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전승훈]우리 안의 언더도그마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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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훈 문화부 차장
전승훈 문화부 차장
요즘 TV의 토크쇼를 보면 인기 절정의 10대 아이돌 그룹 가수들도 연습생 시절 ‘눈물 젖은 라면’을 먹던 이야기를 한다.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기업인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구글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도 모두 허름한 차고에서 창업했음을 강조한다.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은 어린 시절 찢어지게 가난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을 앞다퉈 펴낸다.

“왜들 이러는 걸까요?”

개그맨 황현희의 말투를 빌려서 표현하자면, 여기엔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대중은 힘센 사람을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영화 ‘국가대표’나 ‘쿨러닝’에서 보듯 대중들은 보잘것없는 주인공들에게는 열광하지만, 다윗과 싸운 거인 골리앗은 수세기가 지나도록 악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대중의 심리를 분석한 책이 최근 출간된 마이클 프렐의 ‘언더도그마(지식갤러리)’다. ‘언더도그(underdog)’란 싸움에서 지고 꼬리를 내린 개처럼 객관적인 열세를 보이는 약자다. ‘언더도그마’는 약자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선하고 고결하며, 강자는 힘이 강하다는 이유로 사악하다고 믿는 현상을 말한다.

2005년 11월 이라크전쟁 당시 크리스천 피스메이커팀이라는 기독교 평화운동단체가 이라크에서 반전시위를 하던 중 이라크군에 인질로 잡혀 한 명이 총살을 당했다. 나머지 인질들은 수개월 후 공교롭게도 자신들이 비판했던 다국적군에게 구출됐는데, 석방 후에도 이들은 강자인 다국적군에게 모든 책임이 있으며, 약자인 이라크군은 선하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국내에서 인권을 외쳐온 단체들이 북한 3대 세습체제에는 침묵을 지키고, 중국의 탈북자 북송문제에 대해서도 비판성명 하나 내지 않는 심리의 근저에는 언더도그마가 깔려 있다. 지구 최강국인 미국에 대한 반감이 북한, 리비아와 같은 독재국가나 테러리스트까지 무조건 옹호하는 아이러니를 빚어내곤 한다.

언더도그마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중은 무명의 언더도그 참가자들이 거대 음반사와 계약을 맺는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열광한다. 영국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출연한 수전 보일은 ‘우승을 하지 못한’ 덕분에 데뷔 앨범이 300만 장이나 팔렸다. 국내 프로야구에서도 수년째 가을에 야구를 못한 롯데 자이언츠는 열광적인 팬을 몰고 다니는 반면, 만년 강자로 보이는 삼성 라이온즈는 큰 인기를 끌지 못한다. 언더도그마는 실패한 자는 칭찬하고, 성공한 자는 처벌하는 대중의 심리다.

권력을 얻으려는 정치권의 언더도그마 전략은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최고권력자인 이명박 대통령이 TV에 나와 풀빵장사 경험을 이야기하거나 욕쟁이 할머니의 장터국밥을 먹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말까지 자신이 ‘거대야당과 언론권력’에 휘둘리는 나약한 존재라고 호소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부산 지역에서 문재인 후보가 속한 민주통합당이 언더도그였는데, 새누리당은 더 약해 보이는 27세 정치신인 손수조로 맞불을 놓아 ‘언더도그’ 경쟁을 벌인다. 진보정당이 거대여당에 대한 심판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스캔들에는 ‘무오류’를 주장하는 것도 언더도그마로 해석된다.

대중이 약자에게 끌리는 건 자연스러운 심리다. 그러나 이것이 말 그대로 ‘도그마(dogma)’로 변질될 때는 위험하다. ‘언더도그마’는 분별 있는 이념도, 도덕도 아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대중들의 변덕스러운 심리일 뿐이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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