東)영사관에 외화를 모았다가 어느 정도 쌓이면 평양에 싣고 갔는데, 중국이 대북제재 위반을 핑계로 차량을 뺏은 것이다. 각종 건설공사를 많이 벌여놓았는데 외화는 벌지 못하고, 그나마 몰래 들여가던 외화 수송 통로까지 끊긴 셈이다. 급속히 주머니가 말라가는 김정은은 올해 들어 내부 자금을 털어낼 각종 꼼수를 계속 ‘발명’했다. 대표적인 예가 4월에 무역회사들이 중국에서 밀수해 온 콩기름 등을 방역지침 위반이라며 빼앗은 뒤 가담자들을 엄벌에 처한 조치다. 이후 압수 물자를 평양 시민들에게 팔아 수백만 달러를 챙겼다. 8월엔 북한에서 가장 큰 비리의 온상이던 신의주 세관 검사들을 전원 체포해 그들이 숨겨둔 막대한 비자금을 모두 빼앗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방법만으로는 필요한 자금 확보가 어렵게 되자 다시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10월 중순부터 외화를 취급하는 이른바 ‘외화봉사단위’들에 입금을 무조건 북한 화폐로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코로나 방역을 구실로 올해 북한 당국은 각 무역기관들이 진행하던 수입을 사실상 정부가 독점했다. 들여온 수입 상품은 지방 상업망들에 분배해 팔았다. 북한 주민이 북한 돈보다는 달러와 위안화를 더 많이 쓴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지방 상업망에서도 위안화와 달러를 받고 물건을 팔았다. 그런데 10월 지시로 상품 판매 대금은 외화가 아닌 당국이 정한 환율에 따라 북한 화폐로 내야 한다. 국정 환율은 1위안이 700원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10월 북한 암시장에서 외화 환율은 1위안이 약 1200원, 1달러가 약 8200원이다. 이전까진 당국이 1200원에 팔라며 준 상품을 팔면 암시장 환율에 기초해 1위안을 직접 당국에 내면 됐다. 하지만 이제는 1위안을 은행에 가서 바꾸어 북한 돈으로 내야 하는데, 은행에선 700원만 준다. 1200원을 바치려면 1.7위안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졸지에 상납금이 1.7배나 오른 셈이다.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상업기관들은 국영은행에서만 돈을 바꾸라는 지시를 어기고 몰래 암시장을 찾았다. 은행에 가면 1위안을 북한 돈 700원으로 쳐주지만 환전상은 1200원으로 바꿔주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이 이를 묵과할 리가 없다. 결국 평양의 거물 환전상이 본보기로 처형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상업기관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물건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게 됐다. 10월까지 1200원에 팔던 상품을 지금은 2000원 이상으로 인상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국경 폐쇄로 수입을 제대로 못하는 데다 당국까지 수입을 독점한 뒤 환율로 장난을 치자 김정은 집권 이후 그런대로 유지되던 시장은 급속히 망가지고 있다. 당국의 강력한 북한 돈 사용 정책 및 암시장 단속 때문에 요즘 암시장 외화 환율은 1위안이 1200원에서 800원대로, 1달러가 8200원에서 6000원대로 떨어졌다. 여기에 국경 봉쇄까지 겹쳐 200원짜리 가스라이터가 2000원으로 상승하는 등 대다수 공업품 가격은 올 초에 비해 10배가량 상승했다. 이로 인해 죽어나는 것은 결국 주민들뿐이다. 요즘 북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식량은 어쩔 수 없이 구매하지만 공업품은 거의 사지 않는다. 결국 김정은의 말라가는 외화주머니가 시장 파탄과 민생경제 파탄으로 전이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내년에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군 군용트럭 한 대가 칠흑 같은 새벽어둠을 뚫고 두만강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 강가에 도착한 트럭 운전석에서 완전 군장을 군인이 뛰어내렸다. 하사 계급장을 단 그는 탄창 하나에 30발이 들어가는 AK47 자동소총을 메고, 탄창 3개를 허리에 둘렀다. 어깨에 멘 배낭 안에는 장전한 군용 권총 6정과 탄창이 들어 있었다. 그는 강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실수였다. 평소 허리 정도밖에 오지 않던 강물이라 눈여겨 두었던 곳인데, 장마가 갓 끝난 때라 물이 불어 있었다. 물살에 갑자기 몸이 휘감겨 말려 들어갔다. 의식이 아득해지는 순간 소총을 버리고 탄창도 풀어 던졌다. 허우적거리다 배낭만 쥐고 물살을 헤치고 겨우 뭍에 도착했다. 아차 싶었다. 중국이 아니라 북한 땅이었다. 강기슭에서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통곡했다. “나는 왜 고향과 가족, 미래를 버리고 이렇게 도망자 신세가 됐나요.” 40분쯤 지났을 때 멀리 추격해오는 트럭들의 불빛이 보였다. 방금 죽을 뻔 하다가 겨우 빠져나온 강물에 또 들어가긴 싫었다. “여기서 싸우다 죽자”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중무장한 군인들과 권총 몇 자루를 들고 저항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는 배낭에서 비상식량으로 챙겨두었던 쌀과 증거로 갖고 챙겨온 사진묶음 등을 모두 꺼내 강물에 버렸다. 군복도 버리고 신발도 벗었다. 팬티만 입고 권총 6정과 탄창이 든 배낭을 들고 다시 강물에 뛰어들었다. 추격자들이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에 초인적인 힘이 솟구쳤다. 이번엔 다행히 중국 땅에 도착했다. 도로를 건너 산비탈에 붙어서 뒤를 돌아봤다. 수백 개의 전짓불과 소란스럽게 짖어대는 군견들이 건너편 두만강 기슭을 훑어대며 수색하고 있었다. 1994년 9월 18일 함북 회령에 위치한 22호 관리소(정치범수용소) 경비대 하사 안명철 씨(당시 25세)에게 일어난 일이다.# 수용소에서의 탈출추격의 불빛을 뒤로 하고 산을 오르며 안 씨는 몇 시간 사이 일어난 일을 되짚어봤다. 9월 17일 토요일 늦은 저녁. 함께 근무하던 근무조 장교들이 주말이라며 신이나 퇴근하자 안 씨는 몰래 내무반을 빠져 나왔다. 며칠동안 세운 탈북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경비대 소속 트럭 운전수였던 그는 우선 자기가 몰던 차만 남기고 나머지 차량의 휘발유관을 모두 잘랐다. 차량 추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평소 안면이 있는 외곽 차단초소 초소장에게 전화를 해 “분대장 생일이라 밖에 나가 술을 가져오려 하니 내가 도착하면 차단봉 올리게 부하들에게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평소 종종 있는 일이라 초소장은 “술을 갖고 올 때 쌀 20㎏을 가져달라”고 요구했다. 무기고에 들어가 총과 권총을 모두 꺼내 차에 실었다. 차에 시동을 거니 새벽 2시경이 됐다. 탈북 할 때 꼭 데리고 가고 싶은 수감자 오누이가 있었다. 최순애라는 이름의 누나는 4살 때, 최희유란 이름의 동생은 2살 때 수용소에 끌려와 자랐다. 강원도 안변에서 태어난 이들은 인민군 소장을 하던 큰아버지가 반동으로 처벌받으면서 온 가족이 22호 수용소로 끌려왔다. 이들은 22년간 수용소에서만 자랐다. 남동생은 안 씨보다 한 살 어렸고, 누나는 한 살 많았다. 수용소 수리반에서 일한 남동생은 평소 안 씨의 자동차 수리를 많이 도와주었다. 안 씨는 탈북을 결심하면서 평소 정이 들었던 이들에게 자유를 찾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 저녁에 “돼지고기를 갖다 줄 테니 차 소리가 들리면 둘 다 숙소 앞 도로에 몰래 나오라”고 일러두었다. 이들은 약속을 지켰다. 오누이를 운전석에 태운 차는 초소를 향해 내달렸다. 초소의 탐조등 불빛이 멀리 보일 때 안 씨는 차를 세웠다. 그리고 권총을 꺼내 하나씩 오누이에게 주며 그때에야 비로소 계획을 말했다. “나는 이제 남조선으로 간다. 너희들은 어차피 여기서 죽어야 하는 목숨이다. 나와 함께 자유를 찾아가자. 일단 트럭 적재함에 올라타고 방수포를 덮고 숨어라. 내가 신호를 할 경우 방아쇠를 당겨라.” 순간 오누이의 눈이 공포로 떨렸다. “저는 무서워서 안가겠습니다.” 약속이나 한 듯이 그들은 총을 트럭 운전석에 내던지더니 차에서 뛰어내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미처 설득할 틈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차를 몰고 초소로 갔다. 초소장의 지시를 받은 듯 한 병사가 나왔다. 그가 차단봉을 올리려는 순간 초소 안에서 전화 받는 듯한 소리와 밖에 나간 병사를 찾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벌써 들켰구나.” 망설일 틈이 없었다. 안 씨는 차를 몰아 차단봉을 그대로 치고 나갔다. 용접한 철제 차단봉이 부러졌다. 그 길로 그는 두만강을 향해 차를 내몰았다. 평소 40분 걸리는 거리를 15분 만에 주파했다. # 권총을 팔아 한국행 산을 하나 넘으니 날이 밝았다. 외진 곳에 농가 두 채가 보였다. 한 집에 뛰어 들어갔다. 조선족 농민 부부는 팬티만 입은 남자가 맨발로 아침에 뛰어들자 깜짝 놀랐다. “조선에서 방금 넘어왔는데 멀리 도망갈 수 있게 도와주시오.” 아내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안 씨가 배낭에서 권총 6정을 차례로 꺼내자 금방 입을 닫았다. 이번엔 남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더니 “권총을 주면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거절할 겨를이 없었다. 옌지(延吉)까지 데리고 가는데 권총 2정을 달라고 했고, 하얼빈(哈爾濱)까지 가는 기차표를 사주고는 추가로 한 정을 달라고 했다. 밥 한 끼 사준 값이라며 다시 권총 한 정을 요구하더니, 담배 한 갑을 사주면서 또다시 권총 한 정을 받아갔다. 안 씨는 한 정만 남은 권총을 허리에 차고 기차에 올랐다. 최악의 경우 자살을 하기 위한 용도였다. 이제 혼자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다. 저쪽 건너편에서 우리말이 들려왔다. 말을 한 노인에게 다가갔다. “조선에서 막 넘어왔는데 도와주십시오. 남조선에 가려 합니다.” 그러자 노인이 “김일성 그 놈은 정치를 어떻게 해서 사람들을 굶어 죽이냐”며 욕을 하기 시작했다. 순간 안 씨는 “수령님을 왜 욕해”라는 소리와 함께 저도 모르게 주먹을 휘둘렀다. 노인이 “이놈. 김일성이 싫어 도망쳐 와선 왜 주먹질이냐”고 소리쳤다. 정신이 든 안 씨가 생각해보니 방금 행동은 자기가 생각해도 황당했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너무 교육을 그렇게 받아서 저도 모르게 주먹이 나갔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쯤 지나자 줄담배를 피우던 노인이 화가 풀렸는지 “그럼 내가 도와주겠네”라고 답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북한과 한국에 모두 친척이 있는 조선족이었고, 북한을 방문했다가 가난한 친척들의 모습에 분노한 경험도 있었다. 하얼빈에 내려 노인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노인은 베이징(北京) 한국영사관에 “권총을 차고 온 조선 군인이 한국에 가고 싶어 한다”고 전화를 걸었다. 영사관에 이미 안 씨의 탈북 소식이 전달돼 있었는지, 영사관 직원은 노인에게 당장 베이징까지 함께 와달라고 부탁했다. 벙어리 흉내를 내며 다시 베이징으로 향했다. 18일 새벽 두만강을 넘고 20일에 하얼빈에 도착해 그 다음 날 새벽 베이징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사흘이었다. 택시기사에게 한국영사관에 가자고 했더니 북한대사관 앞에 내려주었다. 인공기와 김일성 초상화를 보고 질겁한 이들은 다시 택시를 탔다. 이번에는 제대로 한국영사관을 찾았다. 밖으로 나온 영사관 직원은 안 씨가 권총을 차고 있는지를 확인한 뒤 탈북 동기 등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데려갔다. 10월 3일 안 씨는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 탈북 이후 이야기 그의 탈북 스토리는 “북조선 군경 안명철 무장한 채 동북지방 침입. 공안 포위망 뚫고 한국 도주”라고 중국 변방군인 교육자료에 실패담으로 실려 있다. 권총을 5정이나 챙겼던 조선족은 체포돼 3년형을 선고받았다. 안 씨는 나중에 자신이 탈출한 뒤 22호 정치범수용소에서 벌어진 일들을 전해 들었다. 그를 찾기 위한 두만강 수색 과정에서 추격조가 어둠 속에서 오인사격을 해 군인과 수용소 직원 3명이 죽었다. 이때 사망한 사람의 가족은 얼마 뒤 수용소 직원 거주지역에서 나왔고, 나중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를 포함해 몇 명이 안 씨에게 수용소 후일담을 전해주었다. 북한 내에서 수색에 실패한 뒤 22호 수용소 정치부장인 송치선 대좌의 지휘 하에 수용소 보위원과 고참 군인들로 구성된 수색조 150명이 군용트럭 3대를 이용해 옌지까지 들어왔다. 그곳에서 중국 공안 및 변방대와 함께 계속 수색을 이어갔다. 이들은 11월 24일 안 씨가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한 뒤에야 북한으로 돌아갔다. 운전석에서 뛰어내린 최 씨 오누이는 처형됐다. 함께 도주하지 않았다고 정상참작하기보단 이들을 살려두면 경비병 탈출 사실이 수감자들에게 퍼질 것이 두려워서였다. 차단 초소의 초소장은 공개 처형됐다. 술을 가지러 나간다는 전화를 받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소대장은 15호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보위부 상좌인 대대장은 해임돼 군복을 벗었다. 수색조 150명이 옌지를 수색하는 과정에 탈북자 140여 명이 체포돼 북송됐다. 수용소 경비병의 탈북은 그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다. 수용소의 비밀이 외부에 알려져 수령의 권위에 치명타를 안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치범과의 만남 안 씨는 1969년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의 식량을 총괄하는 양정사업소 당비서였고, 어머니는 상업관리소 지도원이었다. 아버지는 머슴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도 전쟁고아 12명을 키운 집에서 태어났다. 북한에서 말하는 소위 ‘핵심계층’ 출신이었다. 홍원과 같은 농촌지역에선 안 씨의 부모처럼 부부가 모두 노동당원인 집안도 드물었다. 1987년 안 씨는 홍원농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군에 갈 때가 되자 집에 보위부 지도원이 찾아왔다. 선발과정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안 씨는 정치범수용소를 지키는 보위부 소속 부대에 입대하게 됐다. 정치범수용소 경비대의 40% 이상은 수용소 관리 보위원 출신 자녀들이다. 20% 정도는 외부 보위원 자녀들이고, 30% 정도는 중앙당 등 고위 간부 자녀들이다. 비밀 유지를 위해 보위부와 고위 간부 출신 자녀들만 선발했다. 안 씨는 출신성분이 좋아 예외적으로 뽑힌 경우였다. 1987년 전국적으로 120명이 정치범수용소 경비대에 입대했다. 이들은 모두 함북 경성 관모봉 아래에 있는 11호 수용소에서 신병교육을 받았다. 안 씨는 지금도 수용소로 들어가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다른 신병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들어가는데 철문 옆 철조망에서 웅 하고 전기가 흐르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군요. 그때 ‘내가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을 지나치자마자 교관이 차에서 ‘이제부터 만날 사람들과 절대 웃거나 말을 걸지 말라. 너희는 계급의 전초선에 서있는 장군님의 전사’라고 교육을 시키더군요. 골짜기를 따라 조금 올라가는데 길옆에 정말 왜소한 사람들이 옷이라고 볼 수 없는 누더기를 걸친 채 트랙터에 돌을 싣는 모습이 보였어요. 남자는 머리를 빡빡 깎고, 여성은 반쯤 깎은 머리에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둘렀더군요. 그런데 어떤 작은 사람이 엄청 큰 돌을 번쩍 들어 적재함에 싣는 겁니다. 우리는 ‘우와’하며 모두 놀라고 신기해했죠. 그러자 교관이 소리쳤죠. ‘저놈들은 너희의 부모들을 학살했던 반동 놈들과 그 자식 놈들이다. 일말의 동정도 가지면 안 된다.’” 6개월의 신병교육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사상교육이었다. 관모봉 11호 수용소는 두 개의 골짜기로 이뤄졌다. 김일성에게 반기를 들었던 ‘항일투사’ 출신들이 사는 집들이 한 골짜기를 따라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었다. 돌로 대충 벽을 쌓은 초가집이었다. 김동규 전 부주석, 허봉학 전 군 총정치국장 등이 11호 수용소에 끌려왔던 대표적 빨치산 출신들이다. 이들은 그나마 투사라는 배경이 있어 보위원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늙어가는 이들은 가끔 보위원들을 향해 “내가 산에서 목숨 내걸고 싸워 만든 나라인데 네 놈들이 내게 그따위로 대하냐”고 소리치기도 했다. 그러면 보위원은 “영감, 좀 조용하시오”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가끔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불러 오라고 하면 유배에서 풀려 잘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부름을 받지 못하면 그냥 산골에서 늙어 죽는 게 일반적이었다. 다른 골짜기엔 진짜 정치범들이 수감됐다. 이들은 일하는 짐승에 다를 바 없었다. 1989년부터 수용소 통폐합 조치가 이뤄지면서 12개였던 수용소가 6개로 줄었는데 관모봉 11호 수용소도 1990년대 초반 사라졌다.# 22호 정치범수용소신병교육을 마친 안 씨는 회령 22호 수용소에 배치됐다. 22호 수용소는 서울 크기의 절반만한 면적에 5만 명이 수감돼 있었다. 탄광 6개에서 석탄 40만t, 5개 지구 19개 농장에선 옥수수 수만t이 각각 생산됐다. 축산 작업반 8개와 식료공장도 있다. 석탄은 김책제철소와 성진제강소에 보내졌고, 돼지고기는 평양으로 올라갔다. 고려호텔 등 북한 고급 호텔과 식당에서 팔리는 ‘감흥로’ 술도 회령에서 정치범들이 만든 것이다. 힘을 쓰는 사람은 탄광에 가고, 노약자들은 주로 농촌에 보냈다. 탄광에 간 사람들에겐 하루 300g의 식량이 배급됐는데, 그것으로 일을 시킬 수 없어 풀을 많이 섞여 먹였다. 정치범들은 결혼을 할 수가 없지만 1년에 10~15명 정도 일을 잘하는 수감자들을 선정해 표창결혼을 시킨다. 연애를 할 수가 없으니 보위원이 찍어준 대로 살아야 한다. 이들은 결혼식을 마치면 1주일 합방을 한 뒤 각자 직장에 보내며, 일을 잘해야 한 달에 한 번 만나게 해준다. 아이가 태어나면 수용소 안에 있는 수감자 자녀용 학교에 보낸다. 정치범 관리에는 보위원 1000여 명과 800명 규모의 경비대대 1개, 기타 가족 감시원 등 2000여 명이 동원됐다.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 사람을 때려죽여도 “보위원에게 반항해 죽였다”고 하면 문제 삼지 않았다. 보위원에게 농락당해 임신한 경우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렸다. 안 씨는 신병 때 분대장이 차량 시동을 거는 쇠막대기로 노인을 때려죽이는 현장을 직접 봤다. 불렀는데 뛰어오지 않고 걸어왔다는 이유였다. 분대장은 자아비판서를 일주일 정도 썼을 뿐 다른 처벌은 받지 않았다. 가끔 공터에 모아놓고 공개처형도 했다. 도주 기도나 기물 파손, 규칙 위반 등이 사유였다. 안 씨는 제대할 때까지 8년 남짓 기간에 20여 건의 공개처형을 목격했다. “저는 입대하자마자 운전기사가 됐어요. 처형 때 주변을 포위하고 지키는 경비대원을 실어 나르느라 많이 목격한 편이죠.” 공개처형을 할 때는 7,8년차 고참들이 총을 쏘는데, 보복이 두려워 모두 상등병(입대 1년차 병사) 옷으로 갈아입었다. “입대 1~3년차 경비병들이 수감자들에게 제일 악독하게 행동합니다. 이때는 몸이 근질거려 제어가 되지도 않고, 태권도 훈련을 한다며 구타하기도 하죠. 그런데 오랫동안 있으며 수감자들과 만나 이야기해보면 어이없이 끌려온 그들에게 동정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고참들은 때리는 자리를 피할 때가 많습니다. 보위원도 동정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고요.” 안 씨는 수용소 근무 내내 차를 몰고 다녀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일 일은 없었다. 안 씨는 7년 동안 복무해 노동당에 입당했고, 좋은 대학에 진학할 자격도 얻었다.# 경비병에서 정치범으로 1994년 4월 부대에 전보가 왔다. 아버지가 사망했으니 집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휴가를 얻은 안 씨가 집에 도착하자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집은 반쯤 무너져 있었고, 어머니는 보위부에 잡혀간 지 이미 한 달이나 됐다고 했다. 12살 여동생이 학교도 가지 못한 채 혼자서 허물어지고 유리창이 다 깨진 집을 지키고 있었다. “아침이 됐는데 갑자기 집안에 돌들이 날아 들어왔어요. 학교 가던 아이들이 ‘반동 놈 집’이라고 소리치며 돌을 던지는 겁니다. 뛰쳐나가려는데 여동생이 ‘오빠, 나가지마’라며 잡아요.” 인터뷰 내내 담담했던 안 씨도 이 대목에선 목소리가 떨렸다. 1994년 고난의 행군이 닥쳐왔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갔고, 간부들은 식량을 빼돌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국가 검열이 내려왔을 때 간부들은 양정사업소 당비서인 부친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했다. 화가 난 부친은 술김에 “쌀이 없는 것이 간부들의 잘못이냐. 나라가 잘못한 거지”라고 말했는데 보위부에 고발이 들어갔다. 보위부 조사를 받으며 억울함을 감추지 못한 부친은 어느 날 양잿물을 마시고 세상과 작별했다. 북한에서 자살은 체제에 불만이 큰 반동이나 하는 짓으로 인식된다. 이번엔 어머니가 보위부에 끌려갔다. 자살 여부를 가린다며 아버지 묘를 3번이나 파고 부검했다. 안 씨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집에서 이틀을 보낸 안 씨는 부대에 복귀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정치범이 돼 15호 관리소(요덕정치범수용소)로 12살 여동생과 함께 끌려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뒤늦게 알았지만 국경경비대에 나갔던 남동생도 수용소에 끌려갔다. 안 씨도 수용소 경비원에서 졸지에 정치범으로 내몰릴 상황이었다. 그런데 천운이었는지 마침 그해 7월 김일성이 사망했다. 100일 애도기간 모든 행정이 중단됐다. 그동안 안 씨는 간부들을 만나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지” “너 안 되겠는데”라는 싸늘한 말뿐이었다. 경비대에 있는 동안 안 씨는 여러 정치범들에게 “왜 왔냐”고 물었다. 대개 “하루아침에 이유도 모르고 갑자기 끌려왔다”는 게 주를 이뤘다. 이제 그의 운명도 비슷한 신세가 될 순간이었다. 하루아침에 정치범으로 낙인 찍혀 죽을 때까지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고민하던 그는 100일 애도기간이 끝나기 한 달 전인 9월 18일 탈북길에 올랐다.# 평생 걸어져야 할 짐 1994년 11월 24일 안 씨는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정치범수용소의 실상을 폭로했다. 수용소 경비병의 탈북은 최초라 많은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일부 언론의 시선이었다. “지금까지 했던 정치범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은 피해자이기 때문에 하나를 당하면 열을 당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신은 가해자다. 가해자가 어떻게 피해자보다 더 끔찍한 고발을 할 수 있느냐. 안기부 지시를 받은 것이냐.” 가해자의 프레임은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입을 닫았다. 조용히 숨어버렸다. 2009년까지 15년 동안 한 은행에 취직해 과장까지 승진했다. ‘정치범수용소해체운동본부’ 등의 북한 인권단체가 만들어졌을 때도 그는 후원자로만 남았다. 은행에서 희망퇴직을 한 뒤 자영업을 하면서도 조용히 살려고 애썼다. 그런데 수용소 관련 단체에서 힘들다며 연락해왔다. 가보니 직원도 없고, 사무실도 없고, 대표를 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2013년 그는 단체 대표를 떠맡게 됐고, 단체 이름도 ‘엔케이워치’로 바꾸었다. 2016년 김정은을 반인도범죄로 유엔에 제소한 것도 그의 단체다. 이는 2019년 ‘관할권 없음’이라고 결론이 났다. 요즘 그의 단체는 북한에서 일어난 실종, 구금, 고문, 여성차별, 장애인, 아동, 해외노동 등 7개 분야의 조사를 해 유엔에 남기는 것을 핵심 운영목표로 삼고 있다. 실제로 엔케이워치가 작성한 800여 개의 조사 기록들이 현재 유엔에 등록돼 있다. “2012년 유엔에서 증언을 해달라고 해서 제네바에 갔어요. 그런데 한 유엔 관료가 ‘당신들은 계속 당했다고 하는데 공식적인 증언 자료는 왜 없냐’고 묻더군요. 생각해보니 우리는 말로만 외쳤지 유엔의 기준에 맞춰 문서화를 만드는 것을 못했어요. 그때부터 유엔 기록화 사업에 포커스를 맞추자고 생각했습니다.” 내년 1월 유엔 홈페이지에는 정치범수용소 해체를 위한 대표적 비영리단체(NGO)로 안 씨의 엔케이워치가 등록될 예정이다. 안 씨의 자세한 경력도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그의 마음에는 늘 무거운 돌이 자리 잡고 있다. 어찌됐든 그는 북한에서 정치범들을 관리하던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수용소 경비병이었다는 이유로 같은 탈북자들에게 고발도 당했다. “평생 지고 살아야 할 짐이죠. 지금도 악몽을 계속 꿉니다. 정치범수용소 경비병으로 있다가 제대한 뒤 탈북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고 들었어요. 그는 철저히 신분을 숨기고 살고 있죠. 과거가 알려지면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죠. 저도 그래서 오랫동안 입을 닫고 살았던 것이고요. 그러나 제 마음의 양심이 늘 묻습니다. 지금도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네가 뭐든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입니다. 수용소 사람들을 어떻게든 살려야 하지 않겠냐고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저는 가해자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합니다. 제가 지켜봤던 그 억울한 사람들을 세계에 알려서 살리고 싶어서요. 제가 입을 닫으면 누가 그들을 세상에 알립니까. 피해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가해자의 이야기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지금 이 순간도 수용소에서 학대를 저지르고 있는 보위원과 경비대 군인들에게 ‘세상이 바뀌면 꼭 처벌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김정은 등 가해자들이 법의 처벌을 받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신은 믿지 않는데, 혼자 자주 생각해요. 우연히 정치범수용소 경비병으로 발탁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영화 같은 탈출을 통해 나를 한국까지 오게 만든 힘은 무엇일까. 수용소 경비병으로 갔는데, 어머니와 두 동생이 정치범수용소에서 끌려가 숨을 거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한국에 와서 다 잊고 살고 싶은데 왜 수용소를 고발하는 일로 끝내 들어서게 된 것일까. ‘왜 나일까. 왜 내가 이런 무거운 짐을 걸머져야 할까’고 말입니다.” 인터뷰 내내 그가 벗어던질 수 없는 무거운 돌덩이를 홀로 품고 사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를 짓누르는 건 자신이 인생의 한 순간에 ‘가해자’의 편에 서 있었다는 죄책감이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를 위로했다. “너무 괴로워 마세요. 7년을 가해자로 살았다 하지만 누굴 죽이진 않았잖아요. 그러나 아버지가 자살하고 어머니와 남동생, 12살이던 어린 여동생이 수용소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아픔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대표님은 북한 정권이 만든 가장 참혹한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그 순간 늘 무덤덤한 표정이던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보았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농심이 가수 비의 ‘깡 열풍’과 더불어 깡 스낵 연간 누적 매출 1000억 원의 신기록을 세웠다. 올해 새우깡은 스낵 시장에서 가장 핫한 제품이었다. 깡 열풍을 타고 전국을 뒤덮었던 새우깡의 인기는 농심의 깡 스낵 4종으로 번졌다. 여기에 최근 농심이 선보인 ‘옥수수깡’이 품절대란을 일으키며 깡 열풍에 한 번 더 불을 지폈다. 이처럼 뜨거웠던 깡 스낵의 인기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냈다. 농심은 깡 스낵 5종의 연간 누적 매출액이 1000억 원을 돌파했다고 16일 밝혔다. 이는 1970년대 깡 스낵이 출시된 이래로 최초다. 일등공신은 단연 깡 열풍을 이끌었던 대표 제품 ‘새우깡’이다. 새우깡은 전년 대비 약 12% 성장해 12월 초까지 매출 810억 원을 달성했다. 새우깡의 성장은 트렌드에 발맞춘 커뮤니케이션 활동이 주효했다. 5월 가수 비의 ‘깡 열풍’과 함께 새우깡이 ‘밈(meme)’의 대상으로 등극하자, 농심은 비를 광고 모델로 섭외하며 깡 열풍에 합류했다. 특히 농심은 하나의 놀이문화로 자리 잡은 깡 이슈를 활용해 소비자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대국민 챌린지를 개최하고, 선정작과 비가 함께하는 광고를 선보였다. 또 젊은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패키지 디자인을 적용하는 브랜드 리뉴얼 활동도 펼쳤다. 새우깡이 전국적으로 이슈가 되면서, 소비자의 사랑은 감자깡과 양파깡, 고구마깡 등 다른 깡 스낵으로 번졌다. 이에 7월에는 깡 스낵 4종의 한 달 매출액이 최초로 100억 원을 돌파하는 신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농심은 연말까지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감자깡은 전년 대비 20%, 고구마깡은 39%, 양파깡은 70%로 큰 폭의 성장세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10월 출시된 신제품 옥수수깡은 입소문을 타고 소비자의 호기심을 자극해 품절 대란과 함께 희귀 아이템으로 이름을 올렸다. 인스타그램에서 소비자들은 “마트 몇 군데를 돌아다닌 끝에 겨우 찾았다” “먹는 걸 멈출 수 없다” “한 봉지만 사온 걸 후회했다” “박스째로 샀다”며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농심 관계자는 “오랜 기간 농심을 대표해왔던 장수 스낵 제품들이 다시금 큰 사랑을 받아 감사하다. 더 많은 소비자가 농심 깡 스낵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다양한 이벤트와 마케팅 활동을 펼치겠다”고 말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1982년 한반도 북단의 함경북도 은덕군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은덕은 악명 높은 아오지탄광이 있는 곳이다. 북한은 1977년 “김일성의 은덕으로 나날이 변모해가는 고장”이란 뜻으로 아오지의 원지명인 경흥을 은덕으로 바꾸었다가, 창피함을 알았는지 2005년에 경흥군으로 환원시켰다. 가난한 탄광 노동자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세 살 때부터 연필만 쥐어주면 그림을 그렸다. 유치원에 보내도, 인민학교에 보내도 공부보다는 그림을 그리는데 몰두했다. 남의 집에 가서 당시 유행하는 만화영화를 보고 온 날이면 공책 하나가 방금 본 만화 그림으로 금방 가득 채워졌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그는 미술소조에 다녔다. 그때면 종종 두만강 옆에 나가 수채화로 강변 풍경을 그렸다. 그는 1998년 중학교 졸업사진을 찍기 하루 전에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탈북했다. 중국에서도 그림을 그렸고 미술학원 선생까지 했다. 2016년 그는 마침내 한국에 왔다. 한반도 북쪽 끝에서 태어나 지금은 남쪽 끝인 제주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탈북화가 김정운 씨(38)의 일생은 이렇게 그림으로 요약된다.# 탈북 정운 씨의 집안은 대대로 두만강과 떼어놓고 살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중국에 넘어갔다. 그러나 고향을 멀리 떠날 수는 없어 두만강 옆 훈춘에 정착했다. 항일운동에도 가담했다고 했지만, 증거가 부족해 북한 당국의 인정은 받지 못했다고 한다. 두만강변에 살았던 북한과 중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유롭게 넘나들며 살았다. 정운 씨의 가족도 그랬다. 정운 씨의 아버지는 학생 때인 1950년대 초반 부모를 따라 다시 강을 넘어와 경흥에 자리 잡았고, 결혼한 고모들은 훈춘에 살았다. 그러나 1962년 ‘조·중 국경조약’이 체결되면서 이들 형제는 자연스럽게 북한 국적과 중국 국적으로 갈라지게 됐다. 그것이 나중에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지 당시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오히려 그때는 북한의 경제력이 좀 더 나을 때라 중국 사람이 된 이들은 북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두만강에 경비대도 생겨났고, 도강도 통제하기 시작했다. 경흥에서 자란 정운 씨의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탄광에서 일하게 됐고, 회령 처녀와 결혼해 자녀를 두었다. 북한과 중국의 격차는 1980년대부터 눈에 띄게 달라지더니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극에 달했다. 건너편 훈춘에선 개가 쌀밥을 물고 다녔지만, 이쪽 강변 사람들은 무리로 굶어죽었다. 특히 탄광마을인 아오지에서는 고난의 행군 때 굶어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정운 씨도 학교 친구들이 굶어죽고, 장마당에서 시신이 뒹구는 모습을 생생히 기억했다. 참다못한 정운 씨 가족은 다시 두만강을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건너편에 고모들도 살고 있어 중국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보다는 조건도 좋았다. 게다가 정운 씨의 아버지는 북한에 와서 환멸을 느낄 대로 느낀 상황이었다. 정식 의대를 졸업하지는 않았지만 동의학의 침술에 빠져 오랫동안 독학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침을 놔주던 부친은 1990년대 초반 안전부에 체포됐다. 불법 의료를 했다는 이유였다.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1년 반이나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정운 씨는 아직도 아버지가 석방돼 나올 당시의 참혹한 광경을 잊지 못한다. “뼈만 남아 돌아오셨더군요. 온갖 피부병 때문에 몸에서는 진물이 흐르고….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집안이 감시를 받았어요.” 이런 환경에서 탈북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정운 씨의 아버지는 자리를 잡고 가족을 부르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먼저 누나를 데리고 두만강을 넘었다. 1998년 봄. 내일이면 중학교 졸업사진을 찍는다며 설레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오늘밤 아버지와 누나가 있는 데로 간다”며 옷을 입혔다. 정운 씨는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어둠을 틈타 강을 넘었다. # 미술학원 선생님훈춘에는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국경 옆에는 탈북자들을 잡으려는 공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정운 씨 가족은 고모들의 도움을 받아 헤이룽장(黑龍江) 성 무단장(牡丹江) 시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가족은 주변 농촌마을을 돌면서 닥치는 대로 일하며 살았다. 정운 씨는 “이웃들의 눈이 무서워 1년에도 두세 번씩 이사를 다녔다”고 회상했다. 16세 정운 씨도 가족을 위해 뭔가 하고 싶었지만, 중국말을 전혀 모르는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처음 2년은 동네 꼬마대장 노릇을 하면서 중국어를 배웠다. 그리고 18세 때부터 각종 알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그림은 힘들고 두려운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도피처였다. 2001년 운명처럼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그림 솜씨를 눈여겨본 아르바이트 회사 사장이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친구에게 그를 소개시켜 준 것이다. 정운 씨는 학원원장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저는 조선에서 왔습니다. 그림을 배우고 싶지만 돈이 없습니다. 학원비는 돈을 벌어 내면 안 되겠습니까.” 원장은 그에게 그림을 그려보라 한 뒤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운 씨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원에서 그림을 배웠다. 1년쯤 지나니 원장은 그에게 학원 키를 맡겼다. 학생들이 돌아가면 학원을 청소하는 일이 그의 몫이었다. 그가 다닌 학원은 방학 시즌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200명 가까운 학생들이 방학 두 달 동안 그림을 배우려 다녔다. 학원에 학생들이 넘쳐나면 정운 씨도 원장을 도와 학생들에게 그림의 기초를 가르쳐줬다. 1년 반이 지난 2003년 어느 날 원장이 그를 불렀다. “밖에서 버는 만큼 돈을 줄 테니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 어때.” 정운 씨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때부터 그는 연변 출신의 강사로 신분을 속이고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시간이 지나자 원장은 그에게 학원 관리까지 맡기기 시작했다. 나중엔 원장이 할 일의 약 80%를 그가 챙겼다. 일이 늘었는데도 월급을 올려줄 기미가 없자 그는 2004년 말 산둥(山東) 성 웨이하이(威海) 시의 딴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몇 달 뒤 학원 원장은 그를 찾아와 “월급을 올려줄 테니 다시 돌아오라”고 사정했다. 그렇게 인연을 이어간 학원에서 그는 2007년 후반까지 일했다.# 한국 입국2007년 후반 또다시 그의 인생을 뒤흔든 일이 생겼다. 우연한 기회에 산둥 성 칭다오(靑島)에서 그림 사업을 하는 한국인을 만난 것이다. 그가 만난 첫 한국인이었다. 무단장에 놀러왔던 그는 그림을 잘 그리는 청년이 있다는 소개를 받고 정운 씨를 만났다. 그는 정운 씨의 그림을 본 뒤 칭다오의 자기 회사에 오면 한국식 그림기법을 가르쳐주고, 대우도 더 많이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망설임 없이 정운 씨는 다니던 학원에 작별인사를 하고 칭다오로 옮겨갔다. 새로운 스승 밑에서 정운 씨는 탱화(불화) 그리는 법을 배웠다. 칭다오는 한국에서 멀지 않은 도시이고, 한국 사람도 많이 살았다. 이곳에서 정운 씨는 한국TV와 출판물을 실컷 봤다. 한국에 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부모와 누나 생각에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회사에서 먹고 자며 신변 불안에 대한 걱정이 사라진 상태에서 또 한 번 모험을 시도하는 것도 두려웠다. 정운 씨는 2011년, 3살 연하의 중국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했다. 그녀 역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아들도 하나 생겼다. 학원 선생을 하면서 사두었던 가짜 중국 호적도 칭다오에선 별 탈 없이 통했다. 한국으로 떠나는 모험은 정운 씨의 누나가 먼저 감행했다. 탈북도 누나가 먼저 했고, 한국에도 누나가 먼저 왔다. 한국에 온 누나는 “여기가 너무 좋다”면서 가족을 데려올 작전을 짰다.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구입한 가짜 호적으로 가짜 여권을 만들었다. 그리고 2016년 4월 정운 씨는 부모님과 5세 된 아들과 함께 상하이(上海) 국제공항에서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다. 출국 심사를 받는 동안 정운 씨는 떨리는 감정을 숨기느라 식은땀을 쏟아야 했다. 가짜 여권이 들통 나면 온 가족이 북송돼 고초를 겪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려했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제주도에 도착한 정운 씨 가족은 누나가 알려준 대로 입국 심사를 받기 전 탈북 가족이라고 밝혔다. 이후 가족 모두 제주공항을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 서울행 비행기를 타고 서울의 조사기관으로 가야했다. 이들은 4개월 동안 탈북민 정착 과정을 밟고, 2016년 8월 마침내 사회로 나왔다. 하나원에서 어느 곳에 가서 살고 싶은지를 물었을 때 정운 씨는 주저 없이 제주도를 선택했다. 당시만 해도 제주도에 중국인 여행객이 많아 그동안 익힌 중국어를 활용하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다시 그림을 그리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제주도에 도착한 정운 씨는 이듬해인 2017년 2월, 제주공항 면세점에 취직했다. 처음 왔을 때 제대로 구경조차 못했던 제주공항을 구석구석 다니며 중국인 관광객을 맞이하는 일이었다. 공항에서 일하면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이미 그림은 그에게 살아가는 이유가 됐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탱화도 그렸지만 다른 작품도 그렸다. 2018년 이북5도청에서 주최하는 통일미술대전에 참가해 입상하기도 했다. 백발의 실향민 할아버지가 손녀를 안고 고성통일전망대에서 북한 땅을 쌍안경으로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올해 2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제주공항에선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면세점에서 일하던 정운 씨도 자의 반, 타의 반 사직서를 쓰고 나와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면세점에 취직하면서 3년 동안 돈을 모아 미술 작업실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꾸준하게 실천한 결과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여기에는 가정이 안정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 남았던 아내는 2017년 한국에 왔다. 그해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고, 올해 딸도 얻었다. 그림으로 인연을 맺은 아내는 그에게 든든한 조력자다. 정운 씨가 그림의 디자인과 설계를 하면 아내는 선과 보조색깔을 입힌다. 다만 올해는 아내가 딸을 출산해 정운 씨가 그림 그리기의 모든 과정을 다 맡고 있다. 일감이 많은 것도 아니다. 수입에서 작업실 운영비를 제외하면 남는 것이 거의 없는 수준이다. 입국한 지 4년 밖에 안 된 탈북민이 한국에서 자리를 잡고, 판로를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림에만 집중해 살 수 있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특히 그림을 완성하고 일화(一華)라는 자신의 호를 적어 넣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미래에 대한 불안마저 잊게 될 정도다. “왜 하필 탱화를 그리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탱화 시장은 인공지능과 기계가 대치할 수 없는, 사람의 손이 반드시 가야 하는 그림입니다. 유행도 타지 않고, 세상이 어떻게 달라져도 앞으로도 계속 사람이 그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사라질 분야가 아닙니다.”# 통일의 꿈정운 씨는 북한에서 태어나 16년을 살고, 중국에서 18년 살았으며, 한국에서 4년째 살고 있다. 정체성에 혼란이 일어날 만하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한족들과 살 때는 가끔 우리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한순간도 나는 한민족임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아들들은 저처럼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도록, 완벽하게 한국 남자로 키워 군에 보낼 생각입니다. 요즘처럼 모두들 애를 낳지 않는 때에 제가 셋이나 낳아 키우는 것 자체가 애국이 아닙니까.” 그의 말투는 함북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한국 표준어처럼 들린다. 정작 본인은 “가끔 경상도가 고향이냐는 말은 듣는다”며 머쓱해했다. 아들도 화가로 키울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학교에선 소질이 있다고 하는데 제가 볼 때는 별로”라며 웃었다. 그는 “요즘 아이들은 TV나 휴대전화 게임, 유튜브 등에 영향을 받아서 배우는데 오랫동안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진득하게 오래 앉아 몰두해야 하는 그림과는 전혀 상극인 삶을 살고 있다”며 한숨을 지었다. 정운 씨는 제주도와 어울려 살기 위해 봉사도 열심히 한다. 지난해부터 매주 한 번씩 인근 지역 아동복지센터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지도한다. 지역 탈북민 봉사단체 부회장도 맡아 한 달에 한 번 노인복지센터에 가서 봉사도 한다. 3,4개월에 한 번씩 헌혈도 한다. 그에게 통일이 돼도 제주도에 계속 뿌리내리고 살 것이냐 묻자 단호한 대답이 나왔다.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겁니다. 반드시. 가족들도 다 데리고요.” 지옥 같은 아오지를 벗어나 살기 좋은 제주도에 뿌리를 내린 그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경흥과 인접한 나진, 선봉 지역은 중국과 러시아를 낀 황금의 삼각주입니다. 자녀들에겐 제주도보다는 훨씬 더 큰 기회의 땅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바다도 끼고 있고요. 하하하.” 정운 씨 가족의 유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터뷰를 마치며 제주도 못지않게 푸르고 깨끗한 나진 바다에서 그와 함께 낚시를 하게 될 날이 올지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북한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대책이 갈수록 이상해지고 있다. 겨울철을 맞아 방역 단계가 초특급으로 격상된 뒤 각종 비상식적인 조치들이 남발되고 있다. 코로나19 환자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학교와 상점, 음식점 등 대중 집합시설의 영업을 중단시켰고, 건물 구석구석을 매일 수차례 소독하라고 독려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국가정보원이 밝힌 것처럼 초특급 단계 이전에도 바닷물로 전염된다며 어로와 소금 생산을 막고, 중국이 지원한 식량도 받아오지 않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조치들을 남발했다. 승인 없이 이동했다고 사람들을 마구 처형하면서 한편으론 수십만 명이 운집한 열병식과 대회는 강행하고 있다. 이런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대응의 근본 원인은 김정은이라고 할 수 있다. 방역 책임을 물어 숱한 간부들을 함부로 죽이니, 공포에 질린 간부들이 말도 되지 않는 짓거리를 대책이라 내놓고, 그걸 또 김정은이 승인하고 있다. 가뜩이나 외화와 식량, 연료 부족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당혹스러운 지시가 계속 하달된다. “세관과 모든 무역항에 방역시설을 새롭게 건설하라”는 지시가 대표적이다. 방역시설 구축이야 당연한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세부 내용을 들여다보면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북한 소식통은 새 지시에 따라 두 가지 방역시설을 만들어야 한다고 전했다. 하나는 자외선 소독장이고, 다른 하나는 섭씨 80도 이상을 유지하는 보온창고다. 자외선 소독은 코로나 방역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돈도 전기도 없는 상황에서 자외선 소독 램프를 사서 설치해야 하고, 발전기도 따로 구입해서 돌려야 한다. 더 큰 문제는 80도 유지 보온창고이다. 지침에 따르면 모든 수입 물자는 자외선 소독을 마친 뒤 보온창고에서 최소 40시간을 보관해야 한다. 이후 출하창고로 옮겨 14일 동안 방역 결과를 지켜보고 아무 이상이 없다는 확신이 든 다음에야 반입이 가능하다. 일일이 자외선 소독을 하고 80도 온도를 보장하는 창고에 넣었다 뺐다 하기엔 세관이나 항구로 들어오는 물자가 너무 많다. 수천 t만 돼도 초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다. 물동량을 많이 다루는 곳에선 거대한 보온창고를 지어야 하는데, 온도 유지가 제일 어렵다. 목욕탕도 아니고 대형 창고의 온도를 80도로 유지하려면 막대한 양의 석탄도 필요하다. 과일이나 식료품 등도 예외 없이 40시간 동안 80도 창고에 넣었다가 다시 14일 동안 격리 창고에 넣어야 한다. 이렇게 보름가량을 보내면 수입 물품의 상당량이 부패될 가능성이 크다. 애써 들여온 물자를 돈을 들여 썩혀 버리는 셈이다. 천, 비닐 제품 등은 80도에 보관하면 변형이 생긴다. 북한은 겨울에 온실용 비닐 퉁구리를 대거 수입한다. 수천 m나 되는 퉁구리를 모두 풀어서 말끔히 소독하는 데에는 엄청나게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아래에선 이해할 수 없는 지시라고 아우성인데, 위에선 이런 자외선 소독 장치와 보온창고를 짓지 못하면 수입 물자를 다룰 수 없다고 못을 박는다. 또 다른 북한 소식통은 북한 최대 항구인 남포항의 경우 보온창고를 짓는 데 300만 달러가 들고, 작은 항구나 세관에는 100만 달러 정도가 필요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건설비용만 이 정도이고, 운영 및 유지 비용은 견적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현장 간부들은 “특정 항구와 세관을 수입 전용으로 지정해 그곳에만 이런 시설을 지으면 안 되냐”며 불만을 감추지 않지만, 이런 의견은 반영되지 않는다. 고위 간부들 중에 김정은에게 목을 내걸고 말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당의 지시를 무조건 관철하지 않고 자꾸 조건 타발(불평스럽게 투덜거림)로 토를 단다”고 화를 내는 순간 끌려 나가 처형될 수 있다. 자기만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가족까지 다 농촌으로 추방을 보내니, 융통성이 없다고 욕을 먹는 게 낫다는 것이 고위 간부들의 생각이다. 간부들은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충성 과시에 목적을 둔 지시들을 남발하고, 독하게 통제하는 데에만 골몰한다. 죽지 않기 위해서다. 포악한 독재자 밑에선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현재 북한을 보면 통치 시스템이 굴러가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어쩌면 간부들이 목숨을 저당 잡히고 사는 이상한 시스템을 정상인의 눈으로 해석하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