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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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zsh75@donga.com

취재분야

2024-03-28~202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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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핀홀딩스 아스타(ASTA), 블록체인 기반 결제 플랫폼 개발

    블록체인과 인공지능(AI) 기술로 수집한 빅데이터를 활용해 네트워크 기반의 다중제어 시스템을 제공하는 정보기술(IT) 전문기업 코핀홀딩스(대표 양문섭)가 내달 디아스타(THE ASTA) 플랫폼 서비스를 오픈한다. 디아스타는 가상자산과 화폐의 상호 가치 교환 기능을 실물경제에서 실제 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 블록체인 실용 플랫폼이다. 디아스타는 최근 다양한 모바일 바우처를 가상자산 아스타(ASTA)로 결제하고 거래할 수 있는 결제 플랫폼을 개발해 블록체인 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디아스타는 일상에서 실물자산처럼 활용되는 것을 목표로 아스타를 활용해 숙박, 쇼핑, 의료, 관광, 레저, 엔터테인먼트 등 여러 분야 업체들과 업종 간 연계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으며 실생활 결제 서비스 시장 저변 확대에 나서고 있다. 앞서 코핀홀딩스는 지난해 11월 국내 기업과 컨소시엄 공동 투자를 통해 ㈜아스타투어 홈페이지를 오픈하고 가상자산 결제 시스템과 숙박상품을 결합한 신개념 여행 플랫폼 시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최근에는 가상자산 아스타를 통해 모바일바우처를 결제하게 해 모바일커머스 시장까지 이용 폭을 넓히는 중이다. 아스타투어는 높은 기업 브랜드 가치와 큰 할인 폭으로 소비자들의 가성비를 만족시키고 있으며 국내 대형 호텔·리조트 제휴사와 판매협약을 잇따라 체결했다. 국내 대형 호텔앤드리조트 포함 116곳에서 가상자산 아스타를 이용해 결제할 경우 타 호텔 예약사이트 대비 최대 50% 할인된 금액으로 이용이 가능하다. 아스타투어는 가상자산 결제 시스템 도입과 높은 할인율을 앞세워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으며 현재 약 90만 페이지뷰를 달성하는 등 순항 중이다. 또 디아스타 플랫폼은 모바일바우처 업체와의 제휴를 통해 가상자산 아스타의 구매 기능 아이템을 확장하고 있다. 내달부터 파리바게뜨, 베스킨라빈스 등 제과·제빵 회사들, 스타벅스, 파스쿠찌 등 커피전문점, 맥도날드, KFC, 롯데리아 등 패스트푸드점에서 시중가 대비 5∼20% 할인율을 적용받아 아스타로 결제할 수 있다. 또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마트 이용권도 할인된 금액으로 구매 가능하며, 서비스 오픈 이후 더 많은 할인쿠폰, 특가상품 프로모션이 진행될 예정이다. 코핀홀딩스 관계자는 “디아스타는 앞으로 다양한 제휴사와 교류를 통해 가상자산 아스타를 이용한 신개념 비즈니스를 창출하고 가상자산 생태계 구축을 위해 사업 범위를 점차 확장할 계획”이라며 “아스타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안전하게 사용하고 고객 편익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스타는 국내 4대 가상자산 거래소 가운데 하나인 코인원거래소와 캐셔레스트, 비트소닉 거래소에 상장돼 있어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다. 한편 아스타 플랫폼의 최종 형태는 전 세계 사람들이 불편함 없이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이용 가능한 결제 시스템과 아스타를 중심으로 하는 생태계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아스타 플랫폼은 참여자와 전략적 제휴 파트너를 포함한 네트워크 참여자 모두가 더 많은 이익을 향유할 수 있도록 생태계를 확장하면서 세계 어디서나 환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글로벌 결제 수단으로 자리 잡는다는 계획이다. 코핀홀딩스 관계자는 “상호 가치 교환성을 확보한 아스타 비즈니스 플랫폼은 블록체인 기반 가상자산 결제 시스템으로서의 편리성과 신뢰성, 투명성을 통해 각종 사업 영역을 가상자산 결제 시스템에 도입할 것”이라고 말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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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사가 된 북한 축구 최고 스타[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김정은 집권 10년이 돼 가는 지금까지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것 중 하나가 김여정의 남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다양한 설(說)이 있지만 증명된 것은 없다. 재작년에 누군가가 “김여정의 남편이 축구선수 홍영조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이냐”고 기자에게 물었다. 그 말을 듣자 갑자기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는 21세기 북한에서 가장 유명했던 축구선수다. 실력만 따지면 턱도 없는 비유지만 인기를 따지면 홍영조는 북한에선 한국의 박지성이나 손흥민만큼 유명하다. 홍영조는 1960년대 북한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던 박두익 선수 이후 최고 기량을 가졌다는 평가도 받았고 외모도 괜찮아서 과거 한국 언론에서 ‘인민 베컴’이란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다. 홍영조는 2011년 카타르 아시안컵에 북한 대표팀 주장으로 출전한 것을 끝으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불과 29세 전성기의 나이에 공교롭게도 김정은 시대가 시작되던 시기와 겹쳐 사라진 것이다. ‘김여정이 북한 체육계 최고 스타인 홍영조의 팬이었다면 충분히 결혼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양에 여러 선을 대 취재해 봤다. 워낙 유명한 선수였던지라 그의 근황을 아는 것이 크게 어렵진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홍영조는 김여정의 남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현재 직업이 황당해 깜짝 놀랐다. 축구선수 홍영조가 현재 평양시 검찰소 검사로 있는 것이다. 북한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5년 동안 이례적으로 외국 리그에서도 뛰었던 선수가 검사가 됐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북한이 아무리 특이한 나라라 해도 세계의 보편적 상식대로 체육계 스타는 은퇴 뒤에도 감독 등을 하면서 체육계에 종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검사가 됐다니…. 이런 생뚱맞은 일이 있나 싶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북한 사람들에겐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북한은 권력을 잡은 자가 최고인 세상이다. 아무리 체육계 스타라 해도 국가에서 주는 공급만 갖고는 살 수가 없다. 북한에선 꾸준히 뇌물을 받아먹고 살 수 있는 검사가 배급을 받는 왕년의 스타보다 훨씬 나을 수 있는 것이다. 홍영조는 그래도 해외 리그에서 5년 동안 뛰었기 때문에 북한에만 있었던 선수들에 비해선 돈 벌 기회가 있었다. 그는 2007년부터 2시즌 동안 세르비아 프로팀에서 뛰었고, 2008년 러시아로 이적해 FK로스토프팀에서 2011년까지 3년간 공격수를 맡았다. 세르비아나 러시아의 가난한 프로팀에서 뛰긴 했지만 1만 달러도 큰돈인 북한인지라 연봉만 모아도 부자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북한은 해외 진출한 선수의 월급이나 이적료는 거의 다 당국이 뺏어 간다. 그래서 홍영조는 북한 선수로는 거의 유일하게 5년 동안 해외 생활을 했어도 큰돈을 모으기 힘들었을 것이다. 홍영조가 축구계를 은퇴한 계기는 경기 중 팀 동료를 폭행한 사건 때문이라고 한다. 그 동료 역시 한국에 잘 알려진 유명한 선수인지라 놀랐는데 찾아보니 그도 홍영조가 사라진 시점과 거의 비슷한 때에 북한 대표팀에서 하차했다. 2011년 1월 카타르 아시안컵을 전후로 북한 축구대표팀을 이끌었던 김정훈 감독이 가족과 함께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고, 대표팀을 이끌던 두 스타마저 사라진 뒤 북한 축구는 침체됐다. 축구계를 떠난 홍영조는 대학에서 공부를 한 뒤 검사가 됐다. 북한은 법조인의 90% 이상이 김일성대 법학대학을 졸업한다. 법조인 자격을 얻기 위해 엄격한 시험을 쳐야 하는 한국과 달리 북한은 낙제만 면하고 얼렁뚱땅 법대만 졸업하면 당국에서 검사로 임명해준다. 유명 축구선수 출신은 김일성대 모든 학부가 탐을 낸다. 김일성대는 교내 체육대회에서 축구경기가 매우 격렬한 편인데, 유명 선수는 인기 학부에서 경쟁적으로 데려가는 전통이 있다. 홍영조 정도면 대학 다닐 때 공부는 별로 하지 않아도 체육특기생으로 학부 축구팀을 이끈 공로로 무난히 졸업하고 평양시 검사로 배치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어찌됐든 한때 북한 최고의 축구스타가 ‘범죄자’를 앞에 앉혀 놓고 책상을 치며 “똑바로 자백하라”고 호통 치는 모습은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1-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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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라마이드 + 콜라겐으로 피부보호에 최적

    매일유업이 생애주기별 영양설계 전문 브랜드 ‘매일 헬스 뉴트리션’을 통해 밀크세라마이드 성분과 저분자 콜라겐을 함유한 이너뷰티 제품 ‘셀렉스 밀크세라마이드’를 선보였다. 세라마이드와 콜라겐이 들어간 이너뷰티 제품은 차갑고 건조한 겨울 날씨에 장시간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요즘 피부를 효율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 ‘셀렉스 밀크세라마이드’는 밀크세라마이드 600mg과 함께 흡수율이 좋은 저분자 피시 콜라겐 1000mg을 함유하고 있다. 여기에 함께 먹으면 좋은 비타민C를 하루 권장 섭취량 수준(100mg)으로 담았고 히알루론산, 엘라스틴도 추가했다. 셀렉스 밀크세라마이드는 물 없이 먹을 수 있는 분말스틱으로 부드러운 요구르트 맛을 내 하루 1포씩 간편하게 먹을 수 있다. 매일유업 관계자는 “피부를 구성하는 세포 사이사이 지질의 35∼40%가 ‘세라마이드’ 성분으로 피부 속 세라마이드가 감소하기 시작하는 30대부터는 콜라겐과 세라마이드를 함께 먹을 것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최근 ‘펜트하우스’의 배우 김소연을 모델로 발탁한 ‘셀렉스 밀크세라마이드’는 네이버 매일유업 스마트스토어를 비롯한 주요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살 수 있다. 22일 오전 9시 25분 CJ홈쇼핑 채널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1-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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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가 된 탈북병 “총은 버려도 옷은 못벗는다 버텼죠”[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2002년 2월 20일 동아일보 기사.도라산역 인근서 북한군 1명 귀순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비무장지대(DMZ) 인근 경의선 도라산역을 방문하기 불과 10여 시간 전인 19일 밤 소총 등으로 무장한 북한군 병사 1명이 서부전선으로 귀순, 군 당국이 귀순 경위를 조사 중이다. 국방부는 20일 “북한군 주 모 상급병사(22)가 19일 오후 11시18분경 경의선 남측 최북단 도라산역 부근인 경기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리로 귀순해와 관계당국에서 합동신문 중”이라고 발표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북한군 병사는 인민군 방한복 차림에 AK 소총과 탄창 5개를 휴대하고 있었으며, 도라산역 남서쪽 1.2㎞ DMZ를 통해 귀순했다. 이 병사는 DMZ에 들어서면서 귀순 사실을 알리기 위해 공중을 향해 7발을 쐈으며, 한미 양국 대통령 방문을 앞두고 비상경계 중이던 아군 초병이 총성을 듣고 열상관측장비(TOD)로 확인해 안전하게 유도했다고 군은 설명했다. 북한군 병사는 조사에서 “부시 대통령이 방한했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도라산역에 오는 일정은 몰랐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 당국은 한미 양국 대통령의 도라산역 및 전방 미군부대 방문에 따른 경호 문제 등을 고려해 북한군 병사의 귀순 사실을 20일 오후에야 공개했다.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탈북2002년 2월 19일 저녁 10시 반경. 서부전선을 지키는 북한군 2군단 6사 소속 민경대대 심리전 제압방송국 안에선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때를 기다리던 방송국 조장 주승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고를 열었다. 탈북을 위해 소대장과 정치지도원, 보위지도원 등 장교들을 방송국으로 초대해 이른 저녁부터 술과 음식을 아낌없이 먹였다. 초소 당직자들도 함께 마셨다. 주 씨도 함께 마시는 척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마침내 술에 취한 모든 이들이 잠에 들었다.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무기고에서 자동소총과 탄약 150발이 든 탄창 5개, 수류탄 등을 꺼낸 그는 방송국 문을 열었다. 찬바람 속에서 숨을 길게 내쉰 뒤 매복호(잠복호)를 넘어 전기철조망으로 달려갔다. 북한의 전방 철조망은 50㎝ 정도 사이를 두고 4개가 설치돼 있다. 각각 1만 볼트(V), 6000V, 3000V, 2000V의 전기가 흐른다. 주 씨는 미리 봐두었던, 철조망 하단 콘크리트가 깨진 곳을 찾아낸 뒤 제일 멀리 있는 전기철조망을 향해 ‘접지봉’을 던졌다. 접지봉은 고압 전류를 합선시켜 약 2분 정도 전기를 차단시킨다. 요란한 불꽃과 굉음과 함께 빨갛게 달았던 철조망 4개가 몇 초 뒤 꺼멓게 죽었다. 주 씨는 미리 준비했던, 철조망을 들어 올릴 때 쓰는 Y자형 ‘짝지발’을 이용해 전기철조망을 차례로 통과했다. 철조망 다음은 500m 정도 넓이의 지뢰구역이었다. 망설일 수가 없었다. 전기철조망 전기가 차단되면 자동으로 비상이 걸려 5분 내로 군인들이 추격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뢰를 밟고 말고는 하늘의 뜻에 맡기고, 앞에 보이는 국군 소초(GP)를 향해 내달렸다. 한참을 달리다 선에 걸려 넘어졌다. 발목에 감긴 선을 풀며 보니 말뚝지뢰였다. 설치한지 오래됐는지 터지지는 않았다. 천운이었다. 다시 내달렸다. 5분도 안 돼 북한군 초소 쪽에서 사이렌이 울리고 총소리가 들렸다. 북한군 적외선 탐지초소에 발각됐는지 총알이 정확히 날아오는 느낌이었다. 기를 쓰고 달렸다. 군사분계선에 도착한 그는 허공에 연발로 총을 쐈다. 귀순자가 있으니 총을 쏘지 말라는 신호였다. 냅다 달려 한국군 GP까지 도착했지만, 그곳을 지나쳐 뒤쪽 일반전초(GOP)를 향해 내달렸다. 북한군 추격조가 비무장지대 내에선 분계선을 넘어 한국군 GP까지 오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실제로 당시 북한군 추격조가 한국군 GP까지 왔다고 한다. 한참 달리니 남방한계선 철책이 나타났다. 방송국을 떠나 얼추 20분 정도 걸린 듯했다. 북한군이 총을 난사하고, 자신도 총을 쏘며 달려왔으니 국군 병사가 마중 나와 있을 줄 알았지만 누구도 없었다. 철책은 뛰어넘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다 사살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포기했다. 그는 철책을 따라 200~300m 정도 거슬러 올라갔다. 오랜 전방 경험상 매복초소가 있을 만한 곳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그는 철조망 기둥을 군화로 찼다. 한참을 찼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화가 나 더 힘껏 한참 찼더니 그제야 국군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군 병사는 총을 겨누고 “누구냐”고 물었다. “저기 앞에 북조선 민경초소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무기를 버리고 옷을 벗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무기는 버릴 수 있지만 군복은 벗을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전방에서 근무하다보면 한국에서 날아오는 삐라를 엄청 많이 봅니다. 한번은 과거 우리 부대에서 귀순한 병사의 사진이 삐라에 실려 왔는데, 내복만 입고 후줄근한 모습이더군요. 아마 귀순 즉시 찍은 사진 같았습니다. 옷을 벗으란 말을 듣자 저는 ‘내 모습도 내복차림으로 찍혀 북한에 삐라로 뿌려지면 어쩌지’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목숨 걸고 넘어왔는데 그런 모습으로 옛 전우들에게 보여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뒤에서 추격조가 당장 달라붙을까봐 정말 불안했지만, 끝까지 버텼죠.” 북한군 엘리트 군인의 자존심으로 “무기는 버려도 옷은 벗지 못 하겠다”며 버티자 한국군이 결국 양보했다. 절단기를 가져다 철책을 뜯고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군 당국은 기자들에게 “비상경계 중이던 아군 초병이 총성을 듣고 열상관측장비(TOD)로 확인해 안전하게 유도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주 씨는 “마중 나온 사람도 없었고, 철책을 따라 한참 올라가 스스로 매복초소를 찾아 군화발로 자고 있던 군인들을 깨웠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렇지만 분계선에서 마주보며 근무를 섰던 같은 군인의 처지에서 그들이 불이익을 받을까봐 걱정돼 지금까지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가 넘어온 지역은 도라산역에서 불과 1.2㎞ 떨어진 곳이었다. 그 곳에는 10시간 뒤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방문이 예정돼 있었다. 그런 곳에서 총성이 울렸으니 군이 발칵 뒤집힐만한 사건이었다.# 민경부대에 입대하다북한의 대남심리전의 최전방에 서 있던 주 씨가 탈북한 것은 가정에 닥친 불행, 한국에 대한 동경 등 복합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는 198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공군부대 군관이었고, 태어날 당시 모친도 같은 부대 군관이었다. 부모 모두 군관인 가정에서 태어나 군부대 가족 마을에서 자라다보니, 학교를 마치고 군에 가서 군관이 되는 것이 주 씨의 자연스러운 포부가 됐다. 그래서 학교 때 공부보다는 국방체육 같은 운동에 더 열심이었다. 군에 간다고 해도 공군은 절대로 가기 싫었다. “북한군 육군의 견장은 빨간색 바탕이고, 공군은 파란색 바탕입니다. 그런데 공군 병사들이 도시에 나가면 육군에게 자꾸 얻어맞고 와요. 공군 병사들이 약하다고 인식하는 거죠. 그래서 공군 병사들은 외출 나갈 때 빨간 견장으로 바꿔달고 나갑니다.”원래 공군 군관 가족은 자식들도 공군에 보내는 것이 전통이다. 주 씨가 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몇 년 동안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겪었다. 시내로 나가면 굶어죽은 시신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주 씨의 공군부대 마을은 국가 공급이 그럭저럭 이뤄져 배는 곯지 않았다. 1997년 군에 갈 시기가 다가왔다. 북한은 전방 민경대대, 비행사, 잠수함 승조원, 호위국을 ‘특수병종’으로 구분하고, 학교를 돌며 출신성분과 체력조건 등을 심사해 일반 병종보다 먼저 모집한다. 성분도 좋고, 체격도 좋은 주 씨는 특수병종 입대 대상자가 됐다. 주 씨는 가장 혹독한 훈련을 하는 민경에 가고 싶었다. 부모들은 공군에 가야 나중에 대학 갈 때 힘을 써줄 수 있다고 주 씨를 설득했지만 ‘강한 사나이’가 되고 싶었던 주 씨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부친이 결국 손을 들었다. 대신 조건을 달았다. 2군단 민경에 가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가보니 부친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전방에 주둔한 북한군 1,2,4,5군단 민경대대 중 개성을 끼고 있는 2군단 민경만이 ‘도시민경’으로 불렸다. 깊은 산속에 주둔한 다른 군단 민경부대는 ‘산골민경’이라 했다. 민경 신병훈련소는 일반 신병훈련소보다 기간이 두 배 긴 1년 과정이었다. 철봉, 격술, 사격 등 일반 병사들보다 혹독한 훈련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더 잘 먹이는 것도 아니고 공급은 일반 보병훈련소와 똑같았다. 신병훈련소를 마칠 무렵 인사참모가 그를 찾더니 어느 보직으로 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입대할 때 주 씨는 조국통일의 성전(聖戰)에 가장 앞장서는 최전방 부대에서 강한 군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훈련소 생활을 거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막상 가보니 민경부대의 전투력은 제 생각보다 훨씬 떨어졌고, 군관들은 먹고 사는데 급급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전방 경비병이 되겠다는 생각을 접고 무전병으로 보내달라고 인사참모에게 말했습니다.” 인사참모는 고민에 빠졌다. “그거 부탁자들 자리인데….” 부탁자는 특별히 봐주라고 지시가 떨어진, 한마디로 ‘빽’ 좋은 간부 자식들을 의미한다. 개성의 2군단 민경에는 고위 간부들의 자식들이 많이 입대했다. 당시 간부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자식이 최전방 민경에 있으면 한번은 봐주라는 지시가 하달됐을 때였다. 또 민경에 있으면 노동당 입당이 빠르고 제대한 뒤 출세도 탄탄대로였다. 일반 인민들의 자녀들은 당시 13년을 군복무해야 했지만, 고위 간부들은 자녀들을 5~6년 정도 복무시켜 입당시킨 뒤 ‘위탁생’이란 이름으로 제대시켜 대학에 보냈다. 위탁생 제도는 군에서 사회대학에 위임해 교육을 시키는 제도인데, 사실은 고위 간부들이 자녀들을 일찍 제대시켜 간부로 키우기 위해 만든 특권 제도였다. 힘없는 집 자녀들이 13년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할 때 쯤, 고위 간부 자녀들은 그 기간 군 복무 경력과 대학 졸업, 노동당 입당 등 모든 자격을 갖추고 간부가 돼 있었다. 민경에선 무전병이 ‘부대의 꽃’이라고 불렸다. 가장 ‘꽃보직’이란 의미였다. 민경소대는 일반 부대와 달리 장교가 셋이 있었다. 소대장, 정치지도원, 보위지도원이 장교였는데, 무전병은 항상 이들 장교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편한데다 간부의 신임을 받기 쉬워 입당도 빨랐고, 일반 대학과 군관학교 추천도 잘 된다. 그래서 아들을 민경에 보낸 고위 간부들은 부대에 부탁해 무전병 보직을 달라고 요구했다. 난감해하던 인사참모는 그를 잘 보았는지 결국 무전병으로 임명해주며 “내가 쓸 자리를 너에게 준다”며 엄청 생색을 냈다. 주 씨의 아버지가 공군 장교인데다 그의 친척들도 군에서 고위급이 많았던 덕을 본 듯했다. 주 씨 역시 입대할 때 아버지가 5년만 군 복무를 하면 군관학교에 보내준다고 약속했다. “무전병이 되니 인사참모는 왜 그렇게 생색을 냈는지 알겠더군요. 우리 대대 무전병 중 제가 제일 힘이 없었어요. 저 다음에 힘이 없는 무전병이 김격식 당시 2군단장 조카일 정도였으니까요. 제 선임병이 강원도 2인자인 조직비서 아들이었는데, 저는 제대할 때까지 이 친구 얼굴을 본적이 없어요. 몸이 아프다고 집에 가 있는데 대신 1년에 두 번 수산물을 실은 트럭을 부대에 보냈어요. 이 친구는 끝내 부대에 나타나지 않고 버티다가 몇 년 뒤 위탁생으로 김일성대에 가더군요.” 그가 배속된 2군단 6사 민경대대는 판문점에서 임진강까지를 관할로 두고 있다. 그 안에 개성공단도 있다. 민경대대는 1800명으로 사실상 연대급이었다. 그래서 민경대대장은 계급과 대우도 일반 부대 연대장급 대우를 받는다. 민경대대는 15개 초소를 지키는데, 1개 초소에 1개 소대가 들어가 두 달간 전방에서 근무한 뒤 후방의 다른 부대와 교대한다. 민경 소대는 45~50명으로 일반 부대보다 많은데 소대마다 무전병이 있다.#기정동 대남제압방송국주 씨의 첫 근무지는 개성시 판문군 판문점리였다. 한국에는 개성시 평화리 기정동으로 알려져 있다. 높은 철탑에 커다란 인공기가 펄럭이는 마을이다. 기정동 맞은 편 한국 지역이 역시 큰 태극기 철탑이 있는 대성동이다. 기정동과 대성동은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원래 강릉 김씨 집성촌이었다. 그러다 정전협정으로 평화로운 마을이 둘로 갈라졌고, 친척들이 영영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공산주의 선전마을이 된 기정동은 농사를 지으면 3년을 먹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땅이 비옥한 마을이었다. 그렇지만 1년 소출을 국가에 바치고 나면 농민들이 먹고 살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기정동은 또 집집마다 문을 잠그지 않고 사는 북한에선 보기 힘든 동네였다. 민경군인 외의 외지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도둑맞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민경군인도 이 지역에서 뭘 훔치면 바로 탄로가 나기 때문에 민가를 습격하지 않았다. 주 씨가 처음 기정동에 가니 감시망루에서 분계선 남쪽지역까지 거리가 딱 10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남쪽 지역은 철조망을 따라 도로가 쭉 깔려 있었다. 이곳에서 3년 정도 병사로 근무하다보니 무전병보다 더 좋은 ‘꽃보직’이 눈에 띄었다. 바로 대남 제압방송국이었다. 주 씨의 민경대대에는 3개의 대남방송국이 있었는데, 이들은 3가지 임무를 수행했다. 우선 제작된 대남방송을 남쪽에 확성기로 쏘는 역할을 했고, 두 번째는 인근 부대와 마을에 3방송이라 불리는 내부 유선방송을 전송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이런 임무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한국의 대북확성기 방송을 제압하는 일이었다. 한국의 확성기는 출력이 좋아 북한 깊숙한 곳까지 소리가 도달한다. 그래서 북한은 대북확성기 방송에 대응해 대남확성기 방송의 출력을 최대로 높여 방송한다. ‘소리로 소리를 제압한다’는 의도였다. 대남방송국은 정원이 15명 정도였지만, 실제 소속 대원은 늘 정원의 2~3배였다. 방송국에 최고위 간부의 자녀들인 ‘부탁자’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편하게 군복무를 하고 5년 안에 대학을 추천받아 사라졌다. 최전방 민경군인은 대학 입학이나 승진 등에서 일반 제대군인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받는다. 무전병에서 제압방송국으로 옮기는 것은 대대 당위원회에서 결정해야 한다. 주 씨는 3년 동안 장교들과 어울리고 심부름을 다니는 무전병 생활을 십분 활용해 대대장과 대대 정치지도원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2000년에 방송국으로 옮겨갔다. 1년 뒤에는 4명의 대원을 부하로 둔 제압방송조장이라는 보직도 맡게 됐다. 이제 2년만 편하게 지내다가 아버지가 힘을 써줘 군관학교에 가면 됐다.#절망 속에 찾은 길2001년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전보가 날아왔다. 공군 부대에 상급 기관의 집중 검열이 시작됐는데, 부친은 엄청난 강도의 조사를 받고 집에 돌아온 뒤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휴가를 받고 집에 갔다 온 뒤 주 씨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북한에서 조사 중 사망했다는 것은 출신 성분에 노란딱지를 받았다는 의미다. 아버지가 없으면 군관학교의 꿈도 날아갔다는 것을 뜻했다. 북에선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절망에 빠지자 남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엔 나의 새로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는 최전방, 특히 한국과 가장 가까운 기정동에 있으면서 그동안 남쪽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처음 왔을 때 남쪽 자유로에 차가 너무 많아 놀랐다. 북한에선 부대로 오는 군용차를 어쩌다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남쪽엔 차들이 줄지어 다녔다. 정치지도원에게 “저긴 왜 저리 차가 많은가”고 물었더니 “남조선은 서울에서 부산이나 대전 같은 남쪽으로 차를 타고 가려면 대북심리전을 위해 반드시 분계선 앞쪽으로 에돌아가게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계속 남쪽만 감시하는 병사가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맑은 날엔 멀리 북한산과 김포공항에 이착륙하는 비행기도 보였다. 벌거숭이가 된 북한의 산과 나무가 울창한 한국의 산도 인상이 깊었다. 저긴 전기도 풍부하고, 나무도 많고, 차도 많은, 잘 사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 남쪽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기정동엔 온갖 삐라가 수북하게 쌓였다. 삐라를 회수하는 것도 민경 대원의 일과였다. 처음엔 “남조선 괴뢰들이 삐라에 독을 발라 만지면 손이 썩는다”는 거짓말을 믿고 삐라만 봐도 손이 떨렸다. 하지만 나중엔 일부러 찾아보게 됐다. 삐라 내용과 그가 직접 눈으로 건네다 보는 한국의 실상은 일치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게 된 그는 오랜 고민 끝에 남쪽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적절한 날짜를 2002년 2월 19일로 잡았다. 2월 16일은 김정일 생일로 3일 동안 비상근무 체제에 돌입하게 된다. 비상근무가 풀리는 날인 19일은 그동안의 긴장이 풀어져 초소 장교들이 술도 마시고 일찍 잠에 든다는 것을 감안했다. 그는 이날을 위해 술과 기름진 음식을 잔뜩 준비했다. 방송조장이 한 턱 낸다는 말에 간부들은 별 의심 없이 기뻐하며 마음껏 술과 음식을 먹고 곧 잠에 골아 떨어졌다. 그의 계산대로 된 것이다. 그는 남쪽을 향해 자신의 운명을 내던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운명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민경 출신의 국회 몸싸움 2002년 6월 그는 하나원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다. 막상 와보니 ‘삐라에 속았다’는 생각에 ‘멘붕’에 빠졌다. 삐라 속에서 봤던 엄청난 포상금과 자유로운 삶은 존재하지 않았다. 군 귀순자이니 직업은 줄 거라는 기대도 산산이 부셔졌다. 중국을 거쳐 오며 어느 정도 사회를 알고 오는 다른 탈북민과는 달리 주 씨는 16세에 입대해 군에만 있다가 전혀 문화가 다른 곳에서 사회생활이란 것을 처음 하게 돼 충격은 더욱 컸다. 먹고 살기 위해 직업도 스스로 찾아야 했다. 하나원을 나온 다음 달 집 주변 주유소에서 일자리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일자리를 구했더니 ‘조선족이냐’고 물었다. 탈북자라고 하자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주유소 알바 자리도 얻지 못했을 때 너무나 절망했어요.” 그가 벼룩시장을 보고 찾은 첫 알바는 모텔 청소부였다. 그는 모텔이 뭔지도 몰랐다. 며칠 동안 일하다보니 너무 비참한 느낌이 들어 스스로 그만두었다. “북한 동료들이 제가 남쪽에서 남의 잠자리 뒷정리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비웃겠어요. 내가 이러려고 왔나 싶은 생각이 들어 그 일은 절대 못하겠더라고요.” 여름이라 집 주변 수락산 정상에 물병을 메고 올라가 판매하는 일도 했다. 믿을 것이라곤 체력밖에 없으니 동네마트에서 물을 사 산에 올라 팔아서 차익을 남겼다.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9월에야 서울 종로의 한 일식집에서 알바자리를 얻었다. 배달을 하고 주방과 테이블을 청소하는 이 직업은 꽤 오래 버틸만했다. 청소를 하면서 이곳에서 성공하려면 대학을 졸업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탈북민 특례입학제도 덕분에 그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는 입학했다. 하지만 그동안 공부와 담을 쌓고 온 그가 영어와 수학 등을 따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지만 첫 학기에 학사경고를 받았다. 탈북민의 학비는 정부에서 주지만 학사경고를 받으면 학비 지원이 끊긴다. 그는 방학에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알바를 했다. 알바 자리 하나로 돈을 벌 수 없어 밤잠도 자지 않고 2~3개 알바를 동시에 했다. 겨우 학비를 마련해 2학기 수업을 들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애쓰는 그를 눈 여겨 보던 일식점 사장이 3번째 학기 등록금 일부를 보태주면서, 이번에도 학사경고를 받으면 일본에 가서 식당을 하게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너무 고마웠다. 그러나 학사경고를 더 이상 받지 않아 대학에 다닐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대학 4년을 단 한 학기도 휴학하지 않고 마쳤다. 통일부 공무원이 “대학에 입학해 휴학 없이 졸업한 탈북민은 당신이 처음”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2007년 대학을 졸업한 뒤 외국을 경험하고 싶었던 그는 보증금을 빼 캐나다 토론토에 가서 6개월 동안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왔다. 한국에 오니 마침 총선 시즌이었다. 한나라당 모 의원실에서 보좌관으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왔다. 대학에서 배운 정치외교학을 드디어 쓸 수 있다는 생각에 국회로 갔다. 어느 날 국회 예산심의를 둘러싸고 여야 간 격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한나라당 지도부는 보좌진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군 출신 보좌관은 앞으로 나오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주 씨는 머뭇거렸다. 군 출신은 맞는데 북한군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모 당직자가 “그럼 어때, 무려 특수부대 출신이구만”하며 좋아하더니 열심히 싸우라며 그를 앞장세웠다. 북한군 민경부대 실력을 발휘하는가 싶었지만, 하루 만에 대치 상태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보좌하는 의원이 폭행당해 병원에 실려 갔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주 씨는 국회 생활에 회의감을 느꼈다. 이렇게 정치에 소모되기보다는 차라리 법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2009년 그는 연세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휴학 없는 질주는 이어졌다. 대학원 학비를 벌기 위해 중간에 롯데, 금호석유화학, 동양그룹 등 대기업에 입사해 관리팀과 인사팀 등을 거쳤다. 2011년 석사 학위를 따고, 연이어 다시 박사과정에 도전했다. 3년 만인 2014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 33세 박사. 탈북민 최연소 박사라는 기록을 세웠다.#“콘라트 슈만은 되지 않을 겁니다”박사 학위를 땄지만, 꽁꽁 얼어붙은 남북관계 속에 일자리를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2014년부터 그는 시간강사 자리를 전전했다. 외래교수, 초빙교수, 강의전담 등 타이틀은 그럴듯했지만 그래봤자 비정규직 강사에 불과했다. 11개 대학을 전전하며 6년 동안 고생한 끝에 지난해 9월 부산 고신대에서 처음으로 북한과 통일, 남북관계 등을 가르치는 전임교수 자리를 얻었다. 탈북민이 한국 대학에서 전임교수를 하는 것은 모름지기 주 씨가 최초 사례인 듯하다. 최연소 박사, 최연소 탈북민 전임교수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지만 그의 한국생활 19년은 눈물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19년 만에 비로소 눈물 젖은 빵에서 졸업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주 씨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경영학도 배우고 싶었다. 2018년 모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마친 뒤 지금 또 서울 소재 한 대학에서 경영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한국에 와 10년 넘게 공부해 박사와 교수가 됐는데 왜 또 이런 도전을 하는지 궁금했다. “통일이 되면 통일학 박사의 쓸모는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북한에서 인적관리와 경영을 아는 전문가들이 필요할 거라고 봅니다. 통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경제적 통합이라고 생각되는데, 언제 통일이 될지 모르니 늘 대비하고 준비해야죠.” 과거 주 씨가 썼던 책이나 글에는 분노와 절망이 흘렀다. 목숨을 걸고 귀순했는데 삐라에서 봤던 것과 전혀 달리 거친 광야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면서 만난 주 씨의 표정은 평온해보였다. 한국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솔직히 과거에 고생도 많이 했고 박탈감도 많이 느끼긴 했지만, 한국에 온 것 자체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보니 한국은 기회의 땅이란 말을 이제야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처음 와서 주유소에서 쫓겨났던 제가 대기업 인사팀에서 채용을 담당했고, 지금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출신 성분에 묶이면 아무리 인재라 해도 위로 올라갈 수 없는 북한과 달리 여기는 출신을 따지지 않는 것 자체가 위대한 사회라는 증거입니다.” 과거 고생 경험을 통해 최근에 한국에 온 탈북민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물었다. “일비희비하지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저처럼 학사경고를 받아가며 시작해 박사까지 됐는데 요즘 한국에 오는 젊은 탈북민들은 재능도 많고 웬만하면 저보다 머리도 좋지 않을까 싶네요. 극복하지 못할 난관은 없다고 믿고 열심히 노력하면 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청년이면 가능한 학문이든, 기술이든 상관없이 대학을 다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100세 인생 시대에 4년을 공부하는 것은 아깝지 않은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오래 전부터 탈북 청년들과 함께 모임도 만들어 친목도 다지며 늘 교류한다. 통일이 내일이라도 불현듯 찾아온다면 준비했던 자들에게 기회가 온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마음속에는 항상 콘라트 슈만이란 이름이 자리 잡고 있다. 1961년 동독에서 장벽을 세울 때 20세 동독군 병사 콘라트 슈만은 철조망을 뛰어넘어 서베를린으로 왔다. 그가 탈출하는 사진은 ‘자유를 향한 도약’이란 제목으로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억유산에 등록되기도 했다. 탈출 사진으로 전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슈만은 베를린에서 영웅이 됐다. 그러나 독일이 통일된 이후인 1998년 57세라는 젊은 나이에 목을 매 자살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그는 동독에 가 가족과 만났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를 배신자라고 외면했다. 슈만은 가족의 냉대를 받고 우울증에 빠졌다. 자유를 향한 도약의 끝은 37년 뒤 자살로 마무리됐다. 인터뷰 말미에 주 씨는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저는 절대 콘라트 슈만은 되지 않을 겁니다. 통일이 준 선물이 비극이 된 사람이 아닌, 통일을 선물처럼 만들어가는 가치 있는 삶을 만들어나갈 겁니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 2021-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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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포 핵무기 저장기지 최초 공개[주성하의 서울과 평양사이]

    약 1년 전 개봉된 영화 ‘백두산’에서는 특전사 조인창(하정우) 대위가 특수임무를 받고 북한에 침투해 지하에 숨겨놓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서 핵탄두를 분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ICBM과 핵탄두 개발 성공을 이미 오래전에 발표한 김정은도 영화처럼 어딘가에 이런 ‘최후의 무기’들을 숨겨두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장소가 어딘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김정은이 최근 몇 년 사이 ‘최후의 병기창’인 핵탄두 저장고를 자강도 만포시에 비밀리에 만들었다는 정보가 얼마 전 입수됐다. 지금까지 북한 핵문제를 말할 때 평안북도 영변의 핵시설이 언론에 단골로 등장했지만 만포가 언급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북한 핵무기 개발의 양대 거점은 황해북도 평산 우라늄정련공장, 평안북도 영변 우라늄농축시설이다. 여기에 더해 자강도 만포 핵탄두 저장고까지 포함하면 핵무기 제작 및 보관의 3대 축이 완성되게 된다. 요약하면 북한의 핵무기 생산 시스템은 평산에서 우라늄 정광을 캐서 현지에서 정련한 뒤 영변에 싣고 와 농축시켜 핵탄두를 만들고 이 탄두를 만포에 싣고 가서 보관하는 것이다. 세 지역은 철길로 연결돼 있다. 순서대로 나열하면 평산군 청수리에 위치한 ‘남천화학단지’에서는 인근 광산에서 캔 우라늄 광석을 정제해 ‘옐로케이크’라고 불리는 1차 원료를 만든다. 이것을 영변에 싣고 가 원심분리기로 고농축시켜 핵무기 제조용 우라늄을 생산한다. 그런데 소식통에 따르면 몇 년 전부터 평산과 영변 단지의 운영은 사실상 중단됐다고 한다.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공장 중 하나가 있는 평산군 청수리는 과거엔 정전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날이 비일비재하기 시작했다. 이는 우라늄을 필요한 만큼 다 생산해 평산 우라늄정련공장은 자기 역할을 끝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위성사진으로 확인해 봐도 청수리엔 최근 정전에 대비해 태양광발전 패널을 단 집들이 크게 늘었다. 영변 핵 단지와 그에 포함된 인근 분강지구 역시 현재는 거의 가동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2018년 베트남 하노이 북-미 회담에서 김정은이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이미 영변의 용도도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북한은 핵탄두 몇십 개만 보유하고 있어도 전략적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다.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으며 영변 핵시설을 끊임없이 가동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북한이 이미 만든 핵무기를 어디에 숨겼을까 하는 것이다. 김정은도 숨겨둘 곳을 엄청 고심해 정했을 것이고, 선택된 지역이 바로 자강도 만포라고 한다. 김정은은 북방의 외진 지역인 만포를 2017년 12월에 방문했고, 이듬해 6월에도 또 방문했다. 핵무기 저장고 건설과 관련된 시찰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왜 만포를 선택했을까. 만포는 압록강 옆 국경도시이다. 이곳 산 아래 깊숙한 곳에 저장고를 건설해 입구를 중국 쪽 산비탈로 빼면 타격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미사일을 쏘면 산이 막아서고, 중국 영공에 들어가지 않고선 공습도 어렵다. 특히 만포엔 아연광산이 많은데, 이는 이곳이 지질학적으로 단단하다는 뜻이다. 또 만포는 평양과 직통 철도로 연결돼 있다. 전쟁이 터지면 김정은은 빠르게 만포로 달아날 수 있지만, 공격자의 입장에선 제일 마지막에 함락할 수밖에 없는 도시가 만포다. 이는 김정은의 처지에서 볼 때 최악의 경우 마지막까지 핵무기를 껴안고 흔들며 협박을 할 수 있는 최후의 지역이 만포라는 의미다. 물론 만포가 국경도시라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하루아침에 핵무기를 탈취해 갈 수 있다는 위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이 핵을 가진 북한을 방패로 끼고 있어야 할 이유가 더 크기 때문에 김정은은 그런 위험은 감수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이 만포뿐만 아니라 백두산 아래에도 몇 개 더 숨겨놨을 수도 있지만, 유사시 그곳까지 갈 이동수단이 마땅치 않다. 김정은이 핵탄두를 만포에 숨겼다는 증언이 나온 이상 앞으로 국제사회는 이곳을 집중적으로 주시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미국도 이미 용도 폐기됐다는 영변 핵시설이나 평산 핵시설에 현혹되지 말고 만포의 숨겨진 핵탄두 저장고까지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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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양 거물 환전상이 처형된 배경[주성하의 서울과 평양사이]

    김정은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꽁꽁 닫았던 빗장을 마침내 풀 결심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내년 1월부터 방역이 가능한 물자에 한해 수입을 허용한다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한다.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이 지시에 “수출도 못하는데, 무슨 돈으로 수입을 하냐”며 냉소적 반응을 보이는 현장 간부도 많다고 한다. 북-중 무역통계에 따르면 10월 북-중 무역 규모는 166만 달러(약 18억4000만 원)에 그쳤다. 작년 동기 대비 99.4% 줄어든 규모다. 대중 수출액은 10월에 140만 달러(약 15억5000만 원)에 불과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중국 당국은 도와주지 않고 있다. 또 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9월 중순 북한에 달러와 위안화를 싣고 들어가던 현금 수송 차량을 중국 정부가 압류했다. 대북제재로 정상적인 금융망을 이용할 수 없는 북한은 올해 4월부터 해외에서 벌어들인 외화를 차로 운반했다. 단둥(丹東)영사관에 외화를 모았다가 어느 정도 쌓이면 평양에 싣고 갔는데, 중국이 대북제재 위반을 핑계로 차량을 뺏은 것이다. 각종 건설공사를 많이 벌여놓았는데 외화는 벌지 못하고, 그나마 몰래 들여가던 외화 수송 통로까지 끊긴 셈이다. 급속히 주머니가 말라가는 김정은은 올해 들어 내부 자금을 털어낼 각종 꼼수를 계속 ‘발명’했다. 대표적인 예가 4월에 무역회사들이 중국에서 밀수해 온 콩기름 등을 방역지침 위반이라며 빼앗은 뒤 가담자들을 엄벌에 처한 조치다. 이후 압수 물자를 평양 시민들에게 팔아 수백만 달러를 챙겼다. 8월엔 북한에서 가장 큰 비리의 온상이던 신의주 세관 검사들을 전원 체포해 그들이 숨겨둔 막대한 비자금을 모두 빼앗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방법만으로는 필요한 자금 확보가 어렵게 되자 다시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10월 중순부터 외화를 취급하는 이른바 ‘외화봉사단위’들에 입금을 무조건 북한 화폐로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코로나 방역을 구실로 올해 북한 당국은 각 무역기관들이 진행하던 수입을 사실상 정부가 독점했다. 들여온 수입 상품은 지방 상업망들에 분배해 팔았다. 북한 주민이 북한 돈보다는 달러와 위안화를 더 많이 쓴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지방 상업망에서도 위안화와 달러를 받고 물건을 팔았다. 그런데 10월 지시로 상품 판매 대금은 외화가 아닌 당국이 정한 환율에 따라 북한 화폐로 내야 한다. 국정 환율은 1위안이 700원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10월 북한 암시장에서 외화 환율은 1위안이 약 1200원, 1달러가 약 8200원이다. 이전까진 당국이 1200원에 팔라며 준 상품을 팔면 암시장 환율에 기초해 1위안을 직접 당국에 내면 됐다. 하지만 이제는 1위안을 은행에 가서 바꾸어 북한 돈으로 내야 하는데, 은행에선 700원만 준다. 1200원을 바치려면 1.7위안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졸지에 상납금이 1.7배나 오른 셈이다.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상업기관들은 국영은행에서만 돈을 바꾸라는 지시를 어기고 몰래 암시장을 찾았다. 은행에 가면 1위안을 북한 돈 700원으로 쳐주지만 환전상은 1200원으로 바꿔주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이 이를 묵과할 리가 없다. 결국 평양의 거물 환전상이 본보기로 처형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상업기관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물건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게 됐다. 10월까지 1200원에 팔던 상품을 지금은 2000원 이상으로 인상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국경 폐쇄로 수입을 제대로 못하는 데다 당국까지 수입을 독점한 뒤 환율로 장난을 치자 김정은 집권 이후 그런대로 유지되던 시장은 급속히 망가지고 있다. 당국의 강력한 북한 돈 사용 정책 및 암시장 단속 때문에 요즘 암시장 외화 환율은 1위안이 1200원에서 800원대로, 1달러가 8200원에서 6000원대로 떨어졌다. 여기에 국경 봉쇄까지 겹쳐 200원짜리 가스라이터가 2000원으로 상승하는 등 대다수 공업품 가격은 올 초에 비해 10배가량 상승했다. 이로 인해 죽어나는 것은 결국 주민들뿐이다. 요즘 북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식량은 어쩔 수 없이 구매하지만 공업품은 거의 사지 않는다. 결국 김정은의 말라가는 외화주머니가 시장 파탄과 민생경제 파탄으로 전이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내년에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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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총 5정 팔아 한국行…22호 정치범수용소 경비병[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북한군 군용트럭 한 대가 칠흑 같은 새벽어둠을 뚫고 두만강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 강가에 도착한 트럭 운전석에서 완전 군장을 군인이 뛰어내렸다. 하사 계급장을 단 그는 탄창 하나에 30발이 들어가는 AK47 자동소총을 메고, 탄창 3개를 허리에 둘렀다. 어깨에 멘 배낭 안에는 장전한 군용 권총 6정과 탄창이 들어 있었다. 그는 강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실수였다. 평소 허리 정도밖에 오지 않던 강물이라 눈여겨 두었던 곳인데, 장마가 갓 끝난 때라 물이 불어 있었다. 물살에 갑자기 몸이 휘감겨 말려 들어갔다. 의식이 아득해지는 순간 소총을 버리고 탄창도 풀어 던졌다. 허우적거리다 배낭만 쥐고 물살을 헤치고 겨우 뭍에 도착했다. 아차 싶었다. 중국이 아니라 북한 땅이었다. 강기슭에서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통곡했다. “나는 왜 고향과 가족, 미래를 버리고 이렇게 도망자 신세가 됐나요.” 40분쯤 지났을 때 멀리 추격해오는 트럭들의 불빛이 보였다. 방금 죽을 뻔 하다가 겨우 빠져나온 강물에 또 들어가긴 싫었다. “여기서 싸우다 죽자”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중무장한 군인들과 권총 몇 자루를 들고 저항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는 배낭에서 비상식량으로 챙겨두었던 쌀과 증거로 갖고 챙겨온 사진묶음 등을 모두 꺼내 강물에 버렸다. 군복도 버리고 신발도 벗었다. 팬티만 입고 권총 6정과 탄창이 든 배낭을 들고 다시 강물에 뛰어들었다. 추격자들이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에 초인적인 힘이 솟구쳤다. 이번엔 다행히 중국 땅에 도착했다. 도로를 건너 산비탈에 붙어서 뒤를 돌아봤다. 수백 개의 전짓불과 소란스럽게 짖어대는 군견들이 건너편 두만강 기슭을 훑어대며 수색하고 있었다. 1994년 9월 18일 함북 회령에 위치한 22호 관리소(정치범수용소) 경비대 하사 안명철 씨(당시 25세)에게 일어난 일이다.# 수용소에서의 탈출추격의 불빛을 뒤로 하고 산을 오르며 안 씨는 몇 시간 사이 일어난 일을 되짚어봤다. 9월 17일 토요일 늦은 저녁. 함께 근무하던 근무조 장교들이 주말이라며 신이나 퇴근하자 안 씨는 몰래 내무반을 빠져 나왔다. 며칠동안 세운 탈북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경비대 소속 트럭 운전수였던 그는 우선 자기가 몰던 차만 남기고 나머지 차량의 휘발유관을 모두 잘랐다. 차량 추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평소 안면이 있는 외곽 차단초소 초소장에게 전화를 해 “분대장 생일이라 밖에 나가 술을 가져오려 하니 내가 도착하면 차단봉 올리게 부하들에게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평소 종종 있는 일이라 초소장은 “술을 갖고 올 때 쌀 20㎏을 가져달라”고 요구했다. 무기고에 들어가 총과 권총을 모두 꺼내 차에 실었다. 차에 시동을 거니 새벽 2시경이 됐다. 탈북 할 때 꼭 데리고 가고 싶은 수감자 오누이가 있었다. 최순애라는 이름의 누나는 4살 때, 최희유란 이름의 동생은 2살 때 수용소에 끌려와 자랐다. 강원도 안변에서 태어난 이들은 인민군 소장을 하던 큰아버지가 반동으로 처벌받으면서 온 가족이 22호 수용소로 끌려왔다. 이들은 22년간 수용소에서만 자랐다. 남동생은 안 씨보다 한 살 어렸고, 누나는 한 살 많았다. 수용소 수리반에서 일한 남동생은 평소 안 씨의 자동차 수리를 많이 도와주었다. 안 씨는 탈북을 결심하면서 평소 정이 들었던 이들에게 자유를 찾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 저녁에 “돼지고기를 갖다 줄 테니 차 소리가 들리면 둘 다 숙소 앞 도로에 몰래 나오라”고 일러두었다. 이들은 약속을 지켰다. 오누이를 운전석에 태운 차는 초소를 향해 내달렸다. 초소의 탐조등 불빛이 멀리 보일 때 안 씨는 차를 세웠다. 그리고 권총을 꺼내 하나씩 오누이에게 주며 그때에야 비로소 계획을 말했다. “나는 이제 남조선으로 간다. 너희들은 어차피 여기서 죽어야 하는 목숨이다. 나와 함께 자유를 찾아가자. 일단 트럭 적재함에 올라타고 방수포를 덮고 숨어라. 내가 신호를 할 경우 방아쇠를 당겨라.” 순간 오누이의 눈이 공포로 떨렸다. “저는 무서워서 안가겠습니다.” 약속이나 한 듯이 그들은 총을 트럭 운전석에 내던지더니 차에서 뛰어내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미처 설득할 틈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차를 몰고 초소로 갔다. 초소장의 지시를 받은 듯 한 병사가 나왔다. 그가 차단봉을 올리려는 순간 초소 안에서 전화 받는 듯한 소리와 밖에 나간 병사를 찾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벌써 들켰구나.” 망설일 틈이 없었다. 안 씨는 차를 몰아 차단봉을 그대로 치고 나갔다. 용접한 철제 차단봉이 부러졌다. 그 길로 그는 두만강을 향해 차를 내몰았다. 평소 40분 걸리는 거리를 15분 만에 주파했다. # 권총을 팔아 한국행 산을 하나 넘으니 날이 밝았다. 외진 곳에 농가 두 채가 보였다. 한 집에 뛰어 들어갔다. 조선족 농민 부부는 팬티만 입은 남자가 맨발로 아침에 뛰어들자 깜짝 놀랐다. “조선에서 방금 넘어왔는데 멀리 도망갈 수 있게 도와주시오.” 아내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안 씨가 배낭에서 권총 6정을 차례로 꺼내자 금방 입을 닫았다. 이번엔 남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더니 “권총을 주면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거절할 겨를이 없었다. 옌지(延吉)까지 데리고 가는데 권총 2정을 달라고 했고, 하얼빈(哈爾濱)까지 가는 기차표를 사주고는 추가로 한 정을 달라고 했다. 밥 한 끼 사준 값이라며 다시 권총 한 정을 요구하더니, 담배 한 갑을 사주면서 또다시 권총 한 정을 받아갔다. 안 씨는 한 정만 남은 권총을 허리에 차고 기차에 올랐다. 최악의 경우 자살을 하기 위한 용도였다. 이제 혼자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다. 저쪽 건너편에서 우리말이 들려왔다. 말을 한 노인에게 다가갔다. “조선에서 막 넘어왔는데 도와주십시오. 남조선에 가려 합니다.” 그러자 노인이 “김일성 그 놈은 정치를 어떻게 해서 사람들을 굶어 죽이냐”며 욕을 하기 시작했다. 순간 안 씨는 “수령님을 왜 욕해”라는 소리와 함께 저도 모르게 주먹을 휘둘렀다. 노인이 “이놈. 김일성이 싫어 도망쳐 와선 왜 주먹질이냐”고 소리쳤다. 정신이 든 안 씨가 생각해보니 방금 행동은 자기가 생각해도 황당했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너무 교육을 그렇게 받아서 저도 모르게 주먹이 나갔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쯤 지나자 줄담배를 피우던 노인이 화가 풀렸는지 “그럼 내가 도와주겠네”라고 답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북한과 한국에 모두 친척이 있는 조선족이었고, 북한을 방문했다가 가난한 친척들의 모습에 분노한 경험도 있었다. 하얼빈에 내려 노인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노인은 베이징(北京) 한국영사관에 “권총을 차고 온 조선 군인이 한국에 가고 싶어 한다”고 전화를 걸었다. 영사관에 이미 안 씨의 탈북 소식이 전달돼 있었는지, 영사관 직원은 노인에게 당장 베이징까지 함께 와달라고 부탁했다. 벙어리 흉내를 내며 다시 베이징으로 향했다. 18일 새벽 두만강을 넘고 20일에 하얼빈에 도착해 그 다음 날 새벽 베이징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사흘이었다. 택시기사에게 한국영사관에 가자고 했더니 북한대사관 앞에 내려주었다. 인공기와 김일성 초상화를 보고 질겁한 이들은 다시 택시를 탔다. 이번에는 제대로 한국영사관을 찾았다. 밖으로 나온 영사관 직원은 안 씨가 권총을 차고 있는지를 확인한 뒤 탈북 동기 등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데려갔다. 10월 3일 안 씨는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 탈북 이후 이야기 그의 탈북 스토리는 “북조선 군경 안명철 무장한 채 동북지방 침입. 공안 포위망 뚫고 한국 도주”라고 중국 변방군인 교육자료에 실패담으로 실려 있다. 권총을 5정이나 챙겼던 조선족은 체포돼 3년형을 선고받았다. 안 씨는 나중에 자신이 탈출한 뒤 22호 정치범수용소에서 벌어진 일들을 전해 들었다. 그를 찾기 위한 두만강 수색 과정에서 추격조가 어둠 속에서 오인사격을 해 군인과 수용소 직원 3명이 죽었다. 이때 사망한 사람의 가족은 얼마 뒤 수용소 직원 거주지역에서 나왔고, 나중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를 포함해 몇 명이 안 씨에게 수용소 후일담을 전해주었다. 북한 내에서 수색에 실패한 뒤 22호 수용소 정치부장인 송치선 대좌의 지휘 하에 수용소 보위원과 고참 군인들로 구성된 수색조 150명이 군용트럭 3대를 이용해 옌지까지 들어왔다. 그곳에서 중국 공안 및 변방대와 함께 계속 수색을 이어갔다. 이들은 11월 24일 안 씨가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한 뒤에야 북한으로 돌아갔다. 운전석에서 뛰어내린 최 씨 오누이는 처형됐다. 함께 도주하지 않았다고 정상참작하기보단 이들을 살려두면 경비병 탈출 사실이 수감자들에게 퍼질 것이 두려워서였다. 차단 초소의 초소장은 공개 처형됐다. 술을 가지러 나간다는 전화를 받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소대장은 15호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보위부 상좌인 대대장은 해임돼 군복을 벗었다. 수색조 150명이 옌지를 수색하는 과정에 탈북자 140여 명이 체포돼 북송됐다. 수용소 경비병의 탈북은 그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다. 수용소의 비밀이 외부에 알려져 수령의 권위에 치명타를 안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치범과의 만남 안 씨는 1969년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의 식량을 총괄하는 양정사업소 당비서였고, 어머니는 상업관리소 지도원이었다. 아버지는 머슴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도 전쟁고아 12명을 키운 집에서 태어났다. 북한에서 말하는 소위 ‘핵심계층’ 출신이었다. 홍원과 같은 농촌지역에선 안 씨의 부모처럼 부부가 모두 노동당원인 집안도 드물었다. 1987년 안 씨는 홍원농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군에 갈 때가 되자 집에 보위부 지도원이 찾아왔다. 선발과정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안 씨는 정치범수용소를 지키는 보위부 소속 부대에 입대하게 됐다. 정치범수용소 경비대의 40% 이상은 수용소 관리 보위원 출신 자녀들이다. 20% 정도는 외부 보위원 자녀들이고, 30% 정도는 중앙당 등 고위 간부 자녀들이다. 비밀 유지를 위해 보위부와 고위 간부 출신 자녀들만 선발했다. 안 씨는 출신성분이 좋아 예외적으로 뽑힌 경우였다. 1987년 전국적으로 120명이 정치범수용소 경비대에 입대했다. 이들은 모두 함북 경성 관모봉 아래에 있는 11호 수용소에서 신병교육을 받았다. 안 씨는 지금도 수용소로 들어가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다른 신병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들어가는데 철문 옆 철조망에서 웅 하고 전기가 흐르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군요. 그때 ‘내가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을 지나치자마자 교관이 차에서 ‘이제부터 만날 사람들과 절대 웃거나 말을 걸지 말라. 너희는 계급의 전초선에 서있는 장군님의 전사’라고 교육을 시키더군요. 골짜기를 따라 조금 올라가는데 길옆에 정말 왜소한 사람들이 옷이라고 볼 수 없는 누더기를 걸친 채 트랙터에 돌을 싣는 모습이 보였어요. 남자는 머리를 빡빡 깎고, 여성은 반쯤 깎은 머리에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둘렀더군요. 그런데 어떤 작은 사람이 엄청 큰 돌을 번쩍 들어 적재함에 싣는 겁니다. 우리는 ‘우와’하며 모두 놀라고 신기해했죠. 그러자 교관이 소리쳤죠. ‘저놈들은 너희의 부모들을 학살했던 반동 놈들과 그 자식 놈들이다. 일말의 동정도 가지면 안 된다.’” 6개월의 신병교육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사상교육이었다. 관모봉 11호 수용소는 두 개의 골짜기로 이뤄졌다. 김일성에게 반기를 들었던 ‘항일투사’ 출신들이 사는 집들이 한 골짜기를 따라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었다. 돌로 대충 벽을 쌓은 초가집이었다. 김동규 전 부주석, 허봉학 전 군 총정치국장 등이 11호 수용소에 끌려왔던 대표적 빨치산 출신들이다. 이들은 그나마 투사라는 배경이 있어 보위원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늙어가는 이들은 가끔 보위원들을 향해 “내가 산에서 목숨 내걸고 싸워 만든 나라인데 네 놈들이 내게 그따위로 대하냐”고 소리치기도 했다. 그러면 보위원은 “영감, 좀 조용하시오”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가끔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불러 오라고 하면 유배에서 풀려 잘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부름을 받지 못하면 그냥 산골에서 늙어 죽는 게 일반적이었다. 다른 골짜기엔 진짜 정치범들이 수감됐다. 이들은 일하는 짐승에 다를 바 없었다. 1989년부터 수용소 통폐합 조치가 이뤄지면서 12개였던 수용소가 6개로 줄었는데 관모봉 11호 수용소도 1990년대 초반 사라졌다.# 22호 정치범수용소신병교육을 마친 안 씨는 회령 22호 수용소에 배치됐다. 22호 수용소는 서울 크기의 절반만한 면적에 5만 명이 수감돼 있었다. 탄광 6개에서 석탄 40만t, 5개 지구 19개 농장에선 옥수수 수만t이 각각 생산됐다. 축산 작업반 8개와 식료공장도 있다. 석탄은 김책제철소와 성진제강소에 보내졌고, 돼지고기는 평양으로 올라갔다. 고려호텔 등 북한 고급 호텔과 식당에서 팔리는 ‘감흥로’ 술도 회령에서 정치범들이 만든 것이다. 힘을 쓰는 사람은 탄광에 가고, 노약자들은 주로 농촌에 보냈다. 탄광에 간 사람들에겐 하루 300g의 식량이 배급됐는데, 그것으로 일을 시킬 수 없어 풀을 많이 섞여 먹였다. 정치범들은 결혼을 할 수가 없지만 1년에 10~15명 정도 일을 잘하는 수감자들을 선정해 표창결혼을 시킨다. 연애를 할 수가 없으니 보위원이 찍어준 대로 살아야 한다. 이들은 결혼식을 마치면 1주일 합방을 한 뒤 각자 직장에 보내며, 일을 잘해야 한 달에 한 번 만나게 해준다. 아이가 태어나면 수용소 안에 있는 수감자 자녀용 학교에 보낸다. 정치범 관리에는 보위원 1000여 명과 800명 규모의 경비대대 1개, 기타 가족 감시원 등 2000여 명이 동원됐다.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 사람을 때려죽여도 “보위원에게 반항해 죽였다”고 하면 문제 삼지 않았다. 보위원에게 농락당해 임신한 경우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렸다. 안 씨는 신병 때 분대장이 차량 시동을 거는 쇠막대기로 노인을 때려죽이는 현장을 직접 봤다. 불렀는데 뛰어오지 않고 걸어왔다는 이유였다. 분대장은 자아비판서를 일주일 정도 썼을 뿐 다른 처벌은 받지 않았다. 가끔 공터에 모아놓고 공개처형도 했다. 도주 기도나 기물 파손, 규칙 위반 등이 사유였다. 안 씨는 제대할 때까지 8년 남짓 기간에 20여 건의 공개처형을 목격했다. “저는 입대하자마자 운전기사가 됐어요. 처형 때 주변을 포위하고 지키는 경비대원을 실어 나르느라 많이 목격한 편이죠.” 공개처형을 할 때는 7,8년차 고참들이 총을 쏘는데, 보복이 두려워 모두 상등병(입대 1년차 병사) 옷으로 갈아입었다. “입대 1~3년차 경비병들이 수감자들에게 제일 악독하게 행동합니다. 이때는 몸이 근질거려 제어가 되지도 않고, 태권도 훈련을 한다며 구타하기도 하죠. 그런데 오랫동안 있으며 수감자들과 만나 이야기해보면 어이없이 끌려온 그들에게 동정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고참들은 때리는 자리를 피할 때가 많습니다. 보위원도 동정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고요.” 안 씨는 수용소 근무 내내 차를 몰고 다녀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일 일은 없었다. 안 씨는 7년 동안 복무해 노동당에 입당했고, 좋은 대학에 진학할 자격도 얻었다.# 경비병에서 정치범으로 1994년 4월 부대에 전보가 왔다. 아버지가 사망했으니 집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휴가를 얻은 안 씨가 집에 도착하자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집은 반쯤 무너져 있었고, 어머니는 보위부에 잡혀간 지 이미 한 달이나 됐다고 했다. 12살 여동생이 학교도 가지 못한 채 혼자서 허물어지고 유리창이 다 깨진 집을 지키고 있었다. “아침이 됐는데 갑자기 집안에 돌들이 날아 들어왔어요. 학교 가던 아이들이 ‘반동 놈 집’이라고 소리치며 돌을 던지는 겁니다. 뛰쳐나가려는데 여동생이 ‘오빠, 나가지마’라며 잡아요.” 인터뷰 내내 담담했던 안 씨도 이 대목에선 목소리가 떨렸다. 1994년 고난의 행군이 닥쳐왔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갔고, 간부들은 식량을 빼돌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국가 검열이 내려왔을 때 간부들은 양정사업소 당비서인 부친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했다. 화가 난 부친은 술김에 “쌀이 없는 것이 간부들의 잘못이냐. 나라가 잘못한 거지”라고 말했는데 보위부에 고발이 들어갔다. 보위부 조사를 받으며 억울함을 감추지 못한 부친은 어느 날 양잿물을 마시고 세상과 작별했다. 북한에서 자살은 체제에 불만이 큰 반동이나 하는 짓으로 인식된다. 이번엔 어머니가 보위부에 끌려갔다. 자살 여부를 가린다며 아버지 묘를 3번이나 파고 부검했다. 안 씨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집에서 이틀을 보낸 안 씨는 부대에 복귀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정치범이 돼 15호 관리소(요덕정치범수용소)로 12살 여동생과 함께 끌려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뒤늦게 알았지만 국경경비대에 나갔던 남동생도 수용소에 끌려갔다. 안 씨도 수용소 경비원에서 졸지에 정치범으로 내몰릴 상황이었다. 그런데 천운이었는지 마침 그해 7월 김일성이 사망했다. 100일 애도기간 모든 행정이 중단됐다. 그동안 안 씨는 간부들을 만나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지” “너 안 되겠는데”라는 싸늘한 말뿐이었다. 경비대에 있는 동안 안 씨는 여러 정치범들에게 “왜 왔냐”고 물었다. 대개 “하루아침에 이유도 모르고 갑자기 끌려왔다”는 게 주를 이뤘다. 이제 그의 운명도 비슷한 신세가 될 순간이었다. 하루아침에 정치범으로 낙인 찍혀 죽을 때까지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고민하던 그는 100일 애도기간이 끝나기 한 달 전인 9월 18일 탈북길에 올랐다.# 평생 걸어져야 할 짐 1994년 11월 24일 안 씨는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정치범수용소의 실상을 폭로했다. 수용소 경비병의 탈북은 최초라 많은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일부 언론의 시선이었다. “지금까지 했던 정치범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은 피해자이기 때문에 하나를 당하면 열을 당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신은 가해자다. 가해자가 어떻게 피해자보다 더 끔찍한 고발을 할 수 있느냐. 안기부 지시를 받은 것이냐.” 가해자의 프레임은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입을 닫았다. 조용히 숨어버렸다. 2009년까지 15년 동안 한 은행에 취직해 과장까지 승진했다. ‘정치범수용소해체운동본부’ 등의 북한 인권단체가 만들어졌을 때도 그는 후원자로만 남았다. 은행에서 희망퇴직을 한 뒤 자영업을 하면서도 조용히 살려고 애썼다. 그런데 수용소 관련 단체에서 힘들다며 연락해왔다. 가보니 직원도 없고, 사무실도 없고, 대표를 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2013년 그는 단체 대표를 떠맡게 됐고, 단체 이름도 ‘엔케이워치’로 바꾸었다. 2016년 김정은을 반인도범죄로 유엔에 제소한 것도 그의 단체다. 이는 2019년 ‘관할권 없음’이라고 결론이 났다. 요즘 그의 단체는 북한에서 일어난 실종, 구금, 고문, 여성차별, 장애인, 아동, 해외노동 등 7개 분야의 조사를 해 유엔에 남기는 것을 핵심 운영목표로 삼고 있다. 실제로 엔케이워치가 작성한 800여 개의 조사 기록들이 현재 유엔에 등록돼 있다. “2012년 유엔에서 증언을 해달라고 해서 제네바에 갔어요. 그런데 한 유엔 관료가 ‘당신들은 계속 당했다고 하는데 공식적인 증언 자료는 왜 없냐’고 묻더군요. 생각해보니 우리는 말로만 외쳤지 유엔의 기준에 맞춰 문서화를 만드는 것을 못했어요. 그때부터 유엔 기록화 사업에 포커스를 맞추자고 생각했습니다.” 내년 1월 유엔 홈페이지에는 정치범수용소 해체를 위한 대표적 비영리단체(NGO)로 안 씨의 엔케이워치가 등록될 예정이다. 안 씨의 자세한 경력도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그의 마음에는 늘 무거운 돌이 자리 잡고 있다. 어찌됐든 그는 북한에서 정치범들을 관리하던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수용소 경비병이었다는 이유로 같은 탈북자들에게 고발도 당했다. “평생 지고 살아야 할 짐이죠. 지금도 악몽을 계속 꿉니다. 정치범수용소 경비병으로 있다가 제대한 뒤 탈북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고 들었어요. 그는 철저히 신분을 숨기고 살고 있죠. 과거가 알려지면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죠. 저도 그래서 오랫동안 입을 닫고 살았던 것이고요. 그러나 제 마음의 양심이 늘 묻습니다. 지금도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네가 뭐든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입니다. 수용소 사람들을 어떻게든 살려야 하지 않겠냐고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저는 가해자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합니다. 제가 지켜봤던 그 억울한 사람들을 세계에 알려서 살리고 싶어서요. 제가 입을 닫으면 누가 그들을 세상에 알립니까. 피해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가해자의 이야기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지금 이 순간도 수용소에서 학대를 저지르고 있는 보위원과 경비대 군인들에게 ‘세상이 바뀌면 꼭 처벌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김정은 등 가해자들이 법의 처벌을 받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신은 믿지 않는데, 혼자 자주 생각해요. 우연히 정치범수용소 경비병으로 발탁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영화 같은 탈출을 통해 나를 한국까지 오게 만든 힘은 무엇일까. 수용소 경비병으로 갔는데, 어머니와 두 동생이 정치범수용소에서 끌려가 숨을 거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한국에 와서 다 잊고 살고 싶은데 왜 수용소를 고발하는 일로 끝내 들어서게 된 것일까. ‘왜 나일까. 왜 내가 이런 무거운 짐을 걸머져야 할까’고 말입니다.” 인터뷰 내내 그가 벗어던질 수 없는 무거운 돌덩이를 홀로 품고 사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를 짓누르는 건 자신이 인생의 한 순간에 ‘가해자’의 편에 서 있었다는 죄책감이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를 위로했다. “너무 괴로워 마세요. 7년을 가해자로 살았다 하지만 누굴 죽이진 않았잖아요. 그러나 아버지가 자살하고 어머니와 남동생, 12살이던 어린 여동생이 수용소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아픔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대표님은 북한 정권이 만든 가장 참혹한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그 순간 늘 무덤덤한 표정이던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보았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 2020-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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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깡 스낵 5종 연매출 1000억 돌파

    농심이 가수 비의 ‘깡 열풍’과 더불어 깡 스낵 연간 누적 매출 1000억 원의 신기록을 세웠다. 올해 새우깡은 스낵 시장에서 가장 핫한 제품이었다. 깡 열풍을 타고 전국을 뒤덮었던 새우깡의 인기는 농심의 깡 스낵 4종으로 번졌다. 여기에 최근 농심이 선보인 ‘옥수수깡’이 품절대란을 일으키며 깡 열풍에 한 번 더 불을 지폈다. 이처럼 뜨거웠던 깡 스낵의 인기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냈다. 농심은 깡 스낵 5종의 연간 누적 매출액이 1000억 원을 돌파했다고 16일 밝혔다. 이는 1970년대 깡 스낵이 출시된 이래로 최초다. 일등공신은 단연 깡 열풍을 이끌었던 대표 제품 ‘새우깡’이다. 새우깡은 전년 대비 약 12% 성장해 12월 초까지 매출 810억 원을 달성했다. 새우깡의 성장은 트렌드에 발맞춘 커뮤니케이션 활동이 주효했다. 5월 가수 비의 ‘깡 열풍’과 함께 새우깡이 ‘밈(meme)’의 대상으로 등극하자, 농심은 비를 광고 모델로 섭외하며 깡 열풍에 합류했다. 특히 농심은 하나의 놀이문화로 자리 잡은 깡 이슈를 활용해 소비자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대국민 챌린지를 개최하고, 선정작과 비가 함께하는 광고를 선보였다. 또 젊은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패키지 디자인을 적용하는 브랜드 리뉴얼 활동도 펼쳤다. 새우깡이 전국적으로 이슈가 되면서, 소비자의 사랑은 감자깡과 양파깡, 고구마깡 등 다른 깡 스낵으로 번졌다. 이에 7월에는 깡 스낵 4종의 한 달 매출액이 최초로 100억 원을 돌파하는 신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농심은 연말까지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감자깡은 전년 대비 20%, 고구마깡은 39%, 양파깡은 70%로 큰 폭의 성장세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10월 출시된 신제품 옥수수깡은 입소문을 타고 소비자의 호기심을 자극해 품절 대란과 함께 희귀 아이템으로 이름을 올렸다. 인스타그램에서 소비자들은 “마트 몇 군데를 돌아다닌 끝에 겨우 찾았다” “먹는 걸 멈출 수 없다” “한 봉지만 사온 걸 후회했다” “박스째로 샀다”며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농심 관계자는 “오랜 기간 농심을 대표해왔던 장수 스낵 제품들이 다시금 큰 사랑을 받아 감사하다. 더 많은 소비자가 농심 깡 스낵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다양한 이벤트와 마케팅 활동을 펼치겠다”고 말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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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명 높은 아오지서 제주로 탈북한 화가 “탱화를 그리는 이유…”[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1982년 한반도 북단의 함경북도 은덕군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은덕은 악명 높은 아오지탄광이 있는 곳이다. 북한은 1977년 “김일성의 은덕으로 나날이 변모해가는 고장”이란 뜻으로 아오지의 원지명인 경흥을 은덕으로 바꾸었다가, 창피함을 알았는지 2005년에 경흥군으로 환원시켰다. 가난한 탄광 노동자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세 살 때부터 연필만 쥐어주면 그림을 그렸다. 유치원에 보내도, 인민학교에 보내도 공부보다는 그림을 그리는데 몰두했다. 남의 집에 가서 당시 유행하는 만화영화를 보고 온 날이면 공책 하나가 방금 본 만화 그림으로 금방 가득 채워졌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그는 미술소조에 다녔다. 그때면 종종 두만강 옆에 나가 수채화로 강변 풍경을 그렸다. 그는 1998년 중학교 졸업사진을 찍기 하루 전에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탈북했다. 중국에서도 그림을 그렸고 미술학원 선생까지 했다. 2016년 그는 마침내 한국에 왔다. 한반도 북쪽 끝에서 태어나 지금은 남쪽 끝인 제주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탈북화가 김정운 씨(38)의 일생은 이렇게 그림으로 요약된다.# 탈북 정운 씨의 집안은 대대로 두만강과 떼어놓고 살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중국에 넘어갔다. 그러나 고향을 멀리 떠날 수는 없어 두만강 옆 훈춘에 정착했다. 항일운동에도 가담했다고 했지만, 증거가 부족해 북한 당국의 인정은 받지 못했다고 한다. 두만강변에 살았던 북한과 중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유롭게 넘나들며 살았다. 정운 씨의 가족도 그랬다. 정운 씨의 아버지는 학생 때인 1950년대 초반 부모를 따라 다시 강을 넘어와 경흥에 자리 잡았고, 결혼한 고모들은 훈춘에 살았다. 그러나 1962년 ‘조·중 국경조약’이 체결되면서 이들 형제는 자연스럽게 북한 국적과 중국 국적으로 갈라지게 됐다. 그것이 나중에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지 당시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오히려 그때는 북한의 경제력이 좀 더 나을 때라 중국 사람이 된 이들은 북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두만강에 경비대도 생겨났고, 도강도 통제하기 시작했다. 경흥에서 자란 정운 씨의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탄광에서 일하게 됐고, 회령 처녀와 결혼해 자녀를 두었다. 북한과 중국의 격차는 1980년대부터 눈에 띄게 달라지더니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극에 달했다. 건너편 훈춘에선 개가 쌀밥을 물고 다녔지만, 이쪽 강변 사람들은 무리로 굶어죽었다. 특히 탄광마을인 아오지에서는 고난의 행군 때 굶어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정운 씨도 학교 친구들이 굶어죽고, 장마당에서 시신이 뒹구는 모습을 생생히 기억했다. 참다못한 정운 씨 가족은 다시 두만강을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건너편에 고모들도 살고 있어 중국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보다는 조건도 좋았다. 게다가 정운 씨의 아버지는 북한에 와서 환멸을 느낄 대로 느낀 상황이었다. 정식 의대를 졸업하지는 않았지만 동의학의 침술에 빠져 오랫동안 독학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침을 놔주던 부친은 1990년대 초반 안전부에 체포됐다. 불법 의료를 했다는 이유였다.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1년 반이나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정운 씨는 아직도 아버지가 석방돼 나올 당시의 참혹한 광경을 잊지 못한다. “뼈만 남아 돌아오셨더군요. 온갖 피부병 때문에 몸에서는 진물이 흐르고….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집안이 감시를 받았어요.” 이런 환경에서 탈북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정운 씨의 아버지는 자리를 잡고 가족을 부르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먼저 누나를 데리고 두만강을 넘었다. 1998년 봄. 내일이면 중학교 졸업사진을 찍는다며 설레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오늘밤 아버지와 누나가 있는 데로 간다”며 옷을 입혔다. 정운 씨는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어둠을 틈타 강을 넘었다. # 미술학원 선생님훈춘에는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국경 옆에는 탈북자들을 잡으려는 공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정운 씨 가족은 고모들의 도움을 받아 헤이룽장(黑龍江) 성 무단장(牡丹江) 시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가족은 주변 농촌마을을 돌면서 닥치는 대로 일하며 살았다. 정운 씨는 “이웃들의 눈이 무서워 1년에도 두세 번씩 이사를 다녔다”고 회상했다. 16세 정운 씨도 가족을 위해 뭔가 하고 싶었지만, 중국말을 전혀 모르는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처음 2년은 동네 꼬마대장 노릇을 하면서 중국어를 배웠다. 그리고 18세 때부터 각종 알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그림은 힘들고 두려운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도피처였다. 2001년 운명처럼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그림 솜씨를 눈여겨본 아르바이트 회사 사장이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친구에게 그를 소개시켜 준 것이다. 정운 씨는 학원원장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저는 조선에서 왔습니다. 그림을 배우고 싶지만 돈이 없습니다. 학원비는 돈을 벌어 내면 안 되겠습니까.” 원장은 그에게 그림을 그려보라 한 뒤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운 씨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원에서 그림을 배웠다. 1년쯤 지나니 원장은 그에게 학원 키를 맡겼다. 학생들이 돌아가면 학원을 청소하는 일이 그의 몫이었다. 그가 다닌 학원은 방학 시즌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200명 가까운 학생들이 방학 두 달 동안 그림을 배우려 다녔다. 학원에 학생들이 넘쳐나면 정운 씨도 원장을 도와 학생들에게 그림의 기초를 가르쳐줬다. 1년 반이 지난 2003년 어느 날 원장이 그를 불렀다. “밖에서 버는 만큼 돈을 줄 테니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 어때.” 정운 씨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때부터 그는 연변 출신의 강사로 신분을 속이고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시간이 지나자 원장은 그에게 학원 관리까지 맡기기 시작했다. 나중엔 원장이 할 일의 약 80%를 그가 챙겼다. 일이 늘었는데도 월급을 올려줄 기미가 없자 그는 2004년 말 산둥(山東) 성 웨이하이(威海) 시의 딴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몇 달 뒤 학원 원장은 그를 찾아와 “월급을 올려줄 테니 다시 돌아오라”고 사정했다. 그렇게 인연을 이어간 학원에서 그는 2007년 후반까지 일했다.# 한국 입국2007년 후반 또다시 그의 인생을 뒤흔든 일이 생겼다. 우연한 기회에 산둥 성 칭다오(靑島)에서 그림 사업을 하는 한국인을 만난 것이다. 그가 만난 첫 한국인이었다. 무단장에 놀러왔던 그는 그림을 잘 그리는 청년이 있다는 소개를 받고 정운 씨를 만났다. 그는 정운 씨의 그림을 본 뒤 칭다오의 자기 회사에 오면 한국식 그림기법을 가르쳐주고, 대우도 더 많이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망설임 없이 정운 씨는 다니던 학원에 작별인사를 하고 칭다오로 옮겨갔다. 새로운 스승 밑에서 정운 씨는 탱화(불화) 그리는 법을 배웠다. 칭다오는 한국에서 멀지 않은 도시이고, 한국 사람도 많이 살았다. 이곳에서 정운 씨는 한국TV와 출판물을 실컷 봤다. 한국에 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부모와 누나 생각에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회사에서 먹고 자며 신변 불안에 대한 걱정이 사라진 상태에서 또 한 번 모험을 시도하는 것도 두려웠다. 정운 씨는 2011년, 3살 연하의 중국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했다. 그녀 역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아들도 하나 생겼다. 학원 선생을 하면서 사두었던 가짜 중국 호적도 칭다오에선 별 탈 없이 통했다. 한국으로 떠나는 모험은 정운 씨의 누나가 먼저 감행했다. 탈북도 누나가 먼저 했고, 한국에도 누나가 먼저 왔다. 한국에 온 누나는 “여기가 너무 좋다”면서 가족을 데려올 작전을 짰다.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구입한 가짜 호적으로 가짜 여권을 만들었다. 그리고 2016년 4월 정운 씨는 부모님과 5세 된 아들과 함께 상하이(上海) 국제공항에서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다. 출국 심사를 받는 동안 정운 씨는 떨리는 감정을 숨기느라 식은땀을 쏟아야 했다. 가짜 여권이 들통 나면 온 가족이 북송돼 고초를 겪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려했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제주도에 도착한 정운 씨 가족은 누나가 알려준 대로 입국 심사를 받기 전 탈북 가족이라고 밝혔다. 이후 가족 모두 제주공항을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 서울행 비행기를 타고 서울의 조사기관으로 가야했다. 이들은 4개월 동안 탈북민 정착 과정을 밟고, 2016년 8월 마침내 사회로 나왔다. 하나원에서 어느 곳에 가서 살고 싶은지를 물었을 때 정운 씨는 주저 없이 제주도를 선택했다. 당시만 해도 제주도에 중국인 여행객이 많아 그동안 익힌 중국어를 활용하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다시 그림을 그리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제주도에 도착한 정운 씨는 이듬해인 2017년 2월, 제주공항 면세점에 취직했다. 처음 왔을 때 제대로 구경조차 못했던 제주공항을 구석구석 다니며 중국인 관광객을 맞이하는 일이었다. 공항에서 일하면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이미 그림은 그에게 살아가는 이유가 됐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탱화도 그렸지만 다른 작품도 그렸다. 2018년 이북5도청에서 주최하는 통일미술대전에 참가해 입상하기도 했다. 백발의 실향민 할아버지가 손녀를 안고 고성통일전망대에서 북한 땅을 쌍안경으로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올해 2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제주공항에선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면세점에서 일하던 정운 씨도 자의 반, 타의 반 사직서를 쓰고 나와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면세점에 취직하면서 3년 동안 돈을 모아 미술 작업실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꾸준하게 실천한 결과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여기에는 가정이 안정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 남았던 아내는 2017년 한국에 왔다. 그해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고, 올해 딸도 얻었다. 그림으로 인연을 맺은 아내는 그에게 든든한 조력자다. 정운 씨가 그림의 디자인과 설계를 하면 아내는 선과 보조색깔을 입힌다. 다만 올해는 아내가 딸을 출산해 정운 씨가 그림 그리기의 모든 과정을 다 맡고 있다. 일감이 많은 것도 아니다. 수입에서 작업실 운영비를 제외하면 남는 것이 거의 없는 수준이다. 입국한 지 4년 밖에 안 된 탈북민이 한국에서 자리를 잡고, 판로를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림에만 집중해 살 수 있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특히 그림을 완성하고 일화(一華)라는 자신의 호를 적어 넣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미래에 대한 불안마저 잊게 될 정도다. “왜 하필 탱화를 그리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탱화 시장은 인공지능과 기계가 대치할 수 없는, 사람의 손이 반드시 가야 하는 그림입니다. 유행도 타지 않고, 세상이 어떻게 달라져도 앞으로도 계속 사람이 그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사라질 분야가 아닙니다.”# 통일의 꿈정운 씨는 북한에서 태어나 16년을 살고, 중국에서 18년 살았으며, 한국에서 4년째 살고 있다. 정체성에 혼란이 일어날 만하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한족들과 살 때는 가끔 우리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한순간도 나는 한민족임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아들들은 저처럼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도록, 완벽하게 한국 남자로 키워 군에 보낼 생각입니다. 요즘처럼 모두들 애를 낳지 않는 때에 제가 셋이나 낳아 키우는 것 자체가 애국이 아닙니까.” 그의 말투는 함북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한국 표준어처럼 들린다. 정작 본인은 “가끔 경상도가 고향이냐는 말은 듣는다”며 머쓱해했다. 아들도 화가로 키울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학교에선 소질이 있다고 하는데 제가 볼 때는 별로”라며 웃었다. 그는 “요즘 아이들은 TV나 휴대전화 게임, 유튜브 등에 영향을 받아서 배우는데 오랫동안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진득하게 오래 앉아 몰두해야 하는 그림과는 전혀 상극인 삶을 살고 있다”며 한숨을 지었다. 정운 씨는 제주도와 어울려 살기 위해 봉사도 열심히 한다. 지난해부터 매주 한 번씩 인근 지역 아동복지센터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지도한다. 지역 탈북민 봉사단체 부회장도 맡아 한 달에 한 번 노인복지센터에 가서 봉사도 한다. 3,4개월에 한 번씩 헌혈도 한다. 그에게 통일이 돼도 제주도에 계속 뿌리내리고 살 것이냐 묻자 단호한 대답이 나왔다.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겁니다. 반드시. 가족들도 다 데리고요.” 지옥 같은 아오지를 벗어나 살기 좋은 제주도에 뿌리를 내린 그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경흥과 인접한 나진, 선봉 지역은 중국과 러시아를 낀 황금의 삼각주입니다. 자녀들에겐 제주도보다는 훨씬 더 큰 기회의 땅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바다도 끼고 있고요. 하하하.” 정운 씨 가족의 유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터뷰를 마치며 제주도 못지않게 푸르고 깨끗한 나진 바다에서 그와 함께 낚시를 하게 될 날이 올지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 20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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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과 이성이 사라진 북한의 코로나 대책[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북한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대책이 갈수록 이상해지고 있다. 겨울철을 맞아 방역 단계가 초특급으로 격상된 뒤 각종 비상식적인 조치들이 남발되고 있다. 코로나19 환자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학교와 상점, 음식점 등 대중 집합시설의 영업을 중단시켰고, 건물 구석구석을 매일 수차례 소독하라고 독려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국가정보원이 밝힌 것처럼 초특급 단계 이전에도 바닷물로 전염된다며 어로와 소금 생산을 막고, 중국이 지원한 식량도 받아오지 않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조치들을 남발했다. 승인 없이 이동했다고 사람들을 마구 처형하면서 한편으론 수십만 명이 운집한 열병식과 대회는 강행하고 있다. 이런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대응의 근본 원인은 김정은이라고 할 수 있다. 방역 책임을 물어 숱한 간부들을 함부로 죽이니, 공포에 질린 간부들이 말도 되지 않는 짓거리를 대책이라 내놓고, 그걸 또 김정은이 승인하고 있다. 가뜩이나 외화와 식량, 연료 부족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당혹스러운 지시가 계속 하달된다. “세관과 모든 무역항에 방역시설을 새롭게 건설하라”는 지시가 대표적이다. 방역시설 구축이야 당연한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세부 내용을 들여다보면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북한 소식통은 새 지시에 따라 두 가지 방역시설을 만들어야 한다고 전했다. 하나는 자외선 소독장이고, 다른 하나는 섭씨 80도 이상을 유지하는 보온창고다. 자외선 소독은 코로나 방역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돈도 전기도 없는 상황에서 자외선 소독 램프를 사서 설치해야 하고, 발전기도 따로 구입해서 돌려야 한다. 더 큰 문제는 80도 유지 보온창고이다. 지침에 따르면 모든 수입 물자는 자외선 소독을 마친 뒤 보온창고에서 최소 40시간을 보관해야 한다. 이후 출하창고로 옮겨 14일 동안 방역 결과를 지켜보고 아무 이상이 없다는 확신이 든 다음에야 반입이 가능하다. 일일이 자외선 소독을 하고 80도 온도를 보장하는 창고에 넣었다 뺐다 하기엔 세관이나 항구로 들어오는 물자가 너무 많다. 수천 t만 돼도 초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다. 물동량을 많이 다루는 곳에선 거대한 보온창고를 지어야 하는데, 온도 유지가 제일 어렵다. 목욕탕도 아니고 대형 창고의 온도를 80도로 유지하려면 막대한 양의 석탄도 필요하다. 과일이나 식료품 등도 예외 없이 40시간 동안 80도 창고에 넣었다가 다시 14일 동안 격리 창고에 넣어야 한다. 이렇게 보름가량을 보내면 수입 물품의 상당량이 부패될 가능성이 크다. 애써 들여온 물자를 돈을 들여 썩혀 버리는 셈이다. 천, 비닐 제품 등은 80도에 보관하면 변형이 생긴다. 북한은 겨울에 온실용 비닐 퉁구리를 대거 수입한다. 수천 m나 되는 퉁구리를 모두 풀어서 말끔히 소독하는 데에는 엄청나게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아래에선 이해할 수 없는 지시라고 아우성인데, 위에선 이런 자외선 소독 장치와 보온창고를 짓지 못하면 수입 물자를 다룰 수 없다고 못을 박는다. 또 다른 북한 소식통은 북한 최대 항구인 남포항의 경우 보온창고를 짓는 데 300만 달러가 들고, 작은 항구나 세관에는 100만 달러 정도가 필요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건설비용만 이 정도이고, 운영 및 유지 비용은 견적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현장 간부들은 “특정 항구와 세관을 수입 전용으로 지정해 그곳에만 이런 시설을 지으면 안 되냐”며 불만을 감추지 않지만, 이런 의견은 반영되지 않는다. 고위 간부들 중에 김정은에게 목을 내걸고 말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당의 지시를 무조건 관철하지 않고 자꾸 조건 타발(불평스럽게 투덜거림)로 토를 단다”고 화를 내는 순간 끌려 나가 처형될 수 있다. 자기만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가족까지 다 농촌으로 추방을 보내니, 융통성이 없다고 욕을 먹는 게 낫다는 것이 고위 간부들의 생각이다. 간부들은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충성 과시에 목적을 둔 지시들을 남발하고, 독하게 통제하는 데에만 골몰한다. 죽지 않기 위해서다. 포악한 독재자 밑에선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현재 북한을 보면 통치 시스템이 굴러가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어쩌면 간부들이 목숨을 저당 잡히고 사는 이상한 시스템을 정상인의 눈으로 해석하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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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철학교수, 주체철학과 결별한 뒤 찾은 인생[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평양에 출장을 다녀온다고 집을 나선 남편은 몇 달째 감감 무소식이었다. 사람을 통해 알아보았더니 ‘프룬제 아카데미사건’에 연루돼 조사받는다고 했다. “우리 남편은 정말 고지식하고 착한 사람인데, 죄가 없으니 조사받고 돌아올 거야.” 그러나 몇 달 뒤 남편이 반당반혁명범죄자로 판결됐다는 청천 벽력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아이들도 정치범수용소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아내는 15세, 12세짜리 어린 아들들을 그러안았다. 더는 지체할 틈이 없었다. 연좌제가 적용되는 북한에서 정치범의 아들을 살려둘 리가 없었다. 큰 아들이 말했다. “나는 죽어도 정치범수용소에 가지 않겠어요. 나 도망칠래요.” 순간 아들이 너무 고마웠다. 그런데 어린 둘째는 아버지를 두고 갈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네가 정치범수용소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거야. 살아도, 죽어도 형과 함께 해. 꽃제비로 방랑하며 살더라도 절대 붙잡히면 안돼.” 아이들을 집에서 내보내고 얼마 뒤 보위부가 집에 들이닥쳤다. 어린 손주들에게 “아무래도 너희는 아버지를 따라 수용소에 갈 것 같으니 농사짓는 법을 빨리 배워야 한다”고 말하던 시아버지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1998년 청진의학대학 철학교원 현인애 씨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김일성대 철학부 입학남편이 끌려가기 전까지 현 씨의 삶은 비교적 순탄했다. 그는 1957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6.25전쟁 참전자인 부친은 조선인민군 신문사 기자로 일했는데, 나중엔 장성급인 주필까지 했다. ‘토대’가 좋은 집안의 딸로 태어나 공부까지 잘한 그는 1973년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했다. 수학, 물리 등 자연과학(이공계) 계통에 취미가 있어 물리학부에 가고 싶었지만 이공계는 학제가 1년 더 길었다. 이 때문에 여학생들은 대부분 빨리 졸업하려고 모두 사회과학 쪽으로 진학했다. 현 씨도 같은 이유로 철학부에 들어갔다. 철학부 선택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경제, 어문, 역사 등을 고를 수도 있었지만, 수학과 물리를 가르치는 철학부가 제일 끌렸다. 대학시절은 김정일의 후계자 등극시기와 일치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극하면서 온 나라를 들볶기 시작했다. 이때 처음으로 주생활총화 제도가 나왔고, 문답식학습경연, 항일유격대식 학습방법도 나왔다. 김정일은 1974년 2월 19일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 하기 위한 당사상 사업의 당면한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소위 ‘2.19문헌’을 통해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를 최고 강령을 선포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는 북한 사회의 김일성주의화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주체사상 전파에 앞장서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대학에서 그는 모범생이었다. 김정일의 노작을 달달 외웠고, 학부를 대표하여 문답식 학습경연에 참가해 우승하는데 기여했다. 그는 북한이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와 결별하던 시대에 지배 이데올로기의 변천사를 실제로 체험한 생생한 증인이었다. “1970년대에만 해도 김일성주의는 변증법적 유물론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심화발전이라고 하면서 절반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절반은 주체사상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점점 김일성주의를 강조하더니 1983년에 가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완전히 결별했습니다.” 이때는 출신성분에 따른 차별이 본격화된 시점이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김일성대 옆 부지에 금수산기념궁전을 지으면서 호위국이 김일성대 학생들 출신성분을 다 조사해 안 좋으면 퇴학시켜 지방에 내려 보냈어요. 우리 학급도 처음 입학할 때 30명이었는데, 1976년 판문점 도끼사건을 계기로 남조선 연고자 등을 포함해 8명이 퇴학당했습니다.” 판문점에서 일어난 도끼만행 사건도 평양에 핵심지지 계층만 살게 하는 핑계거리로 이용한 것이다. 현 씨가 김일성대 철학부를 다녔지만, 당시 대학총장이던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본 건 딱 한 번 먼발치에서 행사 때 보고서를 읽는 모습이 전부였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야 황 전 비서를 만났다. 황 전 비서는 그가 김일성대 철학부 출신이고, 북한에서 대학 철학교원으로 일했다는 것을 알고는 반색하며, 자신의 철학 강의를 청강하라고 권했다. 현 씨는 딱 2번만 강의를 듣고 더 이상 가지 않았다. 이미 북한에서 죄 없는 남편을 빼앗아간 북한 체제에 환멸을 느꼈고, 그 사상적 지주인 ‘주체사상’과 결별했기 때문이다. # 대학 철학 교원 현 씨는 6년 학제를 마치고 1979년 12월에 졸업했다. 남들처럼 3대 혁명소조원으로 파견되는 대신 대학교원 양성반에 들어가 추가로 공부했다. 그러나 졸업할 때쯤 아버지가 군복을 벗고 함경북도 청진에 내려갔다. 당시 북한은 장성급이 제대하면 ‘파벌이 생겨 종파주의가 만들어질 여지가 있다’며 평양에 남게 두거나 고향에 보내지 않고 전혀 연고가 없는 지역에 보냈다. 평안북도가 고향이었던 부친도 그런 이유로 청진으로 가야했다. 이 때문에 현 씨는 대학을 졸업하자 함경북도 나진시에 있는 나진해운대학 철학교원으로 발령받아 내려갔다. 다른 동창은 노동당 선전선동부, 노동신문사, 조선중앙통신사 등으로 많이 갔다. “당시 나진해운대학은 전부가 남학생들뿐이었어요. 대학 전체로 여교원도 김일성대를 졸업하고 내려온 셋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처녀 교원의 인기가 엄청 컸죠.” 현 씨는 이곳에서 10년을 일했다. 그때 결혼을 했고, 두 아들이 생겼다. 1989년 청진으로 이동하는 남편을 따라 청진의학대학 철학교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 체제에 대한 크게 불만을 가지진 않았어요. 물론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었고요. 간부였던 남편이 ‘당에서 말하는 인간 개조는 불가능해. 당신부터도 10년 넘게 개조되지 않잖아’ 이렇게 말하면 저도 ‘그래요. 당신도 개조 안 되는 거 보면 그런 것 같아요’라며 맞장구도 쳤죠. 한국에 와보니 부부가 화목하게 살려면 서로를 개조하려 들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보고 그때가 생각났죠. 저는 여기 문화와 반대되는 사회에서 살았던 거죠.” 그러나 대학에선 다른 이야기를 해야 했다. “대학에 제대군인 청년들이 많아서 여교원인 저에게 짓궂게 말할 때가 많았어요. 가령 ‘선생님, 새 물건이 나오면 먼저 가지려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고, 욕심이 생기는 법인데 어떻게 능력과 수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공산주의가 가능 합니까’라고 묻는 식이죠. 그때면 ‘공산주의 사회에 가면 사람들이 공산주의적 인간이 돼 서로 새 물건 먼저 가지려 싸우지 않는다’는 식으로 대답했죠.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말이죠.” 체제에 더욱 의문이 든 것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던 동유럽이 붕괴되고 북한도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을 때였다. 이론이 잘못된 것인지 실천이 잘못된 것인지 정말 궁금했다. 그 와중에도 권력자들은 잘 살고, 가난한 사람들부터 죽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평등사상에 의문부호가 붙기 시작했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제자가 있어요. 저를 찾아와 ‘왜 우리 사회는 개혁 개방을 하지 않느냐’는 등 위험한 질문들을 쏟아냈어요. ‘어디 가서 말하지 말고 혼자 생각하라’고 돌려보냈어요. 그런데 그가 나중에 청진경기장에 삐라를 붙여 체포됐고, 대학이 집중 검열을 받았어요. 구역병원 부원장 아들로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는데, 그 일로 본인은 물론 온 가족이 사라졌죠.”# 남편의 숙청과 아들과의 이별남편의 체포는 그에게 북한 체제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한 결정타가 됐다. 김정일은 최고사령관이 되자마자 구소련에서 유학을 했던 군 간부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것을 ‘프룬제 아카데미 사건’이라고 부른다. 수십 명의 군 장성을 포함한 수백 명의 북한군 엘리트들이 간첩 혐의를 받고 처형됐다. 1993년 초부터 불기 시작한 숙청 바람은 1998년까지 이어졌다. “남편은 소련에 딱 6개월 가 있었어요. 군 장교도 아니어서 숙청 마지막에 잡혀간 것 같습니다. 본인도 소련에서 유학했던 사람들이 잡혀간다는 말을 듣고 불안해했지만, 설마 나까지 숙청할까 생각했어요.” 어느 날 평양에서 회의가 열린다고 남편에게 참가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동료 수십 명과 함께 가는 회의어서 큰 의심 없이 길을 나섰다. 그러나 그것은 탈북을 막으면서 유인하는 수법이었다.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소련 유학파 몇 명만 골라내 싣고 갔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으며 평양에 줄을 대 알아보았지만 행적은 묘연했다. 북한에선 남편을 정치범으로 잡아가면 아내는 이혼시킨다. 또 남편의 직계 남자 혈육은 모두 잡아간다. 졸지에 모든 것을 잃었다. 시간이 흐른 뒤 남편이 비밀 처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때 그는 생각했다. “이건 일제시대보다 더 하지 않는가. 김일성도 회고록에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빨치산 동료들의 부인이 면회도 가고 재판에도 참가했다고 입이 마르게 칭찬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나는 잡혀간 남편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잃었다. 일제는 김일성의 가족도 살게 놔두었는데, 우리는 연좌제로 죄 없는 가족도 잡아가니 이보다 더 악독한 나라가 어디 있는가.” 이후 그는 대학에 더 출근하지 않았다. 보위부는 아들들이 집에 오나 1년 넘게 지켰다. 이웃들에게 임무를 줘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깊은 밤 아들들이 몰래 찾아왔다. 친척이나 아는 집에 일절 가지 못하고 방랑했던 터라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남루한 차림이었다. 그 어려운 와중에 형은 동생을 끝까지 데리고 다녔다. 두 아들을 본 그날은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그러나 반갑기보다 잡힐까봐 걱정부터 들었다. 큰 아들이 말했다. “엄마, 돌아다니며 보니까 중국이란 곳에 가면 우리가 살 수 있을 거 같아.” “그래, 중국에 가서 절대 돌아오지 말고 그곳에서 살아.” 아는 선을 통해 아들들이 무사히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말을 전해들은 뒤 현 씨는 처음으로 발편잠(근심 걱정 없이 마음 놓고 편안히 쉬는 잠을 뜻하는 북한말)을 잤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계속 북송돼 붙잡혀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언제 아들이 잡혀올지 몰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2004년, 갑자기 낮선 사람이 집으로 찾아왔다. 아들들이 찾고 있으니 함께 국경에 가면 전화를 할 수 있다는 말에 급히 따라나섰다. 아들의 전화였다. 그런데 서울 말투였다. “얘들이 남조선에 갔구나”고 바로 직감했다. 21세가 된 아들은 몇 달 뒤에 엄마를 데리러 올 거니 중국에 넘어오라고 했다. 그렇게 두만강을 넘었다. 서울에 가서 아들들에게 뒤늦게나마 밥이라도 지어주고 싶었다. 남한에서 두 아들은 대학을 졸업했고 한때 방황도 했지만 바르게 성장해 있었다.# 정착과정의 방황2004년 7월 베트남에 머물던 탈북민 468명이 한국 정부가 보낸 여객기를 타고 한꺼번에 서울공항에 내렸다. 당시 떠들썩했던 사건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 중에 47세 현인애 씨도 있었다. 아들들은 “엄마가 운이 좋아서 1년 걸릴 과정을 한 달 만에 바로 한국에 왔다”고 좋아했지만, 그는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탈북민 조사기관에 가서 그가 했던 첫 질문은 “우리가 사회에 나가면 배치해줍니까”였다. 국가가 직장을 정해주는 북한식 사고방식에 한국도 직장을 알선해줄 것이란 기대를 품고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그런 것이 없고 알아서 살아야 한다”는 대답에 많이 실망했다. “이 나이에 이제 어디 가서 정착을 하지.” 2004년 12월 하나원을 나와서 당시 대학생이던 큰 아들을 따라 우유배달을 도와주는 일로 정착의 첫 걸음을 뗐다. 북에선 대학선생이었지만, 한국에선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많은 탈북민들이 걸려들었던 다단계 판매에도 뛰어들었어요. 그게 어떤 것인지도 몰랐어요. 석 달을 해보니 이건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아니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되더라고요.” 음식점에 취직하려 여기저기 다녔지만 얼굴에 선생님이라고 쓰여 있는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그렇게 1년 넘게 한국 사회 구석구석을 경험했다. 다양한 사람들도 만났는데, 그중에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도 있었다. 김일성대 철학부를 나와 북에서 철학교원을 20년이나 했던 그의 경력을 안쓰러워했던 교수는 이대에서 석사과정부터 다녀볼 것을 권고했다. 학비도 교수 장학금으로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 덕에 현 씨는 이대에서 2008년 석사를 마치고 2014년 2월 박사 학위까지 땄다. 2013년엔 미국 북한인권위원회의 객원연구위원 자격으로 1년 동안 미국에서 머물기도 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여러 대학에서 강사를 하다 2015년엔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원으로 임명됐다. 그의 나이 58세 때였다. 북한과 한국에서의 경력이 도움이 됐다. 그는 통일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화여대 초빙교수로 일하고 있다. 이제 탈북민 사회의 연구를 말할 때 현인애 박사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왜 탈북민은 보수가 되는가현 씨는 탈북민이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의 의식 변화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제목은 ‘북한이탈주민의 정치적 재사회화 연구’이다. 쉽게 말하면 ‘북한에서 주입받았던 혁명사상이 남쪽에 와서 어떻게 바뀌는지’가 그의 주요 관심사이다. 그가 보는 탈북민 사회는 어떨까. 왜 탈북민들은 보수, 나아가 극우화되는 경향이 높은 것일까. 이에 대해 그는 꽤 긴 설명을 늘어놨다. “제가 정말 숱한 탈북민들을 만나보며 내린 결론은 그들의 사고방식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정보가 머리에 입력돼 분석돼 나오는 매커니즘이 남쪽에 왔다고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북에서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더욱 바뀌지 않아요. 북에서 입력된 프로그램은 타협이 없는 ‘타도정신’입니다. 미제를 타도하고 혁명의 원수를 타도하고 이런 식으로 교육을 받았죠. 한국에 오니 미제의 자리가 김정은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대화하고 타협할 줄을 잘 모르고, 타도할 대상, 투쟁할 대상이 없으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한국에 와보니 이곳의 고령층이 탈북자들과 사고방식이 비슷해요. 그러니 한국의 고령층과 탈북민들이 쉽게 같은 이데올로기로 동화되는 것이죠. 60세가 넘어 한국에 오면 하나도 바뀌지 않아요. 북한에서 간부를 했던 사람이 한국에 오면 권위주의 의식이 바뀌지 않습니다.” 몇 살 때 오면 한국 사회에 완전히 동화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그는 “대략 10살 전후에 오면 완전히 한국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5살쯤에 오면 의식이 왔다갔다 합니다. 20살 지나서 오면 북한사람의 본성을 죽을 때까지 벗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10살쯤에 한국에 와야 완전한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는 말은 오랫동안 탈북 청년들을 만나왔던 기자에게 다소 뜻밖의 대답이었다. 그래서 다시 “제가 만났던 탈북 청년들은 아주 정착을 잘하고, 한국 청년들과도 잘 어울리는데, 10살은 너무 어리게 보는 것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다시 긴 설명을 이어갔다. “젊은 탈북 친구들은 사고가 매우 유연한 것처럼 보이고, 한국의 문화와 의식구조를 잘 이해하고 정답은 확실히 잘 압니다. 그래서 설문조사 같은 것을 해보면 한국 기준에 아주 잘 맞게 정답을 찍습니다. 그런데 이해하는 것과 감정 정서적으로 완전히 동화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여전히 사고방식과 감정 정서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이고 비타협적인 북한식을 벗기 어렵습니다. 가령 대학생 동아리를 예로 들면, 한국 친구들은 리더가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에 본능적 거부감이 있습니다. ‘왜 내 의사를 묻지 않고 네가 혼자 결정하냐’며 아무리 현명한 결정도 독단이 들어가면 불쾌해하고 반발하죠. 한국 대학생들은 느리더라도 토론의 과정을 중시합니다. 그런데 탈북 대학생 동아리를 보면 그런 과정을 두고 ‘질질 끌어 짜증이 난다’고 생각납니다. 보통 똑똑한 리더를 내세우고 리더의 결정에 큰 거부감이 없이 따릅니다. 감정적으로 불쾌하다고 거부하지 않는 것이죠. 이런 판단은 보통 순간적으로 이뤄지는데 이런 것을 보면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체질화된 감정정서는 다르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의 말을 듣다보니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에 건너가 살아도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과 똑같은 감정 정서적 코드로 맞춰 살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 떠올랐다. 10대를 한국에서 보내면 죽을 때까지 어딘가에 한국인의 정체성이 남아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던 것이다. 현 교수는 기자의 지적에 “더구나 한국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미국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크는데도 그 정도면,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온 북한 청년이 잘 바뀌지 않는 것은 더구나 이상하지 않죠”라고 말했다.# 누가 정착을 잘 하는가그에게 “어떤 사람이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다시 그의 긴 답변이 쏟아졌다. “북에서 반항적인 성격보다 체제 순응적 인물들이 정착을 잘하더군요. 한국도 권위주의, 집단주의적 의식이 강한 사회입니다. 어떤 곳이든 쉽게 순응하던 사람들이 정착도 순조롭게 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격이 유연한 사람이 정착을 잘합니다. 이젠 탈북민을 딱 만나보면 정착을 잘할 사람인지 아닌지 대충 감이 옵니다. 탈북민 정착에 대해 한국 사회에선 흔히 직업, 정착금과 같은 물질적 도움에 집중하는데,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입니다. 여기 사람과 쉽게 어울리게 문화적으로 훈련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훈련이 안되면 취직을 해도 적응하기 어렵습니다. 탈북자 본인들이 노력해 다가가야 하고, 한국 사람들도 좀 더 따뜻한 마음으로 탈북민을 품어줘야 합니다. 특히 제가 가슴 아픈 것은 어린 아이들입니다. 어렸을 때 한국에 오면 이곳에 동화될 수 있지만, 학교에서 탈북자라고 하면 왕따가 심합니다. 탈북 학생들이 자기가 북에서 왔다고 커밍아웃하는 비율은 50% 정도밖에 안되죠.” 현 박사는 또 도시에서 온 탈북민이 농촌에서 온 탈북민보다 정착이 더 쉽다고 말했다. 완전히 도시화된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선 그래도 북에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봤던 사람, 아파트에서 살았던 사람이 낫다는 의미다. ‘탈북민을 오랫동안 연구해왔으면 본인은 한국 사회에 상당히 동화되지 않았겠느냐’는 질문에 현 박사는 손사래를 쳤다. “나이 들어오면 잘 변하지 않아요. 저는 한국 사회를 보면서 민주주의가 절대적인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필요에 따라선 강력한 권위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가령 배가 침몰할 때 선장의 명령을 따라야지 저저마다 의견을 내놓고 수렴할 새가 어디 있겠습니까.” 황 전 비서가 탈북했을 때 한국 언론들은 ‘주체사상의 망명’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비유하면 북한 대학에서 20년 동안 주체철학을 가르치던 현 박사는 ‘주체철학의 작은 망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는 이에 대해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북한의 소위 ‘인간 중심의 주체철학’과는 결별했습니다. 인간은 귀중하지만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며 긴 인터뷰를 맺었다. 그의 철학적 사고는 이제 남북 구성원의 의식구조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멀고 먼 험한 바다를 헤치고 왔지만, 그의 돛배는 여전히 사색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 2020-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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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년간 100명 탈북’ 15세 브로커, 한국行 이유는…[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1999년 가을. 늘 정전돼 암흑 속에서 살던 두만강 옆 동네에 모처럼 전기가 들어왔다. 6살 진우는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와 함께 TV 앞에 마주앉았다. 저녁 9시가 넘어 TV 연속극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쾅 열리더니 검정색 정장을 입은 사내 10여명이 집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아버지 이름을 부르고 수갑을 채운 뒤, 옷도 입히지 않은 채 내복 차림으로 끌고 갔다. 진우가 끌려가는 아버지를 부르며 밖으로 나가니 밖에 승용차가 3~4대 서있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다른 수십 명이 집을 빙 둘러 포위하고 있었다. 며칠 뒤 다시 여러 사내가 찾아와 탐지장비까지 동원해 집을 샅샅이 수색하고 돈이 될만한 물건은 모두 압수해갔다. 끌려간 아버지는 보위부의 중범죄자 구류장에 수감돼 1년 넘게 고문을 당했다. 아버지의 형제 2명도 함께 감옥에 끌려갔고, 성인이 된 진우의 사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남조선 안기부 돈을 받아 노동당을 기만한 역적’이라는 무시무시한 혐의를 받았다. 누군가가 노동당에 진우의 아버지를 간첩이라고 신고했고, 대노한 김정일이 직접 “그 지역을 집중 검열해 깨끗이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소위 ‘1호 방침’이 하달된 것이다. 중앙에서 검열단이 내려와 수많이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그 지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부유하게 살던 진우네 집은 이 사건을 계기로 풍비박살이 났다.# 나락으로 떨어지다진우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중국과의 밀무역을 시작한 선구자였다. 1990년대 초반에 북한에서 오징어 등 수산물을 걷어 중국에 보냈고, 중국에서 담배 등을 몇 트럭씩 넘겨받아 북한 시장에서 팔았다. 그렇게 번 돈 중 일부를 ‘보험용’으로 국가에 바쳤다. 1990년대 중반 평양에 ‘노동당창건기념탑’이 건설될 때는 돼지 60마리를 바쳐 TV에도 나왔다. 이후 ‘칠보산관광도로’ 공사와 ‘고무산시멘트공장’ 확장 공사 때는 옥수수를 무려 1만 t이나 수입해 지원물자로 바쳐 김정일의 표창도 받았다. 그런데 1999년 같은 지역에 살던 두 사람이 노동당에 진우 아버지가 바친 지원물자는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에서 몰래 받은 공작금으로 산 것이라고 신고했다. 수사가 시작됐다. 1년이 넘게 고문을 받았지만 안기부 자금이라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반대로 이 기간 신고한 사람들이 오히려 무고 혐의를 받게 됐다. 한 명은 ‘일제 시기 악질순사를 했던 경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 다른 한 명은 허위신고를 했다는 압박이 심해지자 자살했다. 하지만 김정일의 ‘1호 지시’는 한번 하달되면 번복되는 법이 없었다. 대신 “죄는 있지만 노동당의 관대정책으로 석방한다”는 단서를 달고 아버지와 형제 2명이 석방됐다. 죽음은 면했지만 모든 것을 다 빼앗겼기에 알거지가 됐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아버지는 바닷가 도시로 옮겨가 어선을 탔다. 진우는 올해 28세가 됐다. 그는 “남의 집 판자집에서 살면서 아버지가 오징어를 잡아온 날이면 밥을 먹을 수 있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형제들도 헤어졌다. 엄마와 누나는 다른 친척집에 의지하러 갔지만 그것도 잠시 뿐. 모두가 가난한 상황이라 꽃제비와 다름없는 형색으로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렇게 6년을 보내다 부친이 과거의 인맥을 다시 활용해 ‘기름개구리 양식 허가증’을 받았다. 부친은 다시 고향에 돌아왔고 진우도 아버지를 따라 왔다. 그러나 가족이 함께 살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개구리 양식을 위해 수십 리 떨어진 깊은 골짜기에 올라가 움막을 치고 따로 살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한 사람들은 기름개구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팔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걷어 중국에 파는 과정에 기름개구리가 중국에서 비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에선 멸종 위기종으로 포획이 금지된 기름개구리는 중국에서는 정력제로 유명해 식용으로 즐겨 사용되고, 신경쇠약과 불면증 해소에 효과가 높은 한약재로 알려져 있다. 특히 기름이라고 불리는 암컷 개구리의 뱃속에서 나오는 노란 수란관은 2000년대 초반 1㎏에 2000달러 정도 밀거래됐을 정도다. 이것이 알려지자 졸지에 북한의 기름개구리들은 씨가 마를 정도로 ‘대학살’을 당했다. 산 계곡마다 많은 이들이 개구리를 잡았다. 나중에 개구리가 멸종되다시피 하자 이번엔 양식업이 성행했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 허가증을 받아 깊은 골짜기 하나씩 인공적으로 개구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진우의 부친 역시 이런 사업을 나선 거였다.# 한국과의 통화새로 장만한 진우의 집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에 있었다. 아직은 가난을 면치 못해 학교가 끝나면 여름과 가을엔 약초를 채취하러 갔고, 겨울엔 나무를 해 장마당에 팔았다. 이런 가난한 와중에 진우는 공부를 열심히 해 학교를 대표하는 ‘소년단위원장’을 했다. 아버지가 중국에 기름개구리를 몰래 팔면서 진우네 집에는 중국 휴대전화도 생겼다. 물론 이것이 들키면 감옥에 가야 하지만, 기름개구리를 팔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느 날 동네 사람이 찾아와 “휴대전화를 좀 빌려 달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그는 한국에 간 가족과 통화를 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한국과 북한을 연결시켜 줬는데, 갑자기 한국 가족이 북에 돈을 보내줄 테니 좀 전달해달라고 부탁해 왔다. 아버지가 거래하는 중국 대방에게 알아보니 돈을 전달받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진우는 13세에 한국 돈을 받아주는 브로커가 됐다. 한국에 사는 탈북민이 중국에 돈을 부치면, 중국에서 돈을 받은 사람이 다시 북한 내 화교에게 연결해 돈을 주도록 하는 방식이다. 진우는 한국에 사는 탈북민과 북한 가족을 전화로 연결해주고, 중국에서 돈을 받을 사람의 전화번호를 알려준 뒤 돈이 송금되면 화교네 집에서 그 돈을 찾아 가족에게 가져다주는 일을 맡았다. 물론 북한 가족이 돈을 받으면 한국 탈북민에게 정확히 받았다고 ‘애프터서비스’까지 해주는 게 기본이었다. 이런 일을 하는 동안 누구도 13세 진우를 의심하지 않았다. 늘 약초 채취와 나무하러 갔기에 그가 산에 오르내리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점차 돈을 벌면서 진우는 중국 휴대전화를 다섯 대나 장만해 산에 올라가 한국과 전화를 했다. 어려움도 있었다. “조그마한 학생이 찾아와 한국에 간 가족이 찾는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다 의심했어요. 아니 황당해 했죠. 같이 전화하려 산에 가자고 하면 선뜻 나서지 않았어요. 보위부 스파이가 아닌지 의심도 참 많이 받았고요.” 그러나 진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의심이 풀릴 때까지 열 번, 스무 번을 찾아가길 망설이지 않았다. 6살에 닥친 아버지의 체포와 지독한 가난이 그를 ‘어른’으로 만든 것이다.# 15세 탈북 브로커한국 돈을 받아주던 진우는 2년 뒤인 2008년 우연한 기회에 한 가족의 탈북을 돕게 됐다. 부탁을 받고 찾아갔더니 며칠을 굶은 부부가 일어날 힘없이 누워있었다. 그 옆에는 8살 된 딸도 누워있었다. “죽어도 좋으니 자기들을 중국에 좀 데려다 달라고 하더군요. 그 딸을 보는 순간 구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그만한 나이에 아버지가 잡혀가 죽을 뻔했으니까요.” 그는 그 가족을 데리고 밤중에 산을 넘고 넘어 두만강까지 왔다. 중국에 연계하던 사람들에게 마중 나오라고 전화로 연락하고 밤에 강을 건너보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왔던 8살 딸은 지금 한국에 무사히 도착해 대학생이 됐다고 한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탈북브로커의 길을 걷게 됐다. 15세 때였다. 2013년 탈북하기 전까지 5년 동안 그가 강을 넘겨준 탈북민은 50여개 팀에 100명이 넘는다. 당시 북한에서는 탈북 시켜주는 사람은 무조건 ‘인신매매범’이라는 누명을 씌워 총살형에 처했다. 만약 누군가 북송돼 진우의 이름을 불었으면 그는 체포돼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가 넘겨 보낸 사람은 단 한명도 중국에서 체포되지 않고 한국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목숨을 담보로 탈북을 도와준 대가로 큰 돈을 만졌을 법도 한데 진우는 의외로 큰 돈은 벌지 못했다고 했다. 한 개 팀을 넘겨 보내주는 대가는 1만5000위안(약 250만 원)~2만 위안(약 338만 원)이었다. 주로 한국에 먼저 간 탈북민들이 가족의 탈북비용을 댔다. 북한에서 250만 원은 거액이지만, 진우가 모두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탈북시키는 일을 하면서 그는 점조직으로 움직이는 ‘비밀조직’을 운영했다. 타 지역에 가서 사람을 전문적으로 찾는 사람과 가족을 안전하게 국경까지 데리고 오는 사람을 따로 고용했다. 국경경비대 군관과 병사들에게는 금전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심지어 보내준 사람이 북송돼 나올 경우 미리 알아야 대책을 세울 수 있기에 탈북민들이 중국에서 북송될 때 반드시 거쳐 가는 온성군 보위부 사람들까지 매수해야 했다. 돈은 물론 노트북 같은 비싼 물건을 주기도 했고, 명절 때면 닭과 꿩도 가져다주며 친분을 다졌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16세에 진우는 이미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를 가진 탈북 조직을 거느리게 됐다. 그 무렵 아버지의 기름개구리 사업도 성공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진우는 돈이 생겨 중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뇌물을 써서 군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현지 붉은청년근위대 무기고 관리원으로 배치됐다. 이곳에서 일하면 대체복무로 인정해주었다. 무기고를 늘 가서 지키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될 때마다 그는 사람들을 탈북 시키는 일을 계속 했다. 사람들을 넘겨 보내는 과정에 중국도 세 차례 몰래 가서 놀았다. 한국 드라마도 많이 봤지만 가족을 두고 한국으로 가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국가수배령에 쫓긴 탈북위기는 생각지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2013년 7월 말, 한 가족을 탈북 시키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전화로 도 소재지에 사는 삼촌이 보위부에 끌려갔다는 연락이 왔다. 느낌이 이상했다. 삼촌은 사람들을 탈북 시키는데 관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한번 앞쪽에서 탈북자 가족을 데리고 오다가 삼촌 집에 들려 잤던 적은 있었다. 진우는 집에서 나와 숨은 뒤 동태를 살폈다. 멀리 도망가야 할 상황임을 직감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한국에 사는 한 탈북 여성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이 여성은 북에 사는 여동생과 조카딸을 탈북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진우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도 돈을 버는 때라 순전히 돈 때문이라면 그 위험한 일을 계속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탈북시키다 보면 사명감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시궁창에 사는 사람에게 새 삶을 선물하는 느낌도 들고, 더 중요하게는 영영 헤어질 뻔했던 가족을 다시 만나게 해준다는 보람도 있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해 부모와 누나, 여동생과 뿔뿔이 흩어져 사는 고생을 했으니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보위부의 눈을 피해 숨어있는 와중에 그는 약속을 지켜 모녀를 한국에 보내기 위해 두만강에 다시 나갔다. 작별인사를 건네고, 잘 살라며 보내주었다. 그때는 자신도 얼마 뒤 탈북할 수밖에 없는 몸이 되고, 그들과 두 달 뒤 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삼촌이 체포된 지 보름 뒤 어머니에게서 몰래 연락이 왔다. “보위부가 찾아 왔으니 빨리 도망치라”는 거였다. 그는 그 길로 아버지가 양식업을 하는 산골짜기로 도망쳤다. 산에서 몇 시간 내려다보며 감시하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뒤 밤에 몰래 아버지와 만났다. 이미 보위부에서 죽다가 살아난 아버지는 동생이 또 보위부에 끌려갔다는 말에 아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랐다. 살기 위해선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이미 북한의 모든 초소에는 진우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미 보위부는 진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 저렇게 나이 어린 청년이 삼엄한 경비를 헤치고 수많은 사람들을 탈북 시켰을까 확신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삼촌을 고문해 감시하고 있던 탈북민 가족이 탈북한 것이 진우의 소행임을 알아차렸다. 즉시 진우의 사진을 붙인 국가수배령이 하달됐다. 숱한 사람들을 탈북 시킨 진우지만 정작 자기가 탈북할 통로는 없었다. 그가 살던 지역에선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우는 아버지와 함께 그나마 경비대가 적은 백두산 쪽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밤에 움직이고 낮에 숨으며 며칠이면 갈 길을 보름이나 걸어갔다. 마침내 백두산 천지가 코앞에 보이는 곳까지 도달했다. 더 갈 곳도 없었다. 그곳에도 경비대 잠복초소가 있었다. 부자는 잠복조가 교대하는 10분을 기다렸다 중국을 향해 냅다 달렸다. 중국에서는 이미 몇 년 동안 탈북민을 넘겨주며 손발을 맞춰왔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국가 수배령이 떨어져 왔다는 말에 그들은 즉시 한국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주었다. 진우가 도망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누나도 다른 통로를 통해 탈북했다. 다만 엄마는 미처 도망치지 못해 보위부에 끌려갔다. 악명 높은 전거리교화소에 수감됐던 엄마는 결국 3년 뒤 하반신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풀려났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보위부에 체포된 삼촌은 6개월 뒤 끝내 공개 처형됐다.# 23세 5t 지입기사2013년 12월 진우는 아버지와 함께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만 20세 때였다. 또래와 함께 공부를 하고 싶었다. 북한에서 단위원장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기에 대학만 가면 얼마든지 따라갈 자신도 있었다. 2014년 4월 서울 소재의 한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며칠 못 갔다. 엄마가 교화소에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엄마를 살리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그는 대학을 그만두고 아버지는 일용직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진우는 여러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하다 최종적으로 백화점에서 1년 정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가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1년 동안 아끼고 아끼며 3000만 원 정도를 모았다. 그 돈을 밑천으로 2016년 5t 트럭을 할부로 구입해 충남 서산에서 지입기사 자리를 얻었다. 23세밖에 안된, 더구나 나이보다 더 앳돼 보이는 어린 청년이 5t 대형 트럭을 몰고 다니자 주변에서 모두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진우 씨는 힘든 줄을 몰랐다. “어떤 날에는 하루에 100만 원 가까이 벌기도 했어요. ‘한국에 오니 노력하는 것만큼 돈을 벌 수 있구나’하는 생각에 그때는 정말 너무 기뻤죠. 정말 잠을 자지 않고 일했습니다. 밤을 꼬박 새우거나 두 시간 자고 차를 몰고 다녔어요. 어머니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그는 차에 붙어살았다. 그러나 그의 기쁨도 오래가지 못했다. 하루 종일 차에 앉아 무리하게 힘을 쓰며 일하다보니 2년쯤 지난 어느 날부터 허리가 아파왔다. 참다 참다 병원에 가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쉬면 좀 나아질까 싶어 일을 줄여 봐도 소용이 없었다. 여러 병원을 다니다 한 대학병원에서 강직성척추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강직성척추염은 평생 달고 살아야 하는 희귀난치질환이다. 어린 나이에 너무나 무리해 일하다보니 면역체계가 파괴되며 병에 걸린 것이다. 매일 시간 맞춰 약을 꼬박꼬박 먹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운전을 계속 하는 것도 더 이상 무리였다. 결국 그는 차를 팔 수 밖에 없었다. # 다시 찾은 희망평생의 병을 얻었고, 좌절을 겪었지만 진우 씨는 여전히 씩씩하다. 한국 사회에서 6년을 살다보니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감이 온다고 했다. 일용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아버지는 북에서 기름개구리 양식장을 운영했던 경험을 살려보려 했다. 중국에서 정력에 좋다고 소문난 기름개구리가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곳곳에 기름개구리 서식에 적합한 골짜기도 수없이 많지만, 전국적으로 기름개구리를 양식하는 가구는 3~4개 농가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진우와 아버지는 여기에서 기회를 봤다. 중국산이 아닌, 한국산 기름개구리를 양식해 판매를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양식지, 판매 등이 다 걸려있지만, 어떻게든 헤쳐 나갈 생각이다. 본격적으로 기름개구리 양식을 시작하려고 전국을 헤매다 2018년 경상북도 외진 산골에 땅 3000평 샀다. 1년 반이나 걸려 마침내 양식 허가도 받아 ‘하나통일관광농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기름개구리 양식을 시작했다. “한국에 아직 기름개구리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앞으로 점차 알려질 겁니다. ‘동의보감’에도 기름개구리에서 나오는 합마유의 효능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모르고 중국 사람들이 북한에서 비싸게 사올 정도로 더 좋아하거든요. 기름개구리는 튀겨도 먹지만, 가루를 내서 홍삼처럼 진액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죠. 우리가 양식을 하게 되면 국산 합마유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진우는 건강기능식품의 미래는 밝다는 믿음과 함께 개구리 양식업이 꼭 성공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아직은 합마유 추출 장비를 살 돈이 없어 올 가을부터 출하되는 기름개구리는 식용으로 먼저 판매할 계획이다. 한 포털 사이트 스마트 스토어에 판매자로 등록했고, 홍보를 위해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과연 진우 씨의 꿈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저는 (현대 창업주) 정주영 회장처럼 큰 기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아직 젊잖아요. 꼭 성공해서 한국은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통일된 뒤 북한 사람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습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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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의 또 다른 여인 려심[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김정은의 부인 이설주가 10개월째 사라졌다. 과거 김정은의 대다수 현지 시찰에 함께 다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행사장에도 이설주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전 세계가 공인하는 김정은의 공식 부인이고, 둘 사이에 아이도 셋이나 있다고 알려졌기에 숙청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병을 앓거나 또 아이를 낳았거나 혹은 어린 자녀들을 돌보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만, 단정할 수는 없다. 이설주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누구보다 더 궁금한 게 바로 북한 사람들이다. 이미 집에서 “원수님 부인은 어디 갔을까” “새 여자가 생긴 것은 아닐까” 등 각종 추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함경북도 청진 사람들은 이런 것에 더 민감하다. 1970년대 초 함북 도안전부 전화교환수였던 김영숙이 평양에 뽑혀 올라갔고, 몇 년 뒤 청진공산대학 간부였던 부친과 가족 모두 평양으로 이주했다. 사람들은 “청진에서 김정일 장군님의 부인이 나왔다”고 좋아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갑자기 고용희란 여성이 부인이라 등장하고, 그의 아들 김정은이 후계자로 나타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군님은 여자를 여럿 거느리고 있구나”라며 수군거렸다. 요즘 청진에는 또다시 비슷한 이야기가 돌고 있다. 바로 청진에서 나서 자란 려심이란 여인 이야기다. 려심은 ‘김정은의 저택에 들어간 여자’로 소문이 났다. 이는 곧 김정은의 여인으로 간택받았다는 뜻이다. 간부들 사이에선 “딸을 낳으려면 려심이 같은 딸을 낳으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1989년생으로 알려진 려심은 이설주와 동갑 또는 한 살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부모는 북송 재일교포 출신이다. 포항구역 김일성동상 옆 8층 아파트 2층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알려졌는데, 청진에선 가장 요충지에 있는 아파트다. 려심의 아버지는 외화벌이 관련 일을 했는데, 일찍이 당뇨병에 걸려 치료비를 많이 쓰다 보니 집이 가난했다고 한다. 물론 일본에 친척이 있는 귀국자치고 가난했다는 뜻이지, 밥술은 뜨고 사는 집이었다. 고용희도 그러했지만 귀국자들은 자녀를 예술 쪽으로 교육시킨다. 북한에서 귀국자는 출신 성분이 걸려 당 간부도 할 수 없고 보위부, 안전부와 같은 권력기관에도 못 들어가니 그나마 인정받기 위해 선택하는 고육지책이라 할 수 있다. 려심도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는데, 천부적인 능력을 보여 청진예술학원을 다니던 10대 중반에 조선인민군예술학원에 뽑혀 올라갔다. 당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미모가 뛰어났고, 성격이 밝고 예의바르고, 가정교육을 잘 배운 재간둥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평양에 올라간 려심은 어느 날 은하수관현악단 피아니스트가 돼 TV에 등장했다. 김정은과 결혼하기 전 이설주가 이 악단에서 가수로 있을 때 려심은 뒤에서 피아노를 쳤다. 시간이 좀 흐르자 려심의 집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부모들이 평양에 올라가고 청진에 남아있는 외삼촌, 고모들이 ‘교시아파트’라고 불리는 청진의 최고급 아파트로 이사 간 것이다. 2011년 김정일의 마지막 러시아 방문 때 려심도 동행했다. 그러자 청진 사람들은 그녀가 김정일의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선 그의 가족과 친척이 받은 특혜를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김정일이 사망한 뒤에도 려심의 가족에 대한 특혜는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이런 소문이 또 퍼졌다. “원래 김정은이 려심과 결혼하려 했는데, 김정일이 ‘어머니도 귀국자 출신인데, 아내까지 또 귀국자 출신을 들일 순 없다’고 완강히 반대해 이설주가 대신 부인으로 선택됐다.” 려심의 외삼촌과 고모는 지난해까지 여전히 청진에서 잘살고 있다. 이걸 보면 려심은 아직까지 김정은 옆에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김정일이 피아니스트 김옥을 마지막까지 곁에 두었듯, 김정은도 미모의 피아니스트에게 끌리는 피를 물려받았을지 모른다. 어찌 됐든 려심이 김정은 옆에 있다면 가장 신경이 쓰이는 사람은 이설주일 것이다. 김정일이 여러 여성에게서 자식을 두었듯, 려심도 김정은의 아이를 낳지 말라는 법이 없다. 나아가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인 고용희가 최후의 사랑을 쟁취해 성혜림과 김영숙을 밀어낸 것과 같은 일이 또 벌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려심은 이제 겨우 30, 31세에 불과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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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식한 연변 아줌마’ 취급 당했는데…‘1호 탈북 박사 부부’ 된 사연[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따르릉… 따르릉….’전화벨 소리가 사납게 울렸다. 전화기를 내려다보는 서울 양천구 한 카센터 경리 김영희 씨의 심장이 벨소리만큼 사정없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황급히 문을 열고 소리친다.“기사님~~. 전화 왔어요.”손에 기름을 잔뜩 묻히고 차를 수리하던 정비사는 인상을 찌푸리고 소리친다.“아, 그냥 받으라니까.”김 씨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었다.“소중히 모시겠습니다. ○○카센터 XX 대리점입니다.”전화기에서 중년 남성의 소리가 날아온다.“아, 왜 이렇게 전화 안 받아요. 앞 범퍼 수리해야 하는데 얼마예요?”“예, 앞 범버요. 앞 범버가 뭐예요?”“아니, 앞 범퍼도 몰라. 근데 아줌마 연변에서 왔어요. 아, 짜증나. 사장 당장 바꿔.”사장이 전화를 받으면 고객은 고래고래 소리친다.“어디서 앞 범퍼도 모르는 연변 아줌마 내보내고 한국 아가씨 쓰세요.” 하루에도 이런 전화가 수없이 날아왔다.어떤 때는 처음 보는 남성이 들어와 김 씨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아줌마가 전화 받은 연변 아줌마나”라고 하기도 한다. 보통 반말이다.“저 연변 아닌데요.”“그럼 어디서 왔어?”“북한에서 왔습니다.”거짓말을 할 수 없어 솔직하게 대답하면 고객은 북한 사람을 처음 본다며 “북한에서 사람 잡아 먹는다는 게 사실인가. 굶어죽는 사람이 많냐”는 질문을 던진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다보면 보통 고객은 단골이 되곤 했다. 이 카센터는 김 씨가 한국에 정착한지 2개월 만에 교회 집사를 통해 어렵게 구한 일자리였다. 정작 일을 시작하니 회계보다는 전화를 받아주는 것이 주업이었다.들어가자마자 사장 부인이 한국에서는 전화 받을 때 이렇게 해야 한다며 메모지에 “소중히 모시겠습니다. ○○카센터 ㅇㅇ대리점입니다”라는 글을 적어 외우게 했다.고객이라는 개념이 없는 북한에서 살았던 김 씨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이 말이 참으로 간지럽게 느껴졌다. 또 필요한 사람이 찾아오면 그만인데 왜 굽신거리며 인사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할 수 없이 메모지를 전화 앞에 붙여놓고 계속 연습했다. 일주일쯤 돼서야 겨우 그 말이 입에 붙었다.인사는 배웠지만, 그 이후 대화는 더욱 힘들었다. 전화만 오면 가슴이 벌렁거린다. 차종과 부품명을 전혀 모르니 고객의 욕설을 수시로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소나타, 그랜저, 스타렉스, 핸들, 후사경, 엔진오일, 미션오일, 승용, 승합 등 단어를 열심히 외우며 조금씩 적응해 갈 무렵 위기가 찾아왔다. 성격 급한 고객이 연변사투리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며 카센터까지 찾아와 민원을 넣었다.2주 만에 김 씨는 사장에게 말했다.“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있을 곳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장님. 미안합니다.”착한 사장은 손사래를 쳤다.“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죠. 난 괜찮아요. 기죽지 말고 계속 해요. 하다 보면 잘 할 겁니다.”그 말에 힘을 입어 버티고 버텨보려 했다. 손님들이 찾아와 아는 체를 하면 힘도 생겨났다. 그러나 “당장 경리를 바꾸지 않으면 내가 카센터를 본사에 신고해 고객점수 하나도 못 받게 하겠다”는 욕설에는 견딜 수 없었다.결국 그는 입사 2개월 만에 “사장님. 저 때문에 카센터가 너무 피해를 받는 것 같아 더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고 편지를 써놓고 몰래 사무실을 나왔다.집으로 돌아가면서 김 씨는 펑펑 울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9세, 7세 된 아들들은 이제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할까. 아이들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 때가 2003년 9월이었다. # 사회주의 직장생활한국의 카센터에서 매일같이 ‘무식한 연변 아줌마’ 취급을 당하긴 했지만 김 씨는 북한에서 종업원 4500여명의 특급 기업소에서 수하에 30여명의 통계원(회계원)을 두고 재정경리 업무를 담당하던 재원이었다.1965년 함북 길주군 의사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학교 다닐 때 항상 학년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소녀였다. 분단위원장, 사로청부위원장 등 학교 간부도 그의 몫이었다.김 씨는 3남3녀 중 둘째였는데, 그의 형제는 한 명 빼고 모두 대학을 졸업했다. 학교 졸업생의 15~20% 정도만 대학에 가는 북한에서 보기 드문 인텔리 집안인 셈이다. 대학에 못 간 막내는 김 씨가 탈북하는 바람에 추천을 받지 못했다.1981년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김 씨는 교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학교에 교원대학 추천서가 내려오지 않았다. 대신 북한에 하나 밖에 없는 경제대학이자 중앙급 대학인 원산경제대학 추천서가 학교에 왔다.누가 봐도 훨씬 더 좋은 대학이지만, 김 씨는 교원이 될 수 없다면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드러누웠다.그러자 아버지가 그를 달랬다. 대학에 안 가도 좋으니 그냥 이 참에 가기 힘든 원산에 가서 구경이라도 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평양 제1병원 준의(준의사)였던 아버지는 같은 병원에서 준의였던 어머니와 연애해 결혼했다. 나중에 해주의학대학을 졸업해 정식 의사가 된 뒤 한번도 고향이라고 생각해 본적 없는 함경북도 길주에 의사로 배치 받았다. 평양에서 살다가 지방으로 내려왔지만, 부모님의 교육열은 대단했다. 그 덕분에 형제들은 학교에서 간부를 도맡아 하면서 성장했다.아버지의 설득에 넘어가 김 씨는 원산에 가서 시험을 쳤다. 한 달 뒤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래도 교원이 못될 바에는 가지 않으려 했는데 이번엔 아버지가 엄한 얼굴로 말했다. “너 대학에 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한다.”결국 그는 원산에 가 5년6개월 과정을 마치고 졸업했다. 졸업한 뒤 강원도 회양군에서 3년 동안 3대혁명 소조원으로 일하면서 자동판매기를 도입하는 등 업적도 세웠다.3대혁명 소조원 생활을 마치고 중앙당에서 내려와 어디로 가겠냐고 물었을 때 그는 평양에 가겠다고 했다. 부모님의 소원이 죽을 때 고향문턱을 베고 죽는 것이었기에 그 꿈을 이뤄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출신 성분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평양에서 가까운 남포였다. 남포에 간 그는 수출입 관련 특급 기업소의 재정부기과 지도원으로 배치돼 채권, 채무를 담당했다.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에도 엄연하게 채권과 채무가 존재했다. 회계장부에는 채권 대신에 ‘받을 돈’, 채무 대신에 ‘물어줄 돈’이라고 적혀 있긴 했지만 그의 직책은 분명 채권채무 담당 지도원이었다.강원도에서 살다가 남포에 간 김 씨는 기업소 구내에 산더미처럼 쌓인 엄청난 물자를 보는 순간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사나’ 싶어 깜짝 놀랐다고 했다. 각종 물자가 다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제주도에서 북한에 보낸 귤도 실컷 먹었다고 했다.그러나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거짓말처럼 창고들이 텅텅 비기 시작했다. 출근길엔 꽃제비들이 시체가 돼 방치됐다.김 씨의 기업소는 북한에서도 유명한 기업이라 말 사료로 들어온 통밀을 주긴 했지만 배급은 꼬박꼬박 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기업소 4500여명이 모두 도둑놈으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봤다.“사람들이 아침에 출근할 때 도시락 두 개씩 가져와요. 그리고 퇴근할 때 도시락에 창고에 쌓여있는 식량을 몰래 채워 가는 거죠. 경비대가 총을 쥐고 단속하지만, 그들에게 적당히 나눠주면 눈을 감아주었어요.”# ‘어쩌다보니’ 탈북2002년 어느 날 함경북도 국경에 살던 시어머니가 남포에 왔다. 그는 중국 형제들을 방문하고 왔다며 달러와 각종 물건들을 가져왔다. 김 씨는 1992년 결혼했는데, 결혼하고 나서야 남편의 부모가 중국에서 살다 북에 온 사람임을 알았다.시어머니는 김 씨에게 중국 구경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설득했다. 특색있는 사회주의를 한다는 중국의 모습이 보고 싶었고 많이 궁금했다. 그래서 시어머니 진갑 잔치를 명분으로 아이들까지 데리고 떠났다. 그것이 북한에 남겨진 어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이라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며칠 동안 기차를 타고 도착했더니 이미 시어머니가 브로커까지 물색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한국까지는 전혀 생각도 못했어요. 남포 집을 전혀 정리도 못했죠. 이렇게 올 줄 알았으면 사진이라도 챙겨왔을 걸….” 김 씨는 지금도 멋모르고 떠났던 일이 마음에 맺힌다.남편을 따라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가면서도 김 씨는 ‘중국에 가서 구경 좀 하고 돈 좀 받아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어느 날 산을 세 개 넘어 두만강에 갔다.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야밤에 강으로 접근하는데 남편과 브로커, 둘째 아들이 갑자기 땅이 꺼지며 사라졌다. 서로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곳이라 그들은 옥수수 밭에 숨어 밤새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아침이 돼 보니 그들 바로 코앞이 국경경비대 잠복초소였고, 총을 멘 군인들이 아침 식사를 하려 돌아갔다. 낮에 슬금슬금 낭떠러지로 다가가 살펴보니 남편 일행 역시 다시 올라올 수도 없고, 소리쳐 부를 수도 없어 거기에 숨어있었다.하늘이 도왔는지 그들은 기적처럼 다시 만났다. 지체하면 경비대가 다시 초소로 올 시간이다. 제대 2개월을 앞둔 군인이 브로커였는데, 군복을 벗어놓고 팬티 바람으로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건넜다. “어디 가서든 조국은 잊지 마십시오” 브로커였던 군인이 헤어지면서 한 말이다. “돌아올 건데 왜 저런 말을 하지 의아했죠. 지금 생각해보니 그 군인은 가족이 강을 넘는 것을 보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아요. 저만 몰랐죠.”두만강을 넘은 이튿날 시어머니와 두 아들은 먼저 하얼빈(哈爾濱)의 친척집으로 떠났고 김 씨 부부는 북한 국경경비대가 마주 보이는 두만강가 조선족 집에서 일주일동안 머무르다 나중에 하얼빈으로 떠났다.친척집에 한 달 정도 머물고 있던 때에 이웃의 신고로 공안에 체포됐다. 벌금 1만 위안을 내겠다고 말하고 석방되긴 했지만 불안해서 그날 중으로 도시를 떠나야 했다.그때 한국에 가있던 시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함경도에 살던 시누이가 중국에 가서 사는 줄 알았는데, 한국으로 간 줄은 저도 몰랐어요. 그가 한국에 오는 선을 알려주더군요.”그들은 몽골을 통해 한국으로 오는 노선을 선택했다. 시어머니도 당초 북에 돌아가려 했는데 예정에 없이 한국에 왔다. 차를 타고 몽골 국경까지 가는데 운전기사가 한족이었다. 그들 가족 중엔 중국어를 하는 사람은 시어머니밖에 없었다. 말 모르는 운전기사에게 아들 며느리와 손자들을 맡길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도 차를 타고 아들을 따라 몽골에 왔다. 중국과 몽골 국경의 높은 철조망을 초인적 힘으로 넘어 자유를 찾았다. 2003년 12월 가족은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고, 이듬해 4월 하나원을 졸업했다. 하나원에서 앞으로 살 지역을 배정받는데 모두들 서울에 가겠다고 해서 제비뽑기를 해야 했다. 김 씨는 운이 좋게 서울을 뽑았다. # 귀가 뚫리다“한국 사회에 나와서 우리의 목표는 세탁소를 차리는 것이었어요. 하나원에서 성공한 탈북민의 성공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가 세탁소를 한다는 이야기에 당시 하나원 동기였던 40여명의 교육생이 모두 사회에 나가면 세탁업을 하겠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세탁소를 하려니 돈을 벌어야 했다. 한국 사회에 나오지 마자 일자리를 찾았지만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어렵게 구했던 카센터 경리일은 두 달 만에 그만두었다.그때 탈북민 지원단체인 ‘새조위’의 신미녀 대표가 집에 찾아왔다. 북에서 갓 온 탈북민을 면담하기 위해 수소문하다가 부부 모두 북한 중앙대학 졸업생인 이들을 소개받은 것이다.“한국에 와서 탈북민 면담을 여러 차례 했는데, 모두 오라고만 했지 직접 집에 찾아온 사람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게 인연이 돼서 새조위에서 일하게 됐어요.”새조위에서 일하면서 김 씨는 국회의원, 교수, 의사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그들을 보면서 그는 “여기 와서 배우지 않으면 내게 기회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2004년 남편과 함께 경남대 북한대학원대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부부는 2006년 석사 학위를 마치고 바로 동국대 북한대학원 박사 과정에 나란히 입학했다.“외국에 나가면 외국어에 익숙해 귀가 뚫릴 때까지 기간이 있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그랬어요. 패러다임이 어떻고, 매커니즘이 어떻고 하는데 도무지 뭔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녹음을 했다가 집에 와서 남편과 함께 같이 들으며 사전을 찾아보며 배웠어요. 3년이 되니까 귀가 뚫리더군요. 교수님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할 때마다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지 도대체 뭘 가르치지’ 혼돈스러웠습니다. 그게 당에서 가르치는 정답만 배웠던 북한식 사고방식 때문이었던 것이죠.”자존심을 내려놓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석사 논문 심사 때 담당 교수가 논문 절반을 버리고 다시 쓰라고 했다.“온 밤 눈물 한 동이는 흘렸던 것 같아요. 석사 안 하다고 했어요. 교수님이 여기에서 살려면 여기 방식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했죠. 그때가 참 힘들었던 것 같아요.”박사 과정에 들어가고 나니 그제야 방식이 뭔지 느낌이 왔다. 귀가 열리고, 차이를 인정하니 박사 과정은 석사 때보다 힘들지 않았다.# 1호 탈북 박사 부부석사를 마쳤을 때 그에게 기회가 왔다. 산업은행에서 ‘북한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한국에서 석사 학위를 마친 북한 경제 조사 직원’을 특별채용으로 뽑는다고 한다.“제가 행운을 잡았던 것은 분명했죠. 그러나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말이 뭔지 그때 느꼈죠. 제가 한국에 와서 열심히 석사 학위를 따지 않았으면 그런 기회를 잡았을까요.”2006년 그는 산업은행에 입사했다. 일을 하면서 박사 공부까지 하려니 너무 힘에 부쳤다.남편은 2011년 박사를 받았다. 김 씨는 2013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탈북민 최초의 부부 박사가 탄생한 것이다. 남편인 김병욱 박사는 현재 (사)북한개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박사 논문 쓸 때 교수님이 힘들겠다고 직장 앞에까지 두 번이나 찾아와 논문을 지도하고 갔어요. 정말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산업은행 북한연구팀 연구원으로 들어갔지만 보고서 쓰는 것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나이가 한참 어린 선임이 새까맣게 고친 보고서를 보고 기가 막혔지만, 집에 가서 다시 필사를 해가며 하나하나 적응해나갔다.북한연구팀이 정책금융공사로 분리됐을 때 그쪽으로 옮겨갔다가 2015년 산업은행과 통합하며 다시 돌아왔다.2013년 2월 박사 학위를 받고 이틀 뒤 그는 북한경제팀장으로 임명됐다. 김 씨는 그때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저는 계약직 탈북민이잖아요. 저는 팀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저를 팀장으로 임명해주니 너무 감동했죠. 이런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것이 그때 비로써 실감이 나며 뿌듯했습니다.”팀장을 거쳐 산업은행 선임연구위원을 맡고 있는 지금도 그는 은행에 늘 빚을 진 심정으로 살고 있다. “항상 고민하죠. 탈북민에게 이런 과한 직책을 주었는데 내가 과연 제대로 잘 하고 있는 것일까. 명절도 늘 편안하지 못합니다. 내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너무 부족한 것은 아닌지 항상 고민하죠.” 열심히 노력한 결과 그는 2007년 산업은행에 입사한 이래 북한 경제전문가로 인정받아 수많은 국가기관 임명직을 지냈다. 그가 정책자문을 지낸 부처만 국회, 통일부, 외교부, 국방부, 해수부, 기재부 등 수없이 많다. # 고진감래탈북 1호 박사 부부의 아침은 논쟁으로 시작하는 날이 많다. 북한에서 이슈가 터졌다면 둘은 식탁에 앉아 자기 생각을 펼치다가 말다툼까지 간 적도 많다. “서로 언쟁을 하지만 서로 도움이 돼요. 서로 다른 생각을 들으면서 아이디어가 막 떠오르죠. 북한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고요. 남편과 같은 일을 하다보니 공저로 두 편의 책을 펴내기도 했죠.”두 아들은 그런 부모를 보며 자랐다. 탈북할 때 가시에 찔리며 맨발로 두만강까지 오면서도 한마디 비명소리도 내지 않았던 어린 아들들은 이제 20대 청년으로 성장해 대학에 다니고 있다.“정말 아이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죠. 부부가 박사까지 하면서 관심을 돌릴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처음에 아이들이 여기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무장공비’라고 놀림을 받았어요. 그랬던 아이들이 모두 씩씩하게 스스로 잘 자랐어요.”막내아들은 유치원 때 북한을 나와 한국어를 떼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갔다. 처음엔 시험만 쳤다고 하면 0점을 도맡아 받아왔다. 그랬지만 한국어를 공부한 뒤로는 1년에 책을 500권 이상 읽기 시작했고, 5학년 때 서울교육대학 영재교육 추전을 받았다. 큰 아들도 카이스트 영재교육을 받고 상하이청소년엑스포에서서 발표를 하기도 했다.“아이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탈북민도 좀만 적응할 시간을 두고 지켜봐주면 스스로 알아서 잘 정착할 수 있다고요. 결국 몇 년은 헤맬 수 있지만 그게 다 정착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탈북민도 스스로 자기에게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훌륭하게 정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인가. 김 씨의 삶의 좌우명은 ‘고진감래’라고 한다. 북에서부터 갖고 있던 좌우명이라고 한다. “학교 때 아무리 힘들어도 교과서 몇 개를 외우고 나면 분명 높은 점수가 따라왔어요. 고생한 것만큼 좋은 결과가 오는 것을 그때 알았죠. 지금 돌아봐도 저의 인생 자체가 고진감래입니다.”모든 탈북민이 그러하듯 김 씨의 꿈도 빨리 통일이 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고향에 가면 1호점을 낼 겁니다. 뭘 차려도 1호점이 될 거 아니겠어요. 그때는 한국에서의 경험도 살려서 정말 잘 할 수 있겠죠. 돈을 벌기 위해서보다 고향사람들과 뭔가 함께 하고 싶어서요.”꿈을 이야기할 때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톤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꿈이 있는 한 그의 삶도 항상 반짝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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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50년 노하우 담긴 국민커피

    대한민국 커피의 대명사 ‘맥심’이 탄생 40주년을 맞았다. 1968년 창립한 국내 대표 커피전문기업 동서식품(대표 이광복)은 1980년 한국 커피산업사에 일대 전환점이 된 커피 브랜드 ‘맥심’을 탄생시켰다. 맥심은 끝없는 기술 개발과 제품 혁신으로 국민커피로 불리는 모카골드부터 국내 인스턴트 원두커피 시장을 개척한 맥심 카누 등 다양한 제품을 출시해 국내 커피 시장의 역사를 쓰고 있다. 조선 후기 고종 황제가 즐긴 것으로 유명한 커피는 1945년 광복 이후 다방 등에 널리 보급됐다. 그러나 당시 유통되던 커피는 대부분 밀수 등 합법적이지 않은 경로로 유통됐다. 1968년 설립된 동서식품은 미국 제너럴푸즈사와 기술 제휴를 맺고 1970년 맥스웰하우스 커피를 생산하며 국산 커피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동서식품이 국내 최초로 출시한 인스턴트 커피 ‘맥스웰 화인’은 뛰어난 품질을 앞세워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기호품이던 커피가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 국내 시장에서 인스턴트커피가 증가세를 보이던 1970년대 중후반, 동서식품은 향후 커피 시장이 좀 더 고급스러운 맛과 향을 내는 시장으로 변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동결건조 커피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파트너사인 제너럴푸즈는 연간 국민소득이 1000달러도 되지 않는 한국에서 고급 커피가 팔릴 리가 없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동서식품은 한국 소비자의 입맛이 고급화될 것으로 예견하고 동결건조 커피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1980년 9월 국내 최초의 동결건조 커피인 ‘맥심’이 탄생했다. 인기 탤런트 이순재를 모델로 한 맥심 컬러 광고는 맥심 명사 시리즈로 이어지며 큰 호응을 얻었다. 1980년 1대의 설비로 시작한 맥심 공정은 불과 4년 만인 1984년 시설을 2배로 증설했다. 맥심은 소비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으며 1987년에는 맥스웰하우스의 매출액을 추월했고 1988년 이후 국내 커피 시장을 주도하며 동서식품의 주력 제품으로 부상했다. 맥심 모카골드가 지난 30여 년간 커피믹스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며 국민커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고품질 원두에 대한 고집과 50여 년 커피 제조 노하우에 기반한 뛰어난 기술력에 있다. 동서식품은 반세기 기술력으로 커피, 설탕, 크리머의 황금 비율은 물론 콜롬비아, 온두라스, 페루 등 엄선한 고급 원두를 최적의 비율로 블렌딩해 언제 어디서나 누가 타도 맛있는 커피를 만들었다. 획기적인 포장 기술의 도입을 통해 소비자 편의성을 높여온 점도 높게 평가받고 있다. 동서식품은 1987년 국내 최초로 스틱 형태의 커피믹스를 출시한 뒤 1996년 세계 최초로 커피믹스 스틱에 커피, 프리마, 설탕의 순서대로 포장하는 설비를 구축했다. 각자의 기호에 맞게 설탕 양을 조절해 커피믹스를 즐길 수 있게 돼 소비자들이 느끼던 작은 불편을 해소했다. 2000년대 후반에는 야외 여가활동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편의점이 급성장함에 따라 간편하게 구입해 마실 수 있는 커피음료가 각광받기 시작했다. 동서식품은 2008년 6월 언제 어디서나 커피전문점 수준의 리얼 에스프레소를 즐길 수 있는 ‘맥심 티오피’를 출시했다. 또 2000년대 접어들면서 젊은층을 중심으로 원두커피가 점차 인기를 얻는 것에 착안해 2011년 국내 최초의 인스턴트 원두커피 ‘맥심 카누’를 출시했다. 동서식품 관계자는 “국내 최초 동결건조 커피인 ‘맥심’을 선보인 이후 커피믹스, 인스턴트 원두커피 등 새로운 커피시장을 창출하며 국내 커피문화를 이끌어왔다”며 “앞으로도 50여 년에 걸쳐 쌓아온 커피 제조 노하우를 바탕으로 소비자들이 어디서든 커피 한 잔으로 일상의 작은 여유와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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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 빠지겠네’ 韓댄서에 충격…北출신 무용감독 “최승희 계보 잇겠다” [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2015년 9월 전북 남원에서 열린 ‘국민대통합 아리랑공연’ 한복 패션쇼는 기존과 다른 연출을 선보였다. 한복을 입은 모델들이 워킹 중심의 기존 패션쇼와는 달리 민요의 흥겨운 선율에 맞춰 우아한 춤을 추며 등장한 것이다. 무대 뒤에서 한 중년 여성이 차례를 기다리는 모델들에게 몸짓을 해가며 열정적으로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너는 무대 중심에서 세 걸음 더 나간 뒤 돌면서 손가락을 이렇게 쥐고 관객을 쳐다보며 퇴장해. 퇴장할 때 새로 들어오는 친구랑 눈을 맞추면서 무릎 살짝 굽히며 인사하고….” 설명을 들은 모델이 무대에 올라간 뒤 그는 다음 모델에게 “이 지점에서 둘이 헤어진 뒤 후렴 두 번째 박자에 모자를 벗어 옆구리에 대고 반쯤 돌아서”라는 식으로 설명을 했다. 그녀는 북에서 온지 3년째 된 최신아 씨다. 이날 공연은 북한에서 함경북도예술단 무용감독을 지냈던 그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안무를 선보인 자리였다. “전날 저녁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한복 패션쇼는 민요에 맞춰 했으면 좋겠는데, 나보고 안무를 맡아달라는 거예요. 너무 황당했죠. 당장 내일이 공연이고, 심지어 음악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어요. 이렇게 빠듯하게는 못한다고 하자 주최 측에서 ‘창작도 가능하다면서요? 즉흥적으로 한번 해 보세요’라고 하더군요.” 최 씨는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 좋아. 북한에서 27년 동안 무용을 했던 자존심을 걸고 해보자.’ 음악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모델 11명의 동선을 그렸다. 그런데 행사 당일 갑자기 모델이 16명으로 늘었다. 구도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모델들은 대다수 민요를 전공한 20대 여성들로 무용과 구도의 개념이 없었다. 그들을 데리고 한나절 사이에 동작을 가르치고, 개별적으로 무대에 오를 때, 두세 명씩 오를 때, 단체로 오를 때 해야 할 동작들을 가르쳤다. 시간이 급박해 공연 진행 중에도 그는 모델들에게 무대에 오르기 전에 동작을 다시 가르쳐야 했다. 그렇게 급히 진행한 패션쇼가 1500명 관객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으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을 때 그는 탈북 이후 처음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주최를 맡았던 한 인사가 공연이 끝난 뒤 말했다. “대단한 실력인데, 너무 아까워요. 예술단 하나 만들어보면 어때요. 밀어드릴게요.” 그렇게 2015년 11월 최신아 예술단이 만들어졌다. 최 씨가 오디션에 온 80명의 후보 중 5명을 뽑아 만든 예술단이었다. 이는 북한에 이어 한국에서 무용 경력을 새롭게 쌓는 계기가 됐다.#12살 때 시작한 춤최 씨는 1969년 평양에서 예술영화촬영소 간부의 딸로 태어났다. 6.25전쟁 때 나이를 두 살 숨기고 군에 입대한 부친은 정찰병으로 뽑혀 17살 때 부산까지 가 본 것을 자식들에게 두고두고 자랑했다. 최 씨가 춤을 시작한 계기는 우연이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던 최 씨는 소학교(초등학교) 때부터 배구선수로 활동했다. 그런데 중학교에 진학한 1981년 그의 학급이 ‘2중 영예의 붉은기’ 학급으로 지정돼 평양학생소년궁전 가야금 소조반으로 통째로 뽑혀가게 됐다. 학생소년궁전에서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워낙 활동적이었던 그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루는 어디선가 들리는 장단소리에 끌려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가 몰래 들여다보니 자기보다 훨씬 큰 언니들이 무용을 하고 있었다. 너무 멋져 보였다. 그는 담임선생에게 가야금 대신 무용을 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무용선생은 아래위로 최 씨를 훑어보고 몇 가지 동작을 시켜보았다. 남달리 큰 키에 팔과 목까지 길고 유연성과 청각이 좋았던 최 씨는 그 자리에서 무용소조로 결정됐다. 그렇게 무용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2년 최 씨 가족은 함북 청진으로 추방됐다. 둘째 오빠가 패싸움에 여러 차례 가담하는 등 평양에서 물의를 일으켜 온 가족이 평양에서 쫓겨난 것이다. 청진에 온 최 씨는 평양학생소년궁전 경력을 인정받아 청진예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이 학교의 무용선생인 김응범은 ‘전설의 무희’ 최승희의 제자였다. 그가 키운 학생들은 피바다예술단, 만수대예술단에서도 주인공으로 활약했다. 훈련은 혹독했다. 하루에 8~10시간은 기본이었다. 매일 기초훈련을 두 시간 한 뒤 10분 쉬고 발레를 한 시간하고, 다시 조선무용을 한 시간한 뒤 작품 훈련에 매진했다. 집단체조 강국을 자처하는 북한은 무용만큼은 어딜 가나 혹독하게 가르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힘든 훈련을 이겨내며 기량을 인정받은 최 씨는 예술학교 전문부를 졸업하고 17세 때인 1986년 함경북도예술단 무용수로 임명됐다. 젊은 시절엔 평양을 수시로 오가며 김일성과 김정일 등이 참석하는 공연에 수시로 참가했다. 1989년 평양에서 열린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때는 유명 예술단원들과 함께 각국 입장 팻말을 들고 가는 요원으로도 뽑혔다. “그랬다면 지금 다큐에서 제 얼굴을 찾아볼 수 있을 건데, 아쉽게 입장을 못했어요. 제가 상투메 프린시페를 담당했는데, 온다고 했던 대표단이 안 왔거든요.” 최 씨는 2008년 탈북할 때까지 예술단에서 22년 동안 무용을 했고, 예술단 무용 감독까지 맡았다. 26세 때 3급 예술인으로 승진해 ‘65호 국가 특별공급대상’으로 인정받았다. 북한은 예술인들에게 6급에서 시작해 1급까지 급수 제도를 운영한다. 신인은 6급이고, 2급은 공훈예술인에게, 1급은 북한 예술인의 최고 영예라는 인민예술인 칭호를 받아야 부여한다. 3급부터는 따로 정한 공급소에 가서 쌀과 부식물, 계란, 기름, 당과류 등을 특별히 받게 된다. 그만큼 3급은 예술인들이 받기 어려운 급수였다.# 남조선을 만나다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은 예술인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어쩌면 뇌물을 받을 수 있는 권력이 전혀 없는 예술인이 제일 큰 피해자라 할 수 있다. 허기진 사람들에게 무용은 사치였다. 예술인들도 출근해 3시간만 훈련하고 오후에는 장마당에 나가 장사를 해야 살 수 있었다. 훈련 밖에 모르던 최 씨도 이때 장사에 눈을 떴다. 2006년 그는 처음 중국에 나왔다. 중국에 외삼촌이 살고 있어 합법적으로 여권을 받아 친척 방문으로 나올 수 있었다. 처음 와본 중국은 최 씨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2008년에 또 친척방문을 구실로 여권을 떼어 중국에 왔는데, 이때는 아예 작정을 하고 6개월 동안 체류하며 돈을 벌기위해 나왔다. 부모가 한국에 간 어느 조선족 집에서 어린 아들을 봐주는 가사도우미 자리를 얻었다. 이때 그는 처음 인터넷을 알게 됐다. 한국 무용이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 “설운도, 태진아, 김세레나 같은 가수들의 공연을 보았는데 백댄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어머나, 저렇게 추다가 목이 빠지겠다’고 생각했어요. 백댄서들이 치마저고리 입고 나와 무대 위를 뛰어다니는 걸 보고 ‘저건 웬 괴상한 춤이냐’고도 생각했죠. 그때 내가 한국에 가면 안무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들었어요.” 어느 날 평양예술단 공연 영상도 보았다. 그 예술단은 탈북민들이 서울에서 만든 예술단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몰랐던 최 씨는 ‘우리나라에서 서울에 저런 예술단도 보냈나’하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최 씨의 마음에 점점 ‘한국에 가서 북한 무용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그러나 그에게 한국의 이미지는 북한에서 교육받은 대로 ‘썩고 병들고, 화염병이 난무하고, 예쁜 여성들이 길거리에서 총에 맞는 곳이고, 저녁에 안보이면 죽었다고 간주하는 곳’이었다. 한국에 가면 신변안전이 절대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 믿었다. “북에서 예전에 직장마다 ‘선동원’ 제도를 만들 때 저는 우리 예술단의 최초 선동원으로 임명받았어요. 출근하자마자 200여명의 동료들을 모아놓고 ‘당의 부름을 받고 시작하는 오늘 하루를 충성을 바치고 양심의 땀을 흘리자’고 선동하는 일이었죠. 썩고 병든 자본주의 날라리 풍에 절대 물들면 안 된다고 선전하는 일도 제 몫이었어요. 그러다보니 어느 새 제 머리 속에 남조선은 정말 무서운 지옥이란 개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돌봐주던 아이의 부친은 한국에서 자주 전화를 해왔다. 그는 한국이 절대 그런 세상이 아니라고 계속 이야기했다. 하지만 최 씨는 ‘원래 자본주의 보도란 조작’이라며 믿지 않았다. 6개월만 돈을 벌고 북에 돌아간다던 계획은 어그러졌다. 중국이 마음에 들고, 일도 편하고 주변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눌러앉은 기간이 길어지더니 어느새 3년을 넘겼다. 그때 위기가 찾아왔다.# 탈북2011년 9월 어느 날 새벽에 전화가 걸려왔다. 젊은 남자가 대뜸 반말로 “야, 너 조선여자인거 모를 줄 알았나. 공안에 신고해 잡아가게 할 거야. 북에 가면 어떤 꼴이 날지 상상해봐”라며 협박을 했다. “돌봐주던 아이의 사촌 누나와 사귀던 남자친구였어요. 그런데 둘이 헤어지고 여자아이가 잠적했죠. 그랬더니 남자친구가 계속 전화를 해 여자 간 곳을 불라는 거예요. ‘모른다’고 했더니 어느 날 신고하겠다고 협박을 한 거죠.” “난 여권 떼고 온 여자니 신고할 테면 해봐”라고 대답은 했지만 3년째 불법체류 중인 처지라 신고하면 북송돼 고초를 겪을 게 뻔했다. 서울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더니 ‘한국 오는 브로커를 찾아줄 테니 지금 집을 나와 연길역으로 가라’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아침 6시에 정말 몸만 빠져나와 역에 갔더니 정말 브로커가 마중 나와 있더군요. 그런데 북에서 막 건너온 젊은 친구 3명과 한 팀이 됐어요. 기차 타기 전까지 일행이 누군지 몰랐는데 역 앞에 나가보니 나무 밑에서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는 얼굴들이 표가 나서 3명이 누군지 보자마자 다 알아버렸죠.” 기차에서 신분증을 검열할 때면 벙어리 시늉을 하며 위기를 넘겼다. 중국에서 동남아 국가로 넘어갈 때는 열대 숲을 헤치며 6시간 동안 줄곧 산을 오르기도 했다. “같이 오던 어린 여자애가 더는 못 간다며 여기서 죽겠으니 버리고 가라는 거예요. ‘죽더라도 엄마한테 가서 죽어’라고 달래며 그 애를 업고 산에 올라갔죠. 제가 그렇게 힘들게 무용 훈련을 했지만, 땀이 이마에서 정말 비처럼 쏟아질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당시는 탈북민이 한해에 3000명 가까이 한국에 오던 시절이었다. 태국 감옥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모든 것이 가장 열악한 때였다. 그 모든 것을 견디고 2011년 11월 한국에 입국했고, 2014년 4월 한국 사회에 나왔다. 사회에 나왔지만 딱히 할 일은 없었다. 낮에는 식당에 나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십자수를 놓으며 3년을 보냈다. 무용에 관심이 있었지만 마흔 다섯이 된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던 2015년 8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국민대통합 아리랑 순회공연을 하면서 무용을 전공한 탈북민을 수소문했는데 북에서 무용 감독을 했다면서요?” 그렇게 그는 한국 무대에 서게 됐다. 북에서 온 무용수로 소개돼 독무를 시작했는데, 장고를 끼고 혼자 무대를 휘젓는 그를 보고 모두가 ‘대단하다’며 박수를 쳤다. 한달이 되니 갑자기 하루 만에 남원 패션쇼 안무를 맡아보라는 제안까지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무용단까지 만들게 됐다.# 최승희의 계보중국에 있을 때 최 씨는 TV에서 한국의 무용을 보다가 많이 놀랐다고 했다. “저건 북한의 기초(기본) 동작으로 무대에 나와서 왜 연습하지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연습이 아니라 작품이라더군요. 그런데 북에선 그런 기초 동작을 완전히 익힌 다음에 작품을 하거든요.” 1987년 북한은 ‘자모식 무용표기법’이란 것을 발표했다. 춤 동작과 구도 등 모든 형상 요소들을 일정한 기호로 악보와 함께 표기하는 방법이다. 무용표기법만 있으면 세계 어느 나라에 있던지 똑같은 선율에 똑같은 춤동작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백조의 호수’와 ‘마주르카’ 같은 유명 무용도 표기가 가능하다. 현재 무용계에서 통용되는 ‘라반표기법’보다 정교하고 풍부한 무용 동작을 표기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그런데 왜 이 표기법은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최 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걸 활용하려면 엄청 많은 것들을 배워야 합니다. 각각의 무용뿐만 아니라 음악의 악보, 장단, 청음까지 기본으로 알아야 하는데, 여기는 그렇게까지 엄하게 훈련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춤은 전통무용, 현대무용, 발레, 뮤지컬, K팝으로 나뉘죠. 그런데 전통무용은 발레를 좀 아는데 현대무용을 모르고, 현대무용은 발레를 아는데 전통무용을 모르고, 발레는 현대무용은 아는데 전통무용을 모르더군요. 북에선 무용과에 들어가면 전통무용, 현대무용, 발레를 동시에 1전공으로 가르칩니다. 거기에 음악의 청음, 장단, 악보까지 모두 전공으로 교육하죠. 북에서 집단 체조할 때 어린 학생들도 고난도의 동작을 일사불란하게 합니다. 일반 학생들도 그렇게 훈련시키는데, 전공과는 얼마나 훈련시키겠어요. 무용만큼은 북한이 훨씬 더 빡세게 배우는 셈입니다.” 다만 북한의 무용은 획일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최 씨는 “한국의 전통무용은 유명인 중심의 여러 계파로 갈라져 지방마다 특색이 다 다른데, 북한 무용은 최승희 단일파라 할 정도로 철저히 최승희 무용의 영향권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최승희는 1969년 북한에서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그의 춤은 다시 복권되기 시작했고, 그의 유해도 애국열사릉에 안치됐다. 2011년 11월 북한은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가 1956년에 창작한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를 리메이크해 무대에 올렸고, 노동신문에서 ‘조선무용예술의 1번수’ ‘조선의 3대 여걸’ 등으로 극찬하기도 했다. # 최신아 예술단자기 이름을 내건 예술단을 만든 뒤 최 씨는 열정적으로 단원들에게 자기만의 무용을 전수했다. 얼마 안 돼 업계에는 “최신아 예술단에 들어가면 너무 빡세다”는 소문이 났다. 처음에는 단원들과의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고생했다. 북한에서 쓰는 무용 용어가 여기선 거의 통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 씨가 한참을 열심히 설명하고 해보라 하면 단원들이 자기들끼리 얼굴을 쳐다보며 “뭐래?”라고 속삭였다. 처음에는 자기를 무시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정말 이해하지 못해 그런 거였다. 최 씨는 집에 들어가면 한국 용어를 공부했다. 그런데 지금도 지시를 할 때 불쑥불쑥 북한 용어가 튀어나와 고생이라고 털어놓았다. 무용단을 데리고 공연을 다녔더니 이번엔 그의 단체가 탈북예술단체라고 소문이 났다. 단원들은 어딜 가나 자기들을 탈북자로 취급한다며 불만이 컸다. 그래서 공연 때마다 최 씨가 무대에 나가 일일이 해명해야 했다. “저희 무용단은 저만 북에서 왔지 단원들은 한국에서 무용을 전공한 경력자들을 오디션을 뽑아 만든 전문적인 무용단입니다.” 방송에 출연하고, 국가 차원의 공연도 참가하면서 3년쯤 지나자 관객들이 아래에서 자기들끼리 “탈북예술단이라니까” “아니야, 단장만 탈북했다잖아” 이러면서 싸우는 수준까지 인지도가 높아졌다. 초기 최 씨는 한국 사회에 너무 무지했다. 후원자는 단원 월급은 지급했지만 최 씨의 월급은 주지 않았다. 공연 수익 전액을 가져갔다. 최 씨는 처음 2년 동안 한 푼도 벌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이름만 자기 예술단이지, 수익은 남의 것이 됐던 것이다. 결국 그는 2018년 독립을 선언했다. 고맙게도 단원들이 따라와 주었다. 지난해 최 씨는 자기 이름을 딴 무용연구소도 만들었다. 이제는 일본, 중국 등에서 그에게 무용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제자도 생겼다.# 최신아의 꿈무용으로 한국 사회에서 승부를 본지 5년차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최신아란 이름이 한국 무용계에도 알려지고, 단원들도 최신아 예술단에서 무용을 배웠다면 경력으로 인정받게 됐다. 여기저기서 함께 공연하자는 제안도 들어온다. 그러나 올해 터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최 씨의 예술단에게도 타격을 줬다. 예약됐던 공연들이 줄줄이 취소됐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도 없었다. 지난해엔 해외에서도 초청받아 러시아와 인도에서 공연했는데, 올해는 예술단의 활동 범위를 해외로 넓히려는 시도마저 좌절됐다. 요즘 최 씨는 무용연구소 중심으로 제자들을 키워내는데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이 연구소에 가면 북한처럼 학생들에게 장단과 악보를 가르치고 기초 동작을 익히는데 중점을 둔다. “저는 한국춤의 장점과 북한춤의 장점을 결합해 한반도 평화의 춤을 만들고 싶어요. 무용도 70년 넘게 분단이 돼 남북의 차이가 너무 커졌어요. 저는 북에서 27년을 무용만 했고 한국에 와서도 5년째 무용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전통춤은 속도가 느린 반면 북한 춤가락은 매우 빠르거든요. 앞뒤에 북한처럼 빠르고 경쾌한 춤을 넣고, 중간에 한국의 춤가락을 넣으면 이것이 최신아만의 고유의 춤, 나아가 최승희 무용의 계보를 이으면서 남북의 장점을 결합한 새로운 무용 사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미 최 씨는 최승희의 ‘무희춤’을 계승한 ‘쟁강춤’, ‘평양장고춤’ 등 여러 작품을 자신만의 특색을 입혀 창작했다. 그의 정착과 더불어 6년 전 북에서 데리고 온 딸도 잘 적응했다. 처음엔 대학에 가도 친구가 없다며 북한으로 다시 가겠다고 떼를 썼지만 이제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에서 수십 만 구독자와 팔로워를 거느린 인플루언서가 돼 하루하루 바쁘게 살고 있다. 최 씨는 요즘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한국에 온 게 정말 잘한 것 같아요. 무용만 하면 저는 행복해져요. 여기선 죽을 때까지 무용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의 얼굴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한국에서 무용을 다시 시작한지 5년 만에 저렇게 행복한 표정이니, 그의 얼굴이 10년, 20년 뒤에는 어떻게 바뀔지 궁금해졌다. 74년 전 전통 무용과 현대 무용의 용합을 시도해 신무용을 창시한 천재 무용가 최승희는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 숱한 제자들을 키워냈다. 반세기가 넘게 지난 뒤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무용 감독 최신아는 한국 무용계에 어떤 족적을 남길까. 단절된 남북의 무용을 다시 합치겠다는 최 씨의 꿈은 서울에서 이뤄질까.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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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안함 폭침 ‘1번’ 어뢰의 비밀[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파란 매직으로 ‘1번’이라 쓴 어뢰 추진체 부품은 북한이 천안함을 공격했다는 결정적 증거다. 그러나 천안함 폭침이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은 1번이란 글자에 대해 온갖 음모론을 제기해왔다. 1번은 도대체 왜 적혀 있던 것일까. 북한에서 어뢰를 오랫동안 다뤄봤던 전문가가 최근 탈북해 국내에 들어왔다. 그를 만나 전해 들은 답변은 너무나 간단하면서도 이해가 잘돼 ‘10년 동안 우리가 이런 단순한 걸 몰랐단 말인가’ 싶어 허탈할 지경이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잠수함 함장이라 가정해 보세요. 어뢰를 쏴야 하는데, 몇 발을 쏴야 할지 모를 때 어느 어뢰부터 쏘겠습니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어뢰부터 발사하지 않겠습니까. 북한 잠수함은 탑재된 어뢰의 생산연도, 부품 및 정비 상태 등을 다 따져 어뢰 발사 순서를 미리 정해놓고 있습니다. 가령 북한 최대 잠수함(로미오급)은 수상 수량 1700t, 수중 수량 1919.36t인데, 앞에 6발, 뒤에 6발, 예비 2발, 모두 14발의 어뢰가 있습니다. 여기에 발사 순서 1번부터 14번까지 정해놓고 있는 겁니다. 북한은 어뢰를 매년 10∼11월 모두 내려 정비합니다. 이듬해 1월 정기훈련을 앞두고 연례적으로 진행하는 일이죠. 특히 바닷물과 해풍에 노출돼 있는 해군 무기나 탄약은 녹이 슬고, 윤활유도 굳어지는 등의 문제가 심각해 정비가 매우 중요합니다. 북한 잠수함 전대는 어뢰관리조종대대를 갖고 있습니다. 어뢰는 방향, 침로, 심도 등을 조정하는 숫자 조정기를 먼저 떼어내고, 나머지를 분해해 알코올과 베-70이라는 휘발유로 닦고, 다시 윤활유를 새로 발라 조립합니다. 그런데 정비 철에는 여러 잠수함에서 내린 어뢰 수십 발이 병기창에 한꺼번에 들어옵니다. 그럼 정비할 때 부품들이 섞일 가능성이 높겠죠. 그래서 해당 잠수함의 1번 어뢰는 부품에도 1번이라 쓰고, 3번이면 3번이라 쓰는 겁니다. 그래야 그 어뢰는 정비한 뒤에도 신뢰할 수 있는 1번 어뢰로 남게 됩니다.” 설명을 들으니 쉽게 이해됐다. 북한은 천안함 공격 때 매뉴얼대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1번 어뢰를 싣고 온 것이다. 또 천안함 피격 7년 전 한국 해역에서 발견된 북한이 유실한 훈련용 경어뢰에 왜 ‘4호’라고 적혀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참고로 한국 해군은 어뢰를 정비할 때 매직으로 1번, 2번이라는 식으로 쓰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중국이나 러시아가 1번이라고 한글로 적을 일도 없다. 북한이 발사한 어뢰는 어떤 종류일까. “북한의 전투용 중어뢰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과거 소련(러시아)에서 수입해오다 나중에 이 어뢰를 복제한 중국에서도 사오긴 하는데, 사이즈는 똑같습니다. 사이즈가 다르면 잠수함에서 쓸 수가 없어요. 중어뢰는 길이 7.738m, 지름 533.4mm, 어뢰 무게 2t, 속도가 51노트입니다. 장약량은 TNT 200kg입니다. 어뢰 발사관 지름은 어뢰 지름보다 딱 2mm 큰 535.4mm입니다. 전투 사거리는 4km이지만, 그러면 명중률이 너무 떨어져 2km 안에 접근해 발사하라고 가르칩니다. 이걸 어뢰 돌격거리라고 합니다.” 북한 어뢰 장약량(폭약을 장착한 양)이 TNT 200kg이라는 것도 중요한 증언이다. 천안함 피격 당시 백령도 지진관측소에는 TNT 약 180kg 규모의 폭발이 감지됐는데, 이를 근거로 ‘북한 어뢰의 장약량이 250∼300kg이니 이는 어뢰 폭발로 볼 수 없다’는 주장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천안함 피격 브리핑 때 국방부는 “북한이 자체 생산한 ‘CHT-02D’ 어뢰를 발사한 것으로 보인다”며 제원을 공개했다. 이를 보면 북한제 어뢰는 수입 중어뢰보다 길이는 0.388m 줄어든 7.3m, 전체 중량은 300kg 줄어든 1.7t인데, 탄두 중량은 오히려 50kg이나 더 늘어난 250kg이고, 사거리는 무려 15km나 된다. 그는 이에 대해 “천안함 폭침 때 현직에 있지는 않았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는 국산 어뢰가 없었다”며 “길이, 무게가 줄었는데, 탄두 중량과 사거리가 훨씬 더 늘어난 어뢰를 북한이 갑자기 생산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고 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북한 어뢰에 대해 이 정도로 정확하게 진술한 사람은 없다. 그의 이번 증언이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힘을 얻게 될지 궁금하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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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동서 밀차 끌던 혜산 남자, 매출 25억 사장님 변신[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접이식 밀차에 책을 가득 싣고 나자, 사장이 말했다.“자, 이제는 이걸 택배 기사에게 끌고 가라.”“네?”42세 늦깎이 신입사원 김인철 씨는 당황했다. 택배 기사가 물건을 받아가는 대로변 약속 장소까지 가려면 번화가인 서울 명동거리를 가로질러 가야 했다. 북한에서 무역일꾼도 했고, 학생들도 가르쳐봤던 그는 허름한 작업복 차림에 밀차를 끌고 인파 가득한 명동거리를 다닌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삼복더위에 온몸은 땀으로 젖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외국인 관광객들이 자기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머리를 푹 숙인 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이렇게 살려고 한국에 왔나’는 자괴감이 계속 들었다. 그때마다 그는 다시 이를 꽉 깨물었다.‘이젠 더 물러설 곳도, 도망갈 곳도 없다. 창피함을 버려야 돈을 번다.’2014년 여름 그는 그렇게 명동거리를 수없이 오갔다. 6년 뒤인 2020년 김 씨는 매출액 25억 원을 기록한 인쇄업체 사장으로 거듭났다.# 탈북김 씨는 1972년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에서 압록강까지는 불과 50m 정도 거리였다. 어린 시절 그는 압록강에 나가 수영을 했고, 팬티 바람으로 맞은편 중국 창바이(長白) 현 시장에 가서 돌아다녔다. 그 시절에는 국경경비대도 없었다. 1987년에야 군인들이 혜산에 들어왔지만, 압록강에서 노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겨울엔 중국 아이들과 압록강 얼음판에서 만나 북한 물품과 중국 물품을 교환했다. 북한에 많은 명태 20마리를 주면 중국제 포커카드 한 세트와 바꿀 수 있었다. 비누, 다리미, 가위까지 압록강 위에서 온갖 물품이 오갔다.혜산식료공장 지배인을 부친으로 둔 김 씨는 수재학교인 혜산외국어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1994년 김정숙사범대학 영어과도 졸업한 뒤 실습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쳐보니 교사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뇌물을 주고 교사 임용을 거부하고 혜산시 보안서(경찰) 소속 수출과 부원으로 옮겨갔다. 사실상 밀무역을 담당하는 자리였다.밀무역은 잘할 자신이 있었다. 집 바로 앞에 있는, 어려서부터 뛰어놀았던 압록강 지형은 눈에 훤해 밀수에 적임자였다. 보안서 소속 신분증을 갖고 다니니 체포될 염려도 없었다.통나무, 몰리브덴 등 닥치는 대로 중국에 넘기고 식량과 바꿨다. 10년 넘게 밀무역을 했지만 한번도 문제가 생긴 적이 없었다. 돈도 많이 벌었다.그러나 중국을 오가며 머리 속에선 욕심이 생겨났다.‘우리는 왜 자유가 이렇게 없는 것일까. 죽기 전에 세계를 돌아볼 수 있을까. 나는 장사가 적성에 맞는데, 북에선 자기 회사를 가질 수 없으니 억울하다.’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커졌지만 탈북하다 잡히면 북에서 이룬 모든 것을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선뜻 나설 수 없었다.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먼저 한국에 간 동네 친한 여인에게 전화를 했더니 “왜 아직도 거기서 그렇게 사느냐. 브로커를 소개해 줄 테니 빨리 떠나라”고 했다. 하도 독촉을 하는 바람에 그는 ‘한번 가보자’며 길을 나섰다.브로커의 안내를 받아 2010년 6월 11일 압록강을 넘어 동남아를 거쳐 7월 16일 한국에 입국했다. 그야말로 초스피드 탈북이었다.김 씨는 북에서 잘 사는 집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다. 특별한 탈북 계기나 시련을 겪은 것도 아니었다. 탈북민들이 대체로 갖고 있는 눈물나는 탈북 스토리도 없다. 그냥 자유롭게 살고 싶고, 세계를 구경하고 싶고, 사업을 해보고 싶어 탈북한 거였다.한국에 대한 첫 인상도 좋았다. 그는 “인천국제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국에 거지가 득실거린다는 선전이 거짓말인 건 알았지만 직접 오자마자 첫 인상이 너무 깨끗하고 질서정연해 놀라웠다.”# 방황2011년 1월 그는 하나원을 나와 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어디 가서 뭘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처음 시작한 일은 친구들과 함께 지방의 대기업 건설장에서 천정공사를 하는 것이었다. 김 씨는 “첫 일당이 14만 원이었는데, 내 힘으로 돈을 벌었다는 게 너무 기뻤다”고 말했다. 일당직은 일감이 없을 때도 많다. 그때면 그는 짬짬이 한국의 이곳저곳을 열심히 구경 다녔다. 그렇게 2년을 살았다.그러나 현장 공사일은 사십 평생 육체노동을 해보지 않았던 그에게는 너무 힘들었다. 일을 못한다는 핀잔이 받았다. ‘저 친구는 일을 못하니 내일 데려오지 말라’는 면박까지 받으면서 술로 밤을 새는 날이 늘어났다.마침 그때 탈북민 사회에서 외국으로 나가는 바람이 불었다. 그의 가슴에도 꿈이 꿈틀대기 시작했다.‘2년 동안 한국은 충분히 봤으니 선진국이란 곳에도 한번 가보자. 미국과 유럽은 어떤 세상일까. 한국에선 노가다밖에 할 일이 없는데 영어도 배운 내가 외국에 나가면 괜찮은 일자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2013년 12월 그는 독일로 향했다. 그의 첫 해외여행이었다.독일에 정착하려던 꿈은 프랑크푸르트공항에 내리자마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한국의 첫 기억은 깨끗한 인천공항이었다. 선진국은 훨씬 더 발전됐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그곳은 너무 낡고 더러웠다.이민국에 찾아가 난민 신청을 냈더니 아프리카와 동유럽에서 온 사람들과 한 방에서 기다리게 했다. 음식도 맞지 않고, 물 한잔 얻어먹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어렵게 외국에 왔으니 유럽은 확실히 구경해보기로 결심하고 이웃 네덜란드, 벨기에 등을 돌아다녔다.“한국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정작 유럽을 돌아다녀보니 한국이 최고라고 느꼈어요. 말이 통하는 내 나라이고, 깨끗하고, 인정 많고….”그의 일탈은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결국 그는 4개월 뒤에 돌아왔다. 죽으나 사나 한국에 뿌리내려야겠다는 굳은 각오와 함께 2014년 3월 인천공항에 다시 발을 내디뎠다.# 취업한국에 돌아온 그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름 북에서 대학 졸업생이지만, 한국에 와서 쓸만한 지식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북한대학원대 석사 과정에 입학한 뒤 그는 탈북민정착지원기관인 ‘남북하나재단’에 찾아가 일자리를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곳에는 탈북민을 받겠다는 구인광고가 종종 들어온다.마침내 전화가 왔다. 서울 충무로에서 인쇄업을 하는 실향민 2세인 나이 든 사장이었다. 그는 충무로 인쇄골목에 처음 갔을 때 인상을 잊지 못했다.“충무로는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있었어요. 일하는 곳이 아니라 전쟁터라는 인상을 강렬하게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그때 새삼 느꼈습니다. 한편으론 대한민국이 이런 힘으로 일어났구나. 이 사람들이 뛰어다닐 때 나는 날아다녀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그의 첫 월급은 110만 원이었다. 한국에서 만나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아내에게 100만 원을 주고, 10만 원을 한달 용돈으로 버텼다. 저녁에는 대학원도 꼬박꼬박 갔다.“대학원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밥 한번 산 적이 없어요. 돈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때 밥을 사준 사람들을 지금도 잊지 못해요. 이제부터 열심히 밥을 사야죠.”어려웠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김 씨는 눈시울이 붉어졌다.인쇄소 사장은 ‘바닥부터 기어봐야 악이 생기고, 악이 생겨야 일어난다’며 그를 혹독하게 대했다. 명동거리를 일부러 매일 밀차를 끌고 다니게 했다.이 과정에 김 씨는 체면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났다.고된 일 와중에 김 씨는 인쇄업을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그가 충무로 인쇄골목에서 버틴 이유는 110만 원 월급에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창업해 성공하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밀차를 끌고 명동거리로 나가라고 했을 때 머뭇거렸던 그는 1년 넘게 바닥을 기는 법을 배운 뒤엔 머리를 떳떳이 들고 명동거리를 밀차를 끌고 다녔다. 2015년 12월 그는 마침내 ‘지원인쇄출판사’를 세웠다. 수중에는 단돈 100만 원 뿐이었다. 그 돈으로 충무로 인쇄골목에 5평짜리 방을 얻었고, 폐기 직전의 중고 컴퓨터 2대를 샀다.# 일감과의 전쟁천신만고 끝에 인쇄업체를 만들었지만 일감을 따오는 것은 더 어려웠다. 인맥도, 돈도, 경력도 없는 그에게 일감을 주려는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실망하진 않았다. 이미 각오한 일이기 때문이었다.자신이 다니는 대학원에서 논문 인쇄를 첫 일감으로 얻어왔다. 두꺼운 표지의 논문을 처음 찍어냈을 때 그는 감격했다. 탈북해서 이뤄낸 첫 결과물이었다.‘그래, 이제부터 시작하면 되지. 이렇게 일감을 따오면 돼.’그가 처음 가서 매달린 곳은 남북하나재단이었다.“저는 혈연, 학연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나마 아는 곳이 이곳입니다.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한번만 도와주십시오.”직원들이 출근하기 전 정문 입구에 섰다가 명함과 판촉물을 돌리고, 다음날 또 찾아가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그랬더니 마침내 600만 원짜리 자료집을 출판해달라는 요청이 왔다.‘드디어 해냈구나. 수십 번 끈질기게 매달리는 게 내가 사는 유일한 방법이구나.’두 번째로 목표로 한 거주지 구청에도 같은 방법으로 수없이 다녔다. 아쉽게도 그곳에선 지금까지도 일감을 따내진 못했다.그러나 1년 내내 그렇게 다니니 조금씩 인쇄를 부탁하는 곳이 생겼다. 인쇄뿐만 아니라, 판촉물, 현수막 등 닥치는 대로 출판했다. 그렇게 경력이 쌓였고 마침내 이듬해인 2016년 말에 ‘통일형 예비 사회적기업’으로 선정돼 3000만 원의 사업지원비를 받았다. 그 돈으로 그는 디지털 인쇄기를 중고로 구입했다. 그게 있어야 ‘직접생산 확인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고, 그 증명서가 있어야 조달청 입찰을 할 수 있었다.2017년부터 그는 조달청 입찰에 수없이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해 그는 단 한 곳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다.“입찰에 들어가면 경쟁업체들과 함께 심사위원들 앞에서 사업계획서 발표를 해야 합니다. 실적도 없는데다 북한 말투까지 듣고 나면 아예 연락이 없습니다.”칠전팔기란 말은 그에게 사치였다. 희망이 무너지기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이듬해인 2018년 마침내 2억5000만 원짜리 소식지 발행 입찰을 따냈다. 실적도 많지 않은 그를 믿고 첫 일감을 준 곳은 남북하나재단이었다. 심사위원들도 ‘탈북민 1호 출판인쇄기업’이 나오는데 힘을 실어주겠다며 후한 점수를 주었다.그날 저녁 그는 직원들과 함께 밤새 술을 마셨다. “이제 살았다”며 환호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또 울다가를 반복했다.지금도 그는 입찰에 들어갈 때마다 사활을 건다. 이번에 떨어지면 고난을 함께 한 직원들을 내보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온갖 모멸감과 수모를 이겨내게 해주었다.“‘탈북민이 뭘 잘하겠어’라는 편견을 깨기 위해 살았던 것 같아요. 탈락이 이어지면서 나는 정말 이방인인가 싶어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결국 ‘어차피 우린 애초에 여기서 태어난 사람이 아닌 정착하는 사람이니까 몇 배 더 힘들어도 감내하자’고 결론내고 다음날 또 일감을 찾아다닙니다.”기자와 만난 날에도 김 씨는 며칠 전 들어갔던 공공기관 입찰에서 떨어졌다고 스스로 자책하고 있었다. 승산이 있었는데, 갑자기 없던 마이크 울렁증 증세가 나타나는 바람에 말을 더듬어 떨어졌다는 것이다.“사장은 일감 따오는 자리입니다. 매일 잠들기 전 ‘내일은 어디 가서, 누구를 만나 일감을 따오나’하는 생각뿐입니다. 제 얼굴은 항상 근심이 가득 차 있죠. 그러다 일감을 따오면 며칠동안 싱글벙글 얼굴이 환하게 다닙니다.”# 감사한 마음김 씨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인쇄된 첫 제품의 냄새를 맡고, 감촉을 느낄 때다. 회사 이름이 박힌 제품은 그에게 성취감을 안겨준다.“북에 있을 때 제가 한국에 와서 실력있는 디자이너들과 함께 이렇게 예쁜 책을 만들거라고 상상이나 해봤겠습니까. 그런데 해보니 정말 제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힘들지만, 그래도 재미있으니 버티는 것 아니겠습니까.”열심히 사는 사람의 노력은 반드시 누군가의 눈에 띄기 마련이다. 김 씨에게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믿고 도와준 감사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그중 특히 감사한 사람은 그를 충무로 인쇄골목으로 데려 온 사장이었다. 김 씨는 그를 ‘스승님’이라고 부른다. 바닥을 기는 법과 기술을 가르쳐주었다.“제가 독립하겠다고 하자 스승님이 ‘잘 생각했다. 북한 인쇄의 질이 너무 떨어져 있는데 통일이 되면 고향에 돌아가 한국의 인쇄 기술을 전수해라. 3년 동안 뒤를 봐주겠다’고 하시더군요.”뒤를 봐준다는 말은 기술적 문제 등을 해결해주겠다는 의미다. 실제로 그 사장은 모르는 게 있어 찾아갈 때마다 가르쳐 주었다. 2년 동안 배우고 나니 물어보려 더 찾아갈 일이 없어졌다. 대신 김 씨는 명절마다 스승님의 집을 찾아가 인사를 드린다고 했다.스승님의 영향으로 그는 꿈이 생겼다. 통일된 뒤 북한에 돌아가 만화책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멋진 책들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것이 탈북민 1호 인쇄업자가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그가 다니던 김포의 한 교회 목사도 감사한 사람이다.“인쇄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얼마나 미숙했겠습니까. 지금 제가 봐도 줄 간격이나 오자 등이 훤히 보였죠. 하지만 목사님은 늘 교회에서 ‘우리 김인철 사장이 최고다’고 칭찬하면서 꼭 성공할거라고 자신감을 심어줬죠.”맨 주먹으로 시작한 그에게 뭐 하나라도 일감을 맡겨 주려고 애를 써준 남북하나재단 직원들도 너무나 감사한 사람들이다. 아무 인맥도 없는 한국 사회에서 첫 발을 내딛기까지 그들의 도움은 큰 힘이 됐다. 첫 입찰 심사를 통과했을 때 자기 일처럼 기뻐해준 사람들이다.그런 격려에 힘입어 한 발 한 발 걸어온 결과 김 씨의 ‘지원인쇄출판사’는 매년 성장했다. 직원도 9명으로 늘었다. 이중 4명이 탈북민이다.지난해 매출 10억 원을 달성했고, 올해는 25억 원을 달성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대다수 기관들이 인쇄 예산을 방역 예산으로 바꿔 인쇄업이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거둔 성과다.“코로나 사태로 비대면 서비스가 확장돼 배달이 늘고, 박스 수요가 많아졌습니다. 우리도 요즘 박스 생산 쪽으로 많이 공략하고 있죠.”# ‘한국은 살만한 세상.’김 씨의 인쇄소에는 정직원 말고도 하나원을 갓 졸업한 탈북민 10여명이 찾아와 인턴을 한다. 그들은 그의 성공 비결을 들려달라고 요청하곤 한다. 그때마다 김 씨는 “한국은 정말 살만한 세상이며 자유를 누리려면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그가 한국에 막 정착한 탈북민에게 해주는 말은 크게 4가지다.첫째는 한국에서 적성부터 빨리 찾으라는 것이다. 적성에 맞는 일을 잡아야 오래 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사업을 하려면 꼭 밑천으로 먼저 몇 천 만원을 모아놓고 시작하라는 것이다. 단돈 100만 원으로 시작해 너무 힘들었던 자신의 경험이 우러나오는 조언이다. 셋째는 노력이다. 힘든 만큼 노력이 돌아올 수 있는 사회가 이곳이기 때문에 실패해도 좌절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말해준다. 넷째는 정직함이다. 김 씨는 “정직함은 얼굴에 만들어낼 수 없다. 그것은 자기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아직 김 씨는 자신이 성공했다고 보지 않는다. 지금도 한국에 뿌리를 내리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인쇄소 매출을 100억 정도 올리면 좋겠지만, 그건 꿈일 뿐이다. 당면한 목표는 몇 년 전부터 계속 노력하지만 아직까지 이루지 못한 대기업 사옥에 복사점 내는 일을 올해 안에 성공시키고 싶다.김 씨를 한국으로 이끌어온 꿈-세계 여행은 아직 그의 머리 속에 자리 잡을 틈이 없다.그는 지금도 김포의 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지금까지 번 돈을 계속 설비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하남지식산업센터에 100평짜리 인쇄 시설도 갖추고 각종 기계도 갖췄지만, 아내에게 아직 반지 하나 사주지 못했다.김 씨는 아침마다 김포 집을 나와 올림픽대로를 따라 1시간30분~2시간을 운전해 하남 공장으로 간다. 출근시간대에 꽉 막혀있는 올림픽대로 어느 차 안에는 때론 근심 가득한 표정을, 때론 환한 표정을 하고 앉아있는 양강도 혜산에서 온 이 남자도 끼어있다. 압록강에서 뛰어놀며 성장한 그는 이제 한강을 오르내리며 뿌리를 내리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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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러지지 않는 탈북 여사장, 밤마다 韓사장들 접대요구에…[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내려가는 KTX 안에서 한 여인이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입사한 회사는 6개월 만에 부도가 났다. 사장은 사채업자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당장 먹고 살기 어려운 상황이라 닥치는 대로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서울에 오면 200~300만 원은 거뜬히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올라왔지만, 알고 보니 마사지업소였다.이제 더 헤맬 기력도 없었다. 돌아가는 기차에서 여인은 결심을 굳혔다.“부도 난 저 회사를 내가 인수하자.”부산역에 내리자마자 그는 회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선언했다.“이 회사 제가 맡아 살리면 어떨까요?”남자 상무(고작 직원이 3명인 회사였지만)가 박수를 보냈다.“그래,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요.”듣기 좋게 말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 말에 힘이 솟았다.‘그것 봐. 이들도 내가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왜 나는 나 스스로를 믿지 못하지. 어차피 가진 것 없는 몸인데, 한번 힘껏 부딪쳐 보기라도 하자.’2009년 3월 한국 입국 7개월 차 탈북여성 신경순 씨에게 일어난 일이다. 망했던 회사는 신 씨가 인수한 2년 뒤 연간 매출을 20억 원을 넘겼다.# 탈북신 씨는 1969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영예군인(전상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남들처럼 학교를 다녔고, 1986년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남들이 선망하는 39호실 산하 외화벌이회사에 취직했다. 대우도 좋았고, 가끔 양복지와 같은 선물도 받는 회사였다.그러나 그는 노동당원이 되겠다고 그 회사를 2년 만에 때려치우고, 제일 힘든 곳인 무산광산 채굴 현장에 자원했다. 모두가 뜯어말렸지만 그의 결심은 단호했다. 하지만 결국 얻은 것은 병이었다. 2년 만에 집에 돌아와 병 치료를 하는 도중 ‘고난의 행군’을 맞았다.남들처럼 장사도 했고, 황해도를 오가며 쌀 배낭을 나르기도 했다. 그러나 도무지 견딜 수 없어 결국 1999년 탈북을 선택했다. 탈북한 뒤엔 중국 허베이(河北) 성의 깊은 산골 한족 남성에게 의탁해 살았다.한국에 입국한 탈북민 3만3718명(2020년 9월 기준) 여성은 72%이며, 탈북민 전체의 70%는 함경도 지역 출신이다. 신 씨의 성장과 탈북 스토리, 중국 생활은 많은 탈북 여성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고, 음식도 안 맞는 곳에서 겪어야 했던 그 많은 아픔을 여기에 다 설명할 순 없다. 너무나 견디기 힘들어 2년 뒤 파출소를 찾아가 북에 보내달라고 해도 무시하는 동네였다. 그가 살았던 농촌은 밤농사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밤을 줍고, 팔고 하는 생활이 1년 내내 쳇바퀴처럼 돌아갔다. 그래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곳이었다.“이곳을 벗어나려면 중국어부터 배워야 한다.”그 마을 여인들은 모두 문맹자였다. 남자들도 신문을 잘 읽을 줄 몰랐다.신 씨는 한 학년 올라가며 아이들이 버린 흙 묻은 교과서를 주어다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을 독학했더니 이제는 중국인도 가려보지 못할 정도로 말과 글이 능숙해졌다. 이젠 어딜 가든 취직이 가능할 것 같았다.2005년 그는 집을 나와 현에 있는 옷 공장에 취직했다. 한국어는 어디서 들을 곳도 없는 곳에서 그는 한족 여인들과 함께 공장에 다녔다.# “북송하세요.”삶을 바꾼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어느 날 옷 공장 옆에 있는 농산물수출회사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한국 거래처에서 전화가 왔는데 일을 처리해주던 조선족 통역이 그날 없었던 것이다. 그곳 사장은 옆 옷 공장에 조선에서 온 여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신 씨는 처음 한국 사람과 통화하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분명 우리말인데, 제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 순간 내가 중국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죠.”그렇게 급할 때마다 통역 몇 번씩 해준 것이 인연이 돼 한국 거래처 사장이 왔을 때도 통역을 해주게 됐다. 마침 한국 사장은 중간에서 낀 조선족 통역이 사기를 치는 것 아닌지 의심하던 차였다. 그는 신 씨를 무역 거래 회의에 참가시켰다. 처음엔 가만히 앉아 들으라고 했다. 이 회의에 참가하면서 신 씨는 농산물 거래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이해하게 됐다.한국에 돌아간 사장은 곧 그에게 연락을 해왔다. 자기가 월급을 줄 테니 허베이 성의 2~3개 현을 담당해 밤 시장 현황과 가격 등을 조사해 보내라는 것이다. 그가 그 일을 시작하자 주변에서 “가격 좀 뻥튀기해도 한국에선 모른다. 이럴 때 돈 좀 벌어놓아야 한다.” “중국 사장들에게서 선물을 적당히 받아도 된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러나 신 씨는 자신을 믿어준 한국 사장이 고마워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단 1전도 붙이지 않고 정직하게 보고했고, 몇 개 현을 돌아다니며 자기 일처럼 가장 싸고 질 좋은 밤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2년을 일했다. 이제는 허베이 성의 중국 밤 수출 회사 사장들과도 안면도 트여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 시련이 찾아왔다.2007년 한 중국 사장이 보낸 밤이 계약서와 달리 질이 좋지 않아 클레임(손해배상)에 걸렸다. 중국 사장은 사과 대신에 발뺌하기에 급급했다. 화가 난 한국 사장은 “저 회사의 밤은 절대 받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그해 가을 햇밤철이 다가오자 중국인 사장이 “왜 우리에겐 오더를 주지 않냐”며 찾아왔다. 신 씨가 상황을 설명하며 물량을 줄 수가 없다고 하자 그가 협박했다.“우릴 포함시켜주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신고해 북송시킬거야.”신 씨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러나 한국 사장의 지시를 어길 수는 없다고 생각해 태연하게 대답했다.“맘대로 하세요.”그러고도 2년을 알고 지낸 사이인데 신고까지 할까 속으론 기대도 품었다. 그러나 기대는 어긋났다. 공안이 그가 묵던 숙소에 들이닥쳐 그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보위부 감옥에서2007년 9월 6일 그는 단둥을 거쳐 평북 신의주 보위부로 끌려 나갔다. 북한에 도착한 그날부터 신 씨는 폭행과 수치심 등을 겪으며 후회했다.“그래도 중국에 있으면 언젠가 고향 갈 기회가 있을 줄 알고 한국으로 가지 않았던 내가 정말 바보였구나.”신 씨가 일할 당시 중국에선 드라마 ‘대장금’이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드라마가 상영되는 시간엔 공장과 거리가 텅텅 비었다. 신 씨를 보고 동료들이 “한국이 그렇게 잘 사냐. 너는 왜 거길 가지 않냐”고 물었다. 그를 고용한 한국 사장이 한국에 올 생각이 없냐고 물었을 때 그는 단호하게 싫다고 대답했다.북한에 끌려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나서야 신 씨는 정신이 들었다. 고향에 대한 미련이 날아가는 데는 단 몇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어떻게 하나 여길 나가 이번엔 한국에 가야겠다. 호랑이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바싹 차리면 살 길이 있다고 했으니 어떻게 하나 기회를 잡아야겠다.”며칠 뒤 보위부 감옥 소장이 신 씨를 불렀다.“이봐, 신경순. 너는 경력이 좀 특이하더라. 중국에서 무역업에 종사했다며?”“예, 허베이 몇 개 현 농산물을 동남아와 유럽에 수출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거긴 무역을 어떻게 해?”신 씨가 한국과 거래했다는 것만 쏙 빼고, 중국에서 이뤄지는 농산물 수출 절차 등을 설명하니 소장의 눈이 커졌다. 북한에선 달러나 위안화를 만질 수 있는 무역업자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선망의 직업이다. 그런데 그런 무역업을 중국 본토에 앉아 세계와 했다고 하니 소장이 놀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돈 많이 벌었지? 얼마나 벌어놨어?”“예, 몇 십만 달러는 벌었는데, 갑자기 잡혀왔습니다.”“억울하겠다. 중국 남자 좋은 일만 했네.”“소장님. 돈 버는 재간이 있으면 그 돈 내오는 재간도 있지 않겠습니까.”신 씨의 말에 이번엔 소장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다음날 소장은 북송돼 감옥에 수감된 전체 탈북민이 모인 자리에서 소리쳤다.“너네 신경순이 절반만큼만 살고 오면 내 욕도 안한다. 바보처럼 돈도 못 벌고 그러고 잡혀오나.”소장이 그렇게 소리치자 다른 간수들이 신 씨를 보는 눈도 달라졌다. 보위부 감옥은 북송된 탈북민을 심문해 처형할 사람, 정치범수용소나 일반 감옥에 보낼 사람, 보안서(경찰) 집결소(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낼 사람 등으로 분류하는 곳이다. 집결소에 가면 가장 처벌이 경미하다. 그러나 그곳에도 빨리 보내진 않는다. 보통 감옥에서 이관되기까지 몇 달씩 걸리는데 경순은 한 달 만에 집결소로 넘겨졌다.그가 나가는 날 소장의 측근이 그를 따로 불렀다.“이봐, 경순이. 이제 네가 살아가려면 돈이 매우 필요할거야. 우린 전혀 소문내지 않고 중국에서 돈 받아오는 선이 있어. 집결소에서 나오면 찾아와.”측근이 몰래 건네준 작은 쪽지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중국에서 무역을 했다는 신 씨의 서류가 넘어왔는지 집결소 간수(경찰)들도 그에게 호의적으로 대했다. 힘든 야외 일을 시키지 않고 주로 집결소 마당에서 일하게 했다. 간수 한 명은 그의 옆에 붙어 중국어를 가르쳐달라 성가시게 했고, 한 명은 중국 생활을 들려달라고 요청했다. 한국 사장의 심부름을 했을 뿐인데 신 씨는 북한에서 글로벌 인재라도 북송된 듯이 인정된 것이다. 집결소에서도 한 달 정도 있은 뒤 그는 고향인 청진으로 송환됐다.# 한국 입국고향에 갔더니 거주지 분주소는 전기도 없고 난방도 없었다. 밤에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그가 왔다는 소식에 부모들이 찾아와 안면이 있는 보안원에게 사정했다.보안원이 며칠 뒤 말했다.“너는 노병의 딸이니 특별히 봐줘서 집에서 다니게 해줄게. 매일 아침 일찍 여기에 왔다가 조사를 받고 밤에 집에 가.”엄청난 특혜였다. 신 씨는 일주일 뒤 도망쳤다. 추적을 피해 이리저리 숨어 다니다가 2008년 1월 두만강을 넘었다. 중국에 가니 그를 알던 사장들이 동정해주며 빨리 한국으로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심지어 해외에 나간 여인의 호구까지 구해 진짜 중국인 여권까지 만들어주었다. 그해 5월 그는 중국 무역업자 일행에 포함돼 김해공항에 내렸다. 한국에 왔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일주일 동안 부산 시내 등을 구경 다니다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했더니 난리가 났다. 탈북민이 김해공항을 통해 들어온 첫 사례라고 들었다. 이후 그는 김해공항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날아와 정보기관 조사와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8월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때까지만 해도 꿈은 하늘에 닿아있었다. 앞으로 나가 어떻게 살지 걱정하는 남들과는 달리 그는 사회에 나가 입사할 직장이 이미 정해져 있는 상태였다.그가 중국에 있을 때 소속됐던 부산 거래처 사장이 자기에게 와서 함께 일을 해보자고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원을 나와 그는 망설임 없이 부산으로 갔다. 대한민국 국민이 된 보람은 컸다. 월급은 100만 원에 불과했지만 이제 중국에 가서 계약을 체결할 때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입사하자마자 국제 금융위기가 닥친 것이다. 그가 입사했을 때만해도 1달러에 1000원대였던 환율은 그해 12월 1500원을 넘어섰다. 수입업체들에게 직격탄이었다. 곳곳에서 기업들이 도산하기 시작했다. 사채를 쓰며 버티던 사장은 결국 이듬해 3월에 사라졌다. 회사가 사라진 뒤 신 씨는 직업을 찾았지만 40살이 된 여성을 찾는 기업은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회사를 인수하기로 결심했다. 신 씨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위기에서 찾은 기회신 씨가 회사를 인수하기로 결심했을 때 수중에는 반년 동안 100만 원의 월급을 받아 모은 400만 원이 있었다. 그 돈으로 그는 공과금부터 갚았다. 소상공인 대출 1000만 원을 받고 5개월 뒤 탈북민에게 주는 취업 장려금 500만을 더해 직원들의 밀린 월급을 주었다.그리고 8월 24일 처음으로 ‘신영무역’이라는 회사 간판을 걸었다. 새롭게 뿌리부터 시작한다는 의미였다.중국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사장들이 그가 밤 수입회사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돈은 나중에 갚으라”며 두 컨테이너를 외상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눈물나게 고마웠지만, 외상으로 받으면 품질이 떨어질 것 같아 거절했다. 간난신고 끝에 들여온 첫 컨테이너는 3일 만에 다 팔았다. 두 번째 컨테이너도 3일 만에 팔았다. 신이 났다.그러나 생소한 땅에서 그에게 닥치는 고난과 견제는 상상 이상이었다.사채업자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도망친 사장이 밀린 사채를 갚으라며 집기를 부수며 행패를 부렸다. “북한에서 별게 다 기어 들어왔다. 당장 북으로 꺼져라”는 욕을 매일 먹었다. 그때마다 그는 “내게 빌려준 것이 아닌데, 왜 내게 갚으라고 하냐”며 당차게 맞섰다.경쟁업체들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업계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신 씨가 알던 착한 한국인은 없었다. 입사해 몇 달 지났을 때 신 씨는 한국의 경쟁업체 사장이 중국의 거래업체에 “저 여자 중국에 밤 사려 가면 신고해 북송시키라”고 전화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북송이란 단어만 들어도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그에게는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말이었다.신 씨는 “그 사장은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말할 수 있지 다른 경쟁회사들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고 회상했다.밤 수출 및 판매 시장에는 여러 개의 회사가 있다. 신 씨는 이중 유일한 여사장이었고, 나이도 제일 어렸다.밤마다 한국 오프라인 거래처 사장들이 찾아와 밤을 받아주는 대신 접대를 요구했고 3차까지는 기본 코스가 됐다. 물어보니 한국에선 이런 게 당연하다고 했다. 처음 몇 달은 관행인가 싶어 따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고 용납할 수 없었다.“내가 좋은 밤을 좋은 가격에 가져다주면 내게 고마워해야지 내가 왜 이 사람들에게 접대를 해야 하지? 이런 식의 사업은 할 수 없다.”그는 한국 거래처 사장들에게 더는 접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그들은 온갖 욕을 다 퍼부으며 떠나가 경쟁업체 고객이 됐다. 몇 달이 지나자 거래처들이 거짓말처럼 다 사라졌다. 밤을 수입해도 팔 곳이 없는 것이다.신 씨는 홀로 앉아 눈물을 흘렸다.“내가 억울한 대로 접대 요구를 다 받아줘야 하나”고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럴 바엔 사업을 그만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그러나 그는 그런 위기에서 다시 새로운 곳으로 도전했다.“대한민국은 IT 강국인데, 이 조건을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왜 밤은 오프라인에서만 팔아야 하나. 홈페이지를 만들어 온라인으로 판매해보자. 밤은 계절상품이라 가을에만 팔린다는데 왜 여름에 팔면 안 되나.”그때는 밤이 거리에서 구워 파는 정도로만 인식돼 있었지 온라인에서 밤을 산다는 개념이 없었다. 브랜드라는 개념도 없었다. 신 씨는 인터넷을 배웠고,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중국어에 능숙하고, 중국에서 밤 수출업체에서 일해 봤던 경험이 있고, 현지 업체 사장들과 가족 같은 사이로 오랫동안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다른 경쟁사들이 가격 조건을 가장 중요하게 따질 때 그는 중국 현지를 돌면서 하나하나 좋은 밤을 골랐다. 그래서 어떤 업체보다 품질과 가격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차별화를 하기 위해 ‘키즈약밤’ ‘신영약단밤’ 등의 브랜드를 만들었다. 키즈는 국산에 비해 알이 작은 약단밤이란 의미였다.대박이었다. 2011년 3월 홈페이지를 만들었을 때 마침 한국에는 티몬, 그루폰 등 미국의 소셜커머스 업체들이 막 진출했다. 그곳에 입점해 아이스박스를 처음 쓰기 시작했더니 여름에도 불이 나게 판매가 됐다. 어떤 날은 너무 물량이 많아 거래하는 우체국 전 직원들이 우수고객을 도와준다며 달라붙어 택배를 포장해줄 정도였다.그해 티몬 한 곳에서만 11억 원의 매출이 났다. 회사 전체 매출은 20억 원이 넘었다. 지금은 밤 시장이 온라인 판매가 위주다. 2차, 3차를 요구하며 갑질하던 오프라인 중간 거래업체 사장들도 사업을 접고 사라졌다.# 공짜는 없다신영무역 매출액이 늘어나자 2012년부터 관세청, 국세청 등에서 3번 연속 세무조사가 들어왔다. 신 씨는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거래처 사장들에게서 세금계산서를 받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들은 세금에 무지했던 신 씨에게 “계산서를 발행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다”고 주장했고, 신 씨는 나중에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몰라 그들이 하자는 대로 했다. 세무조사가 들어오자 모든 거래금액의 추징금과 가산세는 그의 몫이었다. 3억 넘게 세금을 내고 나자 사업할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 사업을 했던 이유는 추징금은 갚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추징금을 다 갚고 나니 2016년부터 귀신같이 매출이 크게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또 사업을 접을 수가 없었다.그는 이 일을 통해 세무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머리를 싸매고 세무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신영무역은 이제 매년 수십 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모범적인 납세자가 됐다.물론 순탄한 사업은 없다. 잘 나가면 업계에서 집중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고, 매일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일이 터진다.신 씨는 “어제가 모여 오늘이 되고, 오늘이 모여 내일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오늘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그의 좌우명은 “위기는 기회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이다. 북한에서 갖고 있던 신조라고 했다.신 씨의 인생사를 듣고 보니 짓밟히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들판의 잡초가 떠올랐다.북에 앉아 굶어죽을 대신 탈북을 선택했고, 중국에서 피타게 중국어 공부를 해 한국 회사에 취직했다. 금융위기 때 파산한 회사를 접수했고, 거래처 회사들이 다 떠나자 온라인을 개척했다. 요즘도 그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진 뒤로 더 과감하게 투자하고 있다.궁금했다. 가냘프고 연약한 체구 어디에서 굴하지 않는 용기, 위기에 맞서는 용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일까. 부드러운 목소리 어디에서 단호하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배짱이 나오는 것일까.그는 오늘도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고 있다. 잠재력과 능력이 닿는 한까지 걷겠다는 것이 그의 다짐이다. 그가 앞으로 걸어갈 길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지는 알 수는 없다. 다만 인터뷰를 마치며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았다.잡초는 바람에 쓰러지지 않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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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테러조직에 무기 팔다 걸린 북한[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북한이 중국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의 분리 독립 무장 세력에 자동보총 등 무기를 넘겨주다 적발된 사건이 3년 전 발생했다. 더구나 2017년 10월 18일 열린 제19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19차 당 대회)를 불과 일주일 앞둔 민감한 시점이었다. 북-중 혈맹을 자랑하는 양국 간에 일어난 일이라곤 상상하기 힘든 사건이다. 중국 현지 소식통들을 통해 파악한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당시 랴오닝(遼寧)성 콴뎬(寬甸)만족자치현 공안당국은 북한에서 수상한 트럭 2대가 강을 건너온 정황을 포착했다. 평안북도 벽동군 동주리와 마주하고 있는 콴뎬현 다시차(大西岔)진 린장(臨江)촌은 중국이 북한에서 목재를 실어올 때 화물차가 경유하는 대북 ‘임시통상구(화물경유지)’로 활용되기에 평소에도 북한에서 트럭들이 자주 드나든다. 첫 차량은 변방대 초소를 통과해 압록강 옆 변강 고속도로를 내달리다 단속에 걸려 체포됐다. 첫째 차량이 체포되는 것과 동시에 이 차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수십 km 떨어져 오던 둘째 차량은 사라졌다. 이 지역은 무인지경이 많아 단둥에서 파견된 무장경찰대가 일주일이나 꼬박 뒤져 깊은 수림 속에 처박힌 두 번째 차량을 찾아냈다. 차량들에는 북한산 자동소총(AK-47), 권총 등 각종 총기가 가득 적재돼 있었다. 트럭을 몰고 가던 사람들은 신장위구르 무장 세력과 연결된 이들이었다. 조사 결과 이들은 “무기를 넘겨줄 테니 압록강까지 와서 받아가라”는 북한의 제안을 받고 움직이던 중이었다. 그런데 북한의 제안이 파격적이었다. “대금은 무기가 신장에 도착한 뒤 지불해도 된다”는 것. 무기 밀거래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선 북한이 돈 때문에 무기를 팔고자 한 게 아니라 일부러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자극하기 위해 쇼를 벌였다고 분석했다. 북한이 실제 신장에 무기를 전달하기보다는 일부러 정보를 흘려 중국에 적발되게 만들었다는 의미다. 북한이 그럴 동기도 충분했다. 사건 한 달 전인 2017년 9월 3일 북한은 6차 핵실험을 감행한 뒤 “대륙간탄도로켓(ICBM) 장착용 수소탄 시험을 성공적으로 단행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9월 11일 ‘대북 제재 결의 2375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대북 석유 수출은 연간 400만 배럴로 제한됐고, 정유 제품 수출은 기존보다 55% 줄어든 200만 배럴을 상한선으로 제한됐다. 액화천연가스(LNG)의 수출은 물론이고 직물, 의류 중간제품 및 완제품 등의 섬유 수출까지 전면 금지됐다. 북한과의 합작 사업 및 유지·운영도 전면 금지됐으며, 해외 파견 북한 근로자의 신규 고용마저 중단됐다. 이 모든 게 북한으로선 치명적 타격이 되는 조치였다. 이 결의안은 중국의 협조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는데 중국도 자국 19차 당 대회를 한 달 앞둔 시점에 북한이 핵실험을 진행한 것에 분노했다. 그래서 결의안이 채택되자마자 단둥을 비롯해 북-중 세관에서 유엔 결의안에 해당되는 수출입 물자를 압수 및 차단했다. 그러자 북한이 중국을 대놓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중국 정부와 언론의 실명을 거론하며 “다른 주권 국가의 노선을 공공연히 시비하며 푼수 없이 노는 것을 보면 지난 시기 독선과 편협으로 자국 인민들과 국제사회의 신뢰를 어지간히 잃은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난했을 정도다. 여기에 북한은 현지 경찰서 습격 등 무장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국의 ‘아킬레스건’ 신장위구르에 무기를 보내는 쇼까지 벌인 것이다. 중국이 항의하면 “당신들까지 유엔 제재에 가담하니 앉아서 굶어 죽을 판이라 우리도 눈에 뵈는 게 없다”고 주장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도 북한의 이런 속셈을 알기 때문에 북한의 무기 밀매 사건은 어느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다. 북한 정부에 항의하지도 않았다. 이듬해 3월 김정은이 방중해 시 주석을 만나며 양국 관계는 당시 남북 관계처럼 급격히 화해 무드로 반전했다. 무기 밀매 사건은 북한이 중국을 실질적으로 협박한 사례다. 우리는 북-중 관계 악화를 언론의 비난 정도만 보고 짐작하지만, 실제 물밑에선 벼랑 끝 전술까지 동원된다. 그렇다고 중국이 북한에 보복할 처지도 못 된다. 시 주석은 지난주 항미원조 전쟁 70주년 승리를 운운하며 전쟁에서 19만7000명이 죽었다고 말했다. 그 수많은 목숨을 바쳐 안하무인 깡패 이웃을 만들었으니 중국도 속으론 많이 억울할 듯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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