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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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4-04-08~20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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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동서 밀차 끌던 혜산 남자, 매출 25억 사장님 변신[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접이식 밀차에 책을 가득 싣고 나자, 사장이 말했다.“자, 이제는 이걸 택배 기사에게 끌고 가라.”“네?”42세 늦깎이 신입사원 김인철 씨는 당황했다. 택배 기사가 물건을 받아가는 대로변 약속 장소까지 가려면 번화가인 서울 명동거리를 가로질러 가야 했다. 북한에서 무역일꾼도 했고, 학생들도 가르쳐봤던 그는 허름한 작업복 차림에 밀차를 끌고 인파 가득한 명동거리를 다닌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삼복더위에 온몸은 땀으로 젖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외국인 관광객들이 자기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머리를 푹 숙인 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이렇게 살려고 한국에 왔나’는 자괴감이 계속 들었다. 그때마다 그는 다시 이를 꽉 깨물었다.‘이젠 더 물러설 곳도, 도망갈 곳도 없다. 창피함을 버려야 돈을 번다.’2014년 여름 그는 그렇게 명동거리를 수없이 오갔다. 6년 뒤인 2020년 김 씨는 매출액 25억 원을 기록한 인쇄업체 사장으로 거듭났다.# 탈북김 씨는 1972년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에서 압록강까지는 불과 50m 정도 거리였다. 어린 시절 그는 압록강에 나가 수영을 했고, 팬티 바람으로 맞은편 중국 창바이(長白) 현 시장에 가서 돌아다녔다. 그 시절에는 국경경비대도 없었다. 1987년에야 군인들이 혜산에 들어왔지만, 압록강에서 노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겨울엔 중국 아이들과 압록강 얼음판에서 만나 북한 물품과 중국 물품을 교환했다. 북한에 많은 명태 20마리를 주면 중국제 포커카드 한 세트와 바꿀 수 있었다. 비누, 다리미, 가위까지 압록강 위에서 온갖 물품이 오갔다.혜산식료공장 지배인을 부친으로 둔 김 씨는 수재학교인 혜산외국어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1994년 김정숙사범대학 영어과도 졸업한 뒤 실습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쳐보니 교사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뇌물을 주고 교사 임용을 거부하고 혜산시 보안서(경찰) 소속 수출과 부원으로 옮겨갔다. 사실상 밀무역을 담당하는 자리였다.밀무역은 잘할 자신이 있었다. 집 바로 앞에 있는, 어려서부터 뛰어놀았던 압록강 지형은 눈에 훤해 밀수에 적임자였다. 보안서 소속 신분증을 갖고 다니니 체포될 염려도 없었다.통나무, 몰리브덴 등 닥치는 대로 중국에 넘기고 식량과 바꿨다. 10년 넘게 밀무역을 했지만 한번도 문제가 생긴 적이 없었다. 돈도 많이 벌었다.그러나 중국을 오가며 머리 속에선 욕심이 생겨났다.‘우리는 왜 자유가 이렇게 없는 것일까. 죽기 전에 세계를 돌아볼 수 있을까. 나는 장사가 적성에 맞는데, 북에선 자기 회사를 가질 수 없으니 억울하다.’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커졌지만 탈북하다 잡히면 북에서 이룬 모든 것을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선뜻 나설 수 없었다.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먼저 한국에 간 동네 친한 여인에게 전화를 했더니 “왜 아직도 거기서 그렇게 사느냐. 브로커를 소개해 줄 테니 빨리 떠나라”고 했다. 하도 독촉을 하는 바람에 그는 ‘한번 가보자’며 길을 나섰다.브로커의 안내를 받아 2010년 6월 11일 압록강을 넘어 동남아를 거쳐 7월 16일 한국에 입국했다. 그야말로 초스피드 탈북이었다.김 씨는 북에서 잘 사는 집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다. 특별한 탈북 계기나 시련을 겪은 것도 아니었다. 탈북민들이 대체로 갖고 있는 눈물나는 탈북 스토리도 없다. 그냥 자유롭게 살고 싶고, 세계를 구경하고 싶고, 사업을 해보고 싶어 탈북한 거였다.한국에 대한 첫 인상도 좋았다. 그는 “인천국제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국에 거지가 득실거린다는 선전이 거짓말인 건 알았지만 직접 오자마자 첫 인상이 너무 깨끗하고 질서정연해 놀라웠다.”# 방황2011년 1월 그는 하나원을 나와 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어디 가서 뭘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처음 시작한 일은 친구들과 함께 지방의 대기업 건설장에서 천정공사를 하는 것이었다. 김 씨는 “첫 일당이 14만 원이었는데, 내 힘으로 돈을 벌었다는 게 너무 기뻤다”고 말했다. 일당직은 일감이 없을 때도 많다. 그때면 그는 짬짬이 한국의 이곳저곳을 열심히 구경 다녔다. 그렇게 2년을 살았다.그러나 현장 공사일은 사십 평생 육체노동을 해보지 않았던 그에게는 너무 힘들었다. 일을 못한다는 핀잔이 받았다. ‘저 친구는 일을 못하니 내일 데려오지 말라’는 면박까지 받으면서 술로 밤을 새는 날이 늘어났다.마침 그때 탈북민 사회에서 외국으로 나가는 바람이 불었다. 그의 가슴에도 꿈이 꿈틀대기 시작했다.‘2년 동안 한국은 충분히 봤으니 선진국이란 곳에도 한번 가보자. 미국과 유럽은 어떤 세상일까. 한국에선 노가다밖에 할 일이 없는데 영어도 배운 내가 외국에 나가면 괜찮은 일자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2013년 12월 그는 독일로 향했다. 그의 첫 해외여행이었다.독일에 정착하려던 꿈은 프랑크푸르트공항에 내리자마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한국의 첫 기억은 깨끗한 인천공항이었다. 선진국은 훨씬 더 발전됐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그곳은 너무 낡고 더러웠다.이민국에 찾아가 난민 신청을 냈더니 아프리카와 동유럽에서 온 사람들과 한 방에서 기다리게 했다. 음식도 맞지 않고, 물 한잔 얻어먹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어렵게 외국에 왔으니 유럽은 확실히 구경해보기로 결심하고 이웃 네덜란드, 벨기에 등을 돌아다녔다.“한국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정작 유럽을 돌아다녀보니 한국이 최고라고 느꼈어요. 말이 통하는 내 나라이고, 깨끗하고, 인정 많고….”그의 일탈은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결국 그는 4개월 뒤에 돌아왔다. 죽으나 사나 한국에 뿌리내려야겠다는 굳은 각오와 함께 2014년 3월 인천공항에 다시 발을 내디뎠다.# 취업한국에 돌아온 그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름 북에서 대학 졸업생이지만, 한국에 와서 쓸만한 지식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북한대학원대 석사 과정에 입학한 뒤 그는 탈북민정착지원기관인 ‘남북하나재단’에 찾아가 일자리를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곳에는 탈북민을 받겠다는 구인광고가 종종 들어온다.마침내 전화가 왔다. 서울 충무로에서 인쇄업을 하는 실향민 2세인 나이 든 사장이었다. 그는 충무로 인쇄골목에 처음 갔을 때 인상을 잊지 못했다.“충무로는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있었어요. 일하는 곳이 아니라 전쟁터라는 인상을 강렬하게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그때 새삼 느꼈습니다. 한편으론 대한민국이 이런 힘으로 일어났구나. 이 사람들이 뛰어다닐 때 나는 날아다녀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그의 첫 월급은 110만 원이었다. 한국에서 만나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아내에게 100만 원을 주고, 10만 원을 한달 용돈으로 버텼다. 저녁에는 대학원도 꼬박꼬박 갔다.“대학원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밥 한번 산 적이 없어요. 돈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때 밥을 사준 사람들을 지금도 잊지 못해요. 이제부터 열심히 밥을 사야죠.”어려웠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김 씨는 눈시울이 붉어졌다.인쇄소 사장은 ‘바닥부터 기어봐야 악이 생기고, 악이 생겨야 일어난다’며 그를 혹독하게 대했다. 명동거리를 일부러 매일 밀차를 끌고 다니게 했다.이 과정에 김 씨는 체면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났다.고된 일 와중에 김 씨는 인쇄업을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그가 충무로 인쇄골목에서 버틴 이유는 110만 원 월급에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창업해 성공하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밀차를 끌고 명동거리로 나가라고 했을 때 머뭇거렸던 그는 1년 넘게 바닥을 기는 법을 배운 뒤엔 머리를 떳떳이 들고 명동거리를 밀차를 끌고 다녔다. 2015년 12월 그는 마침내 ‘지원인쇄출판사’를 세웠다. 수중에는 단돈 100만 원 뿐이었다. 그 돈으로 충무로 인쇄골목에 5평짜리 방을 얻었고, 폐기 직전의 중고 컴퓨터 2대를 샀다.# 일감과의 전쟁천신만고 끝에 인쇄업체를 만들었지만 일감을 따오는 것은 더 어려웠다. 인맥도, 돈도, 경력도 없는 그에게 일감을 주려는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실망하진 않았다. 이미 각오한 일이기 때문이었다.자신이 다니는 대학원에서 논문 인쇄를 첫 일감으로 얻어왔다. 두꺼운 표지의 논문을 처음 찍어냈을 때 그는 감격했다. 탈북해서 이뤄낸 첫 결과물이었다.‘그래, 이제부터 시작하면 되지. 이렇게 일감을 따오면 돼.’그가 처음 가서 매달린 곳은 남북하나재단이었다.“저는 혈연, 학연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나마 아는 곳이 이곳입니다.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한번만 도와주십시오.”직원들이 출근하기 전 정문 입구에 섰다가 명함과 판촉물을 돌리고, 다음날 또 찾아가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그랬더니 마침내 600만 원짜리 자료집을 출판해달라는 요청이 왔다.‘드디어 해냈구나. 수십 번 끈질기게 매달리는 게 내가 사는 유일한 방법이구나.’두 번째로 목표로 한 거주지 구청에도 같은 방법으로 수없이 다녔다. 아쉽게도 그곳에선 지금까지도 일감을 따내진 못했다.그러나 1년 내내 그렇게 다니니 조금씩 인쇄를 부탁하는 곳이 생겼다. 인쇄뿐만 아니라, 판촉물, 현수막 등 닥치는 대로 출판했다. 그렇게 경력이 쌓였고 마침내 이듬해인 2016년 말에 ‘통일형 예비 사회적기업’으로 선정돼 3000만 원의 사업지원비를 받았다. 그 돈으로 그는 디지털 인쇄기를 중고로 구입했다. 그게 있어야 ‘직접생산 확인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고, 그 증명서가 있어야 조달청 입찰을 할 수 있었다.2017년부터 그는 조달청 입찰에 수없이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해 그는 단 한 곳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다.“입찰에 들어가면 경쟁업체들과 함께 심사위원들 앞에서 사업계획서 발표를 해야 합니다. 실적도 없는데다 북한 말투까지 듣고 나면 아예 연락이 없습니다.”칠전팔기란 말은 그에게 사치였다. 희망이 무너지기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이듬해인 2018년 마침내 2억5000만 원짜리 소식지 발행 입찰을 따냈다. 실적도 많지 않은 그를 믿고 첫 일감을 준 곳은 남북하나재단이었다. 심사위원들도 ‘탈북민 1호 출판인쇄기업’이 나오는데 힘을 실어주겠다며 후한 점수를 주었다.그날 저녁 그는 직원들과 함께 밤새 술을 마셨다. “이제 살았다”며 환호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또 울다가를 반복했다.지금도 그는 입찰에 들어갈 때마다 사활을 건다. 이번에 떨어지면 고난을 함께 한 직원들을 내보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온갖 모멸감과 수모를 이겨내게 해주었다.“‘탈북민이 뭘 잘하겠어’라는 편견을 깨기 위해 살았던 것 같아요. 탈락이 이어지면서 나는 정말 이방인인가 싶어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결국 ‘어차피 우린 애초에 여기서 태어난 사람이 아닌 정착하는 사람이니까 몇 배 더 힘들어도 감내하자’고 결론내고 다음날 또 일감을 찾아다닙니다.”기자와 만난 날에도 김 씨는 며칠 전 들어갔던 공공기관 입찰에서 떨어졌다고 스스로 자책하고 있었다. 승산이 있었는데, 갑자기 없던 마이크 울렁증 증세가 나타나는 바람에 말을 더듬어 떨어졌다는 것이다.“사장은 일감 따오는 자리입니다. 매일 잠들기 전 ‘내일은 어디 가서, 누구를 만나 일감을 따오나’하는 생각뿐입니다. 제 얼굴은 항상 근심이 가득 차 있죠. 그러다 일감을 따오면 며칠동안 싱글벙글 얼굴이 환하게 다닙니다.”# 감사한 마음김 씨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인쇄된 첫 제품의 냄새를 맡고, 감촉을 느낄 때다. 회사 이름이 박힌 제품은 그에게 성취감을 안겨준다.“북에 있을 때 제가 한국에 와서 실력있는 디자이너들과 함께 이렇게 예쁜 책을 만들거라고 상상이나 해봤겠습니까. 그런데 해보니 정말 제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힘들지만, 그래도 재미있으니 버티는 것 아니겠습니까.”열심히 사는 사람의 노력은 반드시 누군가의 눈에 띄기 마련이다. 김 씨에게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믿고 도와준 감사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그중 특히 감사한 사람은 그를 충무로 인쇄골목으로 데려 온 사장이었다. 김 씨는 그를 ‘스승님’이라고 부른다. 바닥을 기는 법과 기술을 가르쳐주었다.“제가 독립하겠다고 하자 스승님이 ‘잘 생각했다. 북한 인쇄의 질이 너무 떨어져 있는데 통일이 되면 고향에 돌아가 한국의 인쇄 기술을 전수해라. 3년 동안 뒤를 봐주겠다’고 하시더군요.”뒤를 봐준다는 말은 기술적 문제 등을 해결해주겠다는 의미다. 실제로 그 사장은 모르는 게 있어 찾아갈 때마다 가르쳐 주었다. 2년 동안 배우고 나니 물어보려 더 찾아갈 일이 없어졌다. 대신 김 씨는 명절마다 스승님의 집을 찾아가 인사를 드린다고 했다.스승님의 영향으로 그는 꿈이 생겼다. 통일된 뒤 북한에 돌아가 만화책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멋진 책들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것이 탈북민 1호 인쇄업자가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그가 다니던 김포의 한 교회 목사도 감사한 사람이다.“인쇄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얼마나 미숙했겠습니까. 지금 제가 봐도 줄 간격이나 오자 등이 훤히 보였죠. 하지만 목사님은 늘 교회에서 ‘우리 김인철 사장이 최고다’고 칭찬하면서 꼭 성공할거라고 자신감을 심어줬죠.”맨 주먹으로 시작한 그에게 뭐 하나라도 일감을 맡겨 주려고 애를 써준 남북하나재단 직원들도 너무나 감사한 사람들이다. 아무 인맥도 없는 한국 사회에서 첫 발을 내딛기까지 그들의 도움은 큰 힘이 됐다. 첫 입찰 심사를 통과했을 때 자기 일처럼 기뻐해준 사람들이다.그런 격려에 힘입어 한 발 한 발 걸어온 결과 김 씨의 ‘지원인쇄출판사’는 매년 성장했다. 직원도 9명으로 늘었다. 이중 4명이 탈북민이다.지난해 매출 10억 원을 달성했고, 올해는 25억 원을 달성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대다수 기관들이 인쇄 예산을 방역 예산으로 바꿔 인쇄업이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거둔 성과다.“코로나 사태로 비대면 서비스가 확장돼 배달이 늘고, 박스 수요가 많아졌습니다. 우리도 요즘 박스 생산 쪽으로 많이 공략하고 있죠.”# ‘한국은 살만한 세상.’김 씨의 인쇄소에는 정직원 말고도 하나원을 갓 졸업한 탈북민 10여명이 찾아와 인턴을 한다. 그들은 그의 성공 비결을 들려달라고 요청하곤 한다. 그때마다 김 씨는 “한국은 정말 살만한 세상이며 자유를 누리려면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그가 한국에 막 정착한 탈북민에게 해주는 말은 크게 4가지다.첫째는 한국에서 적성부터 빨리 찾으라는 것이다. 적성에 맞는 일을 잡아야 오래 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사업을 하려면 꼭 밑천으로 먼저 몇 천 만원을 모아놓고 시작하라는 것이다. 단돈 100만 원으로 시작해 너무 힘들었던 자신의 경험이 우러나오는 조언이다. 셋째는 노력이다. 힘든 만큼 노력이 돌아올 수 있는 사회가 이곳이기 때문에 실패해도 좌절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말해준다. 넷째는 정직함이다. 김 씨는 “정직함은 얼굴에 만들어낼 수 없다. 그것은 자기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아직 김 씨는 자신이 성공했다고 보지 않는다. 지금도 한국에 뿌리를 내리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인쇄소 매출을 100억 정도 올리면 좋겠지만, 그건 꿈일 뿐이다. 당면한 목표는 몇 년 전부터 계속 노력하지만 아직까지 이루지 못한 대기업 사옥에 복사점 내는 일을 올해 안에 성공시키고 싶다.김 씨를 한국으로 이끌어온 꿈-세계 여행은 아직 그의 머리 속에 자리 잡을 틈이 없다.그는 지금도 김포의 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지금까지 번 돈을 계속 설비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하남지식산업센터에 100평짜리 인쇄 시설도 갖추고 각종 기계도 갖췄지만, 아내에게 아직 반지 하나 사주지 못했다.김 씨는 아침마다 김포 집을 나와 올림픽대로를 따라 1시간30분~2시간을 운전해 하남 공장으로 간다. 출근시간대에 꽉 막혀있는 올림픽대로 어느 차 안에는 때론 근심 가득한 표정을, 때론 환한 표정을 하고 앉아있는 양강도 혜산에서 온 이 남자도 끼어있다. 압록강에서 뛰어놀며 성장한 그는 이제 한강을 오르내리며 뿌리를 내리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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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러지지 않는 탈북 여사장, 밤마다 韓사장들 접대요구에…[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내려가는 KTX 안에서 한 여인이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입사한 회사는 6개월 만에 부도가 났다. 사장은 사채업자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당장 먹고 살기 어려운 상황이라 닥치는 대로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서울에 오면 200~300만 원은 거뜬히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올라왔지만, 알고 보니 마사지업소였다.이제 더 헤맬 기력도 없었다. 돌아가는 기차에서 여인은 결심을 굳혔다.“부도 난 저 회사를 내가 인수하자.”부산역에 내리자마자 그는 회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선언했다.“이 회사 제가 맡아 살리면 어떨까요?”남자 상무(고작 직원이 3명인 회사였지만)가 박수를 보냈다.“그래,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요.”듣기 좋게 말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 말에 힘이 솟았다.‘그것 봐. 이들도 내가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왜 나는 나 스스로를 믿지 못하지. 어차피 가진 것 없는 몸인데, 한번 힘껏 부딪쳐 보기라도 하자.’2009년 3월 한국 입국 7개월 차 탈북여성 신경순 씨에게 일어난 일이다. 망했던 회사는 신 씨가 인수한 2년 뒤 연간 매출을 20억 원을 넘겼다.# 탈북신 씨는 1969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영예군인(전상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남들처럼 학교를 다녔고, 1986년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남들이 선망하는 39호실 산하 외화벌이회사에 취직했다. 대우도 좋았고, 가끔 양복지와 같은 선물도 받는 회사였다.그러나 그는 노동당원이 되겠다고 그 회사를 2년 만에 때려치우고, 제일 힘든 곳인 무산광산 채굴 현장에 자원했다. 모두가 뜯어말렸지만 그의 결심은 단호했다. 하지만 결국 얻은 것은 병이었다. 2년 만에 집에 돌아와 병 치료를 하는 도중 ‘고난의 행군’을 맞았다.남들처럼 장사도 했고, 황해도를 오가며 쌀 배낭을 나르기도 했다. 그러나 도무지 견딜 수 없어 결국 1999년 탈북을 선택했다. 탈북한 뒤엔 중국 허베이(河北) 성의 깊은 산골 한족 남성에게 의탁해 살았다.한국에 입국한 탈북민 3만3718명(2020년 9월 기준) 여성은 72%이며, 탈북민 전체의 70%는 함경도 지역 출신이다. 신 씨의 성장과 탈북 스토리, 중국 생활은 많은 탈북 여성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고, 음식도 안 맞는 곳에서 겪어야 했던 그 많은 아픔을 여기에 다 설명할 순 없다. 너무나 견디기 힘들어 2년 뒤 파출소를 찾아가 북에 보내달라고 해도 무시하는 동네였다. 그가 살았던 농촌은 밤농사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밤을 줍고, 팔고 하는 생활이 1년 내내 쳇바퀴처럼 돌아갔다. 그래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곳이었다.“이곳을 벗어나려면 중국어부터 배워야 한다.”그 마을 여인들은 모두 문맹자였다. 남자들도 신문을 잘 읽을 줄 몰랐다.신 씨는 한 학년 올라가며 아이들이 버린 흙 묻은 교과서를 주어다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을 독학했더니 이제는 중국인도 가려보지 못할 정도로 말과 글이 능숙해졌다. 이젠 어딜 가든 취직이 가능할 것 같았다.2005년 그는 집을 나와 현에 있는 옷 공장에 취직했다. 한국어는 어디서 들을 곳도 없는 곳에서 그는 한족 여인들과 함께 공장에 다녔다.# “북송하세요.”삶을 바꾼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어느 날 옷 공장 옆에 있는 농산물수출회사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한국 거래처에서 전화가 왔는데 일을 처리해주던 조선족 통역이 그날 없었던 것이다. 그곳 사장은 옆 옷 공장에 조선에서 온 여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신 씨는 처음 한국 사람과 통화하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분명 우리말인데, 제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 순간 내가 중국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죠.”그렇게 급할 때마다 통역 몇 번씩 해준 것이 인연이 돼 한국 거래처 사장이 왔을 때도 통역을 해주게 됐다. 마침 한국 사장은 중간에서 낀 조선족 통역이 사기를 치는 것 아닌지 의심하던 차였다. 그는 신 씨를 무역 거래 회의에 참가시켰다. 처음엔 가만히 앉아 들으라고 했다. 이 회의에 참가하면서 신 씨는 농산물 거래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이해하게 됐다.한국에 돌아간 사장은 곧 그에게 연락을 해왔다. 자기가 월급을 줄 테니 허베이 성의 2~3개 현을 담당해 밤 시장 현황과 가격 등을 조사해 보내라는 것이다. 그가 그 일을 시작하자 주변에서 “가격 좀 뻥튀기해도 한국에선 모른다. 이럴 때 돈 좀 벌어놓아야 한다.” “중국 사장들에게서 선물을 적당히 받아도 된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러나 신 씨는 자신을 믿어준 한국 사장이 고마워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단 1전도 붙이지 않고 정직하게 보고했고, 몇 개 현을 돌아다니며 자기 일처럼 가장 싸고 질 좋은 밤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2년을 일했다. 이제는 허베이 성의 중국 밤 수출 회사 사장들과도 안면도 트여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 시련이 찾아왔다.2007년 한 중국 사장이 보낸 밤이 계약서와 달리 질이 좋지 않아 클레임(손해배상)에 걸렸다. 중국 사장은 사과 대신에 발뺌하기에 급급했다. 화가 난 한국 사장은 “저 회사의 밤은 절대 받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그해 가을 햇밤철이 다가오자 중국인 사장이 “왜 우리에겐 오더를 주지 않냐”며 찾아왔다. 신 씨가 상황을 설명하며 물량을 줄 수가 없다고 하자 그가 협박했다.“우릴 포함시켜주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신고해 북송시킬거야.”신 씨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러나 한국 사장의 지시를 어길 수는 없다고 생각해 태연하게 대답했다.“맘대로 하세요.”그러고도 2년을 알고 지낸 사이인데 신고까지 할까 속으론 기대도 품었다. 그러나 기대는 어긋났다. 공안이 그가 묵던 숙소에 들이닥쳐 그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보위부 감옥에서2007년 9월 6일 그는 단둥을 거쳐 평북 신의주 보위부로 끌려 나갔다. 북한에 도착한 그날부터 신 씨는 폭행과 수치심 등을 겪으며 후회했다.“그래도 중국에 있으면 언젠가 고향 갈 기회가 있을 줄 알고 한국으로 가지 않았던 내가 정말 바보였구나.”신 씨가 일할 당시 중국에선 드라마 ‘대장금’이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드라마가 상영되는 시간엔 공장과 거리가 텅텅 비었다. 신 씨를 보고 동료들이 “한국이 그렇게 잘 사냐. 너는 왜 거길 가지 않냐”고 물었다. 그를 고용한 한국 사장이 한국에 올 생각이 없냐고 물었을 때 그는 단호하게 싫다고 대답했다.북한에 끌려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나서야 신 씨는 정신이 들었다. 고향에 대한 미련이 날아가는 데는 단 몇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어떻게 하나 여길 나가 이번엔 한국에 가야겠다. 호랑이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바싹 차리면 살 길이 있다고 했으니 어떻게 하나 기회를 잡아야겠다.”며칠 뒤 보위부 감옥 소장이 신 씨를 불렀다.“이봐, 신경순. 너는 경력이 좀 특이하더라. 중국에서 무역업에 종사했다며?”“예, 허베이 몇 개 현 농산물을 동남아와 유럽에 수출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거긴 무역을 어떻게 해?”신 씨가 한국과 거래했다는 것만 쏙 빼고, 중국에서 이뤄지는 농산물 수출 절차 등을 설명하니 소장의 눈이 커졌다. 북한에선 달러나 위안화를 만질 수 있는 무역업자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선망의 직업이다. 그런데 그런 무역업을 중국 본토에 앉아 세계와 했다고 하니 소장이 놀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돈 많이 벌었지? 얼마나 벌어놨어?”“예, 몇 십만 달러는 벌었는데, 갑자기 잡혀왔습니다.”“억울하겠다. 중국 남자 좋은 일만 했네.”“소장님. 돈 버는 재간이 있으면 그 돈 내오는 재간도 있지 않겠습니까.”신 씨의 말에 이번엔 소장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다음날 소장은 북송돼 감옥에 수감된 전체 탈북민이 모인 자리에서 소리쳤다.“너네 신경순이 절반만큼만 살고 오면 내 욕도 안한다. 바보처럼 돈도 못 벌고 그러고 잡혀오나.”소장이 그렇게 소리치자 다른 간수들이 신 씨를 보는 눈도 달라졌다. 보위부 감옥은 북송된 탈북민을 심문해 처형할 사람, 정치범수용소나 일반 감옥에 보낼 사람, 보안서(경찰) 집결소(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낼 사람 등으로 분류하는 곳이다. 집결소에 가면 가장 처벌이 경미하다. 그러나 그곳에도 빨리 보내진 않는다. 보통 감옥에서 이관되기까지 몇 달씩 걸리는데 경순은 한 달 만에 집결소로 넘겨졌다.그가 나가는 날 소장의 측근이 그를 따로 불렀다.“이봐, 경순이. 이제 네가 살아가려면 돈이 매우 필요할거야. 우린 전혀 소문내지 않고 중국에서 돈 받아오는 선이 있어. 집결소에서 나오면 찾아와.”측근이 몰래 건네준 작은 쪽지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중국에서 무역을 했다는 신 씨의 서류가 넘어왔는지 집결소 간수(경찰)들도 그에게 호의적으로 대했다. 힘든 야외 일을 시키지 않고 주로 집결소 마당에서 일하게 했다. 간수 한 명은 그의 옆에 붙어 중국어를 가르쳐달라 성가시게 했고, 한 명은 중국 생활을 들려달라고 요청했다. 한국 사장의 심부름을 했을 뿐인데 신 씨는 북한에서 글로벌 인재라도 북송된 듯이 인정된 것이다. 집결소에서도 한 달 정도 있은 뒤 그는 고향인 청진으로 송환됐다.# 한국 입국고향에 갔더니 거주지 분주소는 전기도 없고 난방도 없었다. 밤에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그가 왔다는 소식에 부모들이 찾아와 안면이 있는 보안원에게 사정했다.보안원이 며칠 뒤 말했다.“너는 노병의 딸이니 특별히 봐줘서 집에서 다니게 해줄게. 매일 아침 일찍 여기에 왔다가 조사를 받고 밤에 집에 가.”엄청난 특혜였다. 신 씨는 일주일 뒤 도망쳤다. 추적을 피해 이리저리 숨어 다니다가 2008년 1월 두만강을 넘었다. 중국에 가니 그를 알던 사장들이 동정해주며 빨리 한국으로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심지어 해외에 나간 여인의 호구까지 구해 진짜 중국인 여권까지 만들어주었다. 그해 5월 그는 중국 무역업자 일행에 포함돼 김해공항에 내렸다. 한국에 왔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일주일 동안 부산 시내 등을 구경 다니다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했더니 난리가 났다. 탈북민이 김해공항을 통해 들어온 첫 사례라고 들었다. 이후 그는 김해공항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날아와 정보기관 조사와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8월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때까지만 해도 꿈은 하늘에 닿아있었다. 앞으로 나가 어떻게 살지 걱정하는 남들과는 달리 그는 사회에 나가 입사할 직장이 이미 정해져 있는 상태였다.그가 중국에 있을 때 소속됐던 부산 거래처 사장이 자기에게 와서 함께 일을 해보자고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원을 나와 그는 망설임 없이 부산으로 갔다. 대한민국 국민이 된 보람은 컸다. 월급은 100만 원에 불과했지만 이제 중국에 가서 계약을 체결할 때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입사하자마자 국제 금융위기가 닥친 것이다. 그가 입사했을 때만해도 1달러에 1000원대였던 환율은 그해 12월 1500원을 넘어섰다. 수입업체들에게 직격탄이었다. 곳곳에서 기업들이 도산하기 시작했다. 사채를 쓰며 버티던 사장은 결국 이듬해 3월에 사라졌다. 회사가 사라진 뒤 신 씨는 직업을 찾았지만 40살이 된 여성을 찾는 기업은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회사를 인수하기로 결심했다. 신 씨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위기에서 찾은 기회신 씨가 회사를 인수하기로 결심했을 때 수중에는 반년 동안 100만 원의 월급을 받아 모은 400만 원이 있었다. 그 돈으로 그는 공과금부터 갚았다. 소상공인 대출 1000만 원을 받고 5개월 뒤 탈북민에게 주는 취업 장려금 500만을 더해 직원들의 밀린 월급을 주었다.그리고 8월 24일 처음으로 ‘신영무역’이라는 회사 간판을 걸었다. 새롭게 뿌리부터 시작한다는 의미였다.중국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사장들이 그가 밤 수입회사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돈은 나중에 갚으라”며 두 컨테이너를 외상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눈물나게 고마웠지만, 외상으로 받으면 품질이 떨어질 것 같아 거절했다. 간난신고 끝에 들여온 첫 컨테이너는 3일 만에 다 팔았다. 두 번째 컨테이너도 3일 만에 팔았다. 신이 났다.그러나 생소한 땅에서 그에게 닥치는 고난과 견제는 상상 이상이었다.사채업자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도망친 사장이 밀린 사채를 갚으라며 집기를 부수며 행패를 부렸다. “북한에서 별게 다 기어 들어왔다. 당장 북으로 꺼져라”는 욕을 매일 먹었다. 그때마다 그는 “내게 빌려준 것이 아닌데, 왜 내게 갚으라고 하냐”며 당차게 맞섰다.경쟁업체들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업계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신 씨가 알던 착한 한국인은 없었다. 입사해 몇 달 지났을 때 신 씨는 한국의 경쟁업체 사장이 중국의 거래업체에 “저 여자 중국에 밤 사려 가면 신고해 북송시키라”고 전화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북송이란 단어만 들어도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그에게는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말이었다.신 씨는 “그 사장은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말할 수 있지 다른 경쟁회사들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고 회상했다.밤 수출 및 판매 시장에는 여러 개의 회사가 있다. 신 씨는 이중 유일한 여사장이었고, 나이도 제일 어렸다.밤마다 한국 오프라인 거래처 사장들이 찾아와 밤을 받아주는 대신 접대를 요구했고 3차까지는 기본 코스가 됐다. 물어보니 한국에선 이런 게 당연하다고 했다. 처음 몇 달은 관행인가 싶어 따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고 용납할 수 없었다.“내가 좋은 밤을 좋은 가격에 가져다주면 내게 고마워해야지 내가 왜 이 사람들에게 접대를 해야 하지? 이런 식의 사업은 할 수 없다.”그는 한국 거래처 사장들에게 더는 접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그들은 온갖 욕을 다 퍼부으며 떠나가 경쟁업체 고객이 됐다. 몇 달이 지나자 거래처들이 거짓말처럼 다 사라졌다. 밤을 수입해도 팔 곳이 없는 것이다.신 씨는 홀로 앉아 눈물을 흘렸다.“내가 억울한 대로 접대 요구를 다 받아줘야 하나”고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럴 바엔 사업을 그만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그러나 그는 그런 위기에서 다시 새로운 곳으로 도전했다.“대한민국은 IT 강국인데, 이 조건을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왜 밤은 오프라인에서만 팔아야 하나. 홈페이지를 만들어 온라인으로 판매해보자. 밤은 계절상품이라 가을에만 팔린다는데 왜 여름에 팔면 안 되나.”그때는 밤이 거리에서 구워 파는 정도로만 인식돼 있었지 온라인에서 밤을 산다는 개념이 없었다. 브랜드라는 개념도 없었다. 신 씨는 인터넷을 배웠고,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중국어에 능숙하고, 중국에서 밤 수출업체에서 일해 봤던 경험이 있고, 현지 업체 사장들과 가족 같은 사이로 오랫동안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다른 경쟁사들이 가격 조건을 가장 중요하게 따질 때 그는 중국 현지를 돌면서 하나하나 좋은 밤을 골랐다. 그래서 어떤 업체보다 품질과 가격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차별화를 하기 위해 ‘키즈약밤’ ‘신영약단밤’ 등의 브랜드를 만들었다. 키즈는 국산에 비해 알이 작은 약단밤이란 의미였다.대박이었다. 2011년 3월 홈페이지를 만들었을 때 마침 한국에는 티몬, 그루폰 등 미국의 소셜커머스 업체들이 막 진출했다. 그곳에 입점해 아이스박스를 처음 쓰기 시작했더니 여름에도 불이 나게 판매가 됐다. 어떤 날은 너무 물량이 많아 거래하는 우체국 전 직원들이 우수고객을 도와준다며 달라붙어 택배를 포장해줄 정도였다.그해 티몬 한 곳에서만 11억 원의 매출이 났다. 회사 전체 매출은 20억 원이 넘었다. 지금은 밤 시장이 온라인 판매가 위주다. 2차, 3차를 요구하며 갑질하던 오프라인 중간 거래업체 사장들도 사업을 접고 사라졌다.# 공짜는 없다신영무역 매출액이 늘어나자 2012년부터 관세청, 국세청 등에서 3번 연속 세무조사가 들어왔다. 신 씨는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거래처 사장들에게서 세금계산서를 받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들은 세금에 무지했던 신 씨에게 “계산서를 발행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다”고 주장했고, 신 씨는 나중에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몰라 그들이 하자는 대로 했다. 세무조사가 들어오자 모든 거래금액의 추징금과 가산세는 그의 몫이었다. 3억 넘게 세금을 내고 나자 사업할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 사업을 했던 이유는 추징금은 갚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추징금을 다 갚고 나니 2016년부터 귀신같이 매출이 크게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또 사업을 접을 수가 없었다.그는 이 일을 통해 세무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머리를 싸매고 세무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신영무역은 이제 매년 수십 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모범적인 납세자가 됐다.물론 순탄한 사업은 없다. 잘 나가면 업계에서 집중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고, 매일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일이 터진다.신 씨는 “어제가 모여 오늘이 되고, 오늘이 모여 내일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오늘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그의 좌우명은 “위기는 기회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이다. 북한에서 갖고 있던 신조라고 했다.신 씨의 인생사를 듣고 보니 짓밟히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들판의 잡초가 떠올랐다.북에 앉아 굶어죽을 대신 탈북을 선택했고, 중국에서 피타게 중국어 공부를 해 한국 회사에 취직했다. 금융위기 때 파산한 회사를 접수했고, 거래처 회사들이 다 떠나자 온라인을 개척했다. 요즘도 그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진 뒤로 더 과감하게 투자하고 있다.궁금했다. 가냘프고 연약한 체구 어디에서 굴하지 않는 용기, 위기에 맞서는 용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일까. 부드러운 목소리 어디에서 단호하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배짱이 나오는 것일까.그는 오늘도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고 있다. 잠재력과 능력이 닿는 한까지 걷겠다는 것이 그의 다짐이다. 그가 앞으로 걸어갈 길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지는 알 수는 없다. 다만 인터뷰를 마치며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았다.잡초는 바람에 쓰러지지 않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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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테러조직에 무기 팔다 걸린 북한[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북한이 중국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의 분리 독립 무장 세력에 자동보총 등 무기를 넘겨주다 적발된 사건이 3년 전 발생했다. 더구나 2017년 10월 18일 열린 제19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19차 당 대회)를 불과 일주일 앞둔 민감한 시점이었다. 북-중 혈맹을 자랑하는 양국 간에 일어난 일이라곤 상상하기 힘든 사건이다. 중국 현지 소식통들을 통해 파악한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당시 랴오닝(遼寧)성 콴뎬(寬甸)만족자치현 공안당국은 북한에서 수상한 트럭 2대가 강을 건너온 정황을 포착했다. 평안북도 벽동군 동주리와 마주하고 있는 콴뎬현 다시차(大西岔)진 린장(臨江)촌은 중국이 북한에서 목재를 실어올 때 화물차가 경유하는 대북 ‘임시통상구(화물경유지)’로 활용되기에 평소에도 북한에서 트럭들이 자주 드나든다. 첫 차량은 변방대 초소를 통과해 압록강 옆 변강 고속도로를 내달리다 단속에 걸려 체포됐다. 첫째 차량이 체포되는 것과 동시에 이 차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수십 km 떨어져 오던 둘째 차량은 사라졌다. 이 지역은 무인지경이 많아 단둥에서 파견된 무장경찰대가 일주일이나 꼬박 뒤져 깊은 수림 속에 처박힌 두 번째 차량을 찾아냈다. 차량들에는 북한산 자동소총(AK-47), 권총 등 각종 총기가 가득 적재돼 있었다. 트럭을 몰고 가던 사람들은 신장위구르 무장 세력과 연결된 이들이었다. 조사 결과 이들은 “무기를 넘겨줄 테니 압록강까지 와서 받아가라”는 북한의 제안을 받고 움직이던 중이었다. 그런데 북한의 제안이 파격적이었다. “대금은 무기가 신장에 도착한 뒤 지불해도 된다”는 것. 무기 밀거래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선 북한이 돈 때문에 무기를 팔고자 한 게 아니라 일부러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자극하기 위해 쇼를 벌였다고 분석했다. 북한이 실제 신장에 무기를 전달하기보다는 일부러 정보를 흘려 중국에 적발되게 만들었다는 의미다. 북한이 그럴 동기도 충분했다. 사건 한 달 전인 2017년 9월 3일 북한은 6차 핵실험을 감행한 뒤 “대륙간탄도로켓(ICBM) 장착용 수소탄 시험을 성공적으로 단행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9월 11일 ‘대북 제재 결의 2375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대북 석유 수출은 연간 400만 배럴로 제한됐고, 정유 제품 수출은 기존보다 55% 줄어든 200만 배럴을 상한선으로 제한됐다. 액화천연가스(LNG)의 수출은 물론이고 직물, 의류 중간제품 및 완제품 등의 섬유 수출까지 전면 금지됐다. 북한과의 합작 사업 및 유지·운영도 전면 금지됐으며, 해외 파견 북한 근로자의 신규 고용마저 중단됐다. 이 모든 게 북한으로선 치명적 타격이 되는 조치였다. 이 결의안은 중국의 협조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는데 중국도 자국 19차 당 대회를 한 달 앞둔 시점에 북한이 핵실험을 진행한 것에 분노했다. 그래서 결의안이 채택되자마자 단둥을 비롯해 북-중 세관에서 유엔 결의안에 해당되는 수출입 물자를 압수 및 차단했다. 그러자 북한이 중국을 대놓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중국 정부와 언론의 실명을 거론하며 “다른 주권 국가의 노선을 공공연히 시비하며 푼수 없이 노는 것을 보면 지난 시기 독선과 편협으로 자국 인민들과 국제사회의 신뢰를 어지간히 잃은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난했을 정도다. 여기에 북한은 현지 경찰서 습격 등 무장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국의 ‘아킬레스건’ 신장위구르에 무기를 보내는 쇼까지 벌인 것이다. 중국이 항의하면 “당신들까지 유엔 제재에 가담하니 앉아서 굶어 죽을 판이라 우리도 눈에 뵈는 게 없다”고 주장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도 북한의 이런 속셈을 알기 때문에 북한의 무기 밀매 사건은 어느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다. 북한 정부에 항의하지도 않았다. 이듬해 3월 김정은이 방중해 시 주석을 만나며 양국 관계는 당시 남북 관계처럼 급격히 화해 무드로 반전했다. 무기 밀매 사건은 북한이 중국을 실질적으로 협박한 사례다. 우리는 북-중 관계 악화를 언론의 비난 정도만 보고 짐작하지만, 실제 물밑에선 벼랑 끝 전술까지 동원된다. 그렇다고 중국이 북한에 보복할 처지도 못 된다. 시 주석은 지난주 항미원조 전쟁 70주년 승리를 운운하며 전쟁에서 19만7000명이 죽었다고 말했다. 그 수많은 목숨을 바쳐 안하무인 깡패 이웃을 만들었으니 중국도 속으론 많이 억울할 듯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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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온지 1년만에 유언장 썼던 탈북 여의사 “이젠 법학박사가 목표”[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1990년대 중반 북한에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대기근이 휩쓸었다. 거리에 바싹 마른 시체들이 방치됐다. 병원 침대에선 영양실조로 실려 온 아이들의 눈빛이 꺼져가고 있었다. 의사들이 할 일은 없었다.함경북도 청진 시 중심부 포항구역의 한 병원 소아과 의사였던 김지은 씨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괴로움에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병원에는 포도당, 링거가 한 방울도 없었다.“퇴근하면서 병상을 돌아봤어요. 내일 여기 누워있는 아이들 중 누가 남아있을까. 퇴근할 때마다 뒤통수에 희망과 기대의 눈빛이 꽂혀요. 의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죽어가는 아이를 보며 우는 부모 곁에서 같이 울어주는 것뿐이었죠. 더는 병원에 의사란 이름으로 있을 수가 없었어요.”1999년 3월 아직도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넘어 그는 중국으로 넘었다. 품에는 아버지가 유언처럼 써준 편지가 있었다.# 아버지의 유언김 씨는 1966년 청진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1960년대 초반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을 피해 자녀들을 데리고 북한으로 들어갔다. 형제들 중 그만 유일하게 북에서 태어났다.학교 때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꿈은 법조인이 되는 것. 그러나 출신성분 제도가 엄격한 북한에서 중국 출신 부모를 둔 그가 유일한 법학부가 있는 김일성대에 입학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언니처럼 사범대학에서 교사가 되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기어코 반대했다.그의 아버지는 북한에 와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중 다리를 다쳐 장애인 판정을 받았다. 이후 병원에서 보일러공 겸 세탁 일을 했다. 어머니는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듯 했다. 딸은 꼭 병원 의사를 시키고 싶어 머리를 싸매고 누웠다.끝내 어머니의 뜻을 꺾지 못하고 청진의학대학 동의학부에 입학한 김 씨는 만 7년 과정을 마치고 1988년 졸업한 뒤 포항구역병원 내과의사로 배치됐다. 북에서 10년 동안 의사를 하면서 내과와 소아과에서 근무했다.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중병으로 집에 누워있었다. 김일성 사망 소식을 듣자 오랫동안 뭔가를 깊이 곰곰이 생각하던 아버지는 편지를 한 장 쓰더니 딸에게 주었다.“지은아, 이 편지를 병원 초급당비서에게 갖다 주어라.”병원 초급당비서와 함께 읽은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내 딸을 당에 바칩니다. 딸을 바치는 것으로 오랫동안 노동당원 생활을 해왔던 저의 마지막 당비를 대신합니다.”집에 돌아온 딸에게 아버지가 물었다.“당비서가 편지를 받고 어떤 반응이더냐.”“아주 좋아하던데요.”며칠 뒤 아버지는 다시 딸을 조용히 불러 편지 한 통을 건넸다.“이 편지는 네가 잘 간직해라. 언젠가 길이 생기면 꼭 가거라.”김 씨가 편지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중국에 있는 아버지의 누이동생 등 친척들의 주소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편지를 건넨 아버지는 그날부터 단 한 끼도 먹지 않고 단식을 시작했다. 온 가족이 매달려 애원하고 사정해도 끝내 아무 것도 먹지 않더니 9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탈북아버지가 스스로 삶을 마감한 이후 김 씨의 머리 속에는 오랫동안 의문이 맴돌았다.‘왜 아버지는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의 편지를 내게 준 걸까?’당시까지만 해도 김 씨는 병원에서 열심히 일해 초급당비서가 되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김일성 사망 이후 닥쳐온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의사의 삶에 회의를 느꼈다.초급당비서 방을 청소하다 우연히 본 서류 한 장도 그의 꿈에 절망을 심어주었다. 병원 초급당비서는 병원 종사자 중 일본, 중국, 미국 등 해외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따로 관리하고 있었다. 김 씨는 북에서 당 비서는커녕 요시찰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탈북했다. 다시 북송됐다가도 몇 달이면 또 사라졌다. ‘중국이 어떤 곳이기에 저 사람들은 저렇게 고문을 받고도 다시 나가는 걸까’ 의아했다.김 씨는 아버지의 편지를 꺼냈다. 아버지의 형제들, 어머니의 형제들 모두 살고 있는 중국에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병원에 사표를 내고 나왔다.고난의 행군 시절 무너져가는 나라를 보며 김 씨는 비로소 아버지가 남긴 편지의 의미를 깨달았다. 첫 편지는 딸이 이 땅에 살게 될 경우를 대비해 노동당에 보험용으로 보낸 것이고, 두 번째 편지는 이 땅을 떠날 상황이 되면 중국에 사는 친척의 도움을 받으라는 의미였다. 몇 년 뒤 대량탈북이 시작돼 사람들이 중국으로 줄지어 넘어가던 시절, 김 씨는 ‘이것이 아버지가 말한 길이었구나’라고 생각했다.1999년 3월 아직 얼음이 가득한 두만강을 넘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여전히 중국의 친척들을 만나 경제적 도움을 받고 다시 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개 먹이에 받은 충격두만강을 넘은 그가 어디로 갈지 몰라 한 중국 마을을 서성일 때 60대로 보이는 여인이 다가오더니 “조선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밥상도 차려주고 젖은 옷도 갈아입혔다. 대량 탈북 초기 연변에는 북에서 굶주려 넘어온 탈북민들을 호의적으로 대해준 조선족들이 많았다.친척을 찾기까지 거의 보름 동안 그 집에 머물렀다. 한번은 밖에 나갔더니 그릇 안에 이밥과 고기가 얼어 있었다. 김 씨가 말했다.“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저에게 매일 따뜻한 밥을 해줘서 고맙습니다. 새로 밥을 짓지 마시고 여기 있는 밥과 고기를 데워 먹으면 좋겠어요.”그러자 여인이 말했다.“그건 사람 먹는 게 아니야. 개를 먹으라고 준건데, 느끼해서 잘 안 먹어.”김 씨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그 순간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어요. 머리 속에 깊이 박혀 있던 영양실조로 죽어간 아이들의 얼굴들이 떠올랐어요. 중국은 농촌 개조차 이밥에 고기국을 배불러 먹지 않는데, 내가 지금까지 어떤 교육을 받고 세뇌돼 살아왔는지 돌아봤죠. 충격으로 그때 친척집에 가기 전까지 한 9일 동안 말을 안했던 것 같아요. 도움을 받고 다시 북에 가려 했는데 그때 그 생각이 무너져 내렸어요. 저 땅에 다시 가고 싶지 않았죠.”1960년대부터 김일성은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기와집에 비단옷을 입는 세상이 공산주의다”고 규정하고, 공산주의 건설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인민을 추동했다. 그러나 인민이 받은 대가는 굶주림이었다. 반면 수정주의로 나간다며 그렇게 비판한 중국에선 개들도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있었다.# 처음 만난 한국 오빠1999년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에 있는 고모 집에 머물 때였다. 발이 넓기로 유명한 이웃집 여인이 “내가 한국 사업가들을 여럿 아는데, 그중 한 명이 북에서 여의사가 넘어왔다는 말을 듣고 꼭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더라”고 했다.그때까지 한국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김 씨는 거절했다. 그러나 여인이 하도 졸라대자 “북한 얘기를 하기는 자존심이 상하니, 그걸 묻지 않는 조건으로 만나보겠다”고 답했다.약속한 시간이 되자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앉아있는 김 씨의 귀에 쿵쿵 큰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문을 벌컥 열더니 싱글싱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진짜 덥다. 그쵸?”그 한마디가 김 씨의 긴장된 마음을 녹였다.“뭐야. 무시무시한 남조선 괴뢰도당이 아니라 흔한 동네 오빠잖아.”남자는 갈 때까지 약속한 대로 김 씨의 자존심에 상할 말은 전혀 꺼내지 않았다.며칠 지났을 때 이웃 여인이 시장에 가자고 하더니 비싼 옷을 사주었다.속으로 ‘옷이 날개라고, 북에서 온 내가 이렇게 입으니 때벗이 했네’라고 은근히 좋아할 때 그 여인이 말했다.“저번에 왔던 남자 말이야. 가면서 ‘자존심 강한 여자 같은데, 나중에 옷 한 벌 사주라’고 돈을 주고 갔어.”김 씨는 지금도 그때 딱 한번 봤던, 처음 만났던 한국 ‘오빠’를 잊지 못했다.“어디 사는지, 누구인지 지금도 모르지만, 1999년 룽징에서 북한 여의사 구경 왔던 남자를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어요. 이젠 70대 노인이 됐겠네요.”# 베이징으로 가다언제까지 고모와 친척들에게 의탁해 살 순 없었다. 친척 소개로 헤이룽장(黑龍江) 성 무단장(牧丹江)의 어느 마을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9개월 머물며 열심히 중국어를 공부했다. 하지만 워낙 조용한 동네라 수상한 여자가 있다는 신고가 들어갔고 어느 새벽 공안에 체포됐다. 공안들은 그의 중국어를 듣고 북에서 넘어온 지 1년 됐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북송될 운명을 걱정할 때 마을에서 알고 지내던 치보(治保) 주임이 파출소에 찾아와 안면이 있는 공안들을 만나 석방해달라고 사정했다. 치보는 중국 마을마다 있는 민경이라 할 수 있다. 공안은 ‘이곳에 있지 말라’는 석방 조건을 걸었다.치보가 물었다.“여기 더 있을 수 없으니 이젠 딴 곳에 가시오. 어디로 가고 싶어요?”김 씨는 조용한 곳에 오래 숨어있긴 어려우니 도시로 가야겠다고 생각해 “베이징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치보가 베이징행 열차표와 중국돈 20원을 주었다.“제가 중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참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정말 열심히 도와줬거든요.”베이징 기차역을 나설 때 막막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베이징 역 앞을 배회하다 치마저고리 여인이 그려진 간판을 보았다. 다짜고짜 들어가 일자리를 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베이징 생활이 시작됐다.식당 일을 배워 한국인 유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대학에 ‘코리안푸드’라는 이름으로 도시락까지 팔게 됐다. 그러나 위생증이 없는 것이 드러나 이것도 오래 하지 못했다. 민박 청소와 빨래 등을 하다 베이징의 한 대학에 교수로 온 한국인 가정에 가정부로 들어갔다.# 은인이 된 한국 여교수한국 여교수는 김 씨보다 3살 어렸고, 5살 된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남편은 한국에서 교수를 하고 있어 베이징에 없었다.김 씨는 여교수에게 탈북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국에 국제결혼을 하려다 돈을 사기당해 연변으로 돌아갈 수 없는 조선족 여인이라고 소개했다.김 씨는 그를 떠올리며 “여교수는 굉장히 높은 인격을 보여주었다”고 회상했다.침대를 붙여 같이 자자고 청했고, 자기가 있을 때는 절대 청소를 못하게 했다. 쇼핑을 하게 되면 꼭 김 씨의 옷 등을 사와 선물했다.여교수는 늘 “아주머니는 조금만 가르치면 공부를 참 잘할 것 같다”며 컴퓨터와 인터넷도 가르쳤다. 그렇게 안착한 듯했던 생활은 길지 않았다.어느 날 여교수가 말했다.“이젠 계약 기간이 끝나 한국에 돌아가야 해요. 한국에서 남편이 데리러 오는데, 아주머니는 여전히 한국에 갈 생각이 있으세요? 제가 초청장을 보내드릴 테니 우리 집에 와주세요. 한국에 가서 애 하나 더 낳으려는데 아주머니가 키워주세요.”그 때 김 씨는 자신이 사실은 탈북한 북한 여의사라는 것, 중국인 신분이 아니라 한국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미리 말해주셨어야죠. 제가 정말 잘해드렸을 텐데….”“이미 저에게 충분히, 너무 잘해 주셨어요.”둘은 부둥켜안고 한참 울었다.서울에 돌아온 여교수는 몇 달 뒤 자기 대학에서 탈북한 학생을 찾아냈다. 그를 통해 어떻게 하면 한국에 올 수 있는지, 어느 탈북 브로커와 만나야 하는지 등을 알아냈다.몇 달 뒤 김 씨는 여교수가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돈은 제가 댈 테니, 제가 알려준 브로커를 만나 한국에 오세요.”그 덕분에 김 씨는 라오스, 미얀마, 태국 등을 거쳐 2002년 3월 14일 한국 땅을 밟았다. 그때 만난 여교수는 지금도 서울의 모 대학에서 교수로 있다.“베이징에서 키웠던 5살 아이가 이젠 20살이 훌쩍 넘었죠. 지금도 우리 둘은 가깝게 지내고 있어요.”# 유서2003년 어느 날, 김 씨는 혼자 눈물을 흘리며 유언장을 써내려갔다. 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 디딘지 1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정말 목숨을 끊으려 했어요. 도무지 앞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죠.”한국에 오자마자 사기를 당해 정착금을 모두 잃었다. 많은 탈북민이 그랬듯 그도 정착하자마자 교회에 다니게 됐다. 한 여인이 언니라고 부르라며 친근하게 다가왔다.“아직 직업이 없지. 집에 앉아 놀면 뭐해. 네트워크 사업을 하는 곳이 있으니 거기 다니면 한국 사람도 많이 만나 정착도 빨리 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어.”김 씨는 네트워크 사업이 최신 기술을 다루는 회사인 줄 알았다. 자기 시간을 활용하며 공부도 할 수 있겠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전 재산을 잃는 데는 반년도 걸리지 않았다.그가 자살까지 결심한 데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탈북민이 한국에 오면 한국 정부는 북한 학력 인정 서류를 발급해 준다. 김 씨도 의대 졸업과 의사 경력을 인정받아 교육부에서 발급한 “한국에서 6년제 의대를 나온 자와 동등한 자로 인정한다”는 경력서류를 받았다. 이 서류로 의사 국가고시를 보려 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는 “북한 경력으로 고시를 볼 수 없으니 의대를 다시 다녀야 한다”고 했다. 의대에 입학하려 서류를 냈더니 이번엔 교육부에서 “한 사람이 같은 전공을 두 번 공부할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당시 법으론 의사 고시를 볼 수도, 의대를 다닐 수도 없는 처지가 돼 한국에서 의사를 하겠다는 김 씨의 꿈은 허물어졌다.“북에 가서 의대 졸업증과 의사 증명서를 갖고 오라더군요. 한국에 와서 거짓말탐지기까지 통과하며 인정받았는데 북한 서류를 갖고 오라니 황당했죠. ‘그럼 북에 가서 증명서 갖고 올 테니,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지 않겠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고 따졌더니 그건 또 못한다고 하더군요.”살아갈 의욕을 잃었다.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던 시기였다.# 살아야 할 이유유서를 쓰면서 지나온 삶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살면서 지금보다 더 힘들 때가 있었던가를 돌아봤다. 중국에서 두 번씩 체포돼 북송 위기에 처했을 때도 죽지 않았는데, 지금은 따듯한 집도 있고 밥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데 왜 죽을 생각이 드는지 반성했다. 그리고 그는 살아야 할 이유 네 가지를 찾아냈다.첫째는 죽을 생각이 드는 것은 자존심과 욕심 때문이라고 결론 냈다. 한국에 와 “나는 의사가 안 되면 안 돼”라는 생각이 좌절을 부른 이유라고 생각했다. ‘내가 꼭 의사가 돼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나. 일반 회사라도 다니면 되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두 번째는 “중국에서 한국에 오지 못하고 생사의 고비를 넘고 있는 탈북민이 얼마나 많은데, 정말 행운으로 한국에 일찍 와놓고, 죽을 생각을 하는 모습을 본다면 다른 탈북민들 눈에는 ‘놀고 있네’라고 비춰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세 번째는 자존감이었다. 북한에선 탈북민을 배신자라고 하는데, 꼭 여기서 성공해서 고향에 돌아가 “나는 누구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보고 왔으니 우리도 그렇게 돼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앞선 세 가지보다 더 큰 이유가 네 번째였다. 김 씨는 북에서 남들처럼 20대 중반에 결혼했다. 1년 만에 이혼으로 끝났지만, 아들이 태어났다. 이혼할 때 시댁은 마음을 바꿔 돌아오라며 아들을 내놓지 않았다. 아들을 보고 싶었고, 그 아들이 “엄마는 날 버리고 혼자 한국에 가서 무책임하게 죽었다”고 평생 원망할 거라 생각하면 견딜 수 없었다.그는 결국 죽음의 유혹을 이겨냈다. 의사 대신 한국의 일반 회사에 취직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나니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이 풀리고 미소가 돌아왔다.회사를 다니며 사람들과 친해지자 사장과 이사들이 오히려 더 격려했다.“당신이 한국에 와서 의사가 될 수 없는 이유를 들으니 너무도 불합리해 우리가 납득할 수 없다. 싸워야 한다.”그들의 주선으로 그는 2004년 10월 국회 국무조정실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나가 진술했다. 그랬더니 의대 입학 허가가 났다. 의사 경력이 있으니 예과 2년을 건너뛰고 본과 4년만 다니면 된다고 했다. 그가 대학에 다니던 몇 년 뒤엔 북한 의사 출신이 한국 의사 국가고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법도 바뀌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대학에 몇 년 다니던 때라 그는 시험 대신 대학 졸업을 선택했다. 김 씨는 남북에서 의대를 나온 흔치않은 경력을 소유하게 됐다. 그의 노력으로 이후에 온 다른 탈북 의사들은 의사 고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됐다.# 상봉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2009년 대학을 졸업했고, 그해 부천에 한의원을 열었다. 북한에서 의대 동의학과를, 한국에서 한의대를 나온 그에게 언론은 ‘남북한 통합 한의사 1호’라는 타이틀을 붙여 주었다. 2017년 한의원을 서울로 옮겼다. 받은 사랑에 보답하겠다는 마음으로 2014년부터 요양원 봉사도 매주 나갔다. 인도네시아, 인도, 태국 등 해외 치료봉사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성공한 탈북민’이 됐고, 인터넷엔 그를 다룬 기사들이 쌓여갔다.개인적으로 가장 행복한 일은 아들과의 상봉이었다.아들이 13살 때 사람을 시켜 두만강까지 데려온 뒤 엄마에게 오라고 설득했다. 한국에 있다는 소리는 할 수 없어 “엄마가 너무 멀리 있어 갈 수 없으니, 엄마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네가 오는 길밖에 없다”고 설득했다. 아들은 할아버지와 살겠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랬던 아들이 19살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엄마, 나 지금 가도 돼?”“그럼, 그럼. 그런데 왜 마음이 바뀌었니?”“공식적인 이유를 말할까, 비공식적인 이유를 말할까? (“둘 다 말해줘.”) 음. 공식적으론 살아보니 여기선 미래가 없더라고. 열심히 공부 잘하면 될 줄 알았는데, 한계가 있더라고. 비공식적인 이유는 한국 가면 승용차를 가질 수 있고 송혜교, 이지아도 볼 수 있을 것 같아.” 두 연예인은 그때 북한에서 가장 인기 있던 한국 드라마 주인공들이었다.그렇게 몇 달 뒤 아들이 왔다. 조사기관에 들어가 만남은 허용되지 않았지만 전화통화는 가능했다. 김 씨는 자신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늘 꿈 꿔오던 스스로의 미션이기도 했다.전화 말미에 “아들, 사랑해”라고 말했다. 전화기 너머에선 아무 대답이 없었다. 북에선 사랑한다는 말을 연인 사이에서도 잘 쓰지 않는다.며칠 뒤 다시 통화가 되자 그는 또 “아들, 사랑해”라고 말했다. 이번엔 전화기 너머 자기도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어, 어, 어”하는 짧은 소리가 들려왔다. 세 번째 통화에서 또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번엔 “예, 나도요”라는 대답이 날아왔다. 그는 인생 최대의 기쁨을 느꼈다.하나원을 졸업하고 아들이 집에 온 날 그는 6살 때 헤어진 아들을 품에 안고 온 밤을 지새웠다. 14년 만의 재회였다. 그 아들이 지금은 한국에서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법조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김 씨를 기쁘게 한 건 엄마를 너무나 아끼는 아들, 목표와 실천이 확실한 성실한 청년의 모습으로 자라줬기 때문이다. # 인생은 마라톤김 씨는 지난해 말 운영하던 한의원을 접고 경기도의 한 한방병원 부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간적 여유를 갖고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다. 병원 원장으로 진료를 하고, 단골 고객을 관리하다보니 공부할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그는 올해 서울 소재 한 법학대학 법학과에 입학해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중학생 시절의 꿈이 이끈 것일까. 의사가 법학박사를 꿈꾸는 이유가 궁금했다. “돈을 버는 것보다 통일될 한반도를 위해 뭔가 기여하는 게 남북에서 의사로 살아본 제 역할이 아닐까 싶어요. 이제 와서 부자가 될 것도 아니고, 될 수도 없는데, 돈은 살만큼 벌면 되잖아요. 언젠가 통일이 되면 남북한의 의료통합도 중요한 문제가 될 거예요. 미리 한국과 북한의 의료법과 규제를 공부해 어떻게 합리적인 통합 체계를 만들지를 고민해야죠. 한국에 먼저 온 사람으로 다음 세대를 위해 지렛대가 되고 싶어요.”그는 삶을 마라톤에 비유했다.“마라톤은 꼴찌를 해도 박수를 받는 종목이잖아요. 시작하자마자 앞서 간다고 1등이 아니고, 마지막을 빨리 간다고 해도 1등이 안돼요. 누가 나를 앞질러 가도 조급해 하지 않고 인내와 끈기를 갖고 자신만의 페이스를 지키며 완주하는 게 중요하죠. 주저앉지만 않고 계속 가면 경기장에 들어갈 것이고, 등수와 상관없이 누군가는 나를 기다렸다 박수를 쳐주지 않겠어요. 그건 포기하지 않고 와준 과정에 대한 찬사라고 생각해요.”김 씨의 마라톤 예찬을 들으며 과연 그는 지금 마라톤 코스의 어디쯤에서 뛰고 있을까 상상했다. 반환점은 돌았을까. 그가 생각하는 결승점은 어디일까. 남북한 통합 한의사 1호에 법학박사까지 받으면 경기장이 보이는 것일까.고백한다면 기자는 그와 하나원 동기이다. 18년 전 우리는 똑같은 날, 똑같은 시간에 하나원을 나와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취재수첩을 닫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 말을 건넸다.“우리 그동안 참 열심히 살았죠?” “그러게. 정말 열심히 달려왔지.”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온갖 사연을 머금은 눈빛이 수천 마디 말을 대신해 허공에서 만났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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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급이 다른 세계최고의 풍미-식감”… 100개국 입맛 사로잡은 신라면

    농심 신라면블랙이 6월 미국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라면으로 선정된 데 이어 세계적인 유튜브와 여행 전문 사이트 등에서 찬사를 받고 있다. 지난달 1660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초대형 유튜브 채널 ‘굿 미시컬 모닝(Good Mythical Morning)’은 ‘최고의 라면은 무엇일까?’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신라면을 최고의 라면으로 꼽았다. 이 채널 운영자 렛과 링크는 구독자를 대상으로 사전 설문조사를 펼쳤고 2만8000여 명의 추천을 통해 세계 8개 라면을 비교 대상으로 선정했다. 이 중 한국 라면은 농심 신라면과 신라면블랙이 포함됐다. 영상에서 렛과 링크는 각각의 라면을 토너먼트 형식으로 맛보며 평가했다. 신라면에 대해 “날카롭게 맵지만 맛있는, 급이 다른 라면”이라고 극찬했다. 신라면은 일본 닛신의 탑라면 칠리맛과 함께 최종 결승까지 올랐고 렛과 링크는 신라면이 닛신 라면에 비해 약 5배 비싸지만 그만큼 값어치를 한다며 신라면을 1등으로 꼽았다. 세계 각국의 라면을 비교한 이 영상의 조회수는 현재 180만 회를 넘어섰고 45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릴 정도로 전 세계 누리꾼의 뜨거운 관심을 얻고 있다. 8일에는 캐나다 소재 글로벌 여행정보 전문 웹사이트 ‘더 트래블(The Travel)’이 신라면블랙을 세계 최고의 라면으로 소개해 국내외 라면 팬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았다. 더 트래블은 2020년 세계 최고의 라면 베스트 4를 발표했다. 이 중 신라면블랙은 ‘최고의 풍미와 식감’을 가진 라면으로 선정됐다. 이 사이트는 신라면블랙에 대해 ‘최고의 경쟁자’라며 “면발이 다른 라면보다 훨씬 풍부하고, 일관성 있는 맛을 유지하며, 국물은 버섯과 채소로 풍미를 더했다”고 평가했다. 또 “글로벌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의 베스트셀러라고 소개하면서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사람들도 도전해 볼 만한 가치를 지닌 라면”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신라면블랙은 라면의 블랙라벨(고급브랜드)로 인정받아 미국 월마트 3400여 개 매장에서 판매되는 등 꾸준히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신라면블랙의 흥행 이면에는 전 세계 100여 개국에 진출한 신라면의 인기가 작용하고 있다. 신라면과 신라면블랙의 활약에 힘입어 올해 상반기 농심은 해외시장에서 30% 늘어난 약 5억2000만 달러(약 5931억 원)의 매출 신기록을 세웠다. 최대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에서의 매출도 79%나 상승했다. 신라면 브랜드가 세계 최고의 라면으로 인정받은 것은 오랜 시간 도전 끝에 이룬 결과다. 1971년 처음으로 라면을 수출하기 시작한 농심은 입맛도 문화도 다른 해외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맛을 알리기 시작했다. 한국의 매운맛을 그대로 해외시장에 선보였으며 고품질을 표방한 프리미엄 전략을 추구했다. 이로써 신라면은 글로벌 시장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지 반세기 가까운 시간 만에 ‘국가대표 라면’ ‘세계 최고의 라면’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현재 신라면은 국내외 연간 7600억 원의 매출로 K-라면 전성시대를 열고 있다. 특히 최근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국내외 라면 소비가 급증했을 때 농심은 일찌감치 해외공장을 가동하고 현지 시장을 깊숙이 파고들며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투자를 확대했다. 농심은 올해 해외 매출 목표로 작년의 8억 달러(약 9121억 원)보다 약 20% 많은 9억5000만 달러(약 1조831억 원)를 제시해 경쟁업체들이 따라올 수 없는 초격차 수준으로 ‘글로벌 신(辛)세계’를 열겠다는 야심을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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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장관 아들’ 평양음악대학 교수의 한국 정착기[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서울에서 북한 음악에 대해 궁금하다면 그를 찾아가면 된다. 한국에 온 탈북자 중 그만큼 북한의 음악 교육의 최정점에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황상혁 교수(46)는 북한 최고의 음악대학인 ‘김원균명칭음악종합대학’에서 20년 동안 피아노 교수로 재직하다 6년 전 탈북해 한국에 왔다. 북에 남겨둔 가족들 때문에 조용한 은둔을 해왔지만 지난해부터 언론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의 ‘커밍아웃’ 덕분에 아직도 잘 알려지지 않은 북한 음악은 가려졌던 베일을 한 꺼풀 또 벗게 됐다. 황 교수는 북한에서 ‘금수저’의 자식으로 태어나 최고의 엘리트 영재 교육을 받으며 고생을 모르고 살아왔지만 서울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 서울에 온 北 장관의 아들북한 외교관들의 망명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한국 언론은 그의 부친은 누구고, 장인은 누구인지를 캐내 보도한다. 하지만 장관의 아들인 황 교수는 2014년 언론의 주목을 받지 않고 조용히 서울에 들어왔다. 북한에서 그의 삶은 탄탄대로였다. 1974년 평양의 김일성 저택에서 태어났다. 중구역 성문동 만수대의사당 뒤편에 있는 북에서 5호 초대소라고 불리는 관저다. 그가 그곳에서 태어난 이유는 그의 할아버지가 호위사령부 부부장으로 관저에 입주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 교수의 부친은 1993년 만들어진 국토환경보호위원회 초대 위원장(장관급)을 지냈다. 국토환경보호위원회는 현재 국토환경보호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모친도 평양 외국인병원에서 오랫동안 의사로 일했다. 외국인 병원은 각종 약이 풍부하게 제공되기 때문에 북한 의사들이 가장 일하기 원하는 병원이기도 하다. 황 교수의 형제들도 형이 조평통 간부를 지내는 등 북한의 요직에서 근무했다. 황 교수의 장인은 외무성에서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와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고 주 스웨덴 북한 대사관 참사를 지냈다. 이런 끗발 있고,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황 교수가 음악을 시작한 건 인민학교 3학년 때인 9살부터였다. 어머니가 내성적이었던 그를 음악인으로 키우겠다며 평양학생소년궁전으로 데려간 게 시작이었다. 황 교수는 그곳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이후 평양예술전문학교에 진학했고, 14세 때인 1988년엔 당시 평양음악무용대학 전문부에 편입했다. 전국에서 10명만 선발된 학생들과 함께 피아노를 쳤다. 대학 졸업 후 만 20세 때 그는 평양음악무용대학 기악학부 피아노 강좌 교원으로 임명됐다. 이곳에서 2년 정도 학생을 가르치던 그는 지휘자가 되고 싶어 다시 전국에서 극소수만 선발돼 다니는 지휘 박사원을 3년 동안 다니며 지휘자 자격증을 받았다. 박사원은 한국의 대학원을 의미한다. 2018년 한국에 파견된 북한 예술단 공연을 지휘했던 윤범주가 대학 1년 후배다. 한국에선 예술 인재들을 양성하는 북한 최고의 학교가 금성학원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김정은의 아내 이설주가 이 학교 출신으로 알려지면서 금성학원에 대한 신비감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북한에서 정통 예술인들을 양성하는 곳은 김원균명칭음악종합대학이다. 그 차이에 대해 황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금성학원은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청년동맹) 소속이고, 음악대학은 문화성 소속입니다. 금성은 원래 김일성을 위해 설맞이 공연할 학생들을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곳인데, 보천보전자악단이 뜨면서 ‘마이크 가수’와 전자악기 연주가를 키우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죠. 북한 예술계의 정통 성악 가수와 ‘기악쟁이’들은 다 음악대학에서 키운다고 보면 됩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나니 금성학원은 북한판 아이돌 양성소라고 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에서 촉망받는 음악인 코스를 걷던 그는 2003년 중국에 파견된다. 북한의 답답한 울타리에 갇혀 있던 황 교수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당시 북한은 동북 3성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20명의 예술교육전문가 대표단을 파견했다. 음악대학과 만수대, 피바다, 국립민속예술단 등에서 뽑힌 사람들이 중국 현지에 체류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들은 선양, 장춘, 옌지 등에 음악학원을 차려놓고 음악에 자질 있는 중국 학생들을 교육했다. 이렇게 배운 중국인들이 북한에 들어가 ‘4월의 봄 예술축전’ 등에 참가해 공연하면, 김 씨 일가를 흠모하는 외국인들로 둔갑하게 된다. 이런 정치적 의도와 더불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외화벌이도 같이 하게 됐다.# 의도치 않았던 탈북3년 파견기간이 끝나 2006년 북에 돌아간 황 교수는 김원균명칭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다 2011년 중국에 다시 파견돼 나왔다. 그리고 파견 기간이 끝나기 직전인 2014년 탈북하게 됐다. 그가 탈북한 계기는 더 넓은 세상에서 음악을 배우자는 식의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다. 중국에 체류할 동안 한국인을 몰래 만났는데, 귀국 무렵이 되자 보위원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적을 캐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해외에 파견됐다가 한국인들과 만났다는 이유로 쟁쟁한 음악인생이 끝나 감옥에 끌려가고 가정이 파탄 난 선배들의 사연이 떠올랐다. 보위원이 지금은 모르는 척 하지만 어디까지 캐냈는지 알 수 없었다. 북에 갔다 한국인을 만난 증거를 제시하면 꼼짝없이 감옥에 끌려갈 것이란 공포심이 그를 괴롭혔다. 그가 만났던 한국인은 미국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정작 길을 떠난 뒤 말이 바뀌었다. 동남아의 한 나라 미국 대사관까지 찾아갔지만, 미국 정부가 받아주기로 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가 떠난 뒤 한국 언론에는 ‘평양음악대학 교수가 탈북했다’는 뉴스가 떴다. 돌아갈 수도 없는 몸이 됐다. 그는 미국을 포기하고 한국을 최종 목적지로 정했다. #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대학교수서울로 온 뒤 그는 새롭게 인생을 개척해야 했다. 피아노에만 파묻혀 있어도 살아가는데 걱정이 없던 북한에서의 삶과는 전혀 달랐다. 한국에 온 뒤 임대아파트에 사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31년 동안 피아노만 연주해 왔던 북한 피아노 영재는 서울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정글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한국 피아노계는 클래식과 실용음악으로 양분돼 있다. 그가 북에서 배웠던 음악과는 결이 확연하게 달랐다. “북에서 음악대학 작곡학부 지휘자 양성반 피아노 연주자를 몇 년 했던 적이 있어요. 지휘자 훈련을 위해 관현악단을 대신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인 거죠. 여기서 연주하면 세계 관현악곡은 거의 연주하게 됩니다. 그걸 하고 싶어 제가 자원했었습니다. 북한도 베토벤, 체르니 등의 고전 클래식을 연주하긴 하지만, 미국 음악 같은 것은 전혀 배울 수 없습니다. 한국에 오니 이곳 클래식 피아니스트들은 한 거장의 음악을 끝까지 파고들더군요. 그게 북한과 다른 점이었죠.” 그렇다고 북한 피아노계가 완전히 폐쇄적인 것은 아니라고 황 교수는 설명했다. “북한도 피아노곡은 정말 많습니다. 대중가요, 동요 등을 재해석한 곡들은 양적으로도 어마어마하죠. 북한 피아노의 장점은 클래식에 민족적 색깔을 가미해 변형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클래식과 실용음악의 중간쯤에 머물렀던 황 교수는 남쪽에서 음악을 새롭게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고 서울대 음악대학원 석사 과정에 들어갔다. 하지만 여기서도 난관이 생겼다. 연주는 자신이 있었지만, 석사 학위를 따려니 영어 점수가 있어야 했다. 북에선 음악인들이 외국어를 잘할 필요가 없었다. 기자와 만났을 때 그는 두터운 영어책을 펴놓고 문장을 중얼중얼 외우고 있었다. 1년째 그렇게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에 와서 만난 가장 힘든 난관이고, 넘어가야 할 벽이었다.# 북한 전문직들의 미래는?황 교수는 통일이 된다면 북한 예술계, 의학계 등에 종사했던 전문직들이 어떻게 한국 사회와 성공적으로 융합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분단 75년 동안 북한은 자기 나름의 예술 세계를 파고 들어왔다. 세계 예술계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의 갈라파고스’ 같은 곳이 북한이다. 황 교수는 그곳에서 피아노만 치다가 새로운 세상에 왔다. 지금까지 37년 동안 갈고 닦은 그의 연주 실력은 북한 최상위급이고, 여기에 북한에서 작곡과 편곡, 지휘 능력까지 갖춘 인재로 양성됐다. 하지만 불시착한 한국에서 그는 ‘외래종’같은 존재가 됐다. 황 교수는 한국 음악과 북한 음악의 ‘이종교배’가 가능할지를 판단하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황 교수 같은 음악인들이 한국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면 통일된 뒤 북한에 존재하는 수많은 ‘인민예술가’ ‘공훈예술가’들은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다. 김정은의 총애를 받는 북한의 최고의 실력자라 할 수 있는 윤범주 은하수관현악단 지휘자도 한국에 오게 되면 예능프로그램에 나가 입담을 자랑하는 것 외엔 할 일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먼저 온 황 교수는 그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전통 민요나 한국의 동요 등을 새롭게 편곡하고 싶은 욕심을 갖고 있다. “남쪽에 오니 클래식 우물을 깊게 파던가, 아니면 유행곡을 만들든가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섰어요. 그러나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기존 음악의 재해석입니다. 이건 한국이 아직 많이 발전됐다고 볼 수 없는 분야인 것 같아요.” 그런 문제의식 속에 그는 ‘아리랑’ ‘어메이징 그레이스’ 등 여러 곡을 새롭게 편곡해 발표했다. 황 교수를 인정하고 격려해주는 사람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올해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이 확산되면서 그 역시 공연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북한 최고의 음악대학 피아노 교수에서 한국 음악대학 대학원생이 된 그는 언젠가 낡은 허물을 벗고 새롭게 태어나 날개 짓 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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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일 속에 숨겨진 횃불 체포조[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북한은 숙청이 일상화된 곳이다. 숙청은 한 명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 명이 체포되면 그와 연관된 인물들이 줄줄이 함께 체포돼 조사를 받는다. 이런 체포는 신속하게 진행된다. 과거 사례를 봤을 때 유력 권력자 한 명이 잡혀 처형될 정도면 그와 연관된 인물들도 체포되고, 풀려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함께 처형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다. 그러니 누가 끌려갔다는 소문이 퍼지면 ‘곧 나도 잡혀갈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하곤 한다. 권력자와 연관된 사람들은 대체로 돈과 비호 세력이 많다. 이 때문에 일단 숨어버린 뒤 필사적으로 탈출하면 체포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숙청 위기에서 한국까지 온 고위급이 없는 것을 보면 탈출에 성공한 경우도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그만큼 주변에서 눈치 챌 틈 없이 여러 명의 체포가 전광석화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지시가 떨어지면 군사작전처럼 시간과 분까지 정해 체포가 마무리된다. 체포에 응하지 않고 반항하거나 탈주하려 할 경우 현장 사살도 가능하다. 이런 체포 작전이 완벽하게 진행되려면 고도로 전문화된 체포 전담 부대가 있어야 한다. 아직 한국에는 북한의 숙청 소식만 전해질 뿐, 김정은의 손발이 돼 이를 집행하는 부대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그 부대가 바로 ‘홰불 체포조’다. 북한에선 ‘횃불’을 ‘홰불’이라 쓴다. 정식 명칭은 국가보위성 전투기동부 소속 특수작전소조다. 이들은 출동할 때 버스 앞 유리 상단에 시뻘건 횃불에 노동당 마크가 그려진 특별통행증을 붙이고 있다. 밤에 통행증의 횃불과 당 마크가 빛을 내뿜는다 해서 북에선 횃불 체포조라 부른다. 이들이 탄 차량은 모든 교통초소와 차단초소를 검문이나 정차 없이 통과할 수 있다. 김정은 경호부대인 974군부대가 경비를 서는 중앙당 청사와 중앙당 최고위 간부들의 저택 차단초소도 횃불 마크가 붙은 차를 막을 수 없다. 이런 차량들이 한국의 소방차나 구급차가 도로를 내달리듯 최고 속력으로 바람을 몰고 달려갈 때면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어디서 또 줄초상이 나나 싶어 오금이 저린다. 체포조는 차량부터 구별이 된다. 이탈리아 유명 차량 생산기업 ‘이베코(IVECO)’ 마크가 앞에 붙은 짙은 선팅을 한 버스를 타고 다닌다. 이베코 브랜드는 북한에선 보기 드물다. 북한이 어떻게 대북제재를 피해 이런 버스를 들여가는지는 비밀도 아니다. 중국인 명의로 벤츠나 아우디를 비롯한 각종 고급 차량을 구입해 중국까지만 가져오면 된다. 중국 정부의 묵인이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북한으로 들여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국의 협조가 있는 한 차량이나 사치품 등에 대한 대북제재는 사실상 허울뿐인 셈이다. 횃불 체포조 규모는 100명 정도로 알려졌다. 20명이 한 개 조로 구성되며, 체포하는 인원수에 따라 몇 개 조가 출동할지가 결정된다. 직접적인 출동 명령은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국가보위상이 내린다. 조원들은 무술 유단자들로 구성됐고, 전례는 없지만 만약 특정 지역에서 소요가 일어날 경우 즉각 투입돼 체포하는 임무도 수행하게 된다.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사람도 횃불 체포조 차량이 들이닥치는 순간 고양이 앞의 쥐 신세가 돼 기가 죽는다. 워낙 높은 간부들을 많이 체포했기에 체포조 성원들의 태도는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다고 한다. 당정군의 최고위급 권력자도 영장조차 없이 연행되는 일이 일반적이다. 조금만 동작이 굼뜨면 발로 차고 뺨을 때리며 끌고 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들이 출동해 잡은 사람이 복직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설사 복직하더라도 김정은의 명령에 따르는 체포조에 보복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간혹 체포조가 떴다는 정보를 일찍 접하고 잠적하는 이도 있지만, 하루 이틀 버티기가 어렵다고 한다. 북한에선 체포에 관한 한 이들이 최고의 프로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10일 성대하게 연 노동당 창건 75주년 퍼레이드에서 김정은은 명품 시계를 번쩍이면서 인민에게 감사하다며 울먹였다. 하지만 번쩍번쩍 노동당 마크를 달고 열심히 사람들을 잡아가는 횃불 체포조 같은 존재들이 없었다면…. 감사를 받을 인민이 북에 남아 있을까.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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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년만 기다려줘, 꼭 성공할게” 탈북민 인생 바꿔놓은 소형 캠코더[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꿈을 향해 달렸다. 길이 나타났다.” 한국에서 처음 본 소형 캠코더가 마흔 살 늦은 나이의 한 탈북민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꿈을 향해 17년 동안 잠시도 한 눈을 팔지 않고 걸어왔다. 이제 그는 세계 최초를 꿈꾼다. 허영철 원코리아 미디컴 프로덕션 대표(57)의 이야기다. 대표, 감독, PD 등 다양한 직함으로 알려진 그의 삶은 한국에 온 탈북민들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된다.# “사람이 하는 거라면….”2004년 3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영상교육센터 원장은 난감한 학생을 만났다. 6개월 과정의 유료 영상미디어교육 공고를 신문에 냈는데 41세 탈북민 남성이 부산에서 찾아와 배우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그런데 영상 편집에 필수적인 컴퓨터의 ‘컴’자도 몰랐다. 원장이 말했다. “제가 지금까지 숱한 학생을 교육시켰지만, 3가지가 처음입니다. 탈북민 교육생도, 마흔이 넘어 영상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도, 제일 중요하게는 컴퓨터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처음입니다. 웬만하면 다른 일 찾는 게 어떨까요.” 남성은 한참 머리 숙이고 있더니 말문을 열었다. “원장님. 신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거면 배우겠습니다.” 허 씨는 이렇게 영상교육의 세계를 만나게 됐다. 태어나 그렇게 절박하게 공부한 적은 처음이었다. 부산에 젊은 아내와 세 살 어린 딸을 남겨두고 떠나온 길이었다. “3개월을 죽도록 공부하니 컴퓨터가 너무 쉬워졌어요. 그리고 영상 촬영과 제작이 제 적성에 너무 잘 맞는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6개월 과정을 졸업할 땐 원장도 한 사람의 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허 씨가 영상을 배우겠다고 결심한 건 2003년 1월 탈북민정착지원기관인 하나원에서 캠코더를 처음 본 게 계기였다. “하나원에서 지방 도시에 견학을 갔는데 자원봉사자들이 손에 작은 캠코더를 들고 와 찍어줬어요. 그리고 영상을 편집해 동영상을 주는데, 그때 ‘어떻게 요런 작은 걸로 영화를 만드는가’하고 놀랐죠.” 강열한 인상을 받은 그는 하나원에서 나오자마자 캠코더부터 구입했다. 무턱대고 찍고 영화를 만들어 보려 했지만 아는 게 너무 없었다. 배울 곳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신문에 실린 영상교육 광고를 봤을 때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한 심정이었다. 집을 나서던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5년만 날 믿고 기다려줘. 꼭 성공해서 돈 많이 벌어 편안하게 살게 해줄게.”# 부산영화제 입상영상 촬영과 편집에 자신감이 붙은 허 씨는 머리 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단편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뿌리’라는 제목의 첫 작품은 단번에 2005년 3월 부산시네마영화제에서 창작상을 받았다. 자신감이 샘솟았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뿌리는 그의 집안의 역사를 담은 작품이었다. 허 씨의 부친은 6.25전쟁에 북한군 장교로 참전했다. 부친은 러시아어, 일본어, 중국어에 정통해 1948년 소련의 주도로 북한군이 창설될 때 통역 장교로 큰 활약을 했다고 한다. 전쟁이 발발하자 남진하는 부대에서 진격하던 부친은 마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채 포로가 됐다. 포로수용소에 가서도 그는 친공 포로들만 격리 수용된 76포로수용소의 선전 책임자를 지냈고, 전쟁 직후 북한으로 돌아갔다. 부친에게 6.25전쟁 3년의 기억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시절의 추억뿐이었다. 거제도에서 미군 포로수용소장을 납치하고, 동요하는 동료들을 죽이며 북한에 대한 충성을 굽히지 않았지만, 북에 돌아간 포로들의 운명은 가혹했다. 북한은 그들을 믿지 않았다. 귀환 포로들은 오지의 탄광과 광산 등 가장 힘든 일자리에 배치됐다. 허 씨의 부친도 양강도로 파견됐다. 다행히 수용소에서 격렬한 투쟁을 주도한 장교 출신임을 인정받아 나중에 혜산 문화회관 관장을 지냈고, 결혼도 해 아들만 여섯을 낳았다. 허 씨는 셋 째 아들로 1963년 태어났다. 2003년 1월 한국 사회에 정착한 허 씨는 어렸을 때 늘 듣던 아버지의 무용담이 사실인지 궁금해 부산에서 배를 타고 거제도로 갔다. 거기서 “포로로 살면서도 막사에 공화국기를 내걸고 깡통으로 오각별 모표를 만들어 모자에 붙이며 북한군처럼 규율 생활을 했다”던 아버지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 거제도 위령탑 앞에서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아니, 한국을 삼키려 남침했다 포로가 돼 죽은 자들을 위해 왜 위령탑까지 세워준 거지. 여긴 어떤 사회인가.” 그는 영상을 배운 뒤 다시 거제도를 찾았다. “아버지는 포로로 거제도에 왔지만, 아들은 거제도에 자유로운 관광객으로 찾아왔다. 두 번 다시 이 땅에 이런 기념관과 위령탑이 있어선 안 된다. 우리는 함께 뿌리내리고 살아야 할 한 민족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기구한 운명을 교차시켜 편집한 다큐는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입상의 영예를 받았다.# 쉬지 않고 달리다부산 영화제에서 입상하자 부산KBS ‘아침마당’ 프로그램에서 PD 겸 리포터로 일할 생각이 없냐는 제안이 왔다. 리포터 겸 편집, 촬영까지 모두 허 씨가 진행했다. 1년 뒤 울산KBS ‘생생투데이’ PD로 옮겨 2년 더 일했다. 방송 일을 하고 보니 리포터는 적성이 맞지 않았다. 결국 리포터를 그만두고 촬영과 편집에만 몰두했다. 무보수로 몇 년을 감독들과 PD들을 따라다니며 배웠다. 그러나 그는 가장이기도 했다. 영상 제작 만으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었다. 허 씨는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아침 7시까지 세탁물 배달을 했다. 낮에는 학원이나 촬영장을 다니며 영상을 배웠다.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다시 한약 배달을 했다. 주말엔 건설장에 나가 일했다. 매달 세탁물 배달로 100만, 한약 배달로 80만, 건설일로 80만, 도합 260만 원을 벌었다. 아내는 마트에서 일했다. 몇 년을 이렇게 살면서 드디어 부산 신라대 앞에 마트를 인수했다. 허 씨는 마트 계산대 옆에 작업실을 만들었다. 밤을 새며 작업실에서 편집하다 손님이 오면 뛰쳐나가 팔았다. 행운도 따랐다. 신라대에는 중국 유학생들이 많았다. 허 씨 부부가 중국어를 하는데다, 덤으로 몇 개씩 주는 등 인심 좋다는 소문에 유학생들이 허 씨 가게에 몰려왔다. 몇 년 동안 도장 깨기를 하듯 그는 촬영과 편집, 컴퓨터그래픽(CG), 색보정(DI) 등 기술을 하나하나 익혔다. 영상 촬영과 편집에 있어 모든 것이 자신 있다고 생각된 순간, 그는 자기가 만든 영상에 영혼이 없다고 느껴졌다. 시나리오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부산작가교육원에 입학해 3년 동안 시나리오 공부를 했다. 그렇게 한국 생활 내내 그는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영상 편집 프로그램인 ‘다빈치 리졸브’를 공부하고, 유튜브와 홀로그램 제작을 배우고 있다.# 사무실이 습격당하다.허 씨는 가족과 함께 2008년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이유가 있었다.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부산에 150평 스튜디오를 임대했다. 허 씨는 지금도 2005년 5월 첫 방송 카메라를 손에 넣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 전까지는 작은 캠코더로 찍었습니다. 그러다 돈을 모아 드디어 방송용 촬영 카메라인 소니PD 150을 구입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아침까지 카메라를 끌어안고 잠을 이루지 못했죠.” 그렇게 어렵게 영상 제작을 시작했다. 첫 작품으로 탈북민의 정체성을 살려 탈북 과정을 그린 ‘자유’라는 다큐를 제작하려 했다. 그런데 이런 작품을 만든다는 소식이 언론에 소개되자마자 주변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북한에서 협박이 날아왔고, 수시로 전기선이 끊기는 등 알게 모르게 방해 움직임이 나타났다. 급기야 2007년 6월 어느 아침, 스튜디오가 완전히 박살이 나있었다. 어렵게 구한 촬영 장비들이 부셔졌고, 컴퓨터에 저장됐던 촬영 및 편집본도 모두 사라졌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범인을 잡을 수 없었다. 그에겐 지금까지도 가장 아픈 기억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서울은 부산에 비해 인구가 훨씬 많아 일거리도 많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부산 생활을 접고 서울로 올라온 2008년 8월 문화체육관광부 PD직에 합격했다. 800명이 면접을 보고 40명을 뽑아 교육을 시킨 뒤 10명만 선발하는 과정인데, 허 씨는 당당히 합격했다. 이곳에서 3년을 일했고, 스포츠TV 촬영 업체로 옮겨 또 10년 가까이 일했다. 스튜디오와 장비를 완벽히 갖추고, 촬영에서 편집까지 혼자서 다 해내는 감독이 있다는 소문에 이제는 한국의 영화, 드라마 감독들에게서 오더(주문)가 계속 들어온다. 경력이 쌓이면서 주문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가족의 힘한국에서 영상 제작의 한 길로 매진하는 동안 가족은 큰 힘이 됐다. 허 씨는 북에서 남들과 마찬가지로 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 군에 나갔다. 전방 2군단 3사단 소속 공병부대에 입대해 개성시 장풍군 귀존리에서 1년 동안 비무장지대(DMZ)에 지뢰를 매설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때 경험으로 올해 화제가 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자문을 해주기도 했다. 이후 자동차 운전병 양성 교육을 받고 포차를 끌었다. 만 10년 복무를 마치고 고향인 혜산에 돌아가 결혼을 했고, 백두산청년들쭉사업소 사로청위원장을 2년간 지냈다. 이후 혜산식품연합회사 자재지도원으로 옮겨갔다. 물자를 다루는 식품회사 자재지도원은 남부럽지 않은 직업이었다. 그러다 고난의 행군 때 삶이 꼬이기 시작했다. 나라꼴이 말이 아니라고 불평한 것이 보위부에 걸려 1996년 새해를 하루 앞두고 체포됐다. 다행히 주변의 도움으로 4개월 만에 석방됐지만 주변 사람들이 줄줄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6월 중국에 넘어가 몇 달 숨어 지내다가 다시 집에 왔다. 하지만 그를 아껴주었던 양강도 인민위원회 상업부위원장이 1997년 2월 처형되는 것을 보고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예감이 들어 아내와 함께 탈북했다. 첫 탈북은 실패했다. 중국으로 넘어가자마자 체포돼 양강도 대홍단군을 통해 북송됐다. 대홍단군 보위부 반탐과장이 직접 그와 아내를 호송해 혜산으로 떠났다. 이대로 가면 죽는다는 생각이 든 허 씨는 압록강 옆 도로를 따라 이동하던 도중 어둠이 내리자 반탐과장과 다른 보위원 1명을 때려눕히고 중국으로 뛰었다. 보위원을 때려눕히며 아내에게 “뛰어”라고 소리치는 순간 아내는 남편을 믿고 차에서 뛰어내려 정신없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 쪽으로 향했다. 허 씨도 뒤따라 강을 넘었지만 아내를 잃어버렸다. 압록강 건너편 중국 쪽에서 둘은 산에서 각자 온밤을 헤맨 끝에 다음날 아침 눈물의 상봉을 했다. 부부는 연길에 들어가 숨었다. 과수원 일도 해주고 별장 관리도 하면서 2년 넘게 살았지만 1999년 5월 또 체포돼 북송됐다. 허 씨는 7개월을 함경남북도의 보위부 감방과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보냈다. 아내는 몸이 허약해져 다 죽게 되자 북한은 그를 먼저 집에 보냈다. 2000년 2월 허 씨는 고향으로 이송됐다. 혜산에 가면 과거 보위부 간부를 때려눕히고 뛴 전력이 들키게 될 판이었다. 혜산을 두 역전 앞두고 그는 다시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도보로 집에 숨어들어 다시 아내를 데리고 그날 다시 중국으로 넘어왔다. 이번엔 청도로 옮겨갔다. 청도에 처음 갔을 때는 폐지와 빈병을 주워 팔며 먹고 살았지만, 나중에 한국 사장을 알게 돼 한국 식품회사 경영을 봐주며 편안하게 살았다. 삶이 안정되자 2001년 딸이 태어났다. 딸이 태어나는 날 그는 답답한 마음에 은하수가 흘러가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북한에도, 중국에도 국적을 둘 수 없으니 너는 하늘을 국적으로 걸어둬라.” 그래서 딸 이름을 은하로 지었다. 중국에서 언제까지 마음을 졸이며 살 수는 없었다. 2002년 5월 부인과 딸을 데리고 청도 한국영사관에 들어갔다. 그러나 영사관에선 “받아줄 수 없다”며 돌아가라고 했다. 그해 8월 그는 몽골로 향했다. 1살 어린 딸을 업고 부부는 이글이글 타는 몽골의 사막을 걸어 넘어 드디어 자유를 찾았다. 10월 부부는 한국에 들어왔다. 그랬던 딸이 이제는 어엿하게 컸다. “딸이 학교 다닐 때 한번도 못 갔어요. 학교에선 은하가 탈북민 자녀인 걸 모르거든요. 말투가 이상한 우리가 갔다간 아이가 곤란한 상황을 겪을까 봐 못 갔죠. 그러다 작년에 고등학교 졸업식 날에야 처음으로 우리 부부가 학교에 갔어요.” 허 씨는 군말 없이 남편을 따라 탈북했고, 지금까지도 묵묵히 옆을 지켜준 아내가 고맙기만 하다. “보위부원을 때려눕히고 뛸 때도, 중국에서 폐지를 팔 때도, 몽골 사막을 넘을 때도 아내는 제 옆에 있었죠. 여기 와 남편이 영상에 미쳐 가정을 미처 돌보지 못해도 자기가 돈을 벌며 뒷바라지 해줬어요. 이제 우리는 혁명전우와 마찬가지예요.”# “하면 된다.”허 씨는 늘 낙천적인 성격이다. 그의 좌우명은 “하면 된다”이다. “지금은 그렇지만 항상 낙천적이진 않았어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뭘 먹고 살지 고민하다 군에서 운전병 했던 경력을 살려 정비사가 되려 했어요. 6개월 정비학원을 다녀 정비사와 기술검사 자격증 2개를 따고 10군데 넘는 카센터에 찾아갔는데 어디서도 취직이 안됐죠. 나는 여기서는 쓰레기인가 싶더라고요. 그때는 자살을 여러 번 생각하기도 했죠.” 다행히 영상을 배우면서 인생을 새로 설계하게 됐다. 17년 동안 한국에서 살았던 경험으로 그는 다른 탈북민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탈북민들은 한국에 오면 빨리 적성을 찾아야 해요. 북에선 당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 됐지만 여긴 직업이 너무 많아요. 어떤 직업이 내게 맞는지 탈북민들은 모른다는 게 문제죠. 한국에 오면 공부를 하던지, 아니면 한 분야를 깊게 파고들어 달인이 되던지, 두 가지 중 한 길을 선택해야 해요. 짧게 보지 말고 길게 보고, 화려함을 버리면 한국엔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참 많아요. 한국에 온 탈북민들은 10년만 지나면 성공한 자, 실패한 자, 그 자리에 머문 자로 3부류로 갈려요. 그 이유를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국에 와서 3년만 죽기 살기로 매달리면 30년이 행복하고, 3년만 허송세월 낭비하면 30년을 실패한다’고 말입니다. 한국은 정신이 올바르게 박히고 몸만 건강하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입니다.” 정부 지원이 충분하지 않다고, 탈북민들은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각을 긍정적으로 전환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게 허 씨의 조언이다. “저는 탈북민이라서 좋은 점이 많아요. 북한 관련 영상을 제작할 일이 있으면 제가 경쟁력이 있거든요. 가령 북한 다큐 찍을 때 누가 북중 국경에 가서 실감 나게 찍을 수 있을까요. 북에서 온 우리의 경쟁력을 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마흔 넘어 정착해 벌써 이만큼 왔잖아요.” 허 씨는 지난해 김포에 50평 규모의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차렸다. 영화 촬영에 필요한 고가의 장비들도 모두 갖췄다. 지금까지 돈을 벌어 끊임없이 재투자를 한 결과다. 가을부터는 스튜디오 옆에 100평 규모의 미디어박스를 새로 건설할 계획도 갖고 있다. 이곳에 영화 촬영 세트장과 홀로그램관을 만들 생각이다. 허 씨는 6년째 매년 탈북민 10명 정도를 선발해 장학금까지 주며 미디어교육을 시킨다. 내년부터는 연기학원도 만들 계획이다. 그의 꿈이 현실화된다면 김포는 탈북민 및 북한 관련 영상제작의 ‘메카’가 될 것이다. 그의 꿈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저의 꿈은 시나리오, 연출, 촬영, 편집, 그래픽, 디자인, 합성 등을 모두 혼자서 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미국에 1인 완성 영화제작자가 1명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하면 세계에서 두 번째가 되죠. 여기에 제가 연기까지 하게 되면 세계 최초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미 허 씨는 자기가 직접 쓴 영화 시나리오도 3개 완성시켜 다듬고 있다. 그는 “배우 3명 정도를 쓰는 인건비와 약간의 제작비만 투자를 받으면 5억으로 50억 원짜리 영화를 만들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감독이 시나리오에서 편집까지 다 하면 상당한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촬영을 미리 상상하며 시나리오를 쓰고, 편집을 감독이 할 줄 알면 딱 필요한 것만 촬영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감이 뿜어 나오는 그의 눈을 보니 그 꿈이 머잖아 이뤄질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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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일성대 아래 ‘비밀’ 광장…“지하 김일성광장은 나만 가봤죠”[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지하 김일성광장은 나만 가봤죠.”평양엔 김일성광장이 두 개 있다. 하나는 평양 중심부의 광장이고, 다른 하나는 지하 약 200m에 있는 ‘비밀의 광장’이다. 위치는 김일성·김정일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 바로 옆, 평양 대성구역 김일성종합대학 옛 운동장 바로 아래다.김일성대를 만 6년 다닌 기자도, 그리고 동창 누구도 우리가 매일 오갔던 운동장 바로 아래에 김일성광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경기도 평택에 살고 있는 최태선 씨(68)는 한국에서 비밀의 김일성광장을 가본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북한에서 김일성 지시를 받고 각종 지하구조물을 건설했던 사회안전부 소속 인민경비대 6국, 일명 공병국 소속 소좌(소령) 출신의 탈북자다. 특히 그는 평양의 지하에 김일성, 김정일을 위해 만들어놓은 각종 지하 시설물의 공사에 참가한 경력을 갖고 있다. 각종 설로만 돌던 김 씨 일가 도주로의 실체 역시 그는 잘 알고 있다. 28일 그를 만나 평양시 지하 시설 건설의 역사를 들었다. 설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지하철보다 먼저 건설한 김일성 땅굴1952년 자강도 송원군에서 태어난 최 씨는 만 17세 때 공병국에 입대했다. 연·아연을 생산하는 화풍광산에서 갱장까지 지낸 그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운 광부들에게 주는 명예인 ‘공훈광부’ 1호 수상자였다. 사망한 뒤엔 애국열사가 됐다. 그런 가족사 때문인지 그는 땅굴을 전문으로 파는 공병국에 배속됐다.그가 입대한 1969년 ‘반항공지하구조물’로 불린 평양 땅굴 1계단 공사는 거의 완공단계였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평양 시 지하 땅굴 건설은 1961년에 시작됐다. 당시 김일성이 “전쟁이 다시 터져도 최고사령부는 평양에 두겠다”고 말하자, 사령부를 보호한다며 군에서 제대한 나이든 병사들을 모아 비밀 건설 부대를 만들었다. 1계단 공사가 마무리될 때쯤 김일성의 지시가 다시 하달됐다.“지금 남조선에서 고속도로를 만든다고 자랑하며, 우리보고 거북이라고 비웃는데, 우리는 평양에 먼저 지하철을 건설해야 한다. 1계단 공사가 완공됐다는 것은 비밀로 하라.”1968년 평양에선 지하철 공사가 시작됐고, 1973년 천리마선이라고 불리는 봉화역에서 붉은별역을 잇는 노선이 마무리됐다. 서울에 지하철 1호선이 완공되기 1년 전 먼저 평양이 지하철을 개통한 것이다. 서울을 앞서려고 땅속 100m 깊이에서 속도전을 벌이다 숱한 군인들이 죽었다고 한다.최 씨에 따르면 평양 천리마선은 ‘2단계’ 공사였을 뿐이다. 1978년 건설된 혁신선은 ‘3단계’였다. 그런데 지하철 공사보다 먼저 전쟁에 대비한 1계단 공사가 이미 1960년대에 완공된 것이다. 평양 시민의 교통 편의보다 김일성을 위한 지하 시설 공사가 먼저였던 셈이다.더 놀라운 건 2계단 지하철보다 1계단 땅굴이 훨씬 아래쪽에 있다는 점이다. 평양 지하철은 전쟁이 터지면 평양 시민 대피 공간이 된다. 그런데 김일성의 땅굴은 더 아래 있기 때문에 대피한 평양 시민들을 인질로 머리에 이고 있는 모양새가 된다.“평양 지하철의 유일한 환승역인 전우역에 가면 에스컬레이터로 150m 정도 지하로 내려갑니다. 수직으로 보면 지하 100m 깊이에 지하철이 있는 셈이죠. 내려가서 다시 숨겨진 비밀입구로 가면 거기서 다시 에스컬레이터로 150m 더 내려가 김일성 전용 땅굴이 나옵니다. 땅굴 너비는 당시 김일성이 타던 포드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폭이었죠.”# 지하 김일성광장의 비밀기자는 평양에서 대학을 다닐 때 늘 궁금한 게 있었다. 김일성대 앞 삼흥역에서 다음 대성산 낙원역까지 가보면 중간에 무정차역 하나를 지난다. 금수산태양궁전에서 가장 가까운 광명역이다. ‘17개 밖에 안 되는 지하철 역 중 한 곳은 항상 세우지 않고 통과하는 이유는 뭘까. 그럴 바엔 왜 지었지?’라는 의문이 생겼다.최 씨는 그 비밀을 이렇게 설명했다.“전쟁이 발발하면 김일성은 주석궁(현 금수산태양궁전)에서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옵니다. 광명역으로 오면 여러 갈래로 빠지는 지하 통로가 있습니다. 우선 평양 외곽의 형제산구역 서포역까지 연결됐는데, 서포역은 김일성 전용 기차역입니다. 두 번째로 최고사령부 야전지휘소로 알려진 철봉산초대소(특각)로 갈 수 있습니다. 철봉산초대소는 6.25전쟁 때 김일성이 하루를 보낸 뒤 ‘모처럼 시원하게 잤는데, 좋은 기가 흐르는 곳 같다’고 말한 뒤 별장이 건설됐고 이후 야전지휘소로까지 확대됐죠. 평양 중앙당 청사까지 또 터널로 이어져 있습니다.”주석궁에서 왼쪽 룡남산으로 터널로 이동하면 넓은 지하 공간이 나온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김일성광장’이다. 룡남산과 김일성대 옛 운동장 아래에 위치해 폭격에 안전하다. 이곳을 폭격하면 교정을 폭격해 대학생들을 죽였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지하 김일성광장은 가로, 세로가 100m 이상이고 높이는 12m다. 전쟁 중이라도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할 수 있도록 건설됐다. 최 씨가 입대한 1969년엔 이미 거의 완공돼 마무리 공사를 벌일 때였다.“천정 마무리 공사가 제일 어려웠습니다. 이때 김일성의 지시로 모스크바에서 터널을 전공한 박인빈이란 사람이 국장으로 투입돼 마무리했죠. 그는 북한에서 유일하게 터널국장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지하 김일성광장 옆에는 샘물터도 있다. 김일성대 교내 안에 있는 룡남산 김일성동상 바로 밑쯤 된다고 한다. 최 씨는 “김일성광장 한쪽에 큰 암반이 있었는데, 이걸 들어낼지 여부를 김일성에게 물었더니 그냥 놔두고 위에 식탁을 놓으라 해서 만찬장처럼 만들었다”고 전했다.# 남침 땅굴 공사는 무력부 몫최 씨는 여러 평양의 지하 구조물의 위치를 설명했지만, 평양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다면 너무 자세한 설명은 혼란스러울 법도 하다. 결론적으로 평양에는 김 씨 일가만 이용하는 무수한 땅굴이 얼기설기 건설돼 있다. 대학교와 아파트, 병원 등과 연결돼 있어 폭격도 어렵다. 이 땅굴에는 지금도 군인들이 주둔해 물을 퍼내고, 관리하고 있다.다만 최 씨는 평양 지하철이 유사시 시민 대피 공간으로 역할을 할지는 의문이라고 했다.“전승, 전우 역을 건설하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입구로 동시에 들어가는 테스트를 했습니다. 유사시 통과능력을 보기 위한 것인데 제가 봤을 때 폭격을 받으며 정신없이 밀려들어가다간 모두 깔려 질식사할 것 같았습니다.”최 씨에게 1970년대 발견된 남침용 지하땅굴 공사에도 참여했는지를 물었더니 “그건 무력부 공병부대에서 했다”고 답했다. 그에 따르면 “무력부가 무식하게 뚫어 발각됐지, 훨씬 전문적인 역량을 가진 공병국이 했으면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다”고 했다.1970년대 평양-원산 고속도로를 만들면서 무력부가 일명 ‘10리굴’로 알려진 무지개동굴을 뚫었는데, 이때 수많은 군인이 죽었다. 공사 기일을 맞춘다고 군인들을 마구 밀어 넣었는데, 낙석이 떨어져 많이 죽었고, 발파 가스가 빠지기 전 군인들을 투입한 탓에 질식사한 이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무력부가 환기구를 내야 한다는 상식도 모르고 터널공사에 숱한 인력을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안전부 소속인 박인빈 터널 국장이 직접 지휘를 했다.# 연예인 아파트와 연결된 김정일 터널공병국은 김일성의 지시를 직접 받아 중요 건설에 투입됐다. 지하 구조물 뿐만 아니라 창광원, 빙상관, 청류관, 평양산원 등 평양에서 유명한 건물도 공병국이 지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권력을 점차 빼앗아오던 김정일도 자신만의 건설부대를 가질 욕심을 내다가 결국 공병국에서 한 개 여단을 따로 독립시켰다. 이곳이 바로 김정일 특각 전문건설부대로 알려진 오늘날의 공병국 1여단이다. 공병국은 사회안전부 소속이었지만, 김정일은 자신이 장악한 1여단을 호위국에 소속시켰다.1980년대 최 씨는 105층 유경호텔 인근의 공병국 운수중대에서도 근무했다. 그 부근인 지하철 황금벌역 뒤에 40층 아파트가 있는데, 이곳은 ‘예술인아파트’라 불렸다. 인기 연예인들이 살았던 것이다. 때때로 호위국 군인들에 의해 운수중대 통행이 통제되는 날이 있었다. 최 씨가 지인들을 통해 알아보니 중앙당 청사에서 엘리베이터로 내려오면 예술인아파트와 연결된 지하통로가 있고, 김정일이 계속 예술인아파트를 찾는다고 한다. 이런 날엔 호위국이 ‘행사경호’라는 이름으로 아파트를 둘러싸고 교통을 통제한다.최 씨는 “공병국에 오래 있어 웬만한 내용은 다 아는데, 평남 덕천에 건설된 지하구조물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씨 일가 전용 터널을 건설한 뒤 많은 노병들이 덕천으로 갔는데 나중에 친구들을 만나 물어봐도 이 건설 내용만큼은 절대 말하지 않고 ‘무서운 굴’이라고만 하더라는 것이다. 평양 지하구조물 건설 때는 ‘비밀을 지킨다’는 손도장을 찍긴 하지만 같은 부대 동료들 사이엔 비밀은 없었다. 그런데 덕천 공사 내용만큼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입을 다물더라는 것이다. 덕천에 간 공병국 대원들은 최상의 대우를 받았다. 그 자녀들도 김일성대를 비롯한 최고의 대학에 갔는데 이 정도 대우면 분명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최 씨의 추측이다. 현재 덕천에는 ‘폭풍군단’으로 알려진 북한군 특수전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다. 최 씨는 “아무리 특수부대라도 군부 시설이라면 친구들도 말 못할 정도는 아닐 것”이라며 “분명 덕천 승리산 아래엔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어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 쌓고 남은 돌의 행방최 씨는 제대할 때까지 공병국에서 26년을 근무했다.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만 해도 공병국 대우는 북한에서 최상급이었다.“1980년대 양강도 삼지연군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할 때 갔는데, 그곳 김 씨 일가 특각을 지키는 호위국 군인들이 지방 쌀에 옥수수까지 먹고 있어 놀랐습니다. 우린 황해도 쌀만 먹고 각종 고기가 풍족했고, 명절엔 헬기로 남방과일까지 먹을 정도였죠. 호위국 군인들이 ‘너희는 무슨 부대이길래 이리 잘 먹느냐’고 부러워할 정도로 공병국에 대한 대우는 좋았습니다.”최 씨는 군관으로 발탁된 뒤 공병국 내 제일 좋은 자리에만 있었다. 공병국 병원 경리지도원을 시작으로 양식지도원을 지낸 뒤 공병국 휘발유와 맥주 공급을 담당하는 실무자로 있었다. 쌀과 휘발유, 맥주, 육류 등 엄청난 물자를 주무르는 실세였다.공병국은 ‘300호 행표’를 가지고 있었다. 300호 행표 소지자에겐 인원과 용도를 묻지 않고 물자를 공급하라는 김일성의 지시가 하달됐다. 대남연락소도 공병국과 동등한 300호행표로 공급받았다.그러나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공병국은 ‘성 쌓고 남은 돌’ 신세가 돼 버림받았다는 게 최 씨의 얘기다. 김정일이 “나에겐 공병국 1여단만 필요하다”고 하는 바람에 김일성 지시를 받던 공병국은 ‘건설돌격대’로 명칭이 바뀔 처지에 놓였다. 졸지에 버림받은 부대가 되면서 제대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평양에 살던 최 씨도 1995년 제대를 선택해 17살 터울의 맏형이 함경남도당 선전부장으로 있는 함흥으로 내려갔다.“충격이었죠. 장마당에 가니 사람들이 굶어죽어 시신들이 뒹굴었어요. 저는 1980년대 후반에 외국에 4년을 나갔다 왔고, 이후에도 공병국 휘발유, 맥주 담당 지도원을 하다 보니 사회를 몰랐어요. 배급을 왜 안주냐고 물으니 형님이 ‘사회 물정을 이렇게 모르냐’고 한숨을 쉬더군요. 4년 동안 딱 한 번 옥수수 2㎏과 쌀 1㎏을 배급으로 받았어요.”함흥에서 살면서 최 씨는 ‘이 나라엔 더는 희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러시아 벌목공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4년 뒤 그 꿈은 이뤄졌다. 열차가 떠나는 날 그는 창밖을 내다보며 결심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벌목장 탈출1999년 12월, 그는 러시아 극동 아무르 주 틴다에 도착했다. 북한의 러시아 벌목 파견 사업은 1955년 협정이 체결돼 1956년부터 시작됐다. 초기엔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아 경제범들을 보냈다. 이때 벌목은 체그도민이란 도시에서 시작됐다. 벌목공 파견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커지자 북한은 점점 파견 인원을 늘여나갔다. 나중에 체크도민 지역에 나무가 없어지자 틴다를 신지구로 삼고 이곳에 중점적으로 벌목공들을 파견했다.틴다에 도착한 최 씨는 5개월 뒤 사업장을 나왔다.“월급이 당시 40달러였는데, 도망칠 수 있다며 1년에 한 번 정산을 해줬어요. 제가 갔을 때는 그것마저 이것저것 떼어내니 남는 것도 없었어요.”2년 전 먼저 온 동료가 벌목장을 떠나 다른 곳에 나가 일하면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보위원에게 말하고 기차를 타고 소개받은 동료를 찾아 떠났다.러시아에는 벌목장을 이런 식으로 벗어난 북한 근로자들이 많다. 이들을 탈북자로 볼 순 없다. 벌목장에는 여름엔 러시아 다른 지역에 가서 건설이나 농사 등을 해주며 돈을 벌다가 눈이 오면 사업소로 돌아와 벌목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아예 몇 년씩 사업소를 떠나 돈을 버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업소 간부들은 은근히 이런 사람이 많기를 바란다. 러시아 정부에서 주는 월급과 문화비는 인원 숫자에 맞춰 사업소에 나가는데, 외부로 나간 벌목공이 많으면 이들이 받아야 할 러시아 정부의 월급을 보위지도원이나 재정지도원, 부기장 등이 짜고 떼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업소 밖에 나가겠다면 “종종 연락해주고 죽지 말고 살아 있다가 집에 갈 때 오면 된다”며 쉽게 승낙하는 것이다.하지만 평양이 고향인 벌목공은 쉽게 나가기 어렵다. 자칫 오래 있다 돌아오면 평양에 있는 가족을 지방으로 추방시키기 때문이다. 북한이 벌목공을 선발할 때 평양 사람들을 위주로 뽑는 이유이기도 하다. 러시아 말을 잘 모르거나 외부 연줄이 없으면 밖에 나가도 돈을 잘 벌지 못해 사업소에 그냥 남아 일하는 사람도 많다.# 바이칼의 ‘까레이 첸’최 씨가 사업소를 떠나 자리 잡은 곳은 바이칼 호수 옆 인구 5만 명의 도시였다. 먼저 나간 사람을 찾아 갔는데 처음 한 일은 미장이었다. 3명이 2~3일 동안 일을 했더니 1인당 200달러가 나왔다. 사업소에선 5개월을 벌목해도 받기 어려운 돈이었다.“우리가 미장을 하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서서 신기한 듯 바라봤어요. 러시아 사람들 눈에는 북한 사람들의 미장 솜씨가 곡예처럼 보였거든요.” 마치 한국 사람들이 중국 요리사의 프라이팬 손놀림을 놀랍게 보듯 러시아 사람들 눈엔 미장이 그렇게 보인 듯하다.까레이(조선인)들이 미장과 타일 시공, 용접, 온수난방 시설 수리 등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면서 일감은 계속 늘었다. 거기서 최 씨는 2016년까지 16년 동안 일했다.“그 도시의 미장은 저랑 동료들이 다 한 거 같아요. 나중에 사업장을 떠나 그곳에 온 벌목공이 15명까지 늘었는데, 그 도시의 잡다한 일들을 우리가 다 했죠.”1년에 한번 정도 사업소 담당 보위원들이 실태 조사를 한다며 오지만 그때마다 거나하게 접대하고 각자 100달러 정도 모아 찔러주면 “건강히 잘 지내라”고 격려까지 하고 떠난다고 한다. 한 도시에서 16년을 일하니 안 가본 집이 거의 없을 정도로 동네 주민이 됐다. 과거 공병국 소좌 최태선은 이 도시에서 ‘까레이 첸’으로 살았다.“한국에 갈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죠. 그런데 길을 몰랐어요.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 여성들이 베트남, 캄보디아 등을 거쳐 한국에 간다는 내용을 들으면서도 ‘저 여자들은 공작원 훈련들 받았나. 어떻게 저기까지 갔지’하며 혀만 찼죠. 우리에겐 먼 얘기 같았어요.”2016년에 한때 같은 도시에서 일하다 사라진 동료가 나타났다.“‘최 아바이 아직도 있소? 난 남조선에 가서 사오.’ 이러면서 한국 여권, 비행기표, 스마트폰을 보여주는데 정말 가슴이 뛰었어요. 북한 벌목공들은 돈을 절대 숙소에 두지 않아요. 내일이 기약돼 있지 않으니 돈을 벌면 달러로 바꿔 팬티에 붙인 주머니에 차고 다니죠. 남조선(남한)에 가서 나도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 떳떳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해 그가 알려주는 대로 움직여서 한국에 왔죠.” 그때가 2017년이었다. # 7세 소년의 꿈최 씨는 공병국에 있던 1989년~93년 예멘에 파견돼 병원을 건설해준 적이 있다. 북부예멘 대통령이 평양산원을 구경하고 부러워하자 김일성이 공병대를 파견하라고 해 약 200명이 남강사업소라는 명칭을 달고 나간 것이다. 이 부대에서 최 씨는 후방지도원으로 물자를 담당했다.“예멘의 고속도로가 1970년대 남조선 사람들이 와서 건설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1주일에 한번 동료들과 함께 홍해로 해수욕을 하러 가면서 고속도로를 타면 ‘와, 우리가 건설한 김일성 전용도로보다 이게 100배 더 좋다’라고 생각하며 달렸죠. 그때부터 남조선에 대한 동경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해외에 나와 김 씨 일가의 호화생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됐다.“예멘의 북한 대사관 사람들의 임무 중 하나는 그곳의 명물 당나귀를 김정일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당나귀가 피가 맛있고, 밸(창자)이 두꺼워 순대를 만들면 씹을수록 고소하다고 해서 김정일이 곰 순대와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라는 겁니다. 바이칼에 가니 또 그곳에만 사는 ‘오물(연어과 민물어종)’이란 물고기를 버드나무 연기로 훈제해 김정일에게 보내는 게 모스크바 대사관의 중요한 업무더라고요. 인민들은 굶어죽는데, 전 세계에 대사관에선 김정일에게 보낼 상납용 식품 구입하느라 정신없으니 화가 안 나겠습니까.”한국에 온 최 씨는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과 달리 평택은 경비원 자리가 구하기 쉬웠다고 한다.요즘 그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 그가 7세였던 1959년 고향인 화풍광산에 북한 바이올린의 전설 백고산이 왔다. 1958년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입상하고 명성을 떨친 다음해 바람을 피웠다는 죄명으로 광산 노동자로 내려온 것이다. 광산 회관에서 백고산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은 그는 집에 가서 바이올린을 사달라고 졸랐다. 강냉이밥도 귀하던 어려운 시절에 어머니는 허리띠를 조이고 조여 그에게 바이올린을 사주었다. 최 씨는 인민학교 같은 학급이 된 백고산의 딸을 졸라 연주를 배웠다. 안타깝게도 얼마 안돼 백고산은 복권됐는지 딸과 함께 마을에서 사라졌다. 이후 예멘과 러시아에서 바이올린을 가끔 연주해보긴 했지만 그때는 하루하루 바빠 연주할 여유가 없었다.요즘 인생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간을 맞았다는 그는 경비원으로 일해 조금씩 모은 ‘거금’ 50만 원을 주고 바이올린을 새로 샀다. 북한과 예멘, 러시아를 돌고 돌아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는 바이올린에서 그동안 잊었던 7세 동심의 떨림을 다시 느끼고 있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 202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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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 찾아 수천 리 행군해 탈북한 북한군 스키여단 참모장[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18세 딸이 사라졌다.모 대학 음악과에 다니던 딸이 갑자기 없어졌다. 집에 숨겨두었던 1200달러도 없어졌다. 2006년 3월 2일에 일어난 일이다.일주일 남짓 지나자 보위부에서 찾아와 그를 끌고 갔다. “딸을 어디다 빼돌렸냐”며 한 달 내내 조사와 고문이 이어졌다. 4월 11일 그는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그 사이 딸이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알아냈다. 딸이 탈북한 동선을 추적해 중국의 지인을 동원했지만 딸을 찾지 못했다는 대답이 왔다.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 새벽 정명운 씨(58)는 딸을 찾겠다고 두만강을 넘었다. 당시 마흔 넷인 그는 북한군 특수부대인 스키부대 여단참모장(대좌) 출신이었다. 막상 중국에 와보니 얼마 전까지 옌지(延吉)에 머무르던 딸이 또 사라졌다. 수소문하며 며칠 지체하는 사이 북에선 비상이 걸렸다. 중국 공안에 정 씨를 무조건 잡아 넘겨달라는 협조 공문이 전달됐다. 옌지에 가서 딸을 찾아 몰래 북에 돌아가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어차피 이젠 돌아가 봐야 처벌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그는 한국으로 가지 않으면 자신이 살아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탈출 4월 19일 그는 옌지에서 공안에 체포됐다. 한족 택시기사가 신고해 공안차 7대가 와 차에서 내리는 그를 덮쳤다. 북한에선 빨리 넘기라고 독촉했다.4월 22일 새벽 그는 북송길에 올랐다. 당시 공안은 외부 시선을 의식해 깊은 밤에 탈북자들을 북송했다. 승용차 앞에 2명이 타고, 뒷좌석에 그를 가운데 앉히고 양쪽에 공안이 앉았다. 그의 오른손과 공안의 왼손이 하나의 수갑으로 묶여 있었다.새벽이라 도로엔 차도 없었다. 승용차는 빠르게 투먼(圖們)으로 달렸다. 이제 끌려가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결단을 내렸다. 승용차 문을 벼락같이 열고 수갑을 함께 찬 공안을 밀치며 뛰어내렸다. 둘 다 아스팔트에 쓸리며 깊은 상처를 입었다. 수갑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멈춘 승용차에서 내린 공안들이 그를 포위했다. 정 씨는 몸에 품고 있던 칫솔을 꺼내 의식을 잃은 공안의 목을 겨누었다.“수갑을 풀지 않으면 여기서 함께 죽겠다.”공안들은 이미 정 씨가 어떤 경력의 인물인지 알고 있었다. 공안은 한동안 고민하더니 대치 상태를 풀고 수갑을 풀어주었다. 그들도 부상 입은 동료를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야 했던 것이다. 정 씨는 그 길로 옌지 시내에 숨어들어 지인의 집에 숨었다. 그곳에서 한달 넘게 부상을 입은 몸을 치료했다.그동안 한국행을 타진했다. 지인의 지인이 다롄(大連)까지 오면 한국행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기차와 버스 등 교통수단은 이용할 수 없었다. 그를 찾는 수배 전단이 사방에 뿌려졌기 때문이다.그는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지인이 조선족들이 보는 한글로 된 중국 지도를 서점에서 구해주었다. 익숙한 군용지도가 아니었다. 밖에 나가 북두칠성을 기준으로 그 지도 위에 걸어갈 노선을 그었다. 현지에 가서 도시와 마을을 확인할 수 있도록 각 지명 위에 중국어 발음을 적었다. 산맥을 지도에서 숙지했다. 여단 참모장 시절 늘 했던 지도 작업이었다.6월 5일 밤 배낭에 옷가지와 운동화 세 컬레, 중국돈 2000위안을 넣고 출발했다. 옌지에서 다롄까지는 직선거리로 850㎞ 정도 된다. 그러나 직선 코스 안엔 북한 땅이 들어 있어 선양(沈阳)을 1차 목표로 에돌아가면 1000㎞ 넘게 늘어난다. 거의 3000리를 행군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전 구간 내내 백두산 산맥을 타고 넘는 험준한 노선이었다.#행군그는 북한군 특수부대 시절로 돌아가 강행군을 시작했다. 낮에 11시~2시 사이 좀 자고 나머지 시간에는 산을 타고 이동했다. 군에 있을 때 특수부대 행군 속도는 급속 행군시 시속 12㎞, 보통 행군시 시속 10㎞ 였다. 일반인들은 달려야 하는 속도를 경보병부대는 무기와 장구를 휴대하고 이동하게끔 훈련하는 것이다.먹을 것을 구할 때는 새 옷을 갈아입고 마을에 나가 빵을 사서 배낭에 넣은 뒤 산에선 다시 낡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가끔 지나가는 화물 트럭에 몰래 매달려 타고 가기도 했는데, 도중에 차를 잘못 타서 엉뚱한 곳에 갔다. 먼 길을 돌아 나오느라 고생하는 바람에 함부로 탈수도 없었다.길을 걸으며 북에서 배웠던 혁명가요를 자기 식대로 개사하며 불렀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7월 12일 마침내 다롄에 도착했다. 무려 37일이나 걸렸다.다롄에 도착해서도 한국행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7월 15일 가짜 여권을 만들어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다 들키는 바람에 또 체포의 순간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번엔 단둥(丹东)에 옮겨와 한국으로 가는 여객선을 알아보았다.신의주가 바라보이는 단둥의 압록강 옆에서 마침내 한국행 브로커와 접선했다. 마침내 7월 20일 인천항에 내렸다. 가짜 여권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는데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항을 지나가는 나이든 경찰을 붙들고 “조선에서 왔다”고 하니 그가 깜짝 놀라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상봉그가 서울의 조사기관에서 조사받던 어느 날 창밖에서 그처럼 그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내다보니 운동장에서 딸이 자기 또래들과 떠들며 농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딸을 목청껏 불렀다. 딸도 창문을 올려다보고 굳어졌다.“북한 집에 있어야 할 아버지가 어떻게 서울의 조사기관에 있는거지?”정 씨는 분노했다. “내 딸이 이 건물에서 조사를 받는 걸 알면서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며 일주일 동안 조사를 거부했다. 그런 끝에 딸과 만날 수 있었다.딸은 어려서부터 한국 드라마와 음악에 빠졌다. 대학에서 친한 화교 친구가 중국에 넘어가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마침 먼저 한국에 간 고모와도 연락이 됐다. 부모에게 말하면 못 가게 할 것이 뻔하니 집에 있는 돈 1200달러를 가지고 도망쳤다. 50달러를 국경경비대 중대장에게 주고 무사히 두만강을 넘어 옌지로 갔다. 18세, 대학 2학년 때였다.그가 옌지의 지인의 집에 숨어 있을 때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이 그 집을 찾아왔다.딸은 “컴퓨터를 하는데 웬 남자 둘이 들어와 집안을 둘러보고 나갔다”고 했다. 그들은 정 씨에게 그 집엔 딸이 없다고 전했다. 정 씨가 딸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단발머리라고 알려주었는데 그새 딸은 중국에 도착해 가짜로 긴 머리를 붙였던 것이다. 딸을 찾지 못하자 결국 정 씨가 두만강을 넘었다.아버지가 두만강을 넘던 4월 15일 딸은 한국행 길에 올라 이미 미얀마까지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7월 13일 한국에 입국했다. 아버지보다 일주일 먼저 도착한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딸을 찾아 탈북했고, 37일을 행군해 다롄까지 왔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토대정 씨는 한국에 와서 독방에 갇혀 3개월을 조사받았다고 회상했다. 남들은 보통 1개월이면 끝나는 조사였다. 정 씨는 한국에 3개의 신분증을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최고사령부 작전지휘조 신임장, 예비역 군관 신분증, 영예군인증이었다.그의 북한 경력은 특이했다. 정 씨는 자신의 토대가 혁명가 집안이었다고 말했다.할아버지는 항일유격대 최현 부대에 원호물자를 운반하다가 악명 높은 이도선부대에 체포돼 처형됐다고 한다. 최현은 최룡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부친이다.정 씨의 부친은 6.25전쟁 시기 최현 부대 정찰소대장을 지냈다. 그 정찰소대가 나중에 경보병부대를 비롯한 북한 특수부대의 전신이라고 한다. 전후 정 씨의 부친은 북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잠바부대’ 선전부장(상좌)을 지냈다. 일명 ‘농산대’라고 불린 여단급 잠바부대는 남조선에서 유격투쟁을 하기 위해 만든 당시 북한의 최정예 특수부대였다. 나중에 이 부대는 ‘신천복수대’란 이름으로도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부친은 훈련장에 찾아와 무리한 도하훈련 지시를 내려 7명을 익사하게 만든 김창봉 민족보위상에게 반발하다 회창의 북한군 노동연대로 끌려가 수감됐다고 한다. 이곳은 군 교도소라고 할 수 있다.이곳에서 부친은 줄기차게 김일성에게 ‘신소편지’를 올려 김창봉 일당 숙청에 명분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석방된 부친은 군 생활에 미련을 두지 않고 제대돼 북한에서 유명한 식료공장 당비서로 옮겨가 은퇴 연령을 지나 수십 년을 일했다.#아동병기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정 씨는 1977년에 특수부대에 뽑혔다고 말했다. 중학교 5학년, 만 15세 때였다. 당시 북한은 남조선 혁명이란 명분으로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을 뽑아 인간병기로 키웠다. 뽑혀 갈 때도 집에 당일에 통보할 정도로 극비 부대였다.이곳에서 정 씨는 전술, 사격, 단도조법, 육박전, 수영, 한국 무기 다루는 법 등 특수훈련을 받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무기로 쓸 수 있게” 훈련받았다. 개천에 가선 기관차 모는 법을, 순천비행장에선 쌍발비행기를 모는 법을, 정주에선 자동차 모는 법을 배웠다. 어린 소년들에게 담력을 키워주기 위해 시체를 파는 훈련, 15일 굶기 등이 강요됐다.그러나 1980년 임무 수행 중 분계선 부근에서 대전차 지뢰가 터져 조원 3명이 즉사하고, 그는 발에 큰 부상을 입고 몇 달을 치료받았다. 부상으로 몸이 편치 않자 당국은 그해 10월 그를 강건군관학교에 보냈다. 1982년 학교를 졸업한 뒤엔 654군부대로 불리는 스키여단에 소대장으로 임명됐다.#최연소 여단 참모장그때부터 그는 승승장구했다. 2년 뒤 중대장, 다시 2년 뒤 대대 참모장 등을 거쳐 91년 여단 참모장까지 올라갔다. 30세 여단 참모장은 북한군에서도 이례적인 것이다.북한에서 특수부대는 한 급 높여 대우를 해준다. 가령 특수부대 대대장은 대좌인데, 이는 일반 보병부대 연대장 직급이다. 정 씨는 북한군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여단 참모장이 됐고, 1992년 김일성군사종합대학 김정일군사연구원반을 4년 다닌 뒤 1996년 졸업했다고 한다. 장령이 되려면 이 코스를 수련해야 한다. 1991년에 상좌가 됐고, 34세 때인 1996년에 대좌로 진급했다고 한다.그의 여단은 전쟁 시 태백산맥을 타고 내려와 전라도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고 한다. 훈련도 전라도 모형 축소판을 만들어 진행했다. 여단 참모장실 옆 기무과에는 콘크리트 50㎝ 두께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금고가 있는데 그 안에 전시 작전 명령을 담은 밀봉된 봉투가 있었다고 했다. 전쟁 시 여단 행동 방향을 지시한 봉투라고 들었지만 참모장 하는 기간 뜯어볼 수는 없었다고 한다.스키 여단 구성은 독특하다. 120명 중대가 4개 소대, 2개 타격대로 구성돼 있고 전쟁 시 1타격대는 중대장이 인솔, 2타격대는 정치지도원 또는 군사부중대장이 인솔한다. 2000년 초반 그의 여단은 자강도로 이동해 군수기지 방어 임무를 맡았다. 한국의 특전사가 침투할 경우 ‘반특공대’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사고승승장구하던 정 씨는 1997년 1월 뜻밖의 사고를 당했다. 스키여단은 동계, 하계 훈련을 한달 씩 한다. 여름훈련은 자전거를 메고 다니며 하고, 겨울은 스키를 타고 한다. 기동 속도를 높이기 위해 계절별로 스키부대와 자전거부대 역할을 하도록 훈련하는 것.훈련은 보통 1000리(400㎞)를 이동하며 하는데 산악 70%, 평지 30%를 도보로 행군한다. 여름엔 주로 함남 맹산에 있는 종합훈련장에서 하고, 겨울은 백두산에 옮겨가 한다. 그해 겨울 그의 여단도 백두산 깊은 눈 속에 들어가 이동했다. 어느 날 스키를 타고 뒤를 따르던 무전수가 넘어지면서 24㎏짜리 무전기가 그의 뒤통수를 쳤다. 정신 잃으며 쓰러지는 순간 뒤따르던 병사의 스키 날이 왼손을 타고 넘었다.정 씨에 따르면 스키부대 훈련은 워낙 격렬해 각 중대별로 1년에 1명 정도는 사고로 죽는다고 했다.정 씨가 사고를 당한 백두산 리명수 근처 산림은 헬기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병사들이 며칠 동안 깊은 눈길을 헤치며 걸어 나와 삼지연비행장까지 그를 이송했다. 그는 특권층만 갈 수 있는 평양의 봉화진료소에 옮겨가 치료를 받았다고 회상했다.그러나 눈길을 헤쳐 나오는 동안 손의 상처가 썩어 특발성 괴저가 시작됐다. 병원에서 끝내 엄지손가락만 남기고 왼손가락들을 모두 절단해야 했다. 하반신 마비도 풀리지 않아 1999년까지 병상에 누워 있었다. 손가락이 없어진 이상 군에 더 있을 수가 없었다.북한군 최연소 여단 참모장은 37세인 1999년 제대됐다. 1977년 아동병기로 발탁돼 떠났던 두만강 옆 고향 땅에 22년 만에 돌아왔다. 처음엔 해당 지역의 당 간부로 임명됐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이듬해 그는 수하에 100여명의 직원을 둔 작은 단위 책임자로 옮겨갔다.#정착그와 딸이 한국에 온 뒤 북에 남은 부인은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군에 입대해 좋은 부대에 있던 아들은 오지로 쫓겨났다. 정 씨와 딸은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노력했다. 2009년 부인을 한국에 데려왔고, 끝내 오기를 거부하던 아들도 마침내 2010년 한국에 왔다. 정 씨는 “처음 전화통화를 할 때 아들이 군에서 어떻게나 세뇌됐는지 자기 앞길을 막은 고모와 여동생을 총으로 쏴죽이겠다고 펄펄 뛰었다”고 말했다. 아들을 포기하고 돈을 보내지 않았다. 돈이 가지 않자 6개월 만에 아들이 중국에 들어와 “나도 데려가 달라”고 전화를 해왔다. 그 아들은 연세대와 해외 유학을 거쳐 현재 유명 외국계 기업에서 인정받는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정 씨는 지금 한국 공기업 직원으로 살고 있다. 지금까지 언론을 멀리하고 살았지만 이젠 은퇴할 때가 되니 굳이 숨기고 살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가 여전히 숨기고 있는 비밀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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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50년 영양설계 노하우 담긴 ‘셀렉스 선물세트’ 출시

    매일유업(대표 김선희)이 추석 명절을 맞아 제휴 온라인 쇼핑몰에서 온 가족의 건강을 위한 고단백 ‘셀렉스 선물세트’를 준비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면역력의 중요성이 커진 사회 분위기 속에 매일유업의 생애주기별 영양설계 전문 브랜드인 ‘매일 헬스 뉴트리션’은 50년간 축적한 과학적 영양설계 노하우를 바탕으로 만든 프리미엄 고단백 셀렉스 선물세트를 출시했다. 단백질은 근육 합성과 손실 예방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이러스, 세균 등 외부 병원체의 침입에 맞서 싸우는 항체의 중요한 성분이 되기 때문에 최근 더욱 주목받는 필수 영양소다. 매일유업은 코로나19로 만나기 힘든 친척들에게 매일유업 네이버 브랜드스토어, 카카오톡 선물하기, 쿠팡 로켓배송 등 온라인몰을 이용해 추석 선물을 집 앞까지 배송할 수 있다고 밝혔다. ‘셀렉스’는 중요한 영양소 중 하나인 단백질을 일상에서 식사만으로는 채우기 힘들기 때문에 맛있고 간편하게 섭취할 수 있게 만들었다. 대표 제품인 ‘셀렉스 코어 프로틴 플러스’는 국내 최초로 한국인 대상으로 진행한 인체적용시험을 기반으로 만든 단백질 건강기능식품으로 시장 1위에 올랐다. 부모님의 근육 건강 선물세트로 추천하면 좋은 ‘코어 프로틴 플러스’ 세트는 분말 1캔과 스틱 14입을 넣은 지관 1통, 전용 텀블러로 구성됐다. ‘셀렉스 스포츠’ 선물세트는 운동과 함께 깔끔하게 마시는 단백질 보충제다. 100% 분리유청 단백질을 사용해 유당과 지방이 없고 순도가 90% 이상으로 높아 체내 흡수 속도가 빠르다. 1회 섭취량 기준 달걀 3개 분량이 넘는 20g의 분리유청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도록 설계해 운동 직후 근육 회복과 합성에 가장 이상적인 양을 제공한다. 초콜릿맛 10포와 복숭아맛 10포, 전용 텀블러로 구성했다. ‘매일 마시는 프로틴’은 간편하게 뜯어서 바로 마실 수 있는 제품으로 125mL 용량에 단백질 8g이 함유돼 있다. 동일 용량 우유의 2배에 해당하는 단백질 양으로, 평소 소화 때문에 우유 섭취가 어려웠던 중장년층이 부족한 단백질을 채우기에 적합하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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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일이 죽었다는데…” 그때 운명이 바뀌었다[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그날따라 추위는 매서웠다. 새벽 4시 중국 지린(吉林)성 장춘(長春)을 떠난 호송차는 도로가 얼어 속도를 내지 못했다. 오전 11시 반이 넘어서야 목적지인 투먼(圖們)의 북중 국경다리에 도착했다. 오전 9시~10시 경 북한 세관에 나가 보위부에 죄수를 넘겨주려던 당초 계획이 틀어졌다. 다리를 지키는 변방대 장교가 말했다. “지금 조선쪽 세관에 사람이 보이지도 안고 전화를 해도 받는 사람도 없으니 점심 먹고 다시 오시오.” 손발에 족쇄를 찬 죄수 한 명과 다섯 명의 호송원을 태운 차량은 식당을 찾아 투먼 시내로 움직였다. 식당을 찾아 헤매는데 갑자기 변방대에서 전화가 왔다. “당장 차를 돌려 오시오.” “아, 조선쪽에 사람이 나왔나 보군. 죄수를 넘겨주고 우리끼리 편하게 점심 먹으면 되겠다.” 호송원들은 이런 대화를 나누며 북중 국경 다리 옆으로 다시 왔다. 변방대 막사에 도착하니 비상이 걸려 있었다. 군인들이 총과 쌍안경을 들고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뭔 일이래?” 호송원 한 명이 휴대전화로 검색하더니 깜짝 놀랐다. 그리곤 죄수에게 이를 보여줬다. “김정일이 죽었다는데….” 2011년 12월 19일 12시. 북한에서 김정일 사망을 공식발표한 순간이었다. 중국 감옥에서 10년을 복역하고, 이날 형기가 만료돼 고문과 처형이 기다리는 북송길에 올랐던 김권능(본명 김경일) 씨의 운명이 바뀐 순간이었다. 김 씨는 오후 내내 변방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김정일 사망이라는 변고를 맞은 북한 쪽에선 전화를 받지 않았다. 김 씨는 삭막한 풍경이 펼쳐진 두만강 건너편 북한을 건너다보며 생각했다. ‘내가 당신(김정일)이 죽는 것을 보고 가는구나. 나보다 앞세웠으니 이제 북한에 끌려가 죽더라도 원이 없다.’ 저녁까지 북에서 전화를 받지 않자 호송원들은 옌지(延吉)로 돌아와 하루 밤을 보냈다. 그러나 다음날도 북한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20일 저녁이 다가오자 호송원들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김 씨가 10년 전 중국 재판소에서 받은 형기는 이날 저녁 9시면 만료된다. 그 이후엔 더이상 김 씨를 잡아둘 명분이 없다. 호송원들은 그를 옌볜(延邊) 출입국관리소로 데려가 넘겼다. “탈북자인데, 이제부터 여기서 알아서 하시오.” 호송원들은 이 말을 남긴 채 장춘으로 돌아갔다. 김 씨는 8년 전까지 이곳 감옥에서 2년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8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3개월의 수감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영화 ‘크로싱’이 나오기까지 김 씨는 1976년 황해남도 신원 군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광물 탐사대원인 아버지를 따라 함경남도 검덕으로 이주했다. 검덕은 연, 아연, 마그네사이트 등이 풍부한 북한의 대표적인 광업도시다. 여기서 중학교와 3년제 검덕광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검덕에 처음 갔던 1980년대 중반만 해도 검덕의 산은 푸르렀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며 광산 마을인 검덕은 사람이 가장 살기 어려운 지역으로 바뀌었다. 산도 검은색으로 변해갔다. 2020년 9월 7일 검덕을 통과한 태풍 ‘마이삭’은 수천 세대의 집을 파괴했다. 검덕에서 살던 김 씨는 “어떻게 재난이 발생했을지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다”고 회상했다. 검덕은 골짜기가 깊지 않고 강 옆에 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나무 없는 산에서 산사태가 나면 강이 막히고 순식간에 마을이 잠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산사태로 막혔던 곳이 압력을 견디지 못해 다시 터지면 아래 마을까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된다. 검덕은 강 옆에 분광 시설들이 있다. 사품 치는 강물은 분광된 돌가루를 잔뜩 머금은 ‘묵직한’ 물이라 아무리 든든한 제방도, 건물도 견디기 어렵다. 김 씨는 사람들이 굶주려 쓰러지는 고난의 행군 시기인 1997년, 살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21세 때였다. 1년 동안 중국의 농촌에 숨어살며 농사를 짓고, 벌목도 했다. 그러다 1998년 한국에서 온 최광 선교사를 만났다. 최 선교사는 “먹고 사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성경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했다. 그는 선교사를 따라 나섰다. 최 선교사의 목표는 탈북 청년들을 모집해 기독교를 공부시킨 뒤 북한으로 파송해 선교한다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2년을 여기 저기 옮겨 다녔다. 안전한 곳을 찾아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까지 옮겨갔다. 2000년 11월 새로운 탈북 청년들을 모집해 팀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옌지로 나왔다. 이때 천기원 선교사를 만났다. 천 선교사는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내는 루트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당시엔 탈북민들이 한국으로 오는 마땅한 길이 없었다. 그는 천 선교사와 함께 2000년 12월부터 중국과 몽골 국경을 다니며 여러 개의 탈북 루트를 만들었다. 중국 남부로 내려가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거쳐 태국으로 가는 루트도 찾아냈다. 오늘날 한국에 온 3만 명 넘는 탈북민 대다수가 거쳐 온 그 루트를 초기에 개척한 이 중 한 명이 김 씨였다. 그는 자신이 개척한 통로로 탈북민들을 탈출시켰다. 그러다 2001년 7월 몽골 국경에서 체포됐다. 탈북민 5명으로 구성된 다섯 번째 팀을 이끌고 가던 길이었다. 국경에 하루 먼저 나가 정찰하려 했는데 그만 공안에 혼자 잡힌 것이다. 인도자가 체포되자 함께 오던 탈북민들은 당황했다. 경험이 없는 탈북민이 새 리더가 돼 중국과 몽골 국경을 넘었다. 이 과정에 일행에 포함됐던 9세 소년 철민이가 사막에서 탈진해 쓰러져 숨졌다. 영화 ‘크로싱’의 모티브가 된 바로 그 사건이었다. 김 씨는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경험이 없어 사막으로 너무 깊이 들어갔어요. 제가 잡히지 않았다면 철민이가 살았을 텐데 너무 안타깝죠. 한편으로 그 일행이 사막에 깊이 들어가는 바람에 체포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철민이를 제외한 일행이 한국으로 오는 동안 김 씨는 북송돼 신의주로 끌려갔다.# 누구도 고발하지 않았다. 신의주 보위부 감옥에 들어가니 단둥(丹東)에서 배로 한국행을 시도하다 체포된 탈북민 25명이 먼저 끌려와 있었다. 그들 대다수가 김 씨를 알고 있었다. 25명조의 리더는 그와 함께 성경공부를 한 함북 무산 출신의 주복이라는 탈북민이었다. 그 외에도 김 씨와 함께 성경공부를 한 사람, 그가 탈북민을 구출하는 일을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중 누가 김 씨의 중국 행적을 고발했다면 그도 살아날 수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를 모르는 척 외면했고, 그 덕분에 김 씨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25명 중 혹독한 취조를 견디지 못해 1명이 감옥에서 죽었고, 리더는 사형 판결을 받았다. 한국으로 도망치려 했다는 죄로 19명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다고 끝까지 버틴 여성 4명만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김 씨는 열악한 신의주 감옥에서 기도했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시면 평생을 저를 위해 살지 않고 탈북민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그때 김정일의 지시가 내려왔다. 단순 도강을 한 사람은 관대하게 용서하라는 내용이었다. 김 씨는 3개월 뒤 석방돼 중국으로 다시 탈북할 수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천 선교사를 만났다. 그러나 2개월 뒤인 2001년 12월부터 시련이 시작됐다. 천 선교사가 중국 공안에 체포되된 것이다. 김 씨와 함께 천 선교사를 보조해 탈북민을 구출하던 탈북민 출신인 ‘이선생’도 체포됐다. 이들이 한국으로 보내려던 탈북민들은 졸지에 길을 잃었다. 감옥 생활로 몸도 성치 않았던 김 씨는 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양심에 부끄럽지 말자. 내가 죽더라도 이들부터 구하자.’ 김 씨는 한국으로 오는 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루트들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체포돼 북송되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자신부터 먼저 한국에 가서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남았다. 다른 탈북민 먼저 구출한 뒤 자신은 맨 나중에 오겠다고 마음먹었다. 천 선교사와 이선생을 대신해 그는 탈북민들을 데리고 몽골과 베트남으로 향했다. 다섯 팀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불운이 닥쳤다. 2002년은 중국 주재 외국공관에 탈북민 집단 진입 바람이 불던 때였다. 그해 3월 베이징(北京) 주재 스페인대사관에 탈북민 25명이 집단 진입하는데 성공한 뒤 여러 외국 공관들로 탈북민들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중국 당국은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 돌입했다. 중국에 숨어있던 수 만 명의 탈북민이 이때 체포돼 북송됐다. 2002년 7월 탈북민 5명을 데리고 베트남으로 가기 위해 떠난 그는 허난성(河南省) 정저우(鄭州)에서 체포됐다. 북중 국경 변방대가 이곳까지 그들을 미행해 왔다. 김 씨는 탈북민들이 북한으로 끌려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구금되는 투먼(圖們)변방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런데 그때 이곳 수용소의 한 방에 수감됐던 탈북민들이 모두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급히 수용소 재공사가 진행되면서 김 씨는 옌지의 구치소로 이송됐다.# “너는 영웅이다.” 구치소에서 한 검사가 이렇게 말했다. “네 서류를 보니 조선에 끌려가면 무조건 죽는다. 그런데 너는 자기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 네가 먼저 한국에 갈 수 있었음에도 끝까지 남았다. 너는 민족의 영웅이고 나는 너를 존경한다.” 변호사들도 그를 도왔다. 그를 중국 감옥에 보내 북송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2003년 사스 광풍이 불며 재판이 지연됐다. 그해 12월 마침내 판결이 내려졌다. 중국 법에는 ‘타인을 조직하여 비법월경한 죄’ 항목에는 ‘조직한 자는 7년 이상을 선고한다’고 규정돼 있다. 그는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예상보다 많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12년은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2004년 4월 그는 장춘 테베이(鐵北)감옥으로 이송됐다. 옌지 감옥에선 좁은 감방에 22명이 머물렀다. 밤에 일어나 화장실을 가려면 사람을 밟고 가야할 정도로 빽빽하게 수감돼 있었다. 대부분 사형수 등 중범죄자들이었다. 명절 직전이면 5~6명이 불려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조용히 처형된 것이다. 그런 옌지를 벗어나 장춘으로 갔지만 사정은 나아진 게 없었다. 테베이 감옥은 무기수나 10년 이상 장기수들이 수감되는 곳. 한 방에 40명 이상 수감돼 있었다. 선풍기도 없어 여름엔 숨이 막혔고, 겨울엔 작은 창문마저 닫아 더 숨이 막혔다. 김 씨는 “그래도 중국 감옥은 신의주 감옥보다 훨씬 나았다”고 말했다. 이 감옥에서 그는 2011년 12월 19일까지 수감생활을 했다. 2004년 9월 이선생이 북송된 것은 충격이었다. 그는 김 씨보다 8개월 먼저 잡혀와 옌지감옥과 테베이감옥에서 함께 생활했다. 한족들에게 둘러싸인 감옥생활에서 둘은 서로에게 의지했다. 그런 이선생이 2005년 7월까지인 형기도 채우지 못하고 북송된 것이다. 이선생의 본명은 이수길. 1960년생으로 추정된다. 그는 북송된 뒤 기독교 조직의 리더를 지냈고 탈북민의 한국행을 주도했다는 죄로 2005년 처형된 것이 확인됐다. 그가 형기도 채우지 못하고 북송된 것은 체포된 뒤 중국에 있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에 난민 신청을 했기 때문이다. 2008년 올림픽을 앞둔 중국은 인권 문제가 불거질 우려를 차단하기 위해 난민 신청을 한 이선생을 황급히 북으로 송환했다. # 감옥의 북한 마약 전사들 김 씨가 이송됐던 2004년 테베이감옥에는 탈북민을 포함해 북한 국적자만 200여명이 있었다. 중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탈북민도 포함돼 있지만, 북한산 마약을 해외에 팔다가 체포돼 10년 이상 형기를 받고 끌려온 북한 간부들도 여럿 있었다. 중앙당 소속 간부 1명과 북한군 소좌 2명, 보위부 상좌 1명이 대표적이다. 북한 영사관이 정기적으로 이들을 찾아와 3개월에 한 번씩 1000위안씩 영치금을 넣어주었다. 김 씨는 보위부 상좌와 한 방에 있었다. 상좌는 자주 화려했던 과거를 이렇게 회상했다고 한다. “나는 차를 끌고 중국을 합법적으로 왔다 갔다 했어. 마약 팔아 당 자금을 마련했지. 2월 16일 김정일 생일 같은 날엔 달러를 가방에 가득 채워 평양에 올라가 ‘충성자금’으로 넘겼어. 그때는 돈을 흥청망청 쓰며 잘 살았는데, 운 나쁘게 작전 중에 잡혀 이 꼴이 된 거야.” 상좌는 북한에서 ‘숨은 영웅’으로 인정받았다. 중앙당 간부와 북한군 소좌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약을 팔아 충성자금을 마련하는 임무 수행 중에 잡힌 사람들이다. 체포된 뒤에도 이들은 절대 북한 당국에서 시킨 일이 아니며 자신들은 노동자라고 신분을 숨긴다. 그러나 중국이 이를 모르진 않는다. 원래 이들처럼 큰 마약 거래를 하다 잡히면 중국에선 사형이지만, 중국 당국은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해 사형은 시키지 않고 종신형을 선고해 감옥에 수감시켰다. 북한도 이들을 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북에 남은 가족은 배급도 꼬박꼬박 받고 당국에서 자녀들도 잘 돌봐준다. 상좌는 김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나라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 그런데 보위부 사람일수록 정부를 훨씬 더 무서워해. 너희 같은 탈북민도 죽이고 싶어 죽이는 게 아니야. 지시가 떨어지니 어쩔 수 없고, 또 나라가 망하면 우리가 너희 같은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죽으니 어쩔 수 없지.” 김 씨가 형기를 마치기 2년 전 상좌는 폐암으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북한군 소좌 한 명도 병으로 감옥에서 죽었다.# 운명의 날김 씨는 감옥생활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감옥에 들어온 사람들은 언제 형기가 끝날지 손꼽아 셉니다. 그런데 저는 그 반대였죠. 형기가 줄어드는 게 두려웠습니다. 북송돼 죽을 날이 다가온다는 의미였으니까요. 북한 인민을 위해 죽겠다고 맹세했지만, 형기가 끝날 때가 다가오니 삶에 대한 애착이 점점 커지더군요.” 가끔 만나는 공안 간부들은 이런 말도 했다. “조선 보위부에서 네가 넘어오길 간절히 기다린다. 보위부에서 빨리 보내달라고 요청서류가 왔는데, 우린 형기를 채워 보낼 거야.” 그는 사형 날짜를 기다리는 사형수의 심정으로 감옥 생활을 했다.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감옥에선 모범수라며 여러 번 감형 처분을 내렸다. 12년이 10년으로 줄어 형기는 2011년 12월 20일에 끝나게 됐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2011년 12월 19일 오전 4시 감옥 문이 열렸다. 손과 발에 족쇄를 차고 호송차에 타는 순간 그는 죽음을 맞이하려 간다는 걸 알았다. 10년 동안 감옥에서 상상해오던 순간이 막상 닥쳐오니 마음은 평온했다. 장춘 감옥에 수감된 탈북민이 형기가 끝나면 중국 당국은 저녁에 기차를 태워 투먼으로 보낸다. 그러면 아침에 도착해 북한 세관이 문을 열자마자 바로 인계한다. 그런데 그에겐 호송차와 호송원 다섯 명이 동원됐다. 사고 없이 북송시켜야 할 특별한 죄수라는 의미다. 그런데 김정일 사망이 발표됐던 12월 19일은 유난히 추웠다. 그 추위가 그의 목숨을 살렸다. 도로가 얼지 않아 오전 10시 이전에 투먼에 도착했다면 그는 북송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정일이 그의 생명을 건진 셈이다.# 석방 2011년 12월 20일 그는 8년 만에 옌지 구치소에 다시 들어갔다. 감옥 간수들은 “북조선 새끼가 잡혀왔네”라며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며칠 뒤에 들어온 관리는 태도가 달랐다. “너의 기록을 쭉 봤다. 너는 조선에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가족도 모두 한국에 있다니 한국 정부에 가족관계증명서를 만들어 보내달라고 요구해 봐. 그럼 우리가 도와줄 여지가 있다.” 김 씨가 수감 생활할 때 아버지와 남동생은 탈북해 한국으로 먼저 왔다. 동생이 통일부에 찾아가 서류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공신력 있는 서류를 만들어오지 못하자 중국 관료가 다시 제안했다. “그럼 가족의 머리카락을 보내. 우리가 유전자 검사를 해서 가족관계를 증명해줄게.” 결국 통일부가 해주지 않은 서류를 중국 간부가 탈북민에게 유전자 검사까지 받아 만들어주었다. 2012년 3월 16일, 간수가 김 씨를 불렀다. “어디로 가냐”고 묻자 “조선에 가지 어딜 가겠나”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모든 노력이 무위에 돌아간 거라 생각해 아찔했다. 그러나 김 씨가 끌려간 곳은 법정이었다. 법관이 그에게 “어딜 움직이는 경우 꼭 공안에 보고한다”는 조건을 달아 석방 판결을 내렸다. 그의 신분은 무국적자였다. 믿어지지 않았다. 상상하지 못했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10년 만에 거리에 나왔다. 숨을 쉬며 걷는다는 게 꿈만 같았다. 한 달 뒤인 4월 17일 아시아나항공 편으로 옌지공항에서 인천으로 날아왔다. 옌지공항 보안책임자는 10년 전 정저우까지 쫓아왔던 변방대 체포조 책임자였다. 김 씨가 드디어 풀려나 한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등고 공항에서 김 씨를 배웅하겠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막상 당일엔 급한 일이 생겨 나오지 못했지만 대신 부하들을 보냈다. 부하들이 김 씨를 보고 “그동안 고생 많았어. 이제부터 잘 살기를 바란다”며 격려했다. 김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공항에서 엄청 긴장했죠. 비행기가 떠서도 중국 상공에 있을 때는 불안했어요. 언제든 회항해 중국 땅에 내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창밖으로 서해 바다가 보일 때 비로써 저는 ‘이젠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습니다.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었어요.” 한국의 조사기관에서 그는 “어떻게 살아왔느냐, 보위부에 체포됐을 때 매수된 거 아니냐”는 질문을 집요하게 받으며 남들보다 훨씬 오래 조사를 받았다. 2012년 9월 6일 그는 드디어 하나원 문을 나섰다. 진정한 자유를 찾은 것이다.# 삶의 의미 김 씨는 지금 인천의 한 탈북민 집단 거주지역에 ‘인천한나라은혜교회’라는 개척교회를 만들고 목사로 재직 중이다. 40여명의 교민들도 대다수 탈북민이다. 김 씨는 총신대학교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 모 대학 신학 박사 과정을 다니고 있다. 같은 탈북민을 만나 결혼했고 아들 셋을 두었다. 막내는 지금 8개월이다. 26세에 체포돼 36세까지 중국의 혹독한 감옥 생활을 이겨내고 찾은 행복이다. “체포돼 1년이 지난 어느 겨울에 재판 받으려 호송버스를 타고 연길 거리에 나섰어요. 처음 감옥 밖으로 나온 거죠. 문뜩 어느 정류장에서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손을 불며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 장면이 왜 그렇게 평안하고 행복해 보이던지…. 감옥에서 10년 내내 계속 그 장면을 떠올렸어요. 밖에 살 땐 추위가 싫었어요. 하지만 그때 평범한 순간이 누구에겐 얼마나 소중할 수 있는 지를 깨달았어요. 행복은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주위에서 발견하는 겁니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 2020-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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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명 여배우의 몰락 부른 ‘문수원 사건’[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평양에서 몇 달 전 이른바 ‘문수원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6명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고, 지난달 20일 관련자 가족을 평안남도 양덕과 맹산에 추방했다. 이들 중에는 유명 여배우까지 포함돼 있어 더욱 화제가 됐다. 문수원은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목욕탕, 사우나, 미용실 등이 구비된 유명 종합편의시설이다. 평양의 대표적 대중목욕탕인 창광원과 비슷한 시기인 1982년에 건설됐다. 보통강 구역에 창광원이 있고, 대동강 건너편 주민을 위해 동대원 구역에 문수원을 건설했다. 평양산원 정문에서 약 200m 거리이고, 현재 평양종합병원을 짓는 곳에선 도보로 약 15분 거리다. 북한의 대형 대중목욕탕들에는 보통 사우나 시설이 설치된 ‘비밀의 방’들이 존재한다. 이곳에서는 권력자와 부자들이 단골로 찾아와 마약과 성매매를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창광원 다음으로 크다는 문수원도 다를 바 없었다. 문수원은 2008년 새 단장을 하면서 VIP 전용 비밀공간을 고급스럽게 꾸몄다. 시내 중심부에서 좀 떨어져 있으니 단속에서도 비교적 안전했다. 서비스가 좋다는 소문이 난 덕분에 단골들도 많았다. 최근까지 별 탈 없이 영업했지만 올해 엉뚱한 곳에서 사건이 터지면서 날벼락을 맞았다. 엉뚱한 사건은 평북 철산에서 벌어졌다. 이곳에 있는 한 외화벌이 조개양식기지의 젊은 책임자가 연쇄 살인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말이 기지이지 사실상 개인 회사처럼 운영됐는데, 책임자는 일찍이 아버지에게서 기지를 물려받아 흥청거리며 살았다고 한다. 북한판 재벌 2세에 비유할 수 있다. 북한에서 돈 좀 있는 사람이라면 마약을 대부분 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책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기지 안 여성들은 물론 외부 여성들까지 데려와 마약과 성매매를 했다. 이 정도 일은 북한에서 비일비재한 것이라 뇌물을 정기적으로 상납하면 걸릴 일도 거의 없었던 게 사실이다. 문제는 그가 뱃놀이를 한다면서 자주 여성들과 배를 타고 나가 놀았는데, 말을 듣지 않는 여성은 죽여서 바다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북한에선 그가 이런 식으로 죽인 여성이 30명이 넘는다는 소문이 났다. 폐쇄회로(CC)TV가 없고, 젊은 여성이 사라지면 탈북했다고 믿는 북한 실정에서 능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흔적을 없애느라 수장한 여성의 시신이 떠올라 발견됐다. 그 바람에 책임자의 경악할 만한 범죄가 드러나게 됐다. 취조 과정에서 그가 평양에도 수시로 가서 문수원에서 즐겼다는 진술이 나왔다. 워낙 엽기적인 사건이라 김정은에게 보고가 들어갔다. 김정은이 철저히 조사하라고 한 이상 아무리 높은 권력자들이 문수원의 뒤를 봐준다 해도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조사 결과 문수원을 즐겨 찾은 간부들 명단까지 줄줄이 나왔다. 문수원에서 직원으로 채용한 젊은 여성 접대원은 물론 인근 대학 여대생들까지 성매매에 가담한 사실마저 드러났다. 문수원 인근에는 평양음악무용대학과 평양연극영화대학이 있는데, 이곳엔 전국에서 뽑아온 미모의 여대생들이 많다. 지방에서 올라온 여학생들 중 일부는 돈이 없어 성매매를 하거나 부유층의 숨겨진 애인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김정은의 지시로 책임자와 성매매업자 등 주범 6명이 처형됐다고 한다. 이 중에는 문수원에서 마담 역할을 했던 여성도 있는데, 그는 유명 여배우인 리설희 남편의 숨겨진 애인이었다. 리설희는 북한이 자랑하는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손으로 가슴을 가리긴 했지만 북한 영화에서 보기 드문 목욕신과 베드신까지 찍어 화제가 됐던 배우다. 문수원 사건으로 리설희도 남편과 함께 추방됐다. 추방된 사람들은 높고 가파른 산에 앞뒤로 막혀 해가 오후 4시에 진다고 알려진 양덕과 맹산의 오지에 끌려가 농사를 짓게 했다. 떵떵거리며 살던 수많은 권력자와 부유층이 하루아침에 몰락한 것이다. 알고 보면 이번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김정은이다. 대북제재와 국경 폐쇄로 외화가 급격히 고갈되는 와중에 때맞춰 돈 많은 자들이 ‘알아서’ 걸려들었으니 민심도 얻고 추방된 부유층의 재산도 몰수했기 때문이다. 북한에선 어떤 명목의 범죄와의 전쟁, 부패와의 전쟁이 진행되든 결국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 땔’ 사람은 김정은이다. 그러나 길게 보면 지나친 식탐과 폭식은 결국 자기 몸에 해가 돼서 돌아오는 법이다. 김정은도 예외는 아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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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육맨’ 김종국에 반해 탈북한 보위부 상위[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집에서 북한 간부들과 주민들을 향해 ‘통일에 동참해 달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를 TV로 봤습니다. 그걸 보고 용기를 얻어 탈북을 결심했죠. 그런데 막상 목숨 걸고 와 보니 박 대통령이 탄핵돼 황당하더군요. 대통령도 쫓아내는 나라라니, 무서운 생각도 들었고, 오라는 사람이 없어지니 잘못 왔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죠.” 북한에서 보위부 상위(한국의 중위와 대위 사이 계급)로 있다가 2016년 9월 바다를 헤엄쳐 20시간 가까운 사투 끝에 남쪽에 온 이철은 씨(33)의 얘기다.# 결심2016년 8월 15일 황해남도 청단군 보위부 2과(정보과) 상위였던 이 씨는 쉬는 날 집에서 한국TV를 보다가 박 대통령의 축사를 접하고 갑자기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그는 지도를 펴놓고 탈북 루트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소지한 보위부 ‘특별 긴급 수사원증’으로 북중 국경인 양강도 혜산까지 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남들이 다 하는 방식으로 압록강을 건너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씨가 근무한 청단군은 강화도에서 건너 보이는 황해도 연안군과 붙어 있는 지역이다. 그는 당시 ‘불순녹화물’ 단속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109상무’라는 조직에 소속돼 한국 영상 시청자들을 적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이 씨는 이미 1990년대부터 한국TV를 열심히 봤다. 그는 황해도 연안군에서 부친과 삼촌 세 명이 모두 보위부 간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위부 간부 집에는 단속이 오지 않았다. 밤에 한국TV를 시청하다 밖으로 나오면 한강 하구 건너에서 한국 불빛이 유혹하듯 반짝거렸다. 한국의 생활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한국 영상을 시청하는 사람을 잡아내는 일이 괴로웠다. 이 씨는 그럼에도 출근해선 아무 일도 없던 듯 한국 영상 단속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물급에 대한 신고가 들어왔다. 청단군 군당위원장의 딸이 한국 드라마를 보다 걸린 것이다. 군당위원장은 청단에서 제일 높은 간부다. 군 보위부에는 당위원장의 비리를 감싸줄 측근들이 많았다. 이 씨는 군당위원장 딸의 적발 사실을 상급 기관에 직보했다. 그러자 군 보위부 정치부장이 그를 불렀다. “야, 임마, 너 죽고 싶어. 절차 없이 그런 보고를 왜 단독으로 하는 거야.” “부장 동지가 묻을 게 아닙니까. 힘없는 백성의 자식은 한국 드라마 봤다고 감옥에 가고, 당 간부 자식은 한국 드라마 마음대로 봐도 되는 겁니까.” “너, 이 자식. 책대로 하겠단 말이지. 두고 보자.” 부하가 대들자 정치부장은 펄펄 뛰었다. 북한 공화국 창건일인 9월 9일 청단군 보위부 건물에선 이렇게 둘의 말싸움이 몇 시간 동안 이어졌다. 즉시 그는 109상무에서 제외됐다. 정치부장에게 찍힌 이상 앞으로도 시련이 계속될 상황이었다. ‘이제 더는 못 참겠다. 한국으로 갈 거야.’ 이 씨는 학교 동창 민철(가명)을 찾아갔다.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민철은 그즈음 장사를 하다 망해 빚에 쪼들리고 있었다. “민철아. 나 한국에 가려 한다.” “나도 같이 가자.” 둘은 의기투합하기로 했다. 그런데 보위부 증명서가 있는 이 씨와는 달리 민철까지 데리고 국경으로 가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고심한 끝에 한강을 헤엄쳐 가기로 결정했다. 며칠 동안 준비를 하고, 탈북 루트로 정한 연안군 해안 정찰까지 마친 뒤 마침내 둘은 배낭을 메고 탈북 길에 올랐다.# 사투9월 18일 저녁 두 남자가 연안의 해안가에 나타났다. 이 씨는 이곳에서 나서 자라 물때와 지형에 매우 밝았다. 게다가 철은의 부친은 함박도 맞은편인 연안군 화양리에서 해안 담당 보위원을 오랫동안 지냈다. 이곳에는 연안 해안에 들어왔다가 강화도 쪽으로 흘러가는 물길이 있었다. 150~200m 간격으로 있는 북한군 잠복초소엔 8시부터 군인들이 잠복을 나온다. 둘은 8시 직전 잠복초소를 통과해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약 200m쯤 헤엄쳤을까. 뒷쪽에서 잠복을 나오는 군인들이 비춰대는 손전등 불빛이 비쳤다. 헤엄치는 속도보다 물이 빠져 나가는 속도는 더 빨랐다. 30분 정도 지나니 둘은 물이 빠진 갯벌에 엎드린 상태가 됐다. 조용히 기어가기 시작했다. 갯벌을 보복으로 전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이동하다 날이 밝아 발각되면 총에 맞을 판이었다. 그날은 보름달이 훤히 밝았다. 점점 지쳐가고 있을 때 구름이 달을 가렸다. 하늘이 도운 것이다.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갯벌을 달리니 그제야 바닷물이 다시 보였다. 이 물은 더 이상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둘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배낭에서 미리 준비했던 자동차 튜브와 펌프를 꺼냈다. 그런데 갯벌에서 펌프질이 잘 되질 않았다. 겨우 바람을 좀 넣었지만 배낭을 얹으니 사람이 매달릴 정도까지 되지 못했다. 그 상태에서 둘은 바다에 뛰어들었다. 맞은편 해병대 건물 불빛이 목표였다. 수영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점점 지쳐갔다. 몇 시간 뒤엔 튜브에 매달리기 위해 식량이 든 배낭도, 신발도 버려야만 했다. 8시간 넘게 사투를 벌인 끝에 새벽 4시가 가까워왔을 때 민철이 말했다. “나 이젠 더 힘이 없어. 날 버려두고 너 혼자 가.” 이 씨는 친구를 포기할 수 없었다. 민철을 끌고 계속 헤엄쳤다. 그러나 불빛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 앞쪽에서 전조등을 비추는 배 한척이 나타났다. 한국 경비정인지 북한 단속정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북한 쪽에 걸리면 끝장나는 상황이었다. 전조등이 나타나자 민철의 눈빛이 달라졌다. 방금까지 모든 걸 포기한 듯 했던 그가 약 100m 거리에 보이는 무인도로 헤엄쳐가기 시작했다. 작은 이 무인도는 원래 목적지가 아니었지만 배를 피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무인도에 겨우 도착하니 새벽 4시가 지났다. 둘은 전조등을 피해 무인도에서 숨을 곳을 찾아 정신없이 헤맸다. 맨발과 맨손으로 따개비 껍질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바위 위로 뛰어다니다보니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다. 마침내 둘은 무인도 기슭에 쌓인 쓰레기 더미에 몸을 숨겼다. 몸에선 피비린내가 났다.# 구조몸을 숨기고 나니 지독한 추위가 몰려왔다. 둘은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를 꼭 안았다. 그러다 잠시 잠이 들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날이 밝았다. 이 씨는 조심스럽게 무인도 꼭대기로 이동했다. 이곳이 북한 땅인지 한국 땅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인도 꼭대기엔 불을 피운 흔적과 사람 발자국 흔적이 남아있었다. 500~600m 앞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해병대 막사가 보였다. 뒤를 보니 2km쯤 거리에 북한군 초소가 보였다. 멀리 200~300t급 회색 경비정이 눈에 들어왔다. 태극기가 붙어있길 간절히 바랬지만,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북한 보위부도 중국에서 경비정을 수입해 운영하는데, 똑같은 회색이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중 갑자기 경비정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씨는 무인도 남쪽 기슭을 헤매며 쓸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지게차로 물건을 나를 때 쓰는 깔판인 나무 파레트가 보였다. 거기에 페트병, 스티로폼 등 뜰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찾아 밧줄로 묶었다. 힘이 빠진 민철을 위해 뗏목을 만든 것이다. 민철이 어디서 포장이 뜯기지 않은 한국산 햇반을 주어왔다. 허기진 둘은 그걸 함께 손으로 퍼먹었다. 남쪽의 밥은 꿀맛이었다. 뗏목을 완성한 건 오후 2시. 이제는 한국 쪽으로 밀려가는 물길에 몸을 맡기고 한국 쪽에 발견되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둘은 파레트 위에 올라 앉아 둥둥 떠갔다. 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파레트는 물속에 서서히 잠겨갔다. 멀리서 보면 대낮에 해상분계선 한가운데서 남자 두 명이 앉은 채로 둥둥 떠내려가는 이상한 모습이었다. 남과 북이 그 모습을 다 지켜봤겠지만, 다행히 어느 쪽에서도 총알은 날아오지 않았다. 한두 시간 지나니 정체를 알 수 없는 경비정이 두 번 나타났다 사라졌다. 무인도와 해병대 막사 중간쯤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고래 떼가 나타나 주변을 빙빙 돌았다. 뒤집히면 큰일이다 싶어 위협을 느끼고 있는데 쾌속정 한 척이 다가왔다. 한국군이었다. 총을 겨눈 군인들이 소리쳤다. “귀순입니까.” “예. 귀순입니다.” “손드세요.” 배에 탈 때까지 총을 겨눈 군인들이 “손들어”라고 외쳤다. 둘을 배 뒤편으로 끌고 간 뒤 목과 두 손목을 연결해 뒤로 포박했다. 눈도 가렸다. 군인들은 여전히 총을 겨누고 있었다. 몸수색을 하니 사복 안주머니에서 비닐에 꽁꽁 싼 보위부 상위 신분증과 만약의 경우 자결하려 준비한 손칼이 나왔다. 쾌속정은 그들을 함정으로 데리고 갔다. 보위부 신분증을 보더니 누군가 나타나 조사를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힘들어 죽을 지경이니 나중에 말합시다.” “배고픕니까?” “예.” 포박하고 눈을 가린 채로 군함 식당으로 갔다. 잠시 후 라면이 나왔다. 추위로 벌벌 떠는 두 사람에게 군인들이 모포를 씌워주었다. 라면을 먹고 따뜻한 온기가 도니 둘은 식탁에 머리를 박은 채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누군가 둘을 깨워 눈을 뜨니 군함은 인천항에 도착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둘이 새벽에 헤엄쳐 오는 것을 해병대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두 명이 어둠 속에서 해양 분계선 남쪽으로 넘어왔다가 다시 북쪽으로 올라 갔다를 몇 시간째 반복하며 허우적대는 것을 열상감시장비(TOD)로 지켜본 것이다. 경비정을 출동시켰더니 두 사람은 무인도로 급히 헤엄쳐 갔다. 자기 딴엔 숨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쪽에선 감시 장비로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명의 신분을 모르는 상태에서 무인도에 갑자기 상륙해 접근하면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몰라 지켜만 보다가 “우리가 무서워 못나온다”고 결론내고 잠시 철수했다. 둘이 다시 나타나 확실하게 한국 해역에 진입했을 때 한국군은 쾌속정을 출동시켰다.# 동경이 씨는 태어날 때부터 보위원이 될 운명이었다. 부친과 삼촌 3명이 모두 보위원이라는 건 그의 집안이 뼈 속까지 ‘새빨간’ 집안이란 뜻이다. 북한에는 “보위원 자녀들은 대를 이어 나라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김정은의 ‘말씀’이 존재한다. 이 씨 역시 2004년 학교를 졸업한 뒤 군대도 원산항 보위부 소속 병사로 갔다. 이곳에서 6년 군 복무를 한 뒤 노동당원이 돼 2010년 해주 김종태 제1사범대학에 입학했다. 2014년 대학을 졸업하고 동창들은 교원이 됐지만 이 씨는 보위부 군관으로 발탁돼 약 2년 반 일했다. 당국에서 보위부 군복을 입혀주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한국TV를 보고 자란 이 씨의 마음속엔 남쪽에 대한 동경이 가득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 사무실에 가면 남쪽에서 풍선으로 보낸 각종 라디오가 산더미처럼 수거돼 쌓여있었다. 그는 몰래 좋은 라디오를 빼돌려 윤도현, 나훈아, 임재범 등 한국 가수들의 노래를 들었다. 그가 한국 사람을 처음 만난 건 2006년이었다. 당시 원산항에 적십자사에서 보낸 쌀 약 2만 t을 실은 한국 선박이 들어왔다. 4박 5일 동안 북한 노동자들이 선창에 들어가 작업하는 동안 이 씨는 권총을 차고 이들을 감시하며 배 위에 서있었다. 이 과정에 한국 선원들에게 담배도 얻어 피우고, 대화도 나눴다. 이 씨와 처음 이야기한 남성은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부선장이었다. 구멍 난 청바지를 입고 있어 “남조선에선 돈이 없어 꿰진 바지를 입냐”고 물었더니 부선장은 웃었다. “유니폼이라고 한 것 같은데, 그땐 뭔 소리인지 몰랐어요. 한국에 와서 알았죠. 지금 제가 유니폼을 입고 다녀요.” 부선장이 북에 대해 물으면 이 씨는 대답 대신 먼 산을 쳐다봤다. 이 씨는 2006년 원산항에 쌀을 싣고 들어온 선박에서 근무한, 권총을 찬 북한 병사와 대화를 했던 그 부선장을 한번 다시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2008년경 원산항에 다른 식량지원 한국 선박이 왔을 때는 이 씨가 먼저 다가가 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 씨가 해주에서 대학을 다닐 땐 ‘러닝맨’이란 프로그램에 푹 빠졌다. 보위원이 돼서도 빠뜨리지 않고 봤다고 했다. “저는 다른 연예인에겐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김종국은 남자다워서 너무 멋있었죠. 김종국 보려고 러닝맨을 꼬박꼬박 챙겨봤을 정도죠. 한국에 와서도 김종국 외에 다른 연예인은 관심이 없어요.”# 감시이 씨는 보위부에서 주민동태 감시 및 외부 ‘불순영상’ 시청 감시를 맡았다. 보위원 한 명이 700~1200명의 주민을 담당했다. 보위원은 20~40명의 서약을 한 민간인 정보원을 둘 수 있다. 대략 주민 30명 중 한 명이 보위부 정보원인 셈이다. 정보원은 수시로 수상한 동향을 보고해야 하는 것과 동시에 매년 보고서를 내야 했다. 이에 대한 대가는 없었다. 나라에서 하라면 해야 하는 것뿐이었다. 보위원은 정보원과 함께 협조원도 둘 수 있다. 지장을 찍고 보위부 문서고에 서류가 보관되는 정보원과 달리 협조원 숫자는 보위원 능력대로 둘 수 있다. 노동당 기관을 제외한 모든 곳에 정보원이 있었다. 경찰격인 보안서에도 보위부 정보원이 있다. 이 씨는 22명의 정보원을 관리했다. 황해도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몰래 한국TV를 본다. 대다수 가정이 국가에서 검열한 TV 외에 12인치 정도의 작은 중국산 TV를 몰래 갖추고 있고 배터리, 또는 태양열 패널로 전원을 해결한다. TV에는 USB를 꽂는 포트도 있었다. 리모컨으로 채널 자동검색을 하면 한국TV가 나온다고 했다. 정전이 되면 TV를 시청하는 가정을 포착하는 보위부 감청차량이 있긴 하지만, 수량이 많지 않다. 그리고 휘발유가 없어 저녁 8~12시경 중요 지역만 순찰한다. “우린 사람을 잡아도 악착하게 하지 않았어요. 북쪽에선 탈북민들이 보위부에서 엄청 맞았다고 하는데, 우린 사람을 거의 때리지 않아요.” 청단과 연안은 강화도 맞은편이라 한국 삐라가 많이 날아온다. 신고를 받고 출동해 수거하는 것도 이 씨의 일이었다. “사람들이 남쪽에서 날아온 것 중 USB만 몰래 숨겨요. 비싸니까. 나머진 쓰레기라 보면 돼요. 황해도 사람들이 한국TV를 직접 보는데 삐라 정도로 주민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하진 않아요.” 이 씨는 바닷가를 돌며 한국에서 떠내려 온 물건들을 수집하는 일도 했다. 이를 맡은 부서를 ‘84상무’라고 한다. 북에 보낸다며 페트병에 쌀을 담아 한강 하구에 던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걸 주은 적이 있냐고 물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오지도 않아요. 그리고 바닷가 갯벌에 주민들이 접근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주워요. 북한 사정 모르는 건지,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희망이 씨는 2017년 2월 말 탈북민 정착기관인 하나원을 나왔다. 경기도 화성에 임대주택을 받았다. 함께 온 민철은 울산으로 배정됐다. 당시 북한 간부와 주민에게 탈북해 오라고 했던 대통령은 헌법재판소 심판을 앞두고 있었고 나라는 온통 시끄러웠다. 이 씨의 마음은 심란했다. 그런 한국 사회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국사회에 나온 이 씨는 처음엔 탈북민 출신 경찰 1호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남쪽에서 나서 자라 교육받은 20대 젊은이들도 취직이 안돼 고생하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그해 4월 플라스틱 샴푸병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다. 올해 1월엔 집을 양주로 옮기고 서울에서 석유공동구매 사업을 하는 협동조합에 취직해 일하고 있다. “아직 비행기 못 타봤어요. 대다수 탈북민은 동남아에서 한국으로 오면서 첫 비행기를 탄다고 하던데 헤엄쳐 오다보니 비행기를 못 타봤네요.” 그는 외국은 물론 정말 가보고 싶은 제주도도 아직 못 가봤을 정도로 3년 반 동안 열심히 일했다. 탈북 과정에 겪은 20시간의 사투는 트라우마(심적인 상처)도 남겼다. 그는 학교 다닐 때 도에서 알아주는 배구선수였고, 원산항 보위부에 있을 때는 2㎞ 바다 수영 ‘군사경기’에서 두 번이나 1등을 했었다. “이젠 물에 허벅지 이상 들어가지 못해요. 발이 안 닿으면 심장이 멎을 것 같아요.” 이 씨에게 앞으로 뭐가 되고 싶은지 물었더니 “일을 배워 사업도 하고 싶고 대학원도 다니고 싶다”고 했다. 올해부터 ‘북한저격TV’라는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북한 실상도 전하고 있는데 벌써 구독자가 1만 명이 넘었다. “남쪽에 왔으니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나요?” 그가 갑자기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저의 소원은요. 김종국을 꼭 만나보고 싶습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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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북부 국경에서 벌어진 잔혹한 학살극[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한반도 최북단이자 두만강 옆에 위치한 함경북도 온성에서 지난달 중순 끔찍한 학살극이 벌어졌다. 그런데 북한이 국경을 어찌나 꽁꽁 틀어막았는지 예전이라면 탈북민들의 전화 통화를 통해 바로 다음 날 전해질 이 소식이 지금까지 한국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북한과 연계된 정보 라인들이 거의 다 차단됐다는 의미다. 온성 사건은 지난달 중국에서 누군가가 몰래 두만강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간 일이 발단이 됐다. 밀수꾼이나 탈북자일 가능성도 있지만, 온성 맞은편 투먼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귀국하지 못해 1월부터 발이 묶인 북한 근로자가 수백 명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 중 한 명이 몰래 집에 가려 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 사람은 곧 체포됐다. 그런데 김정은이 북부 국경이 뚫린 것에 크게 화를 내며 무자비한 처벌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7월 탈북 청년이 임진강을 헤엄쳐 북으로 돌아간 뒤 김정은은 개성을 폐쇄하고 경비 담당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한 바 있다. 그러곤 국가초특급비상방역위원회를 국가비상방역사령부로 기능을 강화하고 방역규정을 어기면 총살, 무기징역을 선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온성에서 밀입국이 발각된 것이다.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밀입국 구간 경비를 담당했던 국경경비대 중대장, 정치지도원, 책임보위지도원, 군 보위부 봉쇄부부장, 군 보안서 기동순찰대장, 밀입국자가 소속된 직장의 당 위원장 및 지배인이 처형됐다. 처형장에는 관계자들을 동원해 참관시켰는데, 얼마나 잔인하게 집행했는지 실신하는 사람, 바지에 오줌을 싸는 사람 등이 속출했다고 한다. 수백 발의 총탄을 퍼부어 사람을 완전 형체도 없이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온성군 당위원장, 군 보위부장, 보위부 정치부장, 군 보안서장, 군 보안서 정치부장, 평양에 있는 국경경비총국장, 정치부국장은 연대 책임으로 무기징역을 받았다고 한다. 무기징역이면 한국 같으면 흉악한 살인범이나 부여받는 처벌이다. 온성에 밀입국자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감방에서 죽게 됐다. 이뿐 아니라 온성군 보위부, 보안서, 해당 지역 국경경비대를 해산 및 전원 제대시켜 농민으로 보냈다. 처형자와 무기징역형을 받은 사람들의 가족도 전부 심심산골로 추방했다. 온성군 보위부나 보안서, 국경경비대는 탈북자들을 워낙 악독하게 다루는 인간들이 가득해서 굳이 동정하고 싶진 않다. 김정은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하루아침에 토사구팽 신세가 됐으니 자업자득인 셈이다. 해산된 보위부, 보안서, 국경경비대 대신 다른 곳에서 사람들이 파견돼 국경 경비 공백을 막고 있다고 한다. 요즘 북한 주민들은 ‘개성 사건’에 이은 ‘온성 사건’ 때문에 숨도 못 쉴 상황이다. 이 사건 이후 온성 회령 무산 등 북부 국경 지역들이 봉쇄돼 외부와의 연락이 차단됐다. 국경 지역 사람들은 산에 있는 개인 밭, 즉 소토지를 경작하기 위해 이동하려 해도 모두 대장에 기록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 도처에 전파탐지기가 있어 국경 사람들은 깊은 산에 가서 한국과 전화통화를 하는데, 꼼꼼한 기록과 수색으로 한국과 연락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20년 가까이 북한을 취재해 온 기자도 요즘 ‘이 정도로 철저한 폐쇄가 가능하구나’라고 혀를 찰 정도다. 코로나19가 발생한 뒤 북한에서 자행되는 잔혹한 처벌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2월 중순부터 두 달 동안 700명 이상이 방역규정 위반으로 처벌된 사실은 몇 달 전 필자 칼럼에 소개한 바 있다. 온성 사건과 별개로 8월 20일에도 북한의 최대 국경 관문인 신의주 세관에서 80여 명 검사 전원이 방역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수감됐고 가족은 농촌으로 추방됐다. 김정은은 집권 직후엔 인민적 풍모를 가진 지도자인 것처럼 포장했다. ‘인민들이 허리띠를 더는 조이는 일이 없게 하겠다’고 선언한 뒤, 허물없이 가정집에 들어가고 허름한 목선을 타고 외진 섬에 가서 군인을 업어주는 등의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이런 모습은 사라졌다. 잔인한 처벌의 강도만 높아지고 있다. 하는 일들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있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 화풀이를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처형하면서 풀고 있어 끔찍하다. 더 끔찍한 건 이런 잔인함이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 언제까지 피바람이 계속 불지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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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걸리 집에서 만난 탈북 1세대 전철우 대표[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남쪽에서 30년을 살아보니 말이지. 탈북해 여기에 정착을 잘 하려면 머리 좋은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성격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 괴로운 일이 있어도 웃고 잊고 그렇게 넘어가야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거야. 내성적이거나 성격이 섬세한 사람은 견디기 어려워하더라고. 그런 사람은 한국에 와서 처음엔 막 신나서 좋아하다가 또 엄청 환멸을 느끼고 그러는데 감정 기복이 산과 계곡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면 살기 힘들지.” 1989년 북한 국비 유학생으로 동독에 유학 갔다가 한국으로 탈북한 사업가 전철우 대표(53)를 24일 서울 성동구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전철우는 그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로 한국에 많이 알려졌다. 그를 다룬 기사는 대개 ‘돈을 많이 벌었다더라’ ‘사업을 새로 시작했다더라’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그는 탈북 1세대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 오랫동안 살면서 그가 겪은 삶을 어찌 돈이나 사업 성패로만 판단할 수 있을까. 그가 이방인으로 이 땅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 그의 눈으로 지켜보는 탈북민들의 정착 등을 들어봤다.# “지금도 사기는 당하고 살지.” “인생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냥 살아가는 것 같아. 어디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이 없잖아. 순간순간 후회 없이 살자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아직 잘 모르겠어.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편안하게 살도록 노력하는 게 내 인생인 것 같아. 편안하게 산다는 게 말은 쉬워도 막상 그렇지 않더라고. 재벌도 편안하지 못하지. 그렇게 돈 많은 사람도 감옥가고 하는 걸 보면서 나는 잘 사는구나 하고 위안을 얻지.” 전 대표는 식탁이 4개 밖에 없는 작은 시장 골목 식당으로 필자를 잡아끌었다. 오랜 단골이라고 했다. 모듬전에 막걸리를 시켜놓고 동네 형이 옆집 동생에게 이야기하듯 편안하게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사는 이미 한국에 다 알려졌다. 귀순, 연예인, 사업, 실패, 이혼, 사기, 성공…. 그의 이름과 함께 항상 따라 다니는 단어들이다. 사기도 수없이 당했고, 당할 때마다 언론을 통해 간간히 전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이제 한 30년 사기 당했으면 이젠 사기꾼을 가려보는 데는 완전 도사가 됐을 거 같은데요.” 전 대표가 손사래를 친다. “아니야. 지금도 당해. 베트남에서 사업을 한다고 나갔는데 또 사기 당했어. 한국에선 이젠 나름 사람 보는 눈도 있고, 모르는 것은 잘 하지 않으니 이제는 사기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외국에 나가선 또 누군가와 손을 잡고 사업을 해야 하니 또 당하지. 하도 당하니까 이젠 ‘이번은 조금만 당해서 다행이다. 손해를 최소화하고, 빨리 피하고, 빨리 잊자’가 좌우명처럼 됐어.” 그는 2017년 ‘전철우의 맛있는 주방’이라는 브랜드를 내걸고 베트남에 진출했다. 하노이에 즉석식품 가공공장을 세웠고 지난해 11월에는 200평이 넘는 큰 식당도 열었다. 그런데 사업을 확대하려는 순간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퍼졌다. 요식업계 전반이 피해를 봤고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베트남 정부가 한국인 입국을 금지하면서 올 3월 한국에 들어왔다가 하노이에 다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한국 사업에 다시 집중하는 중이야. 신속하게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사장이 베트남에 나가 있으면 또 국내 사업이 생각처럼 잘 돌아가지 않더라고. 둘 다 같이 하긴 어려워. 베트남은 지금 딴 사람에게 맡겨 놨지.” “자꾸 사기 당하면 사람 쓰기 무섭지 않나요?” “사람을 쓰지 않고선 사업을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그러니까 사람에게 간혹 배신당해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지. 사람을 멀리 하고 어떻게 사업할 수 있나. 독만 되는 게 아니라 약이 될 때가 더 많아. 정작 내가 제일 어려운 건 시장을 개척하는 거야. 될 것 같았는데, 안되고, 안될 것 같았는데도 되고. 아직도 쉽지 않아. 한국은 과거엔 6개월마다, 지금은 3개월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해. 뭘 하나 시장에 내놓으면 경쟁자들이 가격을 낮추고 따라와. 멈추는 순간 죽는 거지.” 탈북민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라는 말을 듣는 그 역시도 지금까지 멈추면 죽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계속 새로운 걸 만들고 확장하고 하다보면 지치지 않나요?” “나이가 들면 보수적이 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어. 과거엔 사이즈(규모)에 집착했는데 이젠 버는 것보다 지키는 것에 더 신경을 쓰게 돼. 예전처럼 투자금액, 직원 숫자 이런 것에 집착하기보다는 적어도 확실한 내 것이 더 소중해지는 것 같아. 그래서 지금은 완벽하다 판단되지 않으면 일을 벌이지 않아.”# 전라도 담당 안보강사 막걸리 두 병과 고기전과 홍어전을 함께 담은 접시가 금새 바닥이 났다. 그가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사장님, 이거 똑같은 걸로 한 접시 더 줘요.” 그리곤 일어나 냉장고를 열고 막걸리를 직접 꺼내왔다. “요식업체 대표를 수십 년 하다보면 맛에 민감할 텐데, 이렇게 골목에 숨은 작은 식당을 단골로 삼은 이유가 있나요?” “맛있잖아. 내 입에는 이 전들이 참 맛있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입은 과거를 잊지 못하는 듯 했다. “그런데 김책공대 다니다가 독일 드레즈덴 공대에 유학을 갔고, 한국에서도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다닌 것으로 아는데, 한국에 와서 왜 개그맨하고, 음식 장사 시작한 건가요. 그거 하고 싶어서 부모형제 두고 탈북한 건 아닐 거 아니에요?” “그땐 어렸지. 동독이 무너지니 북한도 5년 내로 무너질 것 같았어. 빨리 한국에 가서 자본주의를 배워 돈을 벌면 5년 뒤 고향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는 과거 얘기가 시작되자 쉼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한국에 처음 와 정보 요원들에게 “광주에선 왜 그렇게 사람 많이 죽였어요”와 같은 엉뚱한 질문을 자주 던졌다고 했다. 당시 화제가 됐던 임수경 방북 사건과 관련해서도 “임수경 때문에 북한 사람들이 한국을 다시 보게 됐다”고도 했다. 결국 정보당국은 ‘전철우의 입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귀순 기자회견 때 독일에서 그와 함께 탈북한 친구였던 장영철에게만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도록 했다. 전철우는 옆에서 입을 닫고 있었다. 이후에도 기자들이 찾을 때마다 장 씨만 나갔다. 그랬더니 기자들이 왜 둘이 왔는데 하나만 말하느냐고 난리를 쳤다. “어느 날 정보기관 담당자가 부르더니 KBS ‘남북의 창’이란 방송에 나가야 하는데 입을 조심하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어. 방송 같은 건 그때 관심도 없었는데, 막상 나가니 예쁜 여기자들이 옆에 앉아 질문을 던지니 들뜨는 거야. 그래서 신이 나서 말했지. 그때는 북한 사람의 이미지가 경직되고 증오만 가득 찬, 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처럼 여겨졌어. 그런데 내가 겨울에 평양 거리에 나가 눈을 치기 싫어 숨었던 이야기 같은 것을 웃으며 얘기하니 저기(북한)도 저렇게 날라리들이 있구나 싶어 이미지가 확 바뀐 거지. 방송 끝나고 정보기관 담당자가 막 뛰어오더니 ‘대박이다. 대박’ 이러는데 대박이 뭔지도 몰랐어. 그다음부터 방송에서 계속 단골로 출연하다보니 방송인, 개그맨도 됐지. 허허.” 당시는 탈북자가 귀순자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한국에 오는 숫자도 적었다. 한국에 온 귀순자는 전국을 돌며 몇 년씩 귀순강의를 하던 시절이었다. “난 전라도 고정 담당이었어.” “아니, 왜요. 탈북자들이 강연 가기 꺼리는 곳 아닌가요.” “처음엔 멋모르고 갔지. 광주 조선대, 전남대 이런 데를 보내는 거야. 갔더니 청중으로 온 내 나이 또래의 대학생들이 팔장을 끼고 삐딱하게 앉아 쏘아보는 거야. ‘왜 조국을 배반하고 왔느냐’고 욕을 하더군. 거기에 기가 죽진 않았어. ‘여긴 여기 앉은 사람이 대통령도 되고 그러는 사회 아니냐. 나도 대통령 하고 싶은데, 거긴 아버지, 아들이 다 해먹고, 그 연줄로 다 하니 올라갈 틈도 없다. 나도 정말 돌아가서 올라가고 싶다’ 이렇게 막 떠들어댔지. 그게 먹혔나봐. 강의가 끝나니 그 학생이 날 부르더니 옥상에 데려 가더군. 같이 간 요원도 못 오게 하고 말이지. 얻어맞는 건가 싶었는데 막걸리 한잔 부어주더니 하루 더 있다 가라더군.” “저도요, 2002년에 한국 와서 몇 달 뒤 조선대에 갔는데 그때도 저를 보고 배신자라고 했어요. 형님 때는 더 했겠죠. 그런데 나보고는 막걸리 주면서 자고 가란 말 안하던데. 난 진짜 배신자처럼 보였나봐. 하하.” “그렇게 강의를 마치고 나니 그 다음부턴 계속 안보강의 할 때마다 나를 전라도에만 보내는 거야. 지내고 보니 전라도 사람들이 의리는 있더라고. 아무튼 그렇게 인연을 맺었고, 광주에 전철우사거리도 있는 거 알지?” “몰라요.” “그런 게 있었어. 인터넷에 찾아봐.” # 우주가 내 마음을 끌어 과거 이야기하며 막걸리 잔이 몇 번을 더 오갔을까. 취기가 느껴질 무렵 몇 마디 더 질문을 던졌다. “여기 와서 계속 오뚜기처럼 일어선 비결 같은 뭘까요.” “내 장점은, 우선 부모님이 참 낙관적인 성격을 물러주신 것 같아. 낙천성을 타고 났으니 아픈 일이 있어도 빨리 털고 일어나. 배신당했다 생각하면 일이 잡히지 않는데, 나는 그건 참 빨리 극복해. 둘째는 아무리 최악의 순간이라도 어떤 상황인가를 객관화하는 능력이 타고 난 것 같아. 아무리 나락에 빠져도 ‘여기서 더 무너지지 말자’ ‘절대 지저분해지지 말자’고 자기 최면을 걸어. 거기서 지저분해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거든.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이 뭔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 뭔가를 냉정하게 가려봐야 하거든. 요즘은 한 가지만 잘 해도 돼. 옛날에는 돼지 잡으면 백정이라고 놀렸는데, 이젠 돼지고기만 잘 손질해도 셰프라고 대접 받거든.” “그건 원론적인 말이고, 한 가지 잘해서 일어선 건 아니잖아요.” “나는 사람을 제일 중요하게 여겨. 사업은 망해도 사람을 잃으면 안돼. 신뢰, 평판, 존중 이런 게 있어야 재기가 가능하거든.” “그건 전철우란 브랜드를 가졌으니 하는 말이고, 일반적인 탈북자들은 중요하게 여길 사람도 없이 시작해야 해요. 그런 말 탈북자들에게 하면 욕먹어요.” “그래, 그건 그렇겠네.” 그는 순순히 수긍했다. “요새 취미가 뭐예요?” “넷플렉스에서 드라마 보는 걸 좋아하는데, 우주 이런 것에 끌려. 우주와 인생을 비교하면 ‘뭘 하려고 찰나의 인생을 이렇게 고생하며 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러다보니 결국 오늘 행복한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매일 행복하자, 행복하자 이러며 살지.”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막걸리에 취해 헤어질 때까지 그의 눈은 내내 웃고 있었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 2020-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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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코로나 재난구호 필수품… 참치캔, 글로벌시장서 불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구호식품의 대명사인 참치캔이 전 세계적으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3월부터 6월까지 올해 국내 참치캔 매출액(선물세트 제외)은 전년 동기 대비 18.2% 늘었다. 품목별로는 일반 라이트 스탠더드가 17.9%, 고추참치 등 가미참치가 15.7% 증가했다. 경로별로는 할인점이 20.5%, 개인 슈퍼가 17.4% 증가했다. 기간으로는 코로나가 큰 이슈가 됐던 3월이 31.3%로 가장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참치캔은 국내 코로나19 재난구호 품목에 필수 항목으로 포함되고 있다. 방역을 위해 일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과 코로나19 취약계층의 지원을 위해 지속적으로 지급되고 있다. 참치캔의 수요는 미국에서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유통업체 코스트코는 미국 매장에서 한동안 고객 1명이 살 수 있는 참치캔 수량에 제한을 두는 등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5월부터 참치캔 매출이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실제로 미국 내 참치캔 및 참치 파우치 매출은 AC닐슨 기준 올 상반기에 전년 동기 대비 29.6% 성장했다. 미국 참치캔 시장 점유율 1위 업체 스타키스트는 같은 기간 매출액이 17.47% 늘었다. 특히 스타키스트는 코로나19로 인한 국경 폐쇄로 참치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밀려오는 생산 주문에 공장 설비가 한때 고장 나 전세기까지 띄워 부품을 공수했을 정도였다. 스타키스트는 국내 동원그룹이 2008년 델몬트로부터 인수해 현재 동원산업의 자회사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러한 수요 증가 배경과 관련해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위기감이 전 세계적으로 고조되면서 저렴한 단백질 공급원인 참치캔이 부상했다고 설명했다. 미국 내 5온스(약 142g)짜리 참치캔의 가격은 1달러 수준이다. 참치캔은 2017년 미국 허리케인 ‘하비’ 재난 당시에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하비는 당시 40만 명의 이재민과 2000억 달러에 달하는 재산 피해를 일으켰다. 이때 참치캔은 평상시 대비 3배 이상의 판매량 증가를 보이며 한 달간 1000만 달러 이상 판매됐다. 이렇게 판매된 참치캔은 학교, 마을회관, 교회, 문화센터 등 임시 대피소에 이재민들을 위한 비상식량으로 제공됐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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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 정착 탈북 성악교수의 꿈[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허영희 맞지? 나와.” 총을 든 군인들이 집에 들이닥쳤다.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담담히 군인들을 따라 차를 타고 끌려간 곳은 양강도 주둔 북한군 12군단 보위부 감방이었다. 군인들은 그날 밤 잠을 재우지 않더니, 다음날 취조실로 끌고 갔다. 군단 보위부 고위간부가 두터운 서류철을 들고 들어와 한참을 뒤적이더니 물었다. “왜 잡혀왔는지 알겠지?” “네. 그렇지만 죽으면 죽었지 제자를 감시할 수는 없습니다. 보위부가 선생에게 이런 걸 시키는 게 잘못된 일이죠.” “도대체 그 제자와 어떤 관계이길래 당에서 시키는 임무도 거부하는 건가?” 허영희 교수(61)는 제자와의 역사를 담담히 풀어놓았다. “제자이기 전에 딸 같은 애입니다. 못해요.” 보위부 간부는 그의 이야기를 한참 듣더니 보초를 불렀다. “선생님 데려가 재우라.” 그날 이후 조사관은 더 이상 취조실에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허 교수의 감옥 생활이 시작됐다. 그때가 2013년 1월. 4월 15일까지 76일간의 수감 생활이 시작됐다. 혜산예술대학 성악교수로 15년 동안 재직하던 그가 잡혀온 이유는 제자를 감시하라는 보위부의 지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2012년 3월, 12군단에서 반탐(방첩)을 책임진 보위부 간부가 집에 찾아왔다. 군단 산하 군관과 결혼한 제자가 한국 물품을 밀수하는 것 같은데, 물증을 확보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가 조사해보니 그 제자는 허 선생에겐 비밀이 없다고 하던데 도와주세요.” “옆집을 감시하라면 해도 어떻게 스승에게 제자를 신고하라고 합니까. 절대 못해요.” 고분고분하지 않자 보위부 간부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평양 가서 공부하는 아들이 더 중요하나, 아님 제자가 더 중요해?” 어쩔 수 없이 “생각해 보겠다”고 답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밤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다음 날 제자를 찾아갔다. “보위부에서 너를 감시하는 것 같은데 조심해라.” 그러나 보위부 감시망이 허 교수에게만 향한 게 아니었다. 2013년 1월 제자와 그의 남편은 군 보위부에 체포돼 끌려갔다. 그 소식을 들은 허 교수는 곧 나도 잡아갈 것이라 각오하고 있었다.● 감방에서 반동이 되다. 허 교수가 추위를 견디며 구속돼 있던 감방에는 다른 여성들도 잡혀와 있었다. 보위부에선 인신매매범들이라 불렀다. 그런 범죄자들과 같은 감방에 있는 것도 치욕이라 그는 생각했다. 처음엔 “너희들은 할 짓이 없어 중국에 사람을 팔아 먹냐”고 분노도 했다. 그들이 서로 쳐다보며 “아니, 이 할머니는 어디서 왔나”라며 더 놀라워했다. 이들과 함께 지내며 허 교수는 비로써 북한의 속살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한 여인이 보위부 조사 서류를 쓰면서 통곡하더라고요. 엄마가 딸의 손을 잡고 와 중국에 딸을 보내 달라 사정해서 돈도 안 받고 보내줬는데, 그 딸이 잡혀왔어요. 강을 건네준 그 여인은 중국에 여자를 팔아먹는 인신매매범으로 잡혀왔어요.” 감옥에 갇힌 여인들은 대부분 중국에 사람을 넘겨주고, 한국에서 돈을 받아 북한 가족에게 전달해주고, 한국과 통화를 했다는 이유 등으로 잡혀 왔다. 북한은 이들을 인신매매범이라 낙인찍고 감옥에 보냈다. 감방 일과는 감시를 받으며 하루 종일 계속 앉아 있는 것이었다. 허 교수는 곰곰이 생각했다. ‘일제(강점기) 때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여인도 엄마가 딸을 팔진 않았다. 이들이 죄인이 아니라 나라가 죄인이 아닌가.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중국 산골에 팔려가 맞아죽고 남몰래 암매장 돼도 어디에 하소연 할 수도 없는 것이 과연 누구 탓일까.’ 허 교수는 자기가 북한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을 했다.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17세 때 할아버지가 부유했다는 이유로 가족과 함께 양강도 백암이라는 심심산골로 추방됐다. 그러나 뛰어난 노래실력 때문에 혜산예술전문학교에 입학했고, 1982년부터 양강도 예술단 가수가 됐다. 전국 가요 콩쿠르에 나가 1등도 두 번이나 했다. 여름이면 삼지연 별장에 피서를 온 김일성 앞에서 공연도 여러 번 했고 기념사진도 많이 찍었다. 1998년 모교인 혜산예술대학 성악교수로 옮겨가 제자를 양성했다. 평생 조국의 선전 전사로 충성을 다했고 1년 뒤면 명예로운 은퇴도 예고됐다. 그러나 제자를 감시하라는 보위부의 임무는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감옥 안에서 허 교수는 체제에 환멸을 느끼는 ‘반동’이 돼 버렸다.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 ‘태양절’에 당의 배려라며 석방됐다. 보위부 앞마당에 마중 나온 남편이 76일 동안 목욕 한번 못하고 야윈 아내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왜 울어. 저 새끼들이 좋으라고 우나. 울지 마.” 남편이 깜짝 놀라 아내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의 눈은 더는 예전의 눈빛이 아니었다. ● 제자와 함께 탈북 감옥에서 북한 사회에 환멸을 느낀 최 교수는 더 이상 그 땅에서 살기 싫었다. 그가 살던 혜산 예술인아파트는 80세대가 살고 있었다. 이웃으로 지냈던 수많은 이들이 한밤중에 사라졌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나면 북에 남은 가족들이 돈을 펑펑 쓰기 시작했다. 생각이 바뀌니 목표가 생겼다. ‘남조선이란 곳이 저렇게 살기 좋은 곳인가. 여기서 평생 속절없이 살지 말고, 늙었지만 나도 한번 가서 살아보고 싶다.’ 그러나 남편과 아들이 있기에 선뜻 떠날 수는 없었다. 양강도 예술단 가수 시절 한 직장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2살 연하의 남편 최성가를 만났다. 남편은 그때 북한에 알려지지 않았던 ‘데니보이’ 악보를 갖다 주며 그녀에게 접근해왔다. 사랑이 싹텄고, 결혼을 했고 아들을 낳았다. 같은 직장을 다녔고, 지방 공연도 함께 갔다. 허 교수는 탈북할 때까지 단 하루도 남편과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했다. 남편은 예술단 기량과장을 지냈고, 나중에 문화예술부 자재공급소에서 일했다. 1988년에 태어난 허 교수의 외아들 최경학은 수재들만 가는 1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혜산의학대학 졸업 후 평양의학대학에 진학해 박사원(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연주하는 과학자가 되라며 음악과 과학을 함께 가르쳤는데, 뿌듯하게 잘 컸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험한 탈북길에 가족을 선뜻 함께 데리고 나설 수도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럴수록 여기서 살 수 없다는 답은 더 확고해졌다. 2014년 9월 마침내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 허 교수는 제자를 찾아갔다. 보위부에서 감시하라고 했던 그 제자였다. 제자는 일정 기간 구금 생활을 마치고 석방됐다. 그 역시 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부대에서 주는 배급조차 병사들에게 양보했던 남편은 밀수를 도왔다는 이유로 군복을 벗고 1년 동안 노동교화소에 끌려갔다. “나 여기서 없어질래. 가족은 위험해서 함께 못 가지만 내가 먼저 길을 만들어야겠어. 가서 살만한 세상인지 보고 가족도 데려갈 거야.” “한달 있으면 평양에서 아들이 오는데 보고 가시죠.” “내가 그래서 지금 떠나. 그 애를 보면 못 갈 거 같아.” 한참 말이 없던 제자가 말했다. “저도 선생님을 따라 가겠습니다.” 감방에서 만났던 ‘인신매매범’들이 브로커를 소개해 탈북할 길을 안내해주었다. 한국까지 오는 길은 비교적 수월했다. ● 제주도 정착하다 2015년 5월 하나원을 나와 제주도에 집을 받았다. 서울에 집을 받은 제자는 함께 살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나처럼 늙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불편하지. 우리 멀리 떨어져 살자. 너는 네 인생을 개척해.” 훌훌 털고 제주도에 와보니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 북에서 한 아파트에서 살다 탈북해 한국에 온 옛 이웃들도 만났다. “아니, 선생님은 잘 살았는데 왜 오셨어요?” “너는 왜 왔냐. 우리가 돼지냐.” 이제 가족을 데려올 돈을 벌어야 했다. 자본주의에 살려면 시장경제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시장을 찾으니 5일장을 소개해 주었다. 거기에서 옥수수를 판매하는 아르바이트를 얻었다. 같이 일하는 한 여인이 “언니, 옥수수 팔려면 소리를 쳐야 한다”며 눈치를 주었다. 교수의 체면이 남아있어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지만, 이게 시장경제인가 라는 생각에 오기가 생겼다. “내가 소리치면 너보다 훨씬 잘해.” 그날부터 장보러 왔던 사람들은 한번씩은 눈이 커졌다. 옥수수 파는 여인이 “옥수수 여섯 개에 오천원!”을 외칠 때마다 시장에서 오페라 아리아를 라이브로 듣는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착해가고 나니 한국에선 나이든 여인이 200만 원 이상 벌 수 있는 곳은 호텔 청소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에 올 때부터 노래를 다시 부르거나 학생들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했어요. 북한에서 아무리 잘했다고 해도 거긴 외국곡 하나 제대로 불러보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죠. 여긴 외국에서 유학을 한 가수도 많은데, 나 같아도 북에서 온 여자에게 아이를 맡기지 않겠어요. 여기 올 때부터 제일 아래에서부터 올라가자고 생각했죠.” 리조트 청소를 하면서 언니, 동생으로 부르는 이들도 생겼다. 낙천적 성격인 그녀를 모두 잘 대해주었다. 가족을 빨리 데리고 오라며 돈도 빌려주었다. 너무나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 가족의 체포 가족을 데리고 올 돈이 생기자 그는 북한에 연락해 남편을 설득했다. 마침내 남편도 동의했다. 아들을 설득하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평양의대 박사원을 막 졸업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탈북했다. 2016년 9월 26일. 2년 전 허 교수가 탈북했던 바로 그날이었다. 그러나 강을 넘은 부자는 하루 만에 공안에 체포돼 손을 쓸 사이도 없이 북송됐다. 남편과 아들의 체포 소식에 허 교수는 쓰러졌다. 북한 이곳저곳 연락해 가족을 수소문했지만, 아는 이는 없었다. 한국행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간 게 분명했다. 어느 날 그는 아는 사람에게 제주도에서 통곡을 해도 들리지 않는 곳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한라산 자락 어느 깊은 산속에 주저앉아 남편 이름을 부르며 통곡했다. “성가야. 성가야.” 집에서 부르던 남편의 이름이었다. 나중에 그를 데려갔던 사람이 물었다. “보통 아들을 부르는데 왜 남편 이름을 부르며 울었어요?” “아들은 저를 닮았어요. 걔는 어떻게든 버틸 거 같아요. 그런데 남편은 너무 여리고 착한 사람이라 수용소 생활을 이겨내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할 거 같았어요. 너무 불쌍하고 미안하고, 미안하죠.” 남편과 아들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고 생각되자 그는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극단적 선택을 생각했다. “죽으려 했어요. 못한 이유는 단 한가지예요. 남편과 아들을 빨리 데려오려고 청소하면서 만났던 친구들이 1700만 원, 1000만 원씩 빌려줬어요. 청소를 해보니 그 돈이 얼마나 큰 금액인지 알아요. 죽어버리면 저를 믿고 돈을 빌려준 그들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죠. 죽더라도 돈은 갚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남쪽엔 좋은 사람이 참 많더라.” 허 교수는 남쪽에서 살면서 감사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다고 말했다. 가족을 데려오라며 돈을 빌려주었던 친구들은 그녀 가족의 체포 소식을 들은 날 “우리가 돈을 빌려줘 가족이 체포된 것 아니냐”며 함께 울었다. 돈을 갚으려 하자 “사람을 잃었는데 돈이 문제냐”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허 교수는 재작년까지 그 돈을 다 갚았다. 빚을 갚는 날 또 다같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한 지인이 허 교수에게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가져다줬다. “몇 페이지를 읽어보니 더 못 읽겠어요. 울음이 터져 나와서요. 왜 이렇게 가슴 아픈 책을 줬냐고 원망했습니다. 그래도 다 읽어보니 그가 왜 이 책을 제게 줬는지 알겠더라고요. 저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이겨내고 그 경험으로 세계적인 의사가 됐어요. 우리 아들도 수용소 생활을 이겨내고 저렇게 될 거라는 믿음 같은 게 생겼죠.” 그는 5년 동안 숙박업소 청소를 하다가 올해 2월 집 인근 치과병원에 취직했다. 매일 문을 열기 전 병원을 청소하고 의료 폐기물을 버리는 일이다. 올해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제주도 관광업계가 큰 피해를 입으면서 청소하던 친구들이 일거리를 잃었지만 그는 다행히 계속 일을 하고 있다. 허 교수는 취직한 병원 의사와 딸 같은 어린 간호사들도 편하게 대해 주는 것이 감사하다고 했다. “원장님이 제 치아를 억지로 검사하더니 120만 원짜리 임플란트를 해줬어요. 돈을 내려 했는데 ‘50년 뒤에 갚으라’더군요. 예전에 우리 아들을 한국에 데려와 의사를 시키고 제가 청소를 해주면 좋겠다는 꿈을 꾸었어요. 이 병원을 아들 병원이라 생각하고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청소를 할 겁니다.” ● 살아야 할 이유를 찾다 이제 허 교수는 극단적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살고 있는 제주도가 산도 있고 바다도 있어 정이 들었다. 자신의 존재가 주변에서 쓸모가 있고 할 일도 있음을 느꼈다. “내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이 북에 관심을 갖고 통일을 생각하더라고요. 그들이 북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갖도록 하려면 저부터 모범이 돼야겠죠. 교수했다고 틀(체면)을 차리지 말고 모든 걸 내려놓고 새로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북한 사람들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갖게 되겠죠.” 그는 “북한에 관심도 없던 주변 사람들이 이젠 북한 소식을 자기보다 더 빨리 보고 알려준다”며 환하게 웃었다. 1년 전에는 한 사이버대학에 입학했다. 자격증이나 취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좀 더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첫 중간고사를 쳤는데 컴퓨터에 미숙해 성적을 어떻게 확인하는지도 몰랐다. 기말고사 때는 성적을 확인해 볼 수준이 됐다. 꼬박꼬박 강의를 들었지만 점수는 대부분 C학점을 받았다고 한다. “북에선 1등만 하려 했고, 노래도 남들에게 지기 싫어 노력했는데 이젠 져도 편안하니 새로운 세계관이 생긴 것 같아요. 제 아들이 컴퓨터를 정말 잘했어요. 아들이 옆에 있었다면 제가 컴퓨터를 이렇게 배울 일도 없었겠지만, 혼자 사니 컴퓨터도 배우게 됐어요.” 그는 앞으로 30년 더 사는 게 목표다. “어렸을 때 우리 할머니가 그랬어요. 일제 때 매일 ‘텐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며 살았는데 어느 날 자고 깨니 해방이 왔다고요. 30년 더 살면 그런 날이 오지 않겠어요. 그때까지 돈 많이 모으고 제주도에 좋은 집을 사서 남편과 아들에게 평생의 속죄를 하고 싶어요.” 남편과 아들 이야기를 할 때마다 허 교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수용소에 간 남편과 아들의 생사는 여전히 알 길이 없어요. 누구나 탈북에 성공할 수 없는 거고, 제 남편과 아들은 불행하게도 성공 못한 사람에 속했죠. 그런데 지금도 북한에서 남편과 아들처럼 착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가고 있나요. 나라가 만든 죄인들이죠. 저는 김정은이 이제라도 마음을 바꿔 더는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남편과 아들이 죽었어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허 교수는 집 앞 바닷가에 나가 해가 지는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기자와 만난 8월 중순에도 인터뷰를 끝내고 바닷가에서 석양을 함께 바라봤다. 온갖 상념이 그때만큼은 날아간 듯한 표정이었다. 석양 아래 어디선가 그리운 얼굴들이 그를 향해 웃고있는 것처럼...허영희 교수가 2년 전 제주시민밴드의 요청으로 무대에 올라 그리움과 한을 담은 노래 임진강을 부르는 모습이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 2020-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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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물교환이 통일부의 상상력인가[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남북관계를 창의력과 상상력을 갖고 접근하겠다”고 말하며 취임한 지 거의 한 달이 돼간다. 그러나 그 창의력과 상상력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 장관 취임 이후 통일부는 8억 원 규모의 코로나19 방역물품의 대북 반출을 승인하고 세계식량계획(WFP)에 1000만 달러(약 118억 원)를 지원했다. 이런 지원은 새삼스러운 게 없다. 오히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외부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우리만 창피하게 됐다. 그나마 북한의 인삼술 들쭉술을 남한의 설탕과 맞바꾸는 사업의 승인 여부가 화제가 되긴 했다. 이 장관이 청문회에서 “백두산 생수와 남한 쌀 교환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과 일맥상통한 사업이다. 그런데 북한이 이런 물물교환을 창의력과 상상력 있는 신선한 돌파구라고 생각할까. 평생 북한을 지켜본 필자 생각으로는 “무슨 자본주의 소꿉놀이하자는 것이냐”며 화를 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까지 폭파하고는 바로 물물교환에 응하면 김정은이 얼마나 우스워지겠는가. 북한은 김정은의 자존심과 체면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곳이다. 또 북한이 인삼술과 들쭉술을 팔 곳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닐 거라 믿고 싶지만 혹시나 물물교환 정도를 창의적이고 상상력 있는 돌파구라고 생각한다면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발상이라 생각한다. 지금처럼 남북관계가 꽉 막혔을 때는 22년 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 떼를 몰고 올라가 금강산관광 사업을 성사시킨 일 정도는 벌여야 창의적 돌파구라고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때도 북한이 선뜻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공개하는 내용이지만 오히려 소 떼 방북을 막으라는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북한 중앙수의방역소 서성원 소장(당시 55세)이 고문으로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 소장은 “소가 들어오면 방역에 이상이 없다 해도 아무 트집이라도 잡아 소들을 되돌려 보내라”는 보위부의 전화를 받았다. 그러면 남북관계는 바로 얼어붙는다. 서 소장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다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사건인데 어떻게 이상이 없는 소들을 트집 잡아 훼방을 놓겠는가. 나중에 삼수갑산 가더라도 소신대로 한다”고 결심했다. 이렇게 소 떼 방북을 성사시키고 한 달 뒤 서 소장은 갑자기 들이닥친 검은 승용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반년이나 소식이 끊겼다. 서 소장은 김정일의 동생 김경희와 대학 동창이었다. 부인이 남편을 살리겠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김경희의 차를 가로막고 호소한 끝에 서 소장은 두 사람의 부축을 받고 집에 돌아왔다. 반년 만에 서 소장은 머리가 허연 늙은이가 됐는데, 더 비참한 것은 집안 식구를 봐도 벌벌 떨고, 먹고 싶은 것도, 아픈 것조차 말하지 못하는 정신 이상에 걸려 있었다. 서 소장은 어디에 끌려갔는지, 누구한테 고문을 받았는지도 모른 채 집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숨졌다. 북한은 소 떼를 1차로 받은 지 석 달 뒤 “안기부와 통일부의 반민족 분자들이 소들에게 소화될 수 없는 불순 물질들을 먹여 500마리 중에 15마리가 죽고 8마리가 죽기 직전”이라며 비난했다. 이처럼 옛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것은 북한을 상대할 때 우리의 잣대로만 평가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시장경제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우리는 흔히 “이 정도의 경제적 이익을 보게 하고, 성의를 보이면 북한도 고마워하겠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북한에선 지도자의 체면이나 외부 정보 차단, 전략적 판단 등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있다. 거래의 방법도 우리 상식과 다르다. 대북사업을 성사시키려면 상대 기업에 얼마나 이익을 주는지 설득하기보다는 기업 책임자의 인사권을 쥔 윗선을 찾는 게 성공할 확률이 높다. 윗선에 1억 원의 뇌물이 들어가면 국영기업은 2억 원 손해 볼 수 있는 것이 북한식 계산법이다. 물물교환이 성사되면 김정은 주머니에는 얼마가 들어갈까? 그에게 떨어지는 것이 없으면 설탕 받고 좋아할 인민이 천만 명이라도 의미가 없다.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면 북한식 계산법 정도는 꿰고 있어야 한다. 술과 설탕, 또는 생수와 쌀을 바꾸는 것은 사장이 할 일이지 장관이 매달릴 일은 아니다. 창의력과 상상력을 운운할 문제도 아니다. 그런 걸 하라고 통일부가 존재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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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회 보좌진이 된 아오지 남녀[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아오지. 북한의 웬만한 도시보다 한국에 더 많이 알려진 지명이다. “아오지 탄광에 간다”는 말은 곧 ‘숙청’이란 의미로 읽힌다. 6.25전쟁이 끝난 뒤 수많은 국군포로가 이곳에 끌려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아오지는 행정구역상 한반도 최북단 함경북도 은덕군에 위치해 있다. 은덕군의 원래 명칭은 경흥군이었지만, 1977년 북한은 김일성의 은덕으로 나날이 변모해가는 고장이라는 의미로 행정지역 명을 은덕으로 바꿨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때 가장 많은 아사자(굶어죽은 이)가 발생한 지역 중 한 곳이다. 가만히 앉아 굶어죽을 수는 없다며 탈북한 사람도 많다. 그렇게 한국에 온 수많은 아오지 출신 탈북자들은 북한에서도 가장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았던 정신력으로 남쪽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다. 매일 아침 서울 여의도 국회로 출근하는 사람들 중에 아오지에서 탈북한 두 남녀가 섞여 있다. 김영춘 국회 사무총장의 비서(7급)인 조경일 씨(32)와 지성호 미래통합당 의원의 인턴비서로 일하는 주은주 씨(38)가 주인공이다. 이들을 12일 광화문에서 만나 그동안 걸어온 삶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같은 국회에서 일하지만 둘은 서로를 몰랐다. 이날 처음 만나 같은 고향 출신인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소속 정당이나 이념에 상관없이 금방 어울렸다. 아오지에서 둘의 집은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두 국군포로의 손녀주 씨는 17살 때 중학교를 졸업하고 3년 동안 체신소에서 전화교환수로 일하다 2002년 20세 때 탈북했다. 주 씨의 집안은 아오지의 상징이기도 했다.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형제 다섯 명과 어머니 남형제 다섯 명 모두 아오지 탄광 노동자였습니다.” 주 씨는 국군포로의 손녀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경북 영양 출신의 1936년생 주신호 씨, 외할아버지는 서울 종로 인사동 출신의 1924년생 김경찬 씨였다. 그러나 주 씨는 어렸을 때 두 할아버지가 국군포로 출신인 사실을 몰랐다. 그는 북한군에 자원한 의용군 출신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사실 국군포로들은 모두 북에서 의용군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두 할아버지가 국군포로 출신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죠. 외할아버지는 전쟁 때 포로가 돼 소련까지 끌려가 수감생활을 했고 가끔 이런 저런 추억담을 남겼어요.” 6.25 전쟁 직후 포로 교환이 시작되자 북한군 수용소 관리자가 포로들에게 “남쪽으로 돌아갈 사람은 나오라”고 소리쳤다. 김경찬은 눈치를 보며 서있었지만 용감한 몇몇이 대열 앞에 나섰다. 북한군은 이들을 그 자리에서 모두 총살했다. 더는 남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남은 이들은 북부 탄광들에서 일하는 노동력으로 투입됐다. 김 씨는 인사동의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해방 전에는 유도선수도 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국군 장교 출신이었던 것 같아요. 역시 국군 장교로 참전한 남동생이 남쪽에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북한은 전쟁이 끝나 병사 출신은 온성군 상화탄광 등에 보냈지만 장교 출신은 모두 아오지에 보냈거든요.”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집안은 남쪽 어딘가에 있겠지만 주 씨는 찾지 못했다. “이산가족상봉센터라는 곳을 찾아갔는데 ‘친척을 찾아도 만나길 거부하면 상봉이 불가하다’는 말을 강조하는 바람에 그냥 돌아 나왔어요.”#아오지의 10살 꽃제비조 씨는 아오지의 ‘소년 꽃제비’였다. “1998년에 엄마가 가족을 살리겠다고 먼저 탈북을 했어요. 엄마와 연락이 끊겼던 1998년부터 2000년 사이 저는 시장에서 아버지 몰래 먹을 것을 얻어먹는 꽃제비 생활도 했죠.” 2000년 중국에 갔던 엄마가 돌아왔다. 그리고 아들을 데리고 다시 탈북했다. 조 씨를 데리고 간 곳은 중국 옌벤(延邊) 조선족자치주 옌지(延邊) 시였다. 엄마는 그를 교회에 맡기고 위험한 국경 지역을 떠나 돈을 벌려 다른 곳에 갔다. 교회에는 부모를 따라 탈북한 10대 청소년이 3명 더 있었다. 교회의 도움으로 이들은 학교도 다녔다. 그러나 이 생활은 2년 뒤에 끝났다. 누군가의 신고로 체포돼 북송됐다. 그때가 14세였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며칠 동안 보위부에 갇혀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2년 동안 북에서 살았는데, 엄마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그 사이 엄마는 한국에 도착해 있었다. “아버지가 북에서 둘이 같이 살자며 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엄마가 말했어요. 여기 오면 대학까지 공부를 시켜준다고. 저는 정말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아오지에 있으면 대학은 꿈도 못꾸거든요.” 생활 형편 때문에 조 씨는 인민학교(초등학교)를 2년 밖에 다니지 못했다. 북송된 뒤 중학교에 입학해 2년 더 다녔지만 기초가 보족해 따라가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찾아 집을 떠났다.#아오지의 추억주 씨가 기억하는 아오지는 ‘검은색, 암모니아 냄새, 시신들’이었다. 기압이 낮은 날 아오지는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매캐한 석탄 연기로 가득 찼다. 집집마다 연소가 잘 안되는 석탄을 땔감으로 사용한 탓이었다. “하얀 옷을 입을 수가 없었어요. 샌들을 신고 나가면 발이 금방 새까매져요. 석탄을 원료로 질안 비료를 생산하는 ‘7.7연합기업소’가 옆에 있었는데 거기서 암모니아 냄새가 지독하게 풍겼죠.” 고난의 행군 시기 아오지에선 굶어죽은 시체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1997, 98년에 (아사자가) 제일 심했어요. 2000년까지 아오지에서 제일 큰 오봉시장에 가면 꽃제비 시신을 심심치 않게 봤는데 그나마 제가 탈북하기 전에는 많이 나아졌죠.” 그 당시 아오지에선 석탄을 캐내지 못했다. 모두가 굶주려 일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탄광마을에서 폐타이어를 땠다. 새까만 찌꺼기가 하늘에 흩날렸다. 당시 북한은 쓰레기 처리를 해주는 조건으로 외국에서 돈을 받고 폐타이어와 플라스틱 등을 대량으로 들여와 아오지 등에 버렸다. 조 씨가 덧붙였다. “저는 시신을 본 기억이 없어요. 꽃제비 때 시장에 가면 누워있는 사람들을 봤죠. 그때는 10살~12살 때라 철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저 사람들은 자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죽은 사람들일 수도 있겠네요.” 조 씨는 북송된 뒤였던 2002년부터 2004년 사이가 아오지에선 제일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한다. “아오지 하면 그때 친구들과 강가에서 고기를 잡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모래무지, 세치네(민물고기의 함북 방언), 민물조개 등을 잡아 어죽을 만들어 먹었죠.”#아오지의 탈북 정신 주 씨는 20세 때 탈북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 나진 쪽으로 100리가 넘는 길을 식량 배낭을 메고 걸어가 장사를 다녔다. 가끔 길에서 장사하려 나오는 중국 화물차를 얻어 타기도 했다. 당시엔 외국인과 접촉하면 보위부에 끌려가 구타를 당하고 돈도 다 빼앗길 때였다. 주 씨도 한번은 체포돼 끌려갔다. 보위부 건물에서 여직원이 주 씨의 옷을 벗기고 속옷까지 꼼꼼히 뒤졌다. 위안화가 나오면 바로 압수해 보위부가 나눠가진다. 그게 당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었다. “어느 날 또 중국에서 나오는 화물차를 얻어 타려고 두만강 세관 옆길 도랑에 숨어있었는데 밤에 보위원이 단속하려 나왔어요. 두만강 강둑까지 정신없이 도망쳤죠. 강둑으로 다시 올라가다 경비대에 체포될까 두려웠어요. 그럼에도 죽을 힘을 다해 평소 동경하던 중국으로 넘어왔죠.” 그렇게 도착한 중국에서 주 씨는 6년을 살았다. “그 당시에는 한국으로 갈 생각이 없었어요. 할아버지들이 어렸을 때부터 ‘우린 죄를 지으면 남보다 몇 배 더 큰 처벌을 받으니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고 계속 이야기한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주 씨는 2008년 중국에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벌어져 앞집과 뒷집에 살던 친한 탈북 여성들이 북송되는 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터넷으로 한국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베이징으로 갔다가 라오스 국경 옆 쿤밍을 거쳐 홀로 라오스 국경을 넘었다. 브로커의 안내도 없이 스스로 인터넷에서 정한 루트였다. “그때 인터넷에서 탈북자들이 국경을 넘는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사람들이 정글을 헤쳐 라오스로 가더군요. 나도 그렇게 가면 되겠다 싶었죠.” 온밤 빽빽한 정글을 헤치며, 보지도 못했던 벌레와 짐승을 쫓으며 국경을 넘었다. 주 씨의 나이 26세 때였다. 그는 라오스에서 경찰에 체포됐지만 북한이 가난한 덕분에 살아났다. “라오스에서 북한 대사관에 연락했어요. 당시 외국인을 체포해 넘겨줄 때마다 라오스 정부는 500달러를 받았어요. 그런데 북한 대사관이 돈이 없어 넘겨받지 못했어요. 제가 라오스 경찰과 흥정을 벌였죠.” 결국 라오스 경찰은 한국 정부에 돈을 요구한 뒤 그를 넘겨줬다. 조 씨도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다. 3개월 동안 중국과 베트남을 거쳐 캄보디아까지 찾아갔다. 그런데 캄보디아에서 한국인 브로커가 돈을 더 주지 않는다고 조 씨 일행을 프놈펜 북한 대사관에 넘겼다. 꼼짝없이 북송될 상황이었다.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저희를 조사하더니 현지 외국인 감옥으로 인계하면서 3일 뒤 오겠다고 했어요. 엄마를 볼 수 없다니 앞이 막막했죠. 다행히 몰래 숨겨온 위안화가 있어 그걸 간수에게 주고 한국에 있는 엄마와 통화를 했어요. 엄마가 외교부와 통일부를 오가며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 하더군요.” 물밑에서 어떤 외교적 노력이 오갔는지, 아니면 아무 노력도 없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3일 뒤에 오겠다고 한 북한 대사관 직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18일째 되던 어느날 새벽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 그들을 인계 받은 뒤 한국행 비행기에 태웠다.#냄새부터 달랐던 한국 주 씨는 인천국제공항에 처음 도착했던 2008년 4월 19일을 이렇게 기억한다. “냄새부터 달랐어요. 아오지에서 중국, 라오스, 태국까지 거쳐 오는 동안 모든 나라의 냄새가 다 달랐어요. 그런데 인천에선 참 좋은 냄새가 났어요. 날씨도 너무 따뜻했죠. 할아버지가 남쪽은 참 따뜻하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기쁨도 순간. 같은 비행기를 탄 탈북민들이 비상통로로 나오는 것을 보던 한 공항 직원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저 사람들(탈북민)은 왜 이렇게 많이 들어오느냐”는 말이 귀에 들렸다. 국가정보원 직원이 급히 다가가 그 직원을 말렸다. 조사기관으로 들어오는 도로 옆에 푸른 나무도 주 씨에겐 인상 깊었다. “잘 사는 나라는 나무도 살쪄 있구나.” 조사를 맡은 여성 조사관이 “대한민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첫 인사를 건넬 때만해도 가슴이 설렜다. 그런데 다음 말부터 바로 반말이었다. “야, 너 몽골에 갔지?” “아니요.” “거짓말할래. 너를 본 사람 있어.” 당시 만 해도 옆방에서 취조를 당하던 탈북 남성이 폭행당해 비명소리가 들려오던 시절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했던 남성은 주 씨의 표현대로라면 발로 ‘짓뭉개졌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인권감독관 제도가 도입되는 등 이런 관행이 거의 사라졌다. 하나원을 나온 주 씨는 회계사 자격증을 따고 한 종친회 사무실에서 일했다. 첫 월급은 90만 원이었다. 전임자는 150만 원을 받았는데 왜 나에겐 적게 주느냐고 하자 “전임자는 전문대를 나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주 씨가 열심히 계산해봤더니 대학 4년을 다니는 동안 벌지 못해도 인생 전체로는 월급이 더 많아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2013년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2019년 성균관대 국정전문대학원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대학을 다니다 결혼을 했고 딸과 아들을 얻었다. 남편은 북한에서 해외로 유학 갔다가 탈북해 한국에 온 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해 현재는 의사로 일하고 있다. 평양 남자와 아오지 여자의 서울살이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일년 만에 초중고 검정고시 합격 대학에 보내준다는 엄마의 말에 설레어 2004년 9월 21일 한국에 도착한 조 씨는 처음부터 열심히 공부했다. 북에서 학교를 다닌 것은 고작 4년뿐이었지만 한국에서 초중고 검정고시 과정을 1년 만에 모두 통과했다. 이후 1년 동안 대안학교에서 입시 공부를 한 뒤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에 07학번으로 입학했다. 그 뒤 열심히 공부만 했다. 대학 재학 중 1년 동안 미국에 연수를 다녀왔고, 2013년 졸업했다. 그해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외교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해 2년 과정을 마친 뒤 2015년 여의도에 있는 정치컨설팅 회사에 취직했다. 조 씨는 “처음부터, 지금도 나는 정치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2017년 말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실 인턴비서로 국회에 처음으로 입성했다. 2019년엔 김영춘 의원실 비서로 옮겨갔다. 올해 21대 총선 때는 부산진구 갑 선거구에 출마한 김 의원을 보좌하기 위해 지난해 연말부터 부산에 내려가 살았다. 그러나 김영춘 의원은 선거에서 패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김 전 의원이 국회 사무총장으로 임명됐다. 조 씨는 다시 그의 비서로 들어가 일하고 있다.#이념을 넘어조 씨가 더불어민주당 의원 비서로 들어간 건 정치적 견해 때문이었다. “저는 배고픈 사람에겐 이념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빵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어린 나이에 꽃제비로 살아가는 아이들이 더는 없어야 하죠. 그러다보니 김정은 체제를 지금 당장 제거할 수 없다면 교류협력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미치고 북한 사람들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정치 활동으로 구현하고 싶었어요. 북에는 아버지와 친구들이 있습니다. 저의 꿈은 당당하게 휴전선을 넘어 좋은 소식을 들고 북에 가는 것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민주주의 시스템의 제대로 된 버전을 북에 전하고 싶습니다.” 주 씨가 미래통합당 지성호 의원실에 들어온 것은 인권 때문이었다. “지 의원과 2012년에 만나 8년 동안 북한 인권문제를 이슈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의원실에서 함께 보조를 맞추고 있고요. 할아버지 때부터 저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수난이 다시는 이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10세에 꽃제비가 돼 아오지 시장을 헤맸던 청년은 ‘배고픈 아이들에겐 이념보단 빵이 먼저’라는 신념으로 남북이 오가는 통로를 하루빨리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어 한다. 국군포로의 가족으로 아오지에서 비참한 삶을 대물림했던 청년은 북에 남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 때문에 북한 인권에 평생을 바치려 하고 있다. 비록 몸을 담은 정당은 다르지만 이들의 가슴에서 뛰고 있는 ‘북에 남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사랑의 피’는 온도가 같았다. “북한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북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더 절실한가.” 아오지에서 대한민국 정치의 심장 국회까지 긴 여정을 헤쳐 온 두 남녀는 앞으로도 이 질문의 해답을 찾아 평생의 여정을 이어갈 것이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 2020-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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