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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팔 수도인 카트만두에서 출발한 버스는 10시간이 넘도록 왕복 2차로의 험준한 계곡 길을 곡예운전했다. 천길 낭떠러지 밑에 흐르는 빙하천 주변에 사고로 굴러 떨어진 트럭의 잔해들이 오싹한 기운을 전했다. 버스가 드디어 인도 국경 인근의 룸비니에 도착하자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험준한 산맥은 간 곳이 없었다. 드넓은 평원에는 노란 유채꽃이 한창이고, 원시림은 몬순기후 특유의 습한 안개로 휩싸여 있었다. 아, 부처님이 최초로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법을 하셨다는 녹야원(鹿野苑)이 바로 이런 풍경이었으리라. 》 13일 대한불교 조계종의 ‘108산사 순례기도회’(회주 선묵혜자 스님)가 카트만두 트리부반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네팔 정부의 환영행사는 대단했다. 기알왕 드룩파 린포체(티베트 불교의 영적 지도자)가 영접을 나왔고, 대통령과 총리, 제헌국회 의장이 모두 한국에서 온 스님들을 초청해 면담을 가졌다. 한국 불교계 인사들이 거국적인 환영을 받은 이유는 네팔에서 최상의 보물로 대접받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왔기 때문이다. 이 사리는 부처님의 열반지인 인도 쿠시나가르에 있는 마하파리니르바나 스투파에서 1910년 출토됐던 것으로, 대열반사의 기아네슈와르 주지가 한국의 108산사 순례기도회에 봉양한 8과 중 일부다. 4년 전 선묵혜자 스님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들고 처음 네팔을 찾았을 때 현지 언론은 “평화의 부처님이 돌아오셨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당시 네팔은 왕정 철폐를 내건 마오이스트 반군과 정부군이 10년간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룸비니는 반군이 남부 테라이 지방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며 저항하던 곳으로 순례가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300명의 108산사 순례기도회원이 룸비니를 찾아온다는 소식에 네팔 정부와 반군 측은 순례길을 터주는 협상을 시작했다. 당시 룸비니에서 열린 사리이운 법회에는 네팔 총리와 여야 정치인이 모두 참석했다. 이를 계기로 평화협상은 계속됐으며 네팔은 내전을 끝내고 제헌의회를 구성했다. 15일 룸비니 사원구역 입구에 조성된 한-네팔 평화공원에서 열린 탄생불 제막식에는 네팔 정부요인이 대거 참석했다. 바부람 바타라이 총리는 “네팔은 내전의 상처를 딛고 결연한 전진을 하려는 시기”라며 “룸비니에서 벌어지는 국제적인 협력은 세상만물에 평화와 자비의 메시지를 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룸비니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 최초의 설법지 녹야원, 입적지 쿠시나가르와 함께 불교의 4대 영지(靈地)에 속한다. 룸비니가 본격 개발된 것은 1967년 우 탄트 유엔 사무총장이 룸비니를 방문한 이후 유엔 산하 ‘룸비니 개발을 위한 국제위원회’를 설치하면서부터다. 룸비니 사원구역 내에는 한국 일본 중국 베트남 인도 미얀마 캄보디아 독일 프랑스 등이 각국의 사찰을 짓고 있다. 룸비니 개발프로젝트는 네팔정부와 경제협력을 하려는 각국의 치열한 외교전이 벌어지는 현장이기도 하다. 특히 108산사 순례기도회가 탄생불을 세운 장소는 유네스코가 개발하는 룸비니 사원구역의 출입구로 순례객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장소다. 원래는 네팔 왕가의 기념비 건립 예정지였으나 왕정 붕괴 후 중국 일본 태국 등 각국이 경제 지원을 약속하며 자국의 기념물을 세우려고 로비전을 펼쳤다. 그러나 기리자 코이랄라 전임 네팔 총리는 “내전으로 아무도 찾지 않던 때에 한국의 108산사 순례기도회가 진신사리를 모셔와 네팔 평화의 불씨를 마련한 것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며 이곳에 한-네팔 평화의공원을 조성하고 진신사리 탄생불을 모셔줄 것을 요청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미국 뉴욕에서 보내온 축하 메시지에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룸비니 동산의 성역화를 위해 한국의 108산사 순례기도회가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진신사리 탄생불을 봉안한 것은 무척 기쁜 일”이라고 평가했다. 룸비니=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알제리계 이민 세대인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의 고향은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도시 마르세유다. 그의 환상적인 드리블은 ‘마르세유 턴’이라고 불렸다. 프랑스 제2의 도시인 마르세유는 이탈리아, 동유럽, 북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은 항구도시이다. 프랑스 최고의 인기드라마인 ‘인생은 아름다워(Plus Belle la Vie)’의 배경도 마르세유다. 9년째 시청률 20%가 넘는 이 장수 드라마에는 조그만 바를 운영하는 주인공 가족과 알제리 이민자 출신 나시르 가족, 스페인 출신 토레스 가족이 등장해 얽히고설킨 애정관계와 인종차별, 동성애 문제 등을 시시콜콜 보여준다. 빈민가, 범죄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마르세유는 이 드라마로 프랑스의 ‘다문화 용광로(melting pot)’를 상징하는 활기찬 도시가 됐다. 각국 선거에서 다문화 정책은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530만 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 ‘완득이’에 출연한 필리핀 이주여성 이자스민 씨(35)가 새누리당 비례대표 영입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다문화 사회를 꽃피우게 하는 데 TV와 영화는 고속도로처럼 막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방송계의 경우 2005년 파리 외곽 지역에서 벌어진 이민자들의 폭동 소요사태 직후 심각한 자성의 질문이 쏟아졌다. 과연 프랑스의 TV 화면은 실제로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제대로 비추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2009년 프랑스의 시청각고등위원회(CSA)가 16개 채널의 출연자들을 분석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톨레랑스(관용)’ 문화를 자랑하는 프랑스 TV에서 비(非)백인 출연자는 열 명 중 한 명에 불과했다. 드라마에서는 그 비율이 8%로 줄었고, 뉴스에서 기자, 전문가로 출연하는 유색인종 비율은 6%로 더욱 낮았다. 그나마 TV 속 흑인이나 아랍인들은 마약 밀매자나 범죄인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직시는 변화의 시작이었다. CSA는 이후 6개월마다 주요 채널프로그램을 분석한 ‘미디어 다양성 감시 보고서’를 내며 방송사들을 압박했다. 이후 각 방송사 내부에 ‘다양성위원회’가 설치됐고, 최대 민영방송인 TF1의 저녁 8시 메인뉴스를 흑인 남성 앵커가 맡는 등 수많은 채널에서 유색인종 스타 진행자가 탄생했다. 반면 국내 TV에 비친 외국인들의 모습은 어떤가. 수적으로도 크게 부족할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남성들은 임금을 체불당한 불쌍한 이주 노동자, 여성들은 한국 농촌으로 시집 온 며느리와 같은 이미지로만 고착된다. 이자스민 씨는 “첫 영화 ‘의형제’의 모니터 시사회에서 이주여성을 커다란 스크린에서 보는 게 굉장히 부담스럽다는 지적이 뜻밖이었다”며 “영화에는 외계인과 괴물도 나오는데, 외국인은 그보다 더 부담스러운 존재란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한류의 일방통행식 전파는 곳곳에서 ‘반(反)한류’ ‘혐(嫌)한류’라는 역풍을 낳고 있다. 글로벌 한류를 위해선 우리가 먼저 다문화를 받아들이고, 대중문화의 창의성과 혁신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은 지난해 파리에서 “이제 한류는 프로듀서만 한국인일 뿐 유럽의 작곡가, 중국이나 동남아 출신 가수, 미국의 유통회사와 손잡고 세계로 진출하는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올해 초 시각장애인 앵커가 KBS뉴스 진행을 맡아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외국인 출신 앵커가 뉴스를 진행하는 모습도 하루빨리 보고 싶다.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

박정희기념관이 입안된 지 13년 만에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서 문을 열었다. 총면적 5290m²의 3층짜리 건물이지만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새마을운동, 중화학공업 육성 등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밑바탕이 됐던 역사적 성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근대화를 상징하는 기념관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박 전 대통령과 ‘숙적 관계’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제안으로 건립이 이뤄지게 된 것도 의미가 작지 않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에게 박정희기념관은 긍정적인 유산에 해당한다. 기념관은 부친이 남긴 빛과 그림자 가운데 아무래도 빛을 더 많이 비출 것이다. 이에 비해 박정희의 정(正) 자와 어머니 육영수의 수(修) 자를 따 이름 지은 정수장학회는 부정적 유산일 수 있다. 부산지역 기업인이던 고(故) 김지태 씨가 만든 부일장학회가 모태였다. 김 씨는 박 전 대통령이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일 때부터 악연이 있었다. 처음엔 5·16장학회였다가 1982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부산일보 지분 100%와 문화방송 지분 30% 등을 소유하고 있다. ▷정수장학회 문제가 최근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작년 11월 ‘정수장학회의 사회 환원과 사장 선출권’을 요구하는 부산일보 노조와 사측의 대립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큰 선거 때가 되면 박 위원장을 괴롭히는 단골 소재다. 1961년 5·16 당시 부정축재 등으로 구속된 김 씨의 부일장학회 포기가 ‘자진 헌납’이냐, 국가에 의한 ‘강탈’이냐가 논란의 핵심이다. 정수장학회가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이사장을 지낸 박 위원장의 영향력 아래에 있느냐도 관심거리다. ▷박 위원장은 “이사장직을 그만둔 이후 나와 장학회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야권은 박 위원장을 겨냥해 ‘장물(贓物)’의 사회 환원을 촉구한다. 법적으론 박 위원장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1978년 박 위원장이 청와대 ‘큰 영애’이던 시절 개인 비서관이었던 최필립 이사장을 비롯해 이사진 5명의 면면을 보면 박 위원장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볼 소지가 다분하다. 긍정적인 유산의 계승도 중요하지만 부정적인 유산을 잘 극복하는 것도 상속자의 역량이다. 박 위원장이 왜 깔끔하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지 답답하다.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 중 하나인 코스타 상의 2011년 수상작은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순수(Pure)’에 돌아갔다. 40년 전통의 코스타 상은 소설, 전기, 시, 청소년 소설, 데뷔 소설의 다섯 개 부문에서 각각 후보작을 뽑은 뒤 한 작품을 선정해 상을 수여한다. 소설은 프랑스혁명 직전인 1785년,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기술자 장 밥티스트가 프랑스 국왕의 부름을 받고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하며 시작된다. 혁명 전 베르사유 궁전은 폭풍 전야의 고요함처럼 겉으로는 평온한 모습이다. 장 밥티스트는 국왕으로부터 파리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공동묘지인 레 지노상트를 허물고 묘지의 시체들을 없애 버리라는 명령을 받는다. 아직 앳되고 순진한 그는 레 지노상트에 도착한 후 참담한 광경에 충격을 받는다. 수많은 시체들이 묘지 안에 다 들어가지 못해 묘지 밖에 나뒹굴고, 악취가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끔찍한 광경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하고 책임감 있는 장 밥티스트는 묵묵히 작업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곧이어 장 밥티스트가 묵는 하숙집 주인 부부, 그 부부의 딸, 묘지 공사를 위해 고용한 네덜란드인 광원들 등 그의 주변 인물들은 살인, 강간, 탐욕, 열정, 자살 등 책의 제목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을 펼쳐 나가기 시작한다. 장 밥티스트는 점점 자신의 작업, 평소 가지고 있던 신념과 생각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을 깨닫는다. 죽음과 삶에 대한 경계가 무너지고, 공포와 경외의 차이가 모호해진다. 주인공인 장 밥티스트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프랑스 파리에는 실제로 레 지노상트라는 공동묘지가 존재했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 국왕이 그랬듯 실제로 이 묘지는 왕의 지시에 따라 해체돼 시체들은 파리 외곽의 지하묘지 카타콤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일까. 코스타 상 심사위원장이었던 조르디 그레이그는 이 소설의 강점이 ‘그 시대의 생생한 묘사’에 있다며 칭찬했다. 포일스 서점의 웹 편집자이자 2010년 코스타 상의 심사위원이기도 했던 조나단 루핀은 “짓밟혀 성난 민심과 이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지배 계층의 이야기는 비단 프랑스혁명 시대의 것만은 아니다. 이 소설이 묘사하고 있는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며 오랜만에 문학 작품이 코스타 상을 수상한 데 대해 기대감을 표시했다.런던=안주현 통신원}

본래 유니버스(우주)는 ‘하나’의 ‘천구(天球)’를 뜻한다. 하늘의 모든 별이 둥근 천구에 붙어서 회전한다고 믿었던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에게 우주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세상 전체’였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은 우주에 들어 있어야 하고, 우주에 없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가 없다고 믿었다. 그런 우주가 하나뿐인 것은 하늘에 태양이 하나뿐인 것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현대 이론물리학자와 우주론학자들이 역설적이고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우주가 하나 이상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저 한두 개가 더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많이 존재한다. 우리 우주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우주들이 끊임없이 새로 등장하고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런 주장이 다분히 사변적인 주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학적으로 아무런 모순이 없는, 과학적이고 필연적인 결론이 그렇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을 확률로 설명하는 양자역학은 뉴턴적 확실성에 익숙한 우리에게 난처한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이 바로 다중세계 해석이다. ‘이곳’에서 관찰되는 입자가 오즈의 마법사가 데려다준 다른 우주에서는 ‘저곳’에서 관찰된다. 서로 다른 우주에서 모든 일이 동시에 서로 다르게 진행되는 ‘양자적’ 다중우주는 공상 소설의 훌륭한 소재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단순히 우주가 공간적으로 무한히 광대하다는 사실 자체가 수학적으로 다중우주를 요구하기도 한다. 아득하게 먼 곳에 존재하는 평행우주에 내 판박이가 나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 광대한 세상은 그런 평행우주들을 ‘누벼 이은’ 다중우주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뿐이 아니다. 빅뱅(대폭발)에서 시작된 우주가 빠르게 팽창한다는 우주론에서도 ‘인플레이션’ 다중우주가 등장한다. 영원히 지속되는 우주적 인플레이션에서 무수히 많은 거품 우주가 탄생하고, 우리 우주도 그런 거품 중 하나다. 자연의 모든 법칙을 하나로 통일하겠다는 끈이론은 다중우주의 보고(寶庫)다. 우리 우주는 더 높은 차원의 공간을 떠다니는 수많은 3차원 ‘브레인’ 다중우주 중 하나다. 그런 브레인 우주들이 주기적으로 충돌하는 과정에서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따라 무수히 많은 ‘주기적’ 다중우주가 등장할 수도 있다. 끈이론이 인플레이션 우주론을 만나면 감춰진 차원에서 다양한 ‘경관’ 다중우주가 도출된다. 다중우주가 고차원의 경계면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홀로그램’처럼 투영된 결과일 수도 있다. 우리의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능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다중우주도 있다. 초고성능 슈퍼컴퓨터로 만들어낼 수 있는 ‘시뮬레이션’ 다중우주도 있고, 수학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궁극적’ 다중우주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다양한 다중우주 이론들이 실험적으로 확실하게 검증된 것은 아니다. 다중우주의 존재를 밝혀내는 것이 ‘다윈 혁명 이후 과학사의 최대 난제’라는 뒤표지의 주장은 아직은 성급한 것이다. 과연 다중우주에 어떤 물리법칙이 적용되고, 우리가 인식하는 실재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사실은 우리가 다중우주의 모든 신비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인간 중심적 사고에 젖어 있던 우리에게 현대 물리학이 제시하는 다중우주가 마냥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결국 우리는 수없이 많은 우주들 중 어느 평범한 우주에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별들 중 어느 평범한 행성에 살게 된 ‘한 점’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과학의 끝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그런 과학을 생각해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

그 제목 한번 도발적이다. “여자의 물건이라면 바로 여러 가지가 떠오른다. 목걸이, 반지, 가방, 구두, 화장품…. 그래서 여자들의 삶이 흥미로운 거다. 그런데 남자의 물건이라면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다.” 저자가 표현하는 안타까움이다. “대부분 잠시 당황하다가, 은밀한 곳의 ‘그 물건’을 떠올린다. 너무 서글픈 일 아닌가? 여자의 물건은 그토록 화려하고 다양한데, 남자의 물건이라면 기껏 ‘거무튀튀한 그것’만 생각난다니.”대한민국 남자들은 외롭다. 한국 남자들의 존재 불안은 할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모여서 하는 이야기라고는 정치인 욕하기가 전부다.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빨리 가는 걸까? 누구에게나 학창시절의 기억은 뚜렷하다. 그 시절엔 모든 게 새로웠기 때문이다. 저자는 “‘미친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기억할 일을 자꾸 만들면 된다”고 말한다. 그 방법으로 저자는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어주는 ‘물건’에 대해 이야기해볼 것을 제안한다. 물건을 매개로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고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 책에는 남자 13명의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자기만의 스토리가 담긴 특별한 물건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3m 길이 이어령의 책상… 지식에 대한 끝없는 욕망이어령의 책상은 길이가 3m가 넘는다. 가장 큰 책상을 갖고 싶은 욕구는 지식에 대한 그의 근원적 욕망에서 나온다. 사주에 ‘장수가 될 운명’이었다는 그에게 책상은 사열대다. 그는 이곳에서 수천수만의 언어의 군사를 거느리고 호령한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그는 80에 가까운 지금도 혼자 논다. 그에게 책상은 소통 부재의 외로움을 피해 위안을 얻는 곳이다.■ 아버지가 남기신 신영복의 벼루… 먹을 갈며 세월을 배운다20년간 감옥에서 무기수로 살았던 신영복에게 편지 쓰는 일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는 어릴 적 한학자였던 할아버지로부터 붓글씨를 배웠다. 그에게 아버지가 남겨주신 벼루는 ‘세계(世繼)’, 즉 ‘세대를 잇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신영복은 먹을 갈고 글씨를 쓰며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냈고, 목적이 아닌 ‘과정을 사는 삶’을 배웠다.■ ‘담백’ 문재인의 ‘듬직’ 바둑판… 복기하며 성찰한다담백한 문재인은 그의 바둑판처럼 묵직하다. 그의 바둑판은 총각 때부터 가지고 있던 물건이다. 대통령비서실장 임기가 끝나자 그는 경남 양산의 시골로 내려가 바둑이나 실컷 두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바둑은 ‘복기’를 통해 자신의 실수를 정확히 알고 성찰하는 놀이다. 정치인 문재인은 참여정부의 공과를 ‘복기’ 중이라고 말한다.■ 차범근의 아침용 삶은 계란 받침대… 행복은 식탁이다‘계란받침대’는 독일 아침식사에 필수로 나오는 삶은 계란을 올려놓는 받침대다. 차범근에게 행복이란 가족과 함께 했던 아침식사였다. ‘계란받침대’는 바로 그 행복의 증거물이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오니 가족들이 모두 바빠져 그 소중한 아침식사가 사라졌다. 도대체 뭐가 그리 바쁜 일이 있어 한국인들은 가족과의 아침식사를 희생하며 살아야 하는지, 차범근은 몹시 아쉬워한다.■ 착한 그림 그리는 안성기의 스케치북… 점 하나에 마음 쏟아안성기는 시간이 날 때면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린다. 아크릴 물감으로 점을 하나하나 찍어가며 집요하게 그림을 그린다. 자화상을 비롯해 아들, 가족, 자연, 정물 등 아주 ‘착한’ 주제들을 그린다. 한 자선행사에서 그의 그림이 300만 원에 팔린 적도 있다. 몰입 과잉의 한국사회에서 안성기의 존재감은 어떤 상황에서든 흥분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거리 두기에 있다.■ 네모나게 각진 조영남의 안경… 평범한 얼굴 특별하게가수이자 화가로 경계인의 삶을 넘나드는 조영남은 늘 크고 네모나게 각진 안경만 고집한다. 그의 방에는 똑같은 스타일의 안경만 수십 개다. 그의 안경은 특별하지 않은 그의 외모를 많이 가려준다. 숱한 우여곡절에도 그가 대중 연예인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큰 안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면 세상에 두려울 것 없다’는 조영남 특유의 비현실적 낙관주의 덕택이다.■ 초등학교부터 시작된 김문수의 수첩… 현대사 깨알같이 담겨책상 가득 꺼내놓은 김문수의 수첩에는 초등학교 일기장부터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에 대한 고민까지 깨알 같은 기록이 담겨 있다. 중년의 우울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 김문수의 당당함은 그의 수첩에서 나온다. 그의 수첩은 주머니 안의 송곳처럼 불편하다.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노동운동가에서 도지사에 이르는 드라마틱한 개인사에 대해서도 그토록 당당하다.■ 목수가 꿈인 박범신의 목각 수납통… 슬픔까지 담아놓는다박범신은 다시 태어나면 목수를 하고 싶어 한다. 실제 베스트셀러 작가로 ‘날리던’ 1980년대, 그는 목공예 작품전에 작품을 내기도 했다. 당시 만들었던 목각 수납통은 내면의 상처와 슬픔까지 깎아냈던, 박범신만의 물건이었다. 한때 ‘대중주의’ 작가라는 말이 억울해 절필선언까지 했던 그는 이제 고향 논산에 내려가 손녀에게 나무 의자를 만들어주는 꿈을 꾸고 있다.■ 갈아마시는 김갑수의 커피 그라인더… ‘시인됨’을 즐기노라저자 김정운은 “나이가 들수록 시인, 사진작가 같은 직함이 부러워진다”고 말한다. 정년퇴직 없이 평생 가기 때문이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인 것처럼 한번 시인은 평생 시인이다. 20년 전 시집을 냈던 ‘시인’ 김갑수는 서울 마포의 작업실에서 음악을 듣고, 커피를 손수 갈아 마시는 생활에 푹 빠져 있다. 그는 “나이 들어 돈이나 밥이 아닌 다른 것에 함몰되는 것은 참 근사한 것”이라고 말한다. }

“아빠, 저 나무가 무슨 나무예요?” 2004년 봄 어느 주말.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아들 허예섭 군(17)이 아빠 허두영 씨(51·과학동아 편집인)에게 아파트 현관 앞에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물었다. “엄마한테 물어봐. 인터넷을 찾아보든가.” 무심하게 대답하던 아버지는 문득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색이 10년 넘게 과학기자로 지내면서 일반 대중에게 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려 애써왔는데, 정작 아들과 함께 나무 이름 하나 공부할 시간이 없다니….’ 다음 날부터 허 씨 부자는 집 주변에 무심하게 서 있는 나무들의 정체를 밝혀나가기 시작했다. 느티나무는 출퇴근길을 가로등처럼 지켜보고 있었고, 명자나무는 딸내미가 놀던 놀이터에 예쁘게 자리하고 있었다. 전설의 계수나무는 달이 아니라 화단에 우뚝 서 있고, 동화 속 개암나무는 뒷산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마가목은 하루에도 몇 번씩 봤지만 무슨 나무인지 전혀 모르다가 아들의 질문으로 비로소 그 존재를 알게 됐다. “닥터 지바고가 흰 눈이 쌓인 산 속에 갇혀 있을 때 마가목의 빨간 열매를 보며 연인 라라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이후 볼 때마다 얼마나 아름다운 나무인지 매번 감탄했죠.” 허 씨 부자는 8년간 나무를 관찰한 기록을 노트에 꼼꼼히 담았다. 아들은 나뭇잎을 그림으로 그리고 학명, 분류, 꽃말, 유래, 용도, 전설 등을 조사해 썼다. 아버지는 시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문학적 나무이야기를 곁들였다. 이 노트는 최근 ‘사랑하면 보이는 나무’(궁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됐다. ‘사랑하면…’은 자작나무부터 호랑가시나무까지 52종의 나무를 소개하고 있다. 1월 첫 주부터 12월 마지막 주까지 매주 한 그루씩 나무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때에 맞춰 배열했다. 자작나무는 4월에 꽃을 피우지만 한겨울 눈 속에 서 있는 모습이 가장 멋지고, 오동나무는 6월에 꽃을 달지만 커다란 이파리를 떨어뜨리는 오동추(梧桐秋)의 늦가을에 관찰해야 오동동(梧桐動)의 호젓한 운치를 느낄 수 있다는 식이다. 책을 읽다보면 나무에 대한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토끼와 거북’에 등장하는 토끼는 왜 하필 떡갈나무 밑에서 낮잠을 잤을까? 제페토 할아버지는 왜 소나무로 피노키오를 만들었을까? 단군신화에서 환웅은 왜 신단수(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했을까? 허 씨는 “아들과 둘이서 낮이면 나무를 관찰하고, 밤이면 글을 쓰느라 끙끙대던 지난 8년 동안 아내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도 한가롭게(?) 책을 쓰고 있는 아들에 대한 불안과 초조를 애써 감추어줬고, 딸은 주말에도 같이 놀아주지 않는 아빠와 오빠에 대한 질투를 잘 참아줬다”고 회상했다. 허 씨는 이제 딸과 함께 ‘사랑하면 보이는 풀(꽃)’에 대해 공부하고 책을 쓰는 작업을 시작할 계획이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영화 ‘부러진 화살’의 소재가 된 석궁테러사건의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55·사진)가 9일 ‘판사 니들이 뭔데?’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을 내기 위해 ‘석궁김명호출판사’라는 1인 출판사도 등록했다. 책의 표지에는 한 손에는 소법전, 다른 손에는 석궁을 들고 있는 김 교수가 그려져 있다. 책에는 성균관대 재임용 탈락 관련 소송부터 석궁테러사건 이후 재판정에서의 신문기록, 증거사진 등을 원문 그대로 복사해 담았다. 책에서 그는 판사들에 대해 “결과를 미리 정해놓고는 적재적소에서 법을 위반하고 터진 주둥이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여대는 판결로 서민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 대법원장 등 판검사들을 ‘3류 문서위조 사기꾼’ ‘찌질한 ○○○가 사표를 쓴 덕분에 내게도 이런 기회가 오다’ ‘춘천교도소 비리에 기생하는 ○○○’ 등 실명으로 비판했다. 김 전 교수의 원고를 보고 선뜻 책을 내겠다는 출판사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교수의 행위가 ‘석궁시위’였으며, 오히려 판사들이 ‘재판테러’를 가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데다 직설적 표현을 써가며 판검사들을 실명으로 공격하고 있어 명예훼손 시비에 휘말릴 우려가 있기 때문. 책의 유통을 돕고 있는 이흥식 씨는 “김 교수가 자신이 모든 걸 책임진다는 각오로 1인 출판사를 차려 책을 냈다”며 “석궁은 김 교수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단어로, 김 교수의 호(號)는 아니다”라고 말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정조 5년(1781년) 겨울, 정조는 밤늦게 일하는 규장각, 승정원, 홍문관의 사관을 불러 매각(梅閣)에서 난로회(煖爐會)를 열었다. 난로회는 요즘처럼 추운 겨울날 화로 안에 숯을 피워 석쇠를 올려놓고 기름장, 달걀, 파, 마늘, 산초가루로 양념한 쇠고기를 구워 둘러앉아 먹는 것을 말한다. 정조는 ‘매(梅)’자를 시제로 정해 신하들에게 칠언절구를 지어 올리게 했다. 이날 회식자리에 참석한 정약용은 시에서 “임금 하사 진수성찬… 청빈한 선비 입이 황홀하여 놀랄 따름”이라고 읊었다. 조선은 성리학의 명분론이 밥상까지 지배한 시대였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본분에 맞게 살도록 왕은 12첩 반상, 공경대부는 9첩 반상, 양반은 7첩 반상, 중인 이하는 5첩·3첩 반상을 차려먹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비집고 맛을 탐한 이들이 있었다. 저자는 선비들이 남긴 수많은 문헌과 시 속에서 미식과 탐식의 기록을 찾았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한 후 밥상의 가장 큰 변화는 ‘육식열풍’이었다. 살생을 죄악시한 불교를 숭상한 고려와 달리 조선의 유교식 제례에는 쇠고기가 올랐다. 조선의 선비들 사이에선 소염통구이인 ‘우심적(牛心炙)’이 최고 인기였다. 우심적은 중국 고사에서 진나라 주의와 왕희지, 송태조와 보의 우정을 상징하는 음식이어서 선비들의 지적 허영심을 자극하는 최고의 술안주였다. 진나라 장한이 고향의 순챗국과 농어회를 먹으려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에 나오는 순채 나물도 사대부들의 시에 즐겨 등장한 식재료였다. 양민들에게 퍼진 육식열풍에 소 돌림병까지 겹쳐 농사에 쓸 소의 씨가 마를 것을 우려한 왕실은 ‘우금령(牛禁令)’을 내렸다. 세종은 소 도살 현장을 신고한 사람에게 포상하는, 오늘날이라면 ‘소파라치’라 할 만한 제도를 시행했다. 그러나 정작 세종 본인은 육선(肉饍·고기반찬)이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할 정도여서 이 정책은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사대부들이 좋아했던 음식에는 두부도 있다. 왕실의 능묘를 보살피는 절에서 만든 두부는 중국 황실에서도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대부들은 연포탕(두부를 꼬챙이에 꿰어 닭고기를 섞어 끓인 국)을 먹기 위해 절에 몰려가 횡포를 부렸다고 한다. 중국을 다녀온 사신들이 소개한 열구자탕(신선로), 일본에서 전래된 ‘승기악탕’(스키야키) 등 외국 음식도 유행했다. 중종의 사돈으로 권세를 누린 김안로는 개고기 탐식가였는데 맛있는 개고기 요리를 바친 자들을 요직에 등용해 구설에 올랐다. 인조반정으로 공신에 오른 김자점은 갓 부화한 병아리를 즐겼다. 이들의 탐식은 권력을 잃고 나서는 정적으로부터 ‘패륜’으로 공격당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은 다양한 음식을 탐하고 이를 글로 적은 ‘음식 블로거’의 원조 격이었다. 조선의 식객을 꿈꾼 그는 이조판서를 상대로 진미가 많이 나는 전북 남원이나 가림(충남 공주 인근) 수령으로 보내달라고 관직 로비를 벌였다. 그는 귀양을 가면서도 ‘새우와 게가 좋은’ 전북 함열로 보내달라고 로비를 벌였는데, 정작 가보니 먹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곳에서 예전에 먹었던 산해진미의 맛의 향수를 되살려 지은 책이 ‘도문대작’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평생 근검한 식습관을 실천했다. 유배생활 내내 채소를 몸소 가꾸었고, 두 아들에게 “음식이란 목숨만 이어 가면 되는 것. 아무리 맛있는 고기나 생선이라도 입안으로 들어가면 이미 더러운 물건이 되어 버린다”라며 진수성찬의 가치를 부정했다. 그런 다산도 귀양살이의 궁핍한 몸을 보신하고자 개고기를 먹었다. 다산은 흑산도로 유배 간 형 약전에게 쓴 편지에서 덫을 놓아 산 개 잡는 법과 요리법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한식은 중식이나 일식에 비해 단순하고 소박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사치를 혐오하고, 경제가 좋지 못했던 조선시대에 미식을 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느냐는 선입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남긴 고서를 읽어 보면 그것은 굉장히 좁은 편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우리는 현재 서양식 옷을 입고, 서양식 집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현재의 삶과 매우 다른 생활을 했지요. 조선의 옛집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1일부터 동아일보 오피니언 면에 ‘함성호의 옛집 읽기’를 연재하고 있는 함성호 시인(49). 그는 수많은 집과 사무실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이지만 건축평론가와 만화비평가로 활동하며 책도 여러 권 냈다. 때때로 설치작품을 만들어 현대미술 전시회도 열고, 공연기획자로 나서기도 한다. 이것저것 오지랖 넓게 들쑤시고 다닌다는 뜻에서 명함에는 ‘오지래퍼’라는 직함을 달았다. 그는 2000년 이후 전통 건축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전국을 답사했다. 돌아다니다 보니 옛집 중에는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 우암 송시열, 남명 조식 등 성리학자들이 직접 지은 집들이 많았다. 유서 깊은 반가(班家)에는 집 부근의 산세와 산맥을 그려둔 ‘산경표(山經表)’가 족자로 걸려 있는 점도 놀라웠다. “우리의 옛집은 서양건축처럼 하나의 동떨어진 오브제가 아닙니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산맥, 대지, 땅, 물과 어우러짐까지 고려한 엄청난 스케일의 건축입니다. 옛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심포, 다포’와 같은 양식보다는 그 너머에 담겨 있는 옛사람들의 정신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함 시인은 조선시대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이 우리 옛집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기 위해 2003년부터 홍익대 앞 건축사무소에 ‘맹꽁이 서당’을 차리고 3년간 동료 건축가들과 한문을 공부했다. 그는 “퇴계 이황은 자신의 철학적 깨달음을 담은 그림 ‘성학십도’를 현실세계에 구현하기 위해 도산서원을 지었다”며 “도산서원은 가장 완숙한 철학자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동양철학의 정원”이라고 평가했다. “조선의 반가는 방이 굉장히 작습니다. 그러나 방 안에 들어서면 전혀 좁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그 이유는 외부의 풍경을 방 안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입니다.” 강원 속초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 건축과를 졸업할 때까지 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1989년 고 추송웅 씨의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을 보고 “나도 희곡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휩싸였다. 습작을 한 편 써서 고 김규동 시인에게 보냈는데, 선생이 “뛰어난 이야기 시(詩)”라는 회신을 보내왔다. 1990년 문학과사회에 3편의 시로 등단했고, 이후 ‘56억7천만년의 고독’ ‘성 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등의 시집을 내면서 중견시인이 됐다. 그는 최근 경기 고양시 일산신도시에 아내를 위한 집을 직접 지었다. 옥탑방에서 인근 산봉우리에 걸린 석양을 바라볼 수 있는 집이다. 요즘엔 집 안에서 건축설계도 하고, 시도 쓰고, 만화도 보고, 그림도 그린다. 함 시인은 동아일보 연재 칼럼을 통해 옛집의 뒤뜰에 대나무 숲을 조성한 이유, 처마의 길이, 풍경 소리, 담벼락 등 옛집 곳곳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살필 예정이다. “문화재 관리하는 분들은 제발 문을 꼭꼭 잠가두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 건축은 서양 건물처럼 바깥에서 읽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꼭 마루에 올라가 보고, 방 안에 앉아 차를 마시며 바깥 풍경을 바라봐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책의 부제는 ‘왜 사람들은 더 이상 주류를 좋아하지 않는가’다. 21세기 들어 한국 사회 곳곳에서도 주류 문화가 급격히 균열하고 있다. 발아래 거대한 지반 곳곳에서 틈새가 벌어지고 있다. 저자는 “중심부에서 가장자리로 에너지가 이동하는 시기”라고 말한다. 니치(niche)는 틈새를 의미한다. 틈새시장을 뜻하는 ‘니치마켓’은 예전부터 경영학자들이 써오던 용어다. 주변 시장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추구한다는, 주변적이고 소극적인 개념이었다. 그러나 중심부 곳곳에서 쩍쩍 틈새가 벌어지고 있는 21세기엔 “니치란 더 이상 제3의 길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의 주류이며 대세”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이러한 변화의 가장 큰 원인으로 중간층이 소멸하고 사회가 ‘획일적인 대중’에서 ‘잡식성 대중’으로 변모한 것을 지목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과테말라 커피와 향이 풍부한 자바산 커피, 감미로운 케냐 블렌드의 차이를 구분하길 간절히 열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1969년 창업해 ‘모든 세대를 위하여: 갭’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승승장구했던 의류 브랜드 갭은 2000년대 들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더 이상 모두의 마음에 들 수 있는 브랜드, 평균적인 고객 따위는 없었다. 이처럼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공룡 브랜드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그 대신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 ‘다르게 생각하라’는 모토를 내건 애플, ‘피카소, 헤밍웨이가 사용했던 전설의 수첩’을 표방한 몰스킨과 같은 회사들은 종교집단처럼 열광적인 추종자를 양산해내고 있다. 영화산업에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개런티를 준 스타배우를 캐스팅한 ‘블록버스터’ 여러 편이 참담한 실패를 맛보고 있다. 기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잡식성’ 대중에게 블록버스터는 엄청난 비용과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전략이 돼버렸다. 그 대신 요즘은 소수를 대상으로 하지만 열광적인 숭배자를 낳을 수 있는 ‘니치버스터’ 전략이 세계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정치계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간 지지층보다는 부동층을 쓸어 담기 위해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중간으로 수렴했던 정당들은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대중을 만나지 않았다. 그는 소수의 열렬한 지지자 집단끼리 정보를 공유하고 입소문을 퍼뜨리는 일종의 하위문화를 구축해 엄청난 조직과 자금을 갖춘 경쟁자를 쓰러뜨렸다. 이 책의 장점은 주류가 사라진 ‘니치시대’의 어두운 면도 지적한다는 점이다. 자신만의 관심 분야에 열성적인 신봉자 집단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각각의 집단이 자신만의 구역에 보호막을 치고 남의 말 따위는 귀담아듣지 않게 된다는 것. 저자는 “스스로를 남다른 존재로 정의하겠다는 결의가 지나친 나머지, 개인이나 집단들이 각자 선택한 갑갑하고 비좁은 닭장 속에 갇힌 신세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가 2007년 5월 취임 후 부자들에게 안긴 선물 명세를 낱낱이 기록했다. 저자는 25년 넘게 프랑스 상류층의 생활상과 집단심리를 연구해온 부부 사회학자. 책에 따르면 사르코지는 부자 친구들에게 최고 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나눠주고 조세 상한제로 세금 부담을 덜어주었다. 비어가는 정부 금고는 공공부문 지출을 축소해 서민들의 삶의 기반을 쪼개는 형식으로 해결했다. 두 저자는 “극소수의 백만장자는 사르코지가 아니더라도 대타를 찾아 그들의 대변인으로 앉힐 것”이라고 경고한다.박민주 인턴기자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공자가 옥(玉)이라면, 맹자는 얼음에 비유합니다. 말과 행동이 늘 따뜻하고 온후했던 공자와 달리 맹자의 글은 번쩍번쩍하고, 날카로운 칼처럼 폐부를 찌르는 통렬함이 있습니다.” 공자와 맹자의 차이는 소위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차이다. 맹자의 시대는 ‘싸우는 국가(戰國)’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중원을 제패하기 위한 전쟁이 총력전으로 변해 한층 격렬했다. 시대는 더욱 각박해졌고,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맹자의 날카로운 지혜는 이런 각박한 현실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다. 저자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1978, 1980, 1988년 세 차례 구속됐다.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한 직후인 1990년대 초 인문학서당인 ‘온고재(溫故齋)’를 열고 동양고전 연구와 강의에 몰두해왔다. 이 책은 그가 2000년 ‘논어읽기’이후 12년 만에 펴낸 책이다. 그는 “전 세계가 자본주의의 탐욕으로 자기파탄을 드러내는 21세기에, 맹자를 다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논어의 첫 구절은 공부에 관한 이야기(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인 데 비해, 맹자는 인의(仁義)로 시작한다. ‘맹자’의 첫머리에서 양혜왕이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하실 일이 있겠군요”라고 묻자, 맹자는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단지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왕이 이를 좇으면 신하도, 백성도 모두 각자의 이만 좇을 뿐이어서 결국 그 사회는 무너지고 만다는 뜻이다. 저자는 “맹자가 ‘개인의 이기심이 결국 사회 전체의 선이 된다’는 애덤 스미스 이래 자본주의 옹호론자들에 대해 뭐라고 말할지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선하다”며 “복잡한 현대사회의 문제를 풀기 위해 공자와 맹자의 치열한 고민이 담긴 고전에서 지혜를 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지난해 3월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해 피해를 본 지역에서의 루브르 박물관 소장품 전시를 놓고 프랑스 문화예술계가 뜨거운 논쟁에 빠졌다. 루브르 박물관은 4월 27일부터 9월 17일까지 후쿠시마, 센다이, 이와테 현 등 3개 도시에서 ‘만남, 사랑, 우정, 연대’라는 주제로 루브르 소장품 특별전시회를 연다고 발표했다. 일본의 메세나 기업이 후원하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18세기 로코코 미술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화가 프랑수아 부셰의 ‘사랑의 삼미신(三美神)’, 18세기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프랑수아앙드레 뱅상의 ‘세 남자의 초상’, 16세기 플랑드르 지역의 태피스트리(색실로 짜넣은 그림), 고대 이집트 조각상 ‘이시스 여신상’ 등 23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문제는 전시 지역이 지난해 3월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원전사고 지점에서 불과 70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는 점. 프랑스의 문화예술계와 원자력 전문가들은 루브르 박물관의 보물과 동행하는 전시인력이 방사능 오염에 안전하지 않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프랑스 내각의 산하기관인 방사능보호핵안전협회(IRSN)는 지난해 12월 12일 일본에 거주하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미야기, 이바라키, 도치기, 후쿠시마 전역은 방사능으로 인한 중대한 영향을 받은 지역”이라며 “꼭 필요한 경우에만 여행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또 IRSN은 “방사능에 오염된 먼지가 건물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가구와 카펫, 양탄자의 표면을 정기적으로 진공청소기로 청소해야 한다”고 지침을 내렸다. 루브르 박물관 측은 “후쿠시마 미술관 내부의 방사능 오염정도는 시간당 0.06마이크로시버트로 파리의 박물관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해명했다. 또 전시품은 유리로 된 격자보호상자에 담아 운송해 전시장 내부에서만 공개할 것이며, 외부의 대기 중에 절대 노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프랑스의 롤랑 데보르드 방사능오염정보연구협회 회장은 “건물 내부는 괜찮다 하더라도 방사능은 후쿠시마 전역에 퍼져 있다”며 “기상조건에 따라 시골에 있던 방사능이 도심으로 들어올 수도 있고, 관람객을 통해 유입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유리처럼 매끈매끈한 표면에 붙은 방사능은 쉽게 제거할 수 있지만, 구멍이 많은 돌은 표면을 긁어내야 완전한 제거가 가능하다”며 “16세기 플랑드르의 태피스트리나 회화 작품이 오염될 경우 IRSN의 권고에 따라 ‘정기적으로’ 진공청소를 할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디디에 리크네 라트리뷘드라르지 편집장은 “재난지역 주민들을 위로하는 역할을 왜 루브르가 소장품 전시회를 통해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아이티 대지진 때 루브르는 소장품 전시회가 아닌 아이티 박물관 재건을 돕는 방식으로 도움을 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왜 전 세계 재난 지역과 이라크전쟁으로 피폐한 바그다드엔 소장품을 보내지 않는가”라며 일본 전시 계획을 비판했다. 이번 전시회의 총책임자인 장뤼크 마르티네즈 씨는 “일본 기업은 루브르 박물관 보수공사에 많은 메세나 후원을 해왔으며, 일본 관람객은 루브르의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열성적 고객”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특별한 선례’가 될 이번 전시에 대한 논쟁은 4월 실제 행사가 시작될 때까지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전하의 국사(國事)는 마치 큰 나무를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라버린 것과 같습니다.” 약 500년 전 조선의 선비 조식(1501∼1572)은 날 선 비판으로 조정을 흔들었다. 이 책에 소개된 직신은 율곡 이이, 남명 조식, 연암 박지원 등 13명. 주역에서는 직언을 ‘호랑이 꼬리 밟는 일’에 비유한다. 호랑이 꼬리는 맹수의 왕임을 보여주는 용맹과 힘을 상징한다. 신하의 직언은 호랑이의 위엄에 도전하는 일인 셈이다. 저자는 “13명의 직신이 16세기 조선사회를 이끌 수 있었던 힘”이라고 썼다. 박민주 인턴기자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2003년 인간 DNA를 구성하는 염기서열을 해석한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성됐다. 7년 뒤 미국 하버드대 유전학과 조지 처치 교수는 일반 대중이 자신의 유전 정보를 분석하고 공개하는 ‘개인 게놈 프로젝트(PGP)’를 시작한다. 이 연구실험의 네 번째 피험자로 참여하게 된 저자는 이 프로젝트가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소개했다. 저자는 개인의 유전자 정보를 분석하고 공개하는 것은 의료행위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만 결혼과 취직, 보험계약 등에서 개인정보 유출 우려가 있다고 경고한다. 인종차별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문혜빈 인턴기자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4년}

“청년에 배우면 장년에 큰일을 도모한다. 장년에 배우면 노년에 쇠하여지지 않는다. 노년에 배우면 죽더라도 썩지 않는다.”(사토 잇사이·일본 유학자) 와타나베 쇼이치 조치대 명예교수(82)는 지금도 일본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영문학자이자 사회평론가이다. 그가 쓴 ‘지적으로 나이 드는 법’은 은퇴 후 독서와 자원봉사, 종교생활, 고서적 수집 등을 통해 노년기에도 열정적인 지적탐구의 생활로 건강하게 여생을 보내는 법을 담은 책이다. 30년 전 발간된 후 일본에서 100만 권 이상 판매됐다. 저자는 “책을 보는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단언한다. 뇌 속에 있는 호르몬은 뇌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를 조율한다. 따라서 독서를 통해 뇌를 단련시키는 것은 몸 전체의 건강과도 직결된다. 저자는 “예전에 과학자들은 인간의 뇌세포가 하루에 10만 개씩 죽어간다고 했지만 뇌세포는 60, 70세에도 쓸수록 튼튼해진다”고 주장한다. 그는 실제로 자신이 60세 이후에 젊을 때도 암기하기 쉽지 않던 라틴어 장시를 10절까지 외우게 되었고, 한시도 여러 편 외우게 된 사실을 고백한다. 현대 중국을 건설한 지도자 마오쩌둥도 죽는 날까지 책을 놓지 않았다. 마오는 1976년 9월 8일 오후 5시 50분 최후로 책을 읽었다. 임종을 앞두고 의사가 응급처치를 하는 상황에서도 ‘용재수필(容齋隨筆)을 7분동안 읽었다. ‘마오의 독서생활’은 마오의 도서실관리자, 측근 비서, 영어교사 등 고위 관료들이 곁에서 지켜본 마오의 독서습관을 기록한 책이다. 마오는 혁명전쟁을 펼치던 ‘장정(長征)’ 기간에도 책 읽기를 잊지 않았다. 마오는 일본군 비행기 폭격 때문에 수천 권의 책을 깊은 동굴에 보관했다. “사람은 배워야 산다”는 말을 국민에게 각인시켰던 마오는 항상 책을 누워서 읽지 않고 서서 읽었다. 늘 읽은 책에는 의문부호, 동그라미, 삼각형, 밑줄로 가득했다. 이 책에는 마오가 남긴 육필원고, 책에 남긴 표시들, 저자와의 서신 등 광범위한 도판 자료가 담겨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프랑스에 루소, 디드로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없었다면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한국의 근대 출판문화에 커다란 역할을 했던 계몽주의 선각자들을 누군가가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72)가 구한말부터 현대까지 한국의 책 문화를 이끌어 온 출판사 150여 곳과 출판인 300여 명의 이야기를 담은 책 ‘한국출판 100년을 찾아서’(정음사·사진)를 펴냈다. 책에 따르면 한국의 근대 출판은 19세기 말 한국 천주교회와 개신교 선교사들이 서양식 인쇄기를 들여와 한글성경과 교리서를 펴낸 것이 시초가 됐다. 하지만 본격적인 태동은 1910년 육당 최남선이 발족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였다. 홍명희 정인보 한용운 안창호 김성수 송진우 등 조선 지식인들을 총망라한 조선광문회는 근대식 인쇄출판과 신문학, 신문화의 요람처로 3·1독립운동의 발원지였다. “육당은 일본에 유학 가서 간다(神田)에 있는 책방거리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일본의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책을 사는데, 동서고금의 책을 모두 모아 놓은 데다 ‘퇴계자성론’ ‘율곡집’ ‘성호사설’ 같은 우리나라 고전들이 다 번역돼 나와 있는 거예요. 그는 17세에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출판사를 만들었지요.” 조선광문회는 한국의 귀중한 문화재에 대한 일제의 약탈이 심화되자 우리의 고전을 수집 및 개간(改刊)하는 사업을 벌였다. ‘동국통감’ ‘택리지’ ‘율곡전서’ ‘삼국사기’ ‘열하일기’ 등 100여 권을 번역했으며 한국 최초의 국어사전인 말모이사전 편찬사업도 했다. 이 사전은 일제의 탄압으로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고 대표는 “인촌 김성수는 조선광문회에 참여하면서 한 나라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교육과 출판, 산업 육성임을 확실하게 인식했다”며 “인촌이 창업한 동아일보는 출판계가 극심한 탄압을 받던 일제강점기에 한국 출판계의 견인차요 보호자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인촌이 민족교육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부친의 허락을 받고자 단식을 한다는 소식에 육당은 호남선 기차를 타고 인촌 집을 찾아가 부친을 설득했습니다. 육당은 3·1운동 당시 인촌이 남강 이승훈에게 5000원을 내놓으면서 거사자금으로 쓰게 했다는 사실을 제자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에게 밝히기도 했습니다.” 책에는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광복 전후기, 6·25전쟁기, 21세기 디지털혁명기까지 격동의 현대사를 걸어온 출판인들의 역사기록이 담겨 있다. 특히 6·25전쟁 당시 피란생활을 했던 대구 부산에서 총탄과 포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교과서를 펴냈던 출판인들의 이야기가 감동을 자아낸다. 고 대표는 1952년 부산으로 피란 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12세에 종로 보신각 주변의 영창서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고 대표는 “책을 좋아해서 날마다 서점에 들렀는데 주인 할아버지가 ‘일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얼마나 좋았던지 보수도 따지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이후 1956년 동서문화사를 창립해 55년간 출판인의 외길을 걸어왔다. 그는 “출판업은 창성은 쉬워도 수성은 어려운 사업”이라며 “출판업은 생산품이 인간정신의 소산이므로 영리만을 추구해선 안 되며 문화적인 소명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요즘 출판계가 상업적인 이익을 좇는 경우가 많습니다. 출판계가 엄혹한 근현대사 속에서도 물질보다는 정신적인 부(富)를 추구하며 민족의 미래를 준비해왔던 전통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2012년 올 한 해 지구촌에서는 ‘권력의 대이동’이 벌어진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촉발한 ‘정치의 대중화’ ‘정치 일상화’의 파도는 국내 출판계의 지형도도 바꿔놓고 있다. 정치 서적은 이제 엘리트들의 엄숙한 담론이 아니라 가볍고 대중적인 ‘수다의 장(場)’이 되고 있다. 정치인들이 내놓는 책들도 천편일률적인 자서전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통해 독자들의 눈길을 붙잡고 있다.》○ “출판기념회용 책은 그만!”11일은 제19대 국회의원 총선(4월 11일) 90일 전. 출마 예비후보의 출판기념회를 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어서 국회 의원회관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막판 출판기념회가 몰렸다. 정치인의 책은 대필작가가 급조한 자서전류가 대부분. 그러나 일부는 진부한 틀에서 벗어나 인문교양서, 사회과학서적, 사진집, 예술서, 자기계발서 등으로 포장됐다. 이 때문에 ‘총선용 정치인 책’이면서도 일반 서점에서 독자들에게 팔리는 책들도 생겨났다. 김을동 미래희망연대 의원이 펴낸 ‘김을동과 세 남자 이야기’(순정아이북스)는 할아버지 김좌진 장군, 아버지 김두한 의원, 아들인 배우 송일국 등 격동의 근대사를 살아온 4대에 걸친 가족사 이야기로 눈길을 끈다. 전현희 민주당 의원은 청년들의 도전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자기계발서 ‘도전, 너무도 매혹적인’(리북)을 출간했다. 조윤선 한나라당 의원은 오페라와 미술과 관련된 예술 관련 에세이 ‘문화가 답이다’(시공사)를 내놓았다. 김영호 사진작가가 찍은 조 의원의 표지사진은 클래식 연주자 프로필 사진을 방불케 하며, 전현희 의원의 책도 스타화보집을 연상시킨다.○ 엔터테인먼트형 ‘정치 수다’ 붐지난해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조국 서울대 교수, ‘나는 꼼수다’ 출연진의 책으로 이어진 정치 관련 서적의 열풍은 올해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2, 3월에 김영사가 발간할 예정인 안철수 서울대 교수의 책이 최대 관심사. 인터넷 서점 YES24의 유성식 이사는 “본디 인문사회정치 분야 책의 매출이 9% 선을 차지했는데 지난해에는 15%까지 늘어 문학, 어린이 분야의 매출을 넘어섰다”고 말했다.요즘 많이 팔리는 정치 서적은 학자들이 쓴 엄숙한 ‘정치학 서적’이 아니다. 평균 600만 명 이상이 내려받는다는 ‘나는 꼼수다’의 영향으로 재야 논객이나 평론가가 정치를 분석하고 훈수를 두는 가볍고 대중적인 엔터테인먼트형 서적이 인기다. 개그맨이 웃겨주듯이, 아줌마들이 수다를 떨듯이 정치를 일상의 구어체로 풀어주는 책들이다.김상호 ‘미래를소유한사람들’ 대표는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끼고 킥킥대는 아저씨들의 대부분은 ‘나꼼수’를 듣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며 “인터넷과 SNS를 통해 정치를 대중적으로 소비하기 시작한 20, 30대 독자가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책을 구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따르면 과거 30, 40대 남성들이 구매자의 90% 이상을 차지했지만 요즘엔 여성 비율이 40∼50%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40만 권이나 팔린 ‘닥치고 정치’를 펴낸 김수진 푸른숲 부사장은 “지난해 초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라는 책이 많이 팔렸는데, 프랑스의 늙은 레지스탕스가 ‘왜 젊은 세대들은 분노할 상황인데도 화를 내지 않는가’라고 일침을 가하는 내용이었다”며 “우리나라에서도 정치 비판서가 인기인 이유는 국민이 무언가에 화가 많이 나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세계적 경기불안이 계속되는 한편으로 각국에서 총선과 대선이 펼쳐지며 정치적 대변환이 예고되는 2012년. 최고경영자(CEO)들이 경영화두를 찾기 위해 책을 펼치고 있다. 불확실성 시대에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장기적인 성과를 끌어내기 위한 지혜를 석학들의 저서에서 찾기 위해서다. 동아일보 ‘책의 향기’팀이 주요 대기업 CEO들에게 신년을 맞아 읽고 있는 책들을 물었다.》정준양 포스코 회장 “미국의 대공황 시기… 불황탈출 해법 분석”◇ 잊혀진 사람/애미티 슐래스 지음·리더스북정준양 포스코회장은 지난해 말 임원회의에서 1929∼1940년 대공황 시기 미국 경기 불황의 해법을 담은 이 책을 추천했다. 그는 “경제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거의 모든 실험이 대공황기에 이미 시도됐다”며 “이를 통해 포스코는 위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분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새해 화두는 ‘패러독스 경영’이다. ‘차별화’와 ‘낮은 원가’처럼 양립이 어렵다고 생각한 요소를 결합해 성과를 내는 방식을 뜻한다. 정 회장은 “글로벌 경기불황과 공급과잉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최고 품질의 제품을 최저 원가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고객소통 지름길… 디자인으로 승부“◇ 톰 피터스 Essentials: 디자인/톰 피터스 지음·21세기북스“디자인은 영혼이 담긴 열정의 결과이며, 혁신적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핵심 요소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평소 ‘고객마인드’ ‘브랜드 차별화’ ‘디자인 싱킹(thinking)’을 강조한다. 그에게 디자인은 단순히 제품 포장을 꾸미고 매장 내부를 시각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이 아니다. 디자인은 고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창의적 사고이자 고객과의 소통언어라는 설명. 정 부회장은 “이 책과의 만남은 이마트와 신세계를 찾는 고객의 경험을 한 차원 높일 수 있는 무기를 준비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집단지성 탈권위로 급변시대 뚫어야”◇ 어댑트/팀 하포드 지음·웅진지식하우스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은 ‘경제학 콘서트’의 저자로 유명한 팀 하포드의 ‘어댑트’를 임직원들에게 선물했다. ‘불확실성을 무기로 활용하는 힘’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실패를 통해 적응하고, 변화를 모색하라’, ‘시행착오야말로 가장 훌륭한 스승’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세계적인 흐름이 급변하는 시기일수록 계획보다는 구성원의 임기응변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 회장은 “권력 분산과 탈(脫)권위, 탈집중화를 통해 한 사람이 아닌 ‘집단지성’을 활용해 위기를 극복하고 제2의 도약을 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최치준 삼성전기 사장 “세계시장 승리 위해 Back to Basics!!!”◇ 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제임스 E 메클렐란 3세 지음·모티브북재료공학 박사인 최치준 삼성전기 사장은 과학과 기술에 대한 세계사적 고찰을 담은 이 책이 미래를 준비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준다며 추천했다. 그는 “기술이 실용적인 도구의 사용을 가능케 하여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었으나, 기술(Know How)만을 중시하고 과학(Know Why)을 소외시하면 발전속도가 느려진다”고 지적했다. “급변하는 글로벌 경쟁시장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Back to basics(기본으로 돌아가기)’ 또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세로 역사와 원리를 고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김상헌 NHN 대표 “기회는 잡아채고 리스크는 최소화”◇ The Corner Office/아담 브라이언트 지음·Harper Collins“인터넷기업 최고경영자(CEO)에게 숙고할 시간은 매번 충분치 않다. 언제나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요구받는다. 기회는 잡아야 하고 리스크는 피하거나 최소화해야 한다. 늘 많은 사람을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김상헌 NHN 대표는 변화무쌍한 인터넷 생태계를 이끄는 리더로서 뉴욕타임스 부편집장이 쓴 원서를 읽고 있다. 이 책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스티브 발머, 이베이의 존 도나호 등 74명의 성공한 CEO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사장실로 가는 길’(가디언)이란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됐고, 뉴욕타임스 주말판에 후속 이야기가 연재되고 있다. 이상철 LG유플러스 부회장 “이종결합 서비스… 융합혁명이 대세”◇ 컨버저노믹스/이상문, 데이비드 L 올슨 지음·위즈덤하우스“21세기 새로운 비즈니스의 트렌드, ‘제4의 물결’ 융합혁명의 시대가 오고 있다.” 이상철 LG유플러스 부회장은 융합의 메가트렌드와 과학융합을 통한 새로운 가치창조를 다룬 ‘컨버저노믹스’를 탐독하고 있다. 통신시장은 플랫폼이나 클라우드 등이 연결된 새로운 융합상품으로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 이 사장은 “고객의 욕구가 날로 증가하면서 미디어의 융합, 서비스의 융합은 물론이고 사람과 기계가 융합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며 “경쟁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종결합을 통한 혁신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진세 세븐일레븐&롯데슈퍼 사장 “개념부터 차별화… 생각의 틀 바꾸자”◇ 디퍼런트/문영미 지음·살림Biz“진정한 차별화는 기술적인 차원보다는 개념적인 차원의 혁신에서 나온다.” 기업은 ‘차별화’를 꿈꾸지만 과도한 경쟁 속에서 점점 ‘차별화’가 아니라 ‘모방’을 해간다. 소진세 세븐일레븐&롯데슈퍼 사장은 “소비자들의 사고와 가치관이 계속 변화하고 진화하듯이 기업도 역시 과감한 혁신이 뒤따르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들이 자신이 추구하는 미묘한 차이들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차별화가 아닌 동일화의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며 “진정한 차별화는 전술이 아니라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